지난달 27일, 옥산서원 내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각 안에서는 일군의 무리들이 탁본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먹 방망이로 일정한 속도로 고르게 두드리는 작업 현장엔 문화재청직원과 함께 전 불교중앙박물관장인 실상사 흥선 스님 일행이 회재 이언적 선생의 신도비 비문을 탁본하고 있었다. 흥선 스님은 탁본계의 권위자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현장에서 보는 탁본 작업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기자가 도착했을때는 탁본을 한 장 완성한 상황이었고 이어 여러번의 탁본 작업이 계속됐다. 탁본 작업을 주도하고 있던 흥선 스님은 애로 사항에 대해서 탁본의 전체 과정 전부가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하절기는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야말로 전 과정을 몸으로 하는 작업이어서 더욱 힘이 든다고. 문화재청은 최근 2018년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 대상으로‘한국의 서원’을 선정했는데 한국 대표 서원인 경주 옥산서원을 비롯해 전국의 한국 성리학 발전과 서원 건축유형을 대표하고 있는 9개의 서원이 포함됐다. 마침 옥산서원에 있는 회재 선생의 신도비 탁본 작업이 이뤄져 더욱 의미있는 현장이었다. -포항시에 있는 회재 이언적 선생 신도비, “관리 상태 좋지 않아 지자체가 보존 관리할 수 있는 방법 찾아야” 흥선 스님은 탁본을 하려면 전통 종이가 좋다면서 금석문의 크기들이 전통 종이보다 대부분 크기 때문에 전통 종이를 이어서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했다. 스님은 “현재 시점이라도 좋은 탁본을 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문들이 점차 손상돼 갈 것이다. 회재 선생의 비는 옥산서원에도 있지만 포항 묘소에도 또 하나가 있다. 사전 조사하는 팀들이 따로 조사하고 있으며 탁본 전 단계까지 만들어 둔다. 이는 이끼도 끼고 새똥이나 거미줄 등 여러가지 이물질이 있어 그들을 제거해 탁본하기 좋은 상태로 해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항 신도비의 경우 청소에만 3시간이나 걸렸다. 안타깝게도 이는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작업을 통해 현장에서 시사하는 바다”라면서 “문중에서도 고민하시겠지만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 시점으로 보인다. 지자체가 보존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흥선 스님은 또 “이 탁본 작업은 문화재청에서 예산을 집행해서 전국에 있는 금석문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사업의 일환이다. 경북지역 금석문도 올해 사업 범위 안에 들어가 있었던 차제였다.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이곳 회재 선생 신도비를 찾아 탁본하는 것을 요청해 허락을 받고 작업을 시작했다”며 이번 작업의 경위를 설명했다. -서원이나 문중에서도 회재 선생 신도비에 대한 상당한 수준 갖춘 탁본 보관돼 있어야 스님은 금석문 자료 작업 자체가 우리 문화재의 일부이므로 지금까지 잘 전해져 왔듯이 앞으로도 후손에게 전해져야 하므로 탁본 하는 과정에서 매우 신중하게 작업한다면서 “혹시라도 모를 손상에의 우려때문에 손상을 최소화하는 부분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그래서 상태를 주의깊게 잘 관찰하고 미연에 방지하는 대책을 세우고 작업에 임한다. 바로, 탁본의 대상이 되는 유물의 상태를 가장 안전하게 작업 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 첫 번째 하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또, “이 비석의 상태는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금석문 자료 전체에서도 아주 양호한 편이다. 거의 손상이 없는 상태로 보인다. 이번 신도비의 탁본 결과는 수년째 저희가 작업하고 있는 평균 정도의 수준으로 잘 나오고 있는 편이다. 이번 작업 과정에서 신도비의 이수 부분에 단청색이 남아있었음을 발견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서원이나 문중의 입장에서도 회재 선생의 신도비에 대한 상당한 수준을 갖춘 탁본들이 한 두 부 정도는 보관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탁본 수준으로는 곤란하다. 문중에서 탁본해놓은 기존의 경우와 현재 저희가 한 탁본 작업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옥산서원 내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1호 조선 중기 문신 회재 이언적 선생(1491년(성종 22) ~1553년(명종 8))의 신도비는 현재 경주 옥산서원과 포항시에 두 기가 남아있다. 옥산서원에 있는 신도비는 1577년에 건립됐다.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있는 신도비는 1586년(선조 19)에 건립한 신도비다. 두 비석 모두 경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됐는데 건립 연대나 이언적 선생의 역사적 위상 등을 고려해서라고 한다. 옥산서원 운영위원인 문산 이병환 선생은 “회재 선생의 두 신도비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있다. 경상도 관찰사 박소림이라는 이가 혹시나 이 신도비가 훼손될까 우려해 같은 비석을 하나 더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주 옥산서원과 포항의 이언적 선생의 신위를 모신 달전재사 인근에 모셔져 있는 2기가 오늘날 존재하는 연유다”고 말했다. 옥산서원 내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이 신도비는 선조 초, 추숭(追崇) 과정에서 기대승에 의해 신도비명이 찬(撰)해졌고 1577년(선조 10)에 이산해의 글씨다. 비의 전체 높이는 320㎝, 비신의 높이는 204㎝다. 9년 뒤인 1586년에는 신도비가 포항시에 있는 선생의 묘소 앞에 다시 건립되었다. 특히 옥산서원내 신도비는 이수, 귀부의 조각에서도 예술적인 가치가 있으며 건립연대나 이언적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 등을 반영하고 있어 귀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신도비는 건립 당시, 옥산서원 앞 계류 옆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해서 서원 안으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한편, 회재 선생은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여주다. 초명은‘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언(彦)’자를 더했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이다. 1531년(중종 26) 사간직에 있으면서 김안로(1481~1537)의 중임을 반대하다 파직돼 경주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 때 추관(推官)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1574년(선조 7)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고 강계로 유배돼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1569년(선조 2) 종묘의 명종 묘정에 배향됐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옥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선생은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포항 달전리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67-2호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있는 이언적 선생의 신도비 역시, 선생을 기리기 위해 1586년(선조 19)에 건립한 신도비다. 이 비석은 1577년(선조 10)에 세운 옥산서원 소재 이언적 신도비와 함께 200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비의 전체 높이는 300㎝, 비신은 180㎝이며, 비문의 글씨는 손엽(1544~1600)이 썼다. 신도비명은 기대승(1527~1572)이 지었다. 신도비 인근에는 이언적 선생의 신위를 모신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02호 달전재사(達田齋舍)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비 역시 선생에 관한 역사적 평가 등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포항에 있는 신도비는 비석 일부분이 깨지고 총탄의 흔적으로 보이는 자국 있는 등 손상 심해,‘비각 지어 보존해야’ 현재 포항시에 있는 신도비는 비석 일부분이 깨지고 깊숙하게 파인 총탄의 흔적으로 보이는 자국이 있는 등 손상돼 있는 편이다. 노천에 있다 보니 훼손 정도가 심한 실정이다. 달전재사와 함께 보물로 지정돼 있는데도 포항시의 무관심으로 관리 소홀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항시에 있는 신도비에도 비각을 지어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경주의 봉황대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어요. 이곳을 자주 오긴했지만 밤에 보는 봉황대는 신비롭습니다”경주를 찾은 관광객의 말이다. 세계 유일의 고분에서의 라이브 음악회가 매주 열리는 곳으로 시민들에게 친숙한 그 곳. 바로 노동동 고분군에 속해있는 봉황대다. 우리나라에서 단일 고분으로는 가장 큰 무덤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무덤이기보다는 작은 동산인 듯 싶은 고분 중턱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정경으로 인해, 특히 야간에 비추는 조명과 함께 나무들의 정령들이 노닐고 있는 듯한 몽환적 신비감을 준다. 마치 ‘어린왕자’의 한 장면처럼 작은 별의 바오밥 나무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봉황대 한켠에는 ‘봉황대(鳳凰臺)’라고 쓰여진 작은 비석도 하나 있다. 봉황대라고 자연스럽게 늘 부르던 이 고분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봉황대의 상징이 된 11그루 노거수들(느티나무 7그루, 팽나무 2그루, 오동나무 1그루, 측백나무 1그루)의 수령과 수종, 봉황대라고 불리워지는 원래의 의미와 비석에 쓰여진 ‘봉황대’라는 글씨의 주인공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쉬웠던 것은 경주시 사적관리과 등 여러 곳에 자문을 구했지만 왕릉으로 추정되는 곳에 어떻게 나무들이 그대로 존치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풀 수 없었다. 유독, 봉황대에만 수령 200~300년 수령의 여러 노거수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아직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봉황대(鳳凰臺)...단독 원분(圓墳)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무덤 봉황대는 경주노동동고분군에 속하며, 경주평지에 산재하는 단독 원분(圓墳)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무덤으로 분구의 높이는 25m, 지름은 82m, 높이 22m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내부구조 및 성격은 알 수 없으나, 봉황대 고분은 봉토의 정상부에 함몰 현상이 관찰되어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황대 고분은 지금으로서는 어느 왕의 능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앞에 위치한 금령총, 식리총, 그리고 옆에 나란히 있는 금관총(金冠塚)의 조사결과와 관련해 보면 500년 무렵의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함께 5세기 말∼6세기 초로 편년되고 있고, 노동동 고분군의 서편에 인접한 금관총 역시 5세기 말로 편년되고 있어 봉황대 고분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분들이 분포하는 일대 1642평이 1963년 사적 제38호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경주봉황대고분이 있는 노동동고분군이 대릉원 일원에 포함되어 사적 제512호로 지정됐다. -“봉황대의 노거수들은 살아있는 문화재, 문화유산과 함께 아름다운 생태관광자원” 현재 봉황대에는 느티나무 7그루, 팽나무 2그루가 자라고 있다. 느티나무나 팽나무는 향토 수종으로 이 고분의 정취와 잘 어울린다. 고사한 노거수를 베어낸 흔적이 있는 그루터기도 보였다. 오동나무와 측백나무는 봉황대 입구 쪽에 있다. 이 두 그루 나무는 예전 민가와 혼재돼있던 시기에 집 안에 키우던 나무들로 추정된다는 설이 있다. 고분에 소가 올라가 풀을 뜯어 먹는 풍경도 60년대까진 흔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경주대학교 조경도시개발학과 최재영 교수는 “봉황대의 노거수들은 살아있는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 문화유산과 함께 생태관광자원인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경사진 고분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수분이 메마르기 쉬우므로, 평지에서 자라는 나무보다 더디 자란다. 가뭄이 심하면 환경은 더욱 척박해진다. 이들 노거수들은 가지가 말라가는 한 그루 빼고는 생육이 좋은 편이다”고 설명했다. “느티나무들은 200~300여 년 수령의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팽나무 두 그루는 150~200여 년 수령이다. 팽나무는 잘 자라지 않는 수종이다. 평지와는 다른 경사진 생육 환경에도 건강한 편이다. 이 팽나무는 일명 ‘포구나무’라고도 한다”고 했다. -‘봉황대’... ‘봉황의 알은 내시(內市)에 수없이 많은 고분들을 가르쳐 말한 것’ 경주시에서 1980년 발간한 ‘신라의 전설집(경주시 문화재연구팀 제공)’에서는 봉황대 이름의 유래에 대해 ‘신라 9세기 중엽, 궁예가 이끄는 후고구려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가 신라의 땅을 침략해 신라는 명맥을 유지하기 힘든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궁예의 뒤를 이은 고려의 왕건은 신라가 망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크게 유행하던 때라 어느 풍수가가 왕건에게 “신라 서울의 지형은 배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언젠가는 좋은 바람을 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신라를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면 신라 서울의 배를 침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 풍수가는 신라 임금에게는 “신라 서울의 지리는 봉황의 둥우리처럼 생겼으므로 천년 동안이나 크게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지나서 봉황이 둥우리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한다. 따라서 서울 장안에 봉황새 둥우리 같이 생긴 둥글둥글하게 큰 알을 많이 만들어 둔다면 봉황은 알을 두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신라 임금은 곧 많은 이들을 동원해 서울 복판에 둥글둥글하게 흙을 쌓아 산더미 같은 알을 수없이 만들었다. 풍수가가 봤을 때 이는, ‘떠나가는 배 위에 많은 짐을 실은 격이 된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만족한 풍수가는 알 모양이 가장 많이 만들어져 있는 미추왕릉 부근의 율림(栗林) 속에 우물을 파 놓고 고려로 도망갔다. 이것은 짐을 많이 실은 배 밑 바닥을 뚫어 놓은 격이 되었으니 그 후로 신라는 영영 침몰해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봉황의 알은 내시(內市)에 수 없이 많은 고분들을 가르쳐 말한 것이니, 이때부터 경주 사람들은 고분을 봉황대라 부르게 되었다. 밤숲에 있는 우물은 율림정(栗林정)이라 해 해방된 직후까지도 미추왕릉 부근에 남아 있었다. 남산의 북쪽 기슭의 작은 봉우리를 도당산이라 하는데 일명 단두산(檀頭山)이라고도 한다. 단두산이란 배의 돛대가 되는 산이라는 뜻인데, 서라벌의 돛대는 도당산에서 해목령까지 뻗어있다 했다. 지금 왕정곡에서 식혜곡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패어져 있는 것은 고려 사람들이 신라가 다시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돛대를 끊어 놓은 흔적이라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기조 전 경주문화원장은 “경주가 분지이므로 인공 소산을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노거수들을 보면 혹시 왕릉이 아니지 않을까 추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비석 ‘봉황대’ 서체의 주인공은 조선조 세 명의 경주 부윤 중 한 사람의 글씨로 추정 한편,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교수인 김성춘 시인의 ‘경주에 말을 걸다 -봉황대, 아름다운 서체의 주인공은)’ 편에서는 ‘봉황대’ 글씨의 주인공을 추정하고 있어 인용한다. ‘비석 뒷면에는 기해청화태수서(己亥淸和太守書)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즉, 기해년 4월에 태수가 썼다라는 뜻이다. 태수란 관직은 지방장관 관직을 뜻하며(고려엔 대수라는 관직도 있었음)19세기 마지막 기해년은 1899년이다. 이로부터 한 갑자인 60년씩을 거슬러 올라가면 1599년(선조 32), 1659년(현종 원년), 1719년(숙종 45)이 된다. 그리고 당시 경주 부윤들의 이름은 박의종(1599년), 엄정구(1659), 이정익(1719년), 세 사람의 경주 부윤이 있다. 따라서 이 세 분 중 한 분이 바로 봉황대 글씨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것이 국립경주박물관 측의 추정이다’ 라고 적었다.
“아버지 회 드시고 싶은기요? 내일 경주시내 가서 사다 드릴게요” 돌담 넘어 들려온 이 대화는 경주시 양북면 범곡리(凡谷里) 상범마을에 사는 김복기(65)씨가 회를 좋아하는 연로한 부친에게 하는 말이다. 전쟁이 나도 모를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동막골’같은 마을. 이곳은 양북면 범곡리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 역시 어찌 걱정 근심이 없으랴만, 어쩐지 우리들의 어떠한 근심도 덜어놓고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 오지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굳이 자연주의자가 아니어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는 산촌에 대한 동경은 누구나 있다. 범곡리는 양북면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동쪽에 대목들, 쇄들, 작은 건너들, 무등들 등이 펼쳐져 있다. 그 너머로 대종천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는 지역이다. 범곡 마을은 옛날 석굴암 근처 사는 범이 자주 이 마을에 나타난다 해서 이름 붙진 지명이라고 한다. 어느 봄날, 신록 우거진 숲과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이 마을 길을 따라 걷다보면 한 망태기 그득, 산나물을 캐고 돌아오는 할머니 일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수 년 전, 기자는 그 할머니 일군에게서 이른 봄기운 머금은 야생 산나물을 욕심껏 샀던 생각이 나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추령 터널을 지나 감포 가는 국도변의 오른쪽에 범곡리를 안내하는 작은 표지판이 걸려있지만, 도무지 사람이 살 거라곤, 도무지 이렇게 예쁜 마을이 형성돼 있을 거라는 상상은 할 수 없는 마을 입구였다. 그 입구를 지나 조금씩 높아지는 해발고도를 따라 가다보면 이윽고 깊은 산촌과는 어울리지 않은듯한 펜션형태의 이국적인 집들과 옛 가옥들이 병치돼 나타난다. ‘뿌꾹뿌꾹’, ‘치르치르’..., 산등성이 어디선가에는 이름모를 새들이 짝을 찾는 신호를 보내며 적막을 깨는 마을. 오지 상범마을은 그래서 더욱 ‘현재’ 같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트렌드를 반영하는 건축물에서는 이 마을과 어우러지는 절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에서 하룻밤, 주먹만한 크기로 쏟아져내릴 별들을 보면서 ‘모든걸 훌훌 버리고’ 쉬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범곡리 그 별 아래서 TV에, 월급봉투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수려한 산촌의 자연속에서 순수하게 살아가는 범곡리 상범마을을 지난 20일 찾았다. 해발 359m, 토함산 중턱에 아늑하게 위치한 이 마을은 자연스런 마을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아담하게 집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원주민들과 함께 이곳에서 정착해 이 마을을 가꾸고 아끼며 살고 있는 이들이 있어 더욱 정겨웠다. -범곡리 상범마을...면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고지대에 위치 범곡리는 토함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로 토함산 국립공원 내에 있다.‘범곡,‘범실’등으로 칭해 왔으며 1914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범곡리로 행정명이 개칭됐다. 일명 범실이라고도 하는 이 마을은 면 소재지와 10㎞ 떨어져있으며 면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토함산 동산령을 넘어 심신 수련과 함께 문무대왕릉을 참배하러 가던 옛길이 그대로 남아있다. 범곡리는 상하범으로 나눠져있다. 이 마을의 명소로는 하범 마을 뒷산 길에 20여m가 넘는 바위가 갈라져 있는데 용이 승천하지 못하고 이무기로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특산물로는 임산물과 산양 산삼 등이 있다. 2008년 생태 산촌 만들기와 2009년 녹색농촌체험 마을 조성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는 차제다. 특히, 상범마을 20가구 중 6가구가 민박을 운영하면서 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약 3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당나무가 마을 수호, 임란이후, 전쟁 피하기 좋다고 여겨 처음으로 사람이 정착 이 마을 주민 김복기(65) 씨는 4년전 귀향한 주민으로, 연로한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요사이 보기 드문 효자 아들이다. “여긴 안티 고향입니다. 요즘은 객지인들이 많지만 이 마을은 김해 김씨 집성촌이었지요. 7대조와 8대조 산소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마을 형성도 수 백년 됐지요”라고 했다. 이 마을 총 가구수는 현재 비어있는 1가구를 포함해 30여 호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상주) 가구는 20호다. 주말이나 가끔씩 이 마을 주택을 이용하는 주민은 6~7가구라고 한다. 주민들은 모두 20명으로 연로한 어르신이 홀로 사는 1인가구가 많다. 이 중 울산 등 타 지역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펜션을 운영하는 가구가 6가구다. “벼농사 짓는 가구는 3가구이고 더덕이나 도라지, 산양산삼 등을 재배하는 가구가 몇 집 있을 정도입니다. 산양산삼은 공급과잉으로 현재는 경작면적이 줄었고요. 고추장과 된장을 담그고 판매하는 주민도 있고요. 3~4년전까지는 펜션 운영이 매우 잘되는 편이었지요” 마을 어귀 쪽에 있는 김 씨의 집에는 소 여러 마리가 우리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갓 태어난 송아지 두 마리도 어미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소 우리에서 나는 냄새에서는 시골 특유의 두엄 냄새가 연상되는 듯도 했다. 2016년, 시내버스가 운행되지 않았던 이곳 범곡리를 비롯해 장항리, 권이리 무점마을, 용동리 감골 등 벽지 노선을 따라 ‘수요응답형 시골버스’가 도입됐다. 25인승 마을버스가 어일장날(5,10일)에는 아침 8시 20분, 11시 30분, 오후 4시에 세 번 들어온다. 평일에는 아침과 오후 두 차례만 운영한다고. 한편, 이 마을 뒤편에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약 3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당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양북면 지정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그것이다. 몇 아름드리나 됨직한 이 당나무는 수령은 오래이나 매우 강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김 씨는 “최근엔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이 쉬지만 예전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엔 점심시간에 주민들이 거의 이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곤 했습니다”고 했다. 이 당나무 앞에서 2년전 까지만 해도 동제를 올렸다고 한다. 아직까지 동제때의 상석이 그대로였다. 이제는 객지인들이 많고 그나마 원주민들은 나이가 많아서 지금은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서 가장 고령자는 우리 아버님으로 올해 88세입니다. 지금껏 가장 장수하셨던 분은 94세셨고요. 이 마을에 주민이 정착한 것은 임란 이후, 전쟁을 피하기 좋다고 여겨, 석굴암을 넘어 처음으로 사람이 정착 했다는 설이 전해옵니다. 원래 이곳은 사람이 정착하기 어려운 곳이었으나 난리를 피해 화전을 일구며 정착한 듯합니다” -‘이 동네 몇 백년을 살아도 대문 단 이가 없었는데 대문을 단다’ 오르막이 제법이던 마을 중간 즈음이었을까. 마을이 굽이 내려보이는 곳에 ‘돌목’이라는 펜션집이 나타났다. 6월의 햇살과 기분좋게 불어오는 서늘한 산골 바람을 맞으며 된장 담그는 집과 모내기를 막 마친 오모조목한 들녘을 내려 보았다. 그 정경들과 함께 이 산촌 어디선가 불어오는 하늬바람은 평화로운 ‘치유’를 선사해 주었다. ‘돌목’이라는 상호로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 이채혁(70)대표는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다. 이 마을에 이렇듯 정착을 한 것에 대해선 “15년 전 우연하게 스케치를 하러 왔다가 정착하게 됐지요. 울도 담도 없는, 붉은 함석집 앞에 화사하게 핀 살구꽃에 반해 며칠을 그림 그리다가 얼떨결에 이 집을 ‘덜렁’ 샀습니다(웃음)” 이 집의 구석구석은 주인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오밀조밀한 공간구성을 바탕으로 화가인 주인장의 손 솜씨는 집 전체를 작품화 했다. 그래서일까. 한국관광공사 인증 우수한옥체험숙박시설로 인정받아 한옥 스테이를 운영한다. 이 대표 집을 안내해 준 김복기 씨는 “6.25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곳 주민들이 10월 초, 추석 대목장을 보러 가서야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을 알 정도로 이곳은 오지였지요. 당시는 촛불도 없이 등잔불을 밝혀 살았고 꼬부랑 오솔길이 전부일 정도로 깊은 산촌이었죠. 당시는 어일장이나 양북장 보다는 불국장에 장을 보러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숯을 굽고 감이나 과일 약간씩을 지고 석굴암 마당을 지나 장을 다녔습니다. 그 장에서 팔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 오곤 했고요”라고 회고했다. “국민학교 다닐때 감 한 접을 지고 불국장까지 따라 가봤는데 혼이 났죠. 하하. 잠바 하나 사준다고 해서요. 이 마을 도로가 건설된 것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고서 부터였지요” 돌목 펜션 이 대표는 “내가 이 마을에 올 당시엔 예쁜 돌멩이 하나, 개나리 한 포기 없었습니다. 지금은 돌담마다 꽃이 피고 지지만요. 돌담에 ‘쪼르르’ 채송화라도 심어 특성화 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먹히질 않았지요. 겨우 한 두 사람이 따라 했고 보기가 좋으니 너도나도 돌담도 쌓고 꽃을 심더라구요” 라면서 “집을 짓고 대문을 다니까 ‘이 동네 몇 백년을 살아도 대문 단 이가 없었는데 대문을 단다’고 흉을 봤어요. 제가 왔을 당시는 대문 있는 집이 한 곳도 없었으니까요. 아마도 작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흉허물없이 서로 믿고 살았던 터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대문있는 집은 몇 집 뿐이구요(웃음)”라고 전했다. 한편, 하곡 마을은 상범마을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다고 했다. 하범마을은 상범마을과 주민수는 비슷하나 하범리는 상범마을보다 규모가 더 컸다고 한다. 현재 하범마을은 상범마을과는 달리, 농사를 짓는 가구가 대부분이며 토박이가 대부분이다.
등은 불을 밝히는 도구다. 석등(石燈)은 돌로 만든 등기구다. 절에서 뿐만 아니라 궁전, 관청, 여염집에도 있었을 석등. 불상과 불탑에 비하면 석등은 그에 부수되는 것이며 다분히 건축적인 성격을 띤다. 숫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발전돼 온 석등 중 경주에 현존하는 석등과 석등의 양식,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경주에 남아있는 석등은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 교동에 있는 석등, 국립경주박물관 소재 석등 등이 있다. 그 외, 석등 부재가 현존하는 것으로는 십이지상 석등 부재, 이요당 석등 부재, 분황사, 석굴암, 사천왕사지, 감산사지, 창림사지, 원원사지, 무장사지, 남산리사지, 천관사지 석등부재 등이 있다. -밝게 빛나는 부처님 말씀, ‘석등(石燈)’ 그런데 왜 사람들은 유독 절에 석등을 많이 만들었을까? ‘등지인연경’이라는 불교 경전에는 등불은 부처님의 진리를 비춰줌으로써 모든 무리들이 착한 길을 택하게 한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해서다. ‘시등공덕경’에는 탑과 불상 앞에 등불을 밝히면 수미산(불교에서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 곳)꼭대기인 도리천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등 공양을 한 사람은 죄가 없어진다고도 한다. 절에 등을 많이 밝힐수록 내세에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등은 백제인들이 만든 익산 미륵사터 석등이다. 팔각 연꽃무늬 상대석과 팔각의 등불을 밝힌 돌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가늘고 긴 팔각기둥(간주석)의 석등이 주로 만들어졌다. 이와 함께 둥그런 기둥 중간에 굵은 마디를 두어 북 모양을 띠는 석등, 사자 두 마리가 화사석을 떠받치고 있는 석등도 만들어졌다. -석등의 의의와 석등의 형태 송창한 선생의 ‘불교 미술품에 대하여’ 중-석등의 의의-에서는 ‘불상과 불탑에 비하면 석등은 그에 부수되는 것이며 다분히 건축적인 성격을 띤다. 이 건축물은 간결한 조명 시설로 사원 궁궐 및 사가의 정원을 장식하는 시설물이기도 하다. 이는 숫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발전돼 왔다’면서 ‘우리나라 석등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자료가 제시되고 있지 않으나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불상과 경문이 들어오고 곧 사찰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등에 관한 지식의 전래를 추정해 볼 수 있으나 확실한 근거 또는 문헌을 찾을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송창한 선생은 ‘석등의 양식상 구별은 크게 불교적 시설과 유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석등의 주요 부분은 등화(燈火)를 일으키는 부분인 불집 곧 화사(火舍)이며 이 화사석을 주축으로 그 위에 지붕인 옥개(屋蓋) 부분과 아래로 대좌(臺座)부분(상대(上臺), 간주(竿柱), 하대(下臺)로 크게 나눠진다. 대좌부는 불상 대좌나 부도의 대좌와 같이 거의 동형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석등의 양식적 분류의 주안점은 화사석에 두고 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 즉 8각, 6각, 4각의 3가지 양식으로 크게 구분이 가능하다. 팔각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전해진 양식이며 이는 특히 신라시대에 많이 제작됐다. 육각은 고려초 일시 유행됐다. 사각은 고려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행되고 있는 형태’라고 했다. 또 ‘이와 같이 대별할 수 있으나 모든 부재가 팔각형으로 이루고 있으면 전형(典型)양식이라 부른다. 전형 양식 이외에 간주석의 형태에 따라 고복(鼓腹)형, 이형 석등으로 세분 할 수 있다. 이형 석등은 기둥 부분에 해당되는 간주석 대신에 인물상이나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8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중 가장 완전한 양식, 불국사 대웅전과 극락전 앞 석등 8세기에 건립된 석등은 9세기에 비해 수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의 석탑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중 가장 완전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불국사 대웅전과 극락전 앞에 있는 것이 유일하다. 이들 석등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8세기로 보는 견해와 9세기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들 석등에 구현된 제반 양식을 볼 때 대웅전 앞 석등은 8세기 후반에, 극락전 앞 석등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8세기 중반, 신라시대 석등으로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 전하는 대표적인 석등이다. 신라석등의 양식발달사상에서 전형양식(典型樣式)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의 평면구도를 유지하고 있다.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이 1석으로 조성된 상대석은 8각형의 평면을 보이고 있는데, 신라석등에서 이처럼 화사석 받침을 조성한 예 역시 이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다른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석등의 앞에는 전면과 측면에 각각 안상을 새긴 장방형의 배례석이 있다. 이 석등은 신라석등 발달사상 제2기, 즉 8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과 더불어 현 위치에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석등이다.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대웅전 앞 석등과 더불어 신라 전형기 석등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등의 전체적인 평면은 팔각형을 유지하고 있다. 옥개석은 풍화가 심하나 전체적인 조형이 대웅전 앞의 그 것과 동일하다. 석등의 전면에는 전면과 측면에 각각 안상을 새긴 장방형의 배례석이 있다. 이 석등 역시 8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과 더불어 온형을 유지하고 있는 귀중한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읍성 출토 석등 불교에서는 부처께 등을 공양하는 복덕을 짓는다는 믿음이 있다. 절에서 불전 앞에 석등을 설치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석등은 경주 읍성 출토로 통일신라 8~9세기, 높이는 320㎝다. 경주읍성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모은 부재들을 합쳐 만든 것으로 기둥처럼 긴 팔각형의 간주석이 굵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남쪽 야외전시구역 ‘경주 읍성 석등’ 경주읍성에 있던 이 석등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해 하대석, 간주석이라 불리는 수직으로 세워진 기다란 팔각기둥, 그리고 상대석의 일부만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 자리로 옮겨왔던 1975년 당시 없는 부분을 새롭게 만들어 넣고 지금의 모습으로 전시하고 있다. 복원한 석등은 높이가 거의 6m에 이르는데, 통일신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큰 석등의 하나이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등불을 밝히는 곳의 높이가 거의 5m에 가까운데 어떻게 불을 켰을까 하는 점이다. 매번 사다리를 놓았을까? 그 답은 전라북도 남원의 실상사 석등에서 찾을 수 있다. 실상사 석등 앞에는 돌계단이 마련돼 있다. 이 석등에도 별도의 돌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함께 발견된 것은 없다. 석등 앞에 있는 네모난 돌은 배례석이라고 한다. 이 돌의 용도는 향이나 각종 공양물을 올려놓기 위한 것이다. 석등과 함께 놓이는 경우가 많다. 이 배례석은 경주 읍성에 있던 석등과 함께 놓였던 것은 아니다. 한 시민은 “이 석등을 본 이들은 한결같이 석등의 아름다움에 대해 입을 모은다. 반면, 석등의 전시 위치가 다소 잘 보이지 않는 곳이어서 아쉽다는 지적이 많다. 적극적으로 석등을 홍보하고 자랑해도 손색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면서 이 석등이 제대로 부각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적지나 발굴 현장에서 옛사람들의 뼈나 유물들을 발굴하고 수습하는 고고학자에 대한 동경은 누구나 한 번 쯤은 해봤을 것이다. 경주는 일년 내내 문화재 유적의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발굴은 땅 속 매장 문화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쪽샘지구발굴현장만해도 조사 범위가 넓어 수 십년간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며 경주 월성과 황룡사지 등도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평소 접근이 어려웠던 발굴현장을 일반에 제한적으로 공개하기도 한다. 경주 월성 발굴조사 현장 등이 그것이다. 월성에 관한 안내판이나 발굴조사에 대한 설명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돼 있어 점차 발굴의 신비한 베일이 벗겨지고 있는 차제다.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최영기 원장)과 황룡사 내 유적발굴현장을 찾아 발굴의 절차 및 과정과 발굴이후의 수순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우리나라 전체 문화재 발굴 비용은 2000~3000억원, “땅 속 유물은 국가 소유” 대체적으로 발굴에 대해 일반 시민들은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간이 오래 경과된다는 등속의 피해 의식이 그것으로 현재는 소규모의 발굴은 국비로 충당하지만 발굴 비용 부담이 많다는 지적은 늘 있어왔다. (재)신라문화 유산연구원 최영기 원장은 “국가도 정책적으로 그런 비용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은 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문화재 발굴 비용은 2000~3000억원이 채 되지 않는다. 결국은 국가 정책의 우선 순위에 따른다는 것으로, 이는 국가 경제력과 밀접한 부분이며 타 선진국의 경우와 견주어보면 문화재 발굴 비용의 지원은 평균적인 편”이라고 했다. 일본의 경우는 조사 기관이 대체로 국가 기관이다. 각 지자체에서 조사기관을 설립해 국가나 지자체에서 실시하고 인건비나 기관 운영비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운영 유지하고 발굴의 직접 경비는 발굴 행위자에게 부담 시킨다. 전체 발굴비용의 30%정도는 본인에 부담시키고 나머지 70%정도는 국가나 지자체에서 부담을 하는 식이다.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일반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내 땅은 땅 속의 것도 내 것’이라는 인식이다. 법률적으로 땅은 개인 소유지만 땅 속 유물은 지하자원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것이고 채굴을 하려면 문화재도 마찬가지로 국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발굴해서 유물이 나올시 국가 귀속인데 개인이 발굴비용을 부담해야하는 것은 그 땅을 그대로 보존한다면 발굴하지는 않는다는 원칙에서다. 그러나 개발로 이득을 취할 경우는 비용을 개인이 부담한다는 것. 지역에 따라 처음부터 발굴이 바로 되는 경우와 입회하에 일차적 기초 조사를 통해 유물이 있을 개연성이 확인될 단계에서 즉각적으로 발굴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또, 시굴 트렌치(test trench, 좁고 길게 구획해 시굴해보는 것)로 구역을 정해 시범 발굴해 발굴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발굴기관에서는 각각의 유물층을 미리 파악해 시굴 트렌치를 통해 데이터를 확보하고 발굴한다. 제토 작업부터 시작해 토층을 보고 판단해 발굴한다”고 했다. -경주시 발굴전문조사기관은 13~4곳, 학술발굴조사와 개발을 전제로 하는 발굴 있어 경주시의 경우 발굴전문조사기관은 13~4곳이다. 그 중 국가기관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한국문화재재단 등으로 세 곳이고 경주시 공기관 발굴기관은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하나다. 이 외에는 민간 법인들(성림문화재연구원, 계림문화재연구원 등)이다. 문화재 보존 정비를 위한 학술발굴은 국가기관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주로 시행하고 있다.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진행한 재매정과 천관사지처럼 이미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경우는 복원이나 정비를 위한 발굴이다. 경주시로부터 의뢰를 받아 학술발굴조사를 한 것이다. 이처럼 이미 국가에서 부지를 매입해 문화재로 보존을 하고 있는 지역에 대해 정비나 복원을 위한 학술 발굴이 있고 아파트 등을 짓기 위해 개발을 전제로 하고 발굴을 하는 경우가 있다. 발굴 조사가 끝나면 건물을 짓는 개발 행위를 하게 된다. 이 경우 전산화 된 문화유적 분포지도를 통해 인근의 매장문화재 분포 유무를 파악할 수 있다. 유물의 매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 전문 기관에 의뢰해 발굴 조사를 하라는 건축 조건부 명령을 내리고 사업자는 조사 기관에 의뢰를 해야 한다. 민간일 경우는 문화재청이 인정한 기관에 의뢰하고 해당 발굴 건 자체 전부를 문화재청에 허가 받은 뒤 발굴이 실제로 이뤄진다. -유물면에서는 의료용 메스나 이쑤시개 까지 동원해 섬세한 작업 통해 유물 노출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일단, ‘지표 조사’로서 땅 위에 문화재 흔적이 있어 육안으로 파악될 경우, 10분의 1정도로 부분적으로 파서 시굴 조사를 하고 육안으로 직접 확인한다. 석조 유적 등은 레이저 탐사 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시굴에 이어 본 발굴이 진행되는데 토층을 정확히 살피기 위해 토층 둑을 네모지게 칸을 만들어 둑을 남겨 놓고 발굴을 진행한다. 유물의 상황이나 시대, 종류에 따라 네모진 칸의 크기는 5m~25m로 달라진다. 이는 가장 보편적인 발굴형태로 흙의 퇴적 상황으로 유물의 선후가 다른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했다. 지층의 형성 시기로 판단해 유물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평면 위치와 수직적 좌표를 설정하고 층위를 기록하고 그 과정을 보고서에 기록한다. “대개는 트렌치로 도랑의 형태로 먼저 파보고 상황을 파악한 뒤 흙을 제거한다. 논의 경우, 경작토가 이미 20~30㎝ 있으므로 경작토는 포크레인으로 걷어낸다. 이후 삽이나 호미 등으로 제거하고 유물면에 직접 다가가서는 섬세한 의료용 메스나 심지어 이쑤시개 등으로 하나씩 세심하게 제거하며 유물을 노출시킨다. 이때 흙을 제거하는 ‘붓질’을 하기도 한다”면서 크고 작은 기구들을 다양하게 사용한다고 했다. -발굴 현장에서는 보존처리자와의 긴밀한 협조 필요, 발굴이후에도 발굴과 유사한 시간과 인력 필요 철제류, 토기, 기와 등 유물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천 여 년 이상 땅 속에 매장돼 있다가 공기와 만나면 어스러질 정도라고 한다. 철제류의 경우도 자칫하면 유물 자체가 훼손된다. 이재현 실장은 “유물들이 노출된다고 해서 다 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과정을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고 3D스캔으로 작업하는 등 현대의 첨단 장비를 총동원한다. 발견된 유물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노출되면 부식이 급격히 진행된다. 그래서 유리나 토기 등은 접합을 하고 철이나 금속 등은 부식이 진행되므로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실내작업을 한다”고 했다. 응급처치로 경화 처리를 요하는 경우도 많아 조사 기관은 반드시 보존처리요원을 두도록 하고 있다. 발굴 현장에서는 보존처리자와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보존과학자는 발굴 기간 동안 현장에서 발굴자와 함께 발굴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항시 대기할 정도로 보존처리 유물 발굴이 안 될 경우는 발굴 책임자의 도움 요청이 있거나 보존처리가 필요할 때 보존과학자가 정기적으로 현장에서 공동 작업을 하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발굴하는데 필요한 기간과 인력은 발굴이후에도 기간과 인력이 거의 비슷하게 소요된다고. 유물 출토의 양에 따라 유물을 실측하고 보고서를 발표해야 하는 과정 등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발굴 당시 유물이 훼손된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1970년대 안압지(월지와 동궁)에서 출토된 주령구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기술 부족으로 태워버린 예가 있었다고 한다. 또 즉각적으로 처리하지 않아 산화가 돼 없어져 버리는 예도 있었다. 천마도의 예가 그것이다. 발굴 당시부터 보존 처리해 용기액 속에 보존해두었다가 공개된 것이다. 아직도 보존액속에 그대로 두고 있는 유물의 경우도 있다. 현대의 기술로도 원래의 상태대로 공개할 수 없는 유물들도 많다는 것.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서 만난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성윤 조사연구팀장은 “불과 수 십센티미터 아래서 기와, 토기, 청동이나 우물의 흔적, 씨앗 등이 발견되고 있다. 기와 등이 수습되면 세척해서 기록하고 그 중 중요한 유물로 추정되면 보고서를 통해 보고를 하고 이들은 국가귀속 절차를 밟아 국가에 귀속된다. 이들 유물은 다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돼 그 중 귀한 유물은 전시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 신라월성 학술조사단 이인숙 학예연구사 “‘발굴’이란 계속해서 사랑해야 할 존재” 최근 발굴이 진행 중인 월성(사적 제16호) 서쪽 성벽에서 1500년 전 사람을 제물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2구와 월성해자에서는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토우 중 가장 이른 시기인 6세기로 판단되는 유물 등이 발굴됐다. 이들 유물의 언론공개회를 가지면서 스포트 라이트를 받은 학예사가 있다. 그는 월성 A지구 성벽 조사 중 인골을 최초 발견한 ‘유적 운이 좋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 신라월성 학술조사단 이인숙 학예사(39)다. 그는 “유독 두 인골이 나오는 바람에 특히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라면서 겸손해 했다. 지난 23일 월성 발굴현장에서 그를 만나 생생한 발굴현장에서의 성과와 에피소드를 들어 보았다. -“경주는 고대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 수 있어서 새롭습니다” 이인숙 학예사는 우리나라 중요한 유적의 발굴을 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으로, 2014년 월성 발굴 시작서부터 발굴 팀원으로 일하고 있다. 석빙고 앞 C지구 시굴조사에서부터 시작해 월성 성벽 A지구의 조사원으로 현재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올해 학예사 12년차로, 그가 거쳐간 유적은 낙산사, 경복궁 등이었다. 국민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 훌륭한 유적에 대한 조사를 해왔던 편이었고 그 현장의 중심에 있었던 것. 그는 경북대학교에서 고고인류학을 전공했다. 동대학원에서는 고고학을 전공한 정통파로 학창시절 국사와 지리를 유독 좋아했다고 한다. 이 학예연구사는 “경주에서 2년 남짓 조사를 하고 있는데 제가 주로 조사했던 경복궁이나 낙산사의 경우는 중세 이후 조선시대 유물이 대부분인데 비해, 경주는 고대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 수 있어서 새로웠습니다. 제 전공이 기와 중에서도 평기와였는데 경주의 더 이른 시기의 유물을 직접보고 막새기와도 상당수 출토되기 때문에 병행해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에 대한 논문도 냈습니다”라고 하면서 신라 지역의 독특한 기와에 대해 더욱 연구하고 기와에 대한 연구 영역도 넓혀 나가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대퇴부 다리 하나를 확인, 절묘하게 인골 있는 부분 팠습니다” 그는 인골 발굴 당시, 성벽문이 있던 자리에서 성벽의 축조 형태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성벽에서 인골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1980년 월성 해자 안에서 인골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제가 절묘하게 인골이 있는 부분을 팠습니다. 그 트렌치 중 조금만 어긋났어도 발견하지 못했을 거예요. 처음에는 대퇴부 다리 하나를 확인했는데 나뭇가지일 가능성도 생각했습니다. 계속해서 정형성을 가지고 대퇴부가 발견돼 뼈임을 직감했구요. 바로 동아대학교 인골 전공자 김재현 교수에게 연락해 공동으로 조사하게 됐습니다” 인골은 약해서 쉽게 부서지기 쉽다. 공동으로 조사해 유구를 완벽하게 찾아낸 것이었다.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실감났죠. 습한 지형이라 좀 더 인골이 완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큰 이슈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건 인골을 최대한 온전하게 수습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라며 제물용이라는 근거를 밝혀야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고 기뻤던 반면, 걱정스러운 면도 컸다고 했다. 일단은 실측 및 완벽하게 사진으로 남긴 다음, 물기가 많은 상태에서 발견됐으므로 물기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 중성지에 싼 다음, 건조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인골의 성별, 키, 병의 흔적, 외상의 흔적을 찾고 부러진 뼈의 경우 접합과 복원을 해서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 처리했다. 인골은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것으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다양한 연구도 수반된다. 대퇴부에서 DNA를 추출하면 인간의 유전학적 정보를 알 수 있으므로 현재, 대퇴부 일부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처리실에 의뢰해 놓은 상태라고 했다. 이후 인물 복원 연구도 같이 병행할 계획이라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세트장 같은 복원 하지 않기 위해 최선 다해 발굴합니다” 월성은 현재 A지구 성벽, 석빙고 앞 C지구 건물지, 성벽 밖 해자 등 세 개 지구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다. 성과로는 C지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건물지 군이 확인됐고 A지구에서는 이번 인골이 확인되면서 초축을 5세기 전후로 추정해 밝혔다는 것과 해자에선 ‘병오년(丙午年)’이라고 기록돼 정확한 연대가 최초로 확인된 목간이 발굴되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소그드 인 토우 발견은 신라와 페르시아와의 활발했던 교류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향후 해자는 올해 안으로 조사를 완료한다고 했다. 서성벽을 발굴하는 이유도 월정교와 연결되는 서문을 찾기 위해서다. 제대로 된 복원을 위한 발굴인 것이다. “정확하게 복원하기 위한 것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세트장 같은 복원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최대한 정확한 규모나 위치를 찾아서 복원을 해야 하니까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철저한 고증과 연구가 병행돼서 고대에 가까운, 좀 더 완벽하고 상징적인 월성을 대표할만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한 것이죠. 후대에도 부끄럽지 않은 건축물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월성에도 건축연구사가 따로 있어 복원의 우수 사례, 향후 복원의 방향 등 복원정비에 관련한 연구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A지구는 성벽의 문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로, 하반기에는 일제강점기 조사했던 성벽을 전면 조사해 성벽의 전반적인 초축이라던가 마지막 단계의 성벽의 축조모습 등을 정확하게 판단해 내년쯤 성과들이 공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월성은 역시나 어느 유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중요한 유적입니다. 이 유적을 조사하고 있는 일원으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철저하게 조사연구 해야겠다는 압박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다” “연구 분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요. 단순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새로운 유물이 계속해서 확인되고 있어서 공부해야하는 부분이 많은 거죠. 천천히 공부하면서 많은 정보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월성 성벽은 저로선 처음으로 조사를 한 것이니 이 분야에 대해 더욱 많은 공부를 해서 연구자 반열에도 합류하고 싶습니다”라며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밝혔다. 긍지와 신념이 그의 표정은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얼굴에서 더욱 빛났다.
“두 분의 인간으로서의 삶, 그리고 예술에 대한 시선과 고뇌까지도 어림짐작이나마 이해하게 되어, 가슴 속에 두 분을 더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故 이재건, 조성희 화가 부부의 두 남매, 이소명(45) 이준형(43)씨의 말이다. 단 열흘간 故 이재건 화백 부부의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오는 21일(일)부터 30일(화)까지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이재건&조성희 유작전’이 열리는 것이다. 이재건 화백이 작고한지 3년만에, 아내인 조성희 화가가 작고한지는 16년만의 유작전시다. 남매가 기획하고 마련한 전시는 그리움과 정성이 가득하다. 이번 전시에는 이재건 화백의 작품이 묵화를 포함해서 100점 정도(스케치 제외), 조성희 화가의 작품이 47점(스케치 제외) 정도 전시된다. 경주시민과 미술 애호가들은 두 작가의 유작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자리인 셈이다. 두 작가를 회고하며 추억하는 시간으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지역작가의 혼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전시로 벌써부터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전시 개관식은 24일 수요일 오후 5시 서라벌문화회관에서다. -“유작전 준비는 하루라도 빨리 마련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의 총 기획은 이소명씨와 이준형 두 남매가 맡아 진행했다. 보관하고 있는 유작을 포함해, 이미 많은 작품이 개인이나 기관에 소장중이어서 이번 전시에는 여러 소장자들의 협조로 대여해서 전시하는 작품도 있다고 했다. 남매는 입을 모아 “저희가 해야 될 일이었죠. 유작전 준비는 하루라도 빨리 마련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전시 준비하는 기간이 꼬박 일 년이 걸렸고 두 분이 남기신 스케치나 일기 등을 보면서 부모님을 더욱 이해하게 되었습니다”고 전했다. “아버지의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신라왕경도, 읍성도, 남산도 등이겠지요. 역사 유적에 관한 작품을 고고학적 바탕위에 그리시는 것을 저희도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가시적인 작품들 이외에도 두 분의 정신적 자산도 정리하는 과정이어서 당연히 신경을 써서 집중했습니다. 전시를 위한 준비기간 동안 작품과 자료를 하나씩 일일이 분류했고 두 분의 전시를 준비하는 지라 균형을 맞추는 작업도 힘들었습니다. 부모님이지만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관점을 유지해야 했고 화가로 객관성을 담보로 조명해야 해서 조심스럽고 어려웠습니다”고 하면서 경주시 등에 기증 형태로 두 작가의 전체 작품이 보관되기를 바랐다. -‘예술작품이란 한 인간의 정신력을 온통 바치는 생명력의 결정체’, ‘나의 분신이며 생활의 일기이며 나의 종교이기도 한 작품’ 이재건 화백은 1970년 근화여고 재직 시절, ‘예술작품이란 한 인간의 정신력을 온통 바쳐 그의 생명까지도 깎아 바쳐 찾아내야 하는 생명력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화가가 물감을 캔바스에 바르는 것은, 단지 하나의 색깔 있는 물질이 아니라 바로 화가 자신의 정신이며 생명이어야 한다’고 피력한 바 있다. 또 이재건 화백은 ‘나는 나의 작업에서 형식이나 재료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대학교 때 동양화과에서 작업하면서도 유화를 함께 접할 기회가 많아 동서양의 재료와 기법을 같이 다룰 수가 있었다. 오늘의 그림은 이러한 과정에서 얻어진 스타일이며, 크로스오버 경향으로 영역의 모호한 느낌을 즐긴다. 나는 내 그림 속에 항상 꿈과 시를 담고자 하는 의식세계를 구축하여 왔고 이것은 나의 천성이며 회화로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조성희 화가는 2회 개인전 인사말에서 ‘이제 나의 분신이며 생활의 일기이며 나의 종교이기도 한 작품들을 전시하게 되어 부끄러운 마음 앞선다. 예술인이기 보다는 지성인이기를 노력하면서 무언가를 그득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기를 바라고 또 채워도 채워도 항상 비어있는 항아리, 그 빈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했었다. -이재건 화백의 ‘신라왕경도’, ‘경주남산유적복원도’, ‘경주읍성도’ 제작 이야기 강민수 화가는 이 화백을 기리는 글에서 1992년 제작한 신라왕경도, 경주남산유적복원도, 경주읍성도 제작에 관한 이재건 화백의 글 중에서 아래를 인용했다. ‘필자는 역사가도 고고학자도 아니다. 다만 4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어릴 때 뛰어놀던 산천과 동리, 그 속에서 느껴온 역사의 향기와 여러 사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라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감명 깊게 가슴속에 지녀 온 작은 화가일 뿐이다. 그 옛날 경주를 생각하며 몇 년이 걸려도 한번 그려 보리라고 결심했다’고 적고 있다. 강민수 작가는 이에 대해 “신라왕경도는 순수회화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증되어야 할 그림이므로 이재건 화백은 수많은 자료를 연구하고, 사학자와 관계 인사들을 만나서 자문을 구했으며, 경주의 골목골목을 수없이 돌아다니며 직접 스케치를 하셨다. 지금은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이나 미래의 경주 발전 계획을 세우는 기관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어서 회화적 가치와 역사 문화적 자료의 가치를 동시에 갖는 ‘경주남산유적복원도’를 제작하셨다. 또 경주의 도시환경을 연구하고 경주시가지 발전계획을 세우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는 ‘경주읍성도’를 완성하셨다”고 쓰고 있다. 또, 강민수 선생은 “평생을 전업 작가로 지내오면서 위선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꿈을 그리며, 경주에 애착을 가지고 신라문화를 보존·발전시키기에 고심하면서 살아오신 이재건 선생님은 진실한 화가이자 지성인으로 존경을 받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고 이재건(1944~2014) 선생... 천경자, 김환기 영향 받았으며 평생 예술활동에 몸 담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과 지역 예술 발전 위해 헌신 1944년 경북 군위군 출생으로 아버지를 따라 경주읍으로 이주한다. 대학 입학 전까지 줄곧 경주에서 성장기를 보낸다. 소년시절서부터 윤경렬 선생의 경주박물관 향토박물관 교실에서, 향토사연구반 활동을 하면서 경주의 유물과 유적에 대한 자각을 키우게 된다. 1963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해 동양화를 전공한다. 1967년 경주 삼보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말년의 회고에 의하면, 대학시절 천경자 교수를 만나면서, ‘파스텔 톤의 색깔과 시적인 것, 특히 채색에 대한 매력’으로 서양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향후 서양화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또한, 그림에 시적인 면이 많은 것은 스승이었던 김환기 화백의 영향이라고도 한다. 1970년 경주로 돌아와 근화여자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지내며 지부의 전시회에 초대출품한다. 1972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하면서 친척 박진수의 소개로 조성희 작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했다. 1973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 전공으로 수료한다. 1974년 경주에서 현대 청년 작가 그룹을 결성한다. 대구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전’, ‘오늘의 대구미술전’ 등을 통해 구상화 계열의 작품을 시도한다. 1976년 당시 경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동양화를 가르치는 ‘개미화실’을 열어 학생과 일반인들을 가르친다. 1983년 계명대학교 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해 회화를 전공한다. 재학 시기에 현대 구상화 계열의 작품을 시도하며, 재료와 양식에서 동서양 혼용적인 회화를 추구한다. 재학중 그의 화법에 마지막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점식 교수를 만나 ‘미술은 지성이다’라고 하는 결정적인 철학을 그의 창작세계의 신조로 받아들이게 된다. 1989년 침샘암이 발병하고 이후 완치 판정을 받는다. 1992년 ‘신라왕경도’의 제작을 의뢰받고 1년 이상의 사전답사와 고증작업을 거쳐 신라왕경도의 제작을 착수한다. 이 기간, 학술적인 것을 좋아하는 성격과 맞닿아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활기차게 작업을 해 1994년 착수한지 2년여 만에 신라왕경도를 완성해낸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영인본이 전시되고 있으며 이후 주로 유화 작업에 비중을 뒀다. 2004년 1800년대 경주시의 외곽을 둘러싼 성과 마을 모습을 복원해 그린 고고학적 회화 ‘경주읍성복원도(현, 경주문화원 소장)’를 제작했다. 2006년 경주시문화상 예술부분을 수상한다. 2009년 폐암을 진단 받고 2010년 ‘갤러리 휴’에서 제공한 공간에서 작업을 한다. 2012년 가을부터 병세가 악화돼 부산으로 옮겨 장녀의 집에서 함께 산다. 2014년 5월 27일, 71세로 영면에 들었다. 경주에 돌아와 장례하고 유언에 따라 시신은 동국대경주병원에 기증해 다시 한 번 지역사회에 귀감이 됐다. 사후 한국예총경주지회로부터 경주예술인상 미술부문을 수상했다. 고 이재건 화백은 생전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각종매체에 논고를 집필하면서 미술이론가로서, 그리고 여러 단체의 위원직을 맡으면서 문화계에서도 넓은 영역으로 활동했다. 그는 평생 예술활동에 몸 담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과 지역 예술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본지에 2008년 4월부터는 미술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한국미술협회, 대구미술단체, 경북창미회, 경고동문회 등 많은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경주미술협회 회장을 맡아 지역 미술 문화 발전과 후진양성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고 조성희 선생(1946~2001)...입원과 퇴원 반복하면서도 늘 삶에 대한 희망, 작품 활동에 대한 의욕 버리지 않아 조성희 선생은 1946년 신의주 출생으로 수도여고를 졸업한 후, 1969년 덕성여자대학교 미술과를 졸업한다. 이후 현대회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결혼 이후 임신과 출산, 육아 등으로 그림을 적극적으로 그리지 못하다가 주로 집에서 그림이 크지 않은 유화 작업을 했다. ‘제3구상회전’에 출품해 1985년까지 활동하고 1988년 신라미술대전에서 입선한다. 이를 계기로 작품의 창작과 화가로서의 대외적 활동에 용기를 얻고 1990년 첫 개인전을 꽃을 주제로 해 연다. 1994년 신라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하고 경주·포항·울산 등에서 열린 동해남부 여성작가전 등에 2000년까지 출품하고 활발하게 활동한다. 2000년 췌장암이 진행된 것을 알게 되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도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됐다. 이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더욱 쇠약해지면서도 늘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 그리고 작품 활동에 대한 의욕을 버리지 않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다. 5월 26일, 향년 56세로 생을 마쳤다.
경주 율동 저수지 맞은편 즈음에는 경주에서 흔치 않은 이국적 외관을 자랑하는 한 채의 건축물이 눈에 띤다. 바로 김종수 화백(59)의 거처이자 아뜰리에다. 김종수 화백은 들꽃이나 자연풍경을 담아내는 작가다. 그의 정원 속 무리지어 핀 꽃들을 불러내 화폭에 담고, 다시 그림 속 꽃들은 그의 정원에서 화가와 호흡한다. 그의 그림에는 짙은 고독과 향수가 배여있는가하면, 위무와 생의 쉼표를 주기도 한다. 아날로그의 대표성들이 서정으로써, 나즈막하지만 농밀하게 흐른다. 유미적이면서 다소간의 폐허미를 가진 김종수 화백의 작품은 이미 미술 애호가들에게 꾸준하게 선호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스테디셀러다. 자연적이고 서정적인 그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찾고 있는 것. 김 화백은 아뜰리에에서 울려퍼지던 깊은 공명속 음악처럼, 종소리의 맥놀이처럼 잔잔한 울림을 주는 작품들을 그린다. 제비꽃 ,수선화, 도라지꽃, 쑥부쟁이들과 낮은 담장을 감아 오르는 허름한 농가의 장미들은 화가의 치열한 매무새를 거치면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화가가 늘 꿈꾸었던 모네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며 사는 그를 만났다. 지난달 28일, 유난히 햇살이 좋아 정원의 해당화가 첫 꽃망울을 터뜨렸다던 날, ‘그림공장’이라 자처하는 화가의 집을 찾은 것이다. 화가의 곁에는 사람의 온기가 묻어났다. 그 나이에 흔히 있을법한 노회함도 없었다. 순정한 표정도 청년의 것 그대로였다. 부산 억양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그는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구렛나루수염은 얼핏 모노톤의 영화배우같은 프로필로 보이기도 했다. 자연을 닮아 선하고 맑은 눈동자는 젊은날 꽤나 여심을 울렸을 것도 같다. 고독의 흔적위에 따스하고 소박한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시종,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작가만의 세계와 진정성있는 작가 정신을 강조한 그는 9월 22일부터 10월 22일까지 청도 ‘해브’ 갤러리에서 초대전시를 가질 예정이라고 했다. 그의 아뜨리에 여기저기에는 작업중인 작품들이 여러 점 보였다. 다가오는 전시에도 들꽃들과 서정적인 풍경을 그린다고 했다. -예리하고도 소박한 미술세계... 독특한 처리와 서정성이 농밀하게 흐르는 색채감각 김종수 화백은 부산 출생으로 계명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경주 작가인 그는 전문 작가로서의 길을 30년째 걸어오고 있다. 2007 KIAF 한국국제아트페어(코엑스/ 서울), 1995 현화랑-예술의전당(서울) 등 30회 넘는 초대개인전 외, 2008 코스타리카-한국국제교류전(한국국제교류재단/서울), 2006 천년의 황금도시 경주(북촌미술관/서울, 경주국립박물관/경주) 등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으며 신라미술대전 대상 (1995),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5회(1985,86,89,90,92) 등을 수상했다. 화가는 뛰어난 기량을 지녔는가 하면, 소박하고 따스한 감성의 소유자다. 무엇보다도 농촌마을 율동에서 그림만을 그리며 치열한 예술가 기질에 휩싸여있는 작가인 것이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유화기법에서 뛰어난 기량을 드러내며 예리하고도 소박한 미술세계의 영역을 확보해왔다. 그가 구사하고 있는 유화의 독특한 처리, 서정성이 농밀하게 흐르는 색채감각, 햇살이 손에 잡힐듯 민감하게 포착해내는 예리한 시각은 나름의 영역을 확보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당에 놓인 꽃들을 대담하게 위치시켜 그린다든지,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환경을 담담하게 바라보면서 짙게 우러나오는 서정을 화면 가득 흩뿌린다든가 하는 그런 마음의 배려와도 만나고 있다. 특히나 그의 작업의 주된 특징은 무엇보다도 현장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눈앞에 위치한 자연을 지켜보면서 그로인해 야기되는 감흥과 정서를 그대로 옮겨 놓고자 하는 철저한 자연회귀 순응을 읽을 수 있다. 경기대학교 미술평론가 박영택 교수는 그의 작품에 대해 “그가 포착해내는 빛과 색채의 조화로운 접촉은 종래의 진부하고 상투화된 구상회화의 경직된 틀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애쓴 흔적이 지금의 그림에서 도출돼 나오고 있다”고 평했다. -“밀레의 아뜰리에에 홀딱 반했죠...10년간 그림 그리고 돈 모아 드디어 집 지었습니다” 화가의 정원 곳곳에 적절하게 심어져있어 매우 유기적으로 어울렸던 해당화, 백장미, 불두화, 모과나무, 감나무, 아이리스, 블루베리, 수국, 야생화 등의 꽃과 나무들에는 주인장의 살가운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건물 지을 때 기존 농가에 있던 나무들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지은 지 20년 되니 정원과 어우러져 조화가 되는듯 하네요” 울창한 탱자나무 울타리는 유럽 정원의 담장수처럼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고 수국이 한창 필때면 포토 존이 되고 한켠의 허름한 농가는 그대로 작품의 소재가 된다. 2층 아뜰리에의 내부에선 자신의 입지와 화가의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 작품인 ‘화가의 아뜰리에’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묵직한 매스를 큼직하게 분리해 시원하게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천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음악에 미끄러지듯 흘러 화가의 공간에 화사한 생명을 더했다. 아뜰리에 한켠의 창을 열면 물결치는 청보리밭이 꿈인 듯 펼쳐진다. 맞은편 창을 통해선 호수의 잔물결이 일렁이는데 그 자체가 작품이다. 마치 유럽의 어느 아뜰리에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집은 어느 한 곳 화가의 손길이 머물지 않은 곳이 없다. 그의 손은 화가의 손이라기보다는 농부의 거친 손 마디를 닮았다. 그는 이 집을 짓게 된 배경에 대해 “89년 심상회 활동 당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시골집을 찾던 차제에 동료 화가의 권유로 이 집 대지를 먼저 샀습니다. 이후 10년이 지난 99년에 이 집을 지었고요. 10년간 그림을 그려 전시를 하고 돈을 모아 드디어 집을 지었습니다”고 했다. “96년 프랑스 파리에서 한 달 머물렀는데 ‘문화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트장 같은 건물의 아름다움에 반한 거였죠. 밀레가 살던 바르비죵을 갔는데 밀레의 아뜰리에가 너무 아름다웠고 그 아뜰리에 건축이 그때부터 제 아뜰리에의 모델이 됐지요” 지베르니, 오베르 등지의 건축 양식에 홀딱 반해서 이 집을 짓게 됐다는 것. 화가는 프로방스 인테리어 책을 샀고 이 집의 기본 양식을 전형적 프로방스 풍으로 정했다. 전체적인 색과 형태와 재질은 오묘하게 잘 어울렸다. “제가 직접 시공을 했습니다. 이 집은 무뚝뚝하면서도 굵직한 남성적 느낌으로, 무게감있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구상했죠. 가정집에서는 흔치 않은 ‘인방(lintel, 창틀위에 돌을 올리는 양식)’을 손수 작업했고 장석 등도 일일이 직접 구입하고 타일도 직접 골랐습니다. 조적과 미장도 인부들과 같이 했고요” 착공후 7개월여 걸려서 여느 집 보다 두배 정도 더 걸렸다고 한다.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창호 디자인이었다. 벽면의 질감, 인방의 질감 등을 통일감있게 인테리어 했다. 창호의 나무틀은 100년 된 고재를 이용해 문틀을 제작하고 경북 영해의 200년 수령의 소나무를 2그루 구입해 한 달 반 동안 말려 제재소에서 문틀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집을 짓기 전, 공사장을 직접 찾고 조언을 구하는 등 일년간 인테리어 공부를 했다고. -“저는 아웃사이더입니다. ‘위리안치’하고 열심히 작업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작업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생활속에서 얻어지는 소재로 그릴 것이고 생활이 곧 작품으로 이어지니까요. 예전 대학 재학중에는 아방가르도하고 실험적인 작품도 시도했었는데 결국,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로 했지요” “저는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예술의 최신 유행이나 흐름, 사조 등에 휘둘리지 않고 저만의 스타일을 통해 자연주의적인 작업을 추구하는 것이죠. 대세에 편승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김 화백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수십년간 그림만 그렸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림값도 20년간 올리지 않았구요(웃음)” 그는 지금도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여기는 내 소우주 공간이니 늘 가꿔야 합니다. 생각지도 않는 일거리가 생기기도 하고요. 우선, 그림 그리는 작업부터 시작하지요” 예전엔 아침 일찍부터 현장에서 하루 종일 그려, 많이 그렸을때는 50~70점 정도를 일년간 그렸다고 했다. 그런 성실함은 30회가 넘는 꾸준한 개인전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이나마 이런 집을 지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요즘은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지만 앞으로 70대가 되기 전 더욱 열심히 작업할 것임을 다짐하고 강조했다. “정원의 꽃이 개화하기 시작하면 시기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꽃이 빛의 각도에 따라 하루하루 달라지므로 서둘러 그리지 않으면 놓치고 맙니다. 부지런히 그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트레이닝을 많이 해야 합니다. 마음에 담아놓아야 하는 것이죠. 그림은 그냥 그려지는 것이 아니고 심상의 단련을 통해 연습해야 합니다. 심상을 끌어들여 그림으로 발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그림을 그릴수 있습니다. 새가 알에서 깨어나려면 안에서도 깨치려는 노력이 함께 병행돼야 하듯, 화가는 충격과 자극을 동시에 필요로 합니다”고 하면서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작가만의 세계와 진정성있는 작가 정신을 강조했다. “저도 쉰 즈음, 힘들었습니다. 회의가 생긴 거죠. 방황도 따랐고요. 3년 정도 돌을 모아 돌담도 쌓았죠. 육신을 괴롭히면서 지난 과거도 생각하고 정리했죠. 이제는 편합니다. 열심히 그리니까 밥은 먹게 해주는 것 같아요. 하하” 부지런을 떨어야 겨우 작품 한 점이 나온다며 쉽게 그리는 것을 경계했다. “추사 선생의 치열한 정신을 본받아 이 아뜰리에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 귀양을 간 죄인이 그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둠)’하고 열심히 작업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잖아요?(웃음)” 김 화백은 끊임없이 연마하고 작품에 매진할 것을 20년 된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자신의 집에 비유해 말했다. 김종수 화백이여. 앞날은 부디, 마침내 꽃길만 걸으시라.
다가오는 5월 5일은 어린이 날이다. 64년 전 어린이들에게 경주의 중요성과 경주의 문화유적이나 유물의 소중함을 심어주기 위해 개교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의 역사적 값어치가 더욱 진해지는 시기다. 지난호에서는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태동과 연혁을 중심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번호에서는 이 학교가 배출한 동문이야기와 에피소드, 개교를 위해 초기 헌신했던 이들을 다뤄 보았다. 이 기사는 제1회 수료생 김윤근 경주문화원 원장의 자문과 경주박물관학교 50년‘아! 우리어린이경주박물관학교(국립경주박물관)’를 참고했다. -어린이박물관학교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 동생 업고 들어와 수업 중에 울음소리도 들려 경주박물관학교 50년‘아! 우리어린이경주박물관학교(국립경주박물관)’에서 경주문화원 김윤근 원장(경주박물관학교 1기)은 ‘경주박물관학교 50주년을 회고하며’ 라는 글을 썼다. ‘이 학교를 떠올리면 걸어 온 지난날이 넉넉한 조건이 아니고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며 이어온 길이라 더욱 값지고 빛이 난다. 개교한 1954년은 한국 전쟁이 일어난 4년 뒤라 나라 사정이 매우 어려웠고 살기가 바빠서 문화재에 대한 가치를 따지고 보호할 겨를이 없었다’ ‘1954년 10월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의 문을 열었다. 박물관장실의 의자들, 수업에 지장되는 도구들을 모두 바깥으로 옮기고 긴 의자 열 개를 들여놓고 역사적인 수업이 시작되었으니 그날이 10월10일이었다. 특히 문화재 미술 공부는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환등기를 빌려다 시청각 교육을 겸했으니 그 노력과 정성은 가히 놀랄만했다. 경주에서 한 대 박에 없는 환등기에 비출 슬라이드는 박물관 전속 사진사였던 박영도 님이 맡아 여기저기 다니면서 실물도 찍고 책도 복사하기도 하고 마운트는 종이 상자나 마분지를 오려 두 겹 사이를 벌려 사진을 넣고 풀로 붙여 사용했다. 그때 이미 우리들은 박물관학교에서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 다시 들을 수 있었고 책에서나 말로만 듣던 유명한 음악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박물관학교는 오늘날 교육이 가장 강조하는 열린 학습, 자율학습, 시청각교재를 통한 흥미롭고 신명나는 수업을 했던 것이다. 충실한 강의로 우리를 사로잡아 울렸다 웃겼다 하였으니 얼마나 선지자였던가? 더구나 높은 어른들이 코흘리개 가르친다고 사무실 집기를 모두 들어내고 수업을 준비하고 수업이 끝나 원상태로 돌리는 일은 얼마나 번거로웠을까?’ ‘이렇게 시작된 어린이박물관학교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당시 집이나 학교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시청각 교재인 환등기로 수업을 하고 종종 영사기로 짧은 영화나 뉴스를 보여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영사기는 대구까지 출장가서 어렵게 빌려와 사용했다고 한다. 점점 박물관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늘어나 일찍 오지 않으면 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또 동생을 업고 들어와 수업 중에 울음소리도 들리고 문을 닫고 안막을 치고 환등기로 수업하는 날은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기도 했다. 수업을 마치고는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정원에 있는 유물을 그리고 흙으로 빚어보기도 했다. 이렇게 공부하던 이들이 자라 훗날, 금속명장 김인태 님이 되고 주종의 일인자인 오해익 님, 조각가 김 번 님, 화가 조필제 님, 박진수 님이 되었다’ -이론 수업도 중요하지만 현장 학습이 얼마나 값진 생명있는 산교육인가를 증명해 ‘개교 4년째를 맞아 좀 더 활발하게 움직여 보려 할 때 진홍섭 관장님이 문득 미국 순회전시건으로 떠나고 당분간 박물관 학교는 휴교하게 된다. 머리를 숙이고 기운없이 돌아가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측은해 보였다. 그후부터 박물관은 조용했지만 윤경렬 선생님의 집은 시끌벅적했다. 그동안 문화재 공부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이 선생님 댁으로 몰려가 현지답사를 하면서 공부하자고 졸랐다. 그 후 일요일이 되면 불상이 있는 곳으로, 탑이 있는 곳으로 찾아다니며 그려도보고 실측도 하는 현장 공부를 했으니 교가에 ‘하늘도 내 교실, 땅도 내 교실’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3년간 계속된 현장 학습은 문화재 공부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때 공부한 이들은 훗날 문화재 분야 전문가가 되고 교사가 되어 이론 수업도 중요하지만 현장 학습이 얼마나 값진 생명있는 산교육인가를 증명해 주었다. 한편, 경주어린이향토학교로 교명을 바꿨던 당시, 1956년에 창립된 신라문화동인회와의 만남은 향토문화를 공부하는 목표가 공통인 점도 중요했지만 윤경렬 선생이 어린이향토학교 교장이면서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이 모임의 회원들이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수업까지 맡으면서 운영을 적극 도운 김태중, 김주식, 최영식, 김인태, 최용주, 손윤락, 윤자야 님들이 있었고 박물관 학교 1기 또래들이 대학생이 되어 신라문화동인회를 도와 향토학교를 뒷바라지를 한 이들로는 이철수, 김광해, 김윤근(필자) 등이 있었다. 이때 초중고등학생들로서 배우며 도운 이들이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박방룡 님이고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함순섭 님, 신라문화학교 교장 이홍렬 님, 영남대학교박물관 학예사인 김대환 등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있다’ -경주박물관학교 교본 1권, 2권, 지금까지도 경주 문화재 공부에 가장 유익한 책으로 평가 ‘1972년 경주어린이학교 뒷받침회를 만들어 향토학교 교본이 만들어진다. 당시 이 교본은 문화재 안내서가 없던 시절에 문화재의 아름다운 가치를 알리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교재 1집은 김태중 선생님이 집필한 토기편이고 2집부터 28집까지는 윤경렬 선생이 집필하셨는데 내용은 성덕대왕신종, 불상, 불국사 석굴암, 십이지신상 이야기, 신라 왕릉 이야기, 금관, 임해전터와 안압지, 기와 무늬 이야기, 신라의 궁성 등이었는데 쉽고 재밌게 유익해 회원 수대로 프린트 판을 내고 나면 책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성화가 대단했다. 이 교재는 다시 ‘경주박물관학교 교본 1권, 2권으로 간행됐는데 지금까지도 이 책은 경주 문화재 공부에 가장 유익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당시 어린이 날을 맞아 필자는 우리 향토학교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 윤경렬 선생께 건의해 ‘제1회 경주 어린이 꿈 잔치’가 시립도서관 시청각 실에서 열렸다’ ‘숱한 행사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을 기쁘게하려는 일념으로 찾아가면 어려워하지 않고 선뜻 도와준 많은 얼굴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고마움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오늘도 그 전통을 이어 동인회 회원, 아우들이 봉사하는 모습을 볼 때, 만사를 제쳐두고 놀이지도를 하는 선생님을 볼 때, 박물관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볼 때 우리경주박물관 학교의 미래는 무한히 밝다는 생각을 한다’ -“병아리들처럼 담 아래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한 사람을 위해 수업을 안 할 수 없었다” 국성하 (독립기념관 학예연구사)의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연구’에서는 ‘박물관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수학과 영어가 아닌 우리 문화였다. 그것도 유물을 보면서 설명을 들으면서, 슬라이드를 보면서, 답사를 하면서, 때로는 연극발표와 전시회를 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배우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기억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윤경렬이다. 어린이박물관학교를 진홍섭 관장과 함께 만든 이다. 선생처럼 45년을 한결같이 박물관학교에 헌신한 사람은 없었다. 그 헌신 때문에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가 유지될 수 있었다. 윤경렬은 함경도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개성에 있을 때 고유섭 개성박물관장으로부터 들었던 ‘우리 것을 찾으라’는 말 때문에 1949년 경주에 오게 되었다. 신라인의 숨결이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을 찾기 위해 남산을 수없이 올랐으며 발로 밟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경주 남산의 답사기 ‘겨레의 땅 부처님 땅’을 저술한다. 무엇보다도 그가 평생 가꿔 온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는 아직도 경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1997년 여든이 넘은 때에 어린이 전통예술 실기대회를 심사하는 모습은 얼마나 오랫동안 박물관학교와 그 안에 어린이들에게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30여 년간을 박물관에 빠진 일이 없었다. 눈보라 치고 찬바람 부는 날 누가 나왔으려니 하면서 나가보면 한 두 사람은 꼭 와 있다. 병아리들처럼 담 아래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한 사람을 위해 수업을 안 할 수 없었다. 어린이들과의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어린이들과 사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박물관학교 덕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경주가 굉장히 앞서간 박물관 교육 활동을 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2004년 10월, 경주박물관학교 50주년 기념 대담회에서 이난영 제3대 경주박물관학교 교장은 “일본의 릿교 대학의‘Mouseion’이라는 잡지에 우리 박물관을 소개하면서 특히, 경주박물관에는 전쟁 중에 싹튼 ‘어린이박물관학교’가 있다고 밝혔어요. 경주가 굉장히 앞서간 박물관 교육 활동을 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라고 했다. 진홍섭 초대 박물관학교 교장은 “경주박물관학교 그동안의 역사는 100년, 200년 후를 돌아볼 수 있는 기록을 남기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존을 하는 노력이 앞으로도 계속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주박물관은 앞으로 영구히 계속되겠지만 공식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그런 길을 마련해서 어떤 박해와 천재지변이 있더라도 보존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고 했다. 당시 유병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현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은 “박물관학교가 오랜역사를 지녔음에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진 자료뿐만 아니라 대담 자료도 잘 모아 두었다가 외부에 알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학문적으로도 조명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겨레의 고운얼 길러준 뿌리 이어내리 이천년 거룩한 땅에/ 움트는 새싹이 자라나는 곳 아~우리경주박물관학교/ 하늘도 내 교실 땅도 내 교실 맑고 푸른 하늘에 뻗쳐라 높이/ 꽃 피울 새싹들이 자라나는곳 아~우리경주박물관학교//’ -경주박물관학교 교가 전문. 경주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가지는 또 다른 특별한 기억이 하나 있다. 바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다. 1954년 개교시 고분속에서 뛰어 놀 수밖에 없던 당시로서는 박물관에서 학교를 연다는 것이 생소한 일이었지만 많은 학생들은 박물관으로 향했다. 놀이터였던 경주 시내 고분과 유적들이 배움의 공간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던 것. 우리 문화가 사방에 가득한 경주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문화적 감수성의 토양이 되었을텐데 이러한 배움의 환경을 보다 조직적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 바로 어린이박물관학교였다. 이번호에서는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태동과 연혁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개교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다음호에서는 이 학교가 배출한 동문이야기와 초기 헌신했던 이들을 보다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또 에피소드들과 어린이박물관학교의 발전 방향 등을 자문과 자료를 토대로 구성할 예정이다. 이 기사는 제1회 수료생 김윤근 경주문화원 원장의 자문과 경주박물관학교 50년‘ 아! 우리어린이경주박물관학교(국립경주박물관)’를 참고했다. -박물관은 놀이터 15년 전 유네스코에서는 전 세계박물관 중 사회교육 부문,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조상의 유물과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뿌리의식을 가지게 하는 교육으로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칭찬했다. 64년이라는 역사를 지닌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잘 가꾸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지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문을 열다 문을 연 1954년은 6.25전쟁을 막 치룬 뒤라 나라사정이 무척 어려웠고 힘들었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보호할 여유가 없어 심한 훼손과 도굴은 물론, 해외로 유출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지자들이 순수한 어린이들에게 소중함을 가르쳐 보호하고 지킬 힘을 기르기 위해 유례가 없는 학교 밖의 학교 어린이박물관학교를 개교한다. 숱한 역경 속에서도 꿈나무를 키우고 신라의 넋이 담긴 경주를 자손대대로 물려주려는 헌신과 봉사가 있었기에 그 출발이 가능했다. 1954년 10월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서는 경주어린이들에게 우리문화재의 참뜻을 바르게 알리고 조상들의 얼이 담긴 소중한 문화재를 보호하고 새로운 문화 창조의 지혜를 갖도록 하기 위해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의 문을 열었다. 경주박물관학교는 박물관의 발전과 우리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조직된‘목요회’의 구성원인 진홍섭 관장, 이승을 선생, 박일훈 선생, 윤경렬 선생 등 네 사람이 주축이 돼 발족됐다. 1954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 경주분관에서 당시 진홍섭 관장을 초대 교장으로 추대하고 매주 일요일 관장실을 수업 장소로 제공했다. 목재상을 하던 이승을 선생이 나무의자 10개를 손수 만들어 제공했고, 윤경렬 선생은 아이들 모집 포스터를 그려 곳곳에 부쳤다. 서양화가 이기섭 선생은 출석부와 일지를 기록했다. 수업은 당시 경주에 한 대 밖에 없던 환등기와 영사기를 이용해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강의와 구전동화로 진행했다. 박일훈 학예사와 사진사 박영도 선생도 도왔다. 윤경렬 선생의 수업 진행으로 박물관사무실에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가 개교된 것이다. -‘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며 돈을 받지 않으며, 어린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대말로 대한다’ 어린이박물관학교 기본 방침으로는 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며(자유로움), 어떤 명목이든 돈을 받지 않으며(베푸는 정신), 이들이 자라 나라에 큰 일꾼이 되므로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대말로 대한다(예절교육실천)였다. 그리고 영상자료를 통한 시청각교육을 주로하고 답사를 통한 현장학습을 중요시 하며, 매주 토요일 두시간 공부하는 것을 기본으로 정하고 답사는 종일 진행했다. 교육 내용은 어려운 전문이론과 말보다는 시청각교육으로 현장에서 직접보고 만져보는 답사를 주로하고 문화재, 역사교육 외에도 음악과 놀이, 전통문화(화전놀이) 등도 가르쳐 우리것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어린이박물관학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도록 이어오고 있는 사회교육의 장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학교가 열리지만 결석을 한다 하더라도 문제 삼지 않을뿐더러 시험이 없는 학교이자 수업료가 없는 학교다. 초창기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변변치 못한 교실과 기자재는 물론, 하늘과 땅이 교실이 된 유적지 현장 수업을 이어오던 시절, 도서관으로, 다시 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그때마다 학교의 이름을 바꿔 달았던 아스라한 추억은 64년의 박물관학교 역사에 고스란히 담겼다. 역경을 견디며 60여 년 동안 외길을 걸으면서 길러낸 졸업생은 어느 명문대 고고,사학과보다도 알뜰한 제자들을 길러내어 문화유산연구와 보호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국립박물관장 두 명, 학예관, 학예사, 교수, 화가, 토기, 금속공예명장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으로 성장해 국내외 곳곳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4천명이 훨씬 넘는 졸업생들은 사회 각계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으며 초창기에 다녔던 코흘리개 학생들은 벌써 고희를 넘긴 나이가 됐다. 곧 자신의 예술활동의 밑거름이 됐다고 할때는 이 학교 설립의 의미가 고스란히 배어나는 것이다. -64년간 걸어온 발자취...‘하늘도 내교실 땅도 내교실’ 1955년 10월, 윤경렬 작사, 윤이상 작곡의 교가를 제정하고 1956년 8월, 금관고로 수업장소를 이전했다. 당시 금관고의 유물은 미국으로 피난가있던 상태로 진열장 한쪽으로 몰아놓고 수업을 진행했다. 뉴스영화를 상영하고 ‘자유의 벗’,‘자유세계’를 교재로 하고 종이를 압축한 책받침 등을 선물로 나눠주었다. 1957년 10월 경주읍사무소에서 개교3주년 기념식과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열린 어린이 문화재 작품전으로 작품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 순수한 작품전시회였다. 1962년 8월 경주시립도서관장 김종준의 배려로 도서관시청각실에서‘경주어린이향토학교’로 이름을 바꿔 수업을 재개했다. 1972년 5월 경주향토학교뒷받침회를 조직해 신라문화동인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해 석기, 토기,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 이야기등 30여 종의 교본이 발행됐다. 1975년 12월, 현재의 부지인 인왕동 신축 국립경주박물관에서 17년 만에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로 다시 힘찬 시작 을 한다. 1982년 11월, 중고,일반부 2년 과정을 신설해 경주박물관학교로 개명되고 1부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2부는 고등부 및 일반부를 대상으로 삼국유사 강독 특강 수업을 실시했다. 1984년 11월, 개교 30주년기념큰잔치를 통해 ‘제1회 우리문화재 만들고 그리기대회’를 개최후 학예발표회와 작품전시회 등의 종합예술제가 성대하게 열렸다.‘새얼’ 교지,‘경주고적이야기’가 발간되고 무료 배부한다. 1986년 이난영 관장은 경주박물관학교를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체제로 바꾼다. 이때부터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이 교장을 역임하게 된다. 1987년 신입생 2500여 명이 몰려와 학사운영에 큰 문제점이 야기할 만큼 붐볐다(5부제와 야외수업). 1994년 개교 40주년 기념식과 특별전 ‘하늘도 내교실 땅도 내교실’을 개최했으며 1998년 문화관광부로부터 한국문화학교로 지정, 2004년 개교 50주년 기념식과 전시회 ‘아! 우리어린이경주박물관학교’를 개최했다. 2014년 개교 60주년 기념식과 특별전 ‘학교 밖의 학교, 박물관’을 개최했으며 2017년 올해, 제64기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입학식을 진행했다. 제64기 경주어린이박물관 학교는 개교정신을 계승하고 어린이들이 우리 문화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경주와 신라의 역사 문화를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론 및 체험 활동을 과정 내 균형있게 편성하고 있다. 한편, 초대 진홍섭 교장을 시작으로 2대 윤경렬(1959-1986), 3대 이난영(1986-1993), 4대 지건길(1993-1996), 5대 강우방(1997-2000), 6대 박영복(2000-2004), 7대 김성구(2004-2007), 8대 이영훈(2007-2016), 2016년 5월, 제9대 교장으로 유병하 관장이 재직중이다. 김윤근 경주문화원 원장은 2014년 60주년 기념식을 되돌아보면서 “고 김종준, 김주식, 이철수, 김태중 선생을 비롯해 우병익, 조필제 선생 등 아름다운 역사의 길에는 동인회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 수년간 기획한 60년의 희로애락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장도 감동적이었지만 백발이 성성한 70대 선배와 10대 후배 어린이들 3대가 어우러져 부르는 교가와 경주어린이노래는 참석자 모두에게 감동으로 남았다”고 했다. 김 원장은 “개교 당시 헐벗고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재밌고 흥미를 유발했던 수업을 진행했다. 60년 전 그런 방식의 교육이 열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입체적이면서도 현장답사체험을 할 수 있는 교육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당시의 일반적인 교육 환경이었다”고 회고했다.
‘경주란 데는 산에서나 물에서나 들에서나 수풀에서나, 그리고 언제 어디서고 여러분들이 진실로 구하고 원한다면 시와 소설과 그림과 음악이 물 솟듯 푹푹 솟아나는 고장입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김동리는 단편소설 ‘선도산’에서 신라문화제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격려사를 말하는 장면 에서 이렇게 경주를 찬양했다. 동리 선생과 목월 선생은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이자 두 선생 모두 경주 출신으로 한국 문단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두 문인은 경주를 한국 사상과 예술의 발상지로 여기고 사랑했다. 두 문인 중 이번호에서는 먼저, 한국의 현대소설가들 가운데서 전통의 세계, 종교의 세계, 민속의 세계에 가장 깊이 관심을 기울인 작가로 평가되고 있는 김동리 선생(이하 김동리라고 쓰고 존칭은 생략한다)의 작품들 중에서 경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 위주로 자료를 모아 보았다. ‘김동리(1913년~1995년, 본명은 김시종, 동리는 필명)의 작가적 생애는 소설가, 시인, 수필가, 평론가로서 남겨 놓은 자취가 너무나 우뚝해 우리 한국사뿐만 아니라 노벨 문학상에 추천될 정도로 문학적 업적이 높다. 그러므로 경주의 소설 문학은 그와 더불어 영원한 향기를 뿜어낼 것이다’ -‘경주의 소설문학(2000년, 장윤익, 김선학 공저)’에서의 표현처럼 김동리의 생애를 비롯해 문학적 성취와 업적은 쉽게 언급하기 어려울만큼 훌륭하고 방대하다. 그래서 작품의 배경지에 한정해 ‘경주’라는 장소성에 주목해 보았다. 다음호에선 박목월 선생의 작품 중 경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장윤익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장의 자문을 바탕으로 하고 몇 권의 도서출판물에서 발췌하고 인용해 본 기사를 구성해 보았다. -“경주의 산과 들은 어디서나 예술과 문화를 뿜어내는 듯 했습니다” 동리는 단편소설 ‘선도산’에서 ‘손일봉 선생이 그림을 그리고, 김만술 선생이 조각을 하고 김준극 선생이 첼로를 켜고 박목월 선생이 시를 쓰고 이기현 선생의 ‘태’가 조광지에 당선되고 김석수 선생의 꽁트 ‘도토리’가 중앙일보에 당선되고 나의 ‘화랑의 후예’, ‘산화’ 등이 연이어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당선되고 할 무렵 경주의 산과 들은 어디서나 예술과 문화를 뿜어내는 듯 했습니다. 여러분, 그 산과 들은 저기 그대로 있습니다. 흙을 움켜쥐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원하는 시와 소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고 썼다. ‘나를 찾아서(김동리 자전 에세이, 1997년) -다시 고향에 가보니’ 편에서는 ‘1986년에 나는 다시 고향을 다녀왔다. 옛날 내가 태어난 집을 찾아가보니 집 모양은 달라졌어도 뜰의 흙이 그대로 있었다. 예기청수를 찾아가 보았다. 물빛은 옛날 그대로였다. 경주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예기소 하나뿐이라고 동행을 한 시인 서영수 씨가 말했다. 나의 황토기의 현장을 찾아 서출지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를 더 나가보았지만 해방 후의 식목정책으로 붉은 산, 붉은 흙은 찾을 길이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경주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할 만큼 경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 작품이 문학의 주류 이뤄 ‘김동리의 작가적 생애는 경주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할 만큼 경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 작품이 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무녀도, 황토기, 선도산, 허들풀레, 유혼설, 을화, 까치소리, 바위 등과 역사소설 회소곡, 기파랑, 최치원, 수로 부인, 우륵, 장보고, 원왕생가, 대왕암, 솔거 등 30여 편이 경주와 관련된 작품이다. 단편소설 ‘선도산’에서는 경주의 여러 장소들의 이름들이 줄을 잇는다. 오릉, 금오산, 선도산을 비롯해 미추왕릉, 계림, 반월성, 첨성대, 안압지, 황룡사지, 남산집 이라는 조용한 물회집 식당, 경주호텔, 경주서 제일가는 진한여관 등이 그것이다’ ‘김동리 문학의 핵심이 되고 있는 한국의 전통적인 무속 세계와 기독교, 불교 등의 인간의 운명과 관련된 종교적 세계도 경주를 토대로 해서 작품화된 것이다. 고향 경주에서 문우들과 사귄 인생역전도 자신의 문학 수업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경주 예술의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것을 소설 선도산에서 밝히고 있다’ -‘경주의 소설문학(2000년, 장윤익, 김선학 공저)’ 중에서. -‘예기소’는 동리에게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신비성과 신성사를 인지하게 해 준 공간 ‘김동리 삶과 문학(1996년, 김정숙 저)’에서는 ‘소설 ‘바위’, ‘무녀도’, ‘까치소리’, ‘우물 속의 얼굴’의 배경지는 죽음에의 입사 장소로 성건동 생가 옆의 징검다리다. 무녀도에서 모화의 굿이 열리던 백사장 위 쪽은 무당촌이었던 성건동이다. 까치소리의 배경이 된 부엉뜸 마을, 을화의 배경마을인 현곡면 나원마을이며 황토기의 현장지는 경주 남산, 예기소 전경은 무녀도의 배경과 도깨비벌 ‘유혼설’의 배경이 된다. 예기소는 동리에게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신비성과 신성사를 인지하게 해 주는 공간으로서 중요한 공간이 된다. 신성함은 죽음과 접하면서 그 신성성을 깨닫게 하는데 그러므로 예기소는 무녀도를 창작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성건동의 분위기는 동리소설속의 신화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건동은 ‘무녀도’, ‘소년’, ‘허들풀레(서문 거리, 경주성의 서문이 있던 곳으로 쓰러져가는 오막 한 채와 개천 등)’, ‘을화’, ‘만자동경’, ‘까치소리’ 등의 배경이 될 만큼 현재와 과거,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동리문학의 신화적 지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성건동에는 무녀도의 배경으로 나오는 무당집과 같은 음침한 분위기가 무수히 많이 널려 있었다’고 쓰고 있다. -“민족정서 기반으로 샤머니즘, 기독교, 불교, 유교를 융합해 세계적인 것으로 승화한 동리의 문학” 문학평론가이자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장윤익 학장은 김동리의 문학세계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1913년 경주시 성건동 186번지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을 잡고 서천의 ‘예기청소’에서 보던 굿의 무속적 분위기에 취했던 소년 ‘창귀(昌貴)’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경주제일교회 유치원 문을 두드린다. 제일교회가 운영하는 초등학교 과정 계남학교를 졸업한 동리는 미션스쿨인 계성중학교와 경신고보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기독교의 종교 분위기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경주제일교회 권사였던 어머니를 따라간 경주제일교회는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을화’, ‘사반의 십자가’, ‘부활’을 낳은 모태가 된 곳이다. 김동리와 경주제일교회는 끊어질 수 없는 끈끈한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샤머니즘, 불교, 기독교의 정신세계를 통해서 인간의 구경(究竟,마지막에 이르는 것)적인 생명을 탐구하고 휴머니즘을 작품 창작의 토대로 삼은 그의 창작활동은 경주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동리의 작품 소재와 정서에서 우리들은 민족정신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1982년 무녀도를 개작한 그의 작품 ‘을화’가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에서 10위권 안에 올라 세계인들에게 환영받은 것은 우리의 토착적인 정서를 인류의 보편성으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족정서를 기반으로 샤머니즘, 기독교, 불교, 유교를 융합하여 세계적인 것으로 승화한 동리의 문학은 인간의 운명적인 삶의 양상과 구경적인 생명의 추구를 본격문학으로 확립하고 있다. 샤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무녀도’, ‘당고개 무당’, ‘을화’, ‘유혼설’ 등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간의 운명적 삶의 공간을 토착정서를 배경으로 창작을 시도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감동을 준다. ‘사반의 십자가’, ‘목공요셉’, ‘부활’, ‘마리아 회태’ 등은 구원을 중심으로 천상적 세계관과 지상적 세계관의 대립을 다룬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불교 계통의 작품 ‘등신불’, ‘불화’, ‘눈 오는 오후’ 등은 한국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인간의 운명과 인연을 소설로 표출한 작품들이다. 유교 계통의 작품으로는 ‘용’, ‘춘추’ 등이 있다. 김동리의 문학세계는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해서 인간의 운명과 구경적인 생명을 다룬 민족정신의 세계화라는 점에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 -한국사상과 예술의 고향, ‘경주’에서 목월 선생과 평생을 가장 친한 친구로 우정 이어 장 학장은 “김동리는 경주를 한국 사상과 예술의 발상지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 대다수는 경주를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그의 백형(伯兄) 범부(凡父) 김정설의 신인간주의(Neohumanism) 및 동방학 이론을 자신의 ‘제3휴머니즘’으로 받아들였다”면서 “자연과 일체가 되는 우리의 고유 신앙 샤머니즘과 신라의 화백제도, 화랑정신은 동학의 인내천과 동방사상의 기반이 된다”고 했다. 한편, 다음호에 다룰 목월 선생과의 인연에 대해서 장 학장은 “대구 계성중학교 선후배인 김동리와 박목월은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문학수업 동반자로서 우정을 나눈 친구다. 동리는 경신학교 졸업 직전 경주에 내려왔고, 목월은 계성중학교(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주금융조합 서기로 취직해 경주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소설가를 지망한 김동리·이기현·김석주 시인을 지망한 박목월 등이 거의 매일 만나 문학공부를 함께 하며 우정을 쌓았다. 그 후 김동리와 박목월은 소설가와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해 한국 문단의 거봉으로 우뚝 솟아 있다. 광복 후, 두 분은 한국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해 계급문학을 표방한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서 토착적인 민족정서와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문학의 길을 함께 걸어오면서 평생을 가장 친한 친구로 우정을 이어온 것이다”고 전했다.
그가 만든 복제품 중에는 국보급 유물이 많다. 전국 각 국립박물관, 전시관의 유물이 그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은 진품과 구별하기 힘들다는 평을 받을 만큼 정교하다. 그는 바로 금속유물 복제 최고전문가인 ‘삼선방’ 김진배(56) 대표다. 철저한 장인 정신으로 35년째 금속유물 복제에 정통한 김 대표는 진정한 전문가이자 장인이다. 지난 7일, 경주시 하동 민속공예촌 내 작업장인 ‘삼선방’에서 만난 김진배 대표는 경주시에서 의뢰한 금관과 황남대총의 팔찌, 신라복식 중 허리띠 등을 의뢰받아 작업을 막 마쳤다고 했다. 유물들의 얼과 혼까지 재현시키고 있는 그의 손을 유심히 보았다. 남자의 손이라기 보다는 여자의 섬세하고 고운 손에 가까웠다. 그 손끝에서 고대의 걸작유물들은 또 하나의 소중한 유물로 재창조 되고 있었다. 경주가 자랑할만한 국보급 장인으로서 그가 경주에 있다는 것은 자랑스런 일이다. 그동안 묵묵하게 그의 일을 돕고 있는 부인 박정희 씨와 함께 운영하는 작업장에는 그가 만든 황남대총 출토 금관 복제품, 감은사지 출토 사리기, 백제금동대향로 등의 복제품이 그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천직으로 여기며 전력을 다해 30년 넘게 유물의 복제에만 전념한 그에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옛 신라 장인이 그랬을까? 신라인의 숨결과 솜씨를 그대로 오늘에 재현해내고 있는 그는 바로 신라인의 정체성이자 후예였다. -금속공예계 독보적인 존재였던 아버지이자 스승인 김인태 선생 명성 이어 작업에 정진 그를 설명할 때 그의 부친인 고(故) 김인태 선생을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김인태 선생은 금속공예명장(제91-5)으로, 국내는 물론 일본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금속공예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부친이 작고한 1993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부친의 빈 자리를 메꾸면서 작업에 정진해 그가 복원한 유물만도 1000점이 훨씬 넘는다. “어릴적부터 아버지의 작업을 봐왔고 자연스레 관심이 많아졌고 입문하게 됐지요. 신라문화동인회, 박물관 답사 등을 쫓아다니곤 했지요. 동국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것도 이의 확장이었고요” 그는 대학 1학년 때인 1982년부터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가며 유물 복원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었다. “선친 타계후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지금의 제 나이때 돌아가신거죠. 너무 갑자기 돌아가셔서 저로선 본격적인 작업에 서둘러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선친의 기술을 거의 전수 받았을 때였고요” -수많은 복제품, 전국 국립박물관에 소장전시중이며 진품인지 복제품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 그가 지금까지 복제한 유물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금관, 장신구(허리띠, 귀고리 등), 청동기, 철기, 기와 등 그가 제작한 수많은 복제품은 현재 전국의 박물관에 소장, 전시중이며 진품인지 복제품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실물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는 평을 얻고 있다. 1993년 국립부여박물관 무령왕관식 외 7종 복제를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 부부총 귀걸이(1999), 국립경주박물관 천마총 목관모형(2002), 국립부여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 제작과정 모형(2003), 국립민속박물관 황남대총 금관(2004),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전시유물 금동용두 등, 발해유물과 백제금동대향로(2005), 국립중앙박물관 요시노가리 특별전(2007),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황금유물 20점, 불교 조각(2010), 국립부여박물관 미륵사지 사리기(2011), 전북대학교 박물관 청동유물 동경 외 3종 복원복제(2011), 국립중앙박물관 성덕왕릉 십이지상 원숭이 상(2013), 구리 시청 쇠화덕 고구려 신발 제작(2016) 등 수많은 유물 복제품들이 전국의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어 선생의 진가가 발휘되고 있다. -한 작품당 사진만해도 수백 장 찍는 과정 통해 복제 할 수 있어, 섬세한 손길과 지난한 과정 끝에 완성 “수많은 문화재 유물을 복원했습니다. 그 작업 모두가 중요한 일이지만 굳이 손꼽으라면 2003년 백제금동대향로(국립부여박물관), 신라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금관(국보 제191호) 등의 작품 등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경우 이 작업만 약 10개월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문화재를 복제하기 위해선 일단 박물관에 가서 실측을 하고 여러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다. 대향로의 경우도 수백 장 사진을 찍는 과정을 통해 복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양도 모양이려니와 색채도 같아야 하므로 아주 작은 장식이라도 360도 돌아가면서 전체를 찍습니다. 하루 종일 한 작품에 대한 사진 작업만 해야 할 정도지요. 우리가 하는 작업은 창작이 아닌 그대로 똑같이 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실측과 사진을 비교하고 모형 떠 온 것을 바탕으로 분석하면서 복제 작업을 시작한다. 또, 황남대총금관의 관 부분은 다른 금관과 거의 유사하나 수식부 장식이 세 쌍으로 모두 6개여서 매우 화려한 장식을 자랑한다. 수식부 제작은 관보다 제작 기간이 더 오래 걸릴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손길이 가야한다고 했다. 수없이 두들기고 붙이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금관복제작업은 신라예술의 백미로 꼽히지만 화려한 외양만큼이나 정교하고 꼼꼼한 공정이 필요한 것. 또,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 의뢰로, 외국박물관 10여 곳에서 한국관 지원사업을 할 당시 황남대총 금관 10점, 허리띠 10점, 금동대향로 10점 등을 6개월간의 작업 끝에 완성했습니다”면서 그런 의뢰는 흔치 않는 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절대 대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성을 들여 최선을 다합니다” “똑같이 만들려고 노력해서인지 제 염원대로 나오는 편입니다. 제작중 흡족하지 않으면 중간에 다시 작업합니다. 부부총 귀걸이 등의 경우, 제작하던 것이 금일 경우엔 녹여서 다시 판으로 만듭니다” 부부총 귀걸이 한 쌍의 경우, 0.7㎜의 깨알 같은 금구슬만 하더라도 하나에 6000~7000알을 붙여야 한다. 누금 기법(가는 금줄이나 모래알 보다 작은 금알을 늘여 붙여서 물형을 만드는 정교한 세공기법)으로 완성하는데 단일 작업으로는 꼬박 두 달여 걸린다고 한다. 구슬을 꿰어 몸에 달아 장엄하는 영락 수식도 마찬 가지다. 그만큼 완벽을 기하고 정밀한 작업이라는 것. 섬세한 작업을 계속해야하는 그의 시력이 걱정되는 기자에게 “돋보기 낀지는 오래됐어요. 15㎝이내 거리를 두고 작업을 하는 일이 많다보니 자연히 2년에 한 번씩 도수가 올라가고 있어요(웃음)”라고 했다. “똑같이 만들어 얼핏 보면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아요. 저는 절대 대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몇 회 사용하고 마는 단순한 행사용이라도, 어떤 곳에 납품 하더라도 똑같이 정성을 들여 최선을 다합니다. 제가 흡족하지 않으면 밖으로 작품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고 하는 대목에서 철두철미한 장인 정신을 발견한다. -“지금까지의 작품들, 전시 공간 마련해 한 곳에서 전시해보고 싶은 것이 작은 꿈”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 유물까지 그가 작업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구리시청 아차산박물관에서 의뢰한 고구려 철제 유물 복제품은 모두 그가 한 작품들이다.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각각의 특징이 있지만 제가 경주에서 나고 살아선지, 금관을 비롯해 신라의 유물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신라유물들이 우수하고 위대합니다” 그의 유물 복원 기술과 복제품의 작품성은 수상 경력이 뒷받침해준다. 유물을 모티브로 해 팬던트, 목걸이 등의 창작품을 출품해 전국 공예품경진대회 특선, 전국 관광기념품 경진대회 장려상을 차지했다. 93∼2001년 경북도 공예품 경진대회, 관광기념품 경진대회에서 9년 연속 금상과 장려상 등을 수상하고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0 행사 공로를 인정받아 도지사 표창에 빛난다. 그런데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건이다. 그는 판금, 주물, 누금 등 유물 전체분야를 복제하고 있어 각 분야별로 지정되는 무형문화재 지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친을 이어 대한민국 ‘명장’ 지정이라도 적극적으로 서둘러 그의 진가가 배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년에 어떤 일들이 들어올지, 누가 어떤 일을 의뢰해올지는 모릅니다. 일년 계획을 세울 수가 없지요”라고 하는 그는 한가할 틈이 없을 만큼 수시로 전국 박물관 등지에서 의뢰가 들어온다고 했다. “손재주가 좋은 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이 일은 엉덩이가 질기지 못하면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웃음).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매우 힘들기는 하지만 보람도 크고요. 나중에 아이들이 원하면 전수하고 싶습니다” “전국의 박물관에서 제가 만든 복제복원품이 전시되고 있을때 보람을 느낍니다. 자부심도 생기고요. 앞으로는 지금까지 작업의 결과물인 작품을 전시 공간을 마련해 한 곳에서 전시해보고 싶은 것이 작은 꿈입니다. 언제가 될런지는 모르지만요. 유물들이 전국에 흩어져 전시돼 있는데 시대별 유물의 비교를 일목요연하게 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 보고 싶은 겁니다”
요즈음 경주에서 가장 핫 플레이스를 꼽으라면 단연 일명 ‘황리단길’이다. 이 길을 오고 싶어서 경주를 찾는 이가 많을 정도다. 서울의 경리단길에서 힌트를 얻어 황남동 임을 고려해 지어졌다는 ‘황리단길’이라는 별칭은 이미 자연스레 회자되고 있었다. 젊은 층들에서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이미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고 있는 거리였다.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황리단길은 봉황로를 마주하며 대릉원 주변 내남사거리 입구부터 시작돼 ‘황남관’ 사거리까지 이어진다. 황남동 중 이 일대는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으나 최근 2년여 사이에 서울 경리단길이 부럽지 않은 소위 ‘핫’한 카페와 식당과 책방 등이 경주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일부 가게들의 창가에 앉으면 대릉원이 마주 보이는 전경을 감상 할 수 있는 경주만의 또 다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거리다. 크로와상 전문점인 ‘기와양과점’, 커피집 ‘노 워즈’, ‘홍&리 식탁’, ‘페테 커피’, ‘데네브 베이커리’, 책방 ‘지나가다’, ‘황남 나가사키 카스테라’, 식당 ‘노르딕’ 등의 세련된 상호를 가진 가게들 사이사이로 40년째 오래된 양화점을 비롯해 중화반점, 인력전문공급업체, 다방, 전업사, 철물점, 의상실, 양장점, 장식점, 분식집, 세탁소, 함석집, 조경집, 공인중개사, ‘미륵보살’ 같은 점집도 혼재하고 있었다. 새롭게 생기고 있는 점포 대부분은 20대 후반에서 삼십대로 젊은 점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기존의 오래되고 허름한 건물의 틀을 그대로 살려 빈티지한 옛집의 느낌을 살리고 있었다. 개업을 예고하며 공사중인 곳도 몇 군데 보였다. 지난달 28일 찾은 이 거리는 3월1일 연휴를 앞두고 있어선지 평일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주말에만 몰리던 손님들이 날씨가 풀리면서 주중에도 자주 찾고 있다고 주민들이 귀띔해주면서 신생 가게들은 개업 한 지 2년이 채 안되는 가게들이 대부분인 시점이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남 나가사키 카스테라(김성일, 50)’, 황리단길 이름 짓고 이 길 부각시킨 주역 황리단길 이름도 짓고 이 길을 부각시킨 주역을 만났다. 2년 전에 입점하면서 변화의 물꼬를 튼 이는 황남 나가사키 카스테라 김성일 대표<인물사진>다. “이 길 만의 이름을 지을 필요성을 느꼈고 서울의 경리단길에서 힌트를 얻어 황남동 임을 고려해 황리단길로 별칭을 짓고 SNS에 올렸습니다. 기존 프리마켓에 참여했던 몇 명에게 이곳을 추천해 입점하게 했습니다. 그래선지 단 시간에 확산됐고 조성된 편이지요” 프리마켓에서 함께 활동했던 손수 제작을 하는 젊은층들이 중심이 돼 참신한 콘텐츠를 중심으로 더욱 빨리 확산 될 수 있었던 것. “이곳과 일직선상에 있는 봉황대 상가연합과도 연결하자는 제의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앉을 데가 없는 경우도 많은데 그 자체를 즐기고 있더라구요. 서울처럼 빌딩 숲 속 가게들이라면 아마도 이곳을 찾지 않겠죠. 다소 생경한 풍경을 자아내는 이곳을 찾고 찍은 사진들을 SNS에 올리며 즐거워하더군요” “전국 여러 지자체에서의 사례처럼 지나친 상업화는 젊은 창업주의 순수한 본질과 시도를 훼손시킵니다. 세련되고 최신식으로 단장된 가게들은 대도시에 널려 있잖습니까? 그래서 대형 프랜차이즈 등속은 이 거리 컨셉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황리단길에 몰리는 것이지요” “향후 문제점도 많습니다. 바로 건물 임대료가 자꾸 오르는 것인데, 젊은 청춘들이 입점해 도전하고 새로운 업종으로 창업 하는데 임대료가 오르면 결국은 이곳을 떠날 수 밖에 없겠죠. 임대료가 오르는 부분에 대해 경주시에서의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레 조성되고 있는 이 분위기를 이어가야 합니다” “점집이나 여러 옛 가게들이 혼재돼 있는 이곳을 오히려 재밌어하고 그런 것에 더욱 매력을 느낍니다. 가게들은 자연스럽게 시너지 효과를 유발하고 있고요. 상생하는 콘텐츠인 것이죠. 기존의 가게들이 자연적으로 도태돼 나가면 어쩔 수 없지만 굳이 배척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식당 ‘노르딕’ 황리단길 시작을 알리는 식당 ‘노르딕’은 지난해 2월 개업했다. 북유럽풍 인테리어를 지향하고 있는 노르딕의 주요 메뉴는 노르딕샐러드, 오픈샌드위치, 드립커피 등이다. -‘카페10(김정성, 29)’ 최근 실내를 재정비했다는 ‘카페10’은 이전에도 다크블랙이라는 커피집이었다. 5년이 넘은 가게로 이 거리에선 꽤 오래된 편이라고 한다. 무한 긍정에너지를 가진 김정성씨는 손님들이 서울 등 외지에서도 자주 이 가게를 찾는다고 했다. -브런치 카페 ‘꽃소년(이상현, 37)’ 꽃소년은 오픈한 지 한 달 여 됐다. 이 거리에 젊은 손님들이 많이 찾고 있는 추세를 파악하고 터미널도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등의 여러 입점 요소를 분석한 뒤, 이곳에 입점하게 됐다고 한다. 유난히 인문학적 감성이 돋보이는 가게다. 전체적 인테리어 컨셉은 북유럽풍 화이트 톤으로 아주 깔끔하다. 브런치, 샐러드, 토스트 등을 제공한다. -‘페테 커피(신호용, 32)’ 페테 커피는 지난해 10월 오픈했다. 사이드 메뉴 없이 커피만을 다룬다. 신호용 대표는 마주하고 있는 대릉원 내 야간 조명을 설치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사적의 경관을 야간에도 즐길 수 있기를 경주시에 바랐다. 또 이곳은 원래는 주차 단속이 없었던 지역인데 지금은 주차 단속을 심하게 한다며, 최근 관광객들이 이곳에 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 주차 문제와 교통 혼잡이 가장 큰 애로사항이라 전했다. -수제 ‘별봉 아이스크림(김강우, 52)’ 별봉 아이스크림은 지난해 11월 개업했다. 이곳은 이전에 점집이었다. 이 집은 인왕동에서 수제 별봉 아이스께끼를 팔다가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이곳의 아이스께끼는 경주 자체 수제 공장을 가지고 있다. 경주만의 브랜드를 지닌 아이스크림 가게다. 이웃한 ‘데네브 베이커리’ 역시 사장이 젊다. 평일에도 오후 4시경이면 빵이 다 팔린다. 입소문을 타고 시민들도 자주 빵을 사러 이곳까지 온다고 한다. -‘홍&리 식탁’ 이곳에서만 2년째 운영중인 ‘홍&리 식탁’은 황리단길의 주축으로 역할하고 있다.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 중 하나인 것. 이곳의 대표는 경주에서 젊은이들이 다니는 거리가 거의 없는 것에 비해, 이 길이 활성화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입점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메뉴가 바뀌면서 제철 식재료를 바꿔 가면서 공급한다. 식사 한 끼를 준비해도 분위기와 위생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다. 예쁜 그릇에 예쁜 곳에서의 식사 한 끼를 생각한다면 이곳을 찾게 될 것 같다. 제주도나 서울 등지에서 이곳을 찾아 일부러 오는 경우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깔끔함을 가장 큰 인테리어 요소로 잡고 있는 이곳은 꽃시장에 직접 가서 꽃을 구매해 디자인을 하고 있는 부지런을 피운다. 역시 가장 힘든 부분을 주차 문제로 꼽았다. 황리단 길 전체가 견인 지역이라 단속될 경우 손님에게 이중으로 부담을 끼치는 경향이 있어 더욱 심각하다면서 견인이나 스티커 등의 완화를 바랐다. -커피집 ‘노 워즈(정우재, 30)’ 노 워즈는 지난해 12월 개업했다. 커피만 다루는 이 집은 인테리어가 문자 그대로 ‘대박’이다. 건물 자체가 오래된 이 집을 인위적으로 손대지 않고 최대한 그대로 살려 빈티지한 매력으로 오히려 차별성을 띠고 있었다. 황리단길 중에서도 손님이 많기로 유명하다. -‘배리삼릉공원(이형진 대표)’ 선물가게 지난해 9월 오픈. 경주에서 수제 작업을 하는 이들의 작품을 구매해 다시 이곳에서 판매를 하는 제품이 주류다. 대부분 경주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 제품들이어서 반응이 매우 좋은 편이다. 아이디어가 빛나는 제품들은 ‘경주’라는 정체성도 확실하게 갖췄다. 향낭이나 경주가 담겨있는 사진이나 그림들이 담긴 엽서 등이 인기있는 품목들이다. -‘지나가다(채송화(33), 채송이(27))’ 책방 두 자매가 운영하고 있다. 상호처럼 지나가다 들르고 싶은 곳이 되고 있는 책방이다. ‘아직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아’ 가게를 차렸다는 자매는 독립 출판류 서적을 다루고 있었다. 독립 출판물들은 일반 대형 서점에선 찾을 수 없는 책들이고 이들을 구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발품을 팔고 있다. “경주에선 처음으로, 이런 서점이 없어요. 저희도 다른 지역을 찾아다니며 구해 책들을 팔고 있죠. 독립출판사란 1인1출판사라는 개념으로, 작가가 직접 글을 쓰고 인쇄업자에게 맡겨 소량으로 찍어내 출판하는 책입니다. 개인의 일기나 에세이 같은 결과물들이 많아서 쉽게 읽을 수 있는 편이고요. 최근 이런 작가들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박성환 작가, 이학준 작가 등 경주 출신 작가들도 있어요” 보배같은 책방이다. 소신있는 책방 주인들은 “책들이 팔리면 작가를 양성할 수 있는 밑거름이 돼 저희도 기쁩니다. 벌써 재입고 받은 책도 있어 저희도 놀라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거리는 홍등가 일명 ‘방석집’이라 불리는 가게들이 빠지고 나서 한때는 점집이 많이 생겼었다. 젊은 사람들은 유독 술집이 많은 이 거리를 걷는 것도 부끄러워 할 정도의 거리였다. 이 거리를 찾은 정혜윤, 박주은 씨는 대학생들이었다. “여기가 사실은 술집과 점집이 많아서 ‘뜬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지역이었어요. 이 길이 시발점이 돼 앞으로도 좋은 가게들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저도 가게를 하나 차리고 싶을 정도예요”라고 했다. 이곳은 대체로 월요일이 휴무였다. 이곳의 식당이나 커피집 등에서 주말이면 줄을 서는 풍경은 예사로 볼 수 있다. 계속해서 콘텐츠를 잘 유지하면서도 지역의 명소로 사랑받고 가꿔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고, 남에게 바보 취급이나 받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지요”, “바라는 것 없습니다. 계속해서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은 아직 많아요” 그는 차량도 없다. 사륜 구동오토바이가 그의 유일한 이동 수단이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1973년부터 지금까지 농사짓고, 꾸준하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미쳐있는 이가 있다. 굳건한 뿌리의식 없이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들을 묵묵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바로 ‘갬디미(내남면 이조1리)’에 살고있는 권순채(64) 시인이자 농부다. 선생은 평생 농사를 지으며 고향 향토사 연구를 거듭하면서 1985년부터 사라져가는 경주의 고유한 땅이름을 건져 내기로 한다. 또 경주 지방의 땅이름, 동제, 전설, 방언, 나무 등과 문화유적 등을 조사 연구하고 있다. 땅이름(지명) 관련책만 해도 시집까지 4권으로, 지금까지 총 9권의 책을 발간했다. 고속철도 기초노반 공사, 공공근로, 문화재 발굴현장 등에서 닥치는대로 일을 하고 돈을 마련해 책을 낸다. 순박하고 부지런하기 이를데없는 선생은 우리 고유어의 바탕인 진한 한글 사랑과도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토박이 땅이름’ 뿐만 아니라 ’토박이말’도 널리 수집하고 있기 때문. 지난 13일 선생댁을 찾았다. 서른 두 해째 수집하고 연구한 그 많은 지명과 유래와 의미를 주술처럼 외우며 속사포처럼 내뱉는 선생은 마치 ‘달인’ 같았다. 그간 기고를 하거나 자료로 모은 수백 권의 자료집에는 그간의 기록을 꼼꼼하게 정리해 두었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근거나 자료까지도 보관하고 있었다.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석하고 연구하고 정리하는데는 그의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역사문화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근저일 것으로 보였다. 선생은 심각한 고도 근시를 앓고 있었는데도 삶의 언저리에서 보배를 이끌어내기를 그치지 않는 이였다. -농사짓고 직장생활하며 32년간 직접 발로 찾아 쓰다 ‘마을마다 이름있고/ 산과 들/ 논과 밭/골과 등성이 마다/ 이름 있고 뜻있다.//중략// 봄이면/ 매화꽃 곱게 피는/ 향기로운 고향 마을/ 그리움에 아름다운 옛이름// 철마다 곱고 고운/ 꽃피워 주면/ 옛마을 이름따라 그리웁고/ 마을 사람들 땅이름에 정들고/ 바삐 살아 가는 요즈음/ 옛 정취 사라져도/ 이름만은 옛날 그대로다’ -권순채 시 ‘토박이 땅이름’ 중에서. 권순채 선생은 1953년 내남면 망성1리 둥굴 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조1리 갬디미 마을에 살면서 고향 마을인 망성1리 둥굴을 오가며 농사를 짓고 직장생활도 하고 있다. ‘토박이 땅이름’, ‘박 추억속의 그리움’, ‘토박이 마을 지킴이 나무와 숲’, ‘토박이 마을과 땅이름을 노래하다’, ‘한글과 농촌문화’, ‘농부와 수녀의 유별난 한글 사랑’, 시집 ‘풀꽃 나무들아’ 등을 발표하면서 최근엔 지난 32년간 직접 발로 찾아 쓴 ‘토박이 마을 땅이름과 나무(리얼북스 발행)’를 펴냈다. 이 책은 경주 지방의 땅이름, 동제, 전설, 방언, 나무 등을 조사 연구한 내용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토박이 마을의 땅이름과 오래된 나무를 찾아 떠난 30여 년의 기록으로 내남면과 황남동의 지명을 망라하는 것으로 사라져가는 땅이름을 찾아내기 위해 산천의 구석구석을 헤매며 발로 쓴 책이기도 하다. 전국의 땅이름을 모두 조사하고 싶었지만 그건 마음 뿐이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엄두도 못낼 일이어서 일부에 그친 것이 못내 아쉽다고 한다. -다섯가지 철학을 신념으로 삼고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각오” 선생이 하는 일을 보고 ‘그런 짓을 하고 다니면 돈이 생기나 명예를 얻나’ 이런 식의 핀잔을 받기 일쑤였고 때로는 수상한 사람으로 몰린 적도 하다했다. 또 땅이름의 유래를 성가시게 캐묻다가 말다툼을 벌인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무조건 참고 견디며 열심히 뛰어 다닌 결과가 오늘에 와서 책 한 권으로 묶여 나오지 않았는가’한다. 선생에게는 다섯가지 철학이 있다. ‘최고는 못되어도 최선을 다하자, 탑을 쌓되 아름답고도 단단하게 쌓아라, 선의로 남을 돕자,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배우자, 나를 시기하는 주위 사람들도 사랑하자’등 다섯가지 철학을 명심하면서 오늘도 땅이름뿐만 아니라 사라져가는 우리말과 전설, 나무 등 풍속과 풍습들도 조사 연구해 볼 것이라 다짐하고 있다. 그의 공로에 대한 시상은 거의 전무한 편이다. 관심도 부족하고 지원 한 푼 없음에도 지속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동력을 묻자 “제가 하지 않으면 후대는 할 수 없는 일이고 기록으로 남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해두지 않고 기록해 두지 않으면 묻히고 잊혀지고 말것이니까요” 라며 기록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선생은 이 많은 양의 원고도 직접 육필로 쓰고 아들 유름씨가 워드 작업을 해 보관해두고 있다. 선생은 남이 알아주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시대의 마을들의 땅이름을 조사하고 기록했다. “땅이름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기록을 할때는 먼저 그곳의 도시 이름이나 거기에 따른 땅이름을 적거나 말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나 문화,문명이라도 기록이 없으면 묻히고 잊혀지는 법이죠”라고 한다. 선생이 기록한 30여 년의 값진 기록은 소중한 우리문화 자산으로 ‘으뜸’이다. -한 동네 땅이름 조사하려면 10~20번 찾아가야 선생은 시간을 내어 한글 새소식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한글학회 (전)근화여자 중고등학교 교장 정의순(베드로) 수녀와 함께 식물채집을 하게 된다. 한글새소식에서 전국 지명에 대한 글을 자주 접하게 되고 우리 주변에도 많은 지명이 널려있음을 공감하게 되고 선생이 살고 있는 마을부터 조사하기 시작했고 이는 내남면 전체를 조사하는데 이른다. “수녀님과 학교 차로도 움직이고 시내 버스로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내남면, 선도동 등 본격적으로 조사한 것은 1987년부터입니다” 그렇게 조사한 결실을 처음 낸 것은 1993년 ‘토박이 땅이름’으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다. “주민들도 땅 이름에 대해 알지 뜻은 모릅니다. 자료 수집 후 연구를 해야 합니다. 조사를 하면서 동제까지 조사하게 됐습니다. 마을과 동제, 그리고 마을의 나무는 불가분의 관계지요. 한 동네를 조사하려면 골짜기 이름 논이름, 개울이름 등을 알기 위해 10~20번 찾아가야 합니다. 지명을 조사하다 보면 남의 족보까지도 다 알아야 합니다(웃음)” “땅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조사해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나무, 바위, 산, 지형, 풍수, 인물, 역사 등 이렇듯 지명을 연구하면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죠. 벼슬 이름까지 다 나온다니까요” 30여 년간 조사해도 모르던 것을 최근 알아낸 것이 있을 정도로 지명은 다양하다고 한다. 늘 조사를 하다가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무척 기쁘다는 그다. 또 신라문화동인회 회원으로 전설 조사나 경주문화유적 지도를 만들 때 협업하기도 했다. -에피소드...“죽다가 살아났죠” “에피소드 많았지요. 아들과 노거수 조사하러 가다가 안심1리 청도마을에서 막다른 길을 만나 오토바이가 낭떠러지에 쳐박혀 두 시간만에 건져 내고도 조사를 마친 일, 임도 관리인을 할 때, 일을 마치고 오토바이 브레이크를 잡지 않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오토바이 열쇠조차 잊어버린 일 등 그럴때는 죽다가 살아났죠” 망성, 비지1리, 박달2, 3, 4리, 화곡1,2리 등은 수도 없이 갔다고. 산이 많아야 지명이 많다고 한다. 산에는 골짜기가 많고 산등성이, 골짜기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주민들과 말다툼을 한 적도 있고 자꾸 캐묻는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지요. 하하. 지명 조사를 하다보면 순우리말과 방언과도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지요. 지명에는 순우리말이 있는가하면, 한자어와 순우리말의 조합, 순수한자 지명 등이 있습니다. ‘냄비, 둥굴, 도꼬불, 갬디미, 새들, 시루골, 너븐드리, 못골’ 등 순우리말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 편이고요” “하찮게 내뱉는 한마디 말속에 우리 역사와 얼과 정이 살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매년 조사를 하면서도 땅이름은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땅이름을 찾고 바로 잡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기록의 중요성을 통해 우리의 문화를 우리가 지키는데 앞장 설 것입니다” -“경주시 12개읍면, 11개동 지명까지 조사하고 싶습니다. 경주시 전설집도 집대성하고 싶어요” 선생은 차후에도 내남면의 전설, 유적, 문화재 등을 다룬 자료를 묶어 발간할 예정이다. ‘경주 전체 지명 조사는 누가 하던지 하긴 해야 한다’는 선생은 종신토록 경주시 전체 지명에 대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대락적으로도 조사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경주시 12개읍면, 11개동 지명까지 조사하고 싶지요. 또 노거수, 희귀목, 나무들의 경주 유입 연원 등을 조사해 집대성하고 싶습니다. 이들의 기초 자료는 대강 모아 둔 상태입니다. 경주시의 전설도 틈틈이 조사를 해 자료를 확보 해 둔 상태고요. 경주시 전설집은 반드시 조사를 마저 해야 합니다. 경주 방언도 연구해야 하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네요(웃음)” 발품을 팔아 수집한 자료들은 전문가에 제공한 적도 많다. “조사는 제가 하지만 연구는 학자가 해야 할 몫”이라고 하면서. 선생은 현재 전국농업기술자협회 통일회원(종신회원), 신라문화동인회 자료분과위원장, 남경주문화연구회 부회장,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 문학세계 수필 부문 신인상(등단), 2014년 자유문학 민조시 부문 3회 추천, 2016년 한국신춘문예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향토 사학자, 수필가, 시인, 농부로서 그는 제2회 전국농산물품평회 유기농산물부(콩:재래종) 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은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제’를 주선해 지내고 있다. 선생은 또, 세속오계를 실천한 신라 화랑 ‘귀산과 추항 숭모제’를 2011년부터 주체적으로 주관해 지내고 있다.
현재 경주의 문화재 복원 이전 상태인 1920년대말에서 1930년대 초, 경주 문화재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희귀 사진들이 최근 대거 공개됐다. 90년 전 경주문화재와 발굴현장이 담긴 이 사진들은 한국의 십이지상에 매료돼 파괴된 원원사 석탑 등을 재건하고 사진으로 남긴 ‘노세 우시조(能勢丑三, 1889~1954)’의 업적 덕으로, 실로 90년만에 그가 그토록 몰두하고 사랑했던 경주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은 노세 우시조라는 인물과 그 사진들이 사라질 위기에서 가치를 알아보고 보관해 온 일본 나라시 문화재 전문회사 ‘아스카엔(飛鳥園)’의 감동적인 스토리로 집약된다. 또 자칫 사장될뻔한 경주 유물사진들을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도 우리땅 경주에서 소개될 수 있도록 공을 들여온 경주학연구원(원장 박임관)의 공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도 간과되서는 안된다. 경주학연구원은 지난 2014년부터 아스카엔 측과 교섭한 끝에 지난해 12월 유리건판 3700여 장을 복제 촬영했다. 이중 700여 장이 한국과 관련한 사진과 실측도면이며, 그외 일본과 중국의 문화재 사진인 것으로 밝혀졌다. 아스카엔에서 미처 정리되지 못한채 보관해오던 1920년대말-30년대초의 한국 관련 문화재 유리건판 필름 700여 장을 재촬영해 공개한 것. 이 사진들은 일본인 건축·고고학자였던 노세 우시조가 일제강점기에 황복사터, 헌덕왕릉, 원원사터 등 경주 일대를 발굴 조사해 유리건판에 남긴 사진들로 정비되기 전의 유물들 실태를 확인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노세가 찍은 사진과 도면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세 우시조...신라 문화재만 보면 감격해서‘감격선생', 한국 십이지상 중요성 가장 먼저 파악하고 선구적 업적 남겨 노세 우시조는 1926년 경주 서봉총 금관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의 수행단 일원으로 경주와 첫 인연을 맺는다. 당시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교실 조수였던 그는 37세였다. 이 짧은 경주 방문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고 경주의 문화유산에 흠뻑 빠지게 된다. 특히 십이지신상에 매료돼 12지와 관련된 국내 유적지는 모조리 찾아다니며 1931년까지 당시의 경주 문화재와 발굴현장을 유리필름에 남겼다. 교토의 재력가 자제였던 그는 경주 방문을 계기로 조선의 문화유산에 매료돼 사비까지 털어 한동안 조선 각지를 뒤지고 연구하는 생활을 계속한다. 노세는 1926년 경주 방문 이래 1931년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조선을 찾아 유적 견학과 (발굴)조사, 그리고 문화재 복원을 벌인다. 고대학협회 이사장이자 동료 학자였던 쓰노다 분에이는 ‘고고학 교토학파’라는 글에서 “노세는 열정적으로 조선 고고학과 일본 석조공예사, 회화사를 연구했다. 특히 그는 신라 문화재만 보면 감격을 해서 당시 경주에서의 애칭이 ‘감격선생’으로 불렸다”고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된 사진 중에서는 특히, 1928~1931년 원원사 터에 완전히 붕괴된 채 벼랑 아래로 방치돼 있던 삼층석탑재를 수습하고 탑지를 발굴 조사한 뒤 이를 바탕으로 복원하는 전 과정을 도면과 함께 유리건판에 남겨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헌덕왕릉과 구정동 방형분, 진평왕릉, 흥덕왕릉, 경덕왕릉, 성덕왕릉, 김유신장군묘 등 신라 왕릉을 비롯해 개성 고려왕릉에 대한 조사도 병행해 사진으로 남겼다. 이번 사진자료 발굴은 지금처럼 정비·복원되기 이전의 신라 왕릉 옛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박 원장은 “노세 우시조가 원원사 석탑 복원에 얼마나 정열을 쏟아 부었는가는 그의 조사행적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주 황복사지 십이지상과 헌덕왕릉 십이지상을 수차례 걸쳐서 발굴조사를 했다. 원원사 십이지상과 관련해서 예천 개심사지 석탑, 구례 화엄사 서탑, 경주시 미방리 폐동곡사지, 암곡리 무장사지 등의 십이지상을 최초로 주목한 것도 노세 우시조였다”면서 “또한 한국 십이지상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그와 관련한 선구적 업적을 남긴 연구자였다”고 했다. -이 귀중한 사진들이 경주에 오기까지...“경주 관련 사진 대부분이므로 사진들의 고향인 경주로 와야한다” 그동안 미공개로 있던 사진 자료가 소개되기까지는 경상북도와 (사)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경주학연구원은 2014년 12월 아스카엔에 처음 방문했다. 2015년 4월경부터 구체적이면서 본격적으로 접촉해 한국관련 문화재 사진 2만5000여 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경비 마련이 시급했다. 2016년 연차적 사업으로 추진해 경북도에서 당장 급한 경비가 지원됐다. 경주학연구원이 경비를 구하기 위해 고심하던 과정에서, 모 국가기관에서 아스카엔 측에 교섭을 제의한다. 자칫 그 기관과 일이 진행될려는 찰나였다. 사실, 2009년경부터 이 사진의 소재가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2014년 이미 여러 민,관기관에서도 교섭제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경주학연구원은 아스카엔측에 간곡한 메시지를 전한다. “우린 경비도 부족하다. 그러나 열정 하나로 시작한다. 이 사진들을 현재 상태로 사장되게 할 순 없다. 빛을 보게 해야 한다. 경주 관련 사진이 대부분이므로 이 사진들의 고향인 경주에 와야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당시 유리건판 필름은 비용도 비쌀뿐더러 일본서 가져와서 찍고 다시 일본에 가져가는 등 상당히 공을 들인 작업이었기에 “그 분(노세 우시조)의 공을 충분히 현창하고 지금껏 보관해 온 아스카엔도 충분히 선양하겠다”고 설득했고 아스카엔측은 경주학연구원의 진정성을 인정해주었다. 한편, 이 일이 성사되기까지는 아스카엔과 인연이 있는 가종수 교수(일본 슈지츠대학)가 가교역할을 했다. 아스카엔은 100여 년 된 문화재 전문 사진회사로 창업자는 오가와 세이요(小川晴暘)라는 이다. 사진가 오가와 세이요는 1918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고, 1921년 문화재 전문 사진사로 아스카엔을 창사했다. 가종수 교수는 일본 유학중, 오가와 세이요의 큰 아들(당시 교수)에게 수제자로 눈에 띄었고 그 인연으로 아버지 오가와 세이요가 보관해 온 한국 문화재 사진들에 대해 듣게 된다. 가종수 교수는 한국의 고고학지에 오가와 세이요가 보관해 온 노세 우시조의 문화재 사진에 대해 발표한다. 노세우시조의 사진에는 원원사 사진들이 대거 있음도 알려진다. 2014년, 가종수 교수는 경주학연구원에도 소개해 박 원장 일행이 일본으로 가게 된다. 박 원장은 “지금의 결실이 있기까지는 작은 학술연구 모임의 힘으로는 경비도 그러려니와, 여러 과정적 난관으로 힘이 들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자존심과 사명감으로 이 일을 추진하게 됐다. 자칫 다른 기관으로 넘어갈 뻔했던 자료들을 다시 원위치시켜 승낙을 받는 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처음에는 인화해서 가져가라고 제의했으나 우리 손으로 직접 찍겠다고 주장했다. 저작권은 아스카엔측이 갖고 우리측은 보고서 작성과 전시를 하는 조건으로 2016년 11월 드디어 협상을 이끌어냈다”고 했다. 아스카엔 측의 카메라 점검 등을 위해 12월 연구원 팀이 다녀왔으며 노세 우시조의 사진 작업이 두 달여 소요될 것이라는 아스카엔의 예측을 나흘만에 완료시켜 그들을 놀라게 한다. 박 원장은 “현재,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 이외, 나머지 사진들도 우리와 같이 작업하자는 제의까지 받은 상황이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노세 우시조의 사진자료가 어떻게 아스카엔 측에 소장돼 있었을까? 일본 패전 후 많은 재산가가 경험한 것처럼 노세가의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한 것에 기인한다. 그 때 그가 심혈을 기울여서 촬영한 한국 문화재사진의 유리 건판도 유리가게 손에 건너가 녹여져 유리창으로 재생되려던 시기에 노세의 제자인 야스이 료조(전동지사대학교수)가 오가와 세이요에게 부탁해 아스카엔이 구매해 소장하게 된 것이다. -이번 성과의 의의, “1920년대말~1930년대 초 경주 문화재 상황 통해 복원과 정비에 대한 오류 바로 잡을 수 있어” 귀중한 협약을 이끌어 낸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그동안 국내 여러 기관에서 접촉을 시도했지만 우리가 협상에 성공해 결과치를 도출해 국내에 최초 소개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 있겠다”면서 “현재 경주의 문화재는 복원 정비를 해놓은 것들이 많다. 복원 이전에의 상태를 모르는 상황이 대부분으로, 사진 공개를 계기로 1920년대말에서 1930년대 초에 경주 문화재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 준다는 점”을 큰 성과로 꼽았다. 또 “우리가 몰랐던 실체에 대해 접근함으로써 고고학적, 고고미술학적 관련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물꼬를 틀수 있는 자료들이다. 당시 경주 문화재 현황들을 사진기록을 통해 복원과 정비에 대한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한 의의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의 경주 유적이 처한 상황을 입증하는 기록이기 때문에 향후 문화재 연구를 위해 보고서 발간 및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올 상반기에 열릴 전시를 즈음해서 그들을 초청하고 명예시민증 수여도 추진할 예정이다. 노세 우시조는 중국, 일본, 한국의 십이지신상에 대해서 처음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이다. 이에, 한중일 3국의 십이지신상에 대한 국제 세미나를 개최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아스카엔측과 잘 협상해서 나머지 사진자료들도 소개하고 싶은 것이 희망이다”면서 이는 보람된 일이자 경주인으로서 당연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고 전했다.
본지 지난호(1277호, 경주재발견127회)에서는 ‘35년간 경주말 수집하고 정리한 김주석 선생’편을 실었다. 이번호에서는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을 통해 경주말의 원형과 활용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김주석 선생이 발굴한 조선시대 마지막 해학가 ‘정만서’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 기사는 김주석 선생과의 인터뷰와 김주석 선생이 쓴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을 바탕으로 구성했다. 또 ‘경주말[語]의 보존과 활용’에서 ‘김주석 선생이 채록한 춘강 정만서 이야기’ 및 임종욱 문화평론가의 ‘김주석 선생의 경주말 수집·정리의 경과와 의의’에서도 인용했다. 춘강 정만서(1836~1896)는 개화기때 평생 야인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불의한 세상을 기지와 풍자와 골계로써 조롱하며 맞섰던 블랙 코미디언의 대가로서 봉이 김선달, 천하잡보 방학중과 같은 유형의 골계적(滑稽的) 인물이었다. 괴짜 중의 괴짜인 경주 사람으로 인생을 만화처럼 살다 간 위인이었다.
“저는 국어학자도, 방언 학자도 아닙니다. 재야 학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연구하고 수집해도 인정하지 않았고 관심 갖지 않았습니다” 경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가 ‘제1회 경주말 겨루기 한마당’과 ‘경주말(語)의 보존과 활용방안’ 학술발표회 및 출판기념식을 열면서 특별하게 조명된 이가 있었다. 바로 아무런 대가없이 경주말 수집을 35년간 지속적으로 해 온 김주석 선생(79)에 대한 헌사였다. 김주석 선생은 무언가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몰두하고 실천하는 것의 최종적 미학을 보여주는 이였다. 만시지탄이었지만 지난 20일, ‘경주말(語의 보존과 활용’ 출판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기도 용인에서 경주를 찾은 선생을 귀하게 만났다. 한 사람의 지지자도 없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고향 경주말의 파편들을 모아 오늘에서야 조명되기까지 인고의 길을 오롯하게 혼자 걸어온 선생의 ‘육성’은 너무나 생생했고 외경스러웠다. 각고의 노력으로 발로 뛰면서 귀중한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한 선생에겐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든 지난한 과정이 있었을 것이며, 그 근간에는 경주말에 대한 그의 끝없는 애정과 사명감이 진하게 배여 있었으리라. 화공학도로 자신의 천직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남는 시간을 모으고 짜내 경주말 수집에 힘쓴 선생의 업적은 이제야말로 구체적으로 재조명돼야하고 빛을 발해야 한다. -경주의 소중한 문화와 언어 유산을 물질적 보상이나 정신적지지 없는 가운데 주목하고 수집 실천 선생은 1938년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장승마을에서 태어났다. 경주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 졸업했다. 이후 한화그룹에 입사해 에너지 산업과 화학 공업 분야에서 평생을 헌신했다. 한국화약 상무와 계열사인 경인에너지 상무를 거쳤다. 지금은 경기도 용인시에서 살고 있다. 김주석 선생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35여 년 전부터 발품을 팔아가면서 고향에 대한 애향심과 고향 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오래 전부터 경주말에서 많이 쓰이는 방언이나 어휘들, 나아가 지역에서 즐겨 쓰였던 속담 등 소중한 문화와 언어 유산들의 현황을 어떤 물질적 보상이나 정신적 지지가 없는 가운데 주목했고 수집을 실천했다. 마냥 수집하는 일에만 매달리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선생은 우선 중간보고서 격으로, 영남대 최명옥 교수와 함께 ‘경주 속담·말 사전((최명옥 공편저, 2001년)’과 ‘경주지역어 텍스트-1(역시 공편저, 2007년)’ 등을 편찬해 세상에 경주말의 현황과 자료를 제시했다. 이런 노력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올해 ‘경주 지역어 대사전이라는 방대한 결과로 나올 예정이라고 했다. -“보석같은 말이 사전에 없다는 것은 화나는 일, 그 보석을 나라도 주워 모아야겠다고 생각” 선생이 경주말 채집에 나선 1983년엔 경인에너지 이사를 마치고 대구 경상석유 사장(경인에너지 계열사)을 하던 때였다. 지금까지 35여 년 간 경주말을 채집한 것. 국내 굴지의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고향 경주말에 관심을 가졌던 계기를 묻자 “좋아서요. 보석이잖아요? 매일처럼 보석이 쏟아지는데요? 지금도 그 보석을 수집하고 있어요(웃음). 일차적으로 보석같은 말이 사전에 없다는 것은 화나는 일이었어요. 내 눈에는 전부 보석인데 큰 사전에도 없으니 그 보석을 나라도 주워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했다. 사명감에서 시작해 매주 짬이 날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 현장에서 어휘 수집에 나섰다. 방법론을 세우기 전에 어휘와 그 활용형들을 카드에 하나하나 적어나갔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양이 옛날 15Kg 들이 큰 사과 상자 5개 분량으로 늘어나게 됐다고 한다. -유일한 조력자, 방언학 연구자 영남대 최명옥 교수와의 인연 대구 경상석유(경인에너지 계열사)를 운영하던 시절, 대구 서점에서 우연히 ‘월성지역어의 음운론(1982년)’이란 책을 보게 되었고, 당시 영남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방언학 연구자 최명옥 교수를 수소문 끝에 만나 경주말 수집과 연구에 뜻을 모으게 되었다. 선생은 현장에서 자료를 수집하는 일을 맡았고, 최명옥 교수는 이를 학문적,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에 치중했다. “생래적으로 알고 있는 말이었지만 품사도 모르는 사람이 사전을 만들려니 막연했습니다. 학문적 바탕과 조사 방법, 방향제시 등에 대해 최 교수가 일러 주었지요”흔히 쓰는 말인지, 드물게 쓰는 말인지, 반대어, 유사어를 단어마다 달아달라는 최 교수의 주문을 받았던 것. 이렇게 협력자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선생의 경주말 수집은 더욱 진척을 보게 된다. -‘경주말은 겨레말의 줄기세포’...경주말을 모르고는 한국어를 연구할 수 없어 ‘경주말 속담 말 사전’ 서문에서 경주어는 현대 한국어의 발상지이자 한국어의 시원을 위해서는 경주말 연구와 이론화가 시급하다고 했다. 이의 근거로 선생은 “삼국통일 후 통일신라는 경주가 수도였으므로 경주말이 당시는 전국의 중심언어였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경주의 귀족 즉 상류층이 개성으로 가서 고려 조정 500년 동안 신라 귀족으로서 대접받고 살았지요. 고려 언어는 상류 계층이 사용하는 것을 중심으로 흘렀고 조선의 개국후 한양으로 옮겨 오지요. 그래서 현대 한국어는 경주말을 모르고서는 온전치 않은 것이지요. 다시말해 ‘경주말이 우리 겨레말에 줄기세포’라는 것입니다. 줄기세포이기에 모든 언어로 분화돼 나가는 언어이고 뿌리인 셈이죠. 경주말을 모르고는 한국어를 연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 강조했다. 이는 선생의 주장이기도 하고 동시에 방언학 전문가인 최명옥 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이 작업 초기에는 뿌리인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언어인줄 몰랐던 거죠” 선생은 경주말에는 고저장단이 분명한데 표준말에서는 액센트를 무시하는 점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겨레말의 고저장단의 표준은 경주말’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했다. 높낮이나 장단이 살아있는 연극대사는 세계 어디에 있는 한국 사람도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하면서 그 높낮이가 ‘바로 경주말’이라고 강조했다. “어휘만 포준어로 사용한다는 것뿐이지 고저장단은 바로 경주말입니다. 이것이 경주말이 한국어의 시원에 맞닿아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근거입니다” -‘경주지역어 대사전’ 올해 출간할 예정, 최종판 출간 위해 열성 다해 ‘경주 속담 모음집’에서는 경주 지역민의 삶의 편린을 보며 경주인들의 역사나 풍수, 언어와 사고 방식을 유추할 수 있다. 이에 선생은 “말하는 식으로 썼습니다. 말을 옮겨쓰는 것도 힘들었지만 다른 이가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발음대로 썼고 제다로 쓸려면 어원을 밝혀 쓰는 것이 옳았습니다. 그런데 그러지못해 아쉽습니다” 고 전했다. 단순한 의미의 설명을 넘어 경주 지방민들의 언어생활에서 활용까지를 제시한 선생이 가장 주목했던 것은 속담만큼 멋진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속담을 제대로 활용하면 언어 생활이 풍부해지죠. 표현이 아주 맛깔져요” 아직도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다면서 경주말은 분명히 전해지고 있는데 표준어에 해당하는 말이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다고 했다. 예를 들면 손등 맞기는 ‘심패’라는 경주말이 분명히 있는데 사전에는 없는 식이다. 이외에도 동식물 이름은 부지기수라고 한다. 김주석 선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경주말 어휘가 결집된 사전을 만드는 일이다. ‘경주지역어 대사전’을 올해 출간할 예정인 선생은 최종판 출간을 위해 열성을 다하고 있다. 현재 나온 사전에는 약 3500여 개의 어휘가 실려있는데, 집대성될 사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어휘들이 수록될 예정이다. 곡용 어미와 활용 어미의 변화 등도 실어 놓았으며 예문만 6만개를 수록했다고 한다. 이에는 민속, 민간약(조약), 문화인류학적 자료까지 망라돼 있는 것. “혼자서 한다는 것이 역부족임을 절감합니다. 소위 ‘내 영역’에 국한 될 수 있어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환경이 조성된다면 누락된 것들에 대해 연구를 집약해야 할 것입니다”고 하면서 “한 지역방어사전으로는 제대로 몇 만 단어가 수록된 사전은 없습니다. 저는 이제 불씨를 겨우 일으킨 정도에 불과하지요. 앞으로 집중적으로 연구하면 방언 지도도 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정확한 경주말의 구현도 가능하고요. 경주말의 기존의 억양을 다시 찾아주면 되는 것이니까요” 라고 했다. -‘전자 경주방언사전’ 만들어야...활자만의 사전은 이용에 ‘제한’ 선생은 그간 35년간 작업 중 표기의 일관성을 원고지 4만 장 분량 내내 유지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고 했다. “녹음한 것을 받아쓰는 것은 지루하고 귀찮었지요. 표준어 대역을, 단어별로 달았다가, 문장별로 고치느라 두 번째로 다시 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본보기로 삼을만한 방언사전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출판사엔 사투리를 교정 교열해 줄 이가 없어 공저자가 직접 교정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워낙 다양한 내용에, 방대한 분량이라 한 번에 한 가지씩만 집중해서 봐야만 했었죠” 또, “가장 듣기 거북하고 싫었던 말은 ‘아직도 그 일을 계속 하고 있나?’하는 시선이었습니다. 별난 일에 몇 십 년씩 매달려 있는 저를 지켜보기가 무척 안타까웠나 봅니다”고 했다. 소중한 경주말의 보고를 정리하고 활용하는 일에 있어 동참자의 부족과 주변의 무관심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선생을 만나며 선생에 대한 조명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조금씩 선생의 공이 알려지고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선생의 업적이 더욱 빛을 발하려면 살아 있는 자산으로 활용해 더욱 다양한 결과물을 생산해내는 것이라고 본다. 선생은 정만서 테마파크 설립과 경주말을 소멸 위기 언어로 유네스코에 등재할 것과 경주말 교육 훈련, 경주말 보전육성조례제정, 경주말 보전마을지정 등을 희망했다. 특히, “살아있는 사전, 즉 전자사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활자만의 사전은 이용에 제한이 있지요. 계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면 살아있는 자료가 될 것입니다. 이 사업에는 재원이 확보돼야 하며, 정부 차원에서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적어도 경주가 표본으로서 방언사전을 만들어야 합니다”고 강조했다. -김주석 선생이 발굴한 ‘정만서’이야기는 다음호에..,경주말의 원형과 활용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어 다음호에선, 기상천외한 행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해학가의 일생에도 주목했던 선생의 저서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을 바탕으로 경주말의 활용을 다룰 예정이다. 조선시대 말기를 살다간 ‘정만서’의 생애와 기행, 일화 등을 발굴해 채집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선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경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뛰어난 언어 사용자인 춘강(春岡) 정만서(鄭萬瑞,1836~1896)의 자료와 현황들을 수집, 정리해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을 펴낸 것이다.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에서는 선생이 편찬한 사전과 더불어 경주말의 원형과 활용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큰 구실을 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1920년 개항한 감포항은 올해 개항 97주년을 맞았다. 3년 뒤 2020년이면 개항 100주년이다. 감포개항사는 격동의 근대사였다. 감포항은 1920년 개항된 이래 1937년 제물포와 함께 읍으로 승격될 만큼 국내 대표 어항이었으나 현재는 어항기능 약화 및 인구감소로 쇠락하고 있다. 이에 도시재생과 경주 동해안 지역 발전을 위한 감포항 개항100주년 기념사업이 추진될 예정이다. 감포항 연안 개발, 친수공간 조성, 송대말등대 콘텐츠사업 등 감포항 주변을 개발해 해양관광기반을 조성하고 특화해 새롭게 거듭나는 ‘감포항’의 기틀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다. 본 기사는, 사비를 들여 발품을 팔아 감포항 개항사와 감포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중인 하덕원 씨(감포개항사연구회 주관)를 통해 글과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특히 1910년경의 감포항 해녀 사진과 조선총독부 자료를 통한 감포항 개항의 근거를 명확히 증명하는 자료는 본지 단독으로 최초 공개하는 중요한 자료임을 밝힌다. 이런 귀중한 자료들을 기꺼이 제공한 하덕원씨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감포항(甘浦港)을 아시나요?...일출 어울릴 때면 가슴 벅차오르는 삶의 현장 경주시의 동단에 위치한 감포는 달감(甘)자와 같은 지형을 닮아서 감포로 했다는 설과,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고 해서 감은포라고 불리다가 감포로 축약되어 오늘의 감포항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려 현종때 동경속지증보본에 ‘감포’라는 기록이 있어 통일신라시대 이후 감은포가 감포로 돤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19년 감포내항 방파제축조로 항구의 입지를 갖춘 현재 감포읍은 읍면적 44.84㎢, 인구 7000여 명이 살고 있다. 본래 경주부 동해면이었으나 1895년(고종 32년) 장기군에 편입 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군에 편입되어 양북면이 됐으며, 당시 감포 인구 3천여 명 중 700~800명이 일본사람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수산업 관련 분야에 종사했다고 한다. 이들 일본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해 감포리는 양북면에서 분리돼 인접 9개리와 병합해 1937년 7월 1일자로 감포읍으로 승격됐다. 감포항은 서, 남, 북 삼면이 최고 200m 이내의 낮은 구릉지대 및 평야로 싸여 있어 지리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며 1920년 개항하고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읍으로 승격된 동해에서 가장 큰 동해남부의 중심어항이었다. 감포항 앞 동해 남부 해역은 대륙붕이 잘 발달하고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어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이 때문에 일제는 감포항을 어업전진기지로 삼았고 수산업 중심지역으로 성장시켰다. 규모가 아기자기하면서도 멋진 등대가 우뚝 솟아있는 감포항은 드나드는 어선이 많은 동해남부의 중심 어항인 것. 감포읍은 바다 가까이 200m 내외의 산지가 해안에 급박해 평야가 거의 없으며,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어종은 꽁치·멸치·가오리 등 이며, 약간의 전복과 미역의 양식이 행해진다. 특산물로는 멸치젓갈, 미역, 전복, 오징어, 꿀 곶감 등이 있다. 3일과 8일에 장이 서는 감포장은 바다가 바로 인접해 새벽에 들어오는 오징어잡이 배와 멋진 일출이 어울릴 때면 가슴이 벅차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삶의 현장이다. -본지 단독 최초 공개, 조선총독부 자료에 나타난 1920년 ‘감포 개항사’ 근거 찾아내 아래 글은 하덕원씨가 일본에 직접 가서 알아낸 자료임을 먼저 밝힌다. 조선총독부 자료 중에서 대정 10년(1920년) 4월, 발간된 ‘조선항만(朝鮮港灣)’에서는 조선해안상황, ‘제2장 항만 종류(개항, 지정항, 세관지정항, 지방항 등)편 중, 지정항 20항 중 ‘대정9년 조선총독부령 제41호 구서’에서는 ‘지정항, 항만, 조축, 항만 내 매립과 방파제, 방사제 등 축설, 개축, 제거 등에 연관해 행정상 처분이 조선총독부 권한’임을 명기하고 있다. 지정항 20항에는 법성포, 여수, 제주, 성산포, ‘감포’, 구룡포, 포항, 도동, 마산, 방어진, 주문진, 나진항 등이 해당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항만행정, 주요항만 일반을 기록하고 있으며 제8장에서는 ‘각항 연혁, 상황병시설’편에서 동해안의 방어진, ‘감포’, 구룡포, 포항, 주문진, 원산 등의 항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명백하게 감포항이 항구로 개항한 것은 대정 9년 즉 ‘1920년’임을 뚜렷하게 기록으로써 알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해서 감포항은 올해로 개항 97년이 되며 2020년 개항 100주년을 맞이하는 것이다. -경주 문화재와 도굴 및 발굴된 유물 밀반출이 가장 조용하게 이뤄질 수 있는 곳이 바로 ‘감포항’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조선 반도로부터 강제 수탈과 영구 정착의 목적으로 감포항을 근대화 했다. 찬란한 신라 고도의 경주 인근의 문화재와 도굴 및 발굴된 유물의 밀반출이 가장 조용하게 이뤄질 수 있는 곳이 감포항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 총독부의 지원 하에 당시 수산업의 가장 핵심적 이권허가인 기선저인망(일명 ‘고데구리’) 허가를 경상북도 13척 중 감포에 8척을 집중해 허가해주었고 인근의 포항항에 비교하면 자연적인 입지 조건이 그리 좋지 않은 감포항을 계획도시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이글은 감포 출신 향토 사학가 우암 전달술 선생의 철저한 고증 및 일본어의 번역과 연로한 지역 어르신들의 기억을 되살려 일부 추가 고증을 한 글이다. 그 고증에 일치하고자 하덕원씨가 국가기록원, 일본국립국회도서관을 열람해 기초적인 자료를 완성한 것이다. -패전과 동시에 일본인 중 조선인에게 평소 우호적인 일본인들만 심사해 일본까지 무사히 귀국시켜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부의 전 조선개발 계획에 의해 현대 항구 개설의 일환인 1925년 감포 축항(현 남방파제)이 준공됐다. 동시에 일본인 유자망 어업인 중심으로 주로 일본의 태평양 연안의 당시 어업이 발달했던 ‘시고꾸’ 지역에서 일본인 어업인들이 감포, 구룡포로 강제 집단 이주시켜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초창기까지는 봉화대(현 감포 중고등학교 아래)에서 송대갑까지 봉화대 방향의 당수나무(수령 500년)처럼 해송이 즐비했으나 신작로 개설 및 농지 개간으로 인한 숱한 벌목으로 사라져버렸다. 송대에는 당시 인근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들이 수령 200~300년 이상의 노송이 집단 서식해 자연 경관이 절경이었다. 송대 끝 자연경관은 여러 성씨의 고총들이 운집한 곳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우정국에서는 ‘아침해가 떠오르는 감포 송대끝’이라 명명하고 기념우표 및 엽서를 발행했다. 해방과 동시에 주변인의 무관심 속에 건물 훼손은 물론 수족관의 어족마저 사라지고 폐허가 되어 버렸다고 했다. 한때 감포의 명승지였던 곳이 폐허가 된 것이다. 한편, 당시 일본인의 기상을 조선 반도에 세우려고 오사카 성을 본떠 웅장하게 3층 건물로 건축했으나 1954년 감포 대화재로 인해 완전 소실돼 현재는 단층 형태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마쯔다 상’이라는 도의원이 한 명 있었다고 한다. 그의 권력이 엄청났고 그로 인해 당시 감포읍으로 승격하는데 인구가 100명이 모자랐음에도 억지로 조성하다시피 감포읍으로 승격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패전과 동시에 감포 인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 중 조선인들에게 평소 우호적인 일본인들만 심사해 당시 그들이 운영하던 기선저인망 선박을 감포인들에게 귀속시켜 주는 조건으로 일본까지 무사히 귀국시켜 주었다고도 한다. -1950년경 ‘목포의 눈물’ 영화 촬영지가 감포항, 감포의 50년대 배경 선명 아래 기사는 ‘감포읍지(2013, 감포유림회, 감포 향토사학자 전달술 선생의 고증)’에서 발췌인용했다. ‘감포는 많은 어류 중에서도 명태, 대구, 갈치, 오징어, 방어 등은 계절을 따라 이곳 어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수 없는 귀한 어종들이다. 감포의 기후는 동해의 기후 및 해류의 영향을 크게 받는 지역으로 특히 한난류의 교차 지역이다. 경주시에서도 감포읍은 작은 면적이어서 해안선을 안고 장반원형으로 남서북 삼면이 고저의 구릉지대로 경사도가 높은 곳이기에 평야가 작다’ ‘이 곳 최초의 금융설립은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의 중심이 된 금융조합의 설립으로 시작됐다. 소위 한인 보호권이라는 명분으로 감포금융조합 설립이 그 기초인 것이었다. 그 후 일제말 조흥은행 감포 출장소 외 서민금융이 있었으나 자취를 감췄다. 1950~70년까지는 사금융이 성행하기도 했다. 혼란기 감포에 있었던 조직과 단체로는 감포적산관리소, 해무소, 소방서장(미 군정 당시의 기관) 등이 있었다’ ‘일제초창기에는 조선업, 철공업, 제염업, 수산물 가공업 등이 성업중이었으며 현재도 조선, 철공업 외 가내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또, 1950년경 감포에서는 영화 촬영도 했다고 한다. 송대갑 유료 수족관은 황폐된지 오래인데 자연 경관은 사람들의 입으로 유전돼 한국영화예술 초창기에 전옥과 김칠성 주연, 독고성이 조연한 ‘목포의 눈물’이라는 영화의 배경지가 감포라고 한다. 송대갑과 그 앞바다 위에 부상하고 있는 감방안을 중심으로 감포내항으로 들어오는 광경과 육거리 중심에서 방파제로 가는 물양장 내항에 정박중인 크고 작은 선박들이 배경들이었다. 그 영화만 보면 감포의 50년대 배경을 알 수 있는데 아쉽게도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지금의 수협 건물과 냉동공장도 주무대장으로 이용됐으며 촬영요원들과 소속 배우들은 ‘삼산여관’과 ‘일심여관’을 이용하고 분장은 ‘낙원미용원’에서 이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삼국 시대 신라 최고의 엘리트 최치원(崔致遠,857(문성왕 19)~?), 최언위(崔彦撝, (868~944), 최승우(崔承祐,생몰년 미상)는 역사의 격동기에 저마다 다른 인생을 선택했다. 세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성이 같고 경주 출신이며, 6두품이라는 출신에 당나라 유학 경험이 있는 신라 최고의 엘리트라는 점이다. 그러나 후삼국이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저마다 다른 길을 걸었다. 최치원은 신라가 거의 힘을 잃고 고려와 후백제가 자웅을 겨루고 있는 가운데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조국 신라가 기우는 것이 안타까워 남은 생을 신라를 개혁하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개혁은 멀었고 신라는 망할 날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그는 고려와 후백제에 몸을 맡기지 않고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벗어난다. 최언위는 최치원의 사촌 동생이었다. 최치원과 같이 당나라에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과거에 합격한다. 42세에 신라로 돌아와 여러 벼슬을 했다. 최언위는 최치원과 생각이 달랐다. 현실에 발을 담그고 그의 뜻을 펼치고 싶어한다. 그래서 후삼국의 지도자 중에서 민심에 귀를 잘 기울이는 이가 누구인지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 최승우는 890년 당나라에 유학을 가고 3년만에 과거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하다가 신라로 돌아왔다. 최승우는 귀국후 누구보다 신라에 실망을 한다. 혼란의 시대를 겪으면서 지도자가 강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개혁도, 백성의 민심을 얻는 것도 강한 힘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강한 힘과 결단력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들 세 사람을 ‘경주 3최(崔)’라고 부르고 천재라하여 칭송했다고 한다. 이 기사 일부와 사진은 향토와 문화 63호, ‘대구경북 고려역사 문화도감’에서 발췌하고 인용했다. -‘경주 3최’는 저마다 다른 길을 걸었다 최치원<삽화사진>은 893년 진성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개혁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그는 시무책에서 권력자들의 부패를 폭로하고 이로 인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고발했다. 왕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 들이려하지만 권력자 중에서는 최치원에게 동조하는 이는 없었다. 환멸을 느낀 그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전국의 산과 사찰을 떠돌았다. 유교의 충의 사상이 강해 다른 나라에 귀순하지도 않았다. 세상을 떠돌던 어느날 가야산 해인사 입구에 신발 두 짝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다고 전한다. 한편, 최언위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935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후 고려 왕건 휘하에 들어갔다. 고려 정부에서 한림원령평정사 등 높은 벼슬을 지냈다. 왕건이 죽은 뒤에도 고려를 위해 봉사했고 944년 7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네 아들도 고려시대 초기에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승우는 최치원 못지않게 극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신라의 현실에 절망했고 그 대안으로 후백제의 견훤을 선택했다. 그는 즉시 견훤이 아끼는 인물이 됐다. 견훤은 왕건과 적대할 때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빼어난 글 솜씨를 가진 최승우는 견훤의 편지와 대외 문서 작성을 도맡았다. 그러나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경주 3최’로, 천재라 칭송받았던 그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최치원,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 따라주지 못했던 '난세'를 살다 최치원은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 출신으로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중에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 새로 성장하는 6두품 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고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한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 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토황소격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고 황제에게 인정도 받았으나,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28세에 귀국을 결정한다.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쳐보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된다.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해 중앙 정부를 위협하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국가의 재정은 어려웠다. 889년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최치원은 외직으로 떠돌며 대산군·천령군·부성군 등의 태수를 역임했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지만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이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최치원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지증·낭혜·진감 등 선승들의 탑 비문을 썼고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했다.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46의 제 3장 최치원 부분(출처 : 국사출판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최언위, 고려 태조 대신해 견훤에게 쓴 답신이 최언위 작품으로 알려져 처음 이름이 최신지(崔愼之)로 경주사람이다. 품성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글을 잘했다. 신라후기, 고려전기의 문신으로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한 빈공제자의 한 사람이다. 신라 말년에(885) 18세의 나이로 당에 들어가 발해 재상 오소도의 아들을 물리치고 장원급제했으며 빈공과 마지막 급제자로 알려졌다. 909년, 42세에 귀국할 때까지 25년간 당에 머물렀으며 최치원·최승우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마흔둘에 신라로 돌아오자,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로 임명됐다. 935년(태조18년)에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가 태자사부가 되고 문한을 위임받아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궁원의 편액은 모두 그가 지었던 것이며 그 당시 귀한 가문에서는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특히 고려 초 승려들의 비문은 거의 최언위 작으로 나타나는데, 그가 고려에 오기 이전인 924년에 지은 봉림사진경대사보월릉공탑비는 최인연 찬이라 하여, 신라에서는 인연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며 태조에 귀부한 이후 지어진 글에는 모두 최언위라 했다. 결국 고려 태조의 현존하는 비문 8편 중 7편이 모두 최언위가 지은 것으로, 이것은 고려 초의 문풍이 경주 육두품 출신의 빈공제자들에 의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고려 태조를 대신해서 견훤에게 쓴 답신이 최언위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혜종 원년(944)에 일흔일곱으로 별세한다. [국역고려사, 열전 , 경인문화사에서 발췌] -최승우, 후백제의 견훤(甄萱) 아래에서 봉사 본관은 경주. 890년(진성여왕 4년) 중국당나라에 건너가 국학에서 3년간 공부하고, 893년 당나라의 예부시랑양섭 아래에서 빈공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있다가 귀국했다. 신라 말기의 6두품 출신 중에서 새로운 지식계급으로 대두하는 가장 대표적인 가문인 경주 최씨 출신이다. 특히, 경주 최씨 중에서도 최치원 최언위와 더불어 ‘신라 말기의 3최(三崔)’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후백제의 견훤 아래에서 봉사했다. 견훤을 대신해 고려태조에게 보내는 격서를 짓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927년(견훤 36)의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로서 지금도 『삼국사기』·『고려사』·『고려사절요』·『동문선』 등에 실려 있다. 한편, 『동문선』 권12에는 ‘경호(鏡湖)’를 비롯한 칠언율시 10수가 수록돼 있다. 이들 작품들로 미루어 당나라에 있는 동안 그의 교제범위가 최치원 못지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아마도 절도사의 막부에서 종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문장에 능해 사륙집(四六集) 5권을 저술해 호본집(餬本集)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현재 농업현장에서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와 수입과일의 소비 및 선호도 증가로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새콤달콤하고 부드러운 육질과 껍질분리가 쉽고 처리가 용이한 과일로의 소비패턴 변화도 재배작물의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던 차제에 제주지역에서 생산되던 원예작물이 육지로 북상 중이며 경주에서도 파파야, 한라봉(신라봉), 백향과, 멜론 등 아열대작물중에서도 아열대 과일의 풍미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경주의 토양과 기후에서 자란 ‘경주표 아열대 과일’ 인 것이다. 우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아열대 과일들을 경주 농가를 통해 맛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경북에서는 경주시가 아열대 작물 재배의 선두 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경주의 브랜드 농산물로 자리잡을 아열대 과일들의 ‘경주 상륙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경주시농업기술센터 농촌개발과 경제작물팀의 자문을 바탕으로 구성했다. -경주지역 새로운 아열대 과일 대표작물 3종...한라봉, 파파야, 백향과 경주시농업기술센터 경제 작물팀 양승우 팀장은 “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기후변화는 미래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메가트랜드로 상당한 과학적 근거들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인식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향후 기후변화에 의해 농업생산은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그 영향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는 적응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와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실정이었다”고 하면서 근래에는 아열대 과종인 무화과, 석류, 키위 등의 재배를 희망하는 농가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라 했다. 한편, 경주지역 새로운 아열대작물 재배현황을 살펴보면 3종(한라봉, 파파야, 백향과)이 대표적이라 한다. 이 외에도 멜론은 이미 경주에 잘 정착하고 있는 아열대 과일이다. 현재 한라봉은 천북 모아, 강동 다산, 배동 등에서 작목반을 구성해 고소득 작목으로 여러 농가에서 재배하고 있다. 파파야는 현재 강동 다산의 1농가에서 재배하고 있으며 대부분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아시안마트에 청과 샐러드용으로 출하하고 있다. 백향과(패션푸르츠)는 현재 3농가에서 재배하고 있으며 8월 중순경 첫 수확해 대도시 대형마트 등에 출하시키고 있다. 앞으로 한라봉은 지속적으로 보급해 경주 브랜드로 개발할 예정이며 파파야, 백향과는 판로를 더욱 개척해 경제성을 평가한 후 보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백향과(百香果, 패션 프루트), 판로 뚫을 수 있는 젊은 농가들 도전할 전망 백향과는 백가지 향과 오묘한 맛이 난다는 ‘여신의 과일’로 불린다. ‘껍질까지 하나 버릴것 없는 신이 내린 선물’이라는 이 과일은 파인애플 복숭아, 오렌지 등의 맛이 섞여 난다. 브라질 남부가 원산지로 세계각지의 열대부터 아열대지방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 경주에서는 대만산 묘목을 수입해 재배하고 있으며 이름은 ‘경주백향과’라 명명하고 있다. 11월 즈음이면 거의 막바지 수확을 한다. 백향과는 양남면 효동리에 사는 박경환(에코베리 농원)씨가 재배하고 있는 대표품종 중 하나다. 유통은 대형마트와 콘도에 납품하거나 개별 택배부문을 받는다. 경주시는 농가 새소득원으로 기대하고 있는 품목이다. 백향과는 원체 아직은 홍보가 미흡한 품목이다. 이 과일은 아직까지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판로를 뚫을 수 있는 젊은 농가들이 도전할 전망이라 한다. -제주엔 한라봉 ‘경주엔 신라봉’, 경북에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경주에서 재배 생산 성공 가을에 생산되는 귤은 ‘온주밀감’이며 온주밀감 보다 늦게 생산되는 밀감의 대부분을 ‘만감류’라고 부르는데 만감류 대표 상품은 ‘한라봉’이다. 우리 지역에서는 제주도의 한라봉과 차별화 시킨 것으로 경주에서 생산해 ‘신라봉’이라 명명했다. 천북 모아리에 이상환씨가 운영하는 ‘꿈자람 농원’에서 단동하우스에서 수막재배로 한라봉을 첫 시험재배 하는데 성공했다. 이 씨는 2013년부터 한라봉을 본격 출하하면서 경북에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경주에서 이 과일을 재배해 생산해냈다. 시행착오는 많았지만 17브릭스 이상의 당도를 자랑하는 한라봉을 생산해 내는데 성공한 것. 이 씨가 한라봉을 11년전부터 도입해 가장 오래전부터 보급한 이후 김용구(해오름 농장, 강동면 다산리) 씨도 재배에 성공해 올해, 첫 출하에 성공했다. 경주시는 신라봉 홍보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신라봉 재배 농가를 찾는 방문객은 한라봉 재배희망 농가, 귀농인 등 연간 3000명 정도로 단체 방문은 100회 이상이다. 인기있는 신라봉이지만 재배시 단가 하락에 유의해야 한다. 시설채소 농가의 만감류 재배의향 증가로 홍수 출하시 가격폭락이 우려되는 것이다. 한라봉은 보급이 넓혀지고 있는 추세다. -파파야 재배 농가는 아직 한 곳, 멜론은 수출 규모를 확대할 예정이며 인근지역 멜론재배 전파 파파야를 재배하고 있는 농가는 경주에서 한 곳 있다. 강동면 다산리에 사는 손은익씨가 그 주인공으로 그는 말레이시아에서 20년간 해외근무를 하고 온 이다. 손 씨는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아시안마트에서 청과 샐러드 용으로 출하하고 있다고 한다. 파파야의 경우 재배한 지는 3년째로, 고온을 필요로 하고 있어 연료비가 많이 들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이미 경주에 정착한 아열대 과일로는 경주 멜론이 있다. 멜론은 사하라 사막이 원산지다. 정착된 지 오래됐지만 농가들의 토마토 작황이 5월에 끝나면 멜론을 다시 파종해 100일 후에 추석 즈음해 출시되고 있다. 가격대도 저렴한 편이어서 잘 팔리고 있다. 경주멜론의 정착에는 경주시멜론연합회와 농업기술센터, 농산물 산지유통센터가 삼위일체가 돼 지속적인 교육과 농가간 소통으로 전 회원이 프리미엄급 멜론 생산을 해내고 있다. 멜론은 일본, 홍콩, 대만 등지에 2015년 66톤, 2016년 50톤을 수출 시작했다. 2016년 바이어들로부터 최고품질을 인정 받아 2017년 수출 규모를 확대할 예정이다. 또 포항, 영덕 등 인근지역에 멜론재배를 전파하고 있다. -경주농가에서는 기존의 재배 작목법과 뒤섞여 아직은 재배술 정립 미숙한 편 경주시농업기술센터에서는 이들 농가에 기술을 지원하고 견학을 유도한다든지 전문가를 초청해 영농교육을 받게 하고 있다. 경주시에서 공식적으로 지원을 하는 것은 작목반을 통해서다. 이들이 사업계획을 세우면 현장에서 필요한 부분을 정해 시설 개선이나 지원을 하고 있다. 양 팀장은 “이들 아열대과일은 노지 재배는 불가능하며, 온풍기나 수막재배 등으로 온도를 조절하는 하우스 재배로 출하 시기를 조정하고 있다. 국내 소비가 거의 대부분이다. ‘신라봉’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니까 쉽게 판매가 가능하다. 당도도 일조조건이나 토질이 좋아선지 제주 한라봉 보다 높아서 잘 팔리고 있다”면서 “당도와 산도를 측정하는 기기로 측정해서 가장 맛이 무르익었을때 출하하라고 농가에 유도하고 있다. 농가입장에서는 일이 분산되고 출하 기간이 길어져 다소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명성을 유지해 가려면 수확시기가 중요한만큼 최고의 맛일때 수확하도록 권장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 과일들의 판로는 대형마트와의 계약으로 파는 경우도 있고 직거래로 소비시키고 있으며 대체로 출하하는 족족 잘 팔리고 있다. 그렇지만 백향과의 경우 아직 소비자들이 한 두 번 먹어서는 그 맛의 진가를 잘 알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양 팀장은 “경주에서는 새로운 품목에 관한 재배기술이므로 제주도의 기상과 토양과는 달라 경주농가에서는 기존의 재배 작목법과 뒤섞여 아직은 재배술의 정립이 미숙한 편이다. 이 부분에 다소간 애로 사항이 있다. 한편, 백향과는 판매에 애로가 있는 편이고 파파야는 한 농가에서 재배하고 있다”고 했다. -아열대작물은 단기간에 자라고 병충해도 덜하고 수확도 용이해 기후 변화와 농가 고령화에 적합한 작물 경주시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소득 작물로 보급할 수 있는 작물로 아열대 과일 재배를 시작했다. 토마토, 딸기, 사과 등은 일손을 매우 필요로 하고 노동 시간도 상당히 필요로 한다. 이에 비해 아열대작물은 단기간에 빨리 자라고 병충해도 덜하는 편이다. 결실도 빠르고 수확도 용이하다는 것에 착안했다. 즉, 기후 변화와 농가 고령화에 적합한 작물로 그중에서도 몇몇 작물을 선별한 것이다. 이 밖에 무화과도 시도했고 애플망고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애플망고의 경우 겨울철 관리 온도가 너무 높은 관계로 난방비가 많이 든다. 대신 과일가가 매우 비싸 수익성도 있지만 재배 비용이 만만치 않아 아직은 관망중인 품목이다. “관상 가치도 높은 편이어서 제주도는 물론,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등에서 아열대 과수 재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경주는 관광 도시여서 체험활동을 유도하는 등 관광농업 쪽으로 연계해 활성화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시 관계자는 “앞으로도 이러한 농업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아열대작물 및 새소득 작목의 재배기술을 경주의 특색에 맞게 확대·보급하는데 많은 연구와 지원을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미술관을 비롯해 영국과 호주에서 줄줄이 초대전을 갖고 한국의 미와 그 안에 스며든 철학을 알려온 현대도예가 윤광조(70) 선생이 경주 안강읍 자옥산과 도덕산 자락 바람골에 살고 있다. 한국 작가에 대한 호평이 타 장르에선 매우 드문 일이나 전 세계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회에 이어 앞다투어 선생의 작품을 구입소장하고 있다. 흔한 조수도 두지 않고 청소부터 흙 만지고 불가마에서 굽는 일까지 오롯하게 혼자 해내는 이 비범한 대가는 유명세와는 거꾸로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 산곡에서 선생은 구름과 폭풍, 그림자와 강, 비와 바람에 담긴 사색들을 붙잡아 흙으로 빚은 작품 안에서 이야기한다. 인터뷰 내내 그의 호방한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지만 기자는 시종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대가 특유의 여유에서 발해지는 천진함과 진지한 자세를 견지하는 비범한 카리스마는 그렇게 공존했다. 지난달 30일, 작업장을 찾은 그날도 선생은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가을비가 제법 내리던 안개 자욱한 ‘급월요’의 전경은 눈빛 형형한 그를 더욱 외경스레 보이도록 했다. 고희를 넘긴 나이지만 ‘청년’의 기개는 충천했으며 기자가 선물로 전한 국화에 연신 향을 맡는 선생은 천상 예술가였다. 윤광조 선생은 ‘예술은 기술이 아님’을 거듭 강조하며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자신의 정체성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면서 줄곧 정신성에 대해 일갈했다. 문화 예술의 지나친 물질화를 경계했고 자본주의 말단을 쫓는 현상에 대한 경각심도 일깨웠다. 스물아홉때 도자대전공모전에서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다 흘려보낼 수 있는 대자연의 길을 가고 싶다”는 수상소감은 지금 선생의 현주소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을 놀래키는 것이 예술인줄 아는 우(愚)를 깨트리며, 선생의 지순한 작업이야말로 세계적 소통의 열쇠임을 깨달았던 만남이었다. 선생의 존재는 그 자체로 경주의 자부심이고 치유이자 힘이었다. -전통에 대한 이해와 사랑,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충족시키는 곳이 바로 ‘경주’ “내 작업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지, 알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작업의 세계가 곰삭아야지 자연스레 향이 번질거 아니요?” 선생은 1994년부터 이곳에 천착해 20년 넘도록 살고 있다. 경주에 정착한 것에 대해선 “전통에 대한 이해와 사랑,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즉 두 날개를 가져야 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곳이 바로 ‘경주’ 라고 생각했다. 물질만 판치고 ‘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경주는 더욱 소중한 곳이다”면서 “정체성과 보편성, 자존이 결국은 역사이고 역사 유물이 가장 많이 유존하는 곳이 경주 아닌가. 이것이 경주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했다. -‘급월당(汲月堂)’ 물 속에 잠긴 달을 길어 올릴 만한 기량을 가진 작가 작업실 한켠, 선생의 살림집은 ‘급월당(汲月堂)’이다. 내방객들을 맞는 이곳은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편액이 걸려 있다. 당호를 따라 가마 이름도 ‘급월요’라 한다. 1946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인 선생은 홍익대 미대 공예학부를 졸업하고 1974년 한국문화공보부 추천 일본 당진을 유학했다. 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배속되고 이는 인생 유전의 일대 전기가 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연관성이 많았고 그 역할을 선생이 하면서 당시 최순우 미술과장과 인연이 된다. 이 여정에서 분청 작업이 의미와 보람을 줄 것이라는 최순우 선생의 암시를 받고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분청작업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또 최순우 선생의 스승이었던 고유섭 선생의 아호를 따서 ‘급월당’이라는 당호를 지어주며 ‘물 속에 잠긴 달을 길어 올릴 만한 기량을 가진 작가’라 극찬했다 한다. -“나는 죽어도 모방하지 않는다. 심지어 내가 만든 것도 모방하지 않는다” 선생은 일년에 20점을 채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가마를 열때가 가장 괴롭다며 순정한 토로를 한다. “아무하고 이야기도 하기 싫을 정도야. 잦은 자책도 하지. 평생 작업에의 회한으로 가슴이 아플 정도거든” 그러나 이른바 신이 내리는 경지에서의 작업이기에 기술적으론 흠이 있지만 좋은 작품이 있어 금방 작품을 판단하지 않는다. 1~2년을 더 두고 보고 타작을 골라낸다. 흙 만드는 작업만으로도 일주일이 걸린다. 여러 가지의 흙을 섞어 작품 성향에 따라 달리 조합한다. 이런 과정에서 인대가 늘어나는 등 고희를 넘긴 선생의 몸은 고되다. 그러나 선생은 “늘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 예술행위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이 예술가의 정신이다. 나는 죽어도 누가 만든 것을 모방하지 않는다. 심지어 내가 만든 것도 모방하지 않는다”는 자존심으로 독창적인 흙과 불 작업으로 분청사기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의 현재 문화 환경에서 전업 작가가 작업을 계속하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마치 알몸으로 가시덤불을 기어 나오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선생의 예술론은 이어졌다. “예술은 물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통해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결국 정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면서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예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과정이 힘들고 불편함만큼 가치있고 자유스러운 일이잖은가. 그것만으로도 이곳에서 일할 만하다”고 했다. 선생만의 독창적인 작업을 하는 근간에 대해선 “내가미술대학 간다고 했을때 집에서 쫓겨 났어. 굽히지 않고 집을 나와 버렸어. 나가랬다고 나온거, 그게 지금의 나로 계속 연결돼 있어. 어디든, 어떤 누구든 구애 받지 않아. 그게 나이 70이 되도록 이 길을, 이 산골에서 일관되게 작업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지 싶어” -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에의 공감 분청사기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8년 경암학술상-예술 부문을 수상한 소감에서 선생은 ‘예술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 “한 인간의 고뇌하는 순수와 노동의 땀이 독자적인 조형 언어로 표현되어 여러 사람과의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은 깜짝 놀랄만한 아이디어나 지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순수와 고독과 열정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이다. 새로운 조형인데 낯설지 않은 것, 우연과 필연, 대비와 조화의 교차, 이러한 것들을 통해 자유스러움, 자연스러움을 공감하고자 한다. 이 화두로 꾸준히 공부해 나아가면 언젠가 자유와 자연을 그대로 드러낼 날이 있을 것이다”고 피력했다. -‘분청’... 아취어린 간소함, 삶과 예술 가다듬는 치열한 수행과정 바람골의 자연을 버무려 만든 작품이 ‘산중일기’ 시리즈다. 최광진 미술평론가는 “山中日記, 일상을 통한 일상의 초월 에서 그의 산중일기는 인간적이면서 초월적이다. 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에서 전통의 현대화에 골몰하는 한국화단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평했다. 인공적으로 정제된 완벽함 대신 한국의 자연이 그렇듯 건강하고 순후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하는 것. ‘정체성, 보편성, 조형성’을 고민하는 그는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면서도 전통의 답습이 아닌, 현대적 변형에 관심을 쏟는다. 도자기에 ‘반야심경’을 못으로 새기는 ‘심경’ 시리즈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의식으로 태어났다. 이 작업은 그가 삶과 예술을 가다듬는 치열한 수행과정인 셈이다. 소주잔을 기울이고 작업에 대한 구상이 떠오르면 자연과 가장 가까운 흙과 불과 물로 분청을 빚어내고 있다. 선생은 그 자유로움에 도취되었고 분청만이 지닐 수 있는 다양한 표현에 골몰해왔다. 이에 대해 미술평론가 필립 루이스는 ‘윤광조의 예술세계’에서 ‘다듬어진 작품 안에 사로잡힌 자연의 생생한 힘이 작품의 존재감을 강화시키고 있다. 작가는 새로운 자유를 찾았다’면서 ‘자연의 모든 힘이 분청에 대한 새로운 해석, 즉 아취어린 간소함과 미니멀한 느낌으로 연출되었다. 이 조각들은 자신의 비밀을 서서히, 그리고 고요히 털어놓는다’고 평했다. -윤광조 선생은 1973년 제7회 동아공예대전 대상 수상에 이어 2004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선정, 분청사기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8 경암학술상-예술부분 수상도 했다. 1976년 시인 김광균의 후원으로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국내외 유수 화랑에서 크고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2003 필라델피아미술관 초대전(미국의 3대 뮤지엄 중 하나로, 이 전시는 동양 작가 최초 초대전), 2005 시애틀뮤지엄(미국)에서의 개인전을 필두로 국내에서 가졌던 ‘분청사기 명품전: 한국미의 원형을 찾아서(호암 갤러리 ,2001)’도 보람이었다고 한다. 지난 7월 서울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 유희삼매(遊戱三昧) 도반 윤광조·오수환’ 전을 최근 개최한 바 있다. 이 외에도 다수의 전시가 있다. 주요 작품 소장처로는 대영박물관(영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뉴욕,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샌프란시스코, 미국), 국립현대미술관(서울), 삼성미술관(서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호주), 필라델피아미술관(필라델피아,미국), 시애틀미술관(시애틀, 미국) 등에서 작가의 작품들이 사랑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