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도심 한복판에 절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인 법장사다.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대릉원·황리단길 인근에 있지만, 호기심 많은 일부 외국인 관광객을 제외하면 대다수 관광객들은 이곳을 무심코 지나친다. 법장사는 도심 외곽이나 산자락에 있는 사
영남대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연혁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대구대학 설립인가가 나온다. 1947년 9월 22일자다. 다음으로 청구대학설립인가가 나온다. 1950년 4월 10일이다. 그리고 나서 1967년 12월 22일, 대구대학 설립인가로부터 정확하게 20년 3개월이 지
현진건의 『무영탑』 - 아사달과 아사달의 탄생 아사달과 아사녀가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로 알고 있지만, 삼국유사를 비롯한 역사서에는 찾아볼 수 없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등장은 빙허(憑虛) 현진건(1900~1943)의 소설 『무영탑(無影塔)』에서 기원한다. 1938~19
“아이고 참봉어른 그기 정말입니꺼?” 큰 사랑채 방문이 활짝 열린 가운데 문파 선생과 동네 소작인 한 명이 마주 앉아 실랑이하고 있었다. 소작인은 누대에 걸쳐 최부자댁 전답을 붙여 온 사람으로 최염 선생 말씀으로는 ‘우리 집안을 먹여 살려온 일등공신’이라는 사람이었다
경주시 동부동 경주경찰서에서 동쪽으로 200m쯤 가다보면 경주읍성을 만날 수 있다. 지난 2018년 말 복원을 마친 읍성 동문인 향일문과 동쪽 성벽 일부다. 옛 신라 왕경을 품은 조선시대 경주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경주시는 현재 경주읍성 복원과
“해방이 되고 한참 뒤, 반민특위라 카는 게 맹글어져서 친일파들을 무조건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때 작은 할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대구 반민특위로 잡해 가셨어요!” 반민특위와 관련해 최염 선생이 가장 기억되는 일로 작은 할아버지 최윤 선생이 반민특위에 체포된 사실을 꺼
“짐은 세계의 대세와 ~ ~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후략)”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를 통해 일본 히로이토(裕仁) 일왕(日王)의 항복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일왕의 목소리는 여느 방송 때와
이쯤 되자 문파 선생도 단안을 내렸다. 선생은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채로 나왔다. 아리가는 선생이 몰라볼 정도로 수척한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아니, 최선생, 편찮으시다는 말씀만 듣고 속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이렇게 몸을 상하시다니요…” 아리가는 진
낮은 건물들 사이로 봉긋하게 솟은 신라 고분의 부드러운 곡선. 경주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그런데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 서편엔 특이하게 생긴 고분이 있다. 다른 무덤과는 달리, 낮고 평평한 모습이 마치 누군가 무덤 위를 뭉텅 잘라낸 것처럼
아리가는 조선의 문화에 관심이 많은데다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라 전통적인 양반가이자 부잣집인 최부자댁에 상당한 호기심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여행을 좋아하고 고건축에 대한 취미를 가진 터라 경주를 좋아해 자주 최부자댁을 찾은 인물이었다. 이에 더해
두 청년의 첫 만남 김동리(1913~1995)와 미당 서정주(1915~2000)는 우리나라 시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은 스무 살 언저리에서부터 시작한다. 1933년 동리가 스물 하나, 미당이 열아홉이던 시절 선학원(禪學院)에서 처음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문파 선생은 ㈜백산무역을 경영하는 것을 핑계로 최부자댁 모든 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승화시키며 아름답게 마감했다. ㈜백산무역이 파산하고 최부자댁이 압류상태에 놓이자 문파 선생은 모든 것을 깨끗이 단념하고 부자의 명성은 물론 그때까지의 호의호식을 포
국립경주박물관 마당 한쪽엔 ‘에밀레종’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 있다. 봉덕사종(奉德寺鐘)으로도 불린다. 신종의 주인공인 신라 33대 성덕왕(재위 702~737)은 8세기 초반 35년간 재위하면서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국가경
문파 선생의 문화적 업적 중 하나는 경주의 역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동경통지(東京通志)를 편찬한 일일 것이다. 동경통지는 1933년에 한문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없던 것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다. 원래 1669년(현종10년)에 민주면(閔周冕)이라는 사람
본보는 지난 2023년 12월부터 2025년 2월까지 연중기획 ‘다시 돌아보는 효자, 열녀비’를 통해 13회에 걸쳐 총 31곳의 효자·열녀비에 담긴 내용을 다시 소개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본지에 기고했던 고 함종혁 선생의 글을 토대로 효자·열녀비를 다시
문파 선생이 가장 열심히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던 시기는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창립한 1919년부터 독립자금 대는 일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진 후 주주 간 분쟁으로 안희재 선생과 대표이사직을 맡았던 문파 선생이 물러났던 1925년 사이가 절정기라 할 수 있다. 뒤에 백산은
헌병대 하면 지금은 군의 기강을 잡을 뿐 민간과는 별 상관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헌병대는 지금의 헌병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일제는 군국주의 국가였다. 당연히 군이 최고의 권력을 가진 곳이었다. 헌병대는 그 중에서도 군을 감찰하고 통제하는 곳이었다. 일제
세련되고 독특한 조형미, 화려한 장식과 황금빛 찬란함…. 신라의 상징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신라 금관이 빠질 수 없다. 그중에서도 처음 세상에 나온 금관총(金冠塚) 출토 금관(국보 제87호)은 순도 90%에 육박하는, 보는 이를 신비로움에
이전 회에서 문파 선생이 어떤 방법으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만들었는지 설명했다. 여기서 실제로 많은 투자자들이 문파 선생을 믿고 사업에 투자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주최부자라면 무려 10대 넘게 부잣집으로 소문 난 명문가에다 더구나 문파 선생 당대에
시인 김동리는 왠지 어색하다. 하지만 엄연한 시인이었다. 소설가가 아닌 시인 김동리는 익숙하지 않지만, 소설에 앞서 시로 먼저 신춘문예에 등단한 시인이다. 1995년 세상을 떠났을 때 미발표 유고시 30편이 발견되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소설이 아닌 시였다. 시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