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효자 주택 단지내에 감사둘레길이 조성되어있다. 2012년 6월 준공된 것으로 주택단지 연못에서 청송대, 전망대, 부덕사를 거쳐 영일대 호반 쪽으로 이어 있으며, 어느 쪽으로 들어가 나오든 자유롭다. 주로 대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이어져 황토길, 마사토 길, 대나무길 그리고 데크 나무길로 이어있다. 천천히 걸으면 2키로 미터에 1시간정도 걸린다. 둘레길이 굴곡있고, 다양하고, 오밀조밀해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둘레길 속의 주요 길을 따라가면 여러 갈래 길이 있지만 대나무 숲 속에 야산 허리를 휘감아, 데크 나무로 요리조리 길을 만든 대나무 숲길이 있다. 마치 대나무 긴 터널을 지나는 기분으로 상쾌함과 신선함이 있고 나무 가지들의 서걱거리는 소리에 머리가 맑아진다. ‘마사토 길’은 전망대로 올라와 청송대 쪽으로 가는 길로 450여 미터에 마사토를 깔아 놓았다. 부드럽고, 발에 닿으면 촉감이 뭉글뭉글해 사람들이 더러 이 길에 들어서면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발 케어를 하고 지나간다. ‘황토길’도 있다. 청송대에서 정구장 입구까지 내려가는 길은 흙으로 되어 있어 걷기가 수월하다. -영일대 호수 주변 꽃길은 영일대 호숫가를 돌아보는 길이다. 봄이면 벚꽃, 겹벚꽃,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등이 피어 어우러지는 곳이다. 특히 물가에 피어나는 신선한 노랑꽃 창포가 장관이다. 노랑꽃들이 군락을 이루어 바람에 흔들릴때면 신비롭기까지 하다. 연못 안에는 큰 잉어들이 물 반, 고기 반 득실거리고, 물위로 거위 한 쌍이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이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에 목을매다시피 따라다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작은 인공폭포도 괜찮다. 호숫가에 바위언덕을 만들어 놓고, 호수에서 물을 끌어올려 낙수를 만든다. 더운 여름, 쏟아 흐르는 물길은 좋은 피서 길이 되기도 한다. 이른 봄날이면 호숫가에 개나리꽃이 긴 벚꽃나무 아래로 군락을 이룬다. 쉼터 나무 의자에 앉아 호수 속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세 줄기의 분수와, 새들의 율동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다. -둘레길에 숨어있는 옛 건물들 이야기 둘레길 산 정상 쪽에 2층 철골건물이 있다. 이곳에 오르면 형산강이 보이고, 포항제철소 공장,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 이름은 전망대이나 집 모습은 포항제철소 건설 때, 초기 건설 지휘 본부로, 가칭 ‘롬멜하우스’라 불렀다고 한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영웅 롬멜 장군의 야전군 지휘소와 흡사하다고 해서 애칭으로 부쳐진 것이다.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려 눈을 뜰 수 없던 모래벌판 공사현장, 안전모, 귀마개 방독안경으로 중무장을 하고 출입하든 건설 사무소로, 초기 전설 현장의 지휘소였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여기 2층에 올라 공사 현장을 바라보며, ‘남의 집 다 부셔놓고, 제철소가 되는 건가?’하고 근심어린 눈으로 허허 벌판을 응시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위해 당시 건물 모양대로 지어 보존하고 있는데, 지금은 안전차원에서 출입이 금지돼 있다. 전망대 아래쪽으로 임원사택으로 두어 채가 포스코 역사 보존상 모델로 남아 있고, 근처에 건설당시 일본 기술자 숙소 1채가 있다. 벌써 50년이 넘은 2층 구옥이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부덕사(婦德舍)란 집은 포철 주택단지 내 직원부인들이 모여 취미, 운동이나 생활 지혜를 배우든 곳으로, 부인들의 덕을 쌓는 집이란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호텔 영일대 이야기 1969년쯤 포항제철소건설시 외국 기술자나 자문단들에게 숙소가 필요하게 되자, 건설 현장이 보이는 효자지역 산언덕에 2층 건물을 짓고 그 이름을 ‘영일대(迎日臺)’라 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호텔 영일대로 용도 변경되어 일반인들에게 식당, 호텔로 사용되고 있어도, 당초에는 건설 중요인사의 숙소이며, 또 제철소 건설 상황실로 쓰였던 역사가 있는 건물이다. 한국 철강 산업의 산실인 이곳을 포스코 창업의 성지로 삼아 조경에 정성을 기우리고, 연못과 주변 길을 만들어 소위 영일대 호수공원으로 아름답게 보존하고 있다. 주변에 내·외빈 손님들의 방문기념 식수들이 있고, 고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4월 1일에 포항 제철소 착공기념으로 심은 나무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잘 자라고 있다. -눈여겨 볼 꽃과 나무들 이 둘레길에는 40여종의 수종들이 자라고 있다. 봄이면 산수유에서부터 흰 벚꽃, 분홍색 겹벚꽃, 개나리, 진달래까지 꽃나무들이 줄을 잇고 있다. 감나무, 모가 나무, 오동나무, 수양버들, 길 따라 메타스퀘어, 히말라시다 등 큰 재목들도 창공을 향해 뻗어 있다. 이중에도 이름이 재미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나무가 있다. ‘꽃 아그배나무’이다. 봄, 여름에는 아름다운 꽃으로 흰색과 빨간색이 섞여 있다가, 가을에는 꽃 사과처럼 작은 열매를 맺는 나무이다. 꽃에다 아그배를 합친 이름인데, 아그배는 아기배(돌배)랑 뜻으로 돌배처럼 작은 모양때문인 것 같다. 장미과에 속하는, 중국 서부가 원산지로 일명 서부해당화라고도 한다. 새들이 좋아하며, 오밀조밀한 열매, 상큼한 색상 때문에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흰 벚꽃이 지고나면 여러겹의 분홍색 잎으로 ‘겹벚꽃 길’이 생긴다. 청송대 뒷길을 주로 하여 벚꽃 터널처럼 보인다. 벚꽃송이 크기도 크거니와, 가지가 무거워 땅에 닿을 듯 휘늘어지고, 바람이라도 불면 꽃잎이 길바닥을 쓸며, 산책인의 얼굴도 덮친다. 5~6월이면 호수가에 창포꽃이 길게 군락을 이루어 피어난다. 노란색 창포는 약용으로 쓰이고, 씨앗은 여인들의 머릿기름 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우아하고, 신비스런 꽃이다. 그래서인지 이 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정갈해진다. 이 둘레길은 야간에도 길가에 조명 등을 설치하여 걸을 수 있게 되어있다. 야간 조명이 있는 숲속 둘레길, 군데군데 산돼지 출몰 위험 경고판이 섬뜩하게 하지만, 그만큼 나무들이 신선하고 분위기가 한적해서 좋다. 이 둘레길 지역은 포항제철의 역사가 새겨진 제철산업의 성역이다. 그리고 자연 박물관이다. 착공 기념비가 있고, 건설 현장 지휘소가 있으며, 그리고 제철 역군의 씩씩한 혼과 땀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후세들에게 좋은 힐링 공간과 교육의 장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할 것이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공대생의 야망의 기도처 노벨동산 포항 유강 터널을 통과해, 효자 고가도로 좌측으로 오르면, 산허리에 포항공대가 있다. 정문 앞쪽 건너편엔 형산강이 흐르고, 뒤편엔 학교 캠퍼스가 노란 은행나무들에 묻혀있다. 이제 깊어가는 가을 따라,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흩날리기 시작한다. 대학 본부 옆에 ‘노벨동산’이 있고, 그 중간쯤에 고 박태준 이사장의 조각동상이 효자 골의 대학 캠퍼스를 내려다보고 서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이 학교를 방문한 노벨 수상자들의 기념식수 나무들이 둘러서있다. 이 학교는 설립 당시부터 세계제일의 연구중심 공대로, 또 젊은 과학도를 양성하는 세계적 명문 공대로, 그래서 한국의 과학 인재를 배출하는, 교육보국을 목적으로 탄생된 학교로 잘 알려져있다. 따라서 노벨 과학상 수상자 양성을 학교 지상 목표로 삼고, 이에 학사총력을 기우리는게 아닌가 짐작된다. ▼노벨 수상자들이 포항공대를 다녀가다 이 동산에 들어가 노벨수상자들이 심은 나무를 세어보니 34그루쯤 된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노벨수상자 꿈과 희망을 갖게 하기위해, 학교 측에서 예우를 다해 모셔왔는데, 지금은 학교가 널리 알려져 사정이 좀 달라졌다고 한다. 현재 이 동산에 나무를 심은 수상자는 미국의 브라운박사(화학상) 등으로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상 등이 많고, 식수 종류는 금송, 느티나무, 낙우송, 단풍나무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 노벨동산은 학교본부와 대강당 옆에 조성되어 있다. 이 학교의 대표적인 요지로, 캠퍼스 중심 위치인 이 자리에 노벨동산을 특별히 배정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동산 면적은 사각형으로 4750평방미터(약1440평)쯤 된다. 그 중앙에 동쪽을 향해 고 박태준 이사장의 조각 동상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영국대처수상의 방문 기념식수가 있고, 동산 좌우 양쪽 잔디밭에 노벨 수상자들이 심어놓은 나무들이 둘러있다. 동산 각 코너에 높다란 시멘트 기둥 8개가 전봇대 모양으로 세워져있는데, 그 끝부분에 조명 등이 있어 밤에도 이곳을 밝힌다. 설립이사장의 교육보국 개교이념 실천과 노벨수상자의 학구열정과 명예, 그리고 대처수상의 강인한 추진력을 본받아, 공대생들의 향학열이 창공에 솟는 불기둥처럼 타오르길 바라는 각별한 의미가 이 노벨 동산에 묻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동산은 공대학생들의 명상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공부에 찌든 머리를 식힐 때, 과학 도로서의 장래의 포부와 고민 등, 기타마음의 다스림이 필요할 때, 여기를 찾는다고 한다. ▼영국 ‘대처수상’이 심은 느티나무 이야기 노벨 동산 내, 설립 이사장의 조각상 뒤에 제법 큰 느티나무가 서있다. 주변 은행나무 잎에 비해 유난히 짙은 붉은 색으로 물들어져, 빨간 물이 금방 쏟아질 것만 같다. 1986년 5월 대처수상이 이 학교를 방문하여 기념식수한 나무이다. 당시 여걸 정치인인 대처수상이 포항 공대를 방문했으니, 세계적인 뉴스였다. 더구나 학교 개교도 안 된, 공사 진행 중에 있었기에 일찍부터 학교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절호의 계기가 된 것이다. 수상은 고 김호길 총장의 안내로 대학설립 추진현황설명을 들었고, 영국의 첨단 컴퓨터 제품을 공대에 기증했다. 그리고 느티나무를 방문 기념으로 심었다. 수상의 방문은 김 총장이 설립초기부터 영국의 유명대학을 방문해, 기술 지원 당부와, 또 설립이사장인 포스코 회장의 각별한 노력 등의 사전 분위기 조성과 영국 대사관의 배려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특히 그 곳 유명대학과의 유대강화는 김 총장이 영국 버밍엄 대학에 유학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영국 제2도시 버밍엄에 있는 버밍엄 대학(1900년 설립)에, 1961년 국제 원자력 기구(IABA) 연수생으로 유학했는데, 이곳에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2년 반만의 짧은 기간 내에 딸만큼 실력이 우수해, 그의 이름이 일찍부터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처 수상이 다녀간 후, 김 총장에게 보낸 주한 영국 대사의 감사 편지에는 수상방문이 성공적이었고, 대학에 기증한 컴퓨터와 기념식수나무가 포항공대와 영국간의 협력의 증거로 공대생들에게 깊이 남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유명한 런던의 임페리얼 공대와의 자매결연 등 영국과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졌다. 요즘 이 곳 대학로의 노란 은행나무 잎이 너무 아름답다. 구내 캠퍼스와 연못, 그리고 야외 조각공원을 돌며, 공대의 심장부인 노벨동산을 걸어보는 것도, 깊어가는 가을 속에 좋은 힐링 코스가 될 것 같아 흔쾌히 권하고 싶다. 이런 좋은 포항공대 설립에 헌신하신 고 김호길 총장님과 고 박태준 이사장님의 명복을 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서봉총 기념비와 한서협회 이야기 경주 서봉총에 가면 스웨덴 국왕(칼 구스타프16세)이 1994년 11월 이곳을 방문, 기념식수 한 느티나무 앞에 검은 식수비가 세워져있다. 그 비에는 다음 내용으로 「한서협회」가 세웠다고 적혀있다.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16세 께서 1994년 11월 17일 서봉총을 방문 하시고, 이를 기념하여 심으신 것입니다.-한서협회” 또한, 서봉총 무덤 앞에도 선왕(구스타프6세 아돌프, 당시 왕세자)이 1926년 10월 10일 서봉총 금관을 발굴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비가 1971년 역시 「한서협회」명의로 세워져있다. 위의 두 기념비를 세운 한서협회가 무슨 단체인가 묻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1963년 1월, 향토사학자인 최남주씨를 중심으로 30여명의 발기인으로 창립, 출범하였고, 2003년 2. 「한국-스웨덴 협회」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 민간 친선문화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스웨덴과 관련 소식 교류와 그곳의 문화, 학술 관련 인사들이 오면 지원, 협조하는 등 문화증진에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스웨덴 내에서도 6.25때 서전병원 의료진, 판문점 중립국 감시단원 출신과 그 가족중심으로 한국-스웨덴 관련 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그들 간의 친목유지는 물론, 소식지 발행과 홈페이지를 통하여 한국 소식을 전하며, 한국과 스웨덴 간의 우의를 증진시키는 데에 노력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서전병원활동에 관한 다큐 제작 상영 스웨덴은 작년에 6.25전쟁 60주년과 수교60주년을 기리기 위해 한국동란 때 부산에 주둔한 서전병원의 의료 활동에 대해 다큐를 만들어, 본국 시사회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서울, 대구, 부산 등에서 상영하였고, 올 가을 스웨덴 국영방송에서도 방영될 것이라고 한다. 그 제목이 “한국전쟁과 스웨덴 사람들”, “우리 잊지 맙시다”등이다. 이 다큐는 스웨덴내의 한-스웨덴 협회장(라로스 리스크)이 주관하는 다큐제작팀이 5년간의 제작기간을 통해 만든 것이다. 고령자로 남아있는 당시의 종사자나 그 가족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고, 부산에서 서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한국 환자를 만나 그 때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료를 모으는 등 어려운 과정을 거쳐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3년전 (2017. 9월)에는 당시 의료진들이 병원 및 부산의 모습과 의료 활동을 찍어 갖고 있던 사진을 모아, 부산 동아 대 「석당 미술관」에서 사진전을 개최하였고, 또한 병원 의료진, 가족 등 10여명을 초청하여 치료, 병상생활을 인터뷰하면서 옛정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기회도 만들었다. ▼스웨덴 왕실과 석당(최남주)선생 가문의 인연 최남주(崔南柱)선생은 스웬덴 국왕(구스타프 6세 아돌프, 당시 왕세자)이 1926년 경주에와서 서봉총금관을 발굴할 때,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현장에 참여하여, 그의 발굴 작업을 도왔던 사람이다. 그 후에도 왕실과 교류하며 불교유적 탁본이나 미술품 사본 등 관련 자료를 보내면서 신라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고, 한·서간의 유대강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경주 태생인 석당(1905~1980)선생은 일찍이 경주 고적보존회에 가입하여 신라문화유산 찾기와 보존에 열정적이었고, 경주 박물관 창설에 참여한 한국고고학계의 선구자이며,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문화재 지킴이로서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1970년)을 받았고, 또한 스웨덴 왕실 바사 훈장(1971년)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한서협회를 조직하여 한국과 스웨덴의 상호 문화·증진과 친선유지에 노력해왔었다. 그의 아들 최정필(崔禎苾·75세)세종대 명예교수는 박물관 분야 전문가로서 1994년 11월, 스웨덴 국왕(칼 구스타프 16세)이 그의 할아버지가 금관을 발굴한 서봉총에 왔을 때, 그를 안내, 설명해드린 바 있다. 그리고 아버지 뒤를 이어 신라문화유산에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스웨덴 문화교류에도 관여하고 있다. 2010년 스웨덴의 북극성 훈장을 받은 바 있다. 이와 같이 아버지(최남주선생)는 스웨덴선왕의 서봉총 금관 발굴 작업을 도와 드렸고, 아들은 그의 손자인 현 국왕의 서봉총현장 설명을 하는 등, 두 부자가 스웨덴 두 국왕을 각각 지근에서 모셨다. 서봉총으로 기인된 왕실과의 특별한 인연이며, 또한 석당 선생가문의 영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지난 9월 23일은 서전병원의 의료진이 부산항에 입항한지 70년이 되는 날이었다. 6.25전쟁 발발 1개월 후인 7월 말에, 스웨덴 정부가 한국전쟁에 파견할 의료진을 선발한다는 공지문에 의거 신청을 받아, 선발된 인원이 174명이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70여 년 전 페허가 된 우리 나라를 위해 도움을 준 스웨덴 정부와 왕실, 그리고 그 나라 국민, 당시의 의료진에 대해 그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영원히 잊지 맙시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현스웨덴 국왕(칼 구스타프 16세)이심은 경주 서봉총 방문기념 나무 할아버지(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에 이어, 1973년 왕위에 오른 현 국왕(칼 구스타프 16세)이 1994년 11월 한국순방길에 경주에 와서, 할아버지가 금관을 발굴한 「서봉총」에 들렀다. 조부가 생전에 조선에서 금관 발굴 이야기, 조선 사람들의 예의범절, 조선의 생활환경 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그 무덤과 주변지역을 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 기념식수로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벌서 26년이 지난 지금, 큰 나무가 되어 늦여름의 뜨거운 햇살아래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 할아버지 왕(王)이 심은 전나무와 손자왕이 심은 느티나무, 스웨덴의 두 국왕이 70여년간의 시차를 두고, 경주에 심은 기념식수가 우리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잘 커가고 있으니, 참 보기 좋은 일이다. 특히 한국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현 국왕은 역시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이 깊은 분이다. 지금까지 수번 한국을 방문하면서, 국립중앙 박물관, 경주 서봉총 등의 문화유산을 둘러보았고, 평창올림픽 때는 자국선수 격려와 한국 동계 올림픽 축하 차원에 직접 왔다가기도 했다. ▲우리나라 유물전시를 위한 스톡홀름 「한국전시관」 개관 스웨덴에는 2012년 2월 개원한 한국유물전시관이 있다. 우리나라 유물을 별도 독립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우리의 전시관인데, 이 개원에 스웨덴이 적극 지원해 주었다. 필자는 스톡홀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한국전시관」을 관람한 적이 있다. 2015년 유럽 여행차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을 들렀을 때다. 나는 관광대열에서 빠져 택시로 이곳을 찾았다. 스웨덴의 「동아시아 박물관(East Asian Museum)」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유물을 전시하는 대형 박물관인데, 한국전시관이 이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 동아시아 박물관은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이 왕세자 시절 조선에서 서봉총 금관을 발굴한 1926년에 개원한 오래된 박물관이다. 스웨덴 고고학자인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1874~1960)이 설립관여 하였으며, 유물 10만여점 이상을 전시하고 있다. 노란색상의 직사각형의 3층 건물로 한국전시관은 이 건물 맨위층(3층) 끝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중국·일본의 유물·서적 전시중심의 박물관이었고, 한국유물에 대한 독립 전시공간이 없었으나 우리유물의 역사와 전통적인 중요가치를 인정하고, 특히 한국과의 역사·문화 관계를 중시한 왕실의 배려로 독립개원 된 것으로 생각이 든다. 130여평 되는 한국전시관은 실내가 한국 건축양식으로 온화하고 아늑하다. 한옥건축가인 황두진(57세) 씨가 설계 하였는데 북유럽에 처음 개설하는 한국관이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삼국시대이후 조선 초기까지 유물이 대부분이고, 도자기류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 금목걸이, 채용신 초상화, 인쇄활판 등 총 33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는데, 왕실에서 본래 보관하던 160여점의 유물 또한 이곳에 이관, 전시되어 있다. ▲북구[스웨덴] 스톡홀름의 멋진 해변 뷰(View)와 그윽한 한국전시관의 고풍스런 전통 유물 우리 한국전시관은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스톡홀름의 해변 언덕에 자리해, 아래로 멋진 해안 풍경과 아름다운 거리를 관광할 수 있는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전시관 개원식 때, 현 국왕께서 왕비와 함께 참석해 축사를 해주셨는데, 이 축사에서 할아버지의 금관 발굴 참여 사실과 한국전쟁 때 스웨덴 의료진 파병에 대해 언급하고, 양국간의 깊은 우애에 대해 설명도 하셨다. 당시 우리나라 문화체육부장관이 영접해 개관축하 공연도 같이 관람하고, 전시품과한국문화에 대해 직접 국왕께 설명하였다고 한다. 작년에는 이곳에서 스웨덴과 수교 60주년 기념으로 우리나라 예술작품의 전시·워크숍·강연 등 기타 기념문화 행사가 있었다. 한국전통 한지페스티벌, 해녀특별전, 한국 도자기 워크숍 등을 개최하는 등, 우리나라 문화·예술에 대한 유럽 쪽 알림이 전당(殿堂) 역할도 잘하고 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한국과 스웨덴의 문화·역사 인연 작년 11월 주한 스웨덴 대사(야콥할그렌)가 한국과의 수교 60주년을 기념하고 자국의 선왕(先王)이신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금관을 발굴한 ‘서봉총’을 직접 돌아보기 위해 경주에 왔다간 일이 있다. 한국과의 90여년 역사속에 스웨덴의 두국왕(*할아버지 왕:구스타트 6세 아돌프, 현 손자왕 : 칼 구스타프 16세)이 각자 직접 경주에 와서 기념식수를 하고, 지금에도 그 나라 대표인 대사까지 경주를 방문하여 선왕들의 역사문화업적을 찾아보는 것은 다른나라의 경우 그 예가 없을 것이다. 특히 세계 제일의 복지 국가이며, ICT산업강국인 스웨덴과 상호 교류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을 약속한 것은 두나라간의 매우 의미있는 좋은일로 생각된다. 할아버지 왕 때의 ‘서봉총’ 금관 발굴로 인한 두 나라 인연과 그 간의 상호 유대관계가 잘 이어온 탓으로 여겨진다. 특히 스웨덴은 한국 전쟁때 야전병원을 급파해 우리나라를 도운 혈맹이 국가이기에 더욱 고맙고 감사하다. 서봉총 군데군데는 물론 대능원 불국사 등 경주 주요 사적지를 찬찬히 둘러보고 갔다니, 그 분도 신라문화 유적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졌으리라 생각해본다.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당시 왕세자)의 서봉총금관발굴과 경주 박물관 정원 내 기념 식수 경주문화원 정원에 들어서면 왼편에, 창공을 향해 늘씬하게 자란 전나무가 있다. 그리고 그 앞 검은 표지석에 ‘서전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폐하 경주방문 기념식수 1926년 10월 10일’이라고 적혀있다. 1926년 10월 신혼여행차 일본(日本)에 온 구스타프 6세 아돌프(당시 왕세자)는 10월 9일, 저녁 관부연락선으로 부산항에 도착한다. 고고학자인 그는 이튿날 경주 노서리 서봉총(당시 129호분)발굴현장에서 발굴 종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금관을 출토하여 떨리는 손으로 들어올렸다. 서양인이 우리나라(신라)왕관을 발굴한 처음일이며 금관무덤 이름도 직접 자기가 ‘서봉총’이라 이름지어준 것으로 본인에게 생애 무척 감동적이요, 영광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경주박물관도 둘러보고, 전시관(지금의 경주문화원 향토사료관)앞에 묘목 한 그루를 방문기념으로 심었다. 그 나무가 90여년을 지나면서 스웨덴과 우리나라의 역사우호관계를 이어가며, 하늘을 향해 창창히 뻗어올라간 이 전나무이다. 그는 짧은 조선(경주)체류기간동안 일정을 연기하면서까지 고고학자로서 조선 특유의 유물등을 돌아보았고, 선물받은 금귀고리, 금방울 등 관련 유물과 사진자료등을 지참하여 귀국 후 황실 전시실을 만들고, 서양 손님들에게 조선의 역사문화를 소개하면서 조선의 유물, 문화, 의식, 예의 등을 주변에 알렸다. 한국의 신라문화유산의 해설사역을 솔선수범했다고 볼 수 있다. -스웨덴 국왕(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한국동란지원(서전병원급파)과 양국수교 조선에서 금관을 직접 발굴한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6.25 동란이 일어나든 1950년 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한국을 도와 의료진 1100여명으로 구성된 야전병원(서전병원)을 9월 한국에 급파한다. 영세중립국인 스웨덴이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한다”라는 엄중한 지상명제하에 옛 부산상고 자리(현 서면 롯데백화점)에 병상을 설치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나중에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자리로 이전한다. 1957년 4월까지 6년 7개월동안 주둔하며 아군은 물론, 일반 시민과 적군까지 치료해주었다. 6.25사변 중 무려 200여만명이나 치료 혜택을 받았다고한다. “전쟁통에 돈이 없거나 못고치는 병은 서전병원에 가면 낫는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그들은 전쟁중인 이국 땅에 와서 열심히 병상을 지키며 환자를 돌보았다. 환자 치료외에 이 병원의 중요업적으로 ·최초 BCG 접종시작·나환자 치료·국립의료원 탄생을 들 수 있다. 당시 전쟁 중 우리나라 의료진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어려운 의료 사업이었다. 서전병원 개원에 관한 기사는 1950년 9월 25일자 Life에 개제되어 한국전쟁에 대한 국외인식과 세계인의 동정을 받게했다. 그리고 9년뒤(1959년) 3월에 한국과 스웨덴이 국교를 맺으면서 수교국가로서의 우의를 공고히 다져나갔다. >>부디 잊지맙시다(2회)에서 계속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포항해도동 소금밭[염전] 이야기 포항고속버스터미널 근방은 1930년대 우리나라 동해지역에서 유일한, 유명한 소금밭(염전)이었다. 형산강 제방을 쌓기 전 섬마을이었던 해도동과 송도동 일대는 염전 지역과 갈대밭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바닷가 해도동은 저습지대로 자연스럽게 소금밭이 형성되어 생계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이곳 소금은 빛이 곱고 윤이 자르르 생긴다하여 “금산동(金山洞)”이라고 했고 어전 진상품에 속했다고 한다. 이곳 소금은 불을 때서 수분을 증발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조되었는데, 서해안 천일염에 비해 원가(원료비)가 비싸고 생산량은 적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지만 바닷가에서 살다보니 자연적인 환경에 의해 소금 굽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곳을 형산강 하류의 ‘섬동네’라 해서 ‘섬안’이라 하였고, 따로 떨어진 섬이라 ‘딴섬’ 또는 ‘해도’라고 불렸으며, 또한 바닷가에 가깝고 염전이 형성되어 ‘염전마을’이라고도 했다. 포항의 명산물로 형산강 부조장터를 통해 널리 알려졌던 재래식 소금이 서해 천일염에 밀려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1961년까지 약 8만여 평 염전에 1500~2000가마니 정도 생산되었다고 하며, 약 20여 가구 주민이 여기에 종사했다고 한다. #포항 산유국의 꿈 이야기 포항, 경주 해안 지역은 퇴적층 지형으로 예부터 고전(古典)에 기름 부존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전해온다. 1970년대 들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인 석유의 필요성이 절대적인 상태에서 이 지역의 어느 곳에선가 기름의 징후를 갈망하고 있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1975년부터 비밀리에 포항 인근에 민간 업체의 명의로 시추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형산강 인근의 해도동 시추공 중 1개에서 지하 1200여미터 지점에서 원유처럼 보이는 시커먼 액체를 뽑아 올렸다. 드럼 1개 정도의 소량에 불과했으나 현장 채유팀이 1975년 12월초 총리에게 보고하게 되었으며, 그 즈음 마침 청와대 중동지역 수출대회의장에서 대통령이 이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1976년 1월 15일) 대통령이 중앙청 연두 기자회견장에서 석유의 채굴을 공식 발표하였다. 우리나라도 산유국이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회견장은 흥분했고, 뉴스를 보던 국민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만세”를 불렀으며, 전국은 들떠 ‘우리도 산유국’이라고 외쳤다. 포항 해도동은 갑자기 사람, 차량, 구경꾼들로 붐비고, 포항지역 땅값, 주가 폭등은 물론 온 시내가 북적거렸다. 그러나 그 후, 전문기관에서 이 기름의 성분검사 결과, 원유가 아니라는 판단이 나오고, 경제성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정부는 시추 발표 1년 7개월 만인 1977년 8월 11일 당시 대통령 하계 휴양지에서 포항지구 석유개발은 희망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나라 산유국의 꿈은 사라지고, 석유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때 그 시절 석유가 나온다고 야단법석을 떨던 이 지역 해도동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은 자동차들만 쌩쌩, 어디가 어딘지 어림잡을 수도 없다. 벌써 45년이 지났다. #포항 대잠동 기찻길 공원 GAS 분출 이야기 옛 포항 효자역에서 그때 (2017년 3월) 시민공원 조성 공사시 지하 200여 미터에서 천연가스가 불길에 싸여 치솟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몇 십 년 전 해도동 석유 시추 해프닝을 생각하면서도 혹시 석유가 솟지 않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지질전문기관의 조사결과, 석유는 아니고 가스양도 10여년 정도의 적은 양으로 결국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포항시는 약 1억원을 들여 이 GAS를 관광차원의 불꽃으로 만들어 시민공원의 볼거리로 만들었다. 당시 굴착장비, 철망들을 안내판과 함께 진열했고, 불꽃 주변을 투명 방열유리로 둘러 놓았다. 그리고 포항시의 무궁한 발전을 상징하는 ‘불의정원’으로 이름 지어 잘 보존하고 있다. 때때로 이곳 주변을 산책하면서 이곳이 언젠가 이루지 못한 형산강, 포항, 경주 지역의 도시산업용 천연자원의 보고(寶庫)가 되어 주길 기대해본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포항제철소에서는 지난 5월 3고로공장 앞에서 특이한 입간판 제막식 행사가 있었다. 포항제철소장(남수희) 예수성심시녀회원장(김알로 이시아) 등 관계자 70여명이 참석했다. 3고로공장은 포항 제철소 4개의 고로 중 매년 500만톤의 쇳물을 생산하는 세계 5위인 거대한 제선 공장이다. 이 공장 부지는 1960년대 ‘(재)예수성심시녀회’라는 수녀원 자리였다. 주님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운영되는 수녀원이 현대 문명의 쌀인 철을 만드는 공장으로 탈바꿈 된 것이다. -송정리, 예수성심시녀회가 포항제철 건설부지를 위해 자기 보금자리를 비워주다 예수성심시녀회는 1935년 12월 프랑스 신부 루이 델랑드(한국명 남대영)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일제의 핍팍과 한국 동란 수난 속에서 1950년 포항시 영일만 송정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양로원, 보육원, 무료진료소, 나환자 정착촌 등 다양한 복지시설을 마련해 신부, 수녀들과 함께 700여명의 불우이웃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러나 1968년 포항체철 건설이 이곳으로 결정되자 20여 년간이나 꾸려온 보금자리를 기꺼이 내주고 지금의 대잠동(포항성모병원 근처)으로 옮기게 된다. 설립자 남대영 신부는 한국철강산업과 경제 발전을 위해 성심시녀회의 모든 시설과 생활 터전을 양보함으로써 지금의 포항제철소를 있게해준 은인이다. 당일 입간판 제막은 이러한 예수성심시녀회의 헌신에 감사를 표하는 뜻으로 스테인레스 강종으로 제작하여 당시 시녀회의 옛터인 3고로공장 앞뜰에 건립하게 되었다. -프랑스 루이 델랑드(한국명 남대영) 신부 이야기 포항시 대잠동 성모병원 뒤쪽에 예수성심수녀회와 성모자애원이 있다. 남대영 신부(1895-1972)는 1923년 일제강점기 시절 누구도 오기 꺼려하던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 일제 식민지의 폭정, 한국 전쟁의 고통속에 있는 가난한 사람, 고아, 병자에게 나눔과 사랑을 실천한 프랑스 신부이다. 1922년 신부가 되어 이듬해 부산에 도착, 부산진 본당 주임신부로 시작,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50년 폐허 속에서 포항 송정리(현 포항 제철소 부지)에서 사회복지 단체를 창설한 한국사회복지 사업의 선구자였다. 그런데 1968년 포항제철소 건설 부지가 이 지역(송정리 해안가)으로 결정되면서 이 단체의 이전이 불가피하게 되어 남 신부의 결단이 필요했다. 남 신부는 포항과 한국의 산업 발전을 위해 자진해서 대잠동(현 위치)으로 이주함으로써 포항제철소가 그 자리에 건립될 수 있도록 용단을 내렸다. 1962년 대한민국 문화 훈장, 국제장 수여, 1965년 프랑스 최고 큰 상을 수여한 포항의 역사적 인물이자 한국 경제 발전 기여자이다. 이 신부는 1895년 6월 프랑스 노르망디주에서 출생, 1923년 부산으로 입국하였고 1972년 77세로 포항 갈평리에서 서거하였다. 50여년간 한국을 위해 선교, 복지 사업을 이룩한 분이다. 특히 한국 동란 이후 선교 단체를 만들어서 빠리 신부 직분으로 서양, 미국 등에 수천통의 서신을 통하여 후원금을 조성하는데 노력한 분으로 잘 알려져있다. 대구에 있는 ‘남대영 기념관’(2015년 준공)에 있는 그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구가 남아있다. “제가 저녁에 근심을 가진채 잠든다 하드라도 아침이면 제 영혼의 하늘은 개어 언제나 희망속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남대영 신부는 ‘포항을 빛낸 인물 제6호’로 선정되어 많은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연오랑과 세오녀 테마공원 이야기 포항 동해면 임곡리 해변가에 영일안 바다를 바라보며 연오랑과 세오녀 테마공원이 길게 자리잡고 있다. 포항의 대표 설화인 연오랑과 세오녀를 주제로 하여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 시작되는 지역이다. 포항시 시승격 70년이 된 작년에 ‘귀비고’가 완공됨으로써 소위 신라문화탐방 바닷길인 이 공원이 조성된 것이다. 전면에 영일만 바다와 포항 제철소 전경이 전개되고, 호미곶까지 아름다운 해안섬이 연결되어 있다. 이 공원의 이름인 「연오랑과 세오녀」에 대해서는 상고시대 해와달의 이야기와 관련해 삼국유사(기이편)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동해 바닷가 연오랑과 세오녀 일본에 떠내려가 왕(왕비)이 되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AD158)때 동해 해변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있었다. 어느때 연오랑이 바닷가에 나가서 해조류를 뜯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있던 바위가 쩍 갈라지면서 동해 바다로 둥둥 떠나갔다. 뜻밖의 일이라 놀란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으나 주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부인인 세오녀가 걱정할까봐 마음이 안절부절했다. 망망대해로 떠내려간 연오랑은 며칠 후 일본해안에 도착했고, 그 곳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육지에 올랐다. 그 나라 사람들은 연오랑을 보고 오랫동안 먼 바다를 살아서 온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생각해 그를 왕으로 삼았다. 한편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부인(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아니하자 이상히 여겨 해안가를 다니면서 여기저기 찾았지만 끝내 남편은 없었다. 동해바다만을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신세가 된다. 얼마후 그가 신든 신발을 바위위에서 찾아내어 두리번 그리는데 이젠 그 바위 또한 흔들거리면서 그녀를 싣고 연오랑이 있는 일본나라로 갔다. 이 곳 해안가 사람들이 세오녀를 보고 놀라 왕에게 아뢰니, 오랜만에 부부가 서로 반갑게 상봉하게 되었고 역시 세오녀는 왕의 귀비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없어지자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다 한편 이런일들이 벌어진 사이에 신라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어느날 이 후 이상하게도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리고 온 세상이 암흑으로 변한 것이다. 왕이 일관을 불러 왜 이런가 하고 물었다. “해와 달의 정기가 갑자기 일본땅으로 가버린 탓으로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사신을 보내 연오랑과 세오녀를 찾아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다. 연오랑이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어찌 내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왕비가 짠 고운 명주비단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가서 하늘에 제사지내면 어려운 일이 해결될 것이오”말하고 비단을 사자에게 주었다. △왕비(세오녀)의 비단을 가져오자 해와 달빛이 다시 소생 사자가 돌아와서 신라왕에게 아뢰고 시키는 대로 제사를 올렸더니 그제서야 해와 달이 전과같이 빛을 찾게 되었다. 왕은 비단의 아름다움과 신기함에 놀라 왕실의 특별창소에 간직하고 보물로 삼았고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그리고 왕이 해와 달의 정기를 되찾기 위해 바닷가에 나가 제사를 지낸곳을 영일(迎日)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했다. 또한 비단을 놓고 제사를 지내던 연못 일월지(日月地)은 직경 250여m, 면적 16.500㎡쯤되는 둥근 연못으로 해병대 지역에 있다. 이 전설은 상고시대 신라·백제 문화의 일본 흐름을 말해주는 표본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오랑과 세오녀 테마 공원 둘러보기 테마공원 내 바닷가 옆에 둥글게 지어놓은 건물이 귀비고(貴妃庫)이다. 공원 내 가장 커고 우아한 건물이다. 설화속에 신라의 해와 달빛을 소생케한 비단을 보관한 신라궁중 창고 모양이다. 이 건물앞에 쌍거북돌이 포개져 있는데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타고간 바위를 추정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바위를 돌면서 기도를 하면 바라는 것을 얻는다는 속설이 있다. 이 귀비고는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전시실, 일월 영상관, 양외 테라스 등이 있고 실내 천장 수족관에 생물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귀비고에서 나오면 부부가 살았다는 초가집이 있고 길 옆 마을 벽에는 두 부부의 설화 내용이 적혀있다. 멀리 포항제철소 전경 동해안의 시원한 바다, 떠다니는 배, 해안풍경 등으로 가슴이 확 트이는 상쾌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잇다. 포항을 빛낸 제1호 인물인 연오랑과 세오녀를 상징하는 이 해양공원이 여름철 바닷가의 시원한 힐링코스로 매우 안성맞춤일 것이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장사벌지지와 박제상 부인 유적비 이야기 경주 통일전 못미쳐, 화랑교에서 남천뚝(동쪽)을 걸어가면, “장사 벌지지”와 “신라 충신 박제상공 부인 유적”이라쓴 자연석 비석이 비스듬이 서있다. 그리고 건너편 논 가운데 신라 망덕사지가 보이는데 이 근처와 문천 제방 쪽의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고 한다. 이곳에 신라 박제상과 그 부인의 애틋한 이별의 이야기가 삼국 유사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박제상(朴堤上)이 왜국 볼모로 간 신라 왕자를 구하러 떠나다 신라 17대 내물왕 때 보해와 미해 두 왕자가 고구려와 왜국에 각각 볼모로 갔었다. 아버지(내물왕)가 죽고, 맏이가 눌지왕으로 즉위한지 10년쯤 지나자 동생들이 보고 싶어져, 왕이 박제상(지금의 양산군 태수)을 시켜 고구려에서 보해를 구출하여 데려왔고, 연이어 왜국에 있는 미해도 귀국시키고자 또 박제상을 임지로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일은 바다를 건너 목숨을 걸어야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장사벌지지(長沙伐知旨)’란 지명(地名)이 생긴 이유 박제상이 집에 들리지 않고, 왕(王)에겐 하직 인사 후 왜국으로 떠난다는 소문을 부인이 듣자 남편을 만나려고 문천모래사장으로 허겁지겁 달려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황망한 심정에 그만 주저앉았다. 그가 떠난다는 뱃길인 율포(栗浦)까지 당장 찾아가려하였으나 몸이 말을 듣지않고, 허둥대며 자꾸 주저앉기만 했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해도 몸이 경색되어 부인이 두 다리로 ‘뻗디디’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후부터 이 곳 지명이 ‘장사벌지지’가 되었는데 장사(長沙)는 부인이 두 발로 ‘뻗디디’를 한 문천의 긴 모래사장을 뜻하며, ‘벌지지’는 우리말 ‘뻗디디’를 한자음으로 표현한 것이 사람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면서 ‘벌지지’가 되었다고 한다. △박제상과 부인, 동해 바닷가에서 이별 아무튼 부인은 율포 바닷가에서 떠나는 남편을 향해 울면서 출발을 만류했지만 남편은 “임금님과의 약속인데 충직해야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왜국으로 향했다. 소설가 현진건 선생이 박제상 부인과 관련하여 율포해변가에서 쓴 다음과 같은 애절한 시(詩)가 있다. ‘동해에 배 떠나니 가신임을 어이하리 속절없는 피눈물에 잦아지니 목숨이라 사후에 넋이 곧 있으면 임의 뒤를 따르리라‘ 왜국에 간 박제상은 왜왕에게 ‘계림왕이 죄없는 제 부모와 형제를 처형하기에 도망왔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신라왕에게 원한이 많은 제가 신라의 인질, 미해 왕자의 감시역을 맡게 해달라’고 부탁해 승낙을 받는다.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데리고 바닷가에 나가 물고기와 새를 잡아 왕에게 받쳐가며 환심을 산다. 그러면서 신라 탈출 계획도 착착 진행시켜갔다. ▲왕자는 왜국을 탈축하고 박제상은 화형을 당하다. 어느날 안개가 낀 새벽, 신라사람(강구려)의 안내로 미해 왕자를 탈출시키고 자기는 남아 뒷일을 수습·책임지기로 했다. 전모가 탄로나 왜왕의 문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왕은 그에게 왜국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면 용서하고 후한상을 내리겠다고 회유까지 하게된다. 그러나 박제상은 “나는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네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하며 끝끝내 신라의 신하임을 강조했다. 왜왕은 그의 발껍질을 벗기고, 칼날같이 예리한 풀잎위를 걷게해 피를 흘리게 하는 등 악형을 계속했으나, 신라왕에 대한 충절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결국 ‘목도(木島)’라는 섬에보내 화형을 시키고 말았다. ▲박제상부인 치술령 망부석이 되고 치술신모가 되다 한편 눌지왕은 동생 미해를 만나자 잔치를 베풀고 대사령을 내렸다. 박제상에게 ‘대아찬’ 벼슬을 내리고 그의 부인을 국대 부인으로 책봉하였으며 그의 둘째 딸을 보해의 부인으로 삼아 박제상 가족에게 은혜를 갚았다고 전한다. 그 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심정을 견디지 못해 딸을 데리고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가 보인다는 치술령(765m)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한결같이 그를 기다리다 죽었는데 몸은 ‘망부석’이 되고 넋은 ‘은을암’이 되어 지금까지 남겨져 전해오고 있다. 망부석은 치술령 큰바위면에 ‘望夫石’이라 쓰여있고, 은을암(隱乙庵)은 치술부인의 넋이 새가되어 국수봉 바위굴에 숨어들어가 바위가 되었는데, ‘새가 숨은 바위’라고 전한다. 이 두 돌(바위)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인 ‘박제상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나중에는 박제상 부인이 치술산 신모가 되어 남편과 치술령 일대를 수호하는 신( )으로 신성시되었다고 전한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신라소재상(蘇宰相) 부인 순절비’ 이야기 표항의료원에서 기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연화재)에 「신라소재상 부인 순절비」가 있다. 멀리 동해 바다와 형산강 하구가 굽어 보이는 곳인데 지금은 주변 나무들이 커서 전방 시야가 가려져 있다. 이 비(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소랑부인은 절세미인, 장안선녀(長安仙女) 신라말기 「소랑(蘇郞)」이라는 충직한 대신이 있었는데, 청렴결백하고 덕망있는 관리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었다. 더구나 그 부인 또한 정숙한 절세미인이라 ‘장안선녀’라는 애칭을 얻고, 백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어느 임금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이 부인을 한 번 보기위해 소랑에게 그의 집에 들린다는 전갈을 하였다. 소랑은 황공스러운 큰 영광으로 여겨 부인에게 임금님의 행차소식을 알리고, 융숭한 대접이 되게 연회 준비를 시켰다. 임금은 미복차림으로 소랑의 집에 당도하여 좋은 음식과 술에 건드레해지면서 부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자, 금방 매혹되었고 음흉한 욕심이 생겼다. 왕은 부인을 본 이후부터 그녀를 차지하기위해 남편인 소랑을 없앨까, 삭탈 관직하여 유배를 보낼까, 여러 궁리를 하던차 마침 왜국에서 조공 사신이 와서 그 답방으로 왜(倭)에 파견할 조정사신으로 소량을 보내게 했다. ▷임금의 유혹에 반항하다 변방으로 추방(追放) 소랑이 떠나자 임금은 부인에게 궁중으로 불러들여 여러 차례 유혹, 회유를 하였다. 그러나 지조높은 부인은 왕의 강압에도 결코 굴하지 않음으로, 화가나서 그녀를 죽여버릴까도 생각했으나, 사신으로 떠난 고관의 부인을 해칠수는 없고해서 소랑집의 재산몰수와 부인에 대한 외지추방령을 내렸다. 부인은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쫓겨났다. 소랑이 타던 말과 개, 그리고 노비 한 사람을 데리고 유랑하다가 동해 바다가 잘보이는 이 곳(연화봉)에 올라 움막을 짓고 외롭게 살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동해 바다를 보면서 왜국에서 배를 타고 올 남편만을 기다렸다. ▷연화봉에 초막짓고 남편 기다리다 병사(病死) 한편, 남편 소랑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나 불행하게도 물에 빠져 죽고 만다. 그러나 이를 알길없는 부인은 한결같이 연화봉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병이 들고, 5년 후에 그녀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한 소랑의 말과 개도 주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역시 굶어죽고 말았다. 산아래 마을 사람들은 정절을 지키다가 죽은 이 부인을 위해 장례를 치루고 그녀의 혼백을 모시는 작은 초옥을 지어 ‘망부사’라 이름지었고, 개와 말의 무덤까지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이 순절비가 있는 고개를 ‘연화재’, 산(山)모양이 연꽃봉오리처럼 생겼다하여 ‘연화봉’이라 하며, 또 ‘망부사’란 초옥이 있었다고 해서 ‘망부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 후 이 애절한 사연이 널리 퍼지면서 여러 묵객(墨客)들이나 도처(到處)사람들이 이곳에 올라와 소랑부인의 정절을 찬양하고, 원혼을 달랬었는데 조선 세조때 어느 암행어사가 여기에 들러 썼다는 한시(漢詩) 한 수가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전해오고 있다. “멀리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이별한 낭군만 그리워할세 강가의 푸른풀이 야속하구나. 바위의 꽃은 다투어 피건만 산과 구름이 만리길을 막아 님의 소식이 영영 끊어졌도다. 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오건만 아니오는 님 생각 언제 풀건고” 지금 이 곳 주변은 둘레길도 만들어져있고, 넓은 주차장도 있어 시민들의 좋은 웰빙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장군의 서라벌 집터와 재매정(財買井) 우물 경주 월정교를 지나 남천 강뚝(우측) 넓은 잔디밭에 김유신 장군의 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재매정비각’과 그안에 ‘신라태각 간 개국 공신 김선생 유허비’가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당시 물 맛 좋기로 소문난 장군 댁 우물인 ‘재매정’이 이 있다. 장군의 집은 당시 서라벌에 있던 수십채의 고급 귀족 주택(금입택) 중 하나였다고 한다. 1991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주변지역(9000㎡)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건물지, 배수로, 토기, 담장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재매정(사적 제246호)은 깊이가 약5.7m되며, 화강암으로 독안처럼 벽돌로 쌓아올렸고, 위에는 2단 정사각형의 장대석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얹어 놓았다. 우물 지름이 2m쯤 되며, 장대석 길이가 1.8m정도된다. 1872년(고종 9년)에 세운 유허비가 옆에 있다. ‘재매(財買)’가 김유신 장군 본가의 택호인 ‘재매정택’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져, 김유신 장군 집안의 우물이란 뜻으로 이해된다. △우리집 물 맛은 옛날과 같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645) 9월. 장군이 신라매리포성(지금의 거창)에서 백제군과 싸워 크게 이기고, 서라벌로 귀환 중, 다시 백제군이 쳐들어온다는 급보에 이를 격퇴하라는 어명 또한 떨어졌다. 군사 대열을 전쟁터로 돌려야했다. 가족이 기다리는 자기집을 먼발치에 두고, 그러나 그는 몇십보 정도 지나서 퍼뜩 자기집 우물 맛이 생각나 부하를 시켜 재매정물을 떠오게했다. “우리집 물 맛은 옛날과 같구나” 탄복하며 갈증을 달래고, 가족 상면을 마다하고 돌아선 자신의 심정을 달래면서 전장으로 말을 몰았다고 한다. 이곳 물은 멀리 함월산에서 내려오는 북천과 불교성지 남산골의 합수(合水)로, 당시 신라왕경, 반월성(궁궐), 귀족집 등의 식수원으로, 남천 저변을 통과하는 수질 좋은 신선한 물이었을것으로 생각된다. △진천 생가터와 연보정(蓮寶井) 우물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말이 있다. ‘진천’은 우리나라에서 사람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있다. 예부터 물이 좋고 많으며, 넓은 평야에 토지가 비옥하고, 특히 인심이 후한 고장이다. 이번 코로나19사태에도 중국 후안교민의 진천 수용 환영과 마스크 지원 등에 적극적이었다.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 진천이다. 충북 진천군 진천면 상계리(계양마을)로 국가사적 414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곳에 그의 생가터, 태실, 식수터(연보정), 장군 유허비 등이 있다. 장군이 태어난 집터를 ‘담안밭’이라고 한다. 아버지(김서현 공)와 어머니(만명부인) 형제 등이 살았던 집인데, 서라벌로 이사 후 집이 무너진 뒤 동네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사방이 담으로 둘러친 태수의 사택을 ‘담안’이라 하고 건물이 무너진 뒤 집터가 곡식을 심는 밭으로 변하면서 ‘담안 밭’으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 생가터엔 1983년 건축된 기와집 한 채가 생가터를 대표하고 있다. ▶장군집 우물 ‘연보정’과 사랑 이야기 연보정은 장군 아버지 김서현 공이 신라 만노군(지금의 진천군)의 태수로 있을 때 집 우물이라고 한다. 장군의 어릴 때 젖줄·생명수이요, 유년기의 활력수이다. 이 우물은 생돌(자연석)을 이용 둥글게 쌓았으며 직경 1.8m, 최고높이 ~2.6m정도 된다. 우물 입구쪽에서 바닥으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4m정도의 수로가 있어, 물이 흐르고, 엎드려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특이한 것은, 우물 위에서 내려다 보면 물고인 밑바닥이 묘하게도 ‘♡(사랑의 표시)’ 모양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요새 사람들은 전해오는 장군 부모의 혼전 사랑 얘기를 끄집어내어 이를 포장하고 있다. △김서현 공과 만명부인의 사랑 두 사람은 연애를 했지만 양가의 반대가 극심했다. 김서현 공(멸망금관가야왕손)과 만명부인(신라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의 딸)간의 신분상 문제가 절대 장벽이었다. 그러나 김서현 공이 만노군 태수로 발령을 받아 진천(鎭川)으로 떠날 때 여자는 남자를 따라 몰래 함께 떠났고, 하는 수 없이 양가에서 이를 인정, 혼인시켰다고한다. 당시 가문의 반대는 물론, 서라벌의 충격적인 연예사건이었을텐데도 둘은 결혼으로 골인하였으니, 이 샘을 그들 사랑의 증표라해도 멋있고, 그럴듯하게 들린다. 항시 물이 마르지 않고 맛도 좋다고 한다. 200m 위에 있는 태령산에서 지하수가 흐르고, 연보정 아래 연못에까지도 물이 이어진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의 생애는 두 지역의 좋은 물로 이어졌다. 연보정(진천)물과 재매정(경주)물이다. 전자는 성장기에 무인으로서의 성격과 골격형성에 기초 에너지가 되었고, 후자는 국가충성시기에 무장, 대장군으로 그리고 삼국통일 대업의 선봉장으로서, 노련한 심신의 원숙한 활력수였다고 볼 수 있다. ‘물 좋은 곳에 인걸이 난다’고 했다. ‘땅의 성질에 따라 식물의 열매가 달라지듯이 사람 또한 좋은 물이 있는 곳이면 심신의 크기가 달라져 걸출한 위인이 생긴다’는 말일 것이다.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 장군의 경우에 딱 적합한 말인 것 같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두차레 발굴된 석장사터 경주 동국대 옆 석장리 마을을 지나 옥녀봉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면, 한참가서 석장사지(錫杖寺地) 팻말이 서있다. 대나무들이 둘러있고 석재파편, 와편들이 흩어져있다. 돌아서면 멀리 형산강 중기가 보인다. 동국대 박물관이 이 자리에서 두차례(1986년, 1992년) 발굴조사를 했다. 신라시대(7c~8c)산지가람으로 고려때 재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석장(錫杖)이라고 쓴 자기조각이 출토되어, 여기가 석장사 터라고 확인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지팡이가 집집마다 날아다니며 시주를 받아왔다는 석장사 석장사는 선덕여왕(632~647)때 양지(良志)라는 스님이 주거하던 절로 알려져있다. 근처 주민들은 이곳을 ‘절골’이라 부른다. 이절에 대한 내력은 전해오는 바가 없으나, 석장사라고 이름지어진 연유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양지스님이 석장(지팡이) 머리에 포대 하나를 걸어놓으면, 이것이 저절로 날아 시주집을 찾아 다니며, 방울을 흔들어, 소리를 내었다. 집주인은 이 소리를 듣고 ‘아! 양지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왔구나’하고 그 포대에 재에 쓸 비용을 넣어주었고, 이 집 저 집 다니다가 포대가 차면 날아서 다시 절로 되돌아오곤 했다. 신통한 도력을 지닌 스님을 암시해주는 듯하다. ‘양지(良志)란 무엇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공장(工匠)을 의미하며, 석장은 머리에 여섯 개의 방울이 달려 흔들면 소리가 나는 지팡이로, 스님이 탁발할 때 인기척을 내거나, 길을 다니면서 짐승을 쫓는데에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조각(공예), 서화, 음악 등에 다재다능한 양지스님 이야기 출신, 집안 내력 등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선덕 여왕때 석장사와 함께 행적이 들어난 도승이요, 예술가로서 불교관련 공예, 불상, 녹유전 등을 잘만든 기예만능의 스님으로 전해온다. 또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를 잘써 ‘영묘사’와 ‘범림사’의 현찬을 썼다고 전하리만큼 서화에도 재주가 뛰어난 스님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영묘사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사천왕사 탑 팔부신장 제작과, 그리고 절에 작은 전탑을 짖고, 그 안에 3000불을 만들어 봉안했다고도 한다. 특히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상전은 이 스님의 최고 걸작이라고도 한다. 사천왕이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발로 뭉게고 있는 모양인데, 짖눌린 악귀의 모습이 고통스럽지않고, 오히려 익살스럽게 보인다. 악귀를 응징하는 것 같아도, 부력으로 그를 감화시키려는 자비가 엿보일만치, 그의 넓은 도량과 읽살스런 해학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지어 부른 노래 ‘풍요(공덕가)’의 이야기 삼국유사에 의거, 영묘사의 장륙삼존상을 조성할 때의 일이라고 한다. 곡식 2만3700석이나 되는 큰 비용을 시주받아, 삼존상을 만드는데, 성안의 남녀들이 흙을 나르며 노력봉사를 했다. 이 때 많은 사람이 즐거운 마음으로 능률적인 일을 하기 위해 양지 스님이 지어 불렀다고 하는 노래(향가)가 ‘풍요(風謠)’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왔구나 왔구나, 절로 모여 왔구나. 인생이란 고통스럽고 서러운 것. 그래서, 극락왕생하기위해, 절로 공덕 닦으러 왔구나”이다. 사람 한 평생의 고통, 한탄, 서러움과 푸념 등이 잘 나타나 있는 노래로 보인다. 신도가 사주대신 부역을 할 때, 부르는 노래인데, 죽어 좋은 세상에 가서 살 수 있도록 공덕 쌓기를 권장하는 공덕가로 전한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에만 해도 시골 여인들이 방아 품앗이를 하거나, 힘든일을 할 때,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양지스님 주거 절터에서 발견된 신라 보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임신서기석(보물 1411호)’은 1934년 일제 강점기. 경주박물관 분관장이었던 ‘오사까 긴따로’씨가 석장터에서 발견한 작은 돌비석이다. 신라화랑 두 사람이 국가 충성과 학문연구에 매진하자는 약속의 글(74자)이 새겨셔 있다. 그리고 ‘신라인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얼굴무늬 수막새’ 또한, 일제 강점기 영묘사터에서 발견된 것(보물2010호)으로 전한다. 신라 여인이 살짝 웃는 모습을 조각한 와편인데, 여인의 미소가 너무 아름답고 은근해 그 조각 솜씨가 수련된 장인의 특출한 예술적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연유로 해서 두 보물은 혹여 양지스님이 주석하던 석장사와 영묘사에 관련이 있든 이 스님의 작품 영향을 입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양지 스님의 이런 신묘한 조각 솜씨에 대해, 그가 젊은 시절, 인도여행을 했거나 중국 유학을 통해, 인도 불교문화(예술) 환경에 접했으리라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일연 스님도 삼국유사에서 “이런 재능은 작은 재주로만 밖으로 들어난 것이지, 그의 참실력은 뒤에 숨기고 있었다”고 극찬했듯이 양지스님은 탁월한 재능과 신출한 재주를 가지고, 행적없이 조용히 나타나, 불사, 불전 제작에만 불심 전력을 쏟았을 멋진 스님으로 생각이 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70~80년대 형산대교의 자전거 출(퇴)근 물결 포항시가지서 형산강을 건너, 포스코로 가는 가장 큰 다리가 포스코 대교(구. 형산대교)이다. 형산강 하구에 있으면, 교통량도 제일 많다. 총길이 450m, 1979년. 신형산대교로 보수되었고, 2008년 ‘포스코 대교’로 개명되었다. 포항제철소 건설초기, 불어나는 직원에 비해 통근버스나 대중교통이 턱없이 부족해서 회사는 직원 출(퇴)근 수단으로, 국내 굴지의 자전거 회사들과 협약하여 자전거를 구매, 지급키로 했다. 형산대교는 매일 수많은 자전거 행렬로 그득했고, 회사 출입문은 자전거 병목 현상으로 붐볐다. 당시만해도 회사제복을 입고, 안전모를 쓰고, 안전화를 신고 자전거를 탓기 때문에 마치 군인들이 자전거를 타는것처럼 날렵하고 산뜻해, 그 모습이 멋지기까지했다. ▶자전거 자가용시대, 자산목록 1호로 우대 갑자기 불어난 자전거로 자전거 자가용 시대가 온 것처럼 보였다. 시내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생기고, 자전거 수리상, 자전거 거치대들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술집, 식당, 노래방 등 시내는 붐비기 시작했다. 회사는 공장 작업장 구석구석까지 기동성있게 출동할 수 있는 강점은 물론, 직원들의 건강 단련에도 큰 몫을 했다. 특히 형산대교를 통과할때면 떠오르는 동해 햇빛을 내려받고, 형산강 물빛을 올려 받으면서 통쾌하게 달리는 은율의 물결이 되어 높이 올라가는 제철공장의 굴뚝과 함게 장관을 이루었다. 이 자전거 출(퇴)근 행렬은 당시 영화관에서 필히 보게 되는 ‘대한 뉴스’에서나 KBS 연속극 ‘꽃피는 팔도강산’에서도 경제성장의 원동력 상징으로 약방 감초처럼 방영되곤 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제철산업직원들의 노고에 대해 감사와 성원을 보내면서 밝은 희망을 가졌다. 직원들은 제철 보국에 사명을 건 Posco인으로 긍지를 가지고 힘차게 자전거 폐달을 밟으며 행복해 했었고, 약간 우쭐하기도 했다. 당시 월급 5만원~6만원에 한 대 1만2000원 정도의 과분한 자전거 였기에. 자가용으로, 자산 1호로 귀하게 여기며, 뿌듯해 했었다. 항상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며 소중히 다루었고, 퇴근길에 술이라도 한잔하고, 얼근해지면, 자전거를 타지않고 끌거나, 어깨에 메고 갈만치 애지중지하게 다루었다. ▶형산대교 다 자전거, 제철보국의 발판과 발 이 자전거 출(퇴)근은 포스코의 경영환경 변화에 따라 저탄소 녹색 환경 조성을 위해 2012년경에 다시한번 붐(Boom)의 시기를 맞는다. 회사가 매주 월요일을 자전거 출(퇴)근 날로 정하고, 자전거 대량을 공동구매하여,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도록 권장했었다. 지난 반세기 이후, 형산대교와 자전거는 포항제철소 길목에서 제철산업 전사들의 든든한 발과 발판이 되었으니이들 또한 ‘제철보국(製鐵報國)’의 공로자라고도 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이 다리의 출(퇴)근 주인이 40~50년전 자전거 부대에서 지금은 자동차 자가용 행렬로 바꾸어져있으니, 정년 퇴직 20년차의 눈엔 실로 큰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포스코 한국 초유의 통근 열차 출(퇴)근 이야기 포스코(포항제철)는 직원 자전거 출(퇴)근과 함께 직원전용통근열차 출(퇴)근도 했었다. 회사가 자체직원 전용기차를 운용한건 한국초유의 일이다. 코레일(한국철도공사)과 협약아래, 1975년 동차2량을 기부체납받아 운행하다가, 1996년 4월, 통근형 디젤동차로 교체했었다. 운행구간은 포항역→효자역→(양학동 임시 주차장)→괴동역→제철역의 10.8km 거리였고, 첫차 05시 57분, 막차 23시 30분, 1일/10회 왕복으로, 상주·3교대 직원 1700여명을 실어날랐다. 포항역에서는 시내 직원들이 타고, 효자역은 포항제철 효자주택단지의 직원들이 탔으며, 제철역은 포항제철소 내에 만든 역이었다. 시내 포항역에서 동해 남부선을 타고 효자역을 지나고, 형산강둑을 타고가다 섬안 큰 다리 옆 철로를 따라 형산강을 건너다녔다. 철거덕거리는 동체 속에서 하루 2번, 시원한 형산강 물결을 내려다보면 답답한 가슴을 열어 젖혔고, 근무에 시달려, 찌들린 마음을 강물에 띄어 보낼 수 있어 좋았다. 통근 열차 운행 30년간, 109만km거리에 총 657만명을 실어날랐어도 안전사고 한 건 없이 무사고 운행이었던게 특이할만하다. 통근열차가 사라진지 15여년, 포항역, 효자역, 그리고 제철역은 모두가 폐역되어 역사뒤안길에 사라지고 지금은 그 철도조차 시민공원숲길로 조성되어, 사람들의 발길만 분주할 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포항 6.25참전 유공자 명예 선양비 이야기 형산강(兄山江) 지역은 6.25전쟁시 포항 탈환을 위한 최대격전지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부산을 지키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에서 밀려오는 북한군을 막기위해 우리 국군이 사수해야했던 동해전선의 요충지였다. 형산강도로변에 있는 ‘포항해도동 근린공원’에 가면 ‘6.25참전유공자 선양비’가 창공을 향해 솟아있다. 금년 6월이면 건립된지 10년이 된다. 비(碑)모형은 하늘 높이 V(브이)자 모양으로 뻗어있고, 뒷벽에는 당시 전사자 2300여명의 이름이 빼곡이 새겨져있다. 형산강전투는 1950년 8월 11일부터 9월 23일까지 44일간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적의 수중에 있던 포항을 탈환하기 위해 국군3사단이 3개의 독립부대를 투입하여 싸운 전투다. 북한군은 김일성 직속 충견 전대인 5사단으로 포항을 점령한 후, 형산강을 건너 인근의 영일 비행장을 점령하고 부산진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국군은 이를 저지하여 포항을 탈환 후 서울 수복과 나아가 압록강 진격 계기를 마련해야하는 전략상 극히 중요한 전투였다. 국군은 수차례, 형산강 도하작전을 시도했으나 적의 기관총 진지가 강(江) 요새에 설치된 상태라 번번히 실패하며 많은 전우들이 기관총탄에 쓰러져갔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 17일 새벽 국군제3사단 20연대 소속 ‘연제근 이등상을 분대장으로 한 12명의’ 결사대가 조직되어 천신만고 끝에 적의 기관총 진지를 박살냄으로써 후속부대들이 형산강을 무사히 건너게 되었다. 이 형산강 전투에 참가하여 전시한 국군용사가 무려 2300여명이나 된다고해서 형산강을 피로 물들인 강(江) ‘혈산강’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 전투, 이 강이야말로 6.25전쟁사에 있어 중요한 전투요, 명예로운 강이기도 하다. △형산강 도하작전의 영웅(고 연제근 상사) 이야기 ▲포항 ‘해도동 근린공원’ 특공 결사대 동상(銅像) 고 연제근 상사가 이끄는 12명의 결사대 대원들이 적의 기관총 진지를 격차하기 위해 “돌격 앞으로!”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다. 1950년 9월.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며 포항을 탈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형산강 도하에 걸림돌이 되는 적의 기관총 진지의 위력 때문이었다. 9월 17일. 새벽 4시. 도하통로를 만들고, 포항수복을 위해. 제3사단 22연대 1대대 분대장. 연제근(延濟根)상사가 이끄는 특공대가 결성되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지원한 분대원 127은 수류탄을 몸에 메달고 가슴높이까지 차오르는 물살을 소리없이 헤치며 전진한다. 그러나 어김없는 북한국의 무차별 기관총 사격이 시작된다. 앞서가든 분대장(연제근 상사)이 총알에 맞아 부상당하고, 중상에도 끝까지 전진 수류탄 3발을 던져 기어코 기관총 진지를 파괴한다. 그러나 9명의 특공대원과 함게 그는 22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전사하고 맡았다. 국군의 형산강 도하 전투는 이 결사대의 희생으로 9월 17일~20일까지 3개지역으로 구분해 도하하면서 제3사단이 포항시를 완전 탈환, 점령하게 되었다. 오로지 연제근(1930~1950, 9:17)상사와 그의 특공대원의 순국 덕분이었다. ▲고 연제근 상사의 약력 충북 증평군 도안면 출생, 도암초교를 졸업하였다. 국방경비대 입대(1948) 제3보병사단 제22연대에 배속(1949)된 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하여 9명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운다. 그리고 6.25 형산강 전투에 참가, 22연대 1대대 분대장으로, 형산강 도하 전투를 성공리에 완수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2계급 특진.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무공포장 등을 추서하였으며, 서울 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다. 그에 대한 추념예우로는 6.25전쟁영웅, 호국 인물, 순국선열 등으로 추앙하고 있으며 육군에서는 근속20년이상 부사관 대상으로 ‘제근상’을 제정하여 추모하고 있다. 증평군에서 ‘연제근 공원’ 조성(2015.5)과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도로 이름을 ‘연제근로’로 지정한 바도 있다. ‘고 연제근상사’의 6.25전쟁무공이 얼마나 크고 값진 것이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그와 그리고 함께 순직한 특공대원들의 명복을 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형산강과 가까이 있는 포항 대잠동 페철도 부지의 ‘철길숲(Forail)’에 천연가스가 분출, 그 불길이 3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타오르고 있다. Forail은 Forest(숲)과 Rail(철도)의 합성어로 철로가 있는 숲이란 뜻이다. ▼포항 폐철도 길에 24시간 가스 분출 이야기 2017년 3월, 효자역에서 포항역으로 가는 철도가 폐선 되고 그 지역을 시민공원으로 조성키 위해 공사를 하던 중, 지하 200여m에서 천연가스가 분출,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포항은 45년 전 해도동에서 석유시추사례도 있었던 만큼, ‘이젠 가스도 솟아나오는 구나’하고 놀란 가슴으로 반겼고 혹시나 석유 징후가능성도 기대하며 시민들은 반신반의 그 궁금증은 매우 컸다. 그러나 지질전문 기관의 조사결과, 포항시민전체가 약 한달 사용할 정도로 가스 매장량이 많지 않고 그대로 두면 10여년정도 타오를 수량 밖에 안 돼, 결국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맺었다. 그러나 이것을 하늘로 치솟는 영원한 포항의 불꽃으로 상징, 관광 자원화 하기로 하고 약 1억 원을 들여 ‘불의 정원’으로 이름 지어 시민공원인 철길 숲속코스에 볼거리로 만들었다. 불꽃 주변을 투명 방화유리로 둘러막아 옆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24시간 언제나 볼 수 있도록 안전장치도 했다. 이곳은 이제 포항의 핫플레이스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철길 숲을 산책하며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포항의 시민공원 철길숲 이야기 포항 흥해에 KTX가 생기면서 시내로 통하던 철로가 필요 없게 되자, 포항시는 도시 그린 웨이 프로젝트 핵심으로 이 유휴 지역을 시민들의 산책및 힐링코스로 만들기로 정했다. 그리고 2015년부터 2018까지 약 250억원을 들여, 두 역 사이의 길이 4.3km, 면적 12만㎡의 도시공원을 만들었다. 소나무, 단풍나무 등 16여종 20여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꽃밭, 조형물. 각종운동기구 , 어린이 놀이터, 의자 등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산책로, 자전거도로, 음악분수, 팽나무 숲, 오크정원등을 적재적소 구분해서 만들었고, 또한 쉴 새 없이 솟아오르는 가스분출을 ‘불의정원’으로 이름 부쳐 이 공원의 상징적인 볼거리로 삼았다. 또한 여기에 사라진 철로의 옛 기관차 모형을 만들어 동산에 전시하여 ‘기차는 달리고 싶다’의 표징으로 철거덕 거리며 달리던 기차에 대한 향수를 자아내게 했다. ▼도시균형 발전의 대표적인 사례로 각광 그간 도심을 관통하는 녹지및 힐링 지역으로 환경정화, 미세먼지 저감, 여름철 그늘 조성(피서), 연주회, 독서회 및 기타 문화, 음악행사 등으로 시민 건강과 정서함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이지역이 인구 증가로, 철로로 갈라져있던 양쪽 거주 (대이동과 mbc지역 주변 거주)민들의 자유왕래, 시청 쪽 근접과 상권, 교통소통 등으로 도시 재생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지역발전에 크게 환영을 받고 있다. 이러한 도시지역 균형 발전의 대표적인 사례로 등장하자, 다른 지자체는 물론 해외 기관 에서 조차 벤치마킹을 위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시민들의 왕래가 많은 공원이라 이곳에서 여러 행사도 많이 하는 데 시 승격 70주년 기념으로 게란 2000여개를 가스 불로 삶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걷기 행사 때는 팥죽 3000여 그릇을 준비하여 참여시민에게 지급하는 등, 시민을 위한 이색적인 먹거리 행사도 했었다, 또한 포항시 2020년 (경자년) 시무식을 이 공원 음악 분수터 앞에서 개최하는 등의 시민친화적인 공식행사도 실시하여 시민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간 산림청 주관, 녹색 도시 우수사례 수상도 있었고, 대한민국 균형발전 사업평가 최우수상을 받은 바도 있다. 포항의 ‘철길 숲’이 ‘불의 정원’과 함께 ’가볼만한 곳이 아니라 ‘꼭 봐야할 곳’으로 그 명성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형산강(서천)변 차도 가에 북동쪽으로 잔디밭 산책길이 있다. 잘 가꾸어진 꼬불 길에 훤출한 나무들이 줄을 섰고 그 사이로 시민들이 아침 저녁 걷고, 달리곤 한다. 특히 이 지역은 우리나라 현대소설의 거장 김동리 선생의 생가 터가 있으며, 그가 유년시절 뛰놀던 마을로, 사람들은 이 길을 사랑하며, 걸을 때는 항상 그를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산책길 주변에는 선생의 생가 터와 문학 기념비, 작품 배경도등이 있어 더욱 그와 친근감을 갖게 한다. ▶김동리(金東里) 선생의 생가 터가 있는 길 이야기 전봇대에 매달린 동리선생 생가 안내표지를 따라가니, 어느 집 방범창 앞에 생가 터 해설판이 서있다. 그의 옛집은 없어지고 집터는 세 사람의 소유로 분할되어있다고 한다. 여기가 경주 성건동 284번지, 김동리 선생(1913-1995)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주변에 무속 인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작품 「무녀도」의 동네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널찍한 도로들이 생겨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김동리 선생은 1913.11.23 김임수(부)와 허임수(모)의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34년〜36년(3년사이) 조선일보(백로). 중앙일보 (화랑의 후예), 동아일보(산화)신춘 문예에 잇단 입선으로 문단에 화제가 되었으며, 그 후 대표작,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등으로 한국문단에 부동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한국소설가협회 대표(79년), 예술원회장(81년), 한국문인협히 이사장(83년)을 역임하였으며 1995.6월에 돌아가셨다고 적혀있다. ▶김동리 선생의 문학 기념비 소개 산책길에는 2019년, 7월에 설치한 선생의 문학 기념비가 있다. 1.2단 기단위에 화강암으로 “김동리 선생문학 기념비(-고향을 사랑하신 문학인 동리선생-)”라고 적혀있다. 고향경주를 사랑했던 분으로 작품대부분이 경주나 신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등단 작품이 ‘사랑의 후예’이고, ‘기파랑’을 포함한 16편의 신라 역사 소설이며, 무녀도, 황토기, 바위 등에서 보듯, 경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역시 화랑의 후예로 자처하며, 경주인다운 가장 한국적인 작가였다. 따라서 이곳은 선생의 어린 시절의 애환이 깃던 곳으로 한국역사문화의 본원지이며, 한국문학의 종가라고 끝을 맺고 있다. ▶동리선생 작품에 나오는 경주지명과 주변 환경 이야기 그가 경주에서 출생,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경주일대가 그의 작품 배경으로 많이 등장한다. 대표작품인「무녀도」에는 그의 집이 있던 무당촌을 중심으로 건너다보이는 서천, 예기소 등이 배경으로 나온다. 모화의 굿판이 열리던 서천 백사장이며, 그녀가 망자(亡子)의 혼백을 건지기 위해 무열의 상태에서 춤을 추며 숨져가든 곳이 서천 예기소 강주변이다. 그가 어릴 때부터 무속촌 에서 신비스런 당집, 당제, 당나무 등을 보면서 민간 토속신앙 분위기에 싸여 자랐기 때문에 무속적인환경이 이 소설무대의 기본 울타리가 되었다고 본다. 이 소설은 식구들 간의 다른 종교로 인해 파국에 이르는 한 가족의 불행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민족의 기본적인 민속신앙의 정체성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의 작품 「달」속에서도 달이가 물에 빠져 죽는 곳이 형산강유역의 금당나루근처이며, 「역마」에서 두 주인공이 놀러가는 곳으로 칠불암이 나온다. 그의「황토기」에는 두 친구(억쇠와 득보)의 활동무대로 동 남산을 설정하고 있으며,「바위」「까치소리」에도 경주 부헝듬 마을, 장군교, 성건동입구 회나무 등이 등장한다. 봄이 오고 있다. 봄 따라 이 문학 비 길을 거닐며, 선생의 작품세계와 그의 삶을 알아보고, 그리고 봄꽃에 싸인 작품지역을 구경 하며는, 이 길이 의미 있는 인문학의 길로써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경주 삼랑사터 당간지주(幢竿支柱) 이야기 경주 성건동 서천 강변도로가에 넓은 잔디밭이 있고, 그 안에 서로 닮은 돌기둥이 두 개 마주 보고 있다. 높이 3.7미터 쯤 되는 당간지주로 보물 제 127호이다. 그리고 이 일대는 신라시대 유명한 삼랑사(三郞寺)라는 절터라고 전해 온다.「당간」이란 절에서 불교행사를 할 때 부처나 보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당이란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말하며, 이것을 세웠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 보물은, 바깥 면에 무늬를 새겼고, 꼭대기에서 곡선을 그리며 둥글게 내려가다가, 전체 1/3정도에서 안쪽으로 굴곡을 이루며 깎여있다. 위. 아래 부분 두 곳에 구멍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켰다. 각 변의 길이,높이, 두께 등을 깍은 부분이 깨끗하고 간결하고 세련되어 장식 예술품처럼 돋보이는 뛰어난 석물(石物)이다. 원래 서로 5미터정도 떨어져 있던 것을 1977년에 지금과 같이 가까이 이동 시켜놓았다. 이 근처에 삼랑사란 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절에 관련된 부재들은 흔적이 없고, 이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지주 둘레에는 철제보호 울타리만 쳐져있다. ▼삼랑사(三郞寺)에 전해오는 이야기 이 절은 신라 진평왕19년(597)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삼국유사엔 명승「경흥」이 이 절에 있었다고 한다. 삼랑이라 함은 아마도 ‘3人의花郞’과 관계된 것으로 생각되나 관련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시대 이름 있는 사찰로 왕들의 출입이 잦았던 절이라고 전한다. 또한 관음보살이 환생하기도하고, 불교관련 이적이 나타난 신비스런 사찰로서, 특히 경흥국사와 이절에 얽힌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관음보살이 국사의 병을 치료해주다. 경흥국사는 일찍 불교에 통달하여 문무왕 때 신임을 받았고, 신문왕 즉위 때 부터 국사가 되어 삼랑사에 주거하였다. 어느 해 경흥국사가 병이 나서 한 달 간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 여승이 찾아와 ‘착한 벗이 병을 고쳐준다는 화엄경 구절을 소개하고,’스님 병은 즐겁게 웃으면 쾌유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다음 11가지의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춰보였다. 과연 국사의 병은 어느 사이 나아버렸다. 국사가 여승이 떠날 때 사람을 시켜 추적해보니. 홀연 삼랑사 남쪽 남항사로 들어 가버린 후 자취를 감춰버렸고, 여승이 갖고 있던 지팡이만 절에 그려진 11면 관음보살상 앞에 있었다. 국사의 병을 고쳐준 이 여승은 11면 관음보살의 전신으로 국사에게 즐거움을 주기위해 우스쾅스런 짖을 한 관음보살이었다고 전한다. ▶문수보살이 경흥국사의 호사스러움에 충고를 하다. 경흥이 국사가 되고 신문왕의 신임을 받자 왕궁출입이 잦아졌다. 어느 날 경흥국사가 왕궁으로 가려고 시종이 행차준비를 하는 데, 말안장이며 꾸리개 등 말갖춤이 매우 화려했다. 또한 국사의 신발, 가사, 등 몸치장도 의젓해 국사의 나들이가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되고, 높은 신분의 귀인으로 알아 모두 길을 피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누더기를 걸친 몰골의 중 한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하마대 위에 앉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등 뒤에 다 떨어진 광주리를 메고 있었다. 그 스님의 광주리 안에 마른 고기를 담겨 있는 것을 본 시중이 중더러, ‘중 옷을 입고는 어째서 이런 부정한 것을 갖고 다니느냐?’꾸짖는다. 중이 이르기를 “두 다리 사이에 산(生)고기를 끼고 다니는 것에 비하면 마른 고기를 갖고 다니는 게 더 낫지요”라고 대답한다. 국사가 대문을 나서면서 이 말을 듣고 뜨끔하여, 사람을 시켜 그이 뒤를 따르게 한다. 그 중은 남산 문수사에까지 가다가 광주리를 문밖에 내버리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있었고, 광주리속의 마른고기는 소나무 껍질이었다. 이 말을 들은 국사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문수보살께서 내가 말을 타며, 호의. 호식하는 것을 충고하시는 것이구나’후회하였고, 이후 국사는 절대 말을 타지 않았으며, 의·식·주 모두 검소하게 지냈다고 한다. 부처님이 경흥 국사를 내세워 사바세계 인들의 사치와 물욕에 대해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이곳 (삼랑사터)에는 예부터 우물과 고목들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군영(軍營)이 있던 자리라고 전해온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형산강변 현곡에서 대구행 국도를 따라가면, 우측에 소현 마을이 보이고, 그곳 마을 회관 앞에 이르면 신라시대 효자, 손순(孫順) 유허지가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은 물론, 근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모범 효자 사례로 소개됐었다. ▼거목들에 둘러싸인 손순 유허비 이야기 유허지 주변은 대부분 300-400년 된 회화나무와 팽나무 고목들로 둘러싸여 고색창연하다. 작은 팔작기와지붕의 비각 안에 서있는 비에는 ‘신라효자 문효공 손순유허비’라고 한문으로 적혀있다. 효자 손순에 대한 이야기가 삼국유사(5권, 효선편)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손순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여의고, 품팔이로 아내와 같이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간다. 그러나 어머님만은 극진히 봉양하는 효자였다. 어느 날 어린 자식이 노모가 먹는 음식을 빼앗아 먹는 걸 보고 크게 상심한다. 아내에게 ‘자식은 또 낳으면 되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으니, 자식을 땅에 묻어 버리자’고 차마 부모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한다. 취산 북쪽에 올라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자, 기이한 석종(石鍾)이 종소리를 달랑거리며 나온다. 부부는 놀랐고 괴이해, 잠시 나무위에 걸고 두드려 보니 그 소리가 매우 은은했다. 아내가 ‘우리가 이종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이 아니겠느냐?’ 고하며, 아이를 묻지 말라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고 아이를 안고 도로 집에 내려왔다. 이종을 집에 매달고 날마다 종을 치자 그 소리가 궁중에까지 들리면서 왕이 종소리의 연유를 알아보게 한다. 왕이 손순의 효성에 감동하고, 옛날에 「곽거」라는 사람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이 내려왔다고 하는 데, 지난 세상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함께 보는구나’하면서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매년 쌀 50석을 주기로 한다. 그 후 손순은 살던 집을 시주하여 절을 짓고 절 추녀에 석종을 걸어 놓았는데 도적들이 훔쳐 갔다고 전한다. 이 비문은 조선 말기 학자인 성재 허전(許傳)이 지었다고 하며, 1970년에 손씨 문중에서 다시 세웠다고 한다. ▼효자 손순의 위폐를 모신 「문효사(文孝祠」이야기 손순이 자기 집을 희사하여 「홍효사」란 절을 짓고 종을 안치하였는데, 진성여왕 때 후백제의 도적들에 의해 종을 도난당했다고 한다. 지금은 손순의 집터인 유허지만 남고, 그 안에 「문효사」란 팔작 기와지붕의 3칸 사당이 자리하고 있고, 거기에 손순의 위폐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다. 이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 (홍효문)옆에 ‘시조 문효공 유적보존회 기적비’라고 쓴 큰 표지 비석이 주위를 압도하며 서있다. 이곳은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돼있다. ▼소현리 효자거리 마을에 천연색 타일벽화 유허지 근방에는 소현 마을 전설에 관한 옛 모습들이 천연색 타일로 벽화돼 있는 것이 특이하다, 신라시대 왕, 화랑 등 유명 선인들의 모습, 소현리 유래와 주변 지형 및 산봉우리들, 말, 호랑이 등 동물들이 모자이크돼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이 타일장식은 동국대 김호연 교수와 그 제자들이 가마에서 직접 구워 부쳤다고 한다. 손순이 살던 당시 이 마을주변과 사람들의 활동상을 표현 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효자 손순유허지가 경주 관광명소로 등장 이 마을은 두 선녀가 손을 맞잡고, 마을을 품안에 안고 있는 듯 한 지형이라고 한다. 안태봉을 중심으로 좌우 구미산과 금곡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날에는 손순의 이름인 순우정을 따서 「순우정 마을」로 불렀다고 하는 데, 경주시내에서 보면 모범적인 효자마을이, 너무 작게 보인다고 해서 소현리(小見里)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 한적하든 이 시골 마을이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마을 벽에 알록달록한 벽화거리가 조성되면서. 경주의 새로운 관공 명소로 등장하고 있다. 손순의 효행과 효자마을의 역사를 널리 홍보하여 좋은 관광지로 돋보이게 하려는 것 같다. 일반 관광객은 물론, 특히 학생과 부모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동국대 경주 켐퍼스에서 형산강을 따라 안강으로 가는 지방도로(68번) 변에 현곡면 나원리(羅原里)가 있다. 신라시대 왕들의 안태를 묻었다는 안태봉(337.9미터) 아랫마을로, 형산강을 굽어보며 멀리 경주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옛날 배 (裵)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한 마을로 난원리(蘭原里)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현 이름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형산강 건너 외롭게 서있는 국보 나원리 5층 석탑 경주지역은 신라시대의 3층 석탑이 대부분인데, 흰색5층 석탑이 강 건너 여기 외따로 떨어져 있다. 국보 39호이다. 탑 전면에 넓고, 펀펀한 잔디밭이 조성되어 탑 주변 경관이 시원하고 편안하다. 아마도 잔디밭과 앞쪽에는 금당이 있든 자리인 것 같다. 탑은 전당후탑 형으로 2중 기단위에 5층 탑신과 5개 옥개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신라 41대 헌강왕때 여기에 국운창달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난원사(蘭原寺)란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절 앞에 소(沼)가있고 주변에 난초가 자라, 난원사라고 했다는 데, 지금은 그 흔적이 없고, 탑 옆에는 근간에 지은 작은 절이 있다. ▶흠과 결실이 없는 수려한 외모의 「나원백탑(羅原白塔」 탑의 높이 약 9.7미터, 흰색 화강암으로 짓고, 이끼가 끼지 않아 항상 순백으로 보인다. 신라 8괴중의 하나인 나원 백탑으로 불리는 이유다. 파손. 결실이 없으며,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군더더기가 붙지 않은 황금비례형의 듬직한 신라불교의 걸 작품이라고 한다. 탑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파편 글씨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지역에서 흔치 않는 미(未) 도굴 탑으로, 해체수리 시(1995. 11-1996,7) 3층 옥개석 윗부분에서 사리함과 금동 작은 탑 및 작은 금동불상이 발견되었고, 부처님 진신사리 15과와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와 천년이 넘도록 본래의 색이 변하지 않는 탑, 그래서 국보급으로 품격이 높은 모양이다. ▶탑 주변에 최근 지은, 나원사(羅原寺) 주변이야기 탑 왼편 아래쪽에 작은 사찰, 나원사가 있다. 이 절 공덕비(라원사 공덕비)에, 경주 북쪽 10여리에 신라 41대 헌덕왕때 (809)대각사가 국운 기원을 위해 이룩한 절이 난원사(蘭原寺)라고 했는데, 세월이 흘러 그 절은 없어지고, 이 절 (나원사)은 1975년 1월15일 박도식. 허일금이 지었다고 적혀있다. 본당 1채, 종무소1채, 딸랑 2채뿐이다. 마당에 큰 백일홍나무가 벌거벗은 가지만 잡고, 찬바람에 떨고 있다. 여름이면 붉은 꽃들로 그득해, 절 마당이 현란하게 어울렸을 법한데-. 지금은 너무 적적한 겨울 절간이다. 다행이 본당 앞에 세워놓은 두 조각상 때문에 주변이 다소 여유와 유머가 있다. 하나는 뚱뚱한 넉살좋은 포대화상(布袋和尙)이 불룩한 뱃살을 내밀고 파안대소하는 모습이요, 그리고 그 좌측에 왼손으로 빈 바루(식기)를 들고, 뭔가 먹고 싶어 찡그리며 오른 손으로 머리를 긁는 전진 난만한 까까머리 동자상이다. 부족함이 있는 반면 여유로움도 함께하는 세상, 그게 바로 사바세계임을 암시하는 듯 둘의 모습은 대조적으로 절손님에게 잔잔한 미소를 선사하고 있다. 한적한 절을 찾은 불자들에게 무료함을 달래주려고 배려한 주지스님의 따스한 내공으로 보인다. 나원리 마을에서 여기까지 자동차 1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꼬불꼬불, 좁은 사이길 인데도 잘 올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원리 계탑마을 이야기 나원리 동편에 계탑(개탑)이란 데가 있다. 일명 개탑[犬塔]마을 이라고도 한다. 냇가에 신라시대 때 탑이 있었는데 어느 홍수 때 떠내려갔다고 한다. 약 350여 년전 이 마을에 큰 홍수가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물난리를 피해 마을 뒷산 높은 산봉우리로 피신한 후, 마을을 내려다보니 큰 개 한 마리가 물살에 쓰려지려는 탑 주변을 뱅뱅 돌며, 멍-멍 마구 짖어 대는 게 아닌가? 성난 듯 슬픈 듯, 탑을 구해달라고 구조를 요청하는 울부짖음 이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로, 끝까지 탑을 지키다 탑이 무너지면서, 거기에 깔려 죽고 말았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의 유골이나, 유품을 모셔두고, 숭배, 공양하기위해 만든 신성한 석물로, 바로 부처님을 상징한다. 부처님을 살리기 위해, 사람 대신 죽었다고 「의로운 개」로 칭송하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죽은 개의 영혼을 위해 산기슭에 개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마을 이름도 개탑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신라시대 「계탑(溪塔)」이 개탑[犬塔]으로 바뀐 것이다. 서북쪽 산기슭에 자세히 찾으면, 개 무덤이라고 전하는 돌무덤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역사관에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란 작은 돌이 보물1411호로 진열돼있다. 길이가 약 32센치, 윗부분 너비 12.5센치의 돌인데, 모두 74자의 한문 글이 새겨져있고. 밑으로 갈수록 좁아져있다. 신라시대 두 젊은이의 맹세를 새겨놓은 돌로 전한다. 경주에서 이 보물의 모형 돌로 4개가 더 있는데 동국대 경주켐퍼스에 1개, 근처 「화랑마을」에 3개, 모두 근처 석장동에서 형산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두 젊은이의 면학과 충성을 서약한 맹세의 돌 이 돌에 적인 한자 5줄 74자의 내용은 우리나라 역사학자인 고 이병도 박사의 뜻풀이에 따르면 ‘임신년 .6월16일 두 사람이 함께 하늘에 맹세하는 바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지켜나가고 과실이 없기를 서약한다. 만일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만약 나라가 편치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또 앞서 신미년 7월22일에 맹세를 했던 즉, 시, 상서, 에기, 전을 차례로 습득키로 맹세하는 데 기간은 3년으로 하였다’ 즉 이 돌은 신라의 두 젊은이가 화랑도 정신에 입각, 학문을 익히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서약한 내용을 작은 냇돌에 새긴 것이다. 이 비가 새겨진 시기는 학자에 따라 다르나, 대개 신라 24대 진흥왕 때(552)나, 26대 문무왕 때(612)중 하나 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국난을 예상하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서약했다는 점에서 3국 통일을 지향하든 신라시대의 어느 임신년(壬申年)으로 보여 진다. ▶경주 석장사지 근처에서 일본인이 발견한 금석문 냇돌 이 돌은 1934.5 일본인 오사까 긴따로(경주박물관 근무)씨가 현곡면 석장사지 근처에서 발견하고 박물관에 가져와 수집함에 넣어 두었던 것을 이듬해 12월 일본 역사학자(스에마스 야스카즈)가 박물관에 와 이 돌을 보았다. 보통돌이 아님을 직감하고 판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신년에 서약한 글이 새겨진 돌로 보아 비석 이름을 「임신서기석」으로 지었다. 그리고 이듬해(1936) 경성제대 사회학지에 ‘경주 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을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오사카 개인이 소유하다, 해방이 되면서 경주박물관에 이관, 보물로 지정됐다. ▶경주 화랑마을에 있는 임신서기석 모형돌 이야기 경주 석장동에 2018년 10월 화랑마을이 개원 운영되고 있다. 신라 화랑정신을 되새겨 국가에 바람직한 글로벌 신(新) 화랑육성을 목표로 만든 문화촌이다. 전시관, 국선장, 무예수련장등 화랑에 관한시설이 대부분이다. 이곳 전시관2층 한쪽 벽에 임신서기석 모형돌 2개가 서있다. 길이2 미터쯤 되는 큰 것과, 보물 실제 크기 마한 작은 모형 돌이 유리상자속에 들어있다. 이곳은 당시 화랑이 지켜야했던 세속오계중 「교우이신(交友以信)」정신을 강조하는 공간으로, 그에 대한 설명과 모범적인 화랑들의 사례를 영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전설적인 화랑, 사다함과 무관랑의 이야기 이곳 관람실에 상영되고 있는 삼국사기 「열전」사다함 편에 있는 이야기이다. 신라 사다함과 무관랑은 어려서부터 생사를 같이하기로 하고 화랑이 된다. 대가야국과의 전쟁 때 사다함은 15세의 나이로 비장이 되어 출전하였고, 큰 공을 세우고 개선장군이 되어 귀국한다. 진흥왕으로부터 많은 농토와 200여 명의 가야국 포로들을 노예로 하사받는다. 그러나 그는 노예를 양민으로 풀어주고, 전답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준다. 사다함이 공을 세우는 동안 친구 무관랑은 몸이 아파 화랑다운 역할을 못하다가 병으로 죽고 만다. 사다함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 날을 세운다. 결국 벗이 죽은 지 7일 만에 17세의 젊은 나이로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난다. 당시의 젊은 신라 화랑들이 신의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만큼 서로 우정과 의리에 투철하였다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임신서기석도 이와 유사한 모범적인 좋은 실존사례이다. 화랑마을 풍월정 앞에 있는 모형돌 1개는 5~6미터 크기의 거대한 것으로, 동산에 우뚝 서서 멀리 형산강을 바라보고 있다. 동국대 켐프스의 모형돌은 1984년 12월 동국대 학생회관 준공 때 세웠는데, 학생들이 두 화랑과 같이 우정과 의리를 지키며, 학문에 전념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사람이 되자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