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박목월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새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
저물 무렵의 종이 박스 손수성 벚나무 성화 아래 수행 중인 그를 만났다 어찌 그리 자신을, 납작하게 만드느냐니까 목이며 팔 다리 접어 중심을 잡는다 했다 처음엔 다 반듯한, 사각형 꿈을 꾸지만 중심을 잡지 않아서 모서리가 자꾸 자라 모서리 쌓은 집 한 채 그
의자들의 경영학 손수성 의자들이 바닥을 팔아 경영을 시작했다 시간의 후미진 골목, 영세한 그늘에서도 묵인된 밀수를 하듯 엉덩이들을 찍어냈다 싱싱하고 헐렁하고, 납작하고 축 처진 그 엉덩이가 갈아 탈, 보험까지 찍어냈다 접이식, 의자를 피하고 회전의자를 찾게 했다
내성천 신필영 발목이 가느다란 초식동물 눈빛 같다 상류쪽 맑은 물에 은어 떼로 튀는 햇살 길나선 외나무다리 혼자 내를 건넌다 ‘사이’로 발견하는 존재의 비밀 한 폭 그림 같은 단수다. 사물이 순한 동물의 모습으로 화육되면서 우리의 시각이 범하는 구분
기다렸다는 듯 권선희 종합운동장 맞은편 2층 유방외과에서 오른쪽 악성 종양 진단 받았을 때 기가 찼다 계단에 주저앉아 도로를 질주하는 낙엽들 바라보며 암만, 시인 생에 병마 하나쯤은 다녀가야지 암 병원에서 오른쪽, 왼쪽, 림프 전이까지 있다는 말 들었을 때 아
왜 이렇게 가슴 뛰느냐고 이성복 새 학기에 고3이 되어야 할 여자 아이는 머리 박박 밀고 입에 마스크하고 신승훈인가, 이승환인가 요즘 나오는 발라드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래, 노래라도 해라, 얘야, 노래라도 자꾸 불러라, 시어머니 병수발하던 옆 침대 아줌마
거울 속 거울 강현덕 폐쇄된 채석장에 내가 잘려있네 울음이 함께 남아 고요에 물려있네 수직의 암벽 아래에 그런 내가 모여있네 안개에 떠넘겼던 모든 부끄럼과 순정이라 믿었으나 무용했던 노래와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언젠가라는 말들이 일시에 붙들려 와 이 감옥
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김해자 참 곱다 고와, 봉고차 장수가 부려놓은 몸뻬와 꽃무늬 스웨터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말 먹어봐 괜찮아, 복지에서 갖다주었다는 두부 두모 꼬옥 쥐여주는 구부러진 열 손가락처럼 뉘엿뉘엿 노을 지는 묵정밭 같은 말 고놈
날, 세우다 정지윤 동대문 원단 상가 등이 굽은 한 노인 햇살의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숫돌에 무뎌진 손가락 쉼 없이 갈고 있다 지난밤 팔지 못한 상자들 틈새에서 쓱쓱쓱 시퍼렇게 날이 서는 쇳소리 겨냥한 날의 반사가 주름진 눈을 찌른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눈
햇소금 古代 장석남 마을 이장님으로부터, 신청한 김장용 햇소금을 받았다고 그것도 세포씩이나 받아 뒤꼍 처마 밑에 작년 것의 후배로 나란히 쌓아두고 돌아 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쉬자는데 집 어디선가 조용한 흥얼거림이 시작되었다고 집 안에는 나 혼자뿐이니 귀
하관(下棺) 박목월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 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音聲)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소화하는 목월의 방식 ↑↑ 손진은 시인 죽음을 다룬 한국 현대시 가운데 백미로 필자는 소월의 「초혼」과 목월의 「하관」을 꼽는다. 두 편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격절과 거리를 노래하지만 시의 어조는 완전히 다르다. 소월이 격정적 어조를 통해 화자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면, 목월은 절제된 어조와 표현으로 깊은 슬픔을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의 아우의 하관과 그 이후의 심정을 차분한 독백과 대화와 진술로 드러낸다. 1연은 화자가 마음속에 아우를 묻으며, 기도하고 작별을 고하는 화자의 단정적인 서술과 독백이다. 빈번하게 사용된 마침표는 이러한 화자의 절제된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2연의 꿈에서 아우를 만나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대화는 아연 이 시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형(兄)님!”부르는 목소리에 화자는 반가움에 겨워 온몸으로 화답하는 경상도 남성의 절실한 음성 “오오냐”의 대화는 막막하고 불완전하다. 아우의 음성을 나만 듣는, 슬픔에 겨워 있음을 암시하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에 화자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3연은 소월과 목월의 시 전체를 비교하는 준거로 작용하는 구절이 나온다. 소월이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초혼」)의 수직의 공간으로 목소리를 침투시켜 이승과 저승의 공간을 나누고 있다면, 목월은 생명체(열매)가 죽으면 “툭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표현으로 죽음에 대한 화자의 적막감을 먹먹하게 드러낸다. 감정이입과 격절의 소월과, 내면화의 목월. 두 시인이 깊은 슬픔을 소화하는 방식이다.
물에 잠긴다는 것 박상봉 아이들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물에 잠긴 세월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 귀는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해 저 바다 깊은 물속에 산다 물에 빠져 귀를 잃고 사람의 말귀 알아듣지 못한 채 그냥 살았어 물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겨우 구조된 아이는 반 귀머거리가 되어 말도 잊어버리고 바다 깊은 물속에 두고 온 귀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데 물에 잠긴 귀가 듣는 소리는 아이들 우는 소리만 들린다 작은 그늘로 큰 그늘을 보듬어 안는 귀 이 작품은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을 통하여 2014년 세월호 사건으로 죽은 250여명의 어린 영혼을 애도하는 시로 읽힌다. “아이들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물에 잠긴 세월이 떠오르지 않는다”에서 ‘물에 잠긴 세월’이라는 말은, ‘물에 잠긴 그간의 시간’과 ‘세월호’라는 배 이름이 함께 내재된 이중적 발화로 읽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 ‘나’는 “물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겨우 구조된 아이”로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의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체험을 가진다. “물에 잠긴 세월”은 그대로 시인 자신의 그간의 세월이 되는 절묘함이 있다. 그 세월을 시인은 “귀를 잃고 사람의 말귀/알아듣지 못한 채 그냥 살았”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지만, ‘귀’와 ‘말귀’의 이 말놀이 유머는 “바다 깊은 물속에 두고 온 귀는/아직 찾지 못했다”는 깊이로 연결된다. 시인은 “반 귀머거리가 되어 말도 잊어버리”는 끈질긴 고통의 시간을 살아왔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의 귀가 “저 바다 깊은 물속에” 살면서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는 자신의 개인적 불행이 타자의 더 큰 불행을 만나면서 시인의 존재가 확장되는 지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시의 결구 “물에 잠긴 귀가 듣는 소리는 /아이들 우는 소리만 들린다”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감정의 흐름을 전달하는 의도적 표현이다. 굳이 그렇게 표현한 것은 물속에 잠긴 귀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거나 왜곡되는 상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구절은 ‘이명’ 상태의 감각도 은근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주체로 놓고, ‘우는’은 현재 분사형으로 감정적인 느낌을 강하게 전달하여 ‘들린다’는 수동태로 그 소리가 귀에 전달되는 상태를 강조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은 아직도 계속 울고 있고, 내 귀는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애도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 체험과 공동체적 경험이 만나 새로운 시야와 깊이를 열어놓은 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분고분 가을 고분 서숙희 천년 세월쯤은 한 손에 얹고 비추는 환한 볕살 나눠 덮고 벌초에 든 고분들 머슴애 뒤통수처럼 고분고분 순하다 가을볕이 손수 든 바리캉 아래에서 슬며시 금관 벗고 수굿하니 디민 머리 바람이 쓰윽 쓰다듬어 고분고분 고분들 참하니 잘 다듬어진 평화로운 저 위엄 천년 이불 가벼이 다시 또 당겨 덮고 혼곤히 맑은 잠에 드는 고분고분 고분들 위엄과 천진, 성과 속이 넘나드는 경지 언어를 이렇게 유연하고 재치있게 다루는 시인이 근래에 있었던가 싶다. 시집 『빈』(작가, 2024.7)만 살펴아도 말놀이(pun)가 사용된 작품이 열 편이 넘는다. 그 중 “깨어진 거울 속에선/대소 없는 파안만 있다”(「파경」)거나, “자꾸만 목화이불이/목하이별로 읽혔지”( 「비문非文의 밤」), 또 “막다가 받아주다가 위안이다가 통곡인//너는 늘 난해했고 나는 자주 오해했어”(「벽의 이중성」), “허무도 힘껏 허무한/슬픔도 힘껏 슬픈”(「미스 보디빌딩」)이라는 구절에는 한없이 쓸쓸하고 애잔한 정서가 묻어난다. 그런가 하면 “닦는 일에 길들여진 나긋나긋 티슈 티슈, 독이 번져 다 헐은 이슈의 밑구멍을”(「이슈와 티슈」)에 이르면 실시간 쏟아져나오는 티슈보다 가벼운 이슈라는, 현실의 얼룩과 어두움에 예리한 메스를 가하기도 한다. 확실히 그의 날렵하고도 빛나는 언어에는 명랑하고 아픈 개인과 타자, 시대를 넘나드는 정서와 진단이 겹쳐 있다. 아무래도 그의 시가 깊어지는 지점은 언어의 말맛이 다층적인 함의의 조화를 거느릴 때다. “무채와 시가, 썬다는 것과 쓴다는 것이”(「무채를 쓰고 시는 썰고」)할 때 ‘무’는 채소 ‘무’이면서 ‘무無’이고, 마찬가지로 ‘무채’는 ‘무채無彩’이다. 「빈」은 그 정점에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빈, 하고 네 이름을 부르는 저녁이면/하루는 무인도처럼 고요히 저물고”에서 ‘빈’은 ‘빈貧’이나 ‘공空’에 가깝다면 “비워둔 내 시의 행간에/번지듯 빈, 너는 오지”의 ‘빈’은 ‘빛나다’라는 뚯인 ‘빈彬’의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다. 오늘 우리가 다룰 그의 시의 특징은 명랑성과 유머다. “예전엔 이팝꽃이 밥, 밥하며 피었지요//요즘엔 이팝꽃이 팝, 팝하며 터져요”( 「이팝꽃 변천사」)에 나타나는 명랑성 말이다. 첫수의 풍경은 아마 고분의 가을 벌초 풍경일 것이다. 인부들이 예초기를 들고 다가가는데, “천년 세월쯤은 한 손에 얹고 비추는” 가을 고분들이 일순 “고분고분 순”한 “머슴애 뒤통수”가 되는 천진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둘째 수에서 시인은 금관을 쓴 지체 높은 분이 그걸 벗고 “수굿하니 디민 머리”를, “바람이 쓰윽 쓰다듬어” 고분해졌다고 한다. “가을볕이 손수 든 바리캉”의 통찰 때문에 시가 더 깊어진다. 셋째 수는 벌초가 끝난 후의 풍경이다. 어느새 고분들은 “잘 다듬어진 평화로운 저 위엄”을 회복했는가? 아니다. “혼곤히 맑은 잠에 드는/고분고분 고분”에 이르면 아직 영락없는 철부지다. 그렇다. 시인의 말놀이의 재능과 운치 때문에 한 편의 시에서 우리는 위엄과 천진, 햇살과 천년 이불, 영원과 현재, 성과 속이 넘나드는 경지를 맛볼 수 있었다. ‘일물일어一物一語’를 주장한 사람은 플로베르이지만, 이 시인의 손이 닿으면 어떤 사물도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새롭고도 경이로운 언어로 다시 태어난다. 시조가 운문적인 맛을 회복해야 한다면, 언어의 재치, 말놀이도 소중한 자산이 아니겠는가.
저녁의 소묘 한강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고통과 치욕 끝에 남은 사랑의 시 시인은 ‘저녁’이라는 시간의 단어를 시어로 많이 사용한다. 시집의 이름도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이고, 시의 제목만 살펴봐도,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저녁의 대화」, 「저녁 잎사귀」 등 여러 편이 있다.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을 우리는 흔히 거울을 보듯 찬찬히 존재의 본질과 마주하는 시간으로 부른다. 그 몇 분의 시간 속에서.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자아를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시인이 그리는 저녁은, 그런 성찰의 시간을 멀찍이 뛰어 넘는다. 새벽의 시간과 뚜렷한 구분도 없다. 바로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피 흐르는 눈」) 할 때의 눈이 가진, 고통받는 존재들과 내밀하게 교감하는 지점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이 시는 “어떤 저녁”이 “피투성이”일 때 나의 깊은 곳에서 고통과 침묵 사이에서 뿜어나오는 “고요히 붉은/영혼의 피 냄새”(「마크 로스코와 나2」)에 가깝다.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오랜 지옥”을, 어둠이 대신 그들의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있는데, 나는 그들을 위무해줄 수는 방법은 없다는 말인가? 시인은 고심한다. 여백 끝에 시인은 이들의 ‘피투성이 삶’이 안 보이도록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하고 소망한다. 그래야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노랗고 주황빛인 “외등은 희”어지니까. 화자의 마음처럼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 되니까. 소설 『채식주의자』에는, 오토바이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는 개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이 나온다. 세상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얼마나 고통과 마주하는 일이 끔찍했으면 그림자와 빛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고 할까, 그렇다고 해도 처절한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힐 수 있다면 오랜 지옥을 견뎌온 사람들의 삶이 조금은 위무될까. 그리하여 우리 눈이 흑백렌즈였으면 좋겠다는 시인의 소망과 한탄이 뻑뻑한 치욕을 사랑으로 바꾸는 행위임을 알겠다. 그런데도, 그 사랑이 따뜻하면서도 서늘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비록 그 렌즈로 바라본다고 세계의 상처가 숨겨지기야 않겠지만, 그 순간만이라도 “그의 눈을 적신” 붉은 빛이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는 걸 보고 싶다는 말이다. 다시 고통과 치욕, 그 끝에 남는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흥부 부부상 박재삼 흥부 부부(夫婦)가 박덩이를 사이 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金)이 문제리 황금 벼 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面)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面)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本)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우리 말의 요체를 아는 시인의 광채 가난은 인간을 ‘낡게’ 한다. 가난 때문에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바랜다. 가난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 연인들도 많다. 그러나 가난해도 아름다운 사람은 있다. 그 가난은 인간을 성숙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박재삼은 『흥부전』의 박 타는 장면에서 흥부 부부의 마음을 ‘맑은 가난 속에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인간성’으로 새로이 해석해 낸다. 그렇다. 박을 탈 때 그들은 금은보화를,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기대하지도, 분질러진 다리를 고쳐준 제비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정갈한 소찬이나마 흡족히 먹을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설렘은 박을 가르기 전에 그들 부부가 나눈 ‘웃음살’로 나타나는데, 그 웃음살이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面)”에 어린다. 내가 웃으면 네가 웃는, “없는 떡방아 소리”를 당겨서 듣는 백결 선생 같은 얼굴. 그러나 그 웃음은 연민을 머금기도 한 것이어서 서로 ‘구슬’(눈물 방울)을 나눈다. 그러다 눈가를 타고 얼굴에 굴러온 눈물 방울(구슬)을 보고는 서로 부끄러워 하다 ‘우리가 여기서 왜 울지?’ 몸을 떨 듯이 움직여 참웃음(“본(本)웃음 물살”)을 짓는다. 웃음은 연민을, 다시 연민에 대한 부끄러움을 거쳐 진정한 웃음에 이른다. 불안정한 마음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울음이 타는 가을강」)이라 명명했던 시인은 굳이 어려운 수사를 쓰지 않고, 쉬우면서도 명징한 말(‘웃음살’,‘거울면’,‘구슬’)로 시적 아름다움과 정서를 배가시킨다. 여기서 또 하나, 시인이 의도적으로 쓴 표현을 발견한다. ‘문제’라는 말이다. 이 말은 ‘너는 정직하지 못한 게 문제야’ 할 때의 의미를 굴절시키는 지점에서 파생한다. 다시 이 시어는 어법의 활용(“문제리”, “문제다”)을 통해 가치관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며, 완전히 못 박는(“확실히 문제다”) 역할을 하는 이채로운 장치로 작용한다. 만약 ‘문제’라는 말 대신에 ‘소중하다’라는 말을 썼다면 나타날 수 없는 효과다. 박재삼, 그는 우리 말의 요체를 알고 쉬운 말들의 창조를 통해서도 시가 광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체득한 드문 시인이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김복희 쌀 씻는 소리 오이를 깎는 소리 수박을 베어 무는 소리 미닫이문이 드륵드륵 닫히는 소리 딱 하나면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갈까 앞으로 내가 듣지 못할 것 남도 듣지 말았으면 하는 것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면…… 조용히 우는 소리 틀어 놓은 텔레비전 위로 막막한 허공의 소리 손톱으로 마른 살갖을 긁는 소리 죽은 매미를 발로 밟는 소리 이것 중에 무엇이 좋을까 잠시 고민했다 이런 거 맞나요? 나는 물었고 대답은 없었다 누가 벌써 대답을 가져간 것일까 다 두고 갈 수는 없나요? 아주 조용했다 누가 벌써 가져간 게 확실했다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지지 않을 때의 기쁨 잠든 사람이 따라 하는 죽은 사람의 숨소리 죽은 다음에도 두피를 밀고 나오는 머리카락 소리 벌려 놓은 가슴을 실로 여미는 소리 세상에서 소리를 하나… 데리고 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소리 하나 들고 우린 먼 곳으로 가는 걸까 단정한 듯 입체적인 시다. 그것은 먼저 “딱 하나면 가져갈 수 있다면/무엇을 가지고 갈까”, “세상에서 소리를 하나… 데리고 갈 수 있다면/어떻게 할래?” 유사한 듯 다른 화자의 물음을 핵심으로 시가 구성되고 있다는 점부터 그렇다. 2연 초반부와 마지막 연에서 배치된 그 물음이 나머지 구절을 끌고 가는 형식을 구사한다. 소리의 선택지는 쌀 씻고 미닫이문이 닫히는, 일상적인 소리(1연)에서, “손톱으로 마른 살갗을 긁는” 죽음에 다가가는 마른 생의 고적한 소리(3연), “벌려 놓은 가슴을 실로 여미는” 죽음 이후의 소리(7연)로 진전된다. 이런 세계를 표현하려고 시인은 이에 걸맞은 독백도, 주체와 객체가 피드백하거나 중간을 걷는 화법도 자재로 구사한다. 예컨대 소리를 하나 선택하고 “이런 것 맞나요?/나는 물었고/대답은 없었다”에서 내가 대화하는 대상은 산 자이기보다 죽은 자, 천사, 귀신에 더 가깝다. 현실과 환상, 삶의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화법이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라 딴청을 피우는 이유는 무얼까? 그건 “앞으로 내가 듣지 못할 것/남도 듣지 말았으면 하는 것”(2연)이라는 전제에 합당하기 때문이다.이런 가벼움 속에 놓인 깊이, 여백이 그녀의 시에는 있다. 우리 시단의 새로운 자산이다.
분멸 김소연 그녀는 성냥을 한 장 사진의 꼭짓점에 가져다 대었다 불이 붙었다 세 장의 사진을 불 속에 던졌다 열 장의 사진 스무 장의 사진 혼자서 찍은 사진 모두 함께 찍은 사진 들이 불길 속에서 그녀의 얼굴들이 불길 속에서 일그러졌다 아기였던 얼굴 청년이었던 얼굴 면사포를 쓴 얼굴 눈을 감은 얼굴 들이 불길 속에서 잠시 환했다가 금세 검은 재가 되었다 얼굴이 지워졌을 뿐인데 생애가 사라지는 것 같군 사라지는 걸 배웅하는 것 같군 불길 같은 이런 기쁨 조용하게 출렁이는 이런 기쁨 정성을 다해 추락하는 황홀한 기쁨 검정 같은 깨끗한 기쁨 불 속에서는 재가 된 것과 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두 가지만 남겨져 있었다 입에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눈에는 불이 담겨 있었다 주문진의 바다와 노고단의 구름과 비둘기호의 창문 바깥이 차례차례 깨끗하게 타들어갔다 사진에 담아보았을 리 없는 그녀의 작은 미래가 빨간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그 불씨들마저 꺼졌을 때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그녀가 오래 기다려온 장면이었다 그 속에서 그 안을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온기마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혼자 남았다는 것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은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다 타버린 뒤에도 남는 기름이라는 역설 분멸은 태워 없앤다[焚滅]는 말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형성해왔던 소중한 기록물인 사진을 태워 없애버리는 그녀의 행위와 장면, 표정, 심리가 강렬하게 드러나는 시편이다. 불쏘시개가 된 한 장 사진 위에 그녀는 세 장의 사진, 열 장의 사진 스무 장의 사진을 태연하게 던진다. 그녀 전 생애의 얼굴들이, 그녀가 다녔던 공간들이 잠시 환했다가 금세 검은 재가 되”는 것을 본다. 그러면서 호젓하게 중얼거린다. “얼굴이 지워졌을 뿐인데 생애가 사라지는 것 같”다고. 그걸 “배웅하는 것 같다”고. 독자들은 그녀가 “조용하게 출렁이는 기쁨”으로 “검정 같은 깨끗한 기쁨”의 상태가 되는 것을 쉬이 긍정하지 못한다. 시인은 왜 자신의 사진을 태우면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추억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녀는 빨간 불씨처럼 남아 있던 “그녀의 작은 미래”마저 “꺼져버린 완전한 암흑” 속 “혼자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앉아서. 살아온 생애는 물론 “면사포를 쓴 얼굴”로 추측되는 가족의 모든 것을 버리고 단독자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나’를 다 태우는 의식을 통해 그녀는 단련되려 하는 건 확실하다. 그녀는 타협의 여지를 주는 “온기마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느껴지는 고독. 단호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최후의 정관(靜觀)” 다음의 “그녀는 남은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는 결구에서 묘한 힘을 발견한다. 추억이나 미래의 생각이 돋아나는 족족 계속해서 태울 거라는 의지 말이다. 다만 한 가지! 그녀는 “불 속에서는 재가 된 것과 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두 가지만 남겨겨 있었다”고 한다. 계속 태우고 또 태우려 한다. 그녀는 진정 이러한 과정만을 반복하려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 구절들은 묘하게도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됩니다”라는 만해의 「알 수 없어요」라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만해가 윤회와 재생이라는 종교적 구원의 역설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면, 시인은 지금까지 자신을 살게 한 과거와, 혹은 어줍잖은 미래에 대안 예기(豫期)마저도 다 태워버린 혼자라는, ‘무소의 뿔’ 같은 자유인의 의지를 갈망하고 있어 더 싱싱하고 윤기 나는 기름이 된다. 시인은 어느 글에서 “어떤 쾌락은 이전까지의 쾌락을 소멸시키며 등장한다”는 말을 썼지만, 그 지점에서 이 극명한 고독의 아름다움을 해독할 수는 없을까?
파경 서숙희 손거울을 보다가 그만 떨어뜨렸다 유리와 수은의 얇은 동거가 끝났다 파경은 그렇게 왔다 실수처럼 운명처럼 내 얼굴이 깨졌다 조각조각 웃는다 파안(破顔)과 대소(大笑)는 늘 붙어있어 왔지만 깨어진 거울 속에선 대소 없는 파안만 있다 최후는 쓸쓸할 뿐 슬프지는 않는 것 화장을 지우듯 기억을 지워내고 최선을 다한 파경은 호수처럼 고요하다 깨진 거울, 대소(大笑)는 없고 파안(破顔)만 있는 “손거울을 보다가 그만 떨어뜨”린 사소한 사건에서 시가 시작된다. ‘손거울’, 정말 그 별 것 아닌 것이 우리 생을 엎질러버린다. 곧장 무덤으로 데리고 가기도 한다.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것이 우리를 놔두지 않는 것이 우리 생이 아니겠는가. 늦게 식사를 하는 아내를 기다려 주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이혼한 제법 저명한 부부의 이야기를 우리는 지면을 통해 본 적이 있다. 그들 부부인들 그 사소함이 그들을 갈라놓을 것이라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시인은 느닷없는 현상에서 핀셋처럼 본질을 집어낸다. ‘파경은 실수처럼 운명처럼 온다’는 것. 실수와 운명의 간극이 이리 좁다는 것. 대부분이 거울만 생각하고 있을 맥락에서 “유리와 수은의 얇은 동거”를 잡아내는 예리함은 또 어떤가. 앞뒷면을 이루는 유리와 수은의 얇은 동거로 번드르르한 ‘결혼 생활이라는 거울’이 구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서야 알아차린다. 이 때 두 번의 종결어미로 끝낸 초중장과 도치가 섞인 종장에서 문장의 속도감은 날렵하기 그지없다. 느닷없이 결혼의 끝, ‘파경’에 직면한 시적 화자의 얼떨떨함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둘째 수는 “내 얼굴이 깨졌다 조각조각 웃는다”에서부터 파경의 실감을 통해 ‘일그러지고 파편화된 자아’를 바라보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 구절은 파안(破顔)의 적확한 묘사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시인은 문장의 속도를 줄이면서 독자를 사유하게 한다. 시인은 지금까지는 늘 ‘파안대소’해 왔지만, “깨어진 거울 속에선/대소 없는 파안만 있다”로 현실감을 전달한다. 이 시인만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관용어의 빈틈을 파고들어 자신의 언어로 장악하는 솜씨를 우리는 본다. 그렇다. 깨진 상태로 조각조각 흩어지는 웃음은 대소(大笑)가 될 수 없는 것. 다만 쓸쓸한 자아를 물끄러미 자꾸 되풀이하여 돌아보게 할 뿐. 놀라운 것은 셋째 수의 변신이다. 결여와 상실은 슬픔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음에도 “최후는 쓸쓸할 뿐 슬프지는 않는 것”이라고 감정을 냉철하게 구분하며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보라. 나아가 화자는 이내 쓸쓸함과 허탈마저 벗어버릴 준비를 한다. “화장을 지우듯 기억을 지워내고” 아무래도 둘 사이에서 덧칠(화장)한 부분은 있었을 것인데, 그 가식을 지우듯 그와 함께한 모든 기억마저 지워버린다. 그러면서 나직이 입을 다물고 읊조렸을, “최선을 다한 파경은” 하고는, 행을 달리하여 “호수처럼 고요하다”로 맺는 결구는 바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담담한 수용은 물론, 호수처럼 고요한 내면과 자신을 정관(靜觀)할 여유를 가진 자아의 깊이를 반영한다. 이 고요한 침잠의 상태는 자신을 에워싼 현실을 혼자서 헤쳐나가겠다는 의지를 포함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시는 각 수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깊어지는 화자의 느낌과 내면을 입체적으로 구조화하면서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시에 동적인 힘과 깨달음을 부여한다. 서사를 한 폭의 그림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안목(眼目)을 가진 이런 가편들을 시인이 최근에 낸 『빈』이라는 시집에서도 발견하는 안복(眼福)을 누리시기를!
사막의 사자* 강현덕 나는 꿈을 수집하는 사자라고 해둘게 초원을 오래 걸어 당도한 원시의 사막 지금은 만돌린을 타던 집시가 잠들었군 – 꿈이라면 집시의 것이 가장 순결하지 세상을 떠돌다 만난 날것만 가졌으니 바람이 물 항아리를 엎기 전 재빨리 채취해야지 포효는 내 게 아니니 달은 떨지 말기를 몽환을 담당하는 밤의 정령에 의해 발톱도 거친 이빨도 진즉에 다 뭉개졌으니 *루소의 ‘잠자는 집시’ 에 있는 사자. ‘사자’와 ‘집시’에서 ‘샤리아르’와 ‘세에라자드’를 떠올리다 연일 뙤약볕이 이글거리고 있다. 보름 전만 해도 장마 이재민들 뉴스가 나왔는데, 온 나라가 태양신전이 점령한 전쟁터 같은 열기에 휩싸이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은 아프리카 평원에 하얗게 남은 짐승의 뼈를 비추어준다. 이럴 때 이 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내라고 우리 어깨를 툭 치는 작품이 있다. 강현덕의 「사막의 사자」다.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영겁의 회의와 죽음만이 주인일 것 같은 황량한 사막! 하지만 사막이기에 오히려 환상은 작동한다. 『천일야화 Alf laylah wa laylah』가 바로 그 산물이 아닌가. 이 작품은 그만큼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시인은 이 작품이 앙리 루소의 그림 「잠자는 집시」에서 발상했다는 각주를 붙인다. 기실 강현덕의 작품은 앙리 루소의 그림만큼이나 환상적이다. 하지만 루소와의 차별성은 첫째 수 초장에서 “나는 꿈을 수집하는 사자라고 해둘게” 라는 출발부터 드러난다. 꿈 수집가 사자! 정말 예측하기 어려운 사자의 이야기로 우리를 몰입하게 한다. 시인은 우선 자신의 경험하지 않은 일을 시로 형상화함에 있어, 자신을 대신해서 발화해 줄 만한 화자를 내세우는데, 놀랍게도 ‘사막의 사자’가 자아를 연기하는 화자로 등장한다. 독자들은 사자로 나타나는 화자의 언술 때문에 상위주체는 시인임을 뻔히 알면서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 정서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중장 “초원을 오래 걸어 당도한 원시의 사막”의 주체는 사자일 수도, 만돌린을 연주하며 방랑하다 잠든 집시 여자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이미 ‘초원’이라는 생활공간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사자는 찬찬히 집시를 보다가 “세상을 떠돌다 만난 날것”으로 가득한, 가장 순결한 꿈을 채취할 생각에, “바람이 물 항아리를 엎”어 말라버리기 전이라는 시간을 떠올리며 마음이 바빠진다. 그러면서 하늘에 뜬 만월을 향하여는 “포효는 내 게 아니니 달은 떨지 말기를”이라는 말을 남긴다. 시의 공간성이 확장되는 순간이다. 천지를 호령하는 사자의 용맹을 벗어버렸다는 선언이다. 이미 “몽환을 담당하는 밤의 정령”에 적신 영혼으로 상승되어 있는 것이다. 아라비아 설화 『천일야화』에는 어떤 아내든 첫날밤을 지낸 뒤에는 죽이겠다고 맹세하는 술탄 샤리아르와, 첫날밤 재미있는 이야기로 술탄의 관심을 끌어 목숨을 보존하는 데 성공하고, 마침내 술탄이 자신의 맹세를 포기하게 하는 세에라자드가 나온다. 이 시를 찬찬히 읽다보면 꿈 수집자 사자는 어느새 술탄으로(특히 “발톱도 거친 이빨도 진즉에 다 뭉개졌”다는 표현에서), 세에라자드는 집시 여인(가장 순결하다는 꿈 이야기를 뿌린다는 의미에서)으로 화하는 지점이 있다. 우리의 미학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시를 만나는 기쁨이 크다.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황동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쉰다섯 여름과 겨울 그 헐렁한 길을 맨머리에 눈비 맞으며 헤매다녔노니 이마를 땅바닥에 찧기도 했노니. 공사장에 나가 거칠은 낱말들을 체질해 거르다 찢어진 체가 되기도 했노니, 정신 온통 너덜너덜. 그 해골 돌로 두드리면 돌 소리 내고 나무로 두드리면 나무 소리 내는구나.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알맞게’ 익은 미소 하나를 위한 생 제목부터가 엉뚱하고도 재밌는, 그러나 알고 보면 해학과 깊이, 거기에다 예지의 빛까지를 거느리고 있는 시다. 그것은 무엇보다 ‘해골’이라는 말에서 온다. 진짜 해골이라도 ‘촉루(髑髏)’라고 표현하면(“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髑髏)가 빛나리”, 박두진 「묘지송」 ) 향기가 나는 법인데, 시인은 역으로 우리의 ‘얼굴’을 ‘해골’이라고 유머와 해학으로 그러나 현실감 있게 표현한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다. 온갖 감정이 다 담기는 민낯의 얼굴, 그게 해골이 아닐 것인가. ‘해골’밖에 안 되는 주제에 온갖 거짓과 가식으로 남을 속이고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하냐, 하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 해골을 수식하는 관형절이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이다. ‘알맞게’라는 말은 과장에는 이르지 않고, 거짓의 탈을 쓴 가식은 걸러내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자연스럽게 익은 양태를 말한다. 문득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인은 쉰다섯 인생길을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헤매다녔다고 밝힌다. 그 나이에 이르는 동안 시인이 내면에서 추구하는 이상과 부딪힌 현실은 얼마나 괴리가 많았을까? 자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헐렁한” 길이 되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시인은 그 과정에서 만난 중첩된 고난과 시련을 “맨 머리에 눈비 맞으며 헤매다녔”다고 표현한다. 심지어 “이마를 땅바닥에 찧기도” 하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 좌절, 절망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기에 시인에게 ‘공사판’으로 비유되는 삶이라는 여정은 무엇보다 “거칠은 낱말들을 체질해 거르”는 말의 순화과정의 연속이지만, 그것은 쉽사리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찢어진 체가 되”는 낭패와 소모과정을 거쳐, “정신 온통 너덜너덜”해질 지경까지 이른다. 그러나 웬걸? 정신이 다 닳고 나자 시인은 자신이 변화되는 경이를 맛보게 된다. 그 과정은 2연과 3연 사이의 여백에 생략되어 있다. 3연은 앞의 연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의 탄생을 그린다. 바로 어떤 말을 들어도 다 소화가 되는, 귀가 순해진 인간이다. 타자가 “돌로 두드리면/돌 소리 내고/나무로 두드리면/나무 소리 내는” 해골. 그것은 내 마음이 타자에 대한 적의가 사라졌기에 가능한 반응이다. 오히려 내 마음에 긍휼과 여유가 있기에 그 사람이 어떤 것으로 나를 치고 들어오든 그 사람에게 맞는 미소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혼자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 나오는 미소다. 시인은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드는 데 쉰다섯 해가 걸렸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이순(耳順),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나이를 예순이라 하니, 시인은 그것을 몇 해나 당겨서 이룬 셈이지만, 나중에 우리 생을 결산할 때 과연 어떻게 살아야 일생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더도 덜도 말고 알맞게 지은 미소를 가진 얼굴, 그거면 된 게 아니냐고 시인은 우리의 옷깃을 당기며 속삭이듯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