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보고 싶어 고향에 왔습니다. 스리랑카에 온 지 2주밖에 안 됐는데, 마치 두 달이 넘은 것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아마 제가 한국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제가 살고 있던 경주에 가고 싶습니다. 내 고향 Piliyandala 시에는 Piliyandala 시장이 있습니다. 시장 입구에 있는 시계탑은 1952년 9월 11일에 건설이 시작돼 7개월 후인 1953년 4월 30일에 완공됐습니다. 높이는 24m이며, D. Simon Samarakoon은 그의 아버지 Cornelis Wijewickrema Samarakoon과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이 시계탑을 세웠습니다. 기초석은 지방 정부 장관 C. W. W. Kannangara가 참석해 함께 놓았습니다. 이후 시계탑은 현재까지 계속 운영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여러 가지를 준비해서 23년 만에 시장에 갔습니다. 많은 것이 바뀐 것 같았습니다. 스리랑카는 열대 지방이라 다양한 야채와 과일이 풍부합니다. 대한민국만큼 발달된 나라는 아니지만, 시장의 원리는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격이 저렴할 때 사려고 하고, 생산자들은 비쌀 때 판매하고 있습니다. 당근, 고구마, 감자, 과일, 플라스틱 제품 등 다양한 물건들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좌판대에 앉아 계셨습니다. 이곳은 과일이 아주 풍성합니다. 150종류가 넘는 과일들이 시장에 가득해요. 바나나 10개 235원, 망고 10개 1880원, 라부탄 10개 2350원, 파파야 1개 940원, 구아바 1개 470원, 킹코코넛 1개 722원으로, 한국의 과일 가격의 10분의 1정도입니다. 한국 돈으로 여기서는 과일을 아주 푸짐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꼭 필요한 것만 사셨습니다. 이제 제가 열심히 돈을 벌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있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열정과 노력, 헌신이 있다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고향에서 아내, 아들,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함께하는 시간이 정말 좋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프셔서 병원에 다니고 계셔서 마음이 아픕니다. 고생만 하시다가 제가 한국에서 번 돈으로 행복한 노년을 보내셔야 하는데, 몸이 안 좋으시니 속상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노는 것이 재미있다고 하네요. 아이와 아내를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지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돈을 벌어 아내와 아이,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지난 9일 북경주행정복지센터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안강전통시장을 구경했다. 전통시장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그리 많은 노점상들이 없었다. 5분 정도 걸어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에 들어서니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물건들을 사고 팔고 하였다. 마른 갈치에 달려드는 파리를 쫓으며 “마른 갈치 5000원, 마른 갈치 좋아요. 쫄여서 먹으면 밥 한공기 뚝딱합니다. 마른 포 사세요”를 외치는 노점 아저씨의 외침에 시장 나온 사람들이 별 반응을 하지 않는다. 시장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웅성웅성거린다. 좌판에는 문어가 족히 30여개는 있어 보인다. 어디에서 가져온 문어일까? 제법 큰 것도 있고 아주 조그마한 문어도 있다. 살려는 사람들이 이것저것을 한참 보더니 중간 정도 크기의 문어를 가지고 흥정을 한다. 5000원 디스카운트 해달라고 하고, 주인은 안된다고 한다. 사고파는 모습이 참 재밌다. 한참 말을 주고 받더니 주인이 디스카운트해서 팔았다. 문어를 구입한 사람은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할아버지가 고추와 가지, 호박을 팔고 있다. 할머니들이 채소를 파는 것은 많이 보았는데 할아버지가 농산물을 파는 것은 조금은 흥미로왔다. 내 고향 스리랑카에서도 주로 어머니나 할머니가 노점상에서 자기가 키운 농작물이나 달걀, 닭 등을 파는데 나이드신 할아버지가 채소를 파는 모습이 참 이채로왔다. 할아버지는 물건을 사는 아주머니에게 고추와 가지를 덤으로 더 얹어 주었는데 마음이 넉넉하신 거 같다. 와송이라는 열매도 팔고 있고, 쪽파 씨앗과 단호박을 파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길 한 복판에서는 1톤 트럭에 조그마한 무를 파는 아저씨, 아줌마가 있는데 차로를 가로막고 있어서 뒤에서 오는 승용차 운전사가 계속해서 빵빵 울려댄다. 길을 비키라는 울림인거 같다. 빵빵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그만한 무를 파는 아저씨는 찾아 온 손님들에게 파는 물건이 좋다고 계속 자랑을 하고 있다. 큰길 끝쪽에 조그마한 골목길이 있다. 할머니 100여명이 앉아 장사를 하고 있다. 햇땅콩, 단감, 콩잎, 대추, 마늘, 앙파, 올갱이 등 없는 것이 없다. 할머니들은 모두 집 텃밭에서 재배한 각종의 채소들을 조금씩 가져와서 팔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팔면 하루에 얼마나 벌까? 궁금해진다. 마트나 대형 상점보다는 채소나 과일의 값이 싸 보인다. 남쪽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한 참 걷다 보니 안강전통시장이라는 간판이 나온다. 현대식으로 잘 지어져 있다. 그런데 시장 장옥 안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좀 전에 다녔던 남북으로 뻗은 길가에는 어깨가 서로 맞닿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는데, 이곳은 좀전에 다닌 곳 만큼은 사람들이 많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이것저것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가게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다. 조금 있으면 추석 명절이다. 그래서 전통시장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이곳 시장에는 사람들이 항상 이렇게 많은가요?” 가게 주인은 대답하기를 “안강전통시장은 안강지역에 살고 있는 2만여명의 주민들이 4·9일 장을 보러 온다”고 하였다. 안강읍 주민들 뿐만아니라 경주시내에 사는 시민들도 안강지역에서만 나는 특산물을 구입하기 위해 안강장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안강전통시장은 역사가 깊은 곳이라고 한다.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에 위치해 있다. 1923년부터 장이 서기 시작해 102년째 그 자리에서 전통시장이 열리고 있다. 더 넓은 안강평야에서 생산된 단감, 고추, 참깨, 마늘, 배추 등과 그 주변인 강동이나 천북에서 재배된 신선하고 청결한 갖가지 농산물, 그리고 포항 등 바닷가에서 가져온 어패류, 젓갈류, 생선류 등 수산물과 대구 등지에서 원정온 옷, 신발, 모자, 장신구, 잡화류 등 공산품으로 노점상에 수많은 물건들이 진열된다. 나의 고향에도 한국의 추석과 비슷한 알룻 아우르다(Aluth Avurudda)가 있다. 음력으로 매년 4월 보름날에 이 명절을 즐긴다. 한국과 약간 다른 점은 설날이면서 추석이다. 스리랑카에서는 매년 4월은 곡식과 과일의 수확철이다. 풍요의 결실과 함께 넉넉하게 한 해를 시작하는 의미의 명절이다. 갓 거두어들인 곡식과 과일로 갖가지 명절 음식을 만들고 선물꾸러미를 들고 부모님 계신 고향집으로 형제자매들이 모인다. 전통놀이도 하고 고향 친구들과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회포도 푼다. 아~ 그립구나. 그날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감로를 차로 달려가다가 문무대왕면을 지나 감포 초입, 전촌으로 들어서니 안개가 자욱하였다. 아침 시간에 날이 덜 밝았나 착각할 정도였다. 바다 해무였다. 바닷가에 놀러다니곤 했지만, 경주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바닷물도 보이지 않고 파도도 치는지 안 치는지 알 수가 없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다. 온 세상이 하얀 수증기로 가득 차 있어 보였다. 안개를 뚫고 감포공설시장으로 가니 주차장에 차보다 외지에서 온 상인들이 펼쳐놓은 옷 난전이 많았다. 여자들 옷, 남자들 반바지, 꽃 치마, 여자 통바지, 남자 웃옷 등등. 옷 파는 가게만 7~8개 정도 되었다. 현대식으로 잘 만들어진 공설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감포는 항구답게 생선 파는 상점이 주류를 이루었다. 오징어, 아구, 대구, 새우, 조개 등 내가 모르는 여러 종류의 생선들이 각 점포마다 주류를 이루었다. 파리를 쫓기 위해 자동으로 돌아가는 장치도 처음 보는 것으로 신기했다. 어떤 가게는 선풍기를 세게 틀어놓고 오가는 손님들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한 바퀴 돌아 감포항 쪽으로 나오니 이곳에는 할머니 50여 분이 각자 자기 밭에서 키운 호박잎, 상추, 부추, 호박, 산나물, 풋사과, 복숭아, 고추, 가지, 오이 등을 전을 펼쳐 팔고 계셨다. 모두가 할머니였고 할아버지나 아저씨는 한 분도 없었다. 이 또한 신기한 광경이었다. 보통은 남자들이 일하고 여자는 가정일을 하는데 장사는 여자가 잘하는 모양인 것 같다. 아주머니 한 분은 갓 잡아 온 홍합을 한 바구니 팔고 있었다. 아들로 보이는 남자가 또 한 바구니 가져와서 옆에 놓고 간다. 손질되지 않은 아주 거칠었고 바위에 붙어 있던 생긴 그대로 모습으로 장터에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멍게도 팔고 있었는데 갓 잡은 듯 아주 싱싱해 보였다. 여러 손님들이 가격을 물어보고 사려고 하였다. 다시 잘 정돈된 49개의 점포가 있는 감포공설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 저곳을 살피든 중 미주구리 말려서 뼈를 다 추려낸 건포를 보았다. 먹음직해 보였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한 판에 2만원이라고 한다.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1만원 정도 하면 사고 싶은데 어떻게할까 잠시 머뭇 주저했다. 상점 주인이 그냥 먹어도 맛있다고 한 개를 주었다. 먹어보니 냄새도 나지 않고 생선을 먹는 기분이었다. 고향에 조금 덜 송금하고 나도 맛난 것을 한번 먹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판을 샀다. 집에 가서 구워먹고 고추장에 찍어 먹고 살짝 조려 먹고 감자 넣고 찌져 먹어야겠다. 상점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감포의 연혁을 기록한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6촌 중 금산가리촌에 속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현종 때 장기현에 포함되어 경주속현이 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경주군 동해면이 되었다가 장기군에 편입됐다. 일제 강점기에 장기군의 폐지에 따라 경주군 양북면에 편입되었다가 양북면에서 분리되어 1937년 감포읍으로 승격됐다. 이후 경주시제의 실시로 군명칭이 월성군으로 개정됨에 따라 월성군에 소속되었다가 경주군으로 명칭이 바뀜에 따라 경주군에 속했다가 경주시군 통합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감포라는 명칭은 지형이 甘자 모양으로 생겼고 또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 하여 감은포라 부르다가 음이 축약되어 감포라고 칭하게 되었다. 동해남부의 어업전진기지로 9개 법정리, 20개 행정리, 22개 반으로 구성되었고 52개 자연부락이 있다. 31번 국도 남쪽 32km 지점에 울산광역시가 있으며, 북으로는 32km 지점에 포항시가 위치해 있고, 4번 국도의 서쪽으로는 보문관광단지가 있으며 전촌, 나정, 오류해수욕장과 횟집으로 유명하다.’ 감포공설시장은 시설면에서 아주 잘 갖추어진 전통시장이다. 나의 고향 스리랑카에는 이처럼 현대식으로 잘 만들어진 전통시장이 없다. 대한민국이 경주가 부럽다. 경주에서의 나의 삶도 이제 20여년이 넘었다. 나도 경주사람이다. 경주시가 2025 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선정되어서 기분이 좋다. 경주에 더 많은 관광객들이 오고 외국인들도 찾아오면 좋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비가 오려고 하는데도 아침 일찍부터 입실 전통시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고 허리가 꼬부러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젊고 힘 좋은 외국인인 나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느꼈다. 비가 오는 가운데도 사람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할머니들이 펴 놓은 채소가게, 과일가게, 마늘가게 등을 구경하였다. 과일, 야채, 생선, 떡뽁이, 순대, 호떡, 옷, 족발, 반찬, 옥수수 파는 가게를 둘러보며 시장 구경을 하고 있을 때, 20년 전 내가 입사해서 처음 다니던 회사의 과장님을 만났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오늘 만난 과장님은 나이가 많이 들었고, 건강이 좀 안 좋아 보였는데도, 저를 알아보아 주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처음 한국 생활이 서툴고 힘들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었는데, 정말 신기하게 느꼈다. 왜냐하면, 회사를 퇴사하고 난 뒤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는데, 오늘 입실 전통시장에서 만나게 되어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과장님 내외분도 반가워하면서 자기 집으로 꼭 놀러 오라고 주소도 전해 주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는게 있는 모양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늘 성실하고 진솔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주에 사는 분들은 매너가 좋고 그래서 더욱 내가 살고 싶은 곳이다. 입실 전통시장에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모두 있는 것 같았다. 시장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중 40년이 된 국밥집이 문을 열어 놓았는데, 먹을까 말까 고민을 했다. 왜냐고요, 돈이 없어서 그랬지요. 내일, 모레가 월급날이어서 지금은 돈이 없다. 이 국밥집에는 할머니가 요리를 하시는데 정말, 진짜 맛있다. 전에 스리랑카, 베트남, 태국 친구들과 이곳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얼마나 맛이 좋든지. 꿀맛이었다. 한국 분들은 무슨 일을 하며 뭐든지 열심히 하는데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시는 것에 너무 놀랐다. 지난달 신문 기고에서 “아화시장은 많이 쇠약해지고 있다”고 글을 섰는데, 여기 입실 전통시장은 할머니 30여분이 도로변 난전에 조그마한 포장을 펴놓고 집 텃밭에서 기른 다양한 종류의 채소와 과일 등을 가지고 장사를 하고 있다. 이곳은 아직 생기가 넘치고 전통시장 경제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외국인들도 장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고 물건을 사러 온 외국인들도 많았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이 거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과연 입실 전통시장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살아있는 닭, 토끼를 파는 가게에 가서 “한 마리에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집에 가지고 가서 한 번 길러보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거보다 값이 비쌌다. 그래서 구입하지는 못했으나 살아있는 닭과 토끼를 파는 모습은 스리랑카의 장터 모습과 비슷했다. 입실 전통시장은 할머니, 할아버지 물건파는 곳 30여개, 시장골목 안 외지 상인들이 차린 옷, 생선, 과일, 잡화, 채소, 모종, 순대, 오뎅, 족발, 반찬, 옥수수, 보리떡, 누룽지, 우묵가사리, 콩물, 딸기 ,민물고기, 고동, 펑튀기, 달걀, 옛날과자 점포가 50여개 펼쳐져 있다. 새롭게 현대식으로 단장한 전통시장에는 과일, 채소, 잡화, 그릇, 신발, 김, 농자재, 쌀, 약국 등 20여개의 점포가 장사를 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정돈되어 있었으나 골목 외지 상인들 점포 보다는 손님들이 적었다. 주차장도 멋지게 만들어져 있었고, 소통문화센터라는 상인들과 주민들이 함께 소통하는 공간도 있어 요즘 시골도 살기가 좋은 것 같다. 오늘 하루도 참 보람되고 알차게 한국의 멋과 맛과 시장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5일장으로 열리는 아화 전통시장을 갔다. 가는 도중 아기자기한 논 들판에서는 이앙기로 모내기가 한창이다. 본국 스리랑카에서는 사람들이 아직도 모내기를 하는데 여기 경주에는 사람들이 모심는 광경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트랙터로 논을 고르고 이앙기로 모심기를 하는 광경이 참 낯설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참 발전한 나라 같다. 기계로 농사를 지으니까 사람들이 일할 곳이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안 좋을 것 같다. 아화시장에 들어서니까 아주 규모가 작다는 것을 느꼈다. 장옥은 4개 정도 밖에 보이지 않는다. 면지역의 5일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장에 올 것으로 생각하고 왔는데 실제와보니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다. 과일가게 1곳, 고기파는가게 2곳, 각종 잡화파는가게 1곳이 문을 연 것이 전부다. 그나마 파리를 쫓고 있는 가게 주인들이다.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와 내가 같이 간 선생님이 장에 온 사람의 전부다. 장 어귀 도로가에 할머니 한 분은 각종 모종을 팔고 있었다. 고추, 호박, 오이, 토마토, 가지, 들깨 등등 10가지 정도되는 모종이 있었는데 며칠 전 건천장에서 팔고 남은 것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할머니는 “외국 사람이 이런데 왜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한국의 경주의 시골장이 어떤지 궁금해서 처음으로 보러 왔다고 했다. 할머니는 오이 모종과 토마토 모종을 사 가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사가지고 집에 가서 심고 싶었으나 기르는데 자신이 없어서 못 샀다. 장옥에서 좀 걸어 나오니 공용주차장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 온 장사꾼들이 4군데 트럭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과일 트럭, 신발 트럭, 뻥티기 트럭, 각종 연장을 파는 트럭, 그리고 공용주차장에는 민물고기를 파는 아저씨, 아줌마가 고기를 다듬고 있었다. 어디에서 잡아 왔는지는 알 수 없는데 미꾸라지, 가물치, 붕어, 빨간고기, 새우 등등을 팔고 있었다. 다섯 군데의 외지 장사꾼들이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한두명 있었다. 모내기를 하는 시기라서 그런가? 정말 사람들이 없어 놀랐다. 뻥튀기 트럭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저씨, 장사가 이렇게 안돼요? 물건 사러오는 사람이 이렇게 없어요? 장사하러 오는 분들도 다섯 분이 전부인가요?”라고 물었다. 뻥튀기 아저씨 왈 “요즘은 이게 전부요. 몇 년 전만해도 100여명의 장사트럭이 이 도로가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화장을 오는 손님들이 없으니 장사트럭이 이곳에 안와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고 이곳 아화장은 얼마 안가서 없어질 것 같네요”라고 대답했다. 함께 간 선생님은 “5일장에는 정말 재미나고 볼거리, 먹거리, 살거리 등이 많았는데, 참 안타깝다”고 했다. 5일장을 방문해 한국, 경주의 보통사람들의 사는 모습, 장사하는 모습을 참 보고 싶었는데 이곳 아화장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참 아쉬웠다. 다음에는 좀 더 규모가 있는 5일장을 찾아가 한국의 경주의 5일장 정서와 기억에 남는 일들을 해보고 싶다. 나는 대한민국을 경주를 사랑한다. 경주에서 더 오래 오래 살고 싶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