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은 불을 밝히는 도구다. 석등(石燈)은 돌로 만든 등기구다. 절에서 뿐만 아니라 궁전, 관청, 여염집에도 있었을 석등. 불상과 불탑에 비하면 석등은 그에 부수되는 것이며 다분히 건축적인 성격을 띤다. 숫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발전돼 온 석등 중 경주에 현존하는 석등과 석등의 양식,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경주에 남아있는 석등은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 교동에 있는 석등, 국립경주박물관 소재 석등 등이 있다. 그 외, 석등 부재가 현존하는 것으로는 십이지상 석등 부재, 이요당 석등 부재, 분황사, 석굴암, 사천왕사지, 감산사지, 창림사지, 원원사지, 무장사지, 남산리사지, 천관사지 석등부재 등이 있다. -밝게 빛나는 부처님 말씀, ‘석등(石燈)’ 그런데 왜 사람들은 유독 절에 석등을 많이 만들었을까? ‘등지인연경’이라는 불교 경전에는 등불은 부처님의 진리를 비춰줌으로써 모든 무리들이 착한 길을 택하게 한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해서다. ‘시등공덕경’에는 탑과 불상 앞에 등불을 밝히면 수미산(불교에서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 곳)꼭대기인 도리천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등 공양을 한 사람은 죄가 없어진다고도 한다. 절에 등을 많이 밝힐수록 내세에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등은 백제인들이 만든 익산 미륵사터 석등이다. 팔각 연꽃무늬 상대석과 팔각의 등불을 밝힌 돌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가늘고 긴 팔각기둥(간주석)의 석등이 주로 만들어졌다. 이와 함께 둥그런 기둥 중간에 굵은 마디를 두어 북 모양을 띠는 석등, 사자 두 마리가 화사석을 떠받치고 있는 석등도 만들어졌다. -석등의 의의와 석등의 형태 송창한 선생의 ‘불교 미술품에 대하여’ 중-석등의 의의-에서는 ‘불상과 불탑에 비하면 석등은 그에 부수되는 것이며 다분히 건축적인 성격을 띤다. 이 건축물은 간결한 조명 시설로 사원 궁궐 및 사가의 정원을 장식하는 시설물이기도 하다. 이는 숫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발전돼 왔다’면서 ‘우리나라 석등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자료가 제시되고 있지 않으나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불상과 경문이 들어오고 곧 사찰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등에 관한 지식의 전래를 추정해 볼 수 있으나 확실한 근거 또는 문헌을 찾을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송창한 선생은 ‘석등의 양식상 구별은 크게 불교적 시설과 유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석등의 주요 부분은 등화(燈火)를 일으키는 부분인 불집 곧 화사(火舍)이며 이 화사석을 주축으로 그 위에 지붕인 옥개(屋蓋) 부분과 아래로 대좌(臺座)부분(상대(上臺), 간주(竿柱), 하대(下臺)로 크게 나눠진다. 대좌부는 불상 대좌나 부도의 대좌와 같이 거의 동형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석등의 양식적 분류의 주안점은 화사석에 두고 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 즉 8각, 6각, 4각의 3가지 양식으로 크게 구분이 가능하다. 팔각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전해진 양식이며 이는 특히 신라시대에 많이 제작됐다. 육각은 고려초 일시 유행됐다. 사각은 고려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행되고 있는 형태’라고 했다. 또 ‘이와 같이 대별할 수 있으나 모든 부재가 팔각형으로 이루고 있으면 전형(典型)양식이라 부른다. 전형 양식 이외에 간주석의 형태에 따라 고복(鼓腹)형, 이형 석등으로 세분 할 수 있다. 이형 석등은 기둥 부분에 해당되는 간주석 대신에 인물상이나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8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중 가장 완전한 양식, 불국사 대웅전과 극락전 앞 석등 8세기에 건립된 석등은 9세기에 비해 수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의 석탑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중 가장 완전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불국사 대웅전과 극락전 앞에 있는 것이 유일하다. 이들 석등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8세기로 보는 견해와 9세기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들 석등에 구현된 제반 양식을 볼 때 대웅전 앞 석등은 8세기 후반에, 극락전 앞 석등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8세기 중반, 신라시대 석등으로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 전하는 대표적인 석등이다. 신라석등의 양식발달사상에서 전형양식(典型樣式)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의 평면구도를 유지하고 있다.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이 1석으로 조성된 상대석은 8각형의 평면을 보이고 있는데, 신라석등에서 이처럼 화사석 받침을 조성한 예 역시 이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다른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석등의 앞에는 전면과 측면에 각각 안상을 새긴 장방형의 배례석이 있다. 이 석등은 신라석등 발달사상 제2기, 즉 8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과 더불어 현 위치에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석등이다.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대웅전 앞 석등과 더불어 신라 전형기 석등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등의 전체적인 평면은 팔각형을 유지하고 있다. 옥개석은 풍화가 심하나 전체적인 조형이 대웅전 앞의 그 것과 동일하다. 석등의 전면에는 전면과 측면에 각각 안상을 새긴 장방형의 배례석이 있다. 이 석등 역시 8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과 더불어 온형을 유지하고 있는 귀중한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읍성 출토 석등 불교에서는 부처께 등을 공양하는 복덕을 짓는다는 믿음이 있다. 절에서 불전 앞에 석등을 설치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석등은 경주 읍성 출토로 통일신라 8~9세기, 높이는 320㎝다. 경주읍성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모은 부재들을 합쳐 만든 것으로 기둥처럼 긴 팔각형의 간주석이 굵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남쪽 야외전시구역 ‘경주 읍성 석등’ 경주읍성에 있던 이 석등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해 하대석, 간주석이라 불리는 수직으로 세워진 기다란 팔각기둥, 그리고 상대석의 일부만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 자리로 옮겨왔던 1975년 당시 없는 부분을 새롭게 만들어 넣고 지금의 모습으로 전시하고 있다. 복원한 석등은 높이가 거의 6m에 이르는데, 통일신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큰 석등의 하나이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등불을 밝히는 곳의 높이가 거의 5m에 가까운데 어떻게 불을 켰을까 하는 점이다. 매번 사다리를 놓았을까? 그 답은 전라북도 남원의 실상사 석등에서 찾을 수 있다. 실상사 석등 앞에는 돌계단이 마련돼 있다. 이 석등에도 별도의 돌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함께 발견된 것은 없다. 석등 앞에 있는 네모난 돌은 배례석이라고 한다. 이 돌의 용도는 향이나 각종 공양물을 올려놓기 위한 것이다. 석등과 함께 놓이는 경우가 많다. 이 배례석은 경주 읍성에 있던 석등과 함께 놓였던 것은 아니다. 한 시민은 “이 석등을 본 이들은 한결같이 석등의 아름다움에 대해 입을 모은다. 반면, 석등의 전시 위치가 다소 잘 보이지 않는 곳이어서 아쉽다는 지적이 많다. 적극적으로 석등을 홍보하고 자랑해도 손색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면서 이 석등이 제대로 부각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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