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한 옛 절은 하늘과 닿았어도 舊刹岧嶢接上蒼 천년의 지난 일들 이미 처량해졌네 千年往事已凄涼 퇴락한 돌 감실 오솔길에 묻혀있고 石龕零落埋幽徑 댕그랑 구리 풍경 석양에 울려 퍼지네 銅鐸丁當語夕陽 노인들은 지금까지도 여왕을 말하고 遺老至今談女主 옛 종은 여전히 당 황제를 기억하네 古鍾依舊記唐皇 짧은 비석 매만지며 한참을 서있자니 摩挲短碣移時立 깨어지고 이끼 낀 글자 반은 이지러졌네 剝落莓龍字半荒 조선 전기 학자이자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쓴 ‘靈妙舊刹’(영묘구찰)이란 시로, 제목은 ‘옛 영묘사’란 의미다. 선덕여왕과 밀접했던 사찰 이 시의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묘사는 선덕여왕대에 세워진 사찰이다. 영묘사(靈妙寺) 외에도 영묘사(零妙寺), 영묘사(令妙寺) 등으로도 불렸다. ‘삼국사기’엔 선덕여왕 4년(635년)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당 정관 6년’(632년, 선덕여왕 6년)에 창건한 것으로 돼 있다. 학계는 이 같은 창건 기록의 차이 때문에 창건 연대를 632년 혹은 635년으로 추정하거나, 혹은 632년에 창건을 시작해 635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영묘사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신덕왕(神德王) 4년(915년) 영묘사 안의 행랑에 까치집이 34개나 되고 까마귀집이 40여개나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뤄 보면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을 만들 당시 당대의 유명한 승려이자 예술가였던 양지(良志)가 장육삼존불(丈六三尊佛)과 천왕상(天王像), 불당과 전탑의 기와를 만들고 건물의 현판을 썼다고 하나, 이 또한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800여년이 지난 후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불전은 3층으로서 체제가 특이하다. 신라 때의 불전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다른 것은 다 무너지고 헐렸는데 유독 이 불전만은 완연히 어제 지은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이례적인 3층 높이의 건물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변천 과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조선 중기 문신인 권벌(權橃)이 쓴 ‘충재집’(冲齋集)에 중종 10년(151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그 무렵 폐사(廢寺)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영묘사와 관련한 몇몇 신비한 이야기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래 영묘사 터엔 큰 못이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두두리(頭頭里. 귀신의 일종) 무리가 그곳을 메우고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또, 선덕여왕을 흠모해 상사병을 앓은 지귀(志鬼)라는 젊은이 이야기도 있다. 여왕을 만나지 못한 지귀의 마음속에서 불이 일어나 절의 일부를 태웠으나 승려 혜공(惠空)의 신통력으로 절의 일부를 구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박인량이 지은 설화집 ‘수이전’(殊異傳)에 나오는 얘기다. 그밖에도 선덕여왕이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백제의 군사가 여근곡(女根谷)에 숨은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는 선덕여왕의 신통력에 관한 세 가지의 사건인 ‘지기삼사’(知幾三事)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영묘사와 관련된 전설에 선덕여왕이 즐겨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사찰은 선덕여왕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흥륜사 자리가 영묘사 옛 터 그렇다면 영묘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3층 건물이 남아있던 조선 초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영묘사는 “부(경주부)의 서쪽 5리에 있다”고 했으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선 논란이 있었다. 1962년 5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같은 해 5월 23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은 월성에서 서쪽으로 5리쯤 떨어진 경주시 성건리 452번지 일원에서 20여 개의 주춧돌과 중방돌 등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영묘사 터로 추정했다. 그 근거는 ①이곳 근처에 약 40년 전까지도 느티나무 숲이 남아 있었고 ②지금까지도 이 근처에 ‘연꽃둠벙’이라고 불리는 연못이 있으며 ③‘삼국사기’에 따르면 매월당 김시습이 영묘사의 목탑 위에서 시를 읊었다고 하는데, 발견된 절터에 지금까지도 목탑이 남아 있고 ④주춧돌과 대웅전 중방돌의 수법이 삼국시대의 것이라는 판단을 종합했다고 한다. 이후 10여년이 지난 1976년, 경주시 사정동에 있는 흥륜사(興輪寺) 터에서 ‘영묘지사’(靈廟之斜), ‘대영묘사조와’(大令妙寺造瓦)란 글씨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발견되면서 지금은 이곳을 영묘사 터로 추정하고 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실시되지 않아 전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는 상태다. 다만 흥륜사에 대한 몇 차례의 시굴조사와 수습발굴을 통해 금당 터와 동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목탑 터로 추정되는 기단, 동·서 회랑 터가 확인됐다. 이후 해당 조사를 통해 파악한 출토 양상을 검토한 결과 영묘사가 삼국시대에 창건돼 유지되다 통일신라 후기에 대대적으로 재건되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선 얼굴무늬 수막새와 수렵무늬 벽돌(狩獵文塼, 수렵문전), 귀신얼굴무늬 벽돌(鬼面塼, 귀면전) 등 많은 기와와 벽돌이 출토됐다. 특히 ‘신라인의 미소’로 불리며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얼굴무늬 수막새도 이곳 절터에서 나온 대표적 유물이다. 그밖에도 이곳에선 각종 토기류와 자기류도 여럿 출토됐고, 당시 인근 민가엔 이 절터에서 옮겨갔을 주춧돌도 많았다고 한다. 이곳 절터에서 영묘사터로 추정되는 여러 유물이 나왔지만, 이보다 앞서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될 때의 이름인 ‘경주 흥륜사지’란 명칭은 바뀌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곳엔 1980년대에 흥륜사라는 새 절이 들어섰다. 옛 흥륜사는 이곳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경주공고 마당에서 나온 기와 조각이 그 근거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009년 경주공고가 배수로 공사를 위해 파헤친 400상자 분량의 흙더미에서 ‘흥’(興) 자가 새겨진 신라시대 수키와 조각을 확인했다. ‘사’(寺) 자만 남은 기와 조각도 이곳에서 출토됐다. 한때 찬란했을 영묘사 터엔 흥륜사란 절이 들어섰고, 흥륜사 터엔 경주공고가 자리 잡았다. 세월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스페인에서 마르세유 항구로 프랑스 제2의 도시인 마르세유는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에 있습니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항구로, 무역보다 오히려 관광도시로 더 각광을 받고 있지요. 7/16 스페인에서 이곳으로 와서, 먼저 이 항구의 상징물인 노틀담 드라가르드 성당을 찾았습니다. 이 성당을 포함해, 유명 소설, ‘몬테그리스트 백작’의 배경지인 이프섬과 구시가지 풍경이, 이 도시의 대표적인 관광 포인트로 꼽히고 있습니다. -마르세유 항구의 상징물 ‘좋은 어머니 성당’ 마르세유 언덕위에 세워진 ‘노틀담 드라가르드 성당’을 일명, ‘좋은 어머니 성당’이라고 부릅니다. 거기로 가는 길은 버스와 꼬마열차가 있는데, 우리는 버스로 성당 아래에 내려, 언덕 계단 길따라 올라갔습니다. 주변 도시와 바다, 선박, 해안선 경치를 보며 가기 위해서입니다. 이 성당은 마르세유에서 가장 높은 언덕(150여미터 높이) ‘가르드 언덕’에 13C경에 세워진 성당입니다. 당초에는 해안선의 선박, 군함을 감시하는 감시성벽이 있던 곳이며, 외적 침입자인 로마, 이슬람세력들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한 망루가 설치되어있던 장소라고 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리적인 방어력보다는 하느님으로부터의 보호, 즉 영적인 힘의 보호를 받기 위해 여기에 성전을 건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마르세유 사람들뿐 아니라 이 항구를 출입하는 선원들의 안전항해와 무사귀환을 위한 기도의 장소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노틀담은 프랑스어로 ‘우리의 여인’, 즉 성모님(성당)이란 뜻이고, 가르드는 ‘보호’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성당은 우리(마르세유)를 보호해주는 염원이 담긴 성모 마리아의 성당, 즉, ‘좋은 어머니 성당’이라고 불려졌다고 합니다. 성당 위에 오르니 금빛으로 빛나는 10여미터 높이의 성모상이 우뚝 바다를 굽어보고 있고, 무게 8톤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면서 이 항구를 감싸주고 있는듯 했습니다. -마르세유 성당에서 부산항을 생각하며 나는 마르세유 좋은 어머니 성당을 돌아보고 우리나라 ‘부산항’을 생각했습니다. 두 곳 다 항구도시로 서로 닮은 듯, 무슨 연관성이 있는 듯 해서지요. 노틀담 성당이 바로 바다를 향해있고, 높은 언덕 위에 성당과 종이 시가지를 보호하고 있듯이, 부산항도 ‘용두산 공원’위 (해발 190여m)에서 ‘부산 타워’와 ‘시민의 종’이, 선박들의 정박지로 부산 해안과 시민을 보호하듯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용두산 공원의 종은 높이 4m의 구리 무게 25톤으로, 1996년 시민 헌수금으로 부산항의 번영을 위해 만든 종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마르세유는 외세의 침입을 막은 교두보로 요새 지역이었고, 부산 또한 한국 전쟁 때 남단 최후의 보루로서 전쟁의 마지막 피난처 였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마르세유는 서양 신부님들이 이곳 성당을 거쳐 부산항으로 인도되어, 조선 백성을 깨우치고 서양문화를 전파하며 주님의 사랑을 베푸셨으니, 마르세유는 출발지요, 부산은 그들의 도착지였기 때문에 그 유관성은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층층이 사다리 휘감아 하늘로 오르려하여 層梯繚繞欲飛空 주변의 온갖 산수들 한눈에 들어오네 萬水千山一望通 몸은 노오(옛 신화 속 도인)가 오르내리던 너머로 벗어나 身出盧敖登降外 눈길은 수해(신화 속 잘 달리는 사람)가 오가던 속을 압도하네 眼呑竪亥去來中 은하수 뗏목 그림자 떨어져 처마 앞 비이고 星槎影落簷前雨 달의 월계수 향기 날려 헌함 아래 바람이네 月桂香飄檻下風 동도를 굽어보니 수많은 집들 俯視東都何限戶 벌집이나 개미구멍인양 더욱 아득하네 蜂窠蟻穴轉溟濛 조선 초 학자이자 문신인 김극기(1379~1463)가 쓴 ‘황룡사黃龍寺’란 시다. 황룡사는 신라 궁성인 월성 동북쪽에 있었던 절로, 신라 최대의 호국(護國) 사찰이었다. ◆불국사 8배의 거대 사찰 ‘삼국사기’는 황룡사 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4년(553)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바꾸어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이라고 하였다” 진흥왕 14년 새로운 궁궐을 지을 때 용이 한 마리 나타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이 사찰로 고쳐 짓고 이름을 황룡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황룡사는 신라의 대표적 사찰이었던 만큼 그 면적이 불국사의 8배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같은 왕 30년(569)에 담장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으며, 35년(574)에는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조성했다. 진평왕 6년(584)에는 금당(金堂)을 조성했고, 선덕여왕 14년(645)엔 대국통(大國統) 자장(慈藏)의 건의로 9층탑을 건립했다. 553년부터 645년까지 거의 100년에 걸친 대역사(大役事)였다. 이를 통해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췄다. 그런 만큼 이곳엔 엄청난 물건으로 가득했다. 장육존상과 9층탑은 진평왕 때 천사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줬다는 ‘천사옥대’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세 가지 보물을 의미하는 ‘신라삼보’(新羅三寶)로 불렸다. 장육존상은 5m 크기의 금동불상으로 추정되며 9층탑은 높이가 80m에 달하는 거대한 탑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있었던 대종은 성덕대왕신종의 4배에 달하는 구리가 사용된 거대한 종이었다고 한다. 모든 면에서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 보물이 존재한 장소였던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의 미(美)’를 대표하는 유적인 석굴암이나 석가탑, 다보탑 등은 보물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인 솔거의 금당벽화도 이곳에 있었다. 새들이 진짜 나무인 줄 알고 벽에 부딪혔다는 일화가 이곳의 이야기이다. 황룡사 강당에선 당대 최고 승려였던 원효가 설법을 했다. 그밖에도 원광, 안함, 자장 같은 고승들이 머물며 주요 경전을 강의했고, 역대 왕들은 백좌강회(百高座會),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 등에 참석하는 등 나라에 큰 일이 있거나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왕권에 신성함 더한 강력한 상징 이 절을 처음 짓도록 명한 진흥왕은 신라 왕실을 석가모니 일족의 재림이라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물론 국왕 자신을 불교 속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여 불법을 지키는 수호자이자 정복자로서 알리는 것은 당대 중국에서도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진흥왕은 여기서 더 나아가 금륜, 은륜, 동륜, 철륜으로 나뉜다는 전륜성왕 등급에 맞춰 자식의 이름을 동륜과 사륜으로 지었다. 심지어 태자 동륜의 아들 이름은 백정(白淨), 며느리는 마야(摩耶)라고 하여 실제 석가모니의 부모 이름과 동일하게 지을 정도였다. 손자가 부처의 부모이니 그 뒤에는 부처가 태어날 차례라는 의미였다. 뜻한 대로 손자 백정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진평왕이다. 하지만 진평왕에겐 아들이 없었다. 결국 그의 딸인 선덕여왕이 여자의 몸으로는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된다. 이로써 진흥왕 때부터 4대에 걸친 왕실의 쇼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한 실패로 마무리된 것이다. 그럼에도 선덕여왕은 부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겐 여성이 불법을 열심히 지키면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결국 여성 몸을 지닌 당시 생애를, 미래의 부처가 되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거대했던 황룡사는 그 거대함만큼이나 남달랐던 정신세계가 몇 대에 걸쳐 투입돼 만들어진 사찰이었다. 다시 말해 이전의 5~6세기 초반 마립간시대 왕들이 경주 중앙에 거대한 고분을 만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면, 6~7세기 신라왕들은 평지에 거대 사찰을 만들어서 왕가의 힘을 과시했다. 결국 진흥왕부터 선덕여왕까지 신라를 대표하는 성골 집안의 불교 수호를 위한 자부심이 만들어낸 사찰이었으니 모든 면에서 크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골 왕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황룡사가 자신들의 불법 수호 의식을 영원히 알리며 지켜지길 바랐다. 경덕왕 13년(754)에 대종(大鐘)이 주조되고, 종루(鍾樓)와 경루(經樓, 불경을 보관하던 누각)가 목탑 좌우에 배치되면서 가람의 일부가 바뀌었지만,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시대까지도 중요한 사찰로 인식되어 국가 주도의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뒤 수리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치됐다. 해방 후에는 절터 내에 민가와 논밭 등이 들어서서 상당 부분이 파괴된 상태였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과 탑, 불상이 있었던 자리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황룡사 터에 대한 발굴은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8년간 8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회랑(回廊, 건물 주위를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 안쪽 편에서 금당(金堂, 부처님을 모신 건물 터), 목탑 터, 강당 터 등 14곳 이상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회랑 외곽과 담장 사이에서는 강당 북서편 부속건물 터 16곳, 강당 북편 부속건물 터 10곳, 강당 북동편 부속건물 터 5곳, 중문과 남문 사이 건물 터 4곳, 남문 터 1곳 동회랑 동편 건물 터 5곳, 절 편 건물 터 2곳 등 43곳 이상의 크고 작은 건물 터가 나왔다. 조사를 통해 절의 영역은 약 8만928㎡에 달하며, 4만여점의 유물을 수습했다. 이를 통해 황룡사는 불타 없어질 때까지 그 구조가 세 번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황룡사 발굴조사는 고대 사찰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용궁龍宮에 사찰 부지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황룡사 터 일대가 저습지였다는 고고학 조사 결과와 일치한다는 점을 밝힌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이러한 점에서 황룡사 터는 신라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춥고 힘든 휴전선에서 오늘도 나라를 지키고 있을 OO이 보아라. OO아. 며칠 전에 보낸 니 편지 잘 받았다. 집에는 너거 아버지를 비롯해 모든 식구들이 별 탈 없이 잘 지낸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 문장은 내 어머니가 동네 ‘아지매’ 중 한 분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초반부다. 어머니는 올해 88세 되시는 고령이다. 그러나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중학교까지 나오신 고학력(?) 출신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정실태 조사를 한답시고 집안의 재산상태, 부모님의 학력, 직업 같은 것을 내놓고 조사하곤 했는데 70명 가까운 반에서 그때 어머니가 대학교 나온 친구들은 거의 없었고 고등학교 나온 사람이 한둘, 중학교 나온 사람이 네댓쯤이 고작이었다. 초등학교 나온 사람도 열 손가락 미만이었다. 이를테면 어머니는 그 시대 신식 교육을 받은 흔치 않은 여성이었던 셈이다. 요즘 석사 학위 가진 여성의 비율보다 어머니 시대 중학교 나온 여성이 훨씬 귀했을 것이다. 어릴 때 내가 자란 경주 교촌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큰 기와집 대부분은 경주최부자댁 후손들이 살던 곳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랫동안 최부자댁과 관련되어 일하던 집안의 후손들이거나 새로 이사와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최부자댁 사람들은 자신들끼리는 자주 섞였는지 몰라도 동네의 이런저런 행사와는 거의 무관하게 지냈다. 최부자댁 여성들 중에는 고학력자들이 많았는데 동네 아지매들과 거의 내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부녀 회장하시던 채모 할머니가 최부자댁 후손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동네 부녀회 일을 보지만 거의 상징적인 역할이었다. 그럴 때, 어머니가 부회장을 맡아 오래 활동하시면서 실질적으로 회장 노릇을 했기에 동네 아지매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와 상의하곤 했다. 어머니는 이를테면 교촌 아지매들의 온갖 해결사 노릇을 다 하신 셈이다. 동네 아지매 대부분이 글자조차 모르는 무학(無學)들이다 보니 가장 긴요한 것이 읽고 쓰는 문제였다. 그중에서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거나 먼 공장에 딸을 보낸 아지매들은 대문이 닳도록 우리집을 드나들었다. 편지를 읽어 달라거나 써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고 근여이 어무이요. 이거 쫌 읽어 주소. 우리 OO이가 펜지를 또 보냈데이...!” 내 이름을 넣어 ‘근여이 어무이’로 통하던 어머니는 이럴 때면 열일을 제쳐 두고 편지를 받아 읽기 시작하고 가급적 즉석에서 답장을 써주시곤 했다. 이렇다 보니 어머니는 동네 자녀들 중 어느 집 아들은 어디서 복무하고 있고 어느 집 딸은 또 어떤 곳에서 일하고 있는지 깨알처럼 알고 계셨다. 당연히 해당 집안의 대소사도 꿰고 계셨다. 어머니가 답장을 쓸 때는 가급적 집안 근황을 꼬치꼬치 묻고나서 쓰셨다. 그래야 멀리 가 있는 아들딸들이 집안 소식을 두루 알고 안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누구네 집 딸은 어디에 취직되어 갔고 누구네 집 맏이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네 집 암소가 숫송아지를 낳았지 암송아지를 낳았는지 손바닥 보듯 알고 계셨던 것이다. 80년대 이전만 해도 전화가 흔치 않을 때이고 군대나 공장과의 소통은 편지가 유일했다. 그만큼 자식들 편지는 반갑고 귀했다. 어머니가 편지를 읽을라치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연신 눈물을 닦거나 코를 훌쩍였다. 어머니가 ‘부모님 전상서’라는 첫 글을 읽을라치면 앞에 앉은 아주머니는 눈물부터 찔끔 흘리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편지를 다 읽고 마칠 즈음에는 어느새 눈물 콧물이 범벅된 아주머니들 얼굴을 보곤 했다. 그럴수록 어머니의 편지 읽는 소리는 더욱 낭랑하고 한 줄 한 줄 읽을수록 감정이 충만해졌다. 또 다 쓴 답장을 아지매들에게 읽어줄 때면 ‘우예 그래 내 마음을 잘 알아서 씨는기요?’라는 인사를 으레 듣곤 했다. 어머니의 편지 쓰기는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난 내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직접 경험해본 것은 내가 대학에 가서였다. 학보사 기자 시절 대학 친구 하나가 연애편지를 대신 써달라 한 적 있었다. 소개팅에서 만난 여대생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었던 그 친구는 자기를 좀 유식하게 포장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마침 그 무렵 니체의 무슨 책을 ‘폼 삼아’ 읽고 있었는데 되먹지 않게 그 편지에 니체와 관련된 내용을 넣어서 써주었다. 솔직히 그때 읽던 니체는 어렵기가 이만저만 아니어서 책을 반 가깝게 붙들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무슨 소린지 가늠하지도 못한 채였다. 그런 상태에서 터무니없는 자만심으로 쓴 연애편지가 온전하게 보였을리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편지가 가고 나서 그 여학생으로부터 답장이 없었다는 친구의 푸념을 들었을 때 그게 내가 쓴 편지 탓이 아니고 친구가 여학생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애써 주장했지만 속으로 뜨끔한 것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기 이를 데 없고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따지자면 어머니가 대신 쓴 편지는 철저히 부탁한 아지매의 마음과 아지매 집의 진실한 소식이 담겼을 뿐이지만 내가 대신 쓴 편지에는 오만과 허세가 잔뜩 들어있었던 셈이다. 똑똑한 여대생이었다면 그런 편지를 받고도 좋아서 해실거릴 리 없을 것이다. 대필이라고 하면 아버지 역시 만만치 않은 이력을 가지고 계신다.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면서기 출신이시다. 고향인 내남면에서 수년간 면서기로 근무하셨고 뒤에는 그런 이력을 바탕으로 행정서사 업무, 대서방을 열고 오래 일하시기도 했다. 대서는 서류를 대신 써주는 일인데 그 역시 워낙 글자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라 생긴 직업일 것이다. 내가 대학 진학 후 군 문제를 해결하고 일 년 남짓, 아버지 사무실에서 잡무를 도와드린 일이 있었다. 그때 가끔씩 아버지를 찾아와 고소장을 쓰달라거나 청원서를 써달라는 분들이 있었다. 원래 그런 일들은 사법서사(법무사)들의 고유업무인데 아버지 지인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아버지를 찾아와 이런 일을 부탁했던 것이다. 이럴 때 아버지는 업무영역을 굳이 따지지 않고 가급적 그 부탁을 들어주곤 하셨다. 어차피 고소장이나 청원서가 특정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리에 맞게 정리를 잘해 주면 되는 일이었고 사법서사 사무소에 가도 특별히 잘 써줄 것이란 보장도 없으니 지인들의 부탁을 들어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아버지 지인들은 점심을 사기도 하고 막걸리를 내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나에게 한 번 보고 고칠 곳이 있는지를 보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대학 다니면서 학보사 기자까지 지냈으니 아들이 한 번 봐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쓰신 고소장이나 청원서는 적어도 내용을 쉽게 파악하거나 사실을 적시하는 부분에서는 굉장히 조리 있고 문장 구성도 잘 되어 있었다. 특히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내용만 쏙쏙 뽑아 써놓으시는 것은 그때 나로서는 흉내 내기 어려운 실력이었다. 아버지는 오랜 기간 일기를 쓰셨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대서 실력은 일기 쓰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 번은 아버지 대신 내가 고소장을 써본 적도 있는데 우선 부탁하신 분의 장황한 이야기를 끊는 것이 힘들었고 그 많은 푸념 중에서 핵심적으로 무얼 골라야 할지 선택하기 어려웠다. 푸념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다 억울하고 중요해 보였는데 그게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학생의 한계였다고 지금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내가 대필작가가 된 이면에는 어렸을 때부터 봐오던 어머니의 편지 써주기와 아버지의 대서 유전자가 나도 모르게 깃든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 대필은 어머니의 편지 쓰기와 아버지의 대서 업무와 하등 다를 게 없다. 꼼꼼히 내용을 듣고 핵심을 잡아 쓰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 사람의 마음을 움켜잡는 것은 도도한 지식과 화려한 문장이 아닌 진심을 파고드는 솔직함이란 것이다. 그게 어머니의 편지 쓰기와 아버지 대서업무의 가장 큰 힘이었다.
경기도가 제안한 새로운 개념의 전기차 충전기가 눈길을 끈다. 자동차 주차 시 차가 뒤로 계속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주차방지턱(카 스토퍼)에 전기장치를 연결해 주차와 동시에 충전이 가능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 카 스토퍼형 전기차 충전기는 주차와 동시에 주차방지턱에 설치된 충전기에 바로 자동차 충전 플러그를 연결할 수 있어 별도의 충전공간 없이 충전이 가능하다. 문제는 현행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 시행규칙’상 전기차 충전기는 안전확인대상 전기용품으로 KC안전확인 신고가 필요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충전기인 카 스토퍼형 충전기는 KC 인증이 불가능했다는 것.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기도는 지난 20일 산업통상자원부가 개최한 2022년 제4차 산업융합 규제특례심의위원회에서 규제샌드박스 과제 ‘카스토퍼형 충전기를 활용한 충전서비스’를 제안해 실증특례 승인을 통과하면서 실용화가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신청 기업 두루스코이브이는 실증기간 동안 서울, 경기도, 부산시 내 주차장에서 총 1000세트의 충전기를 판매해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한편 심의위는 이번 스토퍼형 충전기에 대해 ▲독창적인 형태의 충전기인 점 ▲설치공간의 제약이 적은 점 ▲바닥에 위치해 교통약자의 이용이 편리한 점 등을 고려해 특례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는 해당 기업의 실증특례 승인을 위해 신청서 작성부터 시장조사, 법률 전문가를 통해 쟁점 협의·조정에 대한 조언까지 다양한 맞춤형 컨설팅을 제공했다. 이번 실증특례 승인으로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전기차 시장에 필요한 전기차 충전 기반이 확대할 것으로 도는 기대하고 있다. 향후 전기차 보급이 대세인 시점에서 경기도가 제안해 승인받은 이번 스토퍼형 충전기는 앞으로 전기차가 대세인 반면 기존의 충전기가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는 단점을 가진 만큼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각광받을 전망이다.
코로나19로 창업을 꺼려하던 시기, 오히려 이런 분위기를 기회로 삼아 창업에 성공한 곳이 있다. 바로 용강동에 위치한 수제반찬 전문점 나래찬’s. 나래찬’s의 대표 권나래(38) 씨는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린 2020년 4월 가게를 오픈했다. 코로나로 인해 시민들이 외식, 외출을 자제하면서 배달음식들이 인기를 누리게 됐고 나래 씨의 반찬가게 또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포화상태에 이른 지역의 반찬가게들. 차별화된 메뉴와 엄격하게 고른 신선한 식재료, 정성이 담긴 손맛으로 단골 고객과 인지도를 확보한 수제반찬 전문점 나리찬’s의 권나래 씨를 만나 창업 스토리를 들어봤다. 가정주부 경험 살린 창업 나래찬’s의 권나래 씨는 결혼을 하고 가정주부로 지내던 중 창업을 마음먹었다고 한다. 결혼 전에는 의류 매장 매니저 등 서비스 업종에서 근무를 했지만 결혼을 하며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생활을 했다고. 그러던 중 그는 집에서 가족을 위해 만들던 반찬이 남아서 버려지고, 한 번 먹고 나면 손이 잘 안 가는 모습들을 보며 ‘반찬가게를 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반찬이 남아 버리는 경우가 많을 거예요. 가정주부인 주변 지인들도 반찬이 남아서 버리는 경우도 많고, 한두 번 먹으면 손이 가지 않아 버리게 되거든요. 보통 반찬을 만들면 재료값 때문에 많이 만들게 되고 결국 남아서 버려지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버려지는 반찬들이 아깝다는 생각에 반찬가게를 오픈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권나래 씨. 비록 한식 자격증과 같은 전문적인 자격증은 없지만 평소 주변에서 음식 맛, 손맛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그이기에 용기를 내 나래찬’s를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거창한 자격증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음식을 만들어 주변에 나눠주면 맛있다는 평을 많이 받았기에 한 번 도전해 보려고 시작했어요. 다행히도 손님들이 좋아해 주셔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고되지만 보람찬 반찬가게 창업을 하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되기까지에는 코로나19의 영향이 있었다. 나래 씨가 창업한 시기는 한창 코로나가 유행했던 2020년 4월. 외식과 외출을 대대적으로 삼갔던 시기라 배달음식들이 인기를 누리게 된 시작점이었다. 권나래 씨의 나래찬’s도 집밥을 먹고자 반찬을 찾던 고객들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찬가게의 일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식당의 경우 한정된 메뉴를 만들어 판매를 해요. 이와 다르게 반찬가게는 손님들이 원하는 메뉴가 각각 달라 여러 가지 밑반찬은 물론 다양한 메인메뉴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식재료 손질부터 요리까지 정말 손이 많이 가요. 보통 40~50가지의 반찬을 만드는데 친정 어머니와 남편의 도움으로 다양한 메뉴를 만들고 있답니다” 또한 나래 씨는 음식 장사는 식재료가 중요하다는 일념으로 새벽시장을 시작으로 엄격하게 재료 선정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음식 장사는 무조건 식재료의 품질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새벽 장에서 신선한 재료를 사 오고, 식재료 배달이 왔을 때 원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반품을 하죠. 물론 재료비가 많이 들기는 하지만 손님들에게 최대한 맛있고 신선한 반찬을 제공해 드리고 싶거든요. 이렇게 힘들고 원가가 상대적으로 많이 소비되지만 손님들이 재방문하셔서 맛있게 먹었다는 말 한마디가 제겐 큰 힘이 되고 보람이 됐어요” 창업 아이템으로서의 반찬가게 권나래 씨는 반찬가게가 소자본창업이 가능하고 큰 기술을 요하지는 않기에 창업 아이템으로서 괜찮다고 전했다. 다만 경주는 최근 수많은 업체가 생겨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쉽지만은 않다고도 말했다. “코로나 시기 때문에 반찬가게가 정말 많이 생겼어요. 저희 가게 인근에만 4~5개 업체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적은 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고 특별한 자격증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기에 괜찮은 창업 아이템이라고 생각은 해요. 하지만 포화상태인 경주에서 살아남으려면 차별화된 메뉴나 전략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창업은 많은 경험과 준비가 필요하다고도 전했다. “창업은 신중히 결정해야 할 것 같아요. 잘 될 거라는 기대가 있는 반면 원하는 대로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험과 준비가 필요해요. 만약 이런 것들이 갖춰진다면 창업은 성공적으로 이뤄질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베스트셀러 시인이기도 한 정호승 시인을 ‘슬픔의 시인’ 또는 ‘따뜻한 슬픔의 시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나는 시인에게 ‘별의 시인’으로 부르고 싶다. 아니 ‘첨성대의 시인’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시인이 되기까지 문학적 출발점이 바로 첨성대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첨성대」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런가 하면 한 해전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동시「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당선되기도 했다. 군 생활 시절에 두 번이나 신춘문예 당선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이 모두 경주를 대표하는 유적지를 소재로 하고 있다. 경주를 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외가가 경주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작품들이 태어날 수 있었다. 시인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기록상으론 경주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외가가 있는 경주에 자주 왔다. 시내에서 불국사 가는 길 중간 동방에 외가가 있었지만, 외사촌 형들이 중학교를 입학하면서 공부하기 위해 시내로 나와 살던 곳이 바로 첨성대 근처였다. 문을 열면 환히 첨성대가 내다보이는 그곳은 놀이터였음이 그의 산문집 속에 자세히 그림 그리듯 그려내고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울타리도 없던 시절이라 첨성대 위에 올라 보고 우물터에서 세수했던 추억들, 그리고 첨성대 하늘 위에 쏟아지는 별들과 할머니 이야기들은 모두 화강암이 되고 시가 되었다. 지척의 반월성과 계림, 왕릉들 모두 첨성대 쪽으로 몰려들어 한편의 아름다운 시가 태어났다. 정서적 고향은 경주라 해도 다름없을 것 같다. 배경이 되고 소재와 주제가 된 작품들 속 등장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시「첨성대」는 ‘할머니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만큼 시인에게서 첨성대와 외할머니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시인의 첫 시집에도「경주 외할머니」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꼭 나의 할머니 같다. 이외에「검정 고무신」을 비롯하여 산문 속에는 어머니와 할머니 이야기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시인이 돌아가신 어머니 관속에 넣어드린「어머니를 위한 자장가」라는 시를 읽으면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의 시에는 유독 별이 많이 등장한다. 발간된 시집들을 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읽어 본 시집을 예로 들어보면 1997년에 출간된 시집『사랑하다 죽어버려라』에는「별똥별」,「누더기별」등이 있고, 2017년에 출간된 시집『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속에는「별」,「명왕성에 가고 싶다」,「별을 바라보며」등이 있다. 시선집『수선화에게』에는「별들은 울지 않는다」,「별의 길」을 비롯하며 별을 노래한 시들이 여러 편이나 된다. 시집『풀잎에도 상처가 있다』속에는「북두칠성」,「별」,「저녁별」,「개밥바라기별」등 4편이나 별을 노래했다. 물론 제목이 별이 아닌 문장 속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반짝 눈을 뜨고 있다. 시집『별들은 따뜻하다』와 산문집『우리가 어느 별에서』처럼 아예 제목으로 삼은 책들도 있다. 읽어 보지 못하고 살펴보지 못한 시집들까지 다 합하면 별을 노래한 시편들을 합하면 시집 한 권 분량은 족히 넘을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시 속에 뭇 별들이 등장하는 것도 첨성대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독 날씨가 추워지거나 마음이 쓸쓸해지면 그의 시들이 읽고 싶어진다. 진정한 기쁨은 진정한 슬픔에서 태어난다고 시인은 말했던가? 그의 시들은 붕어빵처럼 따뜻하다. 그리고 어떤 희망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날이 추워서일까 문청시절 즐겨 읽던 누렇게 빛이 바랜 첫 시집『슬픔이 기쁨에게』를 다시 꺼내 읽는 즐거움도 가질 수 있었다. 최근에는 그의 시「산산조각」을 좋아한다. 아내는「바닥에 대하여」를 좋아해서 시 낭송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시인은 직접 찍은 첨성대 사진을 노트북 바탕화면으로 사용하고 있을 만큼 첨성대를 사랑한다. 산문집의 마지막 부분에 시인은 아호를 첨성(瞻星), 바라볼 첨(瞻)에 별 성(星), 즉 별을 바라보는 사람이란 뜻으로 스스로 이름을 지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제 우리들이 많이 불러주면 된다. 특히 경주사람들이 많이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별을 얼마나 좋아하는가는 ‘별’이라는 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다리를 버린 사람은 별이 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는데도 지붕 위에 앉아 평생 밤하늘 별만 바라본다 -「별」전문 시인은 운명적으로 별을 노래해야만 하는 소명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만약 필자가 신라의 왕이라도 된다면 그에게 첨성대 별지기로 임명하고 싶다. 여생을 첨성대 위에 올라가 평생 별을 보며 시나 쓰라며 아름다운 형벌을 내려주고 싶다. 현실적으로는 첨성대가 보이는 곳에 노래비 하나 만들어 첨성대를 찾는 사람들 눈을 즐겁게 해주고 가슴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 정호승 시인은 첨성대 시인이고 별의 시인이니까. 첨성대 정호승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 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한단 한단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 불던 그믐밤 첨성대 꼭 껴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 수놓던 첨성대의 등잔불이 되었다. 밤마다 할머니도 첨성대 되어 댕기 댕기 꽃댕기 붉은 댕기 흔들며 별 속으로 달아난 순네를 따라 동짓날 흘린 눈물 북극성이 되었다.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와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지고 나는 홀로 빙빙 첨성대를 돌면서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별 하나 질 때마다 한방울 떨어지는 할머니 눈물 속 별들의 언덕 위에 버려진 버선 한짝 남몰래 흐느끼고 붉은 명주 옷고름도 밤새 울었다. 여우가 아기 무덤 몰래 하나 파 먹고 토함산 별을 따라 산을 내려와 첨성대에 던져놓은 할머니 은비녀에 밤이면 내려앉는 산여우 울음소리. 첨성대 창문턱을 날마다 넘나드는 동해바다 별 재우는 잔물결 소리. 첨성대 앞 푸른 봄길 보리밭길을 빚쟁이 따라가던 송아지 울음소리. 빙빙 첨성대를 돌다가 보름달이 첨성대에 내려앉는다. 할아버진 대지팡이 첨성대에 기대놓고 온 마을 석등마다 불을 밝힌다. 할아버지 첫날밤 켠 촛불을 켜고 첨성대 속으로만 산길 가듯 걸어가서 나는 홀로 별을 보는 일관(日官)이 된다. 지게에 별을 지고 머슴은 떠나가고 할머닌 소반에 새벽별 가득 이고 인두로 고이 누빈 베동정 같은 반월성 고갯길을 걸어오신다. 단옷날 밤 그네 타고 계림숲을 떠오르면 흰 달빛 모시치마 홀로 선 누님이여. 오늘밤 어머니도 첨성댈 낳고 나는 수놓은 할머니의 첨성대가 되었다. 할머니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첨성대’전문-
서울시가 인생 전환기를 맞은 369만 중장년 세대가 중년의 위기를 넘어 평생 현역으로 행복한 노후를 맞을 수 있도록 집중 지원하는 ‘다시 뛰는 중장년 서울런 4050’을 시작한다. 이번 정책은 다른 연령층에 비해 안정적이라 평가됨으로써 오히려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4050 중장년층 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전국 최초의 종합계획으로 알려져 주목받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20일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서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다시 뛰는 중장년 서울런 4050’을 발표했다. 서울시는 ‘일자리와 역량은 높이고, 미래걱정은 줄인다’는 목표로 5개 분야, 48개 사업으로 구성된다. 5년 간(2022~2026) 4600억원을 투입한다. 5개 분야는 ①직업 역량 강화 ②재취업·창업 등 일자리 지원 ③디지털 역량 강화 ④활력있는 인생후반을 위한 생애설계·노후준비 ⑤4050 전용공간 ‘활력+행복타운’ 조성이다. 기본적으로 4050세대들이 변화된 환경 속에서 능동적으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구체적으로 ‘서울런 4050’에서 자격증, 취업 등 330개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하고, 배운 내용을 서울기술교육원, SBA 등 서울 전역 108개 학습공간에서 실습할 수 있다. 특히 ‘별도 캠퍼스를 두지 않고 온라인·토론 수업을 하는 ’미네르바형 직업전환 서비스’를 시작한다. 또 경력과 욕구에 맞는 일자리가 필요한 4050세대를 위해 재취업·창업교육과 맞춤 일자리를 제공한다. 기업과 연계한 이 사업은 민간기업의 중장년 일자리 수요를 발굴해서 중장년과 기업을 연결, 올해 800명, 2026년까지 5000명을 지원한다. 이밖에도 창업지원, 50+세대가 인생 2막을 위한 생애설계와 노후준비를 위해 디지털금융, 법률, 건강관리 등 안전하고 건강한 노후생활을 위한 프로그램도 제공할 계획이다. 여기에 궁극적으로 4050세대의 재충전을 위한 전용 공간 ‘중장년 활력+행복타운’도 만든다는 계획도 있다. 한편 서울시 중장년층은 서울시 인구의 38.9%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세대로, 경제활동인구의 약 59%를 차지한다. 서울시는 중장년 4400명을 대상으로 한 지원정책 요구조사(서울시 50플러스재단, 2022) 결과, 40~64세의 90%가 일자리 지원을 요구했으며, 디지털격차 해소(88.6%), 교육훈련(87.4%), 노후준비(85.3%)가 뒤를 이었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가 감기쯤의 위험도로 인식되면서 몰라보게 대규모 행사들이 늘어났다. 특히 연말이 되면서 그간 3년쯤 치르지 않았던 각종 단체들의 송년회가 봇물 터지듯 일어나고 있다. 이런 행사들이 성행하면서 다시금 말잔치도 늘어나게 됐다. 이 글을 쓰는 기자 역시 그래서 더 바빠졌다. 이곳저곳에서 연설문을 대신 써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농담 삼아 이렇게 묻곤 한다. “선진국형 인사와 후진국형 인사, 어떤 게 필요하신가요?” 기자는 25년 넘게 해외여행업을 하면서 많은 나라를 다녔고 이런저런 해외 행사에도 자주 참여하거나 직접 기획하게 됐다. 그러면서 선진국형 행사와 후진국형 행사를 나눠서 생각해볼 계기를 자주 만났고 선진국형 인사말과 후진국형 인사말을 비교해 볼 기회도 얻었다. 먼저 후진국형 행사를 보자. 이 경우는 일단 마이크 잡은 사람들이 많다. 행사를 주최하는 관계자들은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은 유력 인사들을 무대 위로 올려서 그 사람들에게 점수를 따는 것이냐에 달려 있다. 요컨대 행사를 지켜보는 청중이나 참석자들은 그냥 들러리일 뿐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 잡는 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는 식이다. 이렇다 보니 축사1, 2, 3은 기본이고 격려사 1, 2, 3도 기본이다. 이렇게 하고 난 뒤 대회 주최측에서 회장 부회장 할 것 없이 올라가 또 인사한다. 그 사이사이 어떤 유력인사가 행사장에 왔는지를 꾸준히 알려준다. 그런 유력인사들은 시간관념이 없어서 결코 제때 도착하지 않지만 희한하게 도착할 때마다 여지없이 참석자를 알려주는 성의를 발휘한다. 후진국형 인사말은 기본적으로 10분 이상 주절거린다. 일일이 해당 외국어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우리 같으면 공자왈 맹자왈 같은 고문헌부터 시작해 그럴싸한 사례나 명언 같은 것들을 늘어놓는 것이 틀림없다. 다음 사람 역시 최소한 10분,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절거리다 내려간다. 이때 객석을 보면 청중 대부분은 전혀 행사에 귀 기울이는 표정이 아니다. 7~90년 대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하던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장면과 흡사하다. 후진국형 행사는 말로 시작해 말로 끝나는 영혼 없는 행사다. 행사시간은 유력인사가 많이 참가하면 길어지는 고무줄이다. 심지어 유력인사가 늦게 도착하면 대놓고 행사 시간을 연기해 행사하기 일쑤다. 오직 그 한 사람, 혹은 그들만을 위한 행사다. 선진국형 행사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 우선 행사시간을 엄격히 지킨다. 누가 뭐라고 해도 칼같이 시간을 맞춘다. 행사가 시작되면 행사 관계자가 자신을 포함해 행사를 치르는 주요 인사들과 이 행사를 위해 참석한 주요 내빈을 소개한다. 내빈으로 불린 사람들은 행사를 치르는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다음으로 역시 축사와 인사말이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인사말은 대표적으로 축사자 한 명 아무리 많아도 두 명 선에서 그친다. 그런 다음 대회를 주관하는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나서 바로 중요한 실무 행사로 돌입한다. 인사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축사는 보통 1~2분이 기본이다. 센스 있는 축사자는 30초쯤으로 압축해서 말한다. 아무리 길어도 3분 이내다. 대신 행사를 주관하는 회장 같은 사람도 최대한 실무를 전달하는 선에서 다소 길게 발언한다. 그래도 길어야 5분쯤이다. 역시 유머는 기본이고 센스있는 회장은 1~2분 이내에 말을 끝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아직도 후진국형에 훨씬 가깝다. 무슨 행사에 가건 축사 1, 2, 3과 격려사 1, 2는 기본이고 시간도 인사 하나당 5분 이상 10분이 대부분이다. 그러는 사이 객석은 인사말을 하는 사람과 상관없이 온통 자기 테이블 사람들과 내놓고 대화하느라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이런 모습은 특히 수직적 구조를 가진 동창회나 향우회, 지자체 행사에서 가장 흔하게 연출된다. 층층시하 내려오는 나이 많은 선배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는 동창회나 향우회, 높은 직책의 공직자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지자체 의회, 각종 단체장들이 득실거리는 지자체 행사에서는 누군가는 체면치레를 위해서, 누군가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인사말에 나선다. 인사말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행사를 치르느라 수고한다’는 말을 달아놓고 하고, 자신보다 유력한 사람이나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일일이 호명하며 인사하기를 잊지 않는다. 심지어는 마치 자신이 행사장의 주인인 것처럼 제2, 제3의 인물을 무대에 올려 인사를 시키기도 한다. 이런 것이 주최측에 실례되고 시간을 빼앗는 일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알아도 개의치 않는 눈치다. 내가 아는 어떤 인사는 행사측이 미리 3분 이내로 인사를 줄여달라고 요청했더니 마이크를 잡고는 ‘행사 주최측에서 3분으로 인사를 부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안 될 것 같다’며 오히려 대놓고 더 길게 한 인사도 있었다. 안하무인을 넘어 행사를 대놓고 방해한 것을 그 자신만 모르는 것이다. 그런 인사말이 끝나고 나면 대회를 치르는 회장이라는 사람이 다시 무대에 올라 지금까지 나와서 인사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일일이 고마움을 표하고 객석에 앉은 또 다른 유력인사를 소개하기 시작하고 고마움을 표한다. 이러면서 또 2~3분이 훌쩍 지나버린다. 역시 객석의 회원들은 자기 이야기들에 골몰하느라 대충 흘려들을 뿐인데 말이다. 특히 우리나라 대부분 행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사꾼들이 있다. 바로 지역 국회의원, 지자체 단체장, 지자체 의회 의장과 의원들이다. 동창회, 향우회, 지자체 행사 담당자들에 부탁하노니 국회의원, 시장, 시의회의 의장·의원들에게 제발 인사시키지 말기 바란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지금 행사를 좌우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1970년대 이전에 태어나 선진국형 행사를 못 보고 못 경험한 탓에다 지나치게 오랜 기간 상명하복의 문화에 젖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국회의원, 시장, 시의회 의장·의원을 으레 상전으로 알고 굽신거리는 것이 습관화되었을 뿐 그들이 실상 우리 말을 듣고 따라야 할 종복이라는 생각은 못하기에 이런 후진국형 행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 시장, 시의회 의장·의원들에게도 부탁하노니 행사에 나가 인사하는 시간에 국민을 위해, 시민을 위해 고칠 법안을 찾고 불합리한 제도를 없애고 잘못되고 불편한 곳을 찾아 고치시라. 국회의원, 시장, 시의회 의장·의원이 인사말 하라고 뽑은 자리가 아니지 않는가? 그래도 표를 의식해 꼭 인사를 하고 싶다면 그 자리가 국정보고나 시정보고의 자리가 아니고 남의 집 잔치 장소라는 사실을 제발 깨닫기 바란다. 그걸 착각해 10분 넘게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는 동안 행사는 똥이 되고 그런 행사에 나와 한두 번 지린 경험을 한 젊은이들은 두 번 다시 동창회, 향우회, 지자체 행사에는 근처에 조차 가지 않는다. 행사가 선진국형인가 후진국형인가는 인사말의 수와 그 말의 시간에 달려 있다. 이제 우리나라가 세계 최상위의 선진국으로 도약했는데 아직도 행사의 수준은 빈곤하던 7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런 차원에서 기자가 지금까지 여러 행사장에서 본 인사말 중 가장 인상적인 인사말 하나를 꼽자면 이것이다. 어느 향우회 회장이 최근 모 행사에서 한 인사말이다. “지금까지 제 앞에서 훌륭한 분들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저까지 좋은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OOO회 회원여러분, 아무쪼록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자, 이제 앞으로 닥칠 송년회와 신년회는 선진국형으로 치를 것인가 후진국형으로 치를 것인가? 지금 이 기사를 본 당신은 선진국형 연설가인가 후진국형 연설가인가? 멋진 연설을 하고 싶다면 이제 전문가에게 슬쩍 조언을 들어보는 것은 또 어떨까? 물론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대필 전문가에게 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1)스페인 바로셀로나 민박집 주인 아줌마 7/2일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이튿날 아침 바로셀로나에 도착, 예약해둔 숙소에 짐을 풀었습니다. 스페인 최고의 관광명소인 ‘람브란스’ 거리 가까운 블록에 한국교민이 운영하는 민박집입니다. 딸의 지인 도움으로 2박 3일 간 지내기로 했습니다. ‘유니크’라는 민박집인데, 방 2개를 우리가 빌렸어요. 자기 집은 따로 있고, 이곳 아파트를 전세 내어 본가에서 왕래하며, 운영하고 있었어요. ‘충북 음성’이 고향인데, 오래전에 여기에 이민 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해요. 스페인 관광자료, 바로셀로나 여행안내지 등을 비치하여 놓고, 여행 정보도 제공해 주는 친절한 아주머니였어요. 깔끔하고 부지런하고, 상냥한데 매우 근검절약했습니다.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이 없는 짠순이 민박집 7월의 바로셀로나 여름 날씨는 매우 더운데도, 방에 에어컨이 없었어요. ‘아주머니, 에어컨이 없어요?’하고 물으니, ‘낮엔 더워도 밤엔 괜찮아요. 여긴 다들 그렇게 살아요’ 하며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립니다. 아마 절전하기 위해 설치조차 안 한 것으로 평소 생활 습관인 것 같았어요. 더워 잠을 설치지만 불평할 수도 없고 참는 수밖에. 같은 동포로서 알뜰하게 사는 그녀의 생활방식에 맞춰 이해해주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 외 방 청소, 주변 정리, 방범등엔 더욱 신경을 써주며, 애들도 씻어주며 친절하고 곰살맞게 대해주어 고마웠습니다. 이렇게 아끼며 악착같이 살려고 애쓰니, 다들 자리를 잘 잡아 살구나 하는 부러움을 갖게 합니다. 떠날 때는 애들 간식까지 마련해주는 그녀의 성의에 짙은 동포애를 느끼게 했습니다. (2)바로셀로나(보케리아 시장) 교민 맛집, ’마싯타‘ 식당 바로셀로나에서 가장 으뜸 관광지인 ‘람브란스’ 거리를 가봤습니다. 이 도시는 스페인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이며, 관광도시입니다. 옛날 ‘한니발’ 장군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갈 때, 지나친 마을인데 하도 아름다워, 나중에 자기 가문의 도시로 삼고, ‘바로세로나’라고 한데서 전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람브란스 거리는 1㎞ 쯤 되는데 카타루나 중앙 광장에서 바로셀로나 해안까지 연결되는 도로입니다. 교통 중심지며, 상가, 식당, 꽃가게가 즐비하고, 거리의 화가, 여행객들로 북적대는 곳입니다. 길거리에 ‘삼성전자 갤럭시 로고’도 붙어있어 반갑고 우쭐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거리 중간쯤에 ‘보케리아 시장’이 있어요. ‘산 호셉시장’이라고도 하며, 수백 개의 점포가 들어 차있는 스페인 최대의 시장이지요. 여기를 구경하다 코너에서 우리 한글로 ‘마싯타’라고 쓰여있는 간이 식당을 만났어요. -청사초롱과 한글 메뉴가 걸려있는 우리네 간이 식당 교민이 운영하는 가게라 반가웠어요. 두어 평 정도되는 가게에 청사초롱이 걸려있고, 식당 이름, 메뉴 등이 순 우리 한글로 적혀 있었어요. 메뉴는 라면, 김밥, 잡채, 불고기 등이 있고, 고추장, 된장 등을 우리 교민이나 여행객들에게 식재료로 판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가게를 보고, 손님들이 가판대에서 서서 음식을 먹게되어 있었어요. 내부면적은 작지만, 일종의 맛집으로 깨끗하고 청결하더군요. 수년 전에 바로셀로나에 여행왔다가, 이 식당을 시작했다고 해요. 처음 고생을 했지만 열심히 일하다 보니, 목(위치)이 좋아 지금은 장사가 잘된다고 여유 있게 웃어요. 무엇보다 이곳 교민들이나 동포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주어 고맙다고 합니다. -당당한 우리 한국교민, 스페인 상인과 어깨를 나란히 라면과 김치를 보자 애들이 좋아해서 어쩔줄 몰라 했어요.라면 한 그릇에 6000원 정도인데, 금새 게눈 감추듯 했고, 김밥, 만두 등을 더해서 우리도 점심을 먹었습니다. 점심시간이니 손님들이 가게에 들리면서, 우리는 자리를 비켜 주고, 먹든 음식을 손에 들고 쫓기듯이 비껴 서서 먹어야 했습니다. 다른 외국 손님에게 한 그릇이라도 더 많이, 더 편히 팔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유럽 제일 큰 시장에서 스페인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당당하게 삶의 전선에서 선전하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너무 기분 좋았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통일신라 신문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탑을 세웠다. 692년에 조성한 것으로 전하는 황복사지 삼층석탑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7호로 지정된, 낭산(狼山)의 대표적인 유적 중 하나다. 1942년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함께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 경주 구황동 금동여래입상(국보 제80호)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발굴 유물 중 하나인 금동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돼있었는데,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 안에 넣어 앞선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했다는 내용이 확인됐다. ◆베일 벗는 황복사 황복사(皇福寺)는 ‘삼국유사’에 654년 의상대사(625~702)가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로, 건립 연도와 창건자 등 자세한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황복사 탑으로 전해지는 삼층석탑이 있다는 이유로 황복사지 삼층석탑 앞 건물 터는 오래 전부터 황복사지로 불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전(傳) 황복사지’인 셈이다. 그리고 황복사는 삼층석탑 해체 때 나온 금동 사리함 뚜껑에서 ‘죽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세운 선원가람’을 뜻하는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란 명문이 드러나 신라왕실의 종묘 구실을 한 왕실사원으로 추정돼 왔다. 사실 이 사찰 터는 일찍이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일본 학자 노세 우시조(1889~1954)가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만 주로 발견되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호석을 발굴해 많은 관심을 받아온 지역이었다. 하지만 경력이 일천한 젊은 학자 노세의 조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조선총독부는 출토유물의 노출공개를 허락하지 않았고, 이 부조상은 발굴 이후 다시 묻히게 된다. 노세의 첫 발굴 이후 국내 학계에서는 여러 연구 결과 등을 토대로 이 십이지신상이 원래는 왕릉에 썼던 부재였으나, 어떤 이유로 왕릉이 폐기된 이후 황복사 건물의 기단터를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해왔다. 십이지신상 면이 완만하게 휘어져 있고 더구나 다른 곳에서는 건물 기단에 십이지신상을 설치한 예가 없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게다가 절터 인근 들판은 폐왕릉지로 추정돼 왔다. 무덤 조성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여럿 방치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덤의 주인은 신문왕으로 봤다. 인근에 신문왕을 위한 석탑(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리하자면, 이 지역이 홍수 등의 이유로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무덤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왕릉을 폐기한 뒤 석재를 가져와 건물에 사용했다는 게 학계의 추정이었다. 그러던 중 폐기된 왕릉지에 대한 발굴이 이뤄졌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은 2016년부터 황복사지와 그 주변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였고, 2017년 2월 첫 결과를 내놨다. 결과는 다소 의외였다. 이 왕릉이 실은 어느 누구의 무덤으로도 사용된 적이 없는 가릉(假陵)이란 것이었다. 무덤의 주인은 효성왕(재위 737~742)으로 추정됐다. ‘효성왕이 죽은 뒤 매장을 하지 않고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동해에 뿌렸다’는 기록을 근거로, 효성왕의 무덤으로 사용하려다가 화장과 산골이 결정되면서 왕릉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폐기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삼층석탑 앞 건물지에 묻혔던 십이지신상도 이 미완성 왕릉에 쓰였던 십이지신상을 재활용했을 것이란 견해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은 2017년 2차 조사에서, 땅에 뭍혀 있던 십이지신상 면석의 크기를 실측한 결과, 이들은 절터 앞 왕릉에 쓰인 석물보다 크기가 훨씬 작고 뒷부분 탱석 얼개도 달랐다. 미지의 다른 왕릉 석물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을 재활용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신라 왕실사찰의 웅장하고 화려했던 면모도 드러났다. 국내 발굴 사상 최대 규모의 대석단 기단 건물터와 대형 회랑, 연못 등 크고 작은 유적이 무더기로 드러난 것이다. 유적 안에선 금동입불상 등 불상 7점을 비롯해 1000점 이상의 유물도 쏟아졌다. 왕실사원 성격과 관련해 주목한 곳은 탑 아래의 대석단 기단 건물터였다.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터에 덧붙여 동-서 축선을 중심으로 조성됐다. 내부에 대형 회랑을 돌린 독특한 얼개는 경주의 기존 신라 유적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가람 배치 방식이었다. 게다가 건물터 뒤에 삼층석탑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문-탑-금당의 일반적인 고대 가람 배치와 다른 문-금당-탑의 배치구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 가람? 경주 불국사에 가면 대웅전 앞마당에 두 개의 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다보탑(국보 20호)과 석가탑(국보 21호)이다. 지금은 터만 남은 감은사지에도 동·서 삼층석탑이 마주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쌍탑의 시원은 679년 낭산 남쪽에 들어선 사천왕사로 알려져 왔다. 옛 신라에선 1탑이었다가 삼국통일 직후 사천왕사에서 최초로 쌍탑 가람 배치가 나타났고 이후 감은사·불국사를 비롯해 통일신라 사찰의 기본 틀이 됐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2019년 이곳에서 쌍탑의 기원이 삼국 통일 이전인 옛 신라 때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쌍탑 목탑터가 발견돼 화제가 됐다. 앞서 언급했듯 황복사는 ‘삼국유사’에 654년 의상대사가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이다. 그런데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 신문왕이 죽자 아들인 효소왕이 692년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다. 의상이 출가할 때와 석탑을 조성한 때가 30년 이상 차이가 난다. 게다가 황복사에서 탑돌이 의식을 주관했던 스님이 공중에 떠서 탑을 돌았고, 그 위신력으로 함께 따르던 무리들도 공중에 떠서 탑돌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공중에 떠서 탑을 돌았다’는 데 주목했다. 석탑에는 기본적으로 계단이 없다. 황복사지 삼층석탑도 마찬가지다. 반면 계단이 놓이는 목탑이었다면 이 같이 묘사했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이 절터가 황복사가 있었던 자리가 맞다면, 현재 남아있는 삼층석탑을 세우기 전 목탑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최근 두 개의 목탑지로 추정되는 유구(遺構)가 발견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던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목탑 터가 맞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 가람이고, 쌍탑의 시작이 늦어도 7세기 중반 옛 신라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다수 학자들은 황복사가 ‘신라 최초의 쌍탑 가람’이라는 의견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분위기다. 목탑 터로 보기엔 규모가 작고, 중문 터와 탑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게 주요 이유다. 발굴조사를 주도한 성림문화재연구원 박광열 원장도 “목탑 터 바로 옆에 귀부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종묘와 관련된 곳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고 했다. 어찌됐건 황복사지 일원에 대한 3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 이전엔 남북 선상으로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동·서 목탑지, 중문지 등의 유구가, 통일신라 때는 동서 선상으로 십이지신상 기단의 건물지와 황복사지 삼층석탑, 동·서 귀부 등이, 고려시대엔 초석건물지와 관련시설 등이 각각 확인됐다. 결국 삼국유사 기록처럼 통일신라 이전 옛 신라 때도 사찰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김운 역사여행가
스마트 워치가 서울시민 18만명의 건강을 관리한다. 서울시가 스마트밴드를 통해 서울시민의 건강한 생활습관을 만들어 주는 ‘손목닥터 9988’에 참여할 18만명을 모집한다. ‘99세까지 팔팔(88)하게!’라는 구호를 내세워 ‘무상으로 대여한 스마트밴드로 맞춤형 건강관리를 해주는 이 사업에는 정보통신기술(ICT)이 대거 동원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목닥터9988’은 건강활동 데이터 수집, 분석, 모니터링을 위한 스마트밴드와 전용 앱을 통한 개인별 건강목표 설정지원, 건강활동 모니터링, 건강정보 및 건강상담 등 비대면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멘탈케어와 홈트 서비스도 추가된다. 서울시는 지난해 참여자 5만명을 모집해 올 7월까지 1차 시범사업을 실시했으며, 12월 5일부터 2차년도 참가자를 모집 중이다. ‘서울형 헬스케어 손목닥터9988 시범사업 평가분석’ 결과, 참여자들의 건강생활습관 형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자들은 각종 미션을 실천하며 걸음수가 증가하고 체중감량, 아침식사 실천, 영양표시 인지 등을 통해 건강행태가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는 미션 참가시 동기를 유발하는 포인트 제도를 지속 운영할 방침이다. 8000보 이상 걷기 등 미션 달성 시 건강활동 지속 유지 및 독려를 위한 위한 인센티브로 포인트를 제공한다. 1포인트는 1원으로, 최대 10만 포인트까지 제공된다. 포인트는 병원, 약국, 헬스장, 안경점, 편의점 등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이번 2차년도 사업 참여 대상은 만19세~69세 서울시민(서울 소재 직장인·자영업자 포함)이다. 또 출산모, 대사증후군 등 건강취약계층을 위해 특별모집도 한다. 2022년 1월 1일 이후 출산한 여성 1000명과 건강 중재가 상대적으로 적은 대사증후군 정상군 2500명이 대상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각 연령별로 신청일자가 다르다는 점이다. 10~20대는 월요일, 30대는 화요일, 40대는 수요일, 50대는 목요일이며, 60대는 금요일에 모집한다. 앞으로 남은 2차 모집일은 19일부터 23일까지다. 한편 갤럭시워치, 애플워치 소유자는 본인의 워치를 가지고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단, 스마트밴드는 미제공하며, 신청가능 인원은 총 18만명 중 5만명이다. 문의 : 손목닥터9988누리집(http://onhealth.seoul.go.kr) / 손목닥터 대표전화 02-2133-9711~5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지상강의 제 5장에서 사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장에서는 사진을 통해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을 말했지만 이번에는 자서전에서 사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자서전에서 사진은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다. 특히 근래 기업가들이나 정치인들의 자서전들은 억지로 글을 보여주기보다 사진을 통해 시각적인 발자취를 알려주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책 읽는 습관이 급속히 떨어진 탓도 있고 반대로 스마트폰 일반화 이후 글자보다는 시각적인 전달방식을 선호하는 대중의 습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례로 경주의 어느 전국단위 직능단체 회장은 자신이 그 협회의 장으로 재직할 동안의 활동을 화보로 찍어 퇴임하면서 지인들에게 배포했는데 이것이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회장 재임시 어떤 일을 했고 그 내용은 어떠어떠했다고 이야기해 봐야 읽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는 그 회장은 그간의 활동상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내용을 배열해 활동과 업적을 동시에 드러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 화보에는 자신의 취임식부터 시작해 국내 협회원들과의 다양한 행사가 일일이 수록되었고 국내외 활동도 빠짐없이 소개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일들은 큰 사진을 이용해 시원시원하게 화보로 제작한 것이다. 대통령을 수행해 해외에 나간 모습이나 해외의 유력 인사들과의 회의나 개별적인 만남, 각종 수상 모습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화보는 글씨로 만들어진 어떤 자서전보다 효과적이고 강력한 전달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펴낸 책은 아니지만 서울의 모 구청장이 펴낸 자서전에서도 이런 시도를 볼 수 있었다. 그 구청장은 자신의 재임 기간 활동을 간략한 해설과 함께 실어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 구청장의 경우는 글와 사진을 30:70쯤으로 실어 업적을 세부적으로 묘사하는데 조금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궁극적으로 내용의 전달은 사진에 맞춘 형식이었다. 정치인들의 자서전을 받는 즉시 책장의 후미진 곳에 꽂히거나 분리수거 1순위라고 볼 때 그나마 이 구청장의 자서전은 한번쯤 훑어볼 만한 여지를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진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기능으로 자서전 속에 사용된다. 가장 흔하게는 단락을 나누어주는 도구로서의 기능이다. 어떤 책이건 몇 개의 큰 단락이 있다. 자서전에도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의 단락이 있거나 학생기, 직장기, 사업기, 퇴임 이후 같은 단락이 있다. 그런 단락과 단락 사이를 나누어주는 판막음 역할로 사진을 쓰는 예가 그것이다. 대개의 자서전에서는 사진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년기의 판막음에는 유년기 사진을 쓰고 청소년기의 판막음 사진에는 청소년기 사진을 쓰는 식으로 쓰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판막음 사진을 현재 모습만으로 넣기도 한다. 경주의 모 변호사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판막음 사진을 일부러 현재의 사진으로 써서 비록 이야기는 오래전의 이야기를 쓰지만 현재의 사진을 중간중간 부각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흘러간 추억과 시간들이 모두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위한 자양분이었음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또 하나의 기능은 ‘양념’으로서의 기능이다. 대부분의 자서전이 그렇듯 남의 이야기에 대단한 관심을 가져줄 만한 사람이 드물다. 특히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의 경우 그 주변 사람들과 이익관계자들이 읽는 경우가 많고 아무리 흥미진진하게 썼다고 해도 대충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책을 훑어보다 눈길을 끄는 사진이 있으면 습관적으로나 호기심으로 그 장면에 눈길이 머문다. 때문에 이런 사진 배열은 생각보다 훨씬 전략적이어야 한다. 너무 적게 넣어두면 책 읽는 관심이 멀어지고 너무 많이 넣어두면 식상해서 눈길을 끌지 못한다. 책을 편집해놓고 보면 흔히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진이 좀 더 들어가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실제로 효과면에서 사진을 지나치게 많이 넣어두면 안 넣느니만 못하다. 그 이유는 사진이 많으면 그 사진 역시 깨알 같은 문장과 다름없이 그냥 흔한 사진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로 든 직능단체장이나 구청장의 사진들도 나처럼 꼼꼼히 보는 사람은 어떤 장점이 있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있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냥 사진으로 만든 화보집이거나 사진과 설명이 섞인 자서전쯤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진으로 도배된 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로 도배된 책과 하등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들어간 큰 사진은 글자로 치면 굵은 글씨가 들어가 있는 페이지와 같은 느낌이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사진을 따로 뒷부분 혹은 앞부분에 몰아서 편집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할 경우 본문을 대충 스쳐 지나간 사람이 화보를 통해 그 책의 내용을 일부나마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도 사진이 열 페이지 미만이라야지 무턱대고 사진을 많이 실어두면 역시 식상한 사진들이라 여겨 보지도 않고 덮어버리기 일쑤다. 앞에서 사진은 양념이라고 표현했다. 이 양념은 과하게 쓰면 음식의 맛을 버리게 되고 너무 적게 쓰면 양념을 넣는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다. 사진은 적절히 시선을 유도하는 양념이어야 한다. 화보집처럼 내놓고 사진 중심의 책을 만들게 아니라면 사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단체사진은 금기, 누구라도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2꼭지 당 한 장이 적절 자서전에 쓰는 사진에서 금기시되는 사진도 있다. 그것은 단체 사진이다. 단체라는 말은 10명 이상이 섞여 있는 사진을 말한다. 어릴 때 수학여행 단체 사진처럼 60명이 넘는 인원이 들어간 사진은 그냥 남의 사진을 넣어도 상관없을 만큼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족들이라면 주인공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려고 애를 쓰겠지만 가뜩이나 책에 쓰는 사진은 종이로 아트지를 따로 쓰지 않는 한 재질상 사진이 흐려 보이는 게 당연한데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는가? 자서전 사진은 개인의 사진이 중심이 되어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사진이 함께 실릴 경우 자신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명이 함께 있는 사진을 택해도 자신이 중심에 있는 사진을 쓰는 것이 중요하고 누가 봐도 자신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사진이어야 한다. 또 하나 주의점,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사진을 사용할 때 지인이라고 해서 동의 없이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 정치인이나 가수, 배우 등 유명 인사들은 일일이 따로 허락받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공인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얼굴이 언제 어디에서건 노출되는 것을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고 법적으로도 특별한 거부 의사나 사유가 없는 한 쓰는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공인 아닌 지인들의 사진을 친하다고 동의 없이 사용하면 자칫 법적인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동의를 구하고 사용해야 한다. 다만 공적인 행사에서 보도용 등으로 공개적으로 함께 찍은 사진은 그 사진을 함께 찍을 때 이미 자신의 초상권을 사용해도 좋다는 묵시적 동의가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동의 없이 사용해도 무방하다. 전체적으로 자서전은 30~50개, 많으면 60개쯤의 꼭지를 가지고 제작된다. 두 꼭지쯤에 한 장의 사진 정도면 비교적 비율이 좋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보다 많으면 식상하고 그보다 적으면 양념의 맛이 떨어진다. 물론 최대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꼭지에 그에 합당한 사진을 선택해야 한다. 자서전을 내고자 하는 사람은 미리 책 속에 들어갈 사진을 잘 정리해두고 적절히 본문에 녹일 준비를 하자. 그래야 문장과 사진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자서전을 낼 수 있다.
코로나19로 국내 여행이 각광을 받고, 황리단길이 국내 여행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며 많은 관광객들이 경주로 몰렸다. 이에 관광시즌 경주는 숙소를 구하기 힘들어 신규 숙박업소들이 생겨났다. 불과 1~2년 만에 숙박업소, 특히 게스트하우스들이 많이 생겨났다. 경주읍성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 ‘인히어(in HERE)’ 또한 모텔로 운영되다 올 3월 새로이 오픈을 했다. 나만의 분위기를 연출한 인테리어의 게스트하우스를 통해 관광객들과의 소통을 즐긴다는 김대식(30) 씨를 만나 게스트하우스 ‘인히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학생 때부터 가졌던 창업 김대식 씨는 대학생 시절부터 창업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교 창업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고, 각종 창업 관련 경진대회에서 수상을 한 적도 있다고. “대학생 때부터 창업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이것저것 다양한 콘텐츠로 나만의 가게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기에 대학생 때 창업 동아리 활동을 했었죠. 창업과 관련한 경진대회에서도 나름 수상한 적도 있어요” 대식 씨가 창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여러 콘텐츠를 가지고 자신만의 가게를 운영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성격상 창업이 더 맞을 거란 판단에서다. “성격이 창업에 맞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해 사람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았거든요. 물론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며, 부업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다양한 콘텐츠로 창업을 하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손님들과의 소통이 즐거운 게스트하우스 어머니 조선희 씨와 함께 ‘인히어’를 운영하며, 이곳을 나만의 분위기로 꾸몄다는 김대식 씨는 게스트하우스의 가장 큰 재미를 손님들과의 소통이라고 전했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연령, 직업을 가진 손님들과 얘기를 하면 시야가 넓어짐은 물론 세상사는 얘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SNS와 미디어의 발달로 전국 구석구석의 얘기를 빠르고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듣는 이야기는 또 다른 재미라고 생각해요. 어디서 왔는지, 내일은 어디로 놀러가는지 손님들과 게스트하우스에 마련된 홀에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세상일들을 간접 경험하는 느낌인거죠. 그러다보니 시야도 넓어지는 것 같아요” 숙박업, 부업으로도 추천 현재 대식 씨는 직장 생활과 게스트하우스 운영을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 어머니는 게스트하우스의 관리를 주로 담당하고 예약과 홍보 등 온라인 부분은 그가 담당하고 있다. ‘인히어’는 방이 많은 편인 게스트하우스로 혼자 운영하기는 어렵지만, 소규모일 경우 혼자 부업으로 선택하기 좋다는 얘기를 전했다. “제 주변에도 2~3개 방을 가지고 숙박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소규모로 운영하는 분들은 방마다 콘셉트가 다 있죠. 그래서 방 분위기를 보고 예약하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만약 직장 생활을 하면서 부업으로 숙박업을 할 생각이 있다면 2~3개 정도 운영한다면 알맞을 거라고 생각해요” 확실한 준비가 필요한 창업 게스트하우스 ‘인히어’의 김대식 씨는 창업을 준비하는 예비창업자들에게 확실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창업의 확신이 생길 때까지 준비하는 분야에서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창업은 확신이 설 때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해요. 프랜차이즈가 아닌 치킨이나 카페 창업을 예로 든다면 장소나 메뉴, 인테리어 등 자신만의 차별화된 가게가 필요한 거죠. 이를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실패가 없으니깐요” “만약 창업에 실패해 직장 생활을 다시 하더라도 그 경험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가게라도 세금처리나 관리, 인력 운영 등 경영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나마 배우게 되니깐요. 청년일 때 한 번쯤 창업에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거 같아요”
지난 2021년 한 해 동안 경주지역 내에서 발생한 총 범죄 발생건수 6815건 중 검거 5251건으로, 검거율은 77.1%였다. 총 범죄 중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등 5대 범죄 발생건수는 1619건으로 전체 범죄의 23.8%를 차지했다. 또 5대 범죄 검거율은 80.9%로, 총범죄 검거율보다 3.8%p 높았다. 본지가 창간한 해인 1989년. 즉, 33년 전 경주지역 범죄발생과 관련한 기사를 토대로 지역 범죄현황을 짚어보니 그 당시와 지난해의 총 범죄 건수는 엇비슷했다. 하지만 검거율은 33년 전보다 현저히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 1989년 12월 29일자 제3호 신문 1면에는 ‘범죄발생 갈수록 심각’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경주지역 범죄현황을 다뤘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89년 총 범죄 건수는 6710건, 검거율은 무려 94%로 기록돼있다. ‘1989년 한 해 동안 경주지역에서의 범죄발생 건수는 지난해 6248건보다 무려 462건 늘어난 6710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주경찰서에 따르면 강력범의 경우 살인이 3건, 강도 14건, 강간 28건, 방화가 3건으로 밝혀졌으며, 폭력이 865건, 절도 464건, 도박 136거느 마약이 9건 등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절도범의 경우 지난해보다 171건이 감소한데 비해 강도·폭력·도박범은 상대적으로 늘어나 오늘날의 사회현상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한편 경찰의 검거건수는 지난해 검거율 87%의 5433건보다 7% 증가한 6284건(검거율 94%)으로 나타났는데, 강도사건의 경우 발생 14건인데 비해 검거가 15건으로 검거율이 107% 상향되었으나, 자서(경주경찰서 관할) 강도사건 7건은 현재 미제사건으로 계속 수사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부터 범죄현황과 관련한 기사는 1997년 7월 31일자(제336호) 신문에서 경주경찰서가 민생사범 검거율 91.5%로 경찰청장 표창을 수상하면서 다시 언급된다. 1997년 1월부터 6월까지 상반기 동안 발생한 전체 범죄 4495건 중 4114건, 5409명을 검거했다는 소식이다. 검거자 중 347명을 구속하고 나머지는 불구속 조치했으며, 그해 상반기 기준 검거율은 91.5%를 기록했다는 것. 또 당시 신문에서는 경주경찰서가 1996년 하반기부터 1997년 봄까지 울산 등 외지 범죄꾼들에 의한 각종 강력사건이 빈발해 4월 8일부터 외동읍 모화리 경주·울산 경계지점의 7번 국도상과 내남면 용장리 35번 도로상에 임시검문소를 설치해 통과차량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거 보도를 통해 당시 시대상이 읽혀진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 울산·경주, 포항·경주 등 경계지점에 검문소가 설치돼 지나는 차량을 일일이 검문하는 등 살벌(?)한 풍경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기사다. -범죄가 가장 많았던 해는 2013년···1만1456건 경주지역에서 총 범죄 건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언제였을까? 본지 보도와 경주경찰서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3년으로 총 범죄가 1만1456건 발생했다. 2011년 9783건에서 2012년엔 1만1047건으로 1만건을 넘겼고, 2013년 최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본지에서는 2013년 1월 15일자 신문(1071호)에서 ‘2012년도 한 해 동안 경주지역에서 발생한 범죄가 전반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머리글로 기사를 실었다. 당시 기사는 ‘2012년도 경주에서 발생한 범죄는 1만1047건으로 2011년 9783건에 비해 12.9%가 증가했다. 하지만 검거율은 2010년 79.7%에서 2011년 75%로 감소했고 2012년에는 74.7%에 머물렀다. 5대 범죄 역시 발생률은 증가하고 검거율은 낮아졌다. 5대 범죄 중 살인, 강도의 범죄는 줄었지만 강간, 절도, 폭력 범죄가 증가했다. 이중 강간은 2011년 84건에서 2012년 94건으로 11.9% 증가해 지역에서 5대 범죄 중 가장 높은 범죄 증가율을 나타냈다. 5대 범죄 검거율은 2011년 54%에서 2012년 54.5%로 조금 증가했지만 이 역시 경북도 평균에는 미치지 못했다. 특히 절도 검거율은 27.9%로 지역 범죄 중 가장 낮은 검거율을 보였다. 경주경찰서 관계자는 “아직 2012년도 사건이 종결되지 않아 검거율이 낮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사건이 종결되면 검거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2012년 경주지역 전체 범죄건수가 증가하면서 검거율이 낮아졌고, 또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등 5대 범죄도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 기사였다. 실제 총 범죄 건수가 증가하던 2011년부터 2013년까지의 검거율은 각각 75.0%, 74.7%, 74.5%로 떨어지던 시기였다. 2021년을 기준으로 최근 5년간 경주지역 총 범죄건수와 검거율은 △2017년 8313건, 86.3% △2018년 8140건, 81.2% △2019년 9290건, 75.8% △2020년 8012건, 73.4% △2021년 6815건, 77.1%로 나타났다. 범죄건수와 검거율이 하향 추세다. 이중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등 5대 범죄 건수는 △2017년 2211건, 84.2% △2018년 2009건, 80.0% △2019년 2373건, 79.3% △2020년 2088건, 74.4% △2021년 2001건, 80.9%를 기록했다. 5대 범죄 중 중대범죄에 해당하는 살인과 강도 사건은 최근 5년 간 100%의 검거율로 단 한 건의 사건도 놓치지 않았다. -사이버범죄 폭증 ‘검거율 저하’ 원인 검거율이 떨어지는데는 최근 들어 보이스피싱 등과 같은 사이버범죄 발생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 주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사이버범죄의 경주지역 내 발생건수는 2014년 456건, 2015년 477건, 2016년 48건 등으로 500건 이하였지만 2017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2017년 551건으로 500건을 넘기기 시작해 2018년 787건, 2019년 1887건, 2020년 1620건, 2021년 1059건으로 매년 범죄 발생건수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늘어나는 사이버 범죄의 검거율은 크게 낮아졌다. 2017년 77.7%, 2018년엔 81.9%로 비교적 높은 검거율을 보였다. 하지만 2019년부터 사이버범죄가 폭증하면서 검거율은 떨어졌다. 2019년 39.0%, 2020년 36.5%로 저조한 검거율을 기록했다. 2021년엔 검거율이 55.2%로 상승했지만, 여전히 낮은 검거율로 전체 범죄 검거율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이스피싱, 스미싱 등 날로 지능화되고 있는 범죄 수법과 피해규모도 커지고 있어 사이버범죄에 대한 우려는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전국의 범죄 검거율도 4년 연속 하락하며 80%를 밑돈 것으로 집계됐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범죄 발생건수 142만9826건 중 경찰이 검거한 사건은 113만6665건으로 검거율은 79.5%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에 비해 1.7%p 하락한 수치다. 또 경찰 범죄 검거율은 4년째 하락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4년간 검거율은 2017년 85%, 2018년 84%, 2019년 83.3%, 2020년 81.2% 등으로 줄곧 내리막이다. 경주지역 범죄 검거율은 2017년 86.3%, 2018년 81.2%, 2019년 75.8%, 2020년 73.4%로 내리막을 걷다 2021년 77.1%로 반짝 상승했다. 범죄를 단절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줄일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는 고민해야 한다. 범죄를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검거율을 높이는 것이다.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하나의 사회문화로 만들어 범죄예방에 효과적인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범죄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높이는 사회문화 역시 높여나가야 한다. 이 같은 사회문화가 바탕이 된다면 범죄예방의 협조자로서 시민들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고, 비로소 모든 범죄의 예방 효과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자기소개서(이하 자소서)를 쓸 시기가 찾아왔다. 취업과 입시 또 다른 도전들에서 자소는 개인을 누군가에게 특정지어 설명하는 첫 관문이자 실험대다. 대필 작가로 활동하다 보면 자소서 첨삭에 대한 문의를 자주 받는다. 마침 SNS상에는 자소서 첨삭 고수로 활동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 동영상이나 문서들도 자주 올라온다. 글 좀 쓴다는 분들이라면 솔깃해지는 제안일 것이다. 그러나 자소서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영역이다. 나는 대학에서 마케팅 강의를 듣기도 하고 광고기획사를 하면서 다양한 홍보관련 작업들을 해왔다. 광고란 것이 기업이나 개인을 부각시키고 알리는 작업인데 이런 업무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효과적인 개인 마케팅에 대해 노하우가 생긴다. 어쩌면 내가 대필작가로 활동하게 된 이유도 광고기획사 업무를 한 것이 인연이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 나 자신 오랜 기간 기업을 경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만만치 않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검토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호에서는 자소서 바로 쓰는 방법을 잠깐 이야기해 본다. 지금은 자소서 관련 지침서나 작성요령에 대해 많은 정보들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어서 무턱대고 자소서 쓰는 사람이 덜 있겠지만 예전에는 자소서 볼 때 가장 자주, 가장 첫 머리에 등장하는 내용이 있었다. “저는 19OO년 어디에서 아버지 OOO씨와 어머니 OOO씨의 몇 째 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무슨무슨 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엄격하지만 자상하셨고 어머니는 다정하고 온화하게 저를 보살펴...” 나는 이런 글귀가 나오면 더 이상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취업은 전쟁이다. 자소서는 그 전쟁터의 총이다. 최대한 전략과 전술을 총동원해도 모자랄 판에 그 첫머리를 자기 이야기는 쏙 빼고 아버지 어머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볼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자소서만 보면 대한민국 아버지는 죄다 엄하고 어머니는 다 자상하다. 자기 이야기 할 시간도 부족한데 왜 이런 엉뚱한 시작으로 소중한 기회를 날리는가?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문구가 저는 어느 학교로 무슨 과를 나왔고 하는 학력이나 어디에서 일했고 어디에서 근무했고 하는 경력이다. 이런 것도 역시 밀쳐 버렸다. 자소서와 함께 반드시 첨부되는 것이 이력서다. 이력서에 학력과 경력이 멀쩡히 붙어 있는데도 굳이 어느 대학 무슨 과를 나왔고 어디에서 일했다고 다시 쓴 것은 자소서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본 것이다. 요컨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동반자를 뽑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개성 있는 자기소개서와 일에 대한 적합성, 그 일에 느끼는 비전 등을 기준으로 자소서를 살펴보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자소서에서 반드시 들어가야 할 요소들이 있다. 이것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목표한 학교(학과)나 기업에 대한 분명한 신념 자신이 왜 이 학교나 학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내가 왜 이 기업에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보여야 한다. 지원한 학과나 기업의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미리 충분한 자료조사가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기업의 경우 사훈이나 신문이나 방송에 나온 CEO의 기사 등에 대해 정확히 알고 그와 대비한 자신의 신념을 쓰는 것도 요령이다. 2. 목표를 위한 노력이나 적합성 목표한 학과나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실질적을 공부를 하고 노력을 했는지가 분명히 강조되어야 한다. 자격증이나 각종 교육 이수, 해당분야에 대해 공부한 책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3. 학과 혹은 시장에 대한 전문성 2번과 유사한 서술이 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학과의 현황이나 업계의 현황, 비전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면 이 자체로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주의할 것은 섣불리 이런 내용을 썼다가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칫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틀리거나 엉뚱한 것을 쓰면 그 자체로 끝이다. 분명한 통계나 전망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기술한다면 우호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4. 관계에 대한 가치관 특히 기업들은 직원 한 사람을 잘못 뽑아 해당 부서나 팀의 분위기를 망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어떤 화합의지와 실천력이 있는지를 알리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위에서 가족 관계에 대해 먼저 언급하지 말라고 했는데 만약 형제나 자매가 많은 집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 이런 점을 장점으로 부각시켜 말하는 것은 좋다. 기본적으로 위의 요소들을 제대로 갖춘 자소서라면 어느 곳에서건 환영받을 것이다. 이 내용들을 기본으로 얼마나 요령 있게 쓰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말이다. 최근에는 학교에 내는 자소서나 기업에 내는 자소서들이 일정한 형식을 갖춘 경우도 많다. 자소서를 엉터리로 쓰는 사람이 많다 보니 학교건 기업이건 자신들이 원하는 질문을 해놓고 그에 맞춰서 답변해 달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합성을 판단하는데 다른 것은 다 볼 필요 없이 해당 질의에 대한 답변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학교나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답변도 위의 네 가지다. 신념과 노력과정, 학과(일)에 대한 전문성, 관계에 대한 가치관은 학교건 기업이건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 기업의 정형화된 자소서 형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란이 있는데 그것이 장점과 단점을 쓰라는 것이다. 장점이라고 하면 당연히 자소서에 들어갈 만한 항목이지만 굳이 단점까지 써라고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이것을 곧이곧대로 해석해 정말 단점을 쓰는 바보는 없을 테지만 노파심에서 이 질문의 함정에 대해 말해 둔다. 단점을 쓰라고 하는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해석하면 장점은 장점으로 쓰면 되고 단점으로는 감추어진 장점을 하나 더 써라는 말이다. 장점과 단점은 동전의 양면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장점이 사교적이다 치자. 이 사교성은 좋은 측면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고 인맥을 넓히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지치게 하고 관계로 인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쓰게 만든다. 단점으로 우유부단한 면이 있다고 치자.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신중하다는 말이다. 사교적인 게 장점이자 단점이고 우유부단이 단점이자 장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소서에 쓸 때 장점으로는 그냥 자신이 생각하는 장점을 쓰고 단점으로는 자신의 다른 장점 하나를 끌어다가 이것은 부각시키면서 그 이면에 숨겨진 어려움을 슬쩍 드러내 주면 된다. 만약 사교성이 좋은 장점과 탐구심이 많은 장점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장점 란에는 사교성이 좋은 것을 쓰고 단점으로는 ‘어떤 사안에 빠지면 그것을 제대로 알 때까지 멈추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때때로 자신을 괴롭게 만든다’는 식으로 쓰면 된다. 만약 인사담당자라면 장점으로는 사교성을 볼 것이고 또 하나의 장점으로 탐구심이 강하고 끈기 있는 사람이라 판단할 것이다. 이게 바로 질문의 함정을 뛰어넘는 방법이다. 대필 작가의 입장에서 자소서를 봐달라는 의뢰를 받으면 위의 사항들을 기반으로 자소서를 바로 잡아 준다. 물론 이때도 반드시 대화나 통화를 통해 좀 더 깊은 이야기들 나누어보고 고쳐주거나 써준다. 아무쪼록 이번 호에서 알려준 자소서 쓰기를 바탕으로 올해 진학과 취업에서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란다. 자소서 첨삭이 필요한 분들은 이메일로 의뢰하면 된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1998년에 개관한 전통적인 우리나라 옛모습을 재현한 시설이다. 남산이라고 불리는 목멱산 아래 약 8000㎡의 대지에 서울시 민속자료 한옥 다섯 채를 이전하고 가옥에 걸맞은 가구들을 배치해 선조들의 삶을 재조명한 곳이다. 입구 왼쪽에는 연못과 정자를 짓고 남산에 분포하는 수종으로 정원을 꾸몄다. 1989년 토지매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한옥마을 조성에 들어간 서울시는 1994년 11월 29일, 서울정도 600년을 맞아 기념 타임캡슐을 제작, 서울의 도시 모습, 시민 생활과 사회문화를 대표하는 각종 문물 600점을 수장하고 이를 400년 후인 2394년 11월 29일 공개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단순한 시설로 그치지 않고 철에 맞춘 축제와 다양한 공연, 전시가 이뤄지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2020년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 행사들이 취소됐지만 올해만 해도 1월에 남산골 온라운 설축제 ‘호기로운 설’을 시작으로 5월 6일부터 7월 8일까지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남산골 한옥 콘서트 ‘춘월가’가 열렸고 어린이날 공연, 6월과 10월 두 차례의 전통혼례잔치, 한가위 축제 등이 세시축제가 펼쳐졌다. 각종 온라인 체험이 6차례 진행되었고 4월에 남산골신진작가아트랩공모전을 시작으로 모두 6차례 전시행사도 치러졌다. 현재는 지난 11월 22일부터 12월 25일까지 ‘한옥담닮 / 한옥 기다림을 닮다’라는 주제로 유리공예작가 김헌철, 도자공예 강민성, 한국화 임보영 작가가 한옥마을 전역에서 전시를 진행 중이다. 그런 한편 이웃에 건축된 남산국악당에는 수준 높은 국악공연이 연중 열려 우리 전통 음악의 아름다움과 미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한옥마을은 비록 재현한 곳이긴 하지만 전통적인 한국인 상류층 주거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면에서 특히 외국인들의 방문이 잦은 곳이고 서울 시민에게나 남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반드시 들러볼 만한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런 장소가 단순히 빈집을 둘러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함께 즐기는 축제와 공연, 격조 높은 전시와 어울려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빈집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특히 한옥은 사람이 부대끼지 않으면 급격히 생명을 잃는 가옥이다. 많은 전통 한옥을 보유하고 있는 경주가 눈여겨볼 만한 곳이다.
올해는 지방자치제도의 새로운 미래를 시작한 원년이다. 전면 개정된 지방자치법이 올해 1월 13일부터 시행되면서 주민참여 확대, 지방의회 역량과 책임 강화, 행정 효율 증진 등을 꾀하고 있다. 지난 호 지방자치법의 역사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주민참여 확대를 위해 개정법이 담고 있는 주요 내용을 살펴봤다. -편집자주 전면 개정된 지방자치법이 지난 1월 13일 본격 시행되면서 가장 큰 변화로 지방의회 권한 확대와 지자체의 정책 결정·집행 과정에서 주민 참여 확대를 꼽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개정 지방자치법은 목적 조항에 주민의 지방자치행정 참여권을 명시했다. 개정법에 주민이 지자체 조례의 제·개정 또는 폐지를 청구할 수 있는 ‘주민조례발안제’와 ‘주민 감사청구’ 관련 조항은 제도의 활성화와 실효성 증진을 꾀하고 있다. 주민조례발안제 주민조례발안제는 지방자치법과 분리해 규정해야 할 중요 내용이 다수 있어 지방자치법에 별도 법인 ‘주민조례발안에 관한 법률(주민조례발안법)’에 제정해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법은 주민의 조례 제정과 개정, 폐지 청구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해 주민의 직접 참여를 보장하고, 지방자치행정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제고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법률에는 주민조례 청구권자와 청구 요건, 청구인명부 작성 및 제출, 심사 절차 등을 담고 있다. 주민조례발안법에 따르면 18세 이상 주민 누구나 지방의회에 조례 제정과 개정, 폐지할 수 있다. 청구 요건은 경주시의 경우 인구수 10만 이상 50만 미만 시로, 청구권자 총수의 70분의 1 이상 연대 서명으로 조례 제·개정 또는 폐지를 청구할 있다. 청구권자 총수는 전년도 12월 31일 현재의 주민등록표 및 외국인등록표에 따라 산정하도록 했다. 또 지자체장이 매년 1월 10일까지 산정한 청구권자 총수를 공표하도록 했다. 연대 서명을 받은 주민청구조례안은 선거인명부 확인 등의 절차를 거쳐 법률에 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경주시의회는 주민조례 청구를 수리하고, 30일 이내 시의회 의장 명의로 발의해야 한다. 이어 발의된 주민청구조례안은 지방의회가 수리된 날로부터 1년 이내 의결해야 한다. 다만, 법률에는 필요한 경우 본회의 의결로 1년 이내의 범위에서 한 차례만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또 시의회는 심사 안건으로 부쳐진 주민청구조례안을 의결하기 전 대표자를 참석시켜 청구 취지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주민조례청구 제외 대상도 규정하고 있다. △법령을 위반하는 사항 △지방세·사용료·수수료·부담금 부과·징수 또는 감면하는 사항 △행정기구를 설치하거나 변경하는 사항 △공공시설의 설치를 반대하는 사항 등에 대해서는 주민조례청구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주민조례발안법에 맞춰 경주시의회는 지난해 12월 27일 ‘경주시의회 주민조례발안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올해 1월 13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주민감사청구 기준연령 만18세로 완화 주민의 지방자치행정 참여 확대를 위한 또 다른 조항은 주민감사청구 요건 완화에 있다. 주민조례발안제와 마찬가지로 주민감사청구권자의 기준 연령을 만 19세에서 만18세로 낮췄다. 주민감사청구는 지방자치단체와 자치단체장의 권한에 속하는 사무 처리가 법령에 위반되거나 공익을 현저히 해친다고 인정되면 감사를 청구할 수 있는 제도다. 경주시의 경우 지난 2017년 1월 5일 시행된 ‘경주시 주민감사청구에 관한 조례’에서 만 19세 이상 주민의 수는 200명 이상으로 규정했었다. 그러나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에 따라 지난해 12월 31일 조례를 개정해 18세 이상, 주민 수는 150명 이상으로 연령과 청구인수를 완화했다. 또 주민감사청구는 경주시와 경주시장의 권한에 속하는 사무에 대해 경북도지사에게 감사를 청구하게 된다. 시·도의 경우는 주무부 장관에게 감사를 청구할 수 있다. 다만, 지방자치법에는 감사청구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항도 규정했다. △수사나 재판에 관여하게 되는 사항 △개인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는 사항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다른 기관에서 감사했거나 감사 중인 사항 등은 주민감사청구 대상에서 제외된다. 접수·수리된 주민감사청구는 검토를 거쳐 감사청구를 수리한 날로부터 60일 이내 감사를 마쳐야 한다. 그리고 감사 결과를 청구인 대표자와 지자체장에게 서면으로 알리고 공표하도록 했다. 규칙 제·개정, 폐지에 관한 의견제출도 가능 지방자치단체장이 제정할 수 있는 규칙에 대해 제·개정, 폐지에 관한 의견을 시민이 제출할 수 있게 된 점도 개정법 시행으로 달라진 부분이다. 지방자치법 개정에 따라 경주시는 지난해 12월 24일 ‘경주시 규칙의 제정과 개정·폐지 의견 제출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조례에는 ‘규칙의 제정, 개정 또는 폐지와 관련된 의견을 제출한 경우 지방자치행정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높이고 주민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이를 최대한 존중해 처리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 주민의 의견이 제출된 날부터 30일 이내 검토 결과를 통보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다만, △주민의 권리·의무와 직접 관련 없는 사항 △법령이나 조례를 위반하는 사항 △법령이나 조례에서 위임한 범위를 벗어나는 사항 등은 의견으로 제출할 수 없도록 했다. 중앙지방협력회의 제도화로 지역 균형발전 모색 중앙·지방 간 협력관계 정립 부분도 개정법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다. 제2의 국무회의 격인 중앙지방협력회의를 설치해 지방정부가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구를 제도화했다. 중앙지방협력회의는 지방자치 발전 및 지역 균형발전에 관련된 중요 정책을 심의한다. 수도권 일극 체제에 대응하기 위한 특별지방자치단체 설치·운영에 관한 근거도 구체화했다. 2개 이상의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으로 특정한 목적을 위해 광역적으로 사무를 처리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특별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지방자치단체의 국제교류·협력에 관한 사항도 명확히 했다. 개정법에는 지방자치단체가 국가의 외교·통상 정책과 배치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국제교류·협력, 통상·투자유치를 위해 외국의 지방자치단체, 민간기관, 국제기구와 협력을 추진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 경주시의 경우 지난 2016년 9월 9일부터 시행한 ‘경주시 국제화 촉진 및 국제교류협력 증진에 관한 조례’를 지방자치법에 맞춰 지난해 12월 24일 일부 개정했다. 조례는 국제교류협력 사업의 범위, 지원, 위탁을 비롯해 자매도시 및 우호도시 선정·운영 국제협력자문관 위촉·운영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지자체장의 직 인수위원회 관련 규정 구체화 개정법에는 기존에 없었던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직 인수위원회’와 관련한 규정도 구체화했다. 이에 맞춰 경주시는 지난해 12월 31일 ‘경주시장의 직 인수위원회 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그동안 시장직 인수위원회는 별도 조례 없이 법령에 의거, 운영했으나 개정된 지방자치법에서 인수위 운영을 조례로 정하도록 위임한 것. 이전까지는 법적 근거가 없어 인수위원회 구성과 지원에 한계가 있어왔다. 개정법과 조례에 따르면 경주시장 직 업무 인수와 관련, 당선인이 결정된 때부터 시장의 직 인수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15명(시·군·구) 이내의 위원을 둘 수 있도록 규정했다. 또 인수위는 지방자치단체장 임기 시작일 이후 20일 이내까지 존속한다고 했다. 이밖에 인수위원회 구성·운영 및 인력·예산 등을 지원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주민참여권 확대와 자치입법권 보장 강화 등으로 자치분권 도약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는 반면 그 실효성에는 아직 의문표가 붙는다. 경주의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30년 만에 지방자치법이 개정되고 올해부터 시행됐지만 시민들이 체감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는 것 같다”면서 “코로나19 장기화와 ‘3고(고물가·고금리·고환율) 현상’으로 어려운 시기일수록 행정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조례안 발의 등을 통해 발전방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주민들이 직접 조례안을 낼 수 있는 수준까지 가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 진정한 지방자치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법 개정에 만족할 일이 아니라 경주시, 경주시의회, 시민들의 관심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슬로베니아 국경 시골 식당에서 8월 9일 오스트리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가는 도중, 슬로베니아 국경쪽을 지날 때입니다. 애들이 배가 고프다고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 일찍 출발한다고 아침을 설친 때문이며, 점심때가 가까워가고 간식꺼리가 변변치 않기도 했습니다. 본 도로에서 사이길로 빠져 어느 시골 마을에 들렀어요. 시골 구경도 하고 마을 식당에서 점심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슬로베니아(slovenia)는 발칸 반도 북서쪽 끝자락에 있으며, 우리나라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에, 인구 200만명쯤 됩니다. 사방으로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에 둘러 있으며, 나라 전체 모양이 닭의 형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유럽의 치킨’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시골시장 옆에 있는 조촐한 식당에 들렀어요. 희끗한 머리에 텁텁한 식당 주인이 동양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 ‘사우스 코리아’라고 하니, ‘어디 있는 나라냐?’고 재차 묻습니다, 큰 손주가 지도를 내보이며, 우리나라를 가르켜 주어서야, ‘와! 멀리서 왔네’라고 하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한국인이 자기 식당에 온 것 감사한 일 한 가족이 유럽여행을 한다고 하니 부러운 듯 여기면서, 우선 배고파하는 애들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드는지 부지런히 요리를 만듭니다. 여섯 명의 식탁이 푸짐합니다. 맛도 있거니와 양도 많아요. 아무래도 식당 아저씨의 후덕한 선심이 많이 보태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여행인데 ‘제대로 먹고 다니겠어?’하는 표정으로 아저씨는 음식 접시를 부지런히 애들 앞으로 갖다 나릅니다. 음식값보다 애들 생각을 먼저 한 것입니다. 푸짐하게 잘 먹었으나, 은근히 걱정이 앞섰어요. 얼마나 나올까? 그러나 결제 시에 주문 가격 외에 추가분은 애들을 위한 서비스로 더 받지 않았습니다.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한국인이 우리 식당에 온 것만이라도 감사한 일인데, 오히려 자기가 더 고맙다고 합니다. 크로아티아로 가는 본 도로로 나와 신나게 달렸어요, ‘세상에는 착하고 고마운 사람들도 많이 있구나, 그래서 세상은 좋게 잘 돌아가는 구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식후 잠든 평온한 두 손주의 얼굴을 보며, 그 식당 주인의 후한 대접에 또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스위스(베른)의 어느 카 정비센터 직원의 서비스 (1)레만호 시옹성 주차장에서 차량유리창 파손 7월 25일 레만호에 있는 시옹성 주차장에서, 집시족으로부터 차량 파손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후속 조치는 경찰의 현지출동에 이어 해결이 되었지만 유리파손은 내가 알아서 교체를 해야했습니다. 여행 지속은 물론, 차내 보안상 빨리 수리하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차 속의 짐이나 취사도구, 기타 식자재 등의 보안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베른시 카 정비회사를 찾아 갔지만 사이즈가 맞는 유리가 없어 다른 업체에 연락을 해보더니, 이틀 후에야 수급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창문없이 다니기로하고 그냥 돌아오려는데, 카센터 아저씨가 “그때까지 유리 대용으로 두꺼운 비닐 가림막을 설치해 주겠다”고 조언을 합니다. (2)차유리 대신에 뚜꺼운 비닐로 커버 두꺼운 비닐로 임시 갈아 끼우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간단한 일이니 돈은 안 받겠다고 해요. 2일 후에야 유리창을 새로 끼었지만, 베른시내 몇 군데 업체를 알아보며 신경을 써준 것이 고마웠습니다. 복구비용도 차를 빌린 폴투칼 렌트회사에서, 이곳 스위스 정비업체로 결제를 한다고 합니다. 면식 없는 타국에서, 유리 교체와 비용부담의 편의를 도와준, 그 스위스 카 서비스 센터 직원의 수고와 친절에 대하여 생각날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사천왕사의 정확한 폐사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매월당 김시습의 시집 등을 근거로 조선 건국 직후인 1400년대 초반까지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경역 안쪽까지 민가가 들어서고 곳곳에 잡풀이 무성했던 사천왕사 터가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1910년대 경주-울산 간 철도 개설에 따른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시작이었다. 이 조사를 통해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꼽히는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조각과 다량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며 사천왕사 터가 확인됐으나, 동해남부선 철도가 절터를 가로질러 놓이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1922년엔 조선총독부가 ‘고적발굴조사사업’의 일환으로 경주의 여러 사찰과 함께 다시 조사를 벌였고, 1928년과 1929년엔 동경제국대 교수였던 후지시마 가이지로에 의해 절터 규모와 범위, 가람의 배치, 주요 유물의 정밀 실측 및 측량 조사가 이뤄졌다. 반면, 광복 이후 60여년 동안은 사지 주변에 대한 간단한 조사 외에 제대로 된 발굴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사천왕사가 전모를 드러낸 것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진행한 정밀발굴을 통해서다. 모두 7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해 금당지와 목탑지, 강당지, 부속건물지, 단랑의 회랑지와 익랑지, 중문지 등의 유구가 확인됐다. 출토 유물로는 각종 기와 조각과 금동불상, 비편, 이수편 등이 있다. 특히,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당의 위치 및 크기의 변천, 익랑의 존재, 목탑 기단부 면석에 배치된 녹유신장상의 위치를 확인한 것은 주요 성과였다. 또, 중문 남쪽 귀부 중앙으로 석교가 발견돼 고대건축연구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신라 대표예술가 양지와 녹유신장상 녹유신장상은 국내 고대 조각품 가운데 첫손에 꼽는 걸작 중 하나다. 녹색 유약을 입힌 벽돌판(녹유전) 위에 만든 이 조각상은 꿈틀거리듯 생생한 조형감이 일품이다. 갑옷 차림에 화살, 칼 등을 든 수호신들이 악귀를 짓밟고 불국토를 지키는 자태가 생동감 넘치게 다가온다. 신라 지배층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불안해하는 민심을 하나로 모아 외적을 누르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듯도 하다. 사천왕사 터에서 녹유신장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15년이었다. 1915년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서탑터에서 녹유전 조각을 발견했으나, 당시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어 다시 땅에 묻었다. 이후 1918년과 1922년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발견된 유물조각으로 연구가 이어졌다. 부서진 파편에 불과했지만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 뛰어난 조형성,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며 당시부터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 뛰어난 조각품은 ‘양지’(良志)라는 이름의 스님이 만들었다. 그는 서예가 김생, 화가 솔거, 음악가 백결과 함께 신라를 대표할 예술가로 꼽힐 만한 뛰어난 조각가였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 때 활동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녹유신장상의 제작자라는 점에서 사천왕사가 창건된 문무왕 때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양지 스님은 여러 가지 기예에 통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사천왕사의 녹유신장상뿐만 아니라 영묘사 장육존상과 천왕상, 법림사 주불과 좌우금강신, 석장사 탑삼천불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글씨도 잘 써 영묘사와 법림사 등 큰 절의 현판을 직접 썼다고 전한다. 그러나 작품 활동 외에 전하는 바가 적어 양지 스님의 출신과 이력 등을 두고 각종 설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 그의 전기가 전한다는 점에서 신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조각상 형식, 제작 방식 등이 고대 인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에 근거해 서역에서 온 외국인일 것이란 추정도 제기된다. 또 신라에 와당 제작술 등을 전한 백제 승려일 것이란 견해도 있다. 녹유신장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복원작업은 첫 발견 이후 90년이 지난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연구소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200여점의 파편을 수습했다. 그 결과 수십 년 풀리지 않았던 이 조각상의 실체가 드러났다. 국내 미술사학계에선 사천왕사지에서 나온 녹유신장상이 절 들머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천왕(四天王, 수미산 중턱 사왕천에서 불법을 지키는 네 명의 수호신)의 일종이란 설과, 사천왕의 부하신 팔부중(八部衆,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 상이라는 설이 팽팽히 맞서왔다. 그런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를 통해 동·서 목탑의 기단구조와 녹유신장상의 봉안모습이 확인되며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 드러나게 됐고, 지금껏 녹유신장상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녹유신장상은 사천왕상 같은 네 가지 상도, 팔부중의 여덟 신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사천왕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세 가지 상으로만 복원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머리에 우아한 보관을 쓴 A상, 화려한 투구를 쓴 채 화살을 든 정면의 B상, 옆이 말린 투구를 쓴 채 칼 들고 반가부좌 자세로 앉은 C상 등 세 종류가 전부였다. 녹유신장상으로 사천왕사지 금당 앞 왼쪽과 오른쪽에 세워진 목탑 2기의 기단 벽면을 장식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동탑 발굴에서는 이들 녹유신장상 4기가 탑 기단부에 온전히 박힌 모습으로 출토됐고, 상세히 몰랐던 C상의 전모도 알 수 있게 됐다. 발굴 조각들을 모아보니 A상과 B상은 각 6구씩, C상은 9구나 복원이 가능했다. 기단 벽면 장식 방식은 녹유신장상 세 종류를 한 묶음으로 한 면마다 2번씩 되풀이해 붙인 형태였다. 다시 말해 탑 기단부 한 면에 6개의 녹유신장상이 A-B-C, A-B-C 식으로 배치된 모양이었던 것이다. 추론해보면, 탑 기단부 4면에 붙은 신장상은 24개로, 동탑과 서탑 2기를 장식하기 위해 모두 48점이 제작됐다는 결론이다. 녹유신장상은 각각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세 종류의 틀을 만들어 찍어내 배치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B형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A형은 오른쪽에,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C형은 왼쪽에 두어 신장들이 목탑 주변 사주를 경계하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이런 이유로 녹유신장상은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壁塼)으로 불리기도 한다. 녹유신장상은 ‘녹색 유약을 입힌 장군신상’이라는 뜻이고, 녹유신장벽전은 ‘녹색 유약을 입힌 장군신이 새겨진 벽면 장식용 흙벽돌’이란 의미다. 전자는 예술작품이란 점에, 후자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이름이다. -외교적 술수가 낳은 망덕사 사천왕사지에서 7번 국도 건너 남산 쪽으로 눈을 돌리면 절터 하나가 보인다. 사천왕사지와 함께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망덕사 터다. 논으로 둘러싸인 절터엔 보물 제69호인 망덕사지 당간지주와 몇몇 건물지와 초석이 남아 있다. 망덕사(望德寺)란 이름을 풀어보면 ‘(당 황제의) 덕을 우러러보는 절’이라는 의미다. 자칫 대국에 굽실거리는 힘없는 나라 백성을 연상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망덕사 창건 경위다. 문무왕이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낭산 자락에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명랑법사를 시켜 문두루비법을 시행하게 하자 신라로 쳐들어오던 당나라 군사들은 두 차례나 바다를 건너다 몰살한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은 옥에 갇혀있던 신라 한림랑 박문준을 불러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는 대체 무슨 비법을 쓰기에, 당에서 두 번이나 대군을 보냈는데도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는가?” 박문준이 답했다. “저희는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 지나 본국의 사정은 잘 모르나,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했기 에, 그 은덕을 갚기 위해 낭산 남쪽에 천왕사라는 절을 지어 황제의 장수를 비는 법석(法席)을 오래 열고 있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예부시랑 악붕귀를 사신으로 보내 그 절을 살펴보게 했다. 왕은 사천왕사를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여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 절이 바로 망덕사다. 그러나 당의 사신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사천왕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사신은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며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신라 사람들은 뇌물로 금 1천 냥을 주며 그를 달랬고, 그 사신은 본국으로 돌아가 박문준이 말한 대로라고 전했다. 그 뒤 당나라 사신의 말에 따라 절의 이름을 망덕사로 불렀다. 망덕사는 이처럼 나당전쟁 당시 당의 사찰단을 속이기 위해 세운 절이다. ‘당나라에 대한 보여주기식 충성’을 통한 신라의 ‘실리외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천왕사와 망덕사에서 주목할 점은, 부처의 힘으로 당의 군사를 물리치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신라인들은 본래 지은 사천왕사를 당나라 사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황제의 안녕과 수복을 빈다는 거짓 명목을 만들어 그 옆에 새 절을 지었다. 또 사신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사천왕사의 존재를 비밀에 부쳤는데, 이처럼 호국불교의 상징물을 지키려 한 신라인들의 노력과 의지가 사천왕사 터와 망덕사 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의지의 중심엔 문무왕이 있었다. 김운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