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金虎,1534~1592) 장군은 증조부 김이권(金以權), 조부 김원좌(金元佐)의 가계를 이루고, 경주부 남쪽 월남(月南) 식혜동(識慧洞)에서 부친 김숙린(金叔麟)과 분성김씨 김한보(金漢輔)의 따님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몸집이 크고 호걸의 기상을 지녔으며,
경주 출신의 노석(老石) 이능섭(李能燮,1812~1871)은 회재 이언적의 11세손으로 무첨당 옛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엄숙하고, 몸가짐이 굳세고 순수하였으며, 무리의 아이들과 놀 때 걸음걸이는 망동하지 않고, 책을 읽을 때는 암기를 잘하였으며, 찾아
이견대(利見臺)는 아들 신문왕이 부친 문무왕의 유지에 따라 장사지낸 뒤 추모하여 대를 쌓고 바라보았는데, 큰 용이 바다 가운데에 나타났다. 즉 용이 나타난 것을 본 장소가 이견대이다. 『고려사』 속악(俗樂) 이견대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왕 부자가 오랫동안 서로 헤
정자(程子)는 “옛날에는 25가(家)에 숙(熟)이 있고, 당(黨)에 상(庠)이 있고, 술(術)에 서(序)가 있어, 대체로 들어가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8살에 소학에 들어가고, 15살에 그 준수한 사람을 뽑아 대학에 들어가도록 하고, 가르칠 수 없는 사람은 돌아가
경주는 신라의 옛 도읍으로 남쪽에는 남천(南川), 서쪽에는 서천(西川), 북쪽에는 북천(北川)이 흐르고, 물의 형세가 고을을 빙 두르면서 아래로 흘러가고 있어 삼면이 모두 물이다. 남천은 외동읍 신계마을에서 발원해 형산강으로 흐르는 원동천(院洞川)으로 언제부터 남천으로
삼최(三崔)는 신라 말기와 후삼국시대에 문신으로 이름을 떨쳤던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후백제를 도운 최승우(崔承祐), 고려의 최언위(崔彦撝,868~944) 등 최씨 3인을 말한다. 이들 모두가 6두품으로 골품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하였고, 빈공과에 급제
경주에서 토함산 터널을 지나 장항리에서 옛 도로를 타고 감포방향으로 가다보면 좌측으로 기림사와 골굴사(骨窟寺) 진입표지가 나타난다. 조금 더 가다보면 골굴사가 나타나는데 일주문을 통해 들어서면 맨 안쪽 큰 바위 정상부에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그 아래로 조성된 석굴이 드
조선의 선비들은 주자의 학문과 삶을 따르는 것을 숭모해서 산수의 경치가 빼어난 승경에 은거지를 마련하고 학문과 수양에 힘썼다. 구곡원림의 경영과 구곡시가의 창작은 경북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을 비롯한 동창천(東創川) 일대의 빼어난 승경의 구곡을 경영한 소요당(逍遙堂)
경주 금오산에 기거한 명나라 장수 편갈송은 귀화인으로 『경주의 조선스토리』에도 생소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관련 명나라 귀화인으로 지리에 밝은 두사충(杜師忠), 천만리(千萬里) 등이 유명하고, 경주 관련해서 편갈송(片碣頌) 장군이 있으며, 그의 제단(祭壇)이 금오산에
경주의 문무대왕면은 본래 신라 때 악지현(惡支縣), 약장현(約章縣)으로 불리었고, 6부 가운데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에 속하였다. 고려 때는 가덕부(加德部), 조선 때는 동해면으로 불리었고, 현재는 24개리로 개편되었으며, 그 가운데 앞산의 형상이 물고기를 닮은 벽촌마
KTX 경주역이 있는 건천읍 화천리에 신도시 높은 아파트와 대조적으로 조선의 역사가 서린 화강서당(花岡書堂)이 자리한다. 필자는 우연히 기차역을 지나다 화천1리 마을 길을 내려가는데 큰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화강서당은 옥산전씨 화천문중에서 1993년에 건립한 것으로 무관 파수(巴叟) 전계신(全繼信,1562~1614)을 모신 공간이다. 입구 앞에는 1993년에 세운 ‘화강서당 중건기’와 1977년에 세운 ‘화강사(花岡祠)휴허비’ 비석이 세워져 있고, 유허비는 도로편입으로 2009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계신은 대구 수성구 파잠리(巴岑里;파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 역시 마을 이름을 따서 ‘파잠의 노인’ 즉 ‘파수’로 불리었고, 그의 후손들은 선조의 뜻을 기려 파수정(巴叟亭)을 세우고, 『파수선생실기』를 편찬해 그의 업적을 추모하였다. 증조부 전순손(全順孫), 조부 전익견(全益堅)의 가계를 이루고, 부친은 사재감정 전련(全璉), 모친은 달성배씨(達城裵氏)로 전숭년(全嵩年)·전계량(全繼亮)·전계의(全繼義)·전계례(全繼禮)·전계지(全繼智)·전계신·전계충(全繼忠) 등 자식을 두었다. 그 가운데 전계신은 전천행(全千幸:청도)·전득행(全得幸:화천) 두 아들을 두었고, 그의 후손들이 각각 청도와 경주 화천 등지로 흩어져 세거하였는데, 전득행이 경산에서 경주에 이거하면서 경주 건천읍 화천리 집성촌의 입향조가 되었다. 무관 전계신은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출중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패배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 별시 무과에 합격해 무관이 되었고, 경상도우후·함안군수·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불리한 전세에 경상 좌수영의 동료 권응수(權應銖), 안이명(安以命) 등과 창의를 도모하였고, 청도를 거쳐 팔조령을 넘어가는 길목인 협곡에 매복해 왜놈을 섬멸하였으며,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과 인동·예천·안동·기장·흥해 등 경상도 여러 곳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아쉽게도 161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관직을 수행하다가 안주(安州)의 관서(官署)에서 병으로 죽었다. 전계신은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사후에 청도의 임곡서원(林谷書院)과 경주의 화강사에 제향되었다. 후손들이 화천2리에 화강서당을 지었으나,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다시 화천1리에 파수정을 건립하였으나, 태풍으로 소실된 것을 근대에 와서 문중에서 다시 화강서당을 건립해 현판을 걸었으니, 애틋한 후손의 마음이 전해진다. 전계신의 의병장 기록은 남원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자주 등장한다. 뛰어난 의병 활동으로 2019년 11월에 그를 위한 파동의 무동재(武洞齋) 동쪽에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무동재는 전계신의 육촌 형 전경창(全慶昌,1532~1585)이 학문을 닦던 계동정사(溪東精舍)의 옛터에 지은 재실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경상도 체찰사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추천으로 승려 유정(惟政)을 따라 일본에 회답사(回答使)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국왕 원가강(源家康)의 간절한 화친을 확인하기 위해 1601년·1606년 회답사로 대마도에 두 차례 파견되었다. 선조 25년(1592) 9월에 일본군이 성종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인 선릉(宣陵)과 중종과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靖陵)을 파헤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에 덕천가강(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이 먼저 국서(國書)를 보내고, 임진왜란 때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을 붙잡아 보내야 한다는 조건에 대한 이행 여부를 확인하고, 아울러 일본의 정세를 정탐하기 위하여 전계신 일행이 파견되었다. 이때 귤광련의 아들을 알아보고 위로의 말을 전하였고, 이 일을 경상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조정에 보고해 부산에 귤광련의 사당을 건립하기에 이른다.『난중잡록』에 의하면, 의를 위해 죽은 대마도 작은 두목 귤광련(橘光連:유즈야 야스히로;橘康廣)이 있었다. 귤광련은 1590년 임진왜란 발발 이전부터 누차 왜의 사신이 되어 조선에 내빙(來聘)하였는데, 겐소(玄蘇) 등과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일본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명나라를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라고 조정에 고하였는데도, 그 말을 믿지 않고 결국 왜놈이 쳐들어와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한탄스럽다. 오봉 이호민의 글 가운데 「전계신이 일본 승려 겐소의 편지에 답하다(全繼信答玄蘇書)」가 전한다. 의병창의 그리고 임란 이후 회답사로 큰 역할을 맡은 전계신과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화천마을은 조선의 경주를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창구가 되며, 이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쏠린다.
영양남씨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은 부친 남국형(南國衡)과 모친 여주이씨 이덕함(李德咸)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 이름은 해만(海萬)이었다. 14세에 종조숙부 남국선(南國先)의 양자가 되었고, 훗날 모친상을 탈상한 후에 식솔을 이끌고 경주 명활산(明活山) 아래로 이거해 살며 평생을 학문을 궁구하였다. 풍천임씨 임간세(任榦世)의 따님을 만나 남경채(南景采,1736~1811) 낳고, 서산류씨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의 따님을 만나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 남경화(南景和)를 낳았으니, 아들 역시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가 남긴 『활산집』은 원집(原集) 7권, 부록(附錄) 합 5책으로, 1790년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1723~1801), 1793년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지은 서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문집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집안에서 많은 노력 등이 있었고, 특히 그의 둘째 아들 남경희의 정성이 특출하였으며, 차남 남경희가 「어록(語錄)」을, 장남 남경채가 「행장」을 지어 부친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이계 홍양호는 1760년 7월부터 1762년 6월까지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며 학교의 부흥과 문화발굴에 지대한 공을 들인 인물이다. 그가 부윤으로 있으면서 활산과 교유하였고, 물러난 뒤에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유를 이어갔으며, 남겨진 많은 시작품이 이를 대변한다. 특히 활산의 만사(輓詞)에서 “옛적 내가 이 지방을 다스렸을 때, 민풍을 살피러 옛 수도를 방문했네. … 명활산에 처사가 있으니, 고상한 걸음으로 그윽한 지조를 보존하였네. … 신령의 바람 말은 어디로 돌아갔는가, 남휘정(覽輝亭)을 찾아갔겠지.”라고 그를 추억하였다. 남휘정은 1771년 명활산 덕계에 지은 행랑채의 이름으로, 초봉암(招鳳菴)의 동편에 있었다. 활산은 「초봉암기(招鳳庵記)」에서 “나는 진정 세상을 벗어난 은자(隱者)로, 이곳에 집을 지었으니 진짜 봉황은 쉽게 볼 수 없음을 안다. 사람 가운데 봉황의 자질이 있는 사람 얻기를 구하였기에 그와 비슷한 지명을 따라 편액을 걸고 그들을 불러들였다. 지금 나를 따라 노니는 자는 모두 자주 날갯짓하려 하지만, 날개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아서, 바야흐로 멀고 가까운 거리를 막론하고, 모두가 날개를 나란히 하여 이른다면 그 가운데 무리 중 빼어난 자가 없을 것이라 어찌 알겠는가?”라고, 보기 드문 봉황의 출현과 은둔한 자신의 처지 그리고 봉황처럼 성군의 출현과 태평성대를 기대하는 그의 마음을 글로 대변하였다. 앞서 활산은 풍기군수로 있던 정범조를 찾아가 선조의 글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의 아들 남경희 역시 부친의 유집을 갖고 그에게 서문을 부탁하였으니,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긴요하다. 아들 남경희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의 문인으로, 이만운(李萬運)·손병로(孫秉魯)·송전(宋銓) 등과 교유하였고, 증광시에 합격 그리고 1777년 진사에 올라 승문원박사·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병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으며, 1791년에 사직하고 고향 경주 보문마을리로 돌아온 뒤 스스로 은거하였다. 듣기에 『활산집』이 국역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경주의 선비 활산 선생에 대한 자료를 다시 넘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에 문집의 서문을 소개한다. 활산선생문집 서문 - 이계 홍양호 계림은 신라의 옛 도읍으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천 년 동안 나라를 누렸다. 산천이 빼어나고, 신령이 돌보아 동방의 으뜸이 되었기에 이름난 신하와 큰 선비가 성대하게 배출되었다. 하지만 근세 이래로 차츰차츰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논하는 사람들이 개탄해하였다. 경진년(1760) 내[홍양호]가 동도의 부윤이 되어 학교를 일으키고 선비를 양성하는 일에 뜻을 두었다. 듣기에 진사 남붕로(南鵬路)가 온 고을의 존경을 받고 영남 좌도가 모두 그를 경모하였기에, 이에 예를 갖춰 그를 학교로 초청하였다. 많은 선비의 스승이 되어 문예(文藝)를 강론하고, 경술(經術)을 가르치니, 1년 만에 문장의 재목이 되었다. 배우는 자들이 명활산 아래 덕계(德谿) 가에 나아가 서당을 짓고, 무리를 이뤄 학업을 익혔는데, 내가 그 편액을 쓰고 서문도 지어주었다. 내가 조정으로 돌아오자 남붕로 역시 도백(道伯)의 천거를 받아 침랑(寢郞)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문고 연주하고 책 저술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매번 마음에 드는 시문이 있으면 번번이 천 리나 떨어진 나에게 부쳐 보여주었으며, 나 역시 그렇게 하였으니, 깊이 서로 인정함이 이와 같았다. 군의 둘째 아들 남경희가 젊어서 과거에 급제해 서울로 와서 나를 찾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붕로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만시(輓詩)를 부쳐 그를 애도하였다. 남경희가 이미 탈상을 하고 『활산유고(活山遺稿)』네 권을 가지고 와서는 나에게 서문을 구하였다. 내가 다 읽어보니 … 질박(質樸)하나 속되지 않고, 심오하나 교묘에 빠지지 않았으니 … 말세의 소리가 아니었다. … 계축년(1793) 단오에 풍산인 홍양호 서문을 짓다.
안동권씨 오모재(五慕齋) 권복흥(1555~1592)은 단종의 충신인 죽림 권산해의 후손으로 경주 강동면 단구마을에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사람과 종을 데리고 의병항쟁에 나섰는데, 이미 집안사람 가운데 매와(梅窩) 권사악(權士諤,1556~1612), 매헌(梅軒) 권사민(權士敏,1557~1634), 노헌(魯軒) 권응생(權應生,1571~1647), 구사재(九思齋) 권복시(權復始,1556~1636), 노헌(魯軒) 권응생(權應生,1571~1647) 등 의병에 참여한 의사가 많은 것을 토대로 집안 대대로 임금에 대한 충심이 가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병장 권복흥은 어려서 발에 병을 앓아서 주위 사람들이 불편한 그의 모습에 의병 합류를 만류하였지만, 그는 발이 비록 병들었으나, 마음만은 병들지 않았다며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지를 내세우고, “임금이 위태로움에 처한 상황에 발에 병이 있다고, 어찌 죽음으로 보답하지 않겠는가?”하고는 분연히 뜻을 세웠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1592년 4월 28일 다대포 진영 안에서 순절하였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는 「정려명(旌閭銘)」에서 “경주에 의로운 선비 권복흥은 어려서 다리에 병을 앓아 걸음이 좋지 않았는데, 임진년(1592)의 난리에 떨쳐 일어나 창을 들고 달려가 싸우다 죽었다. 그의 처 류(柳)씨가 달려가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남은 옷으로 초혼(招魂)하여 돌아왔다. 통곡하며 집안사람들에게 ‘지아비가 칼끝에서 죽었는데 그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이는 나의 죄입니다. 어찌 천지 간에 살아가겠습니까. 이제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니, 옷과 신발을 묻은 곳에 합장(合葬)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입을 다물고 음식을 끊어 9일 만에 죽었다. 방백이 그 일을 조정에 알렸고, 남편과 함께 선후로 정려문이 내려졌다”라고 칭송하였다. 이 일로 영조 13년(1737)에 ‘충신의사권복흥지려(忠臣義士權復興之閭)’정표를 내렸고, 사후에 후손과 유림의 공조로 1740년에 단계사(丹溪祠)에 배향되었다. 다시 단계서당으로 개칭하였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1924년에 재건립된다. 게다가 부인 서산류씨는 권복흥이 순절하자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식음을 전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열부였기에, 그 뜻을 기려 정조 18년(1794)에 ‘열녀의사권복흥처서산류씨지문(烈女義士權復興妻瑞山柳氏之門)’정표를 내렸다.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1712~1779)이 「행장」을,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1727~1810)이 「권의사복흥전(權義士復興傳)」을, 면암(俛庵) 이우(李㙖,1739~1810)가 「휴허비」 등을 지었다. 그는 병든 발에도 불구하고, 종과 함께 먼 길을 내달려 다대포에 이르러 적진에서 전사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장자』「덕충부(德充符)」를 보면, 공자가 월형(刖刑)을 받아 발꿈치를 잘린 무지(無趾)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전날 행실을 조심하지 않아서 이러한 우환을 당하였는가?”라고 하자, 무지가 “나는 세상일을 잘 알지 못하고 가벼이 몸을 놀리다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와서는 발보다 더 존귀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온전히 보전하고자 힘씁니다(吾唯不知務而輕用吾身 吾是以亡足 今吾來也 猶有尊足者存焉 吾是以務全之也).”라고 하였다. 존족(尊足)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가리킨다. 발이 불편한 권복흥의 경우를 빗대어 최천익은 ‘존족’으로 그의 천성을 칭송하였고, 나아가 효에 대한 마음도 더불어 부각시켰다. ‘오모(五慕)’는 그의 호로, 『맹자』「만장장구」에서 “대효(大孝)는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하니, 50세까지도 부모를 사모한 자를 나는 대순(大舜)에게서 보았노라”라고 순임금의 효도하는 뜻에서 취하였으니, 그의 효심 가득한 마음가짐을 알만하다. 화산 권 공 행장(花山權公行狀) - 농수 최천익 부친 권평(權平)과 모친 청안이씨 사이에 단구리 집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무리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말수가 적고 입이 무거워 철이 든 어른 같았다. 어려서 학문을 익혀 이미 대의가 있었는데, 매번 옛 성현께서 충과 효에 힘쓰는 구절을 만나면 문득 가슴에 새겨 외웠다. 어려서부터 성장해서까지 스스로 닦고 남을 가르치는 이유가 오로지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를 중히 여겼다. 공은 평소 다리에 병이 있었는데, 모두가 “군대를 따라가기 어렵고, 대오에 끼지도 못하니, 힘써 그 행동을 그만둬라”라고 말하였지만, 공은 개의치 않고 “나의 발은 비록 병들었지만, 여전히 발보다 귀한 것[尊足]이 남아있다. 절름발이로 죽음에 나아가도 달아나 숨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또 나의 검이 있으니 어찌 무리가 대수이겠는가? 마침내 가동 몇 사람을 거느리고, 활과 검을 차고, 말을 타고 날로 나아가 갑절의 길을 내달려 곧장 부산으로 향하였다. 다대포에서 적을 만나 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 힘써 싸우다 전사하였다. 살상의 흔적이 매우 많았고, 검은 부러지고 화살은 다하여, 마침내 적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찰방(察訪)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1494~1553)과 군수(郡守) 귀봉(龜峰) 권덕린(權德麟,1529~1573)을 배향한 운천향현사(雲泉鄕賢祠)는 임자년(壬子年,1732) 5월 경주 강동면 왕신리 운곡[운천]에 창건되었다. 앞서 건천 서면에 제향소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여강이씨와 안동권씨의 관계 그리고 강동에 세거한 안동권씨 집안의 주장에 따르면, 운천향현사는 현재 왕신저수지에서 운곡서원 방향인 동쪽으로 접어들어 굽은 비탈길을 오르는 좌측의 어느 공간으로 일축된다. 운곡서원의 입지와 후손이 세거한 강동면 국당마을 일대를 근거로, 건천에 향현사가 있었다는 주장은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고, ‘운곡’이라는 지명이 ‘운천’과 통용되는 점 등을 미뤄보면 운천향현사는 운곡서원 부근에 자리한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 경상감사는 조현명(趙顯命), 경주부윤은 김시형(金始炯.재임1730.11~1732.10) 그리고 이헌락(李憲洛,1718~1791)의 부친인 이신중(李愼中)이 일을 주도하였지만, 훗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최초에 묘우(廟宇)를 추원사(追遠祠)라 칭하고, 1785년에 묘우를 포함한 ‘운천서원’으로 이름하였다. 강당은 『시경』에서 의미를 취한 영보당(永報堂), 동재는 돈교재(敦敎齋), 서재는 잠심재(潛心齋), 외삼문은 견심문(見心門), 정자는 유연정(悠然亭), 돈대는 반월대(半月坮)라 하였고, 근래에 남쪽 바로 옆에 새롭게 건축하여 운곡서원이라 편액하였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1684~1747)이 상량문을,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1658~1737)이 봉안문을 각각 지었고,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제문에서 “즐거운 저 운천은 신령한 구역에 우뚝하네. 맑디맑은 폭포가 있어 용이 절경을 비호하고, 구름이 신령의 행차를 앞세워 강림하기에 마땅하네. 후손의 정성 실로 다함이 없고, 한목소리로 사당을 세우니 넓고 고요한 곳에 자리하였네(樂彼雲泉 靈區嵽嵲 有湫湛湛 龍護絶境 雲旗風馬 允宜臨況 後昆之誠 實無窮竟 同聲建宮 位置閎靚).”라며 운천의 공간에 대한 영험한 기운과 후손의 정성 등을 언급하였다. 여강이씨 이신중은 회재의 동생 이언괄의 후손 입장에서 향현사 건립에 참여하였고, 전주이씨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1719~1791) 역시 외손의 입장에서 운천서원 강당 영보당 기문을 지어 그 내력을 전하였다. 이헌경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었고, 영정조년간 4대 문장가로 불렸다. 1743년에 진사에 급제해 정언․사서․지평 등을 지냈고, 1763년에 사간원사간이 되어 사헌부집의에 올랐으며, 이후 홍문관수찬, 동부승지, 대사간이 되었다. 단종의 충신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1403~1456)의 후손인 갈산(葛山) 권종락(權宗洛1745~1819)은 이헌경을 스승으로 모셨고, 권종락이 후손에게 효를 진작시키기 위해 이헌경에게 『효경중간발(孝經重刊跋)』을 부탁하였다. “지금 새로이 배우는 후학들은 효경의 면목을 보지 못하니 실로 개탄스럽다. 점필재 선생께서 일찍이 선산부에서 효경을 간행하였고, 그 후에 흥해군에서 간행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경주 권구환(權龜煥),권종락(權宗洛) 두 사문이 오래전에 발행한 책을 구매하여 추원보본의 정성으로 사당에서 간행하여 널리 전하고, 후학을 깨우치려한 점이 매우 정성스럽다.”라고 칭송하였다. 권종락은 선대인 죽림공의 관직을 회복하는 지대한 노력을 한 인물이다. 영보당기(永報堂記) - 간옹 이헌경 사람이 시조(始祖)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정자가례(程子家禮)에 ‘동지(冬至)에 시조에게 제사지낸다.’에서 비롯되었다. 또 하물며 공덕이 이 백성에게 있고, 혜택이 후세에 미치는 경우 나라의 사전(祀典)에 실어서 보답하였으니, 자손이 보답함은 더욱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안동권씨의 시조는 고려 태사공이다. 그렇다면 동도에 사당을 세우는 것이 어떠한가? 동도에 사당을 세움은 곧 효도를 다하는 이유이고, 효도는 보답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실로 선대의 뜻을 계승하고, 선대의 신령을 위로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힘쓰지 않겠는가.”라 말하였고, 이에 동도의 운곡에 사당을 세웠다. 곧이어 “누구를 공과 함께 배향해 흠향할 것인가?”라 하니, 모두가 “자손으로 그 음덕을 입은 수효가 천억이요, 명현(名賢)과 공경(公卿)을 다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동도의 사람으로 높은 산처럼 추앙받는 이로는 죽림 권산해와 귀봉 권덕린 두 선생같은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동도에 사당을 세우고 마땅히 경주의 여망(輿望)을 쫓아, 드디어 두 선생을 함께 배향하였다. 이윽고 제례를 마치고 음복하는 장소를 영보당(永報堂)이라 하였다.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완산(完山) 이헌경에게 “그대가 또한 우리 시조의 외손이니, 기문을 지을 만하다.”고 말하니, 이헌경은 “그러겠습니다.”라고 공경히 응하였다. … 『시경』「소아․곡풍지습(谷風之什)」에 “은덕을 갚으려 해도 하늘처럼 끝이 없네(欲報之德 昊天罔極).”라고 하였으니, 이는 부모의 은덕이 갚기 어렵기가 이와 같고, 나의 말도 이와 같다. 부모의 말씀도 또한 이와 같으니,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조에까지 이르도록 그 말을 이와 같지 않음이 없는 것은 그 시조가 또한 부모의 부모이기 때문이다. 무릇 부모의 마음은 한가지이니 시조에게 제사를 드려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시경』「대아․기취(旣醉)」에 “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는지라 영원히 복을 받으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고 하였으니, 권씨의 복을 가히 헤아릴 만 하다. 을사년(1785) 음력 9월 상순 … 이헌경 삼가 적다
경주시 강동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천북방면 운곡서원으로 가다보면 좌측에 소담한 국당마마을이 자리하고, 마을 안쪽으로 안동권씨 구사재(九思齋) 권복시(權復始,1556~1636)를 모신 공간이 바로 보인다. 안동권씨 국당문중은 판관공(判官公) 권철순(權哲孫)이 향일재(向日齋) 권수해(權壽海,1410~1466)가 세조의 왕위찬탈 사육신 일과 연루되어 연일로 유배될 때 함께하면서 경주 국당에 세거하게 되었다. 권복시는 천사부장(天使部將)을 지낸 권녕(權寧)의 아들로 강동에서 태어났고, 고조 권철손 - 증조 권민(權敏) - 조부 권순경(權舜卿)의 가계를 이룬다. 그는 단종의 이모부인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1403~1456)의 5세손으로 경주에 세거하며 가학을 계승하였고, 학행으로 추천되어 봉직랑 사재감첨정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옥산장씨 장시업(張時業)의 따님과 혼인해 4남(必昌,鎣,鑰,鑒) 2녀를 두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단구리에 사는 종형인 오모재(五慕齋) 권복흥(權復興,1555~1592) 등과 함께 사람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고, 영천성 탈환전과 경주읍성 탈환전 등에 참전하였으며,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팔공산과 화왕산 회맹 등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월암(月菴) 김호(金虎) 장군은 1592년 7월 27일 영천성 탈환전에서 여러 경주의병장 그리고 권복시와 함께 참전해 승리하였다. 단종의 이모부인 권산해의 충심은 후손의 의병활동까지 이어지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계승되었고, 선조의 유지(遺志)에 따라 왜란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형산강 가에 구사재를 짓고 수신을 행하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에 후손들이 추원보본의 정성으로 1638년(인조 16)에 서당과 사당을 건립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862년(철종 13) 화재로 묘우와 고서가 소실되었다. 이후 세월에 퇴락한 구사재정사(九思齋精舍)를 1923년 국포(菊圃) 권숙영(權肅永) 등을 중심으로 재건해 후손들 강학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지금의 구사재는 1959년 사라호 태풍에 무너진 건물을 이듬해 망운재(望雲齋) 권의일(權宜一), 보은(補隱) 권영재(權永載), 모첨당(茅檐堂) 권영태(權永泰) 등 여러 후손이 힘써 안마을로 이건한 것이다. ‘구사재’의 의미는 ‘구용구사(九容九思)’에서 취하였다.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지신(持身)」편에서 ‘구용(九容)’은 우리 몸에 대한 태도를 바르게 행하라는 9가지 가르침이고, ‘구사(九思)’는 학문을 닦고 지혜를 더하기 위한 지표로서 생각을 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라는 9가지 가르침을 말한다. 이는 군자의 생활신조이면서 누구나가 이에 힘써 노력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필자는 ‘구사’의 덕목 가운데 ‘분사난(忿思難)’에 마음이 간다. 분함이 있을 때는 반드시 자신을 징계하고 이치로서 자신을 이겨야 한다. 만일 앞뒤 사정을 살피지 않고 쉽게 화만 내다보면 필시 어려운 일이 생기게 마련이니, 오히려 참고 견디며 일을 치밀하고 정밀하여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다. 거듭 생각하라는 ‘九思’의 의미도 있으니, 신중하게 일을 살핀 구사재 권복시 선비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특히 1598년 안동권씨 국당문중, 아산장씨 유금문중, 월성최씨 국당문중, 서산류씨 중명문중, 신광진씨, 오천정씨 빈암문중 등 6문중이 상동서사(上洞書社)를 지어 상동계(上洞契)를 조직해 마을의 규약인 향약을 만들어 풍습의 교화에 힘썼으며, 이에 옥산서원에서 『정속언해(正俗諺解)』와 『향약(鄕約)』 2책을 보내와 장려하였다고 한다. 권복시는 학행으로 뛰어났고, 국난을 당해 의병을 일으켜 위태로움을 막았으며, 경주부 국당마을에 세거하며 선조의 유지를 받들고, 지역의 유림과 교유하며 혼반의 인연을 이었다. 벼슬을 멀리하고 고향마을 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살다간 선비 권복시. 아쉽게도 그가 남긴 시문과 유고가 적어서 학문을 궁구하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권복시의 후손들은 그의 강인한 절개와 상동계를 통한 지역민의 화합을 이룬 공동화합의 마음을 알 것이다.
경주 불국사를 지나 외동 방향으로 7번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우측으로 마석산(磨石山)이 우뚝하게 서있다. 마석산은 내남면 명계리와 외동읍 제내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두꺼비, 맷돌, 대포, 유두, 가시개 등 기이한 모양의 바위가 많아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마석산 동쪽기슭의 북토(北吐)마을은 신라 때 큰 못인 샘못[토상지(吐上池)]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리적으로 남쪽의 제내리와 냉천리, 북쪽의 정래동과 시래동, 동쪽으로 방어리와 죽동리, 서쪽은 내남면 명계리와 이어져 있다. 외동읍 북토마을 안 북토소류지를 지나 마석산 산자락에 이르면 석은(石隱) 박이민(朴以敏)을 모신 석은재(石隱齋:북토안길 49-32)가 나타난다. 비선문(飛仙門)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좌측에는 ‘密陽朴氏石隱公支下塋苑’이 있다. 박이민은 인조년간에 처사로 살면서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고, 효도와 공경 그리고 충심과 신의로 여러 유생을 훈도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의 존재를 알기에는 문인들의 글이 너무 소략하고, 그나마 족보를 통해 그의 행적을 다소 확인할 수 있다. 박이민은 인조 때 통정대부 첨지중추를 지냈다고 전한다. 선대의 내력을 보면 “사헌부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1253~1340)부터 호조전서 박침(朴忱)은 고려 말기에 의리를 지키다 자결하였고, 아들 박강생(朴剛生,1369~1422)은 집현전 제학으로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아들 박공문(朴功問)은 태종년간 좌찬성 밀성군에 봉해졌고, 아들 박중손(朴仲孫,1412~1466)은 단종년간 좌참찬 밀성군에 봉해졌다. 아들 박건(朴楗,1434~1509)은 중종년간 좌찬성 밀원부원군에 봉해졌고, 아들 박승약(朴承爚)은 의정부 검상사인(檢詳舍人)을 지냈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진계(進階)되었다. 아들 박분(朴芬)은 성균관 생원으로 중종년간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 양주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여러 세대를 월성의 동쪽에서 머물렀다”라며 경주에 세거한 내력을 언급하였다. 기묘사화는 훈구파가 반정 공신의 위훈(僞勳) 삭제를 빌미로 조광조 일파의 급진 개혁 정책을 막았고, 이로인해 많은 사림파가 사약과 유배를 당하였다. 이 시기에 박분이 경주로 내려왔고, 그로부터 네 세대를 지나 박이민이 광해년간에 태어났다. 정묘년(1987) 음력 5월에 지은 「석은재기」를 보면, 집안에서 재실 건립을 도모한 내력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경주부 동쪽 30리쯤 마석산 그 아래에 북토(北吐)마을이 있는데 박씨가 머물러 산지가 이미 십여 세대가 지났다. 마을 뒤에 우뚝한 봉우리 배석봉(拜石峰)이 있는데 통정 첨부를 지낸 밀양박씨 석은 박이민 공께서 살던 곳이다. 의례의 물품을 갖추고 숭배하였고, 봄과 가을 강신제(降神祭) 즈음에 제관이 재소(齋所)에서 지낼 공간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을축년에 후손 박정래(朴炡來), 박용래(朴庸來), 박양래(朴陽來)가 여러 족친에게 묻고 도모하며 말하길, “우리 집안은 예부터 가난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겨를이 없었지만, 선조의 묘소 역시 재실 하나 없다는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서로 정성을 다하고 힘을 모으는 것이 마침내 평소의 마음이었다”라고 하자, 모두가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목과 기와를 옮기고, 인부를 모아서 병인년 봄을 넘겨 묘소 아래에 3칸 집채의 앞쪽에 달아 낸 칸살 집을 지었다. … 손자 박홍이(朴烘以), 박문의(朴門意)가 나에게 와서 기문을 부탁하였다. … 그 사실을 기록하고자 부족한 나에 보여주었는데, 뒤돌아보니 내가 부탁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으나, 살펴보니 세대를 이어온 대략의 박씨 가문의 역사기록이었다. 후손이 선조를 기리는 일은 당연한 인간의 도리이다. 게다가 자손들이 선조를 모시는 건물을 지어서 추원보본(追遠報本: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은혜를 갚음)의 정성을 다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만 모름지기 후손들은 몸을 삼가고 행실을 닦아서 선조의 넉넉한 덕을 실추시키지 않고, 종족 간 화목을 잊지 않아서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비로소 사람의 직분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옛 법도도 쇠락하고, 천륜의 법도가 이지러져 풍속이 문란한 작금의 사태에 어찌 더욱 서로가 함께 삼가고 힘쓰지 않겠는가. 이는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일 것이니, 외동읍 북토리에 자리한 석은재는 후손의 애틋한 마음이 서린 정결한 공간임이 분명하다. 필자는 올해 가을 어느 날 마석산을 오르기 전에 다시 석은재를 방문할 예정이다.
경주 강동면 다산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옥구(沃溝)이씨 성인당(成仁堂) 이희룡(李希龍,1549~1592)과 그의 아들 이문진(李文軫) 그리고 며느리 김씨에 대한 충(忠)․효(孝)․열(烈)의 삼강(三綱)을 기리기 위해 1709년에 건립된 삼강묘비가 있고, 그 옆에 절효(節孝)·충렬(忠烈)·삼강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정려문이 우뚝하게 자리한다. 그 주변으로 후손이 마련한 삼송재(三松齋)가 있고, 그 뒤편에 사당이 있었다. 이희룡은 선조 9년(1576) 28세에 식년시 병과에 합격해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호위하였고, 경주와 울산 사이 적의 동향을 엿보고자 내려가다 충주의 달천(獺川)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에 그의 아들 이문진은 충주에 이르러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고, 불행히도 영천 신녕에서 왜놈에게 잡혀 살해된다. 이 소식을 접한 이문진의 아내 역시 남편과 시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시체 더미를 뒤지고, 심지어 손수 바느질한 옷감을 비교하며 3개월을 찾아다녔으나, 찾을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1712~1779)은 「삼강비명(三綱碑銘)」에서 “이희룡의 자는 사휘(士輝)이고, 선대는 옥구사람이다. 훗날 경주에서 집안을 이루었다. 병법을 좋아하고,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합격해 사헌부 감찰에 보임되었다. 선조 임진년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의주에 왕을 따라갔다가 영남에 적을 정탐하는 명을 받았다. 이때 적이 충청도와 경상도에 넓게 주둔해 있었고, 천리에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공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경주와 울산 등지에 출몰하였고, 허실과 완급의 상태를 살펴 다 얻었다. 왕이 계시는 행재소(行在所)로 돌아가다가 충주에 이르러 적을 만나 나아가지 못하게 되자, 공은 ‘왕명을 받은 몸이라 몸을 욕되게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앞에 나아가 적과 싸워 죽음으로 임금에게 알리겠노라’하고는 마침내 홀로 힘써 싸우다 죽었다”고 언급한다. 1709년에 어사 박봉령(朴鳳齡,1671~1718)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고, 이듬해 이희룡은 통정대부 참의, 이문진은 도사(都事), 며느리 김씨에게 종9품의 단인(端人)에 추증되었고, ‘節孝忠烈三綱俱備之門’의 정려문이 내려졌다. 삼강은 유고 윤리의 세 가지 근본으로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의 벼리를 말한다. 벼리는 그물의 위쪽에 코를 꿰어 잡아당길 수 있게 한 줄로 벼리를 촘촘히 당기면 안의 고기가 나가지 못하고, 반대로 벼리가 느슨해지면 안의 고기가 모두 달아나 낭패를 당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마음속에 군신, 부자, 부부 이 세 가지의 벼리를 잘 단속해 사람의 도리를 펼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에 대제학을 지낸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1698~1773)은 「이씨삼강묘비명(李氏三綱廟碑銘)」에서 “한 집안에서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고,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죽고, 며느리가 남편을 위해 죽어서 삼강의 온전함을 얻은 경우는 세상에 견줄 만한 것이 없이 가장 뛰어날 것이다(若一家之內 臣死於君 子死於父 婦死於夫 得三綱之全者 亦天下一而已矣)”라고 높이 평가하였으니, 조정과 옥구이씨 집안의 큰 자랑이 된다. 영조 17년(1741)에 올린 장계의 의하면, “단구사사(丹丘社祠)는 증 참의 이희룡, 학생 권복흥(權復興), 도사 이문진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경술년(1730) 2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박문수(朴文秀)이고, 부윤은 이중관(李重觀)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석표(李碩標)입니다”라고 전한다.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역시 단구향사에 임란의병장 이희룡, 권복흥, 이문진을 제향하는 봉안문을 지었다. 이희룡에 대해서 『영남인물고』,『여지도서』 및 다수의 문인들 글에 전한다. 그런데 남유용의 「이씨삼강묘비명」 글에 의하면, 이희룡의 자를 응서(應瑞)로 기록하였고, 앞서 최천익이 지은 「삼강비명」에는 자를 사휘(士輝) 등으로 표기하였으니, ‘이희룡’ 동일인물에 대해 정확한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내남 고곡리 전투에서 사망한 이희룡[자 운로(雲老)] 의병장도 있다. 게다가 1972년 강동면 오정길에 건립된 우애당(友愛堂)은 형 이변룡(李變龍)과 동생 이희룡(李希龍)이 부친 이응백(李應百)의 상을 당하자, 형제가 여막을 짓고 3년 시묘(侍墓)한 일로 ‘우애당’이라 편액하였다. 그로 인해 예로부터 효막동(孝幕洞)으로 불렸고, 우애당 안에는 유연재(惟湅齋), 성인재(成仁齋) 현판이 걸려있다.
안동권씨 노헌(魯軒) 권응생(權應生,1571~1647)은 의병장 그리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문인으로 경주의 이름난 학자였다. 고을 유림의 동조로 1795년 안강읍 두류리에 권응생의 위패를 모신 향불천(鄕不遷) 부조묘(不祧廟)가 세워졌으나, 근래 두류공단 조성으로 두류이주단지(두류두동길 34-12)로 이건되었다. 새롭게 조성된 모현문(慕賢門)을 열고 들어가면 충현묘(忠顯廟)가 바로 보인다. 권응생은 평소에는 바른 인품으로 학문을 대하고, 국난에는 창의하여 충을 세운 인물로, 고조부 권명추(權命錘) - 증조부 권계중(權繼中) - 조부 권덕린(權德麟)의 가계를 이룬다. 부친 권사의(權士毅)와 모친 광릉안씨 안윤조(安胤祖)의 따님 사이에서 밀양 삽포리(鈒浦里)에서 태어나 가학을 계승하였다. 어려서 총민하였고, 22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경주 내남 계연(雞淵)전투, 문천회맹, 영천성 탈환작전 등에서 활약하였고, 김호 장군과 노곡전투, 경주성 수복작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팔공산회맹과 화왕산회맹에도 참가하였다. 여주이씨 근재(謹齋) 이경홍(李慶弘)의 따님과 혼인해 슬하에 권기(權旡)·권임(權恁)·권도(權燾) 세 아들을 두었고, 모두 여헌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대암(大庵) 박성(朴惺),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쌍봉(雙峰) 정극후(鄭克後) 등과 교유하였고, 특히 1638년에 권응생은 정극후와 함께 『동경지(東京誌)』를 편찬하였다. 스승 장현광이 제자 권응생[자 명세(命世)]에게 보낸 편지에서 “듣자하니, 『동경지』 편찬이 아직 정서(正書)하지 못했다 하니, 이는 진천(鎭川:권응생) 그대가 눈 치료에 겨를이 없고, 효익(孝翼:정극후)이 혼자 감당키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병을 회복하는 겨를에 생각을 지극히 서로 권해서 기필코 완성하길 기약한다면 아마도 큰 다행이지 않겠는가? 고을의 선비들이 멀리서 찾아오니 그 마음이 진중(珍重)하나 다만 늙고 혼몽하여 그릇된 요구에 응할 수 없어 많이 부끄럽네. 일전에 마침 새로 부임한 부윤이 방문하였기에 잘 조처해 줄 것을 청하였고, 모름지기 제때 사업을 끝마치도록 부탁하였으니, 생각건대 기필코 범범하게 보지 않을 것이네”라고 하였다. 장인 이경홍의 『철감록(掇感錄)』에는 김성일의 참모 박성으로부터 소모밀양사민통문(召募密陽士民通文)을 받아 참전한 의병관련 내용이 있으며, 사위 권응생 역시 의병활동에 영향을 받았다. 사후에 경주 기계현 가천리(駕川里) 산막동(山幕洞)에 장사지냈고, 다시 이장되었다가 기계에 다시 묻혔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봉사(奉事), 직장(直長), 평구도찰방(平丘道察訪) 등을 역임하였으며, 진천현감으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폭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밀양에 돌아가서 손기양(孫起陽) 등과 교유하다가, 만년에 안강으로 돌아와 형강에 정사(精舍)를 짓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집중하였다. 임진왜란 때 당숙 매와(梅窩) 권사악(權士諤)과 작은아버지 매헌(梅軒) 권사민(權士敏) 등과 함께 주민과 노복으로 의병을 조직하였고, 화왕산성에서 망우당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다. 학림(鶴林) 권방(權訪)이 서문을, 궁오(窮悟) 임천상(任天常)이 발문 등을 지은 『노헌유고』가 전하며, 사후에 쌍봉 정극후, 우복 정경세가 제문과 만사, 여와 목만중이 묘갈명,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이 행장 등을 지었다. 지역 유림이 권응생 사후 150여년이 지난 후에 그의 업적에 대해 평가하고, 향불천에 처한 일은 참으로 합당하다. 이제 그의 업적을 제대로 드러내어 후대의 귀감이 되도록 노력할 때이다. 권진천 묘갈명(權鎭川墓碣銘) - 여와 목만중 권응생의 자는 명세(命世), 스스로 노헌(魯軒)이라 불렀다. … 어려서 문예(文藝)에 일찍 성취하였고, 장성해서는 폭넓고 빼어났다. 부친이 매번 칭찬하며 “우리 가문의 업을 잇는 자가 여기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에 종숙 권사악, 서숙 권사민과 눈물을 쏟으며 창의하여 팔공산에서 여러 의병장과 모여 망우당 곽재우을 따라 산성을 수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니, 이때 겨우 약관의 나이였다. … 진천현감에 제수되어 백성을 잘 다스렸고,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동의보감』 한질을 하사하였으니, 사람들이 영화롭게 생각하였다. 공은 평소 벼슬에 마음이 없었고, 밀양 옛 별장으로 돌아와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과 덕과 의로 학문을 익히니, 사람들이 어우러져 대종(大宗)으로 삼았다. 이윽고 다시 동도 옛집으로 돌아와 서적을 낙으로 삼고, 만년에 형강의 빼어난 산수를 좋아해 호수 가에 정자를 짓고 철마다 왕래하였다.
경주에서 현곡면 남사저수지를 지나 왼쪽 남사리로 접어들면 작은 물길을 따라 경주최씨 외와(畏窩) 최림(崔琳,1779~1841)을 배향한 남계정사(南溪精舍)가 나타난다. 조부 최경위(崔慶煒)는 최종륜(崔宗崙), 최종락(崔宗洛), 최종연(崔宗演) 등을 두었고, 최종륜은 밀양박씨 박재엽(朴再燁)의 따님과 혼인해 최림을 낳았다. 최림은 정조 3년(1779) 11월 12일에 현곡 구산(龜山) 아래 옛집에서 나고 자랐고, 현종 7년(1841) 10월 23일에 타계해 현곡 은선암(隱仙庵) 선영에 묻혔으며, 남계정사에서 후손들이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그는 어린 나이 5살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22세에 경시(慶試) 복시(覆試)를 보았다. 딱히 과거에 뜻이 없는 그는 45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나서 과거공부를 접고, 청도 운문산 공암(孔巖)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성력(星歷)‧병학(兵學)‧기수(箕數)에 모두 통달하였고, 선비로써 위기지학과 수신에 힘썼다. 「공암산수기(孔巖山水記)」에서 “청도 여러 산은 경주에서 시작되고, 경주의 여러 산은 소백산에 이어진다. 소백산은 순흥에 있고, 그곳에 백운동이 있으니, 회헌 안향이 살던 곳이다”라고 말하면서, 안동의 퇴계와 경주의 회재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청도 공암의 산수 역시 경주부의 서쪽 계곡에서 발현된 것이라 말하며 자신이 청도에 머문 연유를 빗대어 설명했다. 스승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와 인연은 45세에 회현(懷縣)의 오동(鰲洞:오촌)으로 송치규를 찾아가 4~5일을 머물렀고, 54세에 다시 송치규를 뵈었으며, 이듬해 문인 배영(裵泳)과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학의 연원을 살폈다. 62세 늦은 나이에 관찰사의 추천으로 선공감 가감역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처사문인으로 평생을 벼슬하지 않았다. 송병선은 「서문」에서, “문(文)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의 경우 도리(道里)가 있기 때문이다. 문이 있으면서 도리가 아닌 것이 어찌 문이 되기에 충분하겠는가. 군자께서 그러한 연유를 알았기에 반드시 그 근본을 중히 여기고 그 말단을 가볍게 여겼었다. 근본에 힘쓰고 말단을 얻는 자가 굳이 그것이 있더라도, 근본을 얻지 못하고서 말단에 능한 경우는 아직 있지 않다. 때문에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외와 최 공이 이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그의 인품 됨을 언급하였다. 어려서 수재로 알려진 그는 이미 7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10세에 인(仁)이 되는 효제(孝悌)의 근본을 좌우명으로 적어 실천하였다. 교유한 인물로는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과재(過齋) 정만석(鄭晩錫), 안윤일(安允一) 등이 있다. 손자 최세현(崔世顯)과 증손 최임수(崔任壽)가 유문을 정리하였고, 종손 최진수(崔瑨壽) 등의 주선으로 1899년(광무 3)에 『외와집』을 간행하였다. 연재 송병선이 서문을, 면암 최익현이 행장을, 하석(霞石) 이용원(李容元,1832~1911)이 묘갈명을, 성암 최세학이 행록(行錄) 그리고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1839~1912)이 발문을, 이병수(李炳壽)가 근지(謹識) 등을 지었다. 게다가 「경의회정(經義會精)」에서 『주역』의 건원형이정(乾元亨利貞)을 해설하며, 정자와 주자의 설을 토대로 학자가 지향할 바를 제기한 것이 특이점이다. 최림에 대한 생애와 사상 연구는 경주 현곡에 소재한 선비로써 영천과 지역문인의 관계 그리고 청도에 이어지는 학문연원에 디딤돌이 되기에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묘갈명 병서 -하석 이용원 근래에 경상도 사유(師儒) 중에 외와 최 공이 있는데, 혹은 ‘문장사(文章士:문장으로 이름난 선비)’, 혹은 경세지재(經世之才:세상을 다스릴 재목)라 하니, 사물을 분별하고 이치에 통하여 중심이 되는 사람이다. … 공이 태어난 날밤에 구산(龜山)이 세 번 울었으니, 마을사람들 모두 기이하게 여기며 “옛 정무공 최진립 공이 내려온 듯하다”라고 하였다. … 공은 한번 본 것은 문득 기억하였다. 8살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 10살에 ‘孝悌’ 두 글자를 책상 모퉁이에 적어 인을 하는 근본으로 삼고는 “孝와 悌 두 글자 모두 도리는 하나다. 효(孝) 자는 아들 자(子)를 따르는 아들의 도리이고, 제(悌) 자는 아우 제(弟)를 따른 아우의 도리이지만, 시행함이 같지 않아서 그 이름이 다르다”라고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운문의 공암에 거처하였는데, 공암은 바위 구멍[孔]에서 이름을 취하였다.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 수용하지 못하였고, 이에 벽을 마주 대하여 정자로 삼고, 그 안에서 머물렀다. … 「경세연류(經世沿流)」와 「원회운도(元會運圖)」를 지었는데, 당시 세상의 급한 일 네 가지에 대해 논하였다. 첫째, 元孫(원손)을 보익하여 성군의 기틀로 삼는다. 둘째, 빠뜨린 인재를 모아다 어진 길을 넓힌다. 셋째, 수령을 골라 뽑아 백성의 힘을 풀어준다. 넷째, 군사의 방비를 엄수(嚴修)하여 국경을 견고히 한다. … 돌아가시자 원근의 아는 자 모두가 “어는 곳에서 이러한 사람을 만나리오”라고 하였다.
구봉정사는 안동권씨 구봉(龜峰) 권덕린(權德麟,1529~1573)이 강학(講學)하던 장소를 말하며 서사(書社)에서 변천되었다. 본래 안강읍 양월리 구성(龜城) 아래에 있었으나 1651년에 안강읍 두류(頭流)마을로 이건하였고 근대에 와서 중건되었다. 권덕린은 회재 이언적의 문인으로 어려서 모친의 가르침을 따랐고, 회재의 작은 아버지 이필(李苾)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고조 권수해 - 증조 권효충(權孝忠) - 조부 권명추(權命錘)- 부친 권계중(權繼中)의 가계를 이루며, 모친은 양성이씨(陽城李氏) 이세주(李世柱)의 따님으로 권덕기(權德麒), 권덕린(德麟), 권덕란(德鸞) 3형제를 두었다. 게다가 그의 아들은 매헌(梅軒) 권사민(權士敏,1557~1634)으로 의병장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회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스승이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억울하게 강계로 유배 가자 안강 양월리 구성(龜城) 아래에 구봉서사를 짓고 두문불출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1553년 유배지에서 돌아가신 스승의 영구(靈柩)를 길에서 맞이하였다. 회재의 제자에 대해서 「동국문헌록」에는 구봉․김자(金磁)․사내(四耐) 안경창(安慶昌,1524~?)․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 등을 언급하였고, 「유학연원록(儒學淵源錄)」에는 매곡(梅谷) 배숙(裵璹,1516~1589)․호정(昊亭) 김세량(金世良,1502~1571)을 포함해 6명을 언급하였다. 다만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1631~1695)의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는 구봉 뿐이다. 회재는 오랫동안 이어진 관직생활과 유배 등으로 인해 제자를 두고 수학할 기회가 적었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다만 고향인 옥산과 양동을 머물며 지역의 유림들과 교유하였고 적지 않은 후학을 양성하였을 것인데 그의 학문적 연원을 논하는 가문이 그리 많지가 않다. 경주부윤을 지낸 허엽이 지은 「옥산서원기」에 “합천군수 권덕린 공은 회재 이 선생의 제자이다(陜川郡守權公德麟 晦齋李先生之學徒也)”라 명시한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1553년(명종8) 문과 급제를 시작으로, 1557년 예조정랑, 1560년 회덕현감, 1566년 하동현감 공덕으로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고, 1570년 노모 봉양을 위해 영천군수, 1571년 옥산서원 건립의 조력자로 회재학을 계승하였다. 1572년 합천군수 공덕으로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지고, 1573년 곤양군수(사천시)로 부임하는 길에 안타깝게도 병을 얻어 45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묘갈명,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는 행장,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이 묘지명 등을 지었다.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1788~1861)은 문집 서문에서 “회재의 문하에서 도를 듣고 전수한 자가 매우 드물었다. … 만일 회재가 유배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미진한 연구를 궁구하여 실천의 공부를 발휘하였을 것이다”라 하였고, 훗날 후손 권치복(權致福)이 유문을 모아 문집을 완성하였다. 회재의 학문을 사사받은 권덕린은 안강에서 서사를 건립해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에게 수학한 지역의 많은 유림들이 회재의 학풍을 기억하며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회재 이언적의 학문적 평가와 유학의 도통연원 성립이 확고해지는 그날을 기약하며, 지금도 구봉정사는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고, 중수기문과 첨모당기(瞻慕堂記)가 그 내력을 간직한 채 걸려있다. 귀봉 권덕린 공 묘갈명 - 청대 권상일 어려서 모친의 가르침이 매우 엄하였고, 조금 자라서는 회재 이언적 선생에게 수업하였다. 선생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말씀이 적어서 와서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유독 권덕린의 뜻을 가상히 여기고 재주를 좋아해 이끌어 도와줌이 지극하였다. 정미년(1547:양재역벽서사건)에 선생께서 관서지방으로 유배가자 학문을 마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구봉(龜峯) 아래에 작은 집을 짓고는 문을 닫고 고요히 처하며 서사(書史)를 탐구하고 토의하였다. … 계축년(1553)에 급제하였고, 그해 겨울에 선생의 부고를 듣고는 길 도중에서 영구(靈柩)를 맞이해 돌아왔다. 타고난 자질이 똑똑하고 성품이 본래 효도와 우애가 있었다. 모친을 봉양하고 효성을 다한 후에 동생 첨정공 권덕란(權德鸞)과 한 책상에서 화목하였다. 회재 선생을 정성으로 존경하고 흠모하기를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초당 허엽이 「옥산서원기」에서 그를 칭찬하였고, 남계 박세채의 「동유사우록」에서는 회재의 제자로 권덕린 한 사람만을 언급하였다. 글은 모두 전쟁으로 흩어져 잃어버렸고 단지 과거시험의 두 시권(試券)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