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시즌이라는 말은 크리스마스의 영향력에 든 시기라는 뜻이다.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신일이다. 예수의 탄생을 전후해서 역사는 BC(Before Christ-그리스도 전)와 AD(Anno Domini-그리스도의 해)로 나눈다. 그렇다면 AD원년 전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재미있는 것은 예수 탄생이 BC4년으로 표시되었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해롯왕은 예수 탄생 전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 우리나라는 AD3년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중국에서는 전한이 망하고 왕망이 스스로 황제라 칭한다. AD2년에는 로마와 파르티아가 제3차 전쟁을 일으키고 몇 년 후인 AD7년에는 유대민족이 로마에 항복한다. 이런 역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을까? ‘세계사 연대기’라는 책에서 발췌했다. 역사 관련 글을 쓰다 보면 수시로 고증에 시달리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역사를 비교하거나 동서양의 시대적 흐름을 비교할 때, 세계사 연표를 살펴보는 것 만큼 쉬운 것이 없다. 물론 요즘은 인터넷이나 챗GPT등으로 연대기를 찾을 수 있지만 신뢰의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때문에 정확한 연대나 흐름을 알고 싶다면 세계사 연표가 반드시 필요하다. 세계사 연표를 자주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공통적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제국이 강성하던 시절에는 중국의 당나라가 강성하고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국운이 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사라센 제국이 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철학 사조가 발전할 당시에 그리스에는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가, 인도에는 무수한 고행자들과 고타마 싯타르다가, 중국에는 공자와 제자백가들이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세종대왕 시대는 세계사적으로도 다양한 문명과 문화의 발전이 일어난다. 한글이 제작될 시기 명나라는 북경으로 천도하고 정화를 남방원정길에 보내는 등 번성기를 구가한다. 독일에서는 구텐베르그 활자가 발명되었고 중앙아시아에는 티무르 제국이 번영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 전쟁을 매듭짓고 안정기에 들어간다. 동시대 나쁜 흐름들도 눈에 띈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겪을 무렵 명은 여진 누루하치의 위협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인도에는 영국과 포르투칼 등 열강이 상륙해 침공의 역사가 시작된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메리스튜어트를 처형하는 사전을 벌인다. 영국과 스페인 무적함대가 격돌하는 것도 이 어름이다. 2차 대전 당시 동서양에서 연합국과 동맹국의 대전을 가능하게 한 나라들의 흥망과도 연결된다. 동시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전체주의화,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화 등이 부딪히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흐름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례는 교묘하게 맞춘 퍼즐일 수 있다. 역사 이래 전쟁은 어느 때나 있었고 그 속에서도 문화와 문명은 쉼 없이 성장과 쇠퇴를 거듭해왔기 때문에 연표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마음대로 편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편집이 가능하다는 것 역시 세계사 연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연표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면 좋은 기운을 더욱 좋게 포장할 수도 있고 나쁜 기운을 미리 감지해 세상을 향해 경종을 울릴 수도 있다. 그런 활용은 특히 지성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세상을 향해 역사의 준엄한 흐름과 그에 따른 결과를 알려줌으로써 역사를 평화롭고 이성적으로 끌고가야 할 의무가 그들 지성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직 연표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최근의 세계사적 흐름을 연표로 만든다면 비슷한 시기 세계의 흐름이 포착될 것이다. 러시아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 중국 시진핑의 대만에 대한 공세, 유럽 제국의 경직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의 조짐, 미국의 자국중심주의가 판친다. 이에 질세라 한반도에서도 북한이 무모한 핵위협을 가중하고 우리나라는 검찰독주식 강성정권이 국민을 좌우하는 상황이다. 중요한 것인 이런 흐름이 각각의 국가나 국민보다는 정권의 유지나 일부 통수권자들의 독재적 망동에서 생긴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세계 도처에서 국가들이 이성을 잃고 정권의 이익에만 빠진 채 폭력적인 결정을 하다 보면 3차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바로 이런 시국에 지성인들이 힘을 발휘해 일체의 폭력과 폭주를 막아야 하는 것이다. 세계사 연대기에 등장하는 무수한 세계사적 폭력의 흐름과 그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결과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12월 13일 경주중·고서울동창회 송년회에서 오랜만에 이색적인 행사가 펼쳐졌다. 올해 80세 맞은 동문들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짧은 축하 시간을 가진 것이다. 10여 년 전 70세 생일맞은 동문들에게 축하하던 행사가 사라진 이후 부활한 행사다. 단순하게 80세를 맞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이분들 이전 세대들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루어 낸 업적이 말할 수 없이 크다. 지금의 80세부터 90대 어름이라면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초반의 세대들이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절정부터 6·25 전쟁통에서 태어나 나라 잃은 서러움과 절대빈곤의 나라에서 자라며 갖은 고생 다한 끝에 산업의 역군으로, 독일 간호사 광부로, 중동사막에서 외화획득의 선봉으로, 월남에서는 목숨을 건 역전의 용사로 살며 대한민국을 잘 살게 하는 초석을 다진 세대들이다. 그런가 하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동족상잔을 거치면서 분단된 국가로 인해 500만 가까운 이산가족의 주인공으로 산 세대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삶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마지막 슬픔이라 불러도 모자람 없을 정도의 시기를 지나 어느 나라보다 잘 살고 눈부신 문명을 이룬 최고의 전성기를 사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절묘하게 그려낸 영화가 ‘국제시장(2014/윤제균 감독)’이다. 1950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진행된 흥남철수를 기점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이후 2014년까지의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극명하게 그려낸다. 이야기의 주무대는 부산이다. 부산이 주는 의미는 6·25에서 마지막 남은 보루라는 의미와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최후의 보루이자 반전의 의미를 가진 도시다. 그중에서도 ‘국제시장’은 전쟁을 피해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모인 사람들의 애환이 한곳에 농축되었고 이름 그대로 국제적 물건들이 유통되던 극명한 삶의 현장이다. 주인공 덕수는 열두어 살 남짓의 어린이다. 대체로 1930년대 후반쯤에 태어났을까? 흥남철수 때 뜻밖의 사고로 아버지와 여동생과 헤어진 이후 부산에서 엄마를 도우며 두 동생을 책임진 어린 가장이다. 덕수에게는 헤어지면서 남긴 아버지의 목소리가 평생동안 뼛속 깊숙이 남아있다. “내가 없으면 네가 가장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네가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구두닦이 부두 잡역부를 쉴 새 없이 하고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기 위해 뼈가 부서지도록 일한다. 자연히 선장이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은 가차 없이 무너지고 사라진다. 돈 벌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 쉽지 않음을 극복하기 위해 광부로 독일로 가고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에서 산업근로자로 자청한다. 이 와중에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를 몇 차례나 겪는다. 이런 만큼 이 영화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무지무지 슬프고 힘겨운 영화다. 다행히 윤제균 감독은 이 숨막히는 슬픔의 중간에 배꼽 빠지는 웃음을 숨겨두고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우리 민족사의 최대 통한이자 비극인 ‘이산가족’을 남겨 놓았다. 이 가혹한 장치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전쟁의 참상은 50년 60년이 지나도 쉬 가라앉지 않을 만큼 참혹한 것이며 그게 꼭 전쟁을 겪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쉽게 가르쳐 준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 흘린 사람이라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깊은 휴유증을 남기는지를 몸소 체험한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지금의 80대 이상 노년 세대들이 겪은 살아있는 역사다. 우리의 대선배님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세계 최악의 빈곤국가를 중진국으로 선진국으로 이끈 장본인들이다. 그들은 서슴없이 자신을 희생해 가족들을 지켜낸 위대한 전사들이다. 그들의 주름살 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제 나이가 꽉 차서 늙고 힘없어지니 영화에서처럼 자식들은 그들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돌보기를 꺼리고 사회는 은연중에 그들을 짐으로 취급한다. 국제시장은 어쩌면 이 숭고한 세대를 조명함으로써 우리가 잊어버린 고마움을 대신 표현한 것인지 모른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통해 그들의 고단한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고마움을 가질 수 있다면 당신들을 보는 우리의 눈길이 훨씬 다정스럽게 바뀌지 않을까?
슈퍼히어로, 초능력을 다룬 만화나 애니매이션, 드라마와 영화는 얼핏 미국이나 일본, 중국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미국의 경우는 대체로 세 가지 부류다. 슈퍼맨처럼 외계에서 오거나 스파이더맨과 헐크처럼 과학 실험이나 사고를 통해서 혹은 토르처럼 고대로부터 숨겨져 온 신화의 주인공이 부활하는 것 등이다. 일본의 경우 초능력자들은 일본의 정령문화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동네마다 몇 개씩 되는 일본의 정령문화는 다양한 이야기를 꾸미는 원천적인 소재다. 대표적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모노노케 히메, 음양사 등에서 보이는 초능력자들이 이런 류이다. 중국의 경우 초능력자들은 무협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 수련을 통해 가공할 무공을 익히게 되면 힘도 세지고 빨라지고 심지어 날아다니는 경지에 이른다. 최근 들어서 ‘한국형 슈퍼히어로’를 표방한 드라마나 영화들이 만들어지며 신선한 재미를 주고 있다. 한국형 초능력자들은 주로 설화나 전설을 통해 등장하거나 고대 소설 등에서 도를 닦아서 탄생한다. 구미호는 천년 묵은 여우가 재탄생한 초능력자이고 홍길동과 전우치, 박씨부인은 도를 닦아서 초능력을 얻는다. 이들은 바람을 부르고 비를 오게 하는 재주에 축지법과 변신술 등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런 초능력은 ‘도술’ 정도의 의미로만 제한될 뿐 허리우드 식의 구체적 초능력으로 세분화되지는 않았고 지나치게 자주 영화나 TV로 제작되며 식상해졌다. 이런 한국형 초능력 세상이 요즘 들어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슈퍼히어로의 전형이 다각도로 발전하면서 시청자들의 관심도 덩달아 급상승하고 있다. 이를테면 ‘도깨비’는 고대 장군의 원혼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경우다. 절륜한 무공과 혼령화 되면서 터득한 초능력으로 순간이동과 염동력 등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별에서 온 그대’는 외계에서 지구로 온 외계인이 지구인과 동화하면서 드러내는 초능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도봉구의 초능력자 도봉순, 강남구의 힘쎈 여자 강남순은 집안 여성들에게만 전해지는 마법 같은 힘을 다루었다. 연약하게 보이는 도봉순과 강남순은 수십명의 악당들을 맨손으로 순식간에 제압한다. 그러나 이렇게 단독으로 움직이는 초능력자들은 홍길동과 전우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역량을 중심으로 악당을 물리치거나 잘못된 사회를 바꾸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단독성에 과감하게 벗어난 것이 슈퍼히어로들의 단체 등장이다. 경이로운 소문은 뜻밖에 죽은 정의로운 사람들을 ‘카운터’라는 이름으로 되살리고 초능력을 심어준 경우다. 이들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력한 힘과 빠른 속도, 염동력까지 갖추며 사회를 어지럽히고 악행을 일삼는 악귀들을 소환해 지옥으로 보낸다. 악귀 역시 사람의 혼령을 먹어치울수록 카운터들 못지않은 강한 힘을 얻게 되므로 이들 카운터와 악귀들의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최근 방영된 무빙은 사회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초능력자들의 활약을 그린다. 이들의 초능력은 제각각 개성이 있다. 힘이 엄청나게 세거나 전기를 일으킬 수 있다거나 소리를 잘 듣고 귀가 밝다거나 하늘을 날 수 있다거나 상처가 급속히 낫는 탁월한 재생력을 가졌거나 하는 등이다. 이들은 CIA가 양성한 초능력자와 대결하거나 북한에서 양성한 초능력자들과 싸우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심지어 이들의 초능력은 자녀들에게 대물림 되어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을 점치게도 한다. 이런 한국형 슈퍼 히어로들의 드라마는 OTT방송을 타고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바야흐로 K-콘텐츠의 저변을 이루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들 대부분이 웹툰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만화를 바탕으로 한 헐리우드와 애니매이션 천국을 표방한 일본과 또 다른 비교점이다. 이제 절대다수 대중은 스마트 폰에 의해 콘텐츠를 선택하는 세대로 바뀌었다. 우리나라 웹툰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게 된 것은 급속한 스마트 폰 배급에 맞추어 스마트 폰 화면에 맞춘 웹툰을 어느 나라보다 빨리 정형화 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웹툰에 익숙해진 세계의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한국형 슈퍼히어로들과 친숙해졌고 그 결과로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들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 세계 시장의 활짝 열린 문을 맛본 한국형 슈퍼히어로들이 앞으로 어떤 형태로 진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야흐로 한국형 슈퍼히어로의 전성시대가 열릴 것이다.
경주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별칭에 어울릴 만큼 곳곳이 유적과 유물로 이루어진 도시다. 특히 신라의 수도로서 당시의 도시 규모는 현대의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넓어서 지금도 도처에서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나 유물들의 나오고 있다. 유적이나 유물이 나오면 당연히 그 일대가 발굴로 이어진다. 땅이 얼어붙은 한겨울을 제외하면 경주는 1년 내내 발굴이 진행되는 곳이다. 그만큼 발굴에 의한 유적과 유물의 수도 많고 그와 관련한 이야기도 많다. 당연히 발굴에 참여한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늘려 있다. 그런 발굴이 일상화된 경주사람들에게 꼭 맞는 맞춤형 영화가 더 디그(The Dig / 2021 시몬 스톤 감독)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 당시에는 영국 땅이던 아일랜드의 서퍽이란 곳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다. 영화에는 자신의 사유지인 한 언덕을 눈여겨본 ‘이디스 프리티’와 비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할아버지 대부터 전해온 발굴 실력을 전수받은 발굴전문가 ‘바질 브라운’이 등장한다. 이들은 그 사유지 언덕이 바이킹 이전인 앵글로 색슨 시대의 유적이라 확신하고 발굴을 시작한다. 그러나 역사에는 언제나 냉담한 방관자들이 있듯 당연히 영국 박물관 당국이나 고고학 관련 학자 누구도 이 언덕에 일말의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독자들이 예상하듯 이곳에서 앵글로 색슨 시대의 배로 추정되는 목선이 나온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뒤늦게 박물관 당국이 뛰어들고 이 발굴을 시작했던 바질은 정통 학위 소유자가 아니라는 차원에서 발굴에서 배제된 채 허드렛일만 맡게 된다. 자신의 손으로 발굴을 완성해 발굴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바질은 굴욕감을 이기지 못한 채 발굴 현장을 떠난다. 과연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경주의 역사적인 인물이 있다. 경주의 향토 사학자로 서봉총 발굴부터 시작해 경주의 여러 고분 발굴에 오래 참가한 석당(石堂) 최남주 선생(1905~1980)이다. 특히 최남주 선생은 임신서기석, 남산신성비, 황복사지 발굴 등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인 박물관장 등이 이 사실을 숨긴 채 선생에 대한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선생은 더군다나 해방 후에도 새로운 박물관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끝내 역사적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다. 다만 선생의 공을 익히 알아 온 학자들과 경주의 향토 사학자, 시민들의 노력으로 일부나마 공로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다 2006년 9월 2일 한국박물관협회에서 선생의 공헌을 인정해 김유신 장군 묘 아래 석당공원을 만들고 기념비를 제작해 세움으로써 선생의 공로가 우리나라 발굴의 귀감으로 알려지게 됐다. 특히 최남주 선생과 동시대 경주에서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사이토 타다시 선생이 한국고분발굴 100주년 기념식차 한국으로 와 최남주 선생에 대해 언급했고 석당공원을 방문해 선생과의 교분을 추억한 것으로 알려지며 선생의 역할이 다시 한번 조명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석당 선생의 유지는 선생의 후대에 이어져 큰 아들인 최정필 세종대 명예교수가 역사학자 박물관학계의 권위자로 활약하고 다른 아들들 역시 우리 역사와 경주를 아끼는 중요 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선생의 공이 아직까지 튼튼히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바질은 자신이 시작한 발굴의 가치를 알고 다시 돌아와 끝까지 발굴에 헌신하였고 프리티 여사는 이때 발굴된 모든 유물들을 대영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러나 끝내 최초 발굴자 바질 브라운의 공헌은 당시 기록에서 빠졌다가 뒤에 양심 있는 학자들의 증언에 의해 지금은 최초 발굴자로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더 디그’에는 발굴에 임하는 바질 브라운의 결연한 외침이 나온다. “발굴은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한 일이다” 그때 영국의 비젤 이나 경주의 석당 선생은 얼추 비슷한 시대를 산 사람들로 보인다. 두 발굴자의 공통점은 현장에 대해 해박하고 발굴 경험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고고학에 대해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학위가 없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알량한 학위보다 현장에서 배운 치밀한 실력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시대를 떠나 양쪽에서 발굴에 혼신을 쏟았을 두 전문가의 탁월함을 기리며 박수 보낸다. 그분들이 밝혀낸 미래의 역사에 우리가 서 있다. 다시 꽃 피울 수 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관광답사, 역사답사, 문화답사, 인문학 답사 등에서 만고의 진리다. 특히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곳곳에 많은 유적들이 있고 전국 곳곳에서 출토된 놀라운 유물들이 찬란한 빛을 내는 역사 문화 강국이다. 박물관만 해도 순수히 자국의 유물로 꾸민 박물관으로 우리나라 박물관처럼 품격 높고 다양한 유물을 갖춘 나라도 흔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적 박물관이라 일컫는 런던 대영박물관이나 파리 루브르 박물관도 실상은 약탈을 기반으로 한 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용산에 자리잡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순수 우리 유물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박물관에는 그야말로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한 생활전반의 모든 역사적 유물들이 시대별로 다양한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그런 유물들이 조각과 그림, 도예나 주물, 의복과 공계 등 다양한 기법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궁궐이나 절, 많은 건축이나 건물들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들이 드러나거나 품고 있는 상징들도 무수히 많다. 그 상징들은 때로는 동물일 수도 있고 식물일 수도 있고 이름 모를 문양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이런 동물이나 식물, 문양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모른 채 지나치기 일쑤다. 이럴 경우 유물이 지닌 가치와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만약 유물 속에 숨은 의미나 상징을 알고 본다면 그것을 보는 재미도 달라질뿐더러 그로써 우리 유물에 대한 소중함을 더 각별히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유물 속의 동물 상징 이야기(박병수 저. 내일아침)’는 우리가 박물관 등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상징, 그 중에서도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이해 놓은 책이다. 이 책에는 우리 조상들이 상상 속에서 만났을 법한 청룡, 주작, 현무, 백호 등 사신을 포함해 해치, 기린, 불가사리 등 서수들을 필두로 흔히 12지신으로 부르는 열두 동물들, 새와 물고기, 곤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이런 이야기들이 재미있는 사진들과 함께 섞여 나오니 읽기도 쉽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상징들과 연관된 유물들을 예로 들며 왜 그 유물에 그 동물이 그려져 있는가 등을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절에 가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심우도(尋牛圖)에 등장하는 소가 단순히 소가 아니고 진리나 도를 추구하는 상징이라거나 물고기로 풍경의 바람판이나 목탁에 그려진 물고기의 의미가 늘 깨어 있는 듯 보이는 물고기의 눈을 성실한 정진으로 해석하는 등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그 동물들이 상징하는 의미들을 알아가다 보면 문득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이나 병풍들이 가진 의미가 가슴 속으로 들어오고 궁궐 문 앞에 엎드린 서수로 눈길이 한 번 더 간다. 도자기에 그려진 학과 용, 불단 밑에 사자에도 눈길이 머문다. 그 많은 비석을 바치고 있는 거북을 보며 말을 걸어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전에는 그저 대충 보고 흘려 버렸던 유물과 유적들이 몰라보게 재미있어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호랑이 담배 피울 때는 과연 얼마나 먼 옛날 이야기일까?’나 ‘여성들의 경대에는 왜 박쥐 문양을 그려 놓았을까?’, ‘원숭이 손오공은 왜 천도복숭아를 먹었을까?’ 같은 익살스러운 이야기도 나온다.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새기다 보면 어느 새 우리 문화에 대한 상식도 조금씩 늘어난다. 가끔씩 박물관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들을 만난다. 그런 부모들은 분명히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다양한 문화적 자양분을 공급하는 현명한 부모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묻는 질문에 단순히 이것은 고양이고 저것은 강아지고 하는 식으로 대답해주고 마는 것을 보면 정말 아쉽다. 이럴 때 슬쩍 이 책 한 권을 읽고 나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귀띔해주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그 자체로 훨씬 많은 자양분을 줄 수 있을 것이고 훨씬 더 대단한 재미를 아이에게 줄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기자가 이 책을 읽었을 무렵이 기자의 아이들이 한창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박물관에 가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때가 바로 엊그제 같다. 아이들보다 그 이야기 들려주었던 아버지가 훨씬 더 깊은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 사이 우리나라는 노령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비단 우리뿐 아니라 여러 선진국에서 노년인구는 다수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의료시설과 의학의 발달, 적절한 영양공급, 노인들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사회적 시설들의 증가가 노년 인구의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생명을 연장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노인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사회적 노력도 뒤따라야 하는데 정작 법과 제도는 노년을 외면하고 예산에 대한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노인들에 대한 복지나 혜택을 줄이려 든다. 법과 제도를 다루고 예산을 결정하는 결정권자들이 노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고 노인을 쓸모없이 예산만 축내는 부류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인복지와 노인예산을 쉽게 생각하는 이면에는 자신은 노인이 안 될 것 같은 착각이 동반된다. 언제나 청춘일 줄 아는 젊은이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지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 역시 노인이 되어 젊은 사람들에게 짐으로 여겨지고 걸림돌로 치부되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반복적 진리이지만 젊은 사람들이 그 젊음을 누리는 동안의 달콤함에 탐닉한 나머지 자신은 영원히 젊을 것처럼 착각하기에 노인에 관한 일은 멀고 먼 남의 일로 여기기 쉬운 것이다. 사람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노인이라고 해서 감정이 둔하고 노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초월하거나 달관하지 않는데도 젊은이들은 으레 노인이기 때문에 가져야 할 많은 원칙들이 있는 줄 안다. 그래서 홀로 된 노인이 연애라도 할라치면 노망들었다고 우스워하고 혹시라도 좀 더 깊은 관계로 번지면 어떻게 하나 근심하게도 된다. 특히 가진 것이 많은 노인들일수록 자식들의 등쌀에 짓눌려 새로운 삶을 꿈꾸기 어렵게 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식들은 노인을 돌보거나 가깝게 살기를 꺼린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제인 폰다가 열연한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Our souls at night / 2017 라테쉬 바트라 감독)’은 노년의 노인들이 느끼는 결핍과 그 결핍에서 헤어나기 위한 노력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그냥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 그 상대가 되어 달라” 오랜 이웃인 메디(제인폰다 분)의 난데없고 엉뚱한 질문에 루이스(로버트 레드포드 분)는 며칠 고심하지만 결국 그 이야기의 상대가 되기로 한다. 두 사람 모두 짝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자식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 매일 적적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이들은 밤마다 만나 자신들의 내면에 갈무리된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주변 사람들은 이들을 이상하게 본다. 그 눈길을 의식하면서도 결국 그 눈길을 이겨내야 한다고 믿은 두 사람은 초연하게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다. 가족들 역시 낯설어하고 어려워한다. 특히 루이스의 과거를 잘 아는 메디의 아들은 자신의 엄마가 루이스를 사귀는 것에 못마땅해한다. 영화에는 메디의 손자를 정성껏 돌보면서 메디의 신임과 손자의 신임을 동시에 얻은 장면이 나온다. 부자지간에 볼 수 없는 애틋한 정이나 살가움이 조손(祖孫)간에 진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루이스는 메디의 손자와 자연스럽게 교감을 이룬다. 영화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단지 루이스가 손자를 잘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노인이 사회의 여러 면에서 충분히 대접받을 만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메디의 아들을 떠나, 이런 상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럽다. 특히 사회가 성숙하지 못할수록 여성에 대한 압박히 훨씬 심하기 마련이다. 궁극적으로 젊은이들은 병이나 사고로 요절하지 않는 이상 모두 노인이 된다. 이 절대불변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메디와 루이스의 만남은 지금 젊은이들에게 곧 닥칠 내일의 일이 될 수 있다. 영화는 노인들의 감정도 완전히 젊은이와 같을 뿐 아니라 제약이 따르고 몸이 움직이지 않아 더욱 간절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과연 메디와 루이스는 노년에 찾아든 사랑을 다시 꽃 피울 수 있을까?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 계열사 사장으로 지내는 지인 한 분이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은 적 있다. 부도 가졌고 지위도 얻어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믿는데 돌아보면 잃은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가족, 특히 아내와는 대부분 냉랭하고 자녀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과 담을 쌓은 듯 여겨지더니 출가한 지금까지 전화도 잘 안 하고 지낸다는 것이다. 자신이 뼛골 빠지게 일한 것은 오로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자신의 노력과 희생이 이렇게 대접받지 못한다며 한숨이었다. 그 지인은 새벽같이 일어나 밤늦게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주말에도 한가하게 집에서 쉬어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주중에는 중요한 거래처들과 밥 먹고 술 마셔야 하고 쉬는 날에는 중요한 거래처나 언론사, 법조인들과 골프를 쳐야 했다는 것이다. 그게 자신이 대기업에서 임원이 되고 대표이사가 되는 원동력이었는데 정작 그 사이 가족들과는 대화도 제대로 못 나누고 마음 편히 어디 여행 한 번 못 해 봤다는 것이다. 그냥 여행 가면 되지 않았냐고 되물었더니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과연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그 지인이 가족들과 함께 했을까? 이탈리아 영화 ‘시간은 충분해(원제 ERA ORA : 2023/알렉산드로 아르나디오 감독)’는 흔히 말하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불철주야 일에 매달리는 직장인의 정신없이 바쁜 생활의 이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충격적’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과감하게 중간과정들이 생략된 채 1년 단위로 시간을 뭉턱뭉턱 잘라내기 때문이다. 일에 쫓겨 자신의 생일도 제대로 차려 먹지 못하는 주인공은 어느날 연인과 친구들이 마련해준 생일파티에서 소원 하나를 빈다. 그런데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린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질려 잠들었는데 다시 일어났더니 또 다시 일 년의 시간이 가버린다. 이 사이에 연인은 임신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아기가 태어나 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지 않을까 싶어 잠을 깨우며 버티는데 거울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또다시 일 년이 흘러버린다. 이렇게 순식간에 7년의 시간이 지나는데 주인공은 그 사이에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전혀 모른다. 그 7년의 시간은 생일마다 1년씩 도려내면서 지나는데 그 사이 주인공은 성공가도를 달린다. 다니던 회사의 지점장이 되고 대표가 된다. 반면 그 사이 딸이 자라고 아내는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다. 아버지는 죽고 친구는 암에 걸린다. 이쯤 해서야 주인공은 자신이 무엇을 잘 못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과연 주인공은 이 사라진 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심하게 헝클어진 자신의 변화된 삶을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가장 긴장된 부분은 아내가 주인공에게 쏘아대는 대사다. “당신은 언제나 멀리 떨어져 가족을 기다리게 했어. 심지어 같이 있을 때도 노트북과 스마트 폰으로 회사일 만 해댔어. 그동안 나는 늘 외로웠어!” 거기에 맞서 주인공은 아내에게 그것이 아내와 딸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항변하며 왜 그 희생을 몰라주느냐며 쏘아댄다. 영화의 백미는 과감히 일 년씩 도려내면서도 이야기 전개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가는 스토리의 탄탄함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화의 의도가 그 잘려 나간 시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에 매몰되어 파묻혀 지내는 사람들은 지척의 자기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므로 그 일 년을 기억하는 것이나 기억하지 않는 것이나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은유를 담은 것이다. 다시 지인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영화의 내용과 지나칠 만큼 흡사하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이렇게 자랐는가 싶어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낯설고 도대체 왜 나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 싶어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영화의 말미에 그 주인공이 7년 전 생일에서 빈 소원이 공개된다. 그 소원이야말로 이 영화가 시사하는 전부다. 주인공은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짐작컨대 그 지인의 평소의 소원도 같았을 성싶다.
우리 사회에 언젠가부터 ‘꼰대’라는 말이 남성 노인들을 경멸하거나 비하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자신의 주장만을 옳다 여기고 남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아랫사람들을 자기의 의견 위주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이 말은 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만 열심히 떠드는 사람들을 일컫기도 한다. 구태의연하고 나잇값 못하면서 말만 많은 사람들,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성가신 상대인 셈이다. 사회전반에 꼰대라는 말이 나도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다분히 노인들이 스스로 불러 일으킨 결과다. 이들은 스스로를 틀 속에 가두는 것은 물론 그가 속한 단체나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이런 노인들은 정작 행동해야 할 때는 웅크리고 나가지 않고 돈을 내야 할 때도 뒷전으로 빠져 눈치만 본다. 걸핏하면 ‘나때는 말이야’를 외치다 급기야 꼰대에 붙여 ‘라떼’라는 비아냥을 듣기에 이르렀다. 노인들이 꼰대가 되는 여러 요인 중 자신의 과거에 집착해 그것을 최선으로 여기는 편향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설명이 가장 그럴듯하다. 다시 말해 꼰대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게 누구건 과거의 자기에게 최소한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젊어서 잘 나가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 잘 나가지 못하는 현실을 이기지 못해 말로 때우는 것이 꼰대질이라는 것이다. 이런 꼰대들이 보면 화들짝 놀랄 만한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대한민국의 많은 남성들이 꼰대 소리 들을 만한 64세에 세계 최초로 쿠바와 미국의 플로리다 사이의 해협 160km를 수영으로 건넌 장본인이다. 더구나 그 주인공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이다. 영화 ‘나이에드의 다섯 번째 파도(2023/지미 친 감독)’의 실제 주인공인 다이애나 나이에드(Diana Nyad 1949~)는 장거리 수영 선수로 1974년에 걸프 해협, 1975년에는 맨해튼 둘레 45km, 1979년에는 바하마의 노스비미니에서 플로리다의 주노비치까지 164km를 횡단해 주목받았다. 이에 앞서 28세이던 1978년에는 영화의 주무대인 쿠바의 하바나에서 플로리다의 키웨스트까지 가로지르는 세계 최장거리 수영 횡단을 시도했으나 42시간 동안 122km를 수영한 채 실패했다. 그로부터 33년 동안 수영을 쉰 나이에드는 많은 전문가들의 반대와 염려를 뒤로한 채 2011년 60세에 자신이 젊은 시절 포기했던 쿠바~플로리다 구간에 다시 도전한다. 특히 이때 나이에드는 상어방지용 철책까지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온몸으로만 수영하는 극단의 방법을 시도했다. 보통의 영화에서는 이쯤 되면 드라마틱한 성공담이 그려질 법하다. 그러나 이 도전은 강한 해류와 바람으로 17시간만에 끝난다. 그러나 나이에드는 불과 44일 만에 다시 도전했고 일년 후에도 또 도전했다. 그러나 거센 폭풍과 해파리의 독침에 찔리면서 연이어 실패했다. 이쯤에서 나이에드의 도전을 지지하던 스폰서도 관심을 줄이고 심지어 함께 팀을 꾸린 동료들도 성공에 대한 불확실성과 생활고에 대한 어려움을 겪으며 나이에드를 떠나지만 그래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다섯 번째 시도가 2013년 8월 31일 시도되었고 53시간 만에 180km를 수영한 끝에 마침내 성공해 꿈을 이루었다. 이 도전에는 무려 35명으로 구성된 팀이 함께 했다. 친구이자 코치인 보니스톨, 각종 물살과 풍향 등을 계산해 최적의 시간과 경로를 선택한 항해사 존 발렛을 비롯해 배를 운전한 선장, 먹을 것을 조달한 요리사, 요트로 길을 안내한 인도자, 해파리 전문 해양 생물학자, 상어퇴치를 위한 인원, 기타 배에 속한 사람들 등이었다. 나이에드는 이 도전을 성공한 뒤 몰려든 기자와 팬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세 가지 요점을 발표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꿈을 이루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 수영은 고독한 스포츠 같지만 팀이 필요하다!’ 세 가지 모두 가만히 앉아 꼰대 노릇하는 노령의 남성들이 진지하게 되새겨 볼 만한 외침이다. 꼰대가 아닌 자신만의 꿈을 꾸는 노년이 된다면 그 자신의 정신과 몸이 건강해지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가 훨씬 밝고 활기차게 변할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새로운 꿈을 이룰 수 있다. 과거에 잘 나갔다면 이제 꼰대질을 멈추고 그 잘나가던 경험을 바탕으로 새 꿈을 정하고 그 꿈에 맞는 팀을 찾아보면 어떨까? 설혹 높고 거센 파도들이 앞을 가로막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오랜 기간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단일민족이라는 신앙 같은 상식을 교육하고 그런 양 믿고 살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도 인종학적으로 남방계와 북방계로 나뉘어 그 생김이나 특징이 분명히 다르고 크고 작은 전쟁의 결과로 다양한 인종의 교류가 생겼을 것이 뻔한데도 억지로 한 민족인 것처럼 포장해왔을 뿐이다. 그게 국가 간 교류가 적고 개방되지 않은 나라라면 별 일 아니겠지만 다수의 국가가 어울려 살거나 이 민족 간 교류가 많아지면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인종의 문제를 안게 된 것은 6.25 이후 UN군의 진주, 특히 미군과의 교류로 인한 문제부터일 것이다. 순전히 피부색과 머리카락 등 눈에 띄는 다름이 있을 뿐이지만 별종이나 저급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심지어 더러운 사람으로 취급한 다수의 배타적 성향이 곳곳에서 2세를 괴롭히고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2000년대 이후는 필리핀과 베트남 등 결혼으로 인해 늘어난 다문화 가정, 다양한 국가에서 취업으로 들어온 해외노동자들이 늘면서 일어난 사회적 편견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는 미국이나 아프리카 등에서 일어나는 극한적인 인종차별을 없었지만 단순히 외모가 다르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량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성실한 사람들을 홀대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한때 아메리칸 드림을 외치며 모두가 꿈의 나라로 알고 있었던 미국은 실상 지독한 인종차별 국가다. 백인은 흑인을 ‘니그로’라는 말로 차별하고 그 흑인과 백인은 다시 동양인을 ‘바나나’라 비하하며 차별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지금도 겉으로는 평화롭게 위장한 채 살아가고 있지만 걸핏하면 인종으로 인한 폭력사고가 일어난다. 숱한 인권단체와 양심적 지성들이 이런 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오랜 기간 활동해온 덕분에 상당부분 인종차별이 완화되었지만 언제 이 문제가 불거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의 대표적인 인종차별 백인단체로 KKK단을 꼽는다. KKK는 Ku Klux Klan의 합성어로 이들은 백인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흰색 천으로 온몸을 감싸 자신들을 드러낸다. 미국 역사에서 KKK단이 다른 인종에게 저지른 범죄와 폐해는 상상을 불허하며 지금도 그 점조직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악랄한 KKK단 지부장이 백인 자녀들과 흑인 자녀들의 학교가 통합되는 회의의 공동의장을 맡았으니 그 결과가 심히 괴로울 것은 뻔하다. 더구나 그 악명높은 KKK지부장에 맞서는 상대는 흑인의 권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소문난 열혈 여성 운동가다. 피를 튀기는 접전이 예상된다. 영화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The best of enemies/2019 로빈 바슬 감독)’는 1970년대 화재로 학교 기능이 마비된 흑인 학교를 백인 학교와 합치는 안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2주간의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다. 굳이 세부적인 내용을 접어두더라도 이 첨예한 일이 일으킬 갈등은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다룬 만큼 그 회의상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상세한 전개와 놀라운 반전은 흥미롭기 이를 데 없다. 여기서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양자가 모두 자신들의 신념이 자녀들에게 합리적이고 올바르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KKK단 리더는 자녀들이 흑인 아이들에게 받을 피해를 방지하고 올바른 교육을 위해 흑인 아이들과의 통합을 반드시 막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혼신을 다한다. 그러면서 흑인 대표자에게 당신들과 우리는 똑같은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대답하는 흑인 대변자의 말이 가슴을 후빈다. “흑인들은 당신들이 겪지 않은 고통을 겪으면서 자라납니다. 백인들은 아무 이유없이 애들에게 침을 뱉고 백인에게 길을 안 비키면 얻어맞기 일쑤죠. 앉고 싶은 자리에도 마음대로 앉질 못해요. 가고싶은 곳이나 학교도요. 이런 고통을 매일 겪는데도 우리는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하지요. 그러면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집니다” 이 영화의 결말은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어떤 이유로도 홀대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언제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이 영화를 추천하는 마음은 다소 무겁다. 인종간이나 피부색 간의 일이 아니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는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 그 대상이 비록 적이라도 말이다.
경주사람들, 특히 서울에 사는 많은 경주 사람들은 가끔 지나친 자부심에 빠진다. ‘서울에 볼 것이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경주에 비해 볼 것이 없다’는 말을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데 이럴 때는 정말 어이가 없다. 노천, 다시 말해 ‘지붕 없는 박물관’이란 말을 어려서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세뇌당하듯 들은 경주사람들이기에 이해는 가지만 그들이 서울을 얼마나 알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까 의문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울은 정말 볼 것도 많고 볼 곳도 많다. 오죽하면 ‘서울 구경만큼 좋은 게 없다’는 말이 나왔을까? 경주사람들을 위해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울은 궁궐만 해도 경주가 가진 전체 유적지만큼의 면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경복궁이 넓어 봐야 얼마나 넓다고?’라고! 그러다 서울에 궁이 무려 5곳이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슬며시 겸손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서울에 궁궐이 5개나 된다고? 곰곰이 따져보면 창덕궁과 오래 전 동물원과 유원지였던 창경원이 떠오른다. 창경원도 궁이었나?하는 물음도 꼬리를 쳐든다. 여기에 ‘덕수궁 돌담길!’ 하면 또 ‘아!’ 하고 덕수궁이 있었다는 것도 떠올린다. 덕수궁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억지로 만들어 놓은 이름일 뿐 사실은 경운궁이란 것을 아는 경주사람은 별로 안 된다. 그러면 또 하나 궁궐은 어딜까? 경희궁이다. 경희궁은 이름조차 낯선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나 많은 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도 어쩌면 이 책을 소개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조선왕조와 관련한 종묘와 사직, 궁을 중심으로 한 각종 대문과 성벽, 사대부들이 모여 살았던 인사동과 북촌,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다투던 한성 유적지, 경주의 남산과 이름이 같은 목멱산, 경주의 능과 달리 27대 왕이 정확히 누운 왕릉까지 조선왕조와 관련한 유적만 해도 차고 넘친다. 경주 사람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경주의 많은 유적지들이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복원되고 재건되었던 유적이란 사실이다. 석조 유구를 제외한 목조 건물의 대부분은 실상 이름만 신라를 업었을 뿐 조선시대 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궁은 창덕궁을 비롯해 많은 궁들이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거나 혹은 임진왜란 이후에 새로 지어진 궁궐이란 사실이다. 다시 말해 지금 경주가 지니고 있는 건축술의 결정판들이 모두 서울에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 경복궁은 흥성대원군이 국고를 탕진하며 새로 지은 것을 반 이상 헐어내다시피 한 채 조선총독부까지 설치되었고 창덕궁의 주요 건물들은 일본 고관이나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 선 친일파들의 건축 자재로 쓰인 사실, 창경궁은 궁 자체를 망가뜨려 동물원으로 희화시키는 등 우리 궁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말이다. 다행히 경복궁은 다시 재건되었고 광화문도 제 자리에서 제 모습을 찾았다. 일제의 잔재 총독부 건물도 파괴한 지 오래다. 기타 다른 궁들도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으로 조금씩 원래의 모습들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런 궁들을 제대로 다녀보지 못한 경주 출향인들에게 서울의 궁궐은 낯설어 보인다. 물론 경주사람들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서울 살면서 서울의 핵심인 궁궐을 모르는 서울시민들이 의외로 많다. 굳이 경주사람들에 국한시킨 것은 그나마 서울과 비교할 만한 곳이 경주밖에 없기에 그런 경주 사람들과 출향인들이 오히려 서울을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경주도 마찬가지지만 알고 봐야 제대로 보인다. 서울의 궁궐도 알고 보면 볼수록 녹아드는 곳이다. 우리 민족의 심성, 역대 조선의 왕들과 대신들이 궁궐을 지으면서 담았던 의외의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만나면 궁궐이 새로워 보이고 조선이라는 나라도 새롭게 보인다. 많은 궁궐 안내서들이 있지만 ‘쏭내관의 재미 있는 궁궐 기행’을 꼽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고고학자나 역사학자가 쓴 책이 아니고 궁궐에 의문을 가지고 궁금함을 스스로 풀어나가기 위해 열심히 자료를 찾아 쓴 송용진 작가의 시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반 대중이 궁금해하고 재미 있어 할 만한 이야기를 일반적 시각에서 모아놓았다는 말이다. 또 지나치게 전문적으로 파고들지 않아 초등학교 고학년쯤만 되면 쉽게 읽을 수 있는 편한 책이다. 스스로 궁궐에 빠져 궁궐을 안내하는 쏭내관이 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궁궐이 새삼스럽게 마음속으로 다가올 법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궁궐을 가보면 서울도 경주만큼 볼 곳이 많고 그 중 핵심이 궁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지난주 기자가 쓴 경주최부자 이야기를 읽은 어느 독자분을 만났다. 그는 요즘 경주최부자 이야기를 관심 있게 읽고 있는데 지난주에는 뜻밖에 모르는 게 많아 읽기가 곤란했다며 해석을 요구했다.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 독자는 평소 영화를 자주 보지만 취향상 SF나 애니메이션, 그것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은 잘 보지 않아 그날 읽은 최부자 이야기에 나온 토르니 헤임달, 아스가르드, 바이프로스트, 묠리르 같은 용어들이 깜깜했다고 고백했다. 그럼 헐크나 어벤져스 같은 영화들도 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어벤져스-엔드게임’은 하도 사람들 말이 많아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무슨 소리인지 몰라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영화건 책이건 취향 따라 보고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다양한 장르에 익숙한 기자로서는 그렇지 않은 독자들이 조금은 ‘측은하게’ 여겨진다. SF의 경우, 영화가 주는 상상력은 많은 부분에서 그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질 때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굉장히 많아진다는 차원에서 실현 가능한 상상력이 총동원된 기발한 산물이다. 대표적으로 조지오웰의 명저 ‘1984년’에 등장하는 ‘빅 브러더’는 소설 상에서는 허구적인 전방위 감시체계지만 지금의 CCTV나 SNS와 비교해보면 오히려 그 체계가 저급하다고 할 정도로 현실화 되었다. 각종 로봇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도 점차 현실화 되고 있다. 이미 ‘로봇대전’이라는 특화된 경쟁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고 드론이 주요 산업체나 전장을 누비고 무인 탐사선이 우주나 이웃 행성으로 떠나 활약 중이다. 그런가 하면 의인화된 애니메이션과 SF장르들의 영화는 중요한 철학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토이 스토리 같은 애니메이션은 가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형이나 장난감을 통해 천도교적 철학인 물성(物性)을 가늠해보게도 한다. 천도교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하늘처럼 생각하는 사상을 주장하는 한편 돌멩이나 책상 같은 일상의 자연이나 무생물적 대상들도 그 나름의 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토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형과 장난감들을 보고 나면 주변의 인형이나 장난감들을 소홀하게 보지 않게 되는 효과가 생길 정도다. 애니메이션을 기본으로 이를 발전시킨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은 온갖 세계의 신화와 전설을 현실화 시켜 보여줌으로써 또 다른 상상력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신화가 다분히 역사의 전개과정의 일부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차원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는데도 애니메이션 영화는 필요하다. 기자가 경주최부자댁 쪽문을 토르에 나오는 바이프로스트로 묘사했는데 토르는 다름 아닌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이다. 이런 소재를 발굴해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 만드는 디즈니, 마블, 픽사 같은 제작사들은 세계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대강자로 이제는 세계 각국의 기존 영화사들이 너나없이 줄대야 살아남을 수 있는 최고의 콘텐츠 회사가 되었다. 애니매이션 강국 일본은 일본에 존재하는 신사의 다양한 요정들을 상품화함으로써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이웃집 토토로, 모노노케 히메,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작품들은 일본과 어린이뿐 아니라 전 세계에 확고한 팬층을 유지하며 지브리 스튜디오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전에 몰랐다가 SF와 애니메이션에 맛들인 어느 독자는 이전보다 훨씬 다채롭게 영화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이로써 취미의 영역이 눈에 띄게 넓어졌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마침 최근 OTT방송 ‘디즈니 플러스’에서 만화가 강풀이 쓴 한국판 히어로물 20부작 드라마 ‘무빙’이 국내에서 엄청난 선풍을 일으켰고 세계인들에게도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인기에 힘입어 지난 10월 8일 부산국제영화제 ‘2023 아시아콘텐츠 어워즈 & 글로벌 OTT 어워즈’에서 무려 6관왕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대한민국도 디즈니나 마블, 픽사의 전유물로 알려진 히어로물을 자신감 가지고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이 생긴 셈이다. 물론 이들 SF나 애니메이션 장르들에 굳이 익숙해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앞으로 인간의 상상력은 더욱 발전할 것이고 이를 실현할 컴퓨터 그래픽도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이들 장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재미있게 볼 영화는 어쩌면 점차 제한적이 될 것이다. 토르를 알아야 경주최부자를 이해하는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다. 무빙을 모르면 대화에서 왕따 당할 수도 있다. 어찌 소홀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인류가 국가라는 집단을 만들면서부터 개인의 삶은 훨씬 종속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국가가 만들어진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거대집단의 강력한 힘을 통해 보호받으려는 다수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욕구가 성립했기 때문이다. 보다 강력한 지배체계가 존재함으로써 걸핏하면 일어날 수 있는 크고 작은 낯선 침입자들로터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 욕망이 씨족과 부족 사회를 거쳐 국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태평성대를 이룬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 국민들은 수시로 전쟁의 위험에 내몰리기 일쑤였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세금을 내기 위해 뼛골 빠지게 일해야 했다. 다행히 개인이 그 국가에서 지배적 위치에 올랐다면 자신은 물론 후손들까지 국가의 덕을 보며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지만 반대로 피지배적 위치에 있다면 그 삶은 가난과 고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나 국가나 지배적 위치의 사람들은 피지배적 위치의 대중들에게 대해 대놓고 지배적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국가의 존재가 안정과 희망을 줄 것이라 가르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여하한 경우라도 충성하라고 강조한다. 이 국가 이데올로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교육’이다. 유사 이래 교육은 개인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순기능적 매개체로 존재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국가를 떠받치는 ‘세뇌’를 전담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교육의 주체가 국가이거나 그 국가와 함께 지배력을 공유한 기득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매우 당연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 희생을 훌륭하고 아름답게 미화시키는 교육을 계속함으로써 지배자들을 위한 무지한 국민의 희생을 조장해왔다. 이런 국가주의에 가끔씩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따지고 보면 그들이 성인으로 추앙받는 대철학자나 종교의 태두들이다. 부처나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짧은 노력은 절대다수 정형화된 교육을 받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다시 악용되어 이번에는 국가는 물론 종교까지 국민과 신도들을 속이고 줄 세우기에 급급했다. 급기야 국가에 대한 과한 충성은 전체주의를 양산하고 과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계급화된 거대종교를 만들었을 뿐, 피지배층들의 고난과 가난은 아직도 지구상의 절대다수의 국가에 고쳐지지 않고 있다. 따지고 보면 경주사람들은 이런 국가주의에 가장 자주 노출된 국민들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삼국통일의 대업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화랑 관창의 희생과 용맹에 매료되어 너나없이 화랑의 후예임을 자랑삼아 살았다. 그런 와중에 고작 15~6세밖에 안 된 어린 아이들을 사정없이 전쟁터로 몰아넣은 어른들의 파렴치는 털끝만큼도 비판되지 않았고 삼국통일로 인해 수십 년간 이유 없이 싸우다 죽은 수십만 병사들과 그보다 훨씬 많았을 백성들의 기구한 삶은 역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 무지렁이들이 국가와 왕을 위해 싸우다 죽을 때 과연 그 시대 국가와 왕은 얼마나 백성 개개인의 안녕과 안전을 지켜주었을까?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그나마 신라왕조와 귀족들은 관창과 반굴을 영광스럽게 포장해 자손 대대로 칭송이라도 했으니 아직도 우리는 오로지 국가에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고 믿은 채 살고 있다. 국가의 가장 숭고한 존재 이유인 ‘단 한 사람의 국민일망정 국가가 책임지고 지키고 살려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대전제는 잊어버린 채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맹신마저도 무너지게 되었다. 최근 군에서 일어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숭고한 희생을 책임져주지 않는 국가를 위해 국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역설을 여지없이 일깨운 꼴이다. 이것이 영화 ‘봉오동 전투’를 제목으로 걸어두었을 뿐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은 이유다. 다행히 이제는 그 많은 세뇌교육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이 국가에 우선한다는 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많아졌다. 그 시민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전 가족을 희생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를 반대하는 모습을 지금의 정권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영화 ‘일본침몰(2006/히구치 신지 감독)은 일본 열도의 침몰을 다룬 일본 영화다. 일본의 지각 아래 있는 태평양 플레이트가 상부 맨틀과 하부 맨틀의 경계면에 급속하게 끼어들어 일어나며 일본 열도가 가라앉는다는 구상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열도 침몰의 전조를 보여주기 위해 구마모토와 아소산 등에서 일어나는 초거대 규모의 지진을 보여준다. 심지어 일본총리가 탄 전용기가 지진에서 튀어 오른 분화물에 맞아 폭발하는 영상까지 나온다. 한 번씩 경보가 울릴 때마다 어김없이 몰아치는 지진과 화산폭발, 그에 따른 해일은 도시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가 버린다. 영화는 이로 인한 일대 혼란을 보여주며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생산활동은 중지되고 국민들은 해외로 도피하기 위해 국제선 항공에 쏠린다. 마트는 사재기하는 국민들로 혼란에 빠지고 모든 도로는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기 위한 행렬로 전체가 주차장으로 변한다. 극도의 페닉에 빠진 일본은 가라앉기도 전에 이미 침몰하는 모습이다. 영화 종반부에 가면 큐슈와 시코쿠는 이미 대부분 바다에 잠긴 모습이 나온다. 오사카와 나라가 완전히 바다에 잠기고 교토의 청수사(키요미즈테라)는 거의 파괴된 채 서 있다. 후쿠오카와 나가노는 불바다로 변해있다. 이 와중에 과학자들만큼은 이성을 가지고 미증유의 재해에 대응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일본열도의 침몰을 막기 위해 핵폭탄보다 위력이 센 N2폭탄을 터뜨려 일본열도와 태평양 플레이트를 분리시켜 침몰을 막으려 시도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작전 수행 중 폭탄을 잃게 되고 최후의 수단으로 잠수정 파일럿을 심해 속으로 보낸다. 일본이 끝내 침몰했는지는 영화로 확인하면 되지만 최근 일본의 행태를 보면 일본은 이미 침몰하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영화에서 일본이 침몰하는 것은 자연재해에서 비롯되지만 현실에서 일본은 정치가들의 얄팍한 권모술수와 파렴치한 국가정책으로 인해 침몰하는 모습이다. 이미 일본은 일본만을 위한, 더 정확하게는 일본 자민당만의 영구적인 집권을 위한 정책에 골몰해 있다. 주변국과의 상호이해나 협력은 애초에 관심이 없고 마치 80년 전 군국주의로 돌아간듯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을 압박하고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의도를 다분히 드러낸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결과적으로 자충수란 것을 정치가들은 외면해버린다. 당장 우리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도 보았듯 2019년 이후 일어났던 한일무역마찰은 우리나라 반도체 생산에 차질을 준 한편 일본 자국민들에게도 엄청난 부담을 안겨 양자가 함께 고통스러웠다. 최근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도 주변국 이전에 일본 자국민들이 반대하고 혐오하는 정책이다. 자국 내에서조차 수많은 어민과 수산물 관련업자, 국민이 반대하는 오염수 방류를 태연자약하게 무시하고 방류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오염수를 방류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좋다고 말하는데 국민들을 고통에 빠뜨려가면서 얻은 경제적 이득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비용 줄이기에만 혈안이 되었다. 영화에서 일본 총리는 사고로 죽지만 이런 강성기류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아베 신조 전 일본총리는 총에 맞아 죽는 비운을 겪었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정책은 무시한 채 주변국들을 압박해 얄팍한 이득을 꿰하는 일본은 다른 의미의 침몰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 기류를 반영하듯 일본이 내세우던 전자산업은 이미 세계적 기류에 편승하지 못한 채 대폭 움츠러들어 그 위상을 대한민국 삼성과 LG에 거의 넘겨주게 되었고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기반으로 한 산업에도 편승하지 못한 채 차세대 산업의 성장동력을 잃어버렸다. 이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된 채 권력만 탐하는 일본내 수구 정치인들의 행태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정치인들의 행태와 함께 혐한(嫌韓) 분위기도 일본 침몰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며칠 전 일본의 한 음식점에서 한국인 고객에게 고의로 표백제 물을 먹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단적인 예다. 국가 간 이해와 관용이 사라지고 나면 결국 국민들 간에도 이런 혐오와 분란이 생기는 법이다. 만약 영화처럼 일본이 침몰한다면 결국 그들이 우선적으로 피신해 갈 곳은 대한민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이다. 외교에서도 일본이 잘 사는 길은 주변국들과 상생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 길을 무시하거나 거부한 채 세계화의 거대한 기류에서 홀로 독불장군인 일본은 지금 침몰하고 있다.
검사를 다룬 영화는 많다. 영화 속 검사들은 정의롭게 묘사되기도 하지만 검사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잔혹하고 비열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정의로운 검사 영화의 대표인 ‘공공의적2(2005/강우석 감독)’은 비리와 권력에 맞서 싸우는 꼴통 검사를 그려 국민들에게 통쾌함을 선물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권력층에 빌붙은 악당을 상대하기 위해 담당 검사가 과감히 사표를 쓰자 그 결기에 공감한 부장검사도 검사직을 걸며 수사를 독촉하고 이어 검사장까지 옷 벗을 각오로 검찰총장에게 정의롭게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나서는 장면이다. 결국 악당은 체포되고 그 악당을 봐주던 거물 정치인도 쇠고랑을 차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야수(2006/김성수 감독)도 정의로운 검사를 다루었다. 열혈형사와 정의로 똘똘 뭉친 독종검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악당이 검사를 향해 하는 말이 재미있다. “이기는 것이 정의다. 이기려면 강해야 한다. 강한 자는 조용하다. 약한 것들이 분노하고 흥분한다” 이 말을 증명하듯 영화에서는 그 막강한 검사를 한직, 오지로 보내기도 한다. 악당들은 검사의 가혹행위를 주장하며 검사를 농락하기도 한다. 그런 악당들을 상대하기 위해 야수가 되어야 하는 경찰과 검사, 그들을 결국 그 야수성으로 악의 무리를 제압한다. 부당거래(2010/류승완 감독)에는 비리 경찰과 뇌물에 길들여진 검사가 나온다. 이 영화에는 이른바 쓰레기 같은 기자, 기레기도 등장한다. 여기에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하는 부장검사까지 있고 이들 뒤에는 돈을 대주는 재벌그룹이 회장이 도사리고 있다. 심지어 그들 뒤에는 수사의 혼선에 의해 국민들이 분노하자 이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대통령이 비겁한 대국민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한다. 이들이 승진과 돈, 권력을 중심으로 행하는 부당거래들은 연이어 많은 죽음을 만든다. 범죄와의 전쟁(2012/윤종빈)에도 조폭을 응징하는 검사가 나온다. 이 검사는 한편으로는 정의를 내세우지만 한편으로는 윗선과의 야합을 마다않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검사 역을 맡은 곽도원 배우는 아수라(2016/김성수 감독)에서는 검사로 등장한다. 아수라에는 비리 경찰과 조폭, 권력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검사가 등장한다. 여기서 검사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부하 검찰 수사관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인성말살의 끝장을 보여준다. 검사외전(2016/이일형 감독)은 정의로운 검사가 끝내 권력형 비리 윗전 검사들의 농간으로 인해 검사직을 박탈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옥에 끌려간다는 설정이다. 감옥에 간 검사는 사기꾼과 결탁해 정치인으로 변한 악당 검사를 도로 감옥에 잡아넣는다. 이쯤되면 누가 악당이고 누가 법을 지키는 검사인지 완전히 헷갈린다. 권력을 쫓는 검사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검사들을 다 모아 놓은 듯한 영화가 있다. 더 킹(2017/한재림 감독)은 권력에 빌붙어 부귀영달을 누리는 검사, 부자의 사위로 들어가 호의호식하는 검사, 소신 있게 법을 지키는 검사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검사의 근무지도 다양하다. 지방 검찰청, 중앙지검, 중앙지검 특수부, 검찰 감찰부 등에서 활약하는 검사들이 총출동한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검찰의 총아로 보이는 중앙지검 특수부다. 영화에서 여기에 소속된 검사들은 사건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것을 넘어 사건을 조작하고 사건의 이슈를 덮고 사건 자체를 없애버리는 짓들을 태연하게 자행한다. 사건을 숙성시켜 자기들 구미에 맞추어 써먹는 검사들을 보면 이게 현실에서도 틀림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습이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고 검사에서 출세한 정치인들의 모습과도 빼다 박았다. 영화에서 검사를 어떻게 그렸건 현실에서 국민은 검사가 정의롭고 공정하기를 바란다. 범죄를 다루고 악인을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권한을 쥐고 있는 직책이 검사다. 경찰에서 이첩한 사건들의 기소여부를 책임진 사람이 검사이기에 그의 판단 여부에 따라 삶이 뒤바뀌는 경우가 쉽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2023년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검사들의 활동이 두드러져 검사들이 정치권에 전면 등장해 그들에 대한 촉각이 더욱 곤두서 있다. 그들은 어떤 사건을 숙성 중이고 언제쯤 그것을 터뜨릴까? 검사를 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다.
인공지능, AI(Artificial Intelligence)를 활용한 산업은 다양한 전자제품과 통신은 물론 의료와 법률, 미술과 문학, 음악에 이르는 문화 전반으로 확산하며 번창하는가 하면 그 발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반면 AI로 인한 인간 역할의 축소, 고도화된 AI로 인한 실업과 불의의 사고, AI에 의한 사회장악 등 부작용이 강하게 제시되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끊임없는 편리와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한쪽에서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AI를 대하는 인류의 양면성이다. AI를 소재로 한 영화도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펴며 자연스럽게 스크린을 장악해 왔다. AI 자체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AI를 활용하는 장면도 눈에 띄게 늘었다. 특히 SF영화들은 최첨단 AI들이 빠지면 이야기 자체가 되지 않을 만큼 비약적으로 AI를 다루고 있다. 영화 속에서 AI가 좋게 활용되는 장면은 주로 AI가 부속물로 나타나는 경우다. 사람을 보조하거나 우주선의 항로를 설정하거나 외계에서 물질의 성분을 분석하거나 과학적인 데이터들을 읽어줄 때, 일어날 사건의 가능성을 확률로 알려줄 때 등이다. 이럴 때의 AI는 친절하고 편리하고 고마운 존재로 묘사된다. 스타워즈의 R2D2와 3PO, 전격 제로 작전의 키트, 인터스텔라의 타스, 아이언맨의 자비스 등은 매우 유익한 AI들이다. 그러나 정작 AI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많은 영화들은 AI를 다소 부정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 윌 스미스 주연의 아이로봇, 아이언맨의 자비스에서 진화한 울트론, 최근 넷플릭스에 등장한 AI인형 메간, 프랑스 영화 빅버그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영화들에서 나온 AI들은 자신을 만든 인간을 능가해 스스로 학습하면서 인간들을 노예로 만들려고 하거나 아예 인간을 말살하고 자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심지어 세상 자체가 AI의 거대한 구도 속에 있다는 설정의 영화도 있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매트릭스에서 인간은 AI가 구현한 우주 속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 속에서 인간이 자신들을 창조한 AI에 대항해 싸운다는 어마어마한 우주관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쯤 되면 인간과 AI 간의 경계가 혼란스럽게 무너진다. 메트릭스와는 좀 다르지만 인간과 슈퍼 컴퓨터가 결합해 끔찍한 AI가 된다는 영화 트랜센던스는 AI가 신의 영역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공포를 안겨주기도 한다. AI가 인간을 능가해 현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미 여러 사례에서 드러나고 있다. 게임에서 AI는 체스를 이기는가 싶더니 신의 영역이라는 바둑에서조차 알파고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패배를 확정지었다. 미술 분야에서, 특히 디자인계에서는 AI가 디자이너의 창의력을 도용하는가 하면 순식간에 어려운 디자인을 구현해 이 방면 전문인들의 영역을 침해하고 있다. 음악 분야에서도 AI가 작사·작곡하는 수준을 넘어 사이버 가수가 등장했다. 인터넷 검색엔진에서는 쳇 GPT가 대세인 와중에 쳇 GPT가 알려주는 정보들이 말도 안 되는 짜깁기로 만들어지는 통에 그 신뢰성을 의심받는 실정이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쳇 GPT가 일러주는 정보를 인용하다가는 신뢰성을 넘어 도덕성까지 잃을 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쳇 GPT를 활용하는 사례는 늘고 있고 구글뿐 아니라 다양한 검색엔진들이 쳇 GPT를 능가하는 검색기능을 선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 검색엔진인 네이버도 쳇 GPT를 능가하는 수준의 AI ‘하이퍼 클로바’를 출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좋건 싫건 AI는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올 것이 분명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긍정적인 작용과 부정적인 작용이 조금씩 혹은 극명히 드러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작용을 최대화하고 부정적인 작용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큰 작용을 미치는 것은 AI를 개발하는 인간이 얼마나 엄숙하게 도덕적인 기준을 지키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상상 이상의 초고도 AI가 등장한다면 이것은 결국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가설의 영화가 있다. 마블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등장하는 울트론과 자비스는 AI의 긍정과 부정을 모두 엿볼 수 있는 극과 극의 사례이다. 과연 인간은 어느 정도로 AI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영화 같은 현실이 펼쳐질 수 있을까?
꿈이란 무엇일까? 꿈이란 반드시 이루어야 가치 있는 것일까? 더 근원적으로 꿈을 꾸는 것은 꼭 어리거나 젊을 때에 국한된 것인가?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꿈을 잃게 된다. 어릴 때 거창했던 꿈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오그라들고 초라해진다. 이것을 조금 미화시켜 표현하면 ‘현실화’라 할 수 있다. 어릴 때의 막연했던 거창한 꿈이 자신의 능력과 현실을 알고 다양한 한계를 만나면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어떤 꿈을 꾸었건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그 꿈은 어지간해서는 다시 꿀 수 없게 된다. 태어난 환경이 가난하거나 어려울수록 꿈은 일찌감치 더 먼 곳에 있다. 생존은 꿈보다 훨씬 가까운 문제고 심지어 꿈을 꿀 시간조차 사치스러운 것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다행히 운이 좋아 그런 환경을 피할 수 있었고 학교나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꿈이 반영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만 대부분 인생은 백화점에서 느긋하게 명품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불편한 채 몸을 뒤틀면서 걸어가는 것이다. 여기에 결혼과 가족은 꿈과 멀어지는 또 다른 원인을 제공한다. 삶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꿈꾸기보다는 안주하기를 바라고 어느샌가 자신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조차 잊어먹게 된다. 꿈꾸는 것은 무모하고 꿈이란 것 자체가 허황되다는 자기변명도 이때 생긴다. 이쯤 되면 꿈은 더 이상 가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의 반복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는 꿈의 박제가 일어난다. 다행인 것은 그렇다고 그게 딱히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비슷한 길을 가기 때문에 비교대상조차 없는 현실은 대부분의 꿈을 꿈(夢)으로만 한정시키고 만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일까? 위 세 가지 질문의 무의미함과 현실적인 한계를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통쾌한 영화가 있다. 브리티시 오픈의 유령(2021/크레이그 로보츠 감독)은 중년의 남성이 자신의 꿈을 찾아 불굴의 의지로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 명작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주인공 모리스 플릿크로프트(마크 라일런스)는 조선소 크레인 작업자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은 모리스는 사생아를 둔 여인을 만나 결혼해 다시 쌍둥이 아들을 둔다. 자연스럽게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이 무슨 꿈을 가졌는지조차 모른 채 ‘조선소의 소모품’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만46세 되던 1975년, 모든 상황이 바뀐다. 아니,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라 똑 같은 상황에서 아내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권유를 받게 되며 꿈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들을 위해 헌신했으니 이제 자신의 꿈을 펼치며 살아 보세요” 그러나 이때쯤의 모리스는 자신이 오래전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TV에서 골프경기를 본 모리스는 골프야말로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꿈임을 확신한다. 그리고는 무턱대고 1976년에 열린 브리티시 오픈에 도전장을 내밀고 당당히 우승을 노린다. 참가신청서에는 프로골프라 허위로 썼고 공식 스폰서까지 자신이 근무하는 조선소를 넣어서 쓴 모리스의 참가신청서를 받은 브리티시 오픈 주최측은 골프라고는 생판 모를 초보자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채 프로골프라 거짓으로 꾸민 신청서를 대충 보고 참가를 허락한다. 그때부터 모리스는 연습을 시작하지만 클럽에 등록도 하지 않았고 레슨도 받지 않은 채 대충 골프 클럽을 장만하고 대충 옷을 사입고 대충 골프화를 사서 연습을 시작한다. 그래도 연습만큼은 혼신을 다해서 한다. 과연 모리스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이번 호에서는 이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매듭을 짓겠다. 참가허락서를 받아든 채 ‘이제 프로가 되는 것은 눈앞이다’며 ‘연습은 완벽에 가까워지는 길이다’고 외친다. 이 무모한 도전이 가져올 후폭풍을 즐기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다. 영화를 통해 우리 누구나 모리스 플릿크로프트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인생이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다. 꿈은 누구가 꿀 수 있고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고 꼭 어리거나 젊을 때가 아니라도 좋다는 확신을 이 영화를 통해 배워보자. 분명한 사실 하나, 브리티시 오픈에는 분명히 유령이 나타나 모든 골퍼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삶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만큼일까? 혹은 범위를 넓혀 친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또 얼마만큼일까? 핵가족 시대를 넘어 1인 가구 시대를 향하는 현대사회에서 가족의 개념은 점점 더 옅어져 간다. 특히 노인들은 부부가 의존하면서 살다가 어느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병이 깊어 움직이지 못할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하는 괴리와 불안은 상상을 초월한다. 각종 요양시설과 재가방문요양사들이 활약하지만 시설과 요양사들이 상실감까지 채워주지는 못한다. 자녀들이 다른 도시에 살 경우에는 삶이 더 난감해진다. 이런 경우 오히려 자녀가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든 상실감이 생긴다. 설혹 자녀들이 부모를 모신다고 해도 어느 한쪽이 자신의 영역을 떠나 한쪽으로 합쳐서 사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온갖 의료기관과 발전된 문명 속에서도 고독사의 비율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셈이다. ‘오토(톰 행크스 분)’라는 노년의 남자가 있다. 성격이 까칠해 주변 사람들이 상대하기 어려운 남자다. 그는 사고로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한다. 오래전 사고로 아내는 하반신 불구가 되고 뱃속의 아들까지 잃고 만다. 그러다 그 아내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오토에게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토가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 하필 그때 이웃에 이사 온 가족을 만나 얼떨결에 목숨을 지키고 새 이웃의 삶에 동화되어 간다. 이 영화의 전개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평범하게 흘러간다. 도중에 몇 개의 사건과 사고로 극적인 재미를 주지만 전체적으로는 의혹과 갈등을 이기고 좋은 이웃으로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줄거리보다 더 눈길을 끄는 소재가 있다. 그것은 오토가 가지고 있는 심장병이다. 오토는 이 병의 진행 과정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병원에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고 유언장을 써두는 것으로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끌어 간다. 그 마지막 장면이 얼마나 숭고하고 경건한지 연민이나 슬픔보다는 위안과 평안이 느껴질 정도다. 여기에서 과연 병원에서 삶을 이어가는 것과 자연상태에서 살다가 홀연히 떠나는 삶을 비교하게 된다. 오토는 후자를 훨씬 가치 있게 조명한 셈이다. 이 영화는 좋은 이웃이 가족을 대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주기도 한다. 오토는 가족이 없지만 삶을 마감하는 과정에서 좋은 가족을 얻었다. 우리나라 1980년대 신조어 중의 하나로 ‘이웃사촌’이 있는데 이 영화는 이웃사촌을 넘어 ‘이웃가족’을 만들어 보여준다. 삶에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 어렵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의 숭고함은 때로 가족이나 상식의 범주를 뛰어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난 8월 10일자 본지의 보도에 따르면 경주의 전체 가구 11만9353가구 중 1인 가구가 4만2790가구로 전체의 35.6%에 이르고 이중에서도 65세 이상 노인의 1인 가구가 1만 5272가구로 전체 가구의 12.8%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독거노인’에 대한 전면적인 정책개선과 제도 마련이 시급한 시점이다. 그러나 정책과 제도가 독거노인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런 만큼 사회 전반의 성찰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그 성찰은 다름 아닌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다. 이제 언제 누가 독거노인이 될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내 부모에게도 관심 가지기 어려운 와중에 이웃의 노인을 어떻게 챙길까 고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토라는 남자가 혹은 오토라는 여자가 영화에서만 존재한다면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영화에서 오토의 이웃은 오토의 죽음을 간단하게 알아차린다. 날마다 눈을 치우던 오토가 그날은 늦도록 눈을 치우지 않았던 것이다. 오토를 찾아간 이웃은 싸늘하게 식은 오토의 곁에 놓인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간을 미리 예견한 아름다운 배려가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자신을 가족처럼 아껴준 이웃의 소중함에 대한 감사의 편지였다. 누군가 영화에서처럼 이런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면 그 마지막 삶이 얼마나 풍요로울까!
‘21세기는 정보의 시대’라는 말이 있다. 정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개인과 단체의 생활과 생존은 물론 국가와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정보를 습득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손쉬운 것이 ‘뉴스(news)’다. 뉴스는 개인이 살고 있는 지자체와 광역단체, 국가와 세계의 소식 중 가장 중요하거나 관심가질 만한 내용을 순차적으로 간추려 대중에게 알려준다. 이 뉴스를 전달하는 매체는 과거에는 신문과 공중파 방송이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지상파 방송과 유튜브, 페이스 북 등 다양한 SNS도 뉴스 양산에 한몫 하고 있다. 그러나 뉴스 매체가 다양해지고 많아지는 것과 반대로 뉴스에 대해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란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정파에 따른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면서 서로 상대방을 헐뜯기 위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행위들이 넘쳐난다. 이로 인해 뉴스의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졌고 가짜 뉴스나 편향된 뉴스를 쓰는 기자를 향해 ‘기레기(기자 쓰레기)’라는 말을 넘어 ‘기더기(기자 구더기)’라는 말까지 생겼다. 가짜뉴스는 내용이 가짜인 경우도 있지만 내용과 딴판인 제목을 쓰거나 사실과 상관없이 내용의 일부분만 오려 그게 사실의 전체인 양 짜깁기 하는 것도 한 종류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누군가의 입을 통했다는 전제로 퍼뜨리는 소식도 가짜뉴스다. 이런 종류의 기사들이 우리 사회 전반에 흘러넘치다 보니 이제는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옳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가장 정확한 것이 통계를 통한 전달인데 이제는 이마저도 믿을 수 없다. 통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린다는 것을 뉴스 생산자들이 알고 이를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이다. ‘숫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통념을 왜곡한 채 언제 통계인가, 전체의 비율은 어떤가, 이웃 국가들의 현황은 어떤가 등을 따지지 않고 편집해서 쓰는 통계들은 오히려 더 악랄한 가짜 뉴스가 된다. 이런 뉴스들은 작게는 개인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기업을 악화시키는 정도지만 크게는 생명을 죽이고 사회와 국가를 수렁에 밀어 넣는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교묘하게 치장된 가짜 뉴스는 정적을 소멸하는 도구로 사용된 지 오래며 그로 인해 국민들이 애써 이룬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몇 십 년 이전으로 후퇴하기도 한다. 특히 아직까지 뉴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방송과 신문의 뉴스는 대중을 현혹하는 주범이 된 지 오래다. 더구나 지금 언론사 기자들은 사주의 경향을 대변하는 직장인이라는 소리를 할 만큼 기자들의 역할이 무뎌지고 무너졌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일들은 역사적으로도 흔히 일어나던 일이고 대다수의 경우 언론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살찌우고 그들에게 딸랑거리는 역할에 충실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폴레옹에 대한 일로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해 다시 지지세력을 모아 프랑스로 진격해 들어올 때 시시각각 변하던 프랑스 대표 신문 ‘르몽’지의 기사 제목이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 코르시카의 마귀 쥐앙만에 상륙 / 폭군, 리용 지나 / 보나파르트 급진, 파리 입성은 절대 안 돼 / 황제 퐁텐블로에 들어오시다” 최근 우리나라 정세도 이와 특별히 다른 점이 없다. 좀 더 엄격히 말하면 오히려 지금의 우리나라 언론은 가짜 뉴스들을 적극적으로 양산하며 권력을 떠받들고 그 권력과 동반하는 기업의 광고를 받고 그들과 함께 안락과 생계를 유지하는 형태다. 창궐하는 악성 유튜브 방송들은 여기에 한 술 더 떠 가짜뉴스 퍼뜨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세부적으로 간추린 책이 있다. ‘가짜 뉴스 시대에서 살아남기(2018/글로세움)’다. KBS와 YTN등에서 30년 넘게 기자 생활 후 은퇴한 류희림 씨가 쓴 책이다. 이 책은 가짜 뉴스의 다양한 행태와 사례들, 가짜 뉴스로 인해 일어난 참사, 한국언론의 고질적인 병폐 등이 체계적으로 들어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짜 뉴스들을 판별하는 방법, 가짜 뉴스들을 속 편히 볼 수 있는 방법, 궁극적으로 가짜 뉴스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가짜 뉴스가 싫다고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교통사고가 무서워 자동차를 타지 않는 것과 같다” 작가는 결론적으로 ‘뉴스를 보지 말라’고 조언한다. 쓰레기 같은 가짜 뉴스들이 앞으로 쏟아져 나올 것은 분명한 만큼 뉴스를 보지 말라는 말을 다시 바꾸어 ‘뉴스에 속지 말라’로 고친다. 그래야 현명하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만 19세 이상 모든 남성은 국방의 의무를 진다. 현행 기준상 대한민국 전체 군대는 남성 기준 현역병 50만을 유지하고 있지만 인구절벽으로 인해 2035년부터는 이 인원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돌이켜보면 다산(多産)이 일반적이던 시대 군대는 건장하고 훌륭한 군인을 골라서 뽑을 수 있었다. 징병검사에서 갑을병정 나누어 최소한 갑에 해당하는 남성을 현역병으로 골라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1가구 2자녀 시대를 지나 1가구 1자녀 시대에 들면서 현역병 입영 대상이 급격히 줄었고 그로 인해 눈이 나쁘다거나 건강이 나쁘다거나 독자라거나 하는 등의 사유들이 현역병 제외 기준에서 사라져 어지간하면 군에 가는 시대가 되었다. 반면 병역 의무의 기간은 점점 짧아져 지금의 기준처럼 만 육군, 해병대 등 의무병의 경우 18개월로 정해져 오래전 군대생활 했던 사람들은 지금 군이 정말 전투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눈치다. 누구나 어지간하면 군에 가는 시대고 군에 들어간 병사가 제대로 전투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군에 가는 아들들은 이전보다 훨씬 귀한 아들이 된 것은 틀림없고 군에 복무하는 동안의 안전과 복지에 관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진 시대가 되었다. 더불어 우리의 아들들과 딸들이 안전하게 복무할 수 있도록 국가가 모든 책임을 지고 안전을 담보할 의무 또한 언제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최근에도 해병대 채수근 상병이 예천에서 일어난 물난리에 휩쓸린 주민을 찾기 위해 투입되었다가 그 자신 급류에 휩쓸려 순직하는 사고가 일어나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국가는 채수근 일병을 일계급 특진 추서하고 국가 보훈법에 따라 향후 채 상병의 예우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채수근 상병의 죽음을 두고 해병대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이 군 관계자 8명을 업무상 과실치사혐의로 사건을 경찰에 이첩하려는 사안을 두고 뜻밖의 논란이 일었다. 박정훈 대령은 국방부 장관의 승인까지 난 사안이 특정인 제외를 지시하며 하루아침에 바뀐 것과 경찰에 이첩한 자료가 외부에 누설된 것 등에 대해 외압설을 제기하면서 ‘집단항명수괴’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박 대령은 이에 대해 집단항명수괴는 사실무근이며 끝까지 정당함을 밝히겠다고 선언하고 나서 향후 이 시비가 어떻게 가려질지 주목된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지닌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요소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 문구는 헌법 제34조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넷플릭스에서 상영하고 있는 드라마 디.피에서 모든 드라마 시작 전에 내건 ‘이끄는 문구’로 유명해졌다. 디피는 탈영병(Deserter) 추격( Pursuit)의 약자로 군의 경찰이라 일컫는 헌병대에서 탈영병을 추격하는 임무자를 뜻한다. 이 드라마 시즌2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하찮은 디피 일병이 자신에게 돌아올 탈영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군내부에서 일어난 비겁한 은폐와 비리에 맞서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군 수뇌부는 군에서 발생한 사고를 축소하고 왜곡함으로써 피해자를 기만하는 범죄를 서슴지 않는다. 비록 드라마에서의 일이지만 이와 비슷한 사건이 군의 곳곳에서 일어난 일을 수도 없이 보아온 국민들은 채수병 일병 관련 외압의 여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번 일이 철저히 규명되는 것을 어느 때보다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비단 채수근 상병에 그치지 않고 군에서 일어나는 과도한 군기와 국민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군이 헌신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다. 채수병 상병이 국민을 위해 순직했는데 그런 채 상병 역시 당당한 국민의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정작 채수병 상병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가 마땅한 의무를 다 하고 있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혹여라도 그의 죽음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군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합당한 징계가 반드시 있어야 향후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채수병 상병의 헌신 역시 다시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위세 있는 외압도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사건을 보는 국민은 똑똑히 알고 있다. 이번 일이 공명정대하게 규명되어야 국가를 믿고 우리의 아들과 딸을 군대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연 통일을 얼마나 원하고 있을까? 연령대나 자라난 환경, 공부한 지식에 따라 대답이 다를 것이다. 엄연한 사실은 우리는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고 통일을 하건 하지 않건 북한과는 어떤 식으로건 상대를 인지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많은 시간을 불안과 갈등을 빚으면서 살았고 아주 가끔은 막연한 희망의 불씨로 느끼면서 살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북한과 통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고민일 것이다. 이에 대해 차분하고 깊이 있게, 그러면서도 엉뚱하게 성찰한 책이 권은민 변호사의 ‘평양에서 재판하는 날’이다. 이 책은 판사 출신 권은민 변호사가 수필잡지 ‘에세이스트’에 ‘통일단상’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내용과 20년 이상 북한법을 연구하고 강의한 북한법 연주자로서 느낀 단상을 다섯 개의 장으로 묶은 것이다. 제1장 ‘새로운 세대의 탄생’은 통일과 남북문제가 사람마다, 세대마다 다양한 관점을 가졌음을 소개했다. 북한 연구가 2세대로서 언젠가는 북한에서 북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열망은 권은민 변호사의 진지한 학구열을 짐작하게 한다. 북한 출신 아버지를 둔 어느 아들을 통해 원천적인 분단 시기의 북한문제, 북한이 핵실험 하던 날 아들과의 대화와 좌절감이 ‘과연 북한을 도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와 이어진다. 탈북 학자 주승현 씨가 쓴 책 ‘조난자들’과 축구선수 정대세 선수의 갈등, 삶의 굴레를 져야 하는 북한의 여성 이야기에선 엄연히 실존하는 북한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현상을 꼬집는다. 제2장 ‘지도 없이 길 찾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통일에 대한 시간적 목표를 세우자는 것이다. 1단계 2030년까지 상대지역에 1000명 이상 체류시키기. 2단계 2045년은 분단 100년인 만큼 통일한국의 원년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세대간, 생각이 다른 사람들 간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 통일의 사례를 우리의 통일 지도로 생각한 것에 공감된다. 독일통일 시 동독 인구가 26%인데 비해 북한은 50%나 되는 만큼 통일과정에서 치러야 할 진통과 비용이 훨씬 클 것이니 훨씬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남북 화해 무드이던 2018년, 삼지연 악단에서 느낀 남북 간의 격차를 극복할 수 있을까? 사드 배치와 관련한 한중일 학자간 회의 후 중국학자가 ‘사람이 힘을 쓰려면 허리가 든든해야 하는데 한반도 지도를 보면 허리가 잘려 있다’며 교통과 물류의 단절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현실적이다. 제3장 ‘평양에서 보낸 하루’는 권은민 변호사가 바라는 북한에서의 활동을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남북한의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 서로 다른 법을 비교하면서 사건을 제시하고 해결하는 것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2030년에 펼쳐질 평양의 하루는 흥겹고 자유롭다. 권 변호사는 내친걸음에 평양사무소에서 1년을 보내기도 한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남한과 다른 북한의 법을 어떻게 조화시킬지의 고민이 엿보인다. 할아버지가 된 권은민 변호사는 마침내 통일시대를 살고 있다. 평양에 살며 손자에게 통일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권은민 변호사의 미래가 숙연하다. 손자는 평양에서 경주행 열차를 탈 모양이다. 제4장 ‘교과서 없는 수업’은 권은민 변호사가 대학원에서 북한법을 강의한 이야기와 북한연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았다. 남북한 간의 토지개혁을 설명하기 위해 황순원의 소설 ‘카인의 후예’를 교제로 추천한 것이 기발하다. 남북경협을 위해 어떤 법과 제도가 필요할지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는 과제를 제시한 것은 문제를 포괄적이고 유연하게 다루는 권은민 변호사다움이 녹아 있다. ‘통일은 움직씨, 명사도 형용사도 아닌 동사’ 단원에서 ‘친척 만나기도 꺼리는 요즘 세대들은 통일에 관심이 적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면서 권은민 변호사는 통일에는 민족을 넘어서는 새로운 감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통일을 동사로 두고 인수분해해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모든 영역에서 점검하고 가능성을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제5장 ‘무하국 이야기’는 권은민 변호사가 쓴 꽁트 혹은 우화 모음이다. 남북한을 동쪽 나라와 서쪽 나라로 표현했을 뿐 이 나라가 갈라진 과정과 갈등, 쌍방 정치지도자들의 강압과 세뇌, 상호 간의 불신과 적대감, 궁극적인 이해와 포용들이 이야기의 구조다. 여기에 등장한 금자를 찾기 위해 땅을 파는 무하국 청년은 결국 권은민 변호사 자신일 것이다. 통일에 대한 논의가 담긴 책이라고 해서 딱딱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벗어버려도 좋겠다. 오히려 통일과 남북한 간의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는가에 놀랍다. 통일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읽어볼 것을 권한다.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