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기운이 가득한 11월의 어느 화창한 날, 가을바람의 차디찬 공기가 온 산을 물들여 색이 예쁘게 변한 단풍과 나뭇잎으로 가득했던 풍경을 만끽하며, 며칠간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만 보다가 맑은 하늘을 보며 오다보니 어느새 오늘의 문화탐방 장소, 천년고도 신라의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한 문무왕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는 감은사지에 도착했다. 감은사는 바다와 멀지 않은 경주시 양북면에 위치한 절로 지금은 넓게 자리 잡아있던 절의 흔적만 남아 있어 처음 마주한 감은사지는 나에겐 황량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온 나에게는 신라와 관련된 내용은 역사책을 통해서 배우고 익힌 내용이 전부였기에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수도 경주는 웅장하고 화려함이 가득한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렇듯 단순히 역사책을 통해서만 경주에 대해 보고 배운 나였기에 감은사지의 첫 모습은 어찌 보면 황량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감은사지에 들어서며 주변에 있던 표지판에는 감은사터와 삼층석탑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지금의 장소에 절을 세우기 시작하여 아들인 신문왕 때 완성한 절이다. 문무왕이 처음 짓기 시작한 절... 문무왕은 경찰이 되어서 처음 대구를 떠나 경주에 왔던 나에게 가장 특별한 왕이었다. 친구들과 경주 보문단지에 놀러 왔던 어린시절.. 경주의 많은 왕릉을 보며 ‘신라의 왕들은 모두 저리도 높고 웅장하게 자신의 권위를 마치 자랑이라도 하려는 냥 서로 경쟁하는 듯 짓는 구나. 저 능을 짓지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들었을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문무왕이 잠든 문무대왕릉(수중릉)은 그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 죽어서도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는 뜻을 품은 왕, 그런 문무왕이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동해 바닷가에 짓기 시작한 감은사 터에 지금 내가 와있다는 생각을 하니, 처음 느꼈던 감은사지의 황량했던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고 들판이 넓게 펼쳐진 터에서 ‘이곳에 절을 짓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문무왕은 어떤 느낌이었을까’혼자 잠시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남아있는 감은사 터에는 감은사 동탑과 서탑이 우뚝 자리 잡고 있고 있는데 가까이서 얼핏 보기에도 커 보이는 이 탑들은 현재 남아있는 경주의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석탑 안에서 사리함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석탑의 크기만큼이나 내부공간도 제법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석탑 옆으로는 넓게 금당 터가 펼쳐져 있는데 금당의 바닥부분에는 옆으로 놓인 큰 받침돌 위에 장대석이라 불리는 돌을 올려놓아 그 아래는 빈 공간들이 있었다. 이 공간은 신라를 지키고자 용이 되겠다는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라고 하는데 문무왕의 아들이자 효심이 지극한 것으로 알려진 신문왕이 감은사를 완공하면서 부왕을 생각하여 만든 공간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감은사지 주변으로 잔디가 깔린 바닥에 둥근 돌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돌들은 감은사를 지을 때 회랑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회랑이란 사원을 지을 때 주변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를 말하는데 건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지금도 감은사가 터만 있는 것이 아닌 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정말 웅장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처음 감은사지를 마주했을 때 받았던 첫 느낌은 조금 실망감을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터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탁 트인 시야와 맑게 게인 하늘과 살짝살짝 살결에 닿는 차갑지만 시원했던 바람, 내겐 조금 특별했던 문무왕이 이 곳 나와 같은 곳에 서서 느꼈을 기분을 상상하니 감은사지를 떠나는 발걸음에도 석탑과 터만 남아있는 이 장소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죽어서도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한 문무왕... 그 문무왕이 쉬어가는 이곳에 또 발길이 닿을 듯하다. 신라문화탐방동아리 순경 김영식
맑은 하늘과 알록달록 가을을 품은 나무들이 색을 빛내는 그렇게 예쁜 날. 10번째 문화탐방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로 들어서는 길, 왼편 양동초등학교에서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들린다. 마을길 옆으로 소박하니 피어난 국화와 이름 모를 꽃들이 더해져 가을소풍을 온 것 같은 설렘으로 가슴이 뛴다. 양동마을은 설창산의 산등성이가 네 줄기 능선으로 갈라져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 최대 규모의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이다. 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160여 호의 고가옥과 초가집이 어우러져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 알고 있었는데, 내가 직접 마주선 양동마을은 동그란 초가지붕 뒤로 중후한 기와가 몇 채 보이는 소담한 마을로 보여 의아함을 가득 품고 문화탐방을 시작했다. 원래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사돈지간이었으며 서로 의식과 경쟁으로 마을이 번창하고, 더 뛰어난 인물이 배출될 수 있었다는 문화해설사분의 설명을 들으며 본격적으로 들어선 양동마을은 처음에 느낀 소담한 마을이 아니었다. 관가정(보물 제442호)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자 물봉동산이라는 너른 공간이 나고 저 멀리 골짜기 마다 기와와 초가가 자리 잡은 것이 마을규모가 한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도 6.25때 소실돼 반 정도가 남은 것이라 하니 옛 모습이 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더욱이 국사시간에 말로만 들었던 99칸의 기와집. 일부 불타 규모가 줄어들기는 했으나 보기에도 규모가 상당한 보물 제412호 향단을 보며 조선시대에 이 마을의 위세가 엄청났을 거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관가정과 향단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걷는 길. 동네 어르신께서 손을 분주히 놀리며 짚으로 예쁘게 댕기를 땋고 계신다. 알고보니 댕기처럼 엮은 짚은 초가지붕에 이엉을 얹기 위해 엮는 거라고. 새로운 모습에 신기해하고 있던 찰라 무첨당에 도착한다.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종가 별택으로 마루와 널따란 정자가 이어져 있는 이색적인 모습과 흥선대원군이 이곳에서 머무르며 썼다는 ‘좌해금서’ 편액을 보니 이 건물이 많은 학자와 사람들이 모이는 핫플레이스였다는 해설사분의 설명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방문지인 서백당은 양민공 손소가 지은 월성 손씨의 종가집으로, 이 집터를 잡을 때 설창산의 혈맥이 모이는 이 터에서 세 명의 위대한 인물이 배출될 거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경절공 우재 손중돈 선생과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이 여기에서 태어났고 아직 한명은 미탄생이라 한다. 요즘도 서백당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하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물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두 시간여 양동마을을 둘러보고 경주로 돌아오는 길. 천년고도 신라의 도시로 일컬어지는 경주에서 조선을 만난 것이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 옛것을 꾸준히 지켜나간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계속 유지돼 많은 사람들이 찾아 뜻밖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문화유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신라문화탐방동아리 경장 이종희
계속 머물 것만 같았던 여름이 가고, 천년고도 경주에 ‘잊혀진 계절’ 가을이 왔다. 쓸쓸하면서도 기분 좋은 가을, 그중 우리 민족이 예부터 12개월 중 가장 으뜸으로 여겼던 시월(예부터 새로 난 곡식을 신에게 드리기에 가장 좋은 달, 으뜸달이라는 10월은 시월상달(十月上─)이라고 도 부른다 )그런 시월의 어느 날, ‘천년고도의 파수꾼’ 경주경찰서 문화탐방 동아리는 불교유적의 보고(寶)이자 신라인들의 영산(靈山)이라는 경주 남산으로 향했다. 가을을 맞은 남산은 떨어진 낙엽으로 다소 외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온화한 미소로 따뜻하게 우리를 반겨주는 불곡마애여래좌상[佛谷磨崖如來坐像]이 나타났다. 불곡마애여래좌상은 경주 남산 불교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인 7세기 경 조성된 불상으로 남산 불교유적의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어 남산 불상의 할머니라고도 불린다. 그 모습 또한 이 불상의 별명인 ‘할매부처’처럼 손녀, 손자를 보며 웃고 있는 인자한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우리는 불곡마애여래좌상의 따뜻한 환영인사를 받고 두 번째 탐방지인 중창지로 향했다. 중창지로 향하던 중 지금은 대부분 없어진 남산신성(南山新城 : 신라 진평왕 13년(591)에 축조)의 성곽 일부를 볼 수 있었다. 비록 나무와 흙에 파묻히고 유실된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 가운데서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남아있는 성곽의 모습은 기개가 대단해 보였다. 이어서 성곽을 지나 남산신성 안쪽으로 오르자 문무왕 3년(663년)에 지은 남산신성 내 가장 큰 창고이자 군량미를 보관했던 중장치가 나왔다. 지금은 그 터와 주춧돌의 흔적들 밖에 볼 수 없지만, 아직까지도 중창지 주춧돌 아래에서 탄화된 쌀이 발견되고 있으며 실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데 1,000년이 지난 쌀을 아직도 볼 수 있는 게 무척 신기하면서도 마치 신라시대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가져다 준다. 중창지에서 김구석 소장님의 해설을 듣다보니 어느덧 해가 숨고 달이 떠올랐는데 달빛의 안내를 받으며 다음 목적지인 전(傳) 삼화령(三花嶺)으로 향했다. 삼화령(三花嶺)이란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달여 미륵세존께 드렸다는 삼국유사 설화 속 장소로 전 삼화령은 미륵세존으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상(石造三尊佛像) 중 본존불이 출토 돼 삼화령으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아쉬운 것은 석조삼존불상의 불상 3개 모두 코가 파손되어있는데, 1925년 석조삼존불상의 본존불발굴당시 본존불 불상은 코가 온전했으나 불상의 코를 갈아 마시거나 만지면 아들을 낳는 다는 속설 때문에 발굴이후 한 시민에 의해 코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불상의 코 부분 파손은 비단 경주의 석조삼존불상 뿐만 아니라 20세기 국내의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전국 각지 불상의 코 부분이 많이 훼손되었다. 당시 남아선호사상이 문화재 파손으로 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아쉬운 사실이지만 이 또한 그 당시 우리나라 시민의 문화와 사상을 알 수 있는 예이며 역사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탐방지인 월정교로 향했다. 월정교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이어준 다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언론보도에서는 삼국사기에 월정교는 760년에 지어졌고, 원효대사는 686년에 사망해 월정교와 원효대사의 시대는 무려 100년 차이가 발생하며, 또 삼국유사에서는 원효대사가 건넜던 다리를 월정교가 아닌 나무로 된 작은 느릅나무 다리로 기록하고 있다고 보도해 혼선을 주고 있다. 진실이야 어쨌든 올해 개장한 월정교는 보는 사람들에게 하여금 상당한 아름다움과 신라의 미를 전해준다. 또한 원효대사가 어떤 다리를 건넜든 월정교가 1200년이 지나 지금 우리 눈앞에 다시 있는 것처럼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와의 이야기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의 9번째 문화탐방이 마무리되었다. 이번 문화탐방을 통해 만난 가을밤의 남산은 낮과 달리 세월의 덧없음과 쓸쓸한 분위기, 그러면서도 신라의 소박하면서도 찬란한 미를 동시에 느끼게 해주며 색다른 감동을 전해준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은 분들에게 가을밤의 남산탐방을 추천한다. 남산의 달밤은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이라는 유명 음악과 글귀처럼 여러분에게 멋진 날을 선사할 것이다. 경주경찰서 정보계 순경 배기흠
7월의 느려터진 폭염시계가 애잔히도 9월을 불러오는 시간을 더디게만 만들던 것도 어느덧, 불어오는 바람에 선뜩하게 느껴지는 냉기가 온 몸을 감싸 도는 9월의 끝, 여름날의 폭염시계로 멈춰 져 있던 경주경찰의 문화 탐방이 다시 시작 되었다. 불어오는 9월의 바람 속 냉기가 몸을 휘 감아 움츠려 있던 몸이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동아리 회원들의 따뜻한 웃음과 반가움으로 이내 날아가 버리고 몸에 따스함을 품은채 오랜만의 탐방을 시작한다. 이번 탐방의 장소는 선덕의 자취가 남겨져 있는 분황사와 황룡사지다. 경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물론 타지생활로 10년 정도 경주를 떠나 있었다는 핑계를 대 보기는 하지만) 분황사와 황룡사지는 나에게 있어서는 지금까지도 ‘학창시절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지나치던 삼거리 오른쪽에 있던 3층짜리 석탑이 남아있는 절, 거길 좀 더 지나면 항상 신호가 걸려 집으로 가는 시간을 늦추던 사거리 오른쪽에 있는 9층짜리 목탑이 있었다던 절의 넓디넓은 터’정도의 인식이 전부였다. 물론 이번 탐방을 끝낸다고 하더라도 그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경주사람이지만 처음 가보는 분황사 입구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나는 찰나 문뜩 스쳐가는 이유모를 향기를 뒤로하고 어수선한 인파속으로 파묻힌다. 이윽고 시작된 해설사의 분황사에 대한 설명, 탑이란 부처님의 무덤, 그 안에 모셔진 진신사리와 법신사리, 그리고 분황사의 유래……. 진즉에 알고 있던 삼국유사의 모란꽃 설화가 분황사의 이름을 짓는데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기억 저편에 있던 조각들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간다. 모란꽃 그림을 보내온 당태종이 자신을 향기 없는 꽃으로 비하하는 것을 알고 보란 듯이 사찰이름을 분황사(芬皇寺, 향기로운 임금이 세운 사찰)로 명명하면서 자신의 자존심, 아니 난 고집이라고 말하고 싶은 강단을 보인다. 그 고집 때문이었을까? 당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던 황룡사가 현재는 그 터만을 남긴 채 황룡사지로 전해 내려오는 것과는 다르게 선덕의 고집 속에서 분황사는 아직까지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모습이 유지되어 이어오고 있다. 처음 분황사 입구를 지나치면서 맡은 이유모를 향기도 분황사에 남아있는 선덕의 고집을 무지한 나에게 알려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선덕의 고집을 뒤로하고 오롯이 난 오솔길을 향해 간 곳은 서두에 말했던‘항상 신호가 걸려 집에 가는 버스의 도착을 늦추던’ 그 사거리 오른쪽에 남아있는 넓디넓은 절의 터 황룡사지이다. 그 엄청난 규모를 자랑이라도 하듯 절의 터라고 남아있는 넓은 터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세차게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터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확인하고 싶었던 내 바람과는 다르게 조금 더 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곳은 황룡사지 옆에 새워진지 얼마 되지 않은 “황룡사 역사문화관”이었다. 문화관 내에서 황룡사에 대한 3D 영상, 1/10 크기로 축소하여 만들어 놓은 황룡사 9층 목탑,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목탑 설계의 구조와 비밀, 황룡사지에서 나온 역사적 유물들에 대한 설명 등등……. 그러나 난 여전히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관에서 들은 설명 보다는 오솔길을 걸어오면서 맞은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자꾸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작년 5월, 부산청에서 경북청으로 청간 이동을 하면서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 이동에 마음속 불안과 공허가 많이 남아있었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 어머님께 이끌려 간 사찰에서 기도를 드리는 어머님 몰래 혼자나와 등을 달면서 이런 글을 쓴 기억이 난다. “지금 내가 한 이 선택이 잘한, 옳은 선택 이였기를 바랍니다.” 평소 종교를 믿지 않는 나지만 이때만큼은 나도 모르게 종교에라도 의지해 보고 싶었을 만큼 불안이 컷던 모양이다. 선덕도 그렇지 않았을까? 자신의 선택 하나하나가 나라의 생과 사를 가를 만큼 중요한 선택이고, 매시간 매순간 그 선택을 해야 하는 최초의 여왕이 가지고 있던 불안과 공허를 엄청난 규모와 찬란함을 자랑했던 황룡사에 의지하면서 애써 감췄을 것이다. 선덕의 불안과 공허를 감싸주었던 황룡사가 훗날 몽고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어 남아있는 그 절터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선덕의 공허가 더 애잔하게 느껴진다. “역사는 이어져 있고 중첩되어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어느 역사가의 말인지 혹은 어떤 유명한 인사의 말인지 모른다. 또 그 누군가가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번 탐방을 마무리 하면서 나 혼자만의 자의적 해석으로는 ‘과거 누군가의 남김이 현재에 있는 누군가의 생각으로 이어지고, 또 현재 누군가의 남김이 미래 누군가의 생각으로 이어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중첩되고 이어진다.’라는 의미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황사에 남겨져 있는 선덕의 고집, 황룡사지에서 불어오던 바람 속에 남겨져 있던 선덕의 공허함, 그 속에서 현재의 내가 돌아보는 과거……. 이런 이어짐에는 무언가의 남김이 있어야 할 듯 싶다. 거국적인 역사를 위한 남김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작은 남김(좋은 남김이든, 그렇지 않은 남김이든 불문하고)이 필요할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가을은 무언가를 남기기 참 좋은 계절이리라. 경주경찰서 경무과 경장 김재은
지난 다섯 번째 탐방지였던 오릉에서 내남 방면으로 내려가다 보면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자그마한 숲이 있다. 어쩌면 흔할 수도 있는 이 숲이 경주시민들에게 특히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바로 신라시대 가장 아름다웠던 이궁지이자 신라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포석정(포석정지, 사적 제1호)이 있기 때문이다. 경주 남산 서쪽에 위치한 포석정은 원래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과 정자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복 같이 생긴 이 구불구불한 모양의 돌홈, ‘곡수거’만이 남아있다. 수로에 흐르던 물길의 길이는 약 22m로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술잔이 흐르는 방식과 시간이 다 달랐다고 한다. 이미 오랜 세월을 거쳐 온데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무분별한 보수로 지금은 원형이 많이 파손되긴 하였지만 전체적인 형태나 모양을 보니 신라인들의 뛰어난 석조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 제49대 헌강왕대(875~885년)의 태평스러운 시절에 왕이 포석정에 들러 좌우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흥에 겨워 춤추고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왕들이 신하들과 함께 포석정 수로에 술잔을 띄워 놓고 시를 읊으며 연회를 하던 장소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포석정이 누구에 의해, 어떤 용도로 축조되었는지는 다른 건물들의 흔적이 없어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음이 알려지고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기류도 출토됨에 따라 포석정이 단순히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을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포석정에서 나와 왼편에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능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신라 제6대 지마왕(112~134)이 잠들어 있는 곳, 지마왕릉이다. 지마왕은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던 왕이라고 한다. 지마왕릉도 역시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쌓여 있었는데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반 원형봉토분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단아하면서도 절제된 듯한 자태가 느껴지는 듯 하였다. 지마왕릉 옆에는 또 다른 목적지로 안내하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햇빛을 적당히 가려주는 나무들과 길을 따라 나있는 싱그러운 풀잎들을 만지며 걷다보면 다양한 수생식물이 공존하고 있는 생태공원 태진지가 나온다. 태진지를 건너 소나무숲을 지나면 움직이는 햇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신비한 미소를 지녔다는 배리 삼존석불입상(보물 제63호)이 있다. 이 세 석불은 이곳 남산 기슭에 흩어져 누워 있던 것을 1923년에 지금의 자리에 모아서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특히 중앙에 자리잡은 불상은 극락 세계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에 풍만하고 네모난 얼굴, 둥근 눈썹, 통통한 뺨에서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이 느껴졌다. 그 아름답다는 삼존불의 미소는 이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이 옅어졌지만 여전히 삼존불 자체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움은 사람들에게 미소를 안겨주었다. 신라인들의 풍류와 기상이 담긴 포석정에서부터 지마왕릉과 삼불사 배리삼존불까지 이번 탐방을 통해 골짜기마다 수많은 불교유적과 왕릉이 살아 숨쉬고 있어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경주 남산지구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어서 더욱 뜻깊은 탐방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경주의 찬란했던 시간들이 잘 보존되어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이신화 순경 여성청소년과 여청수사팀
최근 젊은이들에게 가장 핫한 관광지 중 하나인 경주에 발령받아 생활한 지도 2년이 지났지만 경주에 여행을 오는 친구들이 유적지, 맛집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하면 한 번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인터넷 블로그를 검색하던 나의 모습을 보며 ‘경주에 근무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데 난 아직 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하는 자책을 하곤 하였다. 이런 내 마음과 통했던 것인지 경주의 다양한 문화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주변 맛집에서 밥도 먹는 ‘경주경찰서 문화탐방동아리’가 생기고 2018년 2월 경주향교를 시작으로 경주국립박물관, 첨성대, 오릉 등을 돌아 2018년 5월의 마지막 날, 매우 특별한 손님(김상운 경북지방경찰청장님)과 함께 경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인 동궁과 월지로 떠나 본다. 동궁과 월지(사적 제18호)는 신라 왕궁의 별궁과 연못으로 신라 제 30대왕인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강한 국력과 전쟁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일환으로 지은 것으로, 1980년대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파편이 발굴되면서 ‘달이 비치는 연못’이란 뜻의 ‘월지’라고 불리기 전까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러기 안(雁)자와 오리 압(鴨)자를 써서 ‘안압지’로 불리워진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3개의 건물과 연못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겨준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제1호 건물은 건물 아래에 제기(祭器)와 그릇들이 많이 출토되어 용황에게 제사를 지내 신당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가운데 있는 전체 건물 중에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인 제3호 건물은 ‘바다에 임해 있는 궁전’이라는 뜻으로 임해전이라고도 하며, 자신의 무덤조차 바다에 둘 정도로 바다를 사랑하는 문무대왕의 뜻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임해전지라고도 불리는 월지는 인공연못임에도 물을 끌어들이는 입수 장치나 배수구 시설을 설치하여 물이 흐르도록 하였고, 그렇게 큰 규모가 아님에도(가로세로 약 200m 총 둘레 1000m) 가장자리에 굴곡을 만들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여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껴지도록 하여 넓은 바다를 연못에 담아내고자 했던 신라인 지혜를 느낄 수 있었으며, 굴곡져 아스라이 이어지는 풍경은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또한, 동궁과 월지를 통해 신라인들이 포용력을 엿볼 수 있었다. 동궁과 월지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동원되어 건설되었는데 동궁과 월지를 살펴보면 큰 나무를 사용한 고구려의 건물양식과 신선사상이 배경인 백제의 도교 사상이 잘 융화되어 있다. 특히 연못 가운데 세 개의 인공 섬과 12개의 봉우리는 중국에서 신성시 하는 삼신산(三神山)과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峰)을 상징하는 것으로 백제도교의 유토피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동궁과 월지에서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귀면와(鬼面瓦)와 금동가위, 유리공예품, 금동불상 등 3만 여점의 유물들은 신라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그 중에서 주령구(약 5cm의 참나무로 만들어진 14면체 주사위로 각 면에는 러브샷, 세 잔을 한 번에 마시기 등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는 놀이기구)와 목선은 풍류를 즐길 줄 알고 유머러스한 신라인들의 삶의 모습을. 사슴, 기러기, 낙타 등 희귀한 동물의 뼈는 외국과 교류를 활발히 펼쳐나갔던 신라인들의 기상과 뛰어난 항해술을 짐작할 있었다. 이렇듯 동궁에 담긴 의미와 월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보고 있자니 동궁과 월지는 천년 신라를 담고 있는 작은 바다이며, 통일신라를 비추는 거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상운 경북지방경찰청장님은 문화탐방동아리 행사를 함께한 후 회원들에게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과 해석하는 사들에 의해 다양한 시각으로 보일 수 있다.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종합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 나 또한 한명의 해설사가 될 수 있고 경주에 근무하는 경찰로서 외부에서 오는 관광객 및 지인들에게 다양한 역사적인 배경으로 설명을 한다면, 경주·경북·대한민국경찰의 새로운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하셨다. 밝은 달빛을 조명삼아 월정교가 아름답게 비치는 카페에서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고생하는 직원들과 치맥도 먹으며 지친 업무 속에서도 신라의 삶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내가 경주에 근무하게 된 작은 행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다음 탐방장소에 대한 설렘을 갖고 글을 마감한다. 박재식 순경 경주경찰서 생활안전계
사월의 마지막 날, 다섯 번째 탐방장소인 오릉에 가기로 한 날이다. 탐방장소에 들어선 사람들의 옷이 얇아진 만큼 따뜻한 햇살과 봄바람이 불어온 기분 좋은 날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듯이 오릉 입구에서 돗자리를 펼쳐 삼삼오오 모여 경주 대표 김밥인 교리김밥과 컵라면을 먹으니 마치 학창시절 경주로 수학여행을 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경주에 온 뒤,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점심메뉴 교리김밥도 좋은 곳에서 좋은사람들과 먹어서인지 너무나도 맛있게 느껴졌다. 무거운 배를 부여잡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릉 앞으로 걸어갔다. 경주에 근무하는 동안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고 한 번씩은 방문 하겠다 생각한지 2년이 지나는 동안, 오고가며 차안에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 직접 가본 적 없었던 오릉을 문화탐방동아리를 통해서라도 온 게 마냥 기분이 좋았다. 오릉으로 들어서자 웅장한 크기의 다섯 개 무덤이 보였다. 해설사분의 말씀으로는 「삼국유사」,「삼국사기」에 오릉의 기록이 있는데 무덤의 주체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릉은 박혁거세 한 명의 무덤으로, 진한의 땅에 6촌들이 알천언덕에 올라가 나정의 붉은 빛을 보고 따라가니 흰 말이 절을 하는 형상을 하고 있고 옆에 알이 있었다. 그 말은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하늘로 승천하였는데 6촌들이 알을 깨어보니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몸을 깨끗하게 씻기니 몸에서 빛이 나 이름은 혁거세, 박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은 박으로 지어 박혁거세였다. 그 뿐만 아니라 마침 알영정이란 우물에 계룡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가던 중,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은 여자아이가 나왔다. 노모가 이 아이를 발견해 물에 씻기니 부리가 떨어져나갔고, 우물 이름을 따 알영이라 지어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후, 박혁거세가 하늘로 올라가 몸체가 5개로 나눠져 땅에 떨어졌고 나눠진 몸을 합장하여 무덤을 지으려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해 제각각 무덤을 짓게 되었다. 그래서 다섯 개의 무덤 오릉을 뱀의 이름을 따 사릉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삼국유사」보다는 현실적으로「삼국사기」에 실린 기록이 채택되어져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설화 내용은「삼국유사」와 동일하나 다섯 개의 무덤은 1대 박혁거세와 2대 알영부인, 3대 남해 차차웅, 4대 유리 이사금, 5대 파사 이사금 다섯 명의 무덤이라 한다. 이때의 신라는 보통의 왕위계승과 다르게 신라 초에는 덕·지혜·능력 있는 자가 왕위 계승을 하였다. 유리와 석타래가 왕위 계승으로 다툴 때, 지도자의 자질은 치아의 개수가 많을수록 뛰어나다 하여 떡을 가져와 치아 개수를 판별하니 유리가 치아 개수가 많아 왕위에 올랐고 그 후 석타래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4대 석타래 이사금은 ‘박’씨가 아닌 ‘석’씨 이기에 오릉에 묻히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 「삼국사기」에는 오릉의 기록이 실려져 있을 뿐 자세한 위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담헌사 북쪽에 있다’ 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담헌사도 실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현재 오릉 주차장에서 탑지가 발견되어 그 곳이 담헌사 절의 터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오릉의 다섯 개 무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제일 앞에 있는 무덤이 박혁거세의 무덤으로 추정될 뿐 어느 무덤이 박혁거세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오릉의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박씨 문중에서 주관하여 춘분 때는 숭덕전, 추분 때는 오릉 앞 제각에서 제사를 지낸다. 숭덕전은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세종대왕 때 건립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고 선조 34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후 경종에 이르러 숭덕전이라 불러지게 되었으며, 현재 평소에는 들어갈 수 없고 제사를 지낼 때만 개방을 한다. 아직은 유교사상으로 여성 출입이 금지 되어있다 하여 아쉬움이 남았다. 오릉 앞 제각 안에는 의자만 있는데 그 의자 뒤에 위패를 두고 추분 때 제사를 지낸다. 숭덕전 뒤편으로 걸어 가다보면 알영부인이 태어났다는 알영정이 있다. 돌로 우물을 덮어두었는데 그 돌의 모양(네모,동그라미 등)으로 그 시대가 추정 가능하다. 또한 이 돌의 모서리를 보면 움푹 파여진 부분이 있다. 이것을 ‘철정’이라고 하는데 돌과 돌을 연결하는 것으로 돌을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알영정을 끝으로 오릉 문화탐방은 끝이 났다. 오릉을 걸어 나오니 부산토박이였던 내가 천년의 역사를 지닌 신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우리나라 전통·역사를 지켜온 것에 자부심과 긍지가 남다른 경주를 문화탐방을 통해 더 알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조세정 순경 112종합상황실
모처럼 새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펼쳐졌던 금요일 오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네 번째 문화탐방을 떠났다. 오늘의 탐방지인 첨성대와 월성, 계림 숲은 경주가 고향인 나에겐 학창시절 단골 소풍 장소이자, 친구들과 함께 각종 백일장, 사생대회에 참가했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유년시절로의 추억여행을 할 생각에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첫 탐방지인 첨성대는 국보 제31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신라 27대 선덕여왕 재위 당시 건축되었고, 현재 동양에서는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 첨성대의 12개 하단부, 12개 상단부를 합쳐 24절기를, 창 부분의 3개 단까지 총 27개의 단은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재위를 의미하고, 첨성대를 구성하는 362개의 돌은 음력 평균 일 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과거 신라시대는 물론 최근 발생한 강력한 지진도 이겨낼 수 있게 내부를 일부 흙으로 메워두었다고 한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첨성대를 건축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담아내기 위한 우리 조상들의 노력과 정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또 천 년 전 신라인들의 지혜와 기술 덕분에 자연재해로부터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지켜졌다고 하니 경주사람으로서, 또 신라인의 후손으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요즘의 천문 관측대가 산 정상에 위치한 것과는 달리 첨성대가 평지에 있다는 점 등으로 인해 천문 관측기구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만들어 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는 해설사의 이야기는 기존에 첨성대를 단순한 천문 관측기구로 바라보던 내가 기존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첨성대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두 번째 탐방 장소인 월성은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멸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달의 모양을 닮아 ‘월성’ 또는 ‘반월성’으로 불리며, 왕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한다. 월성에 도착해보니, 한창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10여 년 전 내가 초등학생 시절만 해도 이곳은 잔디가 무성한 벌판 같은 곳이었고, 학교 친구들과 소풍 와서 뛰어다녔던 장소로 기억이 나는데, 이곳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신라시대 건물터가 발견되고, 토기, 기와, 철기 등이 발굴이 되었다고 하니 정말 놀라웠다. 특히, 벼루가 다수 발굴이 되어 예전에 이곳이 왕과 신하들의 문서 행정을 담당한 자리로 추정이 된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어린 시절 뛰어놀던 이 자리가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고, ‘경주’라는 이곳이 정말 신라 천년의 역사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성 외곽에는 해자(垓子)가 자리하고 있었다. 해자는 적으로부터 도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성의 외곽을 둘러싼 도랑 또는 자연하천이다. 해자에 있던 물로 인해 바닥에 진흙층이 쌓이고, 이 진흙층에 천 년 전의 유기물들이 진공상태로 보존되어 문화층이 첩첩이 형성된다. 따라서 해자는 엄청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며, 유네스코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장소라고 한다. 나는 여태껏 경주에 살면서도 해자의 존재며 기능을 전혀 몰랐고,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해자를 그저 최근에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이번 탐방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해자의 가치와 기능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해자를 바라보게 된 것 같다. 마지막 탐방장소인 계림 숲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로 유명한 장소이다. 신라 탈해왕 때 호공이 이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가 빛을 내며 걸려있었고, 임금에게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열었더니 그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고, 그 때부터 이 숲을 계림 숲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지금까지 전해진다. 계림 숲을 한 바퀴 걸으며, 초등학생 때 소풍 와서 친구들이랑 김밥도 먹고, 울창한 나무 사이에 앉아 그림도 그리고, 글짓기도 했던 추억이 떠올랐고, 10여 년 전에 왔을 때보다 더욱 웅장해진 자태를 자랑하며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살아있는 박물관인 ‘경주’는 천년 전 신라인들의 희로애락과 인생을 그대로 담고 있는 역사적 요지라고 생각한다. 이 번 탐방을 통해 경주에 살면서도 신라의 문화재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과 시선을 바꿀 수 있는 매우 뜻깊은 시간이 된 것 같다. 또한 경주 시민이자 경주 경찰로서 나의 고향 경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진 것 같다. 경주에 새겨진 신라, 그 찬란했던 천년의 역사가 잘 보존되어, 앞으로 천년, 만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이 후손들에게 깊은 울림을 가져다주기를 소망한다. 박소연 순경 형사과 생활범죄수사팀
3월 30일 금요일 문화탐방동아리의 세 번째 탐방 장소는 김유신장군묘와 무열왕릉이다. 첫 번째, 두 번째 탐방 모두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이번 탐방은 화창한 봄 날씨로 모두 기분 좋게 탐방을 시작했다. 경주 초임 발령을 받고 10년 여 동안 김유신 장군묘는 몇 번 가봤지만 무열왕릉은 한 번도 못 가본 곳이다. 평소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경주의 너무나 많은 유적지로 인해 그냥 똑같은 무덤으로 생각하고 흘려버리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오늘의 탐방장소인 김유신 장군묘와 무열왕릉...... 어떤 연관이 있을까?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김유신 장군묘 입구에 있는 길라잡이 안내서를 통해 김유신 묘는 사적 제21호, 무열왕릉은 사적 제 20호인 것을 보고 일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했다. 김유신 장군묘 가는 길에 금산재라는 칼국수 집으로 갔다. 넓은 마당과 아름다운 경치를 품은 고택이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칼국수가 절로 넘어 갈 것 같았다. 해설사로부터 이곳이 김유신의 재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배를 든든히 하고 김유신 장군묘로 걸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왜 김유신은 묘라고 할까? 라고 의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무덤에는 능(陵), 원(園), 묘(墓), 총(塚), 분(墳) 이라는 각각 다른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 ‘묘’는 능과 원을 제외한 왕족 및 군의 무덤, ‘총’은 왕릉으로 추정되지만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는 무덤, ‘분’은 주인공도 모르고 특징도 없는 무덤을 말한다고 한다. 김유신은 신라 시대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묘라고 하는 것이다. 김유신장군묘에 들어서니 신라의 어느 왕릉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과연 장군의 무덤이 맞는가’ 두 눈을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김유신(595~673)은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멸망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이다. 신라에 투항하면서 신라의 진골이 되었지만 외조부가 어머니인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아버지인 서현과 혼인을 반대한 것에서 보듯이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귀족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김유신은 성골 남성이 한명도 남아 있지 않아 성골 여성이 왕위를 잇고 있는 상황에서 진골 신분인 김춘추와 힘을 합쳐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해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를 연결해 주려고 했다. 문희와 김춘추의 만남을 통해 결혼 전 아이를 가졌지만 김춘추는 결혼을 주저하고 있고 선덕여왕의 도움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김춘추는 외교를 담당하고 김유신은 국방을 담당하면서 삼국통일의 위엄을 달성하는 견인차가 됐다. 김춘추가 무열왕이 된 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를 병합하고, 이어 문무왕 때 고구려를 병합했으며, 당나라 군사까지 물리쳐 ‘태대각간(太大角干)’ 이라는 관작을 받고 뒷날 흥덕왕 때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기도 했다. 설화로 신라 36대 혜공왕 무렵 김유신장군묘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 바람 속에 말을 탄 장군과 40여 명의 병사들이 미추왕이 묻혀 있는 죽현능 안으로 들어가자 장군의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고 한다. “신이 한평생 나라를 위해 충심으로 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애 썼는데 지금 왕의 방탄함으로 자손이 무고한 죽음을 당하고 있으니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하자 미추왕이 “장군이 이 나라를 떠난다면 불쌍한 백성들은 어찌 되겠소, 부디 이 신라를 지켜 주시오”라며 그 간청을 거절하여 다시 회오리바람이 김유신장군묘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혜공왕이 듣고 김유신 장군묘에 백배 사죄를 하고 사악한 귀신이 못 들어가게 십이지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에서 보듯이 신라에서 김유신의 영향이 상당했던 것 같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29대 왕인 무열왕릉이다. 김춘추(604~661)는 25대 진지왕의 손자로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임금이자,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진 왕이다. 김춘추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은 방탕한 생활로 왕이 된지 4년 만에 폐위가 됐는데 이로 인해 김춘추는 쉽게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김춘추가 왕이 된 데에는 김춘추의 뛰어난 외교능력과 그 뒤에 김유신 장군의 군사력이 있었다. 김춘추는 선덕여왕 11년 백제군에 의해 자신의 사위와 딸의 죽음을 보고받고 군사 지원 요청을 하러 고구려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후 당나라로 가 군사 지원 약속을 받는 등 정치가로 기반을 다졌다.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화백회의에서 상대등인 알천이 왕위를 사양해 김유신을 등에 업은 김춘추가 29대 무열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은 완수하지 못했다. 그리고 당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복식, 무덤 앞에 비석이나 상석을 세우는 것 등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때 들어온 문물로 신라 시대 최초로 세워진 비석이 무열왕릉 좌측에 위치하고 있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이다. 비석에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아 있는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새겨있어 무열왕릉 무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받침돌인 거북의 모양을 보면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신라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고 머릿돌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번 탐방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미친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을 알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다. 신라인의 숨결이 살아 있는 경주에 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번 탐방을 마무리 한다. 이재우 경사 경주경찰서 생활안전과
>>1334호 경주경찰 문화탐방동아리 경주를 보다(1)-최부자댁, 경주향교, 월정교서 ‘숨은 이야기’ 찾다에 이어 3월 15일 두 번째 탐방장소인 국립경주박물관을 가기로 한 날이다. 촉촉한 봄비와 더불어 제법 옷깃을 여밀 정도의 쌀쌀한 바람까지 불어 왔다. 주말엔 번호표를 받아서 한참을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는 맛집에서 비빔밥을 후다닥 먹고 박물관을 향해 다시 차를 탔다. 궂은 날씨라 실내 탐방이라는 안도감을 갖고… 잠시 후 나에게는 너무 친숙한 경주박물관의 웅장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 가는 길 중간에 박물관이 옆에 있었다. 그 후 버스통학을 할 때에도, 나이가 든 지금도··· 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 무심했나 보다. 경주로 처음 발령받아 같이 탐방하는 직원들과 별로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머쓱해졌다. 경주박물관은 1975년 7월 2일 지금의 장소인 반월성 동쪽, 신라왕궁의 별궁인 동궁의 남쪽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먼저 신라 천년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신라 역사관’에 들어섰다. 신라 역사관은 기원전 57년에서 기원후 935년까지의 천년왕국 신라를 만날 수 있는 전시관이다. 신라의 건국과 번영과정을 네 부분으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제1전시실은 아득히 오래된 구석기시대부터 5세기 말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기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신라시대의 유물에만 익숙해져 있었는데, 선사시대 돌도끼, 사라리와 구어리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을 보니 신라가 우연히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 오랜 태동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탄생한 나라였고, 그래서 찬란한 역사를 꽃피울 수 있었던 근원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2전시실은 신라가 4세기 중반 마립간이라는 지배자를 중심으로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마립간과 그 일족은 금·은·금동으로 화려하게 세공을 한 각종 장신구를 걸쳤고, 또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도 썼음을 보여준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 금제 허리띠, 장신구 등 국보, 보물들이 전시돼있어 말 그대로 황금의 나라, 신라였음을 증명한다. 화려한 금관 장식물 중 곡옥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나의 중·고등학교 마크여서 오래 전부터 친숙해서 그런가 보다. 제3전시실은 드디어 503년(지증왕 4년) 신라라는 국호와 ‘왕’이라는 호칭으로 바꾼 이후 신라의 영역확장과 중앙집권화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신라의 영토 확장을 보여주는 진흥왕 순수비 탑본, 전쟁을 대비해 쌓은 남한산성비, 명활산성작성비 등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화랑 두 사람이 나라를 위해 큰 뜻을 이루기로 약속하며 남긴 작은 임신서기석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개인들의 다짐과 노력이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제4전시실은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이후 안정된 사회에서 세련되고 화려한 통일신라 문화를 발전시켰음을 보여준다. 인구 약 100만명으로 추정되는 계획 도시였던 신라 경주! 그러나 통일 후 약 100년의 전성기 이후에는 치열한 왕위 다툼과 혼란을 겪으면서 결국 고려에 항복하며 천년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신라의 태동, 성장, 찬란했던 전성기, 그리고 아쉬운 멸망의 역사를 체험하고 불교미술Ⅰ, Ⅱ실이 있는 신라미술관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사천왕사지에서 발굴된 파편을 조합해서 복원한 부조상인 녹유신장상 3종 세트가 우리를 맞이한다. 1300여 년 전 고대 조각품의 걸작으로 손꼽힌다고 하는데, 생동감이 넘치는 정교한 표현이 두드러진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527년 이래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통일신라까지의 불교조각들이 종류, 재료와 크기, 시대별로 정리돼있다. 앳된 미소를 머금은 불상에서부터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는 8등신의 불상까지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 친숙하고 푸근한 신라의 불상들이다. 이 땅에서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신라, 그리고 또다시 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탓에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 돼 흘러가는 곳이 경주다. 지금도 불과 1~2미터 땅만 파도 신라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신라의 도로였다고 하는 경주고 앞 도로를 여전히 다니고 있지 않는가? 경주에 살면서도 잊고 있었던 신라인의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워준 탐방이었던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오른다. 손정희 경위 경주경찰 문화탐방동아리 회장
경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경주의 역사, 신라문화유적지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져 본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산재한 많은 사적지들은 당연히 있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런 와중에 최근 배기환 서장이 부임해 우리가 근무하는 지역인 경주, 신라의 역사·문화를 아는 것이 치안에 도움이 되고, 직원들도 함께하면 좋겠다는 제의로 ‘경주경찰 문화 탐방동아리’가 발족했다. 지난달 28일 첫 탐방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댁, 최초의 국학 교육기관인 경주향교, 최근 복원해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을 자랑하는 월정교로 향했다. 먼저 교촌마을 인근 식당에서 이른 점심과 간단한 동아리 창립행사를 마치고 최부자 아카데미 최창호 이사의 해설로 진행됐다. 해설은 대릉원에서 교촌마을로 가는 길목에 있는 ‘놋전거리’의 유래로 시작했다. 최부자댁에 공급하기 위해 이곳에 놋전이 생겼고, 교촌마을 일대가 누워 있는 소[臥牛]의 형상이라 게으름을 막기 위해 소의 목에 해당하는 지점에 방울을 달기 위해 놋전이 생겼다고 한다. 또 최부자댁 서편 아름드리 나무가 일제강점기 소총 개머리판을 만들기 위해 무참히 베어나갔다는 해설과 함께 최부자댁에 도착했다. 솟을대문을 지나 작은 화단을 가진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엔 800석을 저장했던 곡식창고, 그 사이로 중문을 지나 ‘ㅁ’자 형태로 지어진 안채가 있는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하지만 12대 만석꾼 집치고는 낮은 솟을대문과 사당을 안채 동쪽에 배치하지 않고 서쪽에 배치한 점, 기둥을 낮게 만들어 집 높이를 낮추고 집터를 낮게 닦은 점 등은 옆에 위치한 향교를 배려한 최부자댁의 건축적 특징이다. 화재로 소실 후 지난 2006년 복원한 큰 사랑채에는 면암 최익현,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의친왕 이강 공(公), 스웨덴 구스타프 국왕(당시 왕세자) 등 당대 인사들이 머물렀다. 특히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기 위해 만든 ‘백산상회’도 이곳 사랑채다. 흔히 부자는 3대를 넘기기 힘들다고 하는데 12대 만석꾼을 이룬 배경에는 남다른 가훈인 육훈(六訓)을 통해 집안을 다스렸기에 가능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은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이들 육훈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현재뿐만 아니라 후대까지 존경받을 가문으로 지속되길 기대한다. 최부자댁의 육훈이 이 시대와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절제와 베풂을 통해 과욕을 멀리하는 모습이 배금주의(拜金主義) 시대를 사는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신라 국학의 요람인 경주향교. 문화관광해설사 김희옥 씨의 해설로 진행됐다. 경주향교는 신라 신문왕 2년(682년) 설립한 교육 기관인 국학이 위치했던 곳으로 고려시대 향학, 조선시대에는 향교로서 지방교육기관의 역할을 이어왔다. 1492년 중수했지만 임진왜란 때 대성전이 소실돼 1600년 경주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진사청을 중건, 1616년 광해군 6년에 명륜당을 중수하고 동서 양무를 중건했다고 한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향교로 앞쪽 높은 곳에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보물 제1727호)과 동·서무를 두고 뒤쪽에 공부하고 생활하는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를 두는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성현 일곱분과 우리나라 유학자 18분(동국 18현 또는 동방 18현)을 모시는데 그중에 신라시대 설총과 최치원이 포함된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경주지역에서 소과에 합격(진사)한 사람은 237명이고 현재 향교는 교육기관의 명맥은 사라졌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전통 혼례장소로 지역민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어 세 번째 방문지는 최근 복원해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을 자랑하는 월정교다. 월정교는 ‘삼국사기’ 경덕왕 19년(760년)조에 의하면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춘양(春陽), 월정(月淨)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후에 춘양교는 일정교(日精橋)로 월정교는 한자가 바뀐 월정교(月精橋)로, 두 다리가 각각 해와 달의 정령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변경됐다. 남천에는 이 두 다리 외에도 느릅나무로 만든 나무다리(유교, 楡橋)도 여러 개 있어 서민들이 편하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시니어클럽 문화관광해설사 김상곤 씨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를 이어준 다리는 월정교가 아니라 서민들이 이용한 유교에서 물에 빠져 인근에 있는 요석궁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동방 18현 중 한분인 설총이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월정교 앞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마지막으로 이날 경주경찰의 신라문화탐방 첫 번째 이야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