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음악으로 유명한 두 명의 ‘스키(sky)’가 있다. 한 사람은 차이콥스키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스트라빈스키다.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는 프티파와 함께 고전발레의 완성이라는 큰 업적을 세웠다. 한편 스트라빈스키(I
고전발레의 형식을 정립한 프티파는 오늘날 차이콥스키 3부작만큼이나 자주 공연되는 작품들도 안무했다. 돈키호테와 라 바야데르라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의 음악은 밍쿠스(Ludwig Minkus, 1827-1907)라는 오스트리아 작곡가가 담당했다. 밍쿠스는 당시 황
19세기가 흐르는 동안 발레가 궁정을 나와 대중예술로 자리 잡게 되고, 자연스레 ‘발레음악’이란 장르가 전문 예술분야로 새로 등장했다. 19세기는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에 도래한 낭만주의 시대였고, 오늘날 음악사의 한 줄을 장식하고 있는 거장들이 클래식 분야에서 매우 활
발레는 푸에테처럼 여성무용수의 신기에 가까운 독무에서 받는 감동도 크지만, 남녀 무용수가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2인무도 이에 못지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발레용어로 2인무를 파드되(pas de deux)라고 부르는데, 주인공인 남녀무용수가 추는 2인무는 수식어 하나를
고전발레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여성 무용수가 서른 두 번을 빙글빙글 도는 장면이 있어야 한다. 이 묘기는 발레 테크닉 중 가히 최고라 말할 수 있는 푸에테(fouetté)다. 푸에테는 한쪽 발로 신체를 지탱하고 그것을 축으로 삼아 팽이처럼 도는 연기를 말하는데,
발레계의 반항아 카마르고(Marie Camargo, 1710-1770)가 긴 치마를 발목 위로 싹둑 자르고 무대에 등장한 이후로 여성 무용수들의 치마는 점점 짧아져 갔다. 낭만발레 ‘지젤’에서 보았던 종 모양의 다소 긴 로맨틱 튀튀(romantic tutu)를 지나 프
프랑스 혁명 이후 낭만발레는 파리에서 발레의 대중화와 함께 오늘날의 발레에 가까운 극장예술로 자리잡는데 성공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오페라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위축된다. 이때 발레의 중심지는 러시아로 이동해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낭만발레로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는 작품은 지젤(Giselle)이다. 지젤은 당대의 드림팀이 만들었다. 대본을 고티에(Theophile Gautier, 1811-1872)가 쓰고, 음악은 아당(Adolphe Charles Adam, 1803-1856)이, 안
발레가 현대무용을 비롯한 다른 춤 장르와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발끝으로 서는 까치발 동작이다. 이것을 발레 용어로 쉬르 레 푸앵트(sur les pointes)라고 한다. 까치발 동작은 발레 예술에 독자성을 부여했고, 오늘날 발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작이
루이 14세가 한창 발레에 빠져 스스로 공연의 주인공으로 출연할 당시의 발레는 남성의 예술이었다. 발레의 중심인물이 여성 무희가 아니라 남성 무용수였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18세기에도 계속되었다. 남성 무용수는 바지를 입고 발레를 했다. 반면, 여성 무용수는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스커트를 입고 춤을 췄다. 따라서 여성 무용수는 아무래도 남성보다 동작에 더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기교를 부리더라도 관객들은 치마에 갇혀있는 다리를 볼 순 없지 않은가? 더욱이 여성이 발목을 노출하는 건 시대의 금기사항이었다. 이때 발레계의 반항아가 나타난다. 1726년 파리에서 데뷔한 벨기에 태생의 마리 카마르고(Marie Camargo/1710-1770)는 발목 위로 스커트를 자르고 무대에 등장하여 금기를 깨버린다. 당시 복사뼈를 가릴 정도로 길었던 무용 스커트를 무릎과 복사뼈의 중간에 닿을 정도로 짧게 만들어 입었던 것이다. 또한 하이힐에 가까웠던 무용 신발의 뒷굽을 떼어 냈다. 이제 여성 무용수도 바지를 입은 남성 무용수들처럼 편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 무용수의 발목이 노출되고, 신발 뒷굽이 낮아지면서 여성 무희들은 도약하며 수직동작을 연출해냈다. 대표적인 동작이 앙트르샤다. ‘앙트르샤’는 교차하기라는 뜻으로 무용수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두 다리를 빠르게 앞뒤로 서로 교차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두 번 교차할 때는 앙트르샤 되(Entrechat deux), 네 번 교차할 때는 앙트르샤 캬트르(Entrechat quatre), 여섯 번 교차할 때는 앙트르샤 시스(Entrechat six)라고 부른다. 마리 카마르고는 앙트르샤 캬트르(entrechat quatre)를 최초로 시도한 여성 무용수로 알려져 있다. 카마르고의 시도는 발레리노 전성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매우 파격적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반응도 꽤나 뜨거웠으리라! 스커트 끝단은 고작 발목 위 15cm 정도였지만, 여성 무용수들을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발레복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후에는 종 모양의 로맨틱 튀튀가, 접시 모양의 클래식 튀튀가 속속 등장하며 각각 낭만발레와 고전발레를 상징했다. 스커트 길이는 점점 짧아져 갔다. 그럴수록 여성 무용수들의 하체 테크닉은 급속히 발전해갔다. 바야흐로 남성들의 발레시대가 저물고, 발레리나의 전성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혁신적인 무희였던 마리 카마르고는 당대의 패션리더이기도 했다. 카마르고가 편집한 발레의상은 매우 큰 인기를 끌었다. 더불어 그녀의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그리고 신발까지도 카마르고 풍(風)이라 불리며 유행했다.
발레는 원래 유럽 귀족사회에서 사교무용으로 기능하던 오락물이었다. 최초의 발레는 13세기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무용이 연극의 막간에 독립된 무언극으로 상연되면서 나중에 발레로 발전한 것이다. 최초의 발레 원형은 1489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갈레츠오 공과 아라공의 이사벨라 공주의 결혼식에 있었던 막간 희극이다. 요리가 나오는 사이에 그 요리에서 연유된 춤을 추었다. 당시 프랑스 궁정은 이탈리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발레 역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메디치 가문의 딸인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erina de’Medici, 1519-1589)가 프랑스로 출가하여 앙리 2세의 왕비가 된 것이다. 그녀 스스로 무용 애호가이자 무용의 명수였다. 자연스레 프랑스에 이탈리아 궁정 발레가 전파되었다. 발레는 프랑스와 궁합이 잘 맞았다. 역대 국왕의 사랑을 받던 궁정 발레는 루이 14세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짐이 곧 국가다!” 라고 말하며 절대군주의 상징이 된 루이 14세는 발레의 대가였다. 1652년부터 1670년까지의 18년 동안에 27편의 발레극에 직접 출연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발레극은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였는데 그는 이 공연에서 태양왕 아폴론의 역할을 맡았다. 그가 태양왕이라 불린 이유가 바로 이 공연 때문이다. 루이 14세는 발레가 귀족들의 아마추어적인 기예에 머물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1661년 파리에 왕립무용학교를 설립했다. 무용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이 학교는 1672년에 음악을 추가하여 왕립음악무용학교가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는 국립음악무용학교가 되었다. 파리 오페라발레극장의 기원이기도 하다. 왕립음악무용학교의 교장에는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가 취임했고, 전임 무용교사에는 보샹(Pierre Beauchamp, 1631-1705)이 임명되었다. 륄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무용가로 프랑스 오페라의 창시자라 불릴 정도로 루이 14세의 핵심적인 예술 참모였다. 한편 보샹은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뛰어난 무용가로, 오늘날에도 발레의 기본기에 해당하는 ‘다리의 다섯 가지 포지션’을 처음 만든 사람이다. 루이 14세가 만든 학교에는 귀족의 자제뿐만 아니라 평민이라도 재능있는 자가 남녀를 불문하고 입학할 수 있었다. 이는 대단한 파격이었다. 게다가 보샹의 탁월한 교육훈련으로 말미암아 실력 있는 무용수들이 줄줄이 배출되었다. 이젠 이들의 공연을 궁정 밖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궁정발레의 시대가 저물고 극장발레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이는 ‘과(過)’가 많았던 절대군주 루이 14세의 큰 ‘공(功)’임에 틀림없다.
수강생들에게 발레의 발상지가 어디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러시아라고 답을 한다. 일부는 ‘발레’라는 단어가 불어라고 하며 프랑스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긴 발레 용어가 대체로 불어고, 볼쇼이발레단이 우리나라에선 가장 유명한 발레단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발레는 이탈리아 태생이다. 오페라처럼 르네상스의 산물인 것이다. 발레 용어가 불어로 된 이유는 뭘까? 이탈리아 발레는 궁정에서 사교를 위한 제스처였다. 이것을 메디치 가문의 한 여성이 프랑스 왕에게 시집오면서 프랑스에 전파된 것이다. 프랑스 왕들은 이것을 발레(ballet)라 칭하고 장려했다. 특히 태양왕 루이 14세는 스스로 발레리노가 되어 발레극에 참여했고, 오늘날 파리국립오페라의 전신이 된 발레학교를 열었다. 이러다 보니 발레 용어들이 온통 불어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혁명을 거쳐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발레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장르가 되었다. 천상에 더 가깝기 위해 뒤꿈치를 올리는 까치발 동작(푸앵트)과 종 모양의 긴 튀튀(로맨틱 튀튀)는 낭만발레의 아이콘이 되었다. 라 실피드(1832년)와 지젤(1841년)은 낭만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두 작품에 모두 등장하는 백색발레(블랑발레) 씬은 고전파 발레에도 계승되어 군무씬의 압권으로 뽑히고 있다. 19세기 초중반을 풍미하던 낭만발레는 프랑스에서 급격하게 퇴조한다. 당시 발레계의 관행에 환멸을 느낀 발레인들은 터전을 러시아로 옮긴다. 러시아 황실이 발레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장려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인상파 작가 드가는 1500여개의 그림과 조각으로 당시의 발레계를 꼬집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에투알’과 ‘14세 발레리나 마리의 조각상’이다. 우리는 음악사에서 낭만파에 앞서 고전파가 음악규칙과 형식을 만들어 냈음을 알고 있다. 낭만파는 고전파가 만들어 낸 규칙과 형식을 깬 사람들이다. 그런데, 발레는 특이하게도 낭만파가 고전파에 선행한다. 먼저 낭만발레의 꽃을 피운 후 엄격한 형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프랑스 출신의 안무가 프티파(Marius Petipa, 1819-1910)가 러시아에서 이룬 업적이다. 낭만발레의 파드되를 업그레이드한 그랑 파드되, 이야기와 상관없이 흥을 돋는 디베르티스망, 32회전 고난도 푸에테는 고전발레의 대표적인 형식이 되었다. 러시아 발레가 온 유럽을 장악한 것은 디아길레프(Sergei Pavlovich Diaghilev, 1872-1929·인물사진)의 공이 크다. 동향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천재 무용수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90-1950)와 함께 활약한 발레뤼스(러시아발레단)는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불새, 페트로슈카, 봄의제전이 발레뤼스의 주요 레퍼토리다. 하지만 1929년 디아길레프의 사망 후 발레뤼스는 거짓말처럼 해제된다. 발레뤼스의 주요 멤버는 유럽으로, 북미로 이동해서 해당 대륙의 발레선구자가 된다. 예를 들어, 미국으로 간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1904-1983)은 미국 발레의 아버지다.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폴란드계 이민자 3세로 태어났다. 어릴 적 또래보다 월등한 피아노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13세인 1919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서 곤궁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당시 원장이었던 글라주노프의 지원으로 겨우 음악원을 마칠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1번 교향곡을 작곡(1925년)했다. 1번 교향곡은 러시아 역사상 두 번째로 10대 작곡가가 쓴 교향곡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등에 의해 소개될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이후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쇼스타코비치에게 위기가 닥친다. 1934년(28세)에 발표한 그의 두 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Lady Macbeth Of Mtsensk)’이 문제였다. 스탈린이 오페라 공연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온 후 소련 공산당 당간지 프라우다에 이 작품이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비판 기사가 난 것이다. 비판은 보통 숙청으로 이어진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공산당의 마음에 드는 작품이 필요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사활을 걸고 러시아혁명 20주년을 기념하는 교향곡 5번(1937년)을 작곡한다. 이 작품은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암시하는 팡파르로 귀결되는 대작으로, 초연에서 갈채가 40분 이상 이어질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이렇게 쇼스타코비치는 첫 정치적 위기에서 간신히 넘기고, 모교인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작곡 교수로 임용된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쇼스타코비치가 거주하던 레닌그라드도 위험해지기 시작한다. 이즈음 나온 작품이 7번 교향곡이다. 나치에 대한 승리를 기원하는 80분 길이의 이 대작은 모스크바 초연 이후 서방세계에서도 자주 연주되었는데, 1942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NBC 교향악단의 연주는 미국 전역에 중계되어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쇼스타코비치에게는 두 번째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1945년에 발표한 9번 교향곡이 스탈린의 심복이자 소련 문화계의 거두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Andrei Zhdanov, 1896-1948)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스탈린은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대단한 걸작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9번 교향곡은 그렇지 못한 평이한 작품이었다. 이 즈다노프 비판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사망하는 1953년까지 교향곡 작곡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스탈린 선전용 영화음악을 주로 작곡하면서 숙청의 위기를 넘긴다. 쇼스타코비치는 1953년 스탈린이 죽자 10번 교향곡을 발표하면서 9번 교향곡의 저주를 풀었다. 저승사자가 9번을 쓴 쇼스타코비치를 잡아가야 하는데 스탈린을 잡느라 못 잡아갔다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당대의 라이벌 프로코피예프가 스탈린과 같은 날에 사망하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사실상 소련의 대표 음악가가 남게 되었다. 그는 1975년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비올라 소나타를 마지막으로 완성하고 4일 뒤 세상을 떠났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생을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에서 활동했었기에 당대 서방음악의 주류였던 무조음악이나 아방가르드 성향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가 작곡한 15곡의 교향곡은 현재까지 교향곡 분야 최후의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1951)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유대인 부모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기 낭만파 작곡가들, 특히 말러를 성자(聖者)로 여길 정도로 숭배했다. 같은 음악적 지향점을 가진 안톤 베베른(Anton von Webern, 1883-1945),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를 제자로 두면서 2차 빈 악파(1차 빈 학파는 18세기 말 고전파)를 형성하게 된다. 쇤베르크의 후기낭만주의적 작품의 정점은 1910년에 작곡한 ‘구레의 노래’이다. 이 곡은 5명의 독창자, 8부 혼성 합창단, 3부 남성 합창단, 해설자, 그리고 140여명의 관현악단을 동원한 대작이다. 말러의 8번 천인교향곡에 필적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동시에 쇤베르크가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낸 마지막 작품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장조와 단조에 기반한 조성을 점점 허물어 가다가 완전히 조성을 포기한 노골적인 무조음악(無調音樂)으로 옮겨갔다.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연가곡 ‘달에 홀린 피에로’가 이즈음의 대표작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한동안 작곡을 중단하게 된 그는 전후에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12음 기법을 만들어낸다. 그는 이 기법에 대해 향후 100년 동안 독일 음악을 최고봉에 올릴 발견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기법을 사용하여 피아노 모음곡, 관현악 변주곡, 현악 4중주 3번 등을 작곡하게 된다. 그는 1925년 베를린 예술학교의 교수에 임용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게 되면서 이 유대인 작곡가는 나치의 명령으로 학교에서 해임되고 뉴욕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다시는 유럽에 오지 않았다. 1936년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그는 UCLA의 교수로 부임하고, 한동안 중단했던 작곡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한편 나치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한 사회 참여적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12음 기법에 기초한 쇤베르크의 작품은 음악계에 충분한 논란거리를 제공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진 못했다. 한때 전위적인 작품으로 경쟁했던 스트라빈스키가 신고전주의 작품으로 전향하게 되자 쇤베르크의 소수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하지만 쇤베르크의 인생 말년에 접어들면서 재평가를 받게 된다. 젊은 작곡가들이 그의 무조 음악과 12음 기법에 기초한 음렬주의(※ 2차 빈악파가 발전시킨 기법)에 관심을 갖고, 이에 기초한 곡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12음 기법을 음정뿐만 아니라, 길이, 강약, 음색에 까지 사용하는 총렬주의로 확장시켰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이러한 흐름은 음악계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고, 쇤베르크는 선구자로서 추앙받게 되었다. 서양음악의 토대를 이루었던 조성을 해체하고, 12음 기법을 창조한 쇤베르크는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소수파 천재작곡가임에 틀림없다. 그는 과거의 음악을 답습하지 않으려 했다. 20세기 초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51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영면한다.
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yevich Prokofiev, 1891-1953·인물사진)는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에 속하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손초프카에서 태어났다. 음악을 하는 어머니는 프로코피예프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조기 음악교육을 시켰다. 1904년(13세)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시켜 천재 아들을 후원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 시절에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행각으로 늘 화제를 뿌렸다고 한다. 음악원 졸업 후에도 그의 파격성은 자주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러시아 음악계는 이 젊은 음악가의 탁월한 실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코피예프는 1911년(20세), 러시아의 유명 음악 출판사인 유르겐손과 계약하여 작품들을 출판했고, 1913(22세)년부터는 해외 연주여행을 시작했다. 여행 중 1차대전이 발발(1914년)하자 프로코피예프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작품 경향도 변한다. 그간의 파격 일변도에서 벗어나 교향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서는 신고전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1917년(26세)에는 러시아 혁명이 터진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으로 음악활동이 위축되자 이듬해 미국으로 간다.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회심의 작품이었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초연 계획이 엎어지자 실망한 그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간다. 여기서 수년 전 만났던 디아길레프에게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위촉받아 ‘어릿광대’를 작곡한다.(디아길레프의 첫 번째 의뢰작품인 ‘알라와 롤리’ 역시 초연 계획이 불발된 아픔이 있다.) ‘어릿광대’는 1921년(30세) 파리에서 초연되어 다행히도 큰 성공을 거둔다. 같은 해에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 역시 미국 시카고 초연에 성공한다. 1921년은 프로코피예프에게 새 도약의 계기가 된 해였다. 1927년(36세)에는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에 소련에서 연주 여행을 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된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이 호평을 받게 되면서 프로코피예프는 소련으로의 복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결국 1936년(45세)에 그는 영구 귀국을 선언한다. 그리고 직전 해에 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연을 위해 소련 당국과 교섭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소련의 문화정책에 그의 활동은 곧바로 제동 걸린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살아남기 위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1939년 스탈린의 환갑에는 ‘건배’라는 제목의 어용 칸타타를 발표하여 정권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이후 프로코피예프는 거의 소련에 머물면서 영욕의 순간을 반복하다가 1953년(62세) 뇌출혈로 사망한다. 프로코피예프가 사망한 날, 스탈린도 죽었다. 스탈린 사망 소식에 묻혀 프로코피예프는 모차르트만큼이나 초라한 장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의 명성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사후 4년만인 1957년 레닌상을 수상했다.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대표 공항은 1973년 ‘프로코피예프 국제공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냉전 시절 프로코피예프는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와 같이 서방에서 활약했던 음악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을 받았지만, 이념의 해빙기가 찾아오면서 프로코피예프는 재평가를 받는다. 지금은 가장 자주 연주되는 현대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성악가였지만, 아들이 음악보다는 법학을 전공하길 원했다. 스트라빈스키는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이 사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법학을 그만두고, 당대의 거장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의 수제자가 된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20세기 초 활동무대를 당시 첨단 유행도시였던 프랑스 파리로 옮긴 스트라빈스키에게도 드디어 행운이 찾아온다. 동향의 다재다능한 공연기획자 디아길레프(Sergei Pavlovich Diaghilev, 1872-1929)를 만난 것이다. 디아길레프는 단번에 스트라빈스키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챘다. 그리고는 자신이 운영하는 발레뤼스(러시아발레단)의 레퍼토리를 위한 발레음악을 스트라빈스키에게 의뢰하는데, 이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불새(fire bird, 1910)다. 불새는 파리 초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스트라빈스키는 일약 파리의 스타 작곡가로 등극한다. 불새의 성공으로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두 번째 발레음악을 의뢰한다. 두 번째 작품은 페트로슈카(Petrouchkah, 1911)다. 이 작품도 성공을 거두자 스트라빈스키는 차기작에서 전례 없이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 1913)이란 작품이다. 봄의 제전은 타악기의 강력한 리듬으로 원시주의를 표방했다.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 모두 흥행을 점쳤으나 이 생경한 작품의 결과는 처참했다. 공연장은 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 장면은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도입부에서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초연은 분명 실패였다. 하지만 봄의 제전의 유명세는 오히려 커져 갔고, 오늘날에도 무용가들의 중요한 창작 원천이 되고 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이어서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스트라빈스키는 (1962년에 소련의 공식 초청을 받기 전까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191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음악가로 평가받았지만, 제1차 대전 이후에는 고전주의로 회귀하는 새로운 파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시기의 작품들은 3대 발레음악으로 불리는 불새, 페트로슈카, 봄의 제전을 비롯한 초기 작품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다. 생애 후기에 작곡된 쇤베르크식 무조음악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성 짙은 초기 작품들의 아우라는 대단했다. 스트라빈스키는 1934년 프랑스에 귀화하고, 1939년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미국에 귀화한다. 대부분의 망명 작곡가들이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교류할 정도로 사교적이었다. 1962년(80세)에는 소련 작곡가 연맹의 초청으로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조국의 땅을 밟는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머무는 동안 쇼스타코비치(Dmitrii Shostakovich, 1906-1975),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1903-1978)과 같은 걸출한 후배들과 만나 교류했다.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1874-1951)가 죽은 후 스트라빈스키는 현대음악의 독보적인 거장으로 존경받았다. 1971년(89세) 뉴욕에서 사망했고, 베네치아 산 미켈레 성당에 잠들어 있던 필생의 은인 디아길레프의 곁에 묻힌다. 현재 프랑스 파리의 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 앞에는 스트라빈스키 조각분수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가 프랑스 파리에 미친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 1873-1943)의 부친은 러시아의 귀족으로 경제적으로도 부유하여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다. 네 살 때 스스로 피아노를 연주하더니 10대에 접어들며 작곡을 시작했고, 17살 때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완성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전도유망한 청년 음악가였다. 그랬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24살(1897년)에 발표한 교향곡 1번이 혹평을 받는다. “화려한 경력을 쌓으려던 내 꿈이 산산이 부서졌다” 교향곡 1번 초연 후 라흐마니노프는 우울의 나락에 빠졌다. 교향곡 1번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더 이상 연주되지 않았다. 그의 우울증은 최면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심해졌다. 라흐마니노프는 3년여 동안 주치의 니콜라이 달(Nikolai Dahl)의 치료를 받으면서 건강을 회복해간다. 그리고 1901년(28세) 희대의 히트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세상에 내놓는다. 피협인데도 피아노가 반주하고, 오케스트라가 멜로디를 연주하는 독특한 시도로 1악장을 연다. 누가 들어도 애수에 가득 찬 러시아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성공의 1등 공신이었던 달박사에게 헌정된다. 라흐마니노프는 비로소 자신감을 되찾고, 성공가도를 다시 질주하기 시작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라흐마니노프는 공산화된 조국을 뒤로 하고 망명길에 오른다. 일단 노르웨이에 갔다가 이듬해인 1918년 미국으로 떠난다. 1928년에는 동족의 망명 연주자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3-1989)를 만난다. 호로비츠는 라흐마니노프보다 30살 연하였지만 이후 평생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다.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의 연주 실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특히 1909년(36세)에 발표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하여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다”라고 말하며 극찬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망명 후에 피아노 협주곡 4번(1926년)을 만들긴 했지만, 눈앞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실상 전업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2m에 육박하는 큰 키에 손을 펴면 엄지와 새끼손가락 사이가 30cm를 넘는 신체를 가진지라 그의 연주는 범인이 불가능한 영역에 있었다. 그가 한국인에게 유난히 인기가 많은 이유는 탁월한 신체조건을 활용한 기교와 러시아적 애수를 담은 멜로디 때문이다. 그의 선율은 차이콥스키와 같은 듯 다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조국 러시아를 그리워했지만 다시는 그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43년 70세에 미국 베벌리힐스에서 피부암(흑색종)으로 사망한다.
러시아 5인조의 막내인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는 귀족 집안 출신으로 가문의 전통대로 해군에 입대하여 장교가 된다. 어린 시절 귀족들의 교양 차원에서 음악을 익힌 그가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로 들어선 건 발라키레프를 비롯한 5인조 멤버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에 매료되었고, 잠재되어 있던 음악적 재능이 꽃을 피우게 된다. 특히 관현악에 일가견이 생겼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71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관현악법 및 작곡법 교수로 임용된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게다가 정규교육과정을 밟지 않은 사람을 교수로 발탁한 것은 꽤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당시 서양식 음악에 정통했던 차이콥스키와 교류하며 막역한 우정을 쌓았다. 또한 3년 동안 안식년을 갖고 독학에 매진하기도 했다. 그 결과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대가가 되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대표작은 1888년에 만든 교향모음곡 ‘세헤라자데(Shekherezada)’다. 아라비안 나이트(천일야화)에 모티프가 있는 작품으로 그의 관현악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탄생했다.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오리엔탈리즘이 돋보이는 4악장의 작품이다. 과거 김연아 선수가 피겨 스케이팅 배경음악으로 세헤라자데를 선곡하면서 우리나라에 친숙한 곡이 되었다. 사실 세헤라자데보다는 ‘왕벌의 비행’이라는 소품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대표하는 곡으로 더 유명했었다. 이 작품은 1900년에 초연한 오페라 ‘살탄 황제의 이야기(The Tale of Tsar Saltan)’의 2막에 등장하는 곡이다. 벌떼의 습격을 받은 백조의 모습을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여러 악기로 묘사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피아노곡은 이 관현악곡을 러시아의 후배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가 편곡한 것이다. 관현악의 대가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편곡자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러시아 음악의 선구자였던 미하일 글린카Mikhail Glinka, 1804-1857)의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Ruslan and Lyudmila)’를 편곡했다. 러시아 5인조 동료들의 작품에도 손을 댔다. 보로딘(Aleksandr Borodin, 1833-1887)의 미완성 오페라 ‘이고르공(Prince Igor)’과 무소륵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1839-1881)의 대작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가 대표적인 편곡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한동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편곡작품으로 무대에 오르다가, 5인조 동료들의 다소 거칠지만 독창적인 작품을 훼손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요즘은 최소한의 수정을 거친 원곡이 연주되고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 5인조의 국민악파로 음악 인생을 시작했지만, 스스로 서양 음악 양식을 독학하여 둘을 융합시켰다. 글라주노프, 레스피기,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등 당대를 풍미한 러시아의 거장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았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해임되었다가 복직되었지만 곧 은퇴를 했고, 지병으로 1908년 사망한다.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는 러시아 5인조뿐만 아니라 러시아 음악사상 가장 독창적인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그가 독창적인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리스 고두노프’와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걸작을 남긴 무소륵스키는 술에 의존하다가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무소륵스키는 대대로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엄친아였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워 썩 잘 쳤지만 가문의 전통에 따라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그는 군 복무 중 러시아 음악의 선구자인 글린카(Mikhail Glinka, 1804-1857) 의 후계자 다르고미시스키(Aleksandr Dargomyzhskii, 1813-1869)와 친분을 쌓게 된다. 또한 5인조의 리더 발라키레프에게 작곡을 배운다. 무소륵스키는 1858년 군 전역 후 음악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1862년 완전체가 된 5인조와의 교류도 심화되었다. 이즈음 음악에 눈을 떠가는 무소륵스키에게 큰 위기가 닥친다. 1865년(26세) 어머니의 죽음이다. 이때 슬픔과 충격을 이기고자 과음을 반복했고, 알코올 의존이 심해졌다. 그럼에도 1867년 완성한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Night on Bald Mountain)’은 무소륵스키다움이 물씬 풍기는 수작이었다. 악마들이 술잔치를 벌이다 새벽 종소리와 함께 사라진다는 판타지를 곡에 담았다. 격렬한 리듬의 변화와 선명한 선율적 색채는 가히 압권이다. 이어진 걸작은 1869년 작곡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다. 황권 찬탈의 야심을 품고 황태자 드미트리를 살해한 후 그의 망령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는 남자 보리스 고두노프의 이야기다. 이 오페라는 러시아 오페라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도 러시아어로 된 오페라 가운데 가장 자주 연주된다. 과거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쇼스타코비치가 대폭 개정한 수정판이 연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작품원전을 연주하는 것이 대세가 되면서 무소륵스키 오리지널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도 무소륵스키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륵스키의 절친인 화가 하르트만(Alexandrovich Hartmann, 1834-1873)이 1873년 39세의 나이에 갑자기 죽자 이듬해 열린 유작 전시회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피아노곡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피아노곡보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이 관현악으로 편곡한 작품으로 더 자주 연주된다. 절친이 죽자 무소륵스키의 알코올 중독은 더 심해졌고, 다른 천재들처럼 너무나 젊은 나이인 42세(1881년)에 영면한다.
‘러시아 5인조’에는 19세기 중반 서유럽 음악을 하는 러시아 주류 음악계가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민족주의 음악가 5명을 통째로 얕잡아 보는 뉘앙스가 들어있다.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바로크(baroque)’나 빛에 따른 색채의 변화를 그림에 담은 ‘인상파(impressionism)’도 원래는 이들 유파를 비꼬는 투의 부정적인 의미였다. 그런데 바로크나 인상파가 이런 부정적인 위상을 극복하고 후대의 재평가를 받아 위대한 예술 유파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러시아 5인조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그들도 ‘5인조(패거리)’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과감히 받아들인 후 음악사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혁혁한 성과를 낸 것이다. 5인조 멤버는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1837-1910),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 세자르 큐이(César Cui, 1835-1918), 알렉산드르 보로딘(Alexander Borodin, 1833-1887), 그리고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다. 연배로 딱 중간에 위치한 밀리 발라키레프가 리더 역할을 했다. 러시아 5인조의 역사는 1856년 발라키레프와 큐이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이듬해에 무소륵스키가, 1861년에 림스키코르사코프가, 1862년에 보로딘이 합류하면서 완전체가 된다. 이때 막내인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살에 불과했고, 최연장자인 보로딘 조차도 29살이었으니 매우 젊은 음악가 단체가 탄생한 것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이다. 직업(전공) 역시 다양하다. 발라키레프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보로딘은 화학을 전공하여 화학자로도 활동했다. 큐이와 무소륵스키는 육군장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장교였다. 서유럽 음악에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은 러시아 고유의 선율을 찾아 자신들의 독창적인 민족주의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이들 중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친 음악가를 뽑으라면, 그룹의 막내뻘인 무소륵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될 것이다. 둘 다 오페라와 관현악에 모두 능했다. 특히 1871년 27세의 나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음악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넘어서는 관현악 작곡 기량을 선보였다. 러시아 5인조는 동시대의 천재 차이콥스키와 협조와 반목을 거듭하면서 성장해갔다. 미하일 글린카(Mikhail Glinka, 1804-1857)가 물꼬를 튼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을 계승하여 세계적인 입지를 확보한 것은 그들의 큰 공적이다. 그리고 그 공은 보물 같은 후배 작곡가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i Shostakovich, 1906-1975)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