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윤 엄상공 선정비는 엄 정구가 부민을 위해 추진하고자 했던 정책의 미완성을 아쉬워하며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선정비다. 비의 전면에는 ‘府尹嚴相公善政碑 公諱 鼎耈 字重叔 歲戊戌夏 四月 下車 己亥冬十月 以病 辭歸 不終厥施 借哉 銘日 公來何暮 公去何速 不忘千載 有日片石 己亥十二月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를 국역하면 ‘공의 휘는 정구이며 자는 중숙이다. 무술년(1658) 4월에 부임했고, 기해년(1659) 10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귀가했다. 그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명하여 이르되, 공의 오심은 어찌 이리 늦으시며 공의 가심은 어찌 이리 빠르십니까? 천 년이 지나도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여기 작은 비석을 세운다’로 해석된다. 이 비문은 엄 정구의 삶과 가치관이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을 되새길 수 있다. 한편 ‘문화유적총람(1977)’에서는 그가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들을 정확하게 판결해 방면해 준 사실을 언급하며, 부윤의 성명이 미상으로 기록됐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비문 아래의 의미와 일치하지 않아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부윤 이능섭 불망비는 봉산 지역의 청정한 환경과 백성들의 고난을 해결해 준 공적에 대한 감사와 그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비석 전면에는 ‘府尹李相公能燮永世不忘碑 封山童濯 弊瘋民療 唯公尹茲 哀我多艱 矯革屬任 有誰容奸 永世不談 誓此石顏 同治十年日 南道立’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이를 국역하면 ‘봉산의 재목은 씻은 듯 깨끗하나 백성들의 폐단은 더욱 깊어졌다. 오직 공께서 부임하시어 우리의 어려움을 깊이 아파하셨다. 속임수의 잘못을 바로잡으니 누가 감히 농간을 일삼을 수 있으랴. 영원히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이 비석에 글을 새겨 전하노라. 동치 10년(1871) 어느 날, 남도에서 세우다’로 해석된다. 이 비석의 원소재지는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에 위치해 있었다. 봉산은 국가에 필요한 재목을 조성하기 위해 채벌을 금지한 산으로, 관리 책임자를 명시해 봉산이라 명명됐다. 봉산으로 지정되면 정해진 양의 재목을 국가에 진공해야 했으나, 해마다 국가에서 요구하는 물량이 증가하면서 봉산에서의 재목 생산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어려움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간에서의 속임수와 부정이 극성을 부리게 됐다. 원래 지정된 수량이 증가한 이유는 아전들의 농간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부윤 이능섭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백성들의 고난을 경감시켜 주었기에 남도(양남면) 주민들이 이 비석을 세우게 됐다.
영장 김영세의 불망비는 그의 군사에 대한 사랑과 위로의 덕목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비석 전면에는 ‘營將金公泳永世不忘碑 撫軍愛卒 德洽恩足 追思歌頌 有一片石 癸丑十二月 日’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이를 국역하면 ‘군사를 사랑하며 위로하니 은혜와 덕이 풍성하도다. 더욱 그리워 칭송하기위해 작은 비석을 세운다. 계축년 12월 어느 날 세우다’로 해석된다. 이 비석은 원소재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계축년이 구체적으로 어떤 해인지 명확하지 않다. 비석의 상단부(비개)에는 쌍용이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서로 엉켜 있는 채 조각돼 있다. 쌍용은 전통적으로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며, 왕권이나 국가의 수호를 나타내고, 여의주는 신성한 힘이나 권위를 나타낸다. 비석의 내용과 비개에 조각된 쌍용과 여의주는 김영세의 덕목을 더욱 부각시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부윤 김광묵의 공덕비는 외동읍 북토리 순지못둑에 위치해있었다. 이 비석은 부윤 김광묵이 외동 북토리 및 일곱 개 마을에 대해 환곡 등 세금을 감면해 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운 선정비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公之嚴刑政綜事□ 乃一境之均化 至於全□ 田地□□□□稅 爲我七里民 粉骨難忘之 惠也 □立片碍 以報公萬一爾 乾隆四十九年甲辰八月日 栗村谷立’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를 국역하면 ‘공은 형벌과 정치를 엄격히 시행하고 사업을 잘 경영하니, 곧 한 고을이 두루 감화하였다. 그리고 경작에 따른 세금을 공정히 부과하는 데 있어 우리 일곱 개 마을 백성을 위해 주시니, 각골난망의 은혜이다. 여기 작은 비석을 세워 공의 은덕에 만분지일이라도 갚으려 한다. 건륭 49년 갑진년(1784) 8월 어느 날 율촌곡 주민이 세우다’로 해석된다. 이와 더불어 목비 김부윤공덕비가 정조 10년(1786)에 세워졌으며, 현재 경북문화재자료로 기림사에 소장돼 있다. 이는 김광묵이 기림사를 중창한 공이 지대했음을 보여주며, 더불어 그가 지역 사회에 기여한 헌신적인 관료이자 정치적 역량을 갖춘 인물임을 보여준다.
영장류휘지영세불망비는 경주읍성의 서문 앞에 위치한 성서리(현재 성건동)에서 발견됐다. 정조 22년(1798)에 제작된 ‘집경전구기도’에서는 이 지역이 경주 읍성을 수호하는 군사와 장교가 주둔하던 곳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營將柳公徽之永世不忘碑 肇刱籌樓 普愛管鎭 吾心未忘 石面斯鐫 戊午三月 日’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를 국역하면 ‘영장 류휘지 영세불망비, 주루를 창건하고 관진을 널리 사랑하였다. 우리 마음에 잊을 수 없어 이 비문에 이를 새겨 기린다. 무오년 3월 어느 날 세우다’로 해석된다. 이 비석은 영장 류휘지가 주루를 창건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성서리에 새로운 병영을 세웠음을 의미한다. 이는 당시 군사력 강화와 지역 방어에 기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의 리더십과 인품, 그리고 지역 사회와 군사 간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한 달 사이에 류춘호의 비석이 두 기가 세워졌다. 고종 19년(1893) 6월에는 [1]편에 소개된 철비 ‘영장류공춘호영세불망비’가 세워져 그의 덕을 기렸고, 7월에는 그의 청렴함과 지방 군사에 대한 세심한 보살핌을 추정할 수 있는 석비 ‘영장류공춘호청덕거사비(營將柳公春浩德去思碑)’가 세워졌다. 비석의 전면에는 ‘營將柳公春浩清德去思碑 惠懷屏翰操潔水玉 撫卒惠普 愛民恩篤 一規清價愼 萬姓歌頌 片珉不磷 氷寓釿誦’, 후면에는 ‘光緒十九年癸巳七月日立 都監李基元 色吏 金潤軾 光武七年癸卯十二月下澣 移改 立 重侈都監朴文植, 色吏 斐興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국역하면 ‘영장으로서 베푸신 은혜 지조는 빙옥처럼 맑았네. 군사를 어루만지며 널리 사랑했고 백성을 사랑하며 두터이 보살폈네. 한 법도를 청렴하게 행하자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였네. 여기 비석은 인멸되지 않아 영원히 우러러 흠모할 것일세’ ‘광서 19년 계사(1893) 7월 어느 날 세우다. 도감:이기원, 색리:김윤식, 광무 7년 계묘(1903) 12월 하순에 옮겨 세우다. 중수도감:박문식, 색리:배흥술’이다. 두 기의 비석은 본래 동일한 장소에 나란히 건립된 것은 아니었다. 1977년에 발간된 ‘문화유적총람’에 따르면, 철비는 성건동 392-1번지에 위치했으나, 석비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석비는 1960년대 후반 소태고개 정상에 옮겨졌다. 도감을 맡았던 이기원의 증손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도감을 맡았던 비석이 성건동 민가 인근에 방치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60년대 후반에 석비를 소달구지에 실어 소태고개 정상에 이건했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류춘호를 기리기 위한 비석과 그 보존을 위한 후손들의 노력과 의지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최근 황성공원 내 호림정에서 선정비와 불망비, 효자비 등 총 29기의 비석이 경주읍성으로 옮겨졌다. 이 비석들은 경주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경주신문에선 29기 비석을 소개하며, 우리 지역의 귀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조명하고자 한다. 또한 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 나아가 이 비석들이 매력적인 관광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기대해본다. -편집자 주 경주읍성에 위치한 비석 29기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비석은 ‘營將柳公春浩永世不忘碑(영장류공춘호영세불망비)’라고 새겨진 선정비다. 이는 경주에서 유일한 철비(鐵碑)로, 경주시 성건동 392-1에 있던 철비를 향도감 권달운의 후손들에 의해 효현동 소태고개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비석의 전면에는 ‘歛此大惠 雄鎭一摩 裘帶多暇 氷蘖自持 口碑濫境 頂薌載路 勒諸翁仲 宴出衆籲’, 후면에는 ‘崇禎 紀元 五 癸巳 六月 日 立 鄕都監 權達運 監官 金時憲’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국역하면 ‘조세 거둠에 큰 은혜를 베푸심은 웅진의 한 영장이셨네. 군정의 바쁘신 여가에도 빙옥의 마음을 가지셨다. 칭송은 온 고을에 자자하여 향기로운 덕택 수레에 가득하였네 여기 비석을 세운 것은 많은 사람들의 성원으로 이루어졌네’ ‘숭정기원후 다섯 번째 계사년(1893) 6월 어느날 세우다. 향도감:권달운, 감관:김시헌’이다. 비문에서는 영장 류춘호가 부민 또는 군사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선정을 베풀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가 군포 등 징수 시 많은 혜택을 주었고, 청백하게 지방군사를 보살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 철비의 상태 보존을 위해 비각 설치나 바람과 습기가 덜한 곳으로의 이전을 제안하고 있다. 이를 통해 경주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더욱 잘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