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랑에다 여뀌를 찧어 넣자 거짓말 같이 버들붕어들이 둥둥 떠오르곤 했다/ 모래무지 같이 모래 범벅인 아이들이 모래톱에 엎드려 종종 물새알을 품었다/ 모래무지를 닮아 투명한 아이들이 물새들과 한 둥우리에서 한여름을 지내곤 했다/ 물새들을 따라 남쪽으로 날아간 아이들은 여름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새 별자리로 돌아왔다/ 여름 내내 물새자리에서 날아오는 새들은 모래톱이 없어, 우리들 가슴속 개울가에다 둥우리를 치고 알을 낳았다.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이 아니라 비닐속에 든 각 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위에 밥알을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가족 간의 따스한 인간애가 잔잔히 전해 온다. 신발이 주는 삶의 무게가 뭔가? 새삼스럽게 생각케 해준다. “내게로 다가오는 작은 신발의 미소!’ 상큼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하다. 인생의 후반기, 성장한 자녀들이 떠나버린 텅 빈 신발장, 아내와 나, 우두커니 둘의 신발만 남은 그 신발장에서 시인은 어느 날 햇살처럼 반짝 빛나는 쬐끄만 신발 한켤레를 발견 한다. 엊 저녁 집에 온 두살배기 외손자 신발! 앙징스런 표정으로 꿈을 꾸는 한 켤레의 신발이 희망의 배처럼 다가온다. 이 작은 신발도 다가올 미래의 세파와 싸우며 긴 항해를 떠나야 하리라. 지나간 세월과 함께 가는 신발, 신발은 견디며 살아야하는 인생의 또 다른 은유다. 생의 후반기에 들어 선 시인과 생의 출발점에 선 외손자의 신발 한짝의 대비가 재밌다. 삶이 아무리 각박해져도 화목한 가족간의 끈이 있는한 생은 엄청난 축복이다. 외손자의 작은 신발 한켤레! 생의 후반기에 만나는 행복 충전의 충전소다
손바닥만한 시다. 아프다. 짧은 시지만 이야기는 길다. 빈익빈 부익부 얘기다. 안타까운 일상속의 짠한 얘기다. 피부에 와 닿는 리얼리티가 있다. 박의상의 시는 재치속의 깊이다. 이 시의 묘미는 6행부터다. 강남역 소호정 칼국수 값은 9500원, 거기서 20분 거리의 사랑의 교회 앞 명동 칼국수값은 5000원, 그런데 외환은행뒤 잔치국수 값은 3000원이다. 아주 저렴하다. 주인이 겨우, 300원 가격을 올렸다. 칼국수가 3300원이면 아주 싸다. 그런데 손님들이 뚝 끊긴다. 이런 낭패가? 결국 잔치국수집은 문을 닫는다. 폐업해서 “미안합니다!” 방이 나붙는다. 누가 누구에게 미안한 것일까? 가슴이 짠해 온다. 시에 사용된 환유(인접 사물을 이용한 비유)는 시의 테크닉일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은 테크닉을 압도 한다. “미안 합니다!” 메시지속에 삶의 애환이 담겼다. 먼 곳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싱그런 초여름날 농촌 풍경이 평화롭다. 초록 스크랩이다. 들판엔 “탈탈거리는 이앙기” 소리, 이젠 지났지만, 논물위로 개구리를 낚아채는 재두루미 한 쌍은 요즘도 보인다. 초여름 들판이 초록 기쁨으로 출렁거린다. 시 읽는 마음에도 푸르름이 번져 온다. 시인의 섬세한 눈길이 손에 잡힌다. 이앙을 마친 구부정한 허리의 팽씨 노인과 뭉게구름 일가를 대비시킨 점과 의인화된 뭉게구름이 재밌다. 구름을 “소요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니! 이 또한 발견이다. 정처없는 구름이 하늘에서 어린 모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오뉴월 초록 기쁨이 다 내 차지라는 듯, 맑고 투명하다. 오늘의 시골 집 앞에 펼쳐진 초록 스케치 한 장이다
이 시의 핵심 이미지는 마지막 연에 있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에 있다. 얼룩이 ‘지나가고’ 당신도 ‘지나가고’ 마침내 모든 것은 지나간다. 애틋한 사랑도 삶의 상처도 마침내는 그렇게 지나가는 것, 그렇다면 삶에서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이 순간’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인가? 시인은 지난 세월의 아픈 흔적들을 생각한다. 그것은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힌 것”이다. 사랑하던 한때. 그 얼룩은 슬픔의 자국이다. 아픈 시간의 흔적들, 삶이 짜 올린 무늬들이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세월은 사랑을 만들고, 상처를 만들고 죽음과 그리움을 만들면서 얼룩져 간다. 얼룩은 내가 살았다는 삶의 흔적이다. 내가 살아온 오늘의 문명이다. 시인은 검버섯 얼룩에서 삶의 또 다른 의미를 떠올리고 있다
아침은 언제나 싱그럽다. 출렁이는 한 양동이의 물처럼. 시인은 말한다, 아침은 “아직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고. 밤까지 가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고. 술 마실 시간도, 누군가를 사랑할 시간도, 여행할 시간도 아직은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새가 앉으면 출렁거리는 나무들, 나무들도 새들을 기다렸나 보다. 새가 왔다고 기뻐서 몸을 출렁이는 나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시인은 지금 새와 나무를 보고 있다. 나무에 앉아서 똥도 싸고 열매도 쪼는 아침나절의 새들을 바라보고 있다. 저녁때의 새가 아니다. 자 봐라, 새들도 나무와 어떻게 대화하고 사랑하는가를 보라. 시인은 지금 새와 나와 나무와의 관계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번 출렁했다” 언어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출렁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아직 살아서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아침은 오늘도 명랑하고 또 달콤하다
“예쁘다 예뻐!” 떠드는 아이들 소리에 마당의 벚나무가 깜짝 놀라서! 손에서 꽃잎을 놓아 버린다. 보송보송한 강아지 흰 털 위에 점, 점, 점 내려앉는 연분홍 맨발들! 동심의 이미지가 눈부시다. 어둡던 마음도 금방 환해진다. 떨어진 벚꽃잎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얼룩이 아니다. 어쩌면 천사의 날개 같은 순결한 느낌이 드는 무엇이다. 더없이 순수해지는 동화 같은 이야기. 세상의 모든 새끼는 얼마나 귀여운가. 호랑이 새끼도, 쥐새끼도, 심지어 고슴도치 새끼까지도. 모든 새끼는 사랑스럽다. 꿈꾸는 희망이다. 어린 꼬마들, 보송보송 털 강아지, 어린 벚꽃들, 세 박자가 쿵작작, 잘도 어울린다.
“아, 지금은 먼 옛날/하얀 달밤/밤꽃내/개구리 소리”… 당신도 기억하리라. 풋풋해서 더 간절해지는 유월의 흰 달밤을. 시인은 지금 먼 옛날 보석 같은 첫 사랑, 사라져간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달콤한 분위기의 시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다. 지울 수 없는 상처 같은 첫 사랑이기 때문에 그 풍경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사랑하는 마음 한쪽에 찬란한 무지개처럼 걸렸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간 짧은 사랑. 잊을 수 없는 그 여자의 눈빛이 이슬처럼 순수해서 손도 잡지 못했던 그 밤. 그 수줍음, 유월의 달밤은 그렇게 지천으로 깔리는 개구리 소리와 함께 사라져갔다. 아무도 삶의 의미나 존재의 의의를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알 수 없는 시간만이 우리들의 삶을 할퀴고 지나간다. 시간을 쪼개어 유월의 시골 밤길을 걸어보라. 혼자라도 좋다. 폭포 같은 개구리 소리가 피곤한 당신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줄 것이다. 아, 그 첫사랑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시인은 섬에 들어간다. 2박 3일간. 그러나 섬을 구경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섬은 외로운 시인 자신의 은유이기 때문이리라. 섬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깊고 쓸쓸하다. 시인은 어쩌면 나그네다. 무엇이 될 수도 없고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그네의 정서다. 갈매기는 저 자신을 구경하지 않는다. 통통배도 수평선도 마찬가지다. 갈매기와 통통배는 갈매기와 통통배로 살아갈 뿐 다른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그 무엇도 다른 그 무엇을 구경하지 않는다” 사물은 오직 사물일 뿐이다. 시인에게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순결한 상태를 의미한다. 얼핏 김수영의 시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으로 시작하는 <절망>이라는 시와 유사한 분위기지만, 김수영과 문인수는 서로 다르다
좋은 시를 만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장식적인 수사도 보이지 않는, 낮술 한잔 마시고 실토하는 내용이 전부인 단순한 시다. 그러나 시인의 생각은 날카롭다. 나도 가끔 낮술을 마신다. 살면서 세상 근심을 잊는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대명천지에 낮술 먹은 놈이 나밖에 없는 것 같아/큰 소리로 대답했다/그래 낮술 묵었다 이눔아!” 시속 화자가 자신의 일탈(낮술?)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 부분에서 독자는 아, 직설적이긴 하지만 솔직해서 재밌다라는 공감의 미소를 짓는다. 행간이 절제되어 있고 일상어의 운용이 빼어나다. 시는 생략과 침묵과 낯설게 하기를 통해 독자들을 긴장시킨다. 오월의 바람에 싱그러운 잎사귀들, 살랑거리는 것 같다
모래성은 우리 인생의 은유적 표현이다. “해질녘이면 돌아가야지” 시속 화자의 이 독백은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한 말이 아니다. 언젠가는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언젠가 맞이할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삶을 가치 있게 마감할 것인가?를 성찰하게 하는 연민의 감정이 녹아있는 시행이다. 모래성을 쌓는 일, 개미처럼 부지런히 산다는 일, 그게 뭐 좋다고 진종일 있었니? 라는 어머니의 질문에, 아이는 “그래도 재밌잖아요”라고 답한다. 그렇다. 고통 속이지만 견딜만한 재미 속의 삶, 그 눈부신 시간이 우리 삶이 아닌가. “찌개를 끓이는 연탄불 아래서 모래투성이 손을 씻는 일”이 삶 아닌가. 인생은 결코 부질없고 헛된 꿈이 아니다. 순간순간이 장엄한 삶이다. 개미처럼 쌓았던 모래성도 쓸쓸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삶의 진실이다. 김성춘(시인)
라일락엔 라일락의 향기가 있고 장미엔 장미의 향기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그 사람만의 분위기, 그 사람만의 색깔과 향기가 있지요. 이 시의 소재가 된 피천득 선생은 ‘인연’이란 감동적인 수필로 우리의 가슴에 살아있는 저명한 수필가 겸 시인이지요. 그는 타계했지만 생존시 그의 삶은 언제나 단아한 그의 수필 세계처럼 조용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오산학교 김소월 진달래꽃 축제 때 객석에 그림자처럼 앉아있는 노 시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노 시인, 그림자처럼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돌아가는 노 수필가 피천득!” 노 시인의 행동이 꽃향기처럼 은은합니다. 시의 화자는 노 시인의 행동을 보면서 겸손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소박하지만 격조 높은 한 예술가의 향기를 만납니다. 싱그런 오월의 신록 같은
최근에 아름다운 시집 한 권을 받았다. 동국대 경주 캠퍼스 이사가(이임수 교수) 시인의 시집, <구름이나 쳐다보는 하느님>이다. 이 시인은 ‘향가와 서라벌 기행’이란 책도 낸 향가 전문 교수다. 섬세하고 애정이 어린 눈길로 시인은 주변의 사물들에 말을 걸고 있다. 시편들에는 생의 연륜이 곰삭은듯한 인간적 체취가 소박하게 담겨있다. “사랑하는 것도 때로는 짐”이 된다고 인식하며 흐르는 구름을 본다. 벤치의 젊은 연인들을 보며 “그래,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지” 쓸쓸한 위로도 건넨다. 누가 ‘사랑은 움직인다’고 했던가, 희생하고 절제하는 게 사랑이라고 했던가, 시집 후기를 보니 “시고, 산문이고, 인생이고 어디 구분이 있으리. 사는 것이 시고 하느님이고 존재 자체”라고, 남은 시간엔 좀 더 말을 아끼고 싶다는 시인이여. 오늘도 구름과 풀꽃과 자신과 대화를 하고 계시는가?
밤사이 풀잎에 맺혔다, 해 비치면 스르르 사라지는 영롱한 이슬의 존재. 한 줌도 안 되는 이슬의 삶, ‘이슬’의 진정한 의미는 뭘까요? 삶의 진실한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슬의 하루는 허덕이던” 내 평생! 이라는 깨달음의 진술이 전율처럼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익숙한듯한 시행 속에서 낯선 의미를 느끼게 합니다. 행간의 침묵이 응축된 의미를 던져 줍니다. “이제는 알겠지/ 그래도 이슬을 찾아 나선 내 사연”이라는 화자의 독백은 쓸쓸하지만 견디며 살아야 하는 삶의 가치를 말해줍니다. “이슬이 보일 때부터 시작해/ 이슬이 보일 때까지 살았다” 이슬의 존재감이 한 인간의 존재감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시인의 이슬은 그만의 이슬이면서 또한 우리 모두의 이슬입니다. 우리는 이슬과의 싸움을 오늘도 진행하고 있으니까요
시속에 똥이 등장하지만 비속하지 않다. 똥 누는 장면을 크로키(묘사) 하고 있지만, 시인의 시선은 깊고 인간적이다. 穢(더러울 예)土는 거칠고 더러운 현세를 상징한다. “어린 남매가 나란히 앉아 똥을 누고” 어린 누나가 동생의 밑을 닦아준다. 마치 어머니처럼, 가슴이 따스해진다. 어린 남매의 인정 어린 풍경이 잔잔하게 애조를 띠고 있다 “먼저 일을 마친 동생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쳐든다/제 일도 못다 본 누나가/제 일은 미뤄놓고 동생의 밑을 닦아 준다” 꽃잎 같은 손으로. 시인은 예토에서도 피어나는 꽃을 본다. 인도의 풍경이나 한국의 풍경이나 어린 남매의 정은 똑같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독자들의 숨통을 틔워준다
‘곡옥’으로 은유된 잠든 노숙자의 표현이 절묘하지 않은가. 어머니 뱃속의 태아를 닮은 곡옥,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상징이다. 시인은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웅크리고 잠든 한 노숙자를 발견한다. 삶이 불안한 노숙자한테서 오히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캐낸다. 박물관 유리장 속의 곡옥보다 더 아름다운 건, 방금 출토된 진흙 속에 있는 곡옥이다. “방금 출토된 것 같은 펄럭이는 유리문’의 신선한 비유를 보라. “흐린 빛에도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뒤척일 때마다 비췻빛 새어나오는” 노숙자의 꿈. 시인은 노숙자의 불안한 삶에 따뜻한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어깨를 두드릴까/손을 내밀어도/천 년쯤 떨어져 있는 것처럼 닿지 않았다” 존재는 어떤 존재이든 그 살아있음 때문에 존귀하다
경주에 살면서도 나는 아직 모량역에 가보지 못했다. 소녀의 이름처럼 이쁜 모량역. 시인은 모량역은 종일 네모 반듯하다고 한다. 왼 종일 가을볕만 만판 쏟아지는 시골역사, 하루에 한 두사람 떠나거나 돌아 오는 시골역, 기차소리보다 더 큰 아가리의 적막감이 살고있는 모량역. “더도 덜도 아니고 딱, 한되”되는, 모량역이 단단하단다. 재밌다. A4 용지처럼 네모 반듯하다는 역 묘사도 그렇고, 한되처럼 단단하다는 비유도 참신하다. 문인수의 시는 통상적인 서정시와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그에게는 삶과 자연속에서 극한의 미를 찾아내려는 시선이 보인다. 시속에서 독자들은 세속의 삶을 묘사하는 시인의 뛰어난 문체를 만난다. 근처에 박목월 시인의 생가가 있는 모량역. 1940년대 어느 봄 날 저녁, 서울서 내려오는 조지훈 시인과 건천의 목월 시인이 처음으로 만났다는 전설적인 추억에 담긴 아름다운 모량역. 한적한 역의 묘사가 한폭 수채화다
어제는 불국사 뒤뜰 요사채 부근의 홍매화들이 가슴 두근거리며 벙글고 있더군요. 보문단지 호숫가 벚나무 가지들도 뿌리쯤에선가 물 펌프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가지 끝들이 뽀얀 안개를 일으키며 가슴 두근거리고 있더군요. 안갯속에 연둣빛 입술들, 꼼지락대는 게 보였어요. 살아 있다는 것은 두근거린다는 것이지요, 기대와 설렘 속에 심장이 펄펄펄 뛰고 있다는 증거지요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 젖힌 게지요. 봄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죽은 가지(삭정이 가슴)엔 꽃이 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랑도 피어나지 않습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얼마나 황홀합니까. 무엇이 식어가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까요? 봄의 가슴을 한번 꼬집어 보세요. “두근거려보니 알겠다!” 독백 같은 이 한마디 말, 가슴에 와 닿지요? 오늘, 부푸는 봄의 뽀오얀 길 앞에서 봄과 함께 가슴 두근거려 보십시오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과 사유가 보이는 시 입니다. 나비에게 보낸 석줄의 편지가 궁금하지요? ‘봄이다’ 라고 적자마자 언어가 날개를 답니다. 언어가 현실의 들판을 넘어서 초현실(몽상)의 들판으로 내달립니다.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에 꽃이 피어 납니다. 나비가 못 속에서 튀어나오고 하늘을 담은 유리창으로 날개 달린 물고기들이 헤엄쳐 옵니다. 바람결에 물비린내도 훅 끼칩니다. 봄 풍경이 마치 샤갈의 한 폭 아름다운 그림 같죠? 눈이 시리도록 환한 봄날. 시인은 엉뚱하게 한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죽음에게 보낸 석줄의 편지, “죽었나?” 가 “죽었다”로 고쳐져 있는 편지를. 물음표를 검게 지운 자리에 아, 누군가가 슬프게 떠난 봄 날. “물음표를 검게 지운 그 자리에” 텅 빈 세상같은 그 죽음 하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