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개항한 감포항은 올해 개항 97주년을 맞았다. 3년 뒤 2020년이면 개항 100주년이다. 감포개항사는 격동의 근대사였다.
감포항은 1920년 개항된 이래 1937년 제물포와 함께 읍으로 승격될 만큼 국내 대표 어항이었으나 현재는 어항기능 약화 및 인구감소로 쇠락하고 있다. 이에 도시재생과 경주 동해안 지역 발전을 위한 감포항 개항100주년 기념사업이 추진될 예정이다. 감포항 연안 개발, 친수공간 조성, 송대말등대 콘텐츠사업 등 감포항 주변을 개발해 해양관광기반을 조성하고 특화해 새롭게 거듭나는 ‘감포항’의 기틀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다.
본 기사는, 사비를 들여 발품을 팔아 감포항 개항사와 감포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중인 하덕원 씨(감포개항사연구회 주관)를 통해 글과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특히 1910년경의 감포항 해녀 사진과 조선총독부 자료를 통한 감포항 개항의 근거를 명확히 증명하는 자료는 본지 단독으로 최초 공개하는 중요한 자료임을 밝힌다. 이런 귀중한 자료들을 기꺼이 제공한 하덕원씨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감포항(甘浦港)을 아시나요?...일출 어울릴 때면 가슴 벅차오르는 삶의 현장
경주시의 동단에 위치한 감포는 달감(甘)자와 같은 지형을 닮아서 감포로 했다는 설과,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고 해서 감은포라고 불리다가 감포로 축약되어 오늘의 감포항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려 현종때 동경속지증보본에 ‘감포’라는 기록이 있어 통일신라시대 이후 감은포가 감포로 돤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19년 감포내항 방파제축조로 항구의 입지를 갖춘 현재 감포읍은 읍면적 44.84㎢, 인구 7000여 명이 살고 있다. 본래 경주부 동해면이었으나 1895년(고종 32년) 장기군에 편입 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군에 편입되어 양북면이 됐으며, 당시 감포 인구 3천여 명 중 700~800명이 일본사람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수산업 관련 분야에 종사했다고 한다. 이들 일본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해 감포리는 양북면에서 분리돼 인접 9개리와 병합해 1937년 7월 1일자로 감포읍으로 승격됐다.
감포항은 서, 남, 북 삼면이 최고 200m 이내의 낮은 구릉지대 및 평야로 싸여 있어 지리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며 1920년 개항하고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읍으로 승격된 동해에서 가장 큰 동해남부의 중심어항이었다. 감포항 앞 동해 남부 해역은 대륙붕이 잘 발달하고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어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이 때문에 일제는 감포항을 어업전진기지로 삼았고 수산업 중심지역으로 성장시켰다. 규모가 아기자기하면서도 멋진 등대가 우뚝 솟아있는 감포항은 드나드는 어선이 많은 동해남부의 중심 어항인 것.
감포읍은 바다 가까이 200m 내외의 산지가 해안에 급박해 평야가 거의 없으며,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어종은 꽁치·멸치·가오리 등 이며, 약간의 전복과 미역의 양식이 행해진다. 특산물로는 멸치젓갈, 미역, 전복, 오징어, 꿀 곶감 등이 있다. 3일과 8일에 장이 서는 감포장은 바다가 바로 인접해 새벽에 들어오는 오징어잡이 배와 멋진 일출이 어울릴 때면 가슴이 벅차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삶의 현장이다.
-본지 단독 최초 공개, 조선총독부 자료에 나타난 1920년 ‘감포 개항사’ 근거 찾아내
아래 글은 하덕원씨가 일본에 직접 가서 알아낸 자료임을 먼저 밝힌다. 조선총독부 자료 중에서 대정 10년(1920년) 4월, 발간된 ‘조선항만(朝鮮港灣)’에서는 조선해안상황, ‘제2장 항만 종류(개항, 지정항, 세관지정항, 지방항 등)편 중, 지정항 20항 중 ‘대정9년 조선총독부령 제41호 구서’에서는 ‘지정항, 항만, 조축, 항만 내 매립과 방파제, 방사제 등 축설, 개축, 제거 등에 연관해 행정상 처분이 조선총독부 권한’임을 명기하고 있다.
지정항 20항에는 법성포, 여수, 제주, 성산포, ‘감포’, 구룡포, 포항, 도동, 마산, 방어진, 주문진, 나진항 등이 해당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항만행정, 주요항만 일반을 기록하고 있으며 제8장에서는 ‘각항 연혁, 상황병시설’편에서 동해안의 방어진, ‘감포’, 구룡포, 포항, 주문진, 원산 등의 항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명백하게 감포항이 항구로 개항한 것은 대정 9년 즉 ‘1920년’임을 뚜렷하게 기록으로써 알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해서 감포항은 올해로 개항 97년이 되며 2020년 개항 100주년을 맞이하는 것이다.
-경주 문화재와 도굴 및 발굴된 유물 밀반출이 가장 조용하게 이뤄질 수 있는 곳이 바로 ‘감포항’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조선 반도로부터 강제 수탈과 영구 정착의 목적으로 감포항을 근대화 했다. 찬란한 신라 고도의 경주 인근의 문화재와 도굴 및 발굴된 유물의 밀반출이 가장 조용하게 이뤄질 수 있는 곳이 감포항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 총독부의 지원 하에 당시 수산업의 가장 핵심적 이권허가인 기선저인망(일명 ‘고데구리’) 허가를 경상북도 13척 중 감포에 8척을 집중해 허가해주었고 인근의 포항항에 비교하면 자연적인 입지 조건이 그리 좋지 않은 감포항을 계획도시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이글은 감포 출신 향토 사학가 우암 전달술 선생의 철저한 고증 및 일본어의 번역과 연로한 지역 어르신들의 기억을 되살려 일부 추가 고증을 한 글이다. 그 고증에 일치하고자 하덕원씨가 국가기록원, 일본국립국회도서관을 열람해 기초적인 자료를 완성한 것이다.
-패전과 동시에 일본인 중 조선인에게 평소 우호적인 일본인들만 심사해 일본까지 무사히 귀국시켜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부의 전 조선개발 계획에 의해 현대 항구 개설의 일환인 1925년 감포 축항(현 남방파제)이 준공됐다. 동시에 일본인 유자망 어업인 중심으로 주로 일본의 태평양 연안의 당시 어업이 발달했던 ‘시고꾸’ 지역에서 일본인 어업인들이 감포, 구룡포로 강제 집단 이주시켜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초창기까지는 봉화대(현 감포 중고등학교 아래)에서 송대갑까지 봉화대 방향의 당수나무(수령 500년)처럼 해송이 즐비했으나 신작로 개설 및 농지 개간으로 인한 숱한 벌목으로 사라져버렸다. 송대에는 당시 인근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들이 수령 200~300년 이상의 노송이 집단 서식해 자연 경관이 절경이었다. 송대 끝 자연경관은 여러 성씨의 고총들이 운집한 곳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우정국에서는 ‘아침해가 떠오르는 감포 송대끝’이라 명명하고 기념우표 및 엽서를 발행했다. 해방과 동시에 주변인의 무관심 속에 건물 훼손은 물론 수족관의 어족마저 사라지고 폐허가 되어 버렸다고 했다. 한때 감포의 명승지였던 곳이 폐허가 된 것이다.
한편, 당시 일본인의 기상을 조선 반도에 세우려고 오사카 성을 본떠 웅장하게 3층 건물로 건축했으나 1954년 감포 대화재로 인해 완전 소실돼 현재는 단층 형태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마쯔다 상’이라는 도의원이 한 명 있었다고 한다. 그의 권력이 엄청났고 그로 인해 당시 감포읍으로 승격하는데 인구가 100명이 모자랐음에도 억지로 조성하다시피 감포읍으로 승격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패전과 동시에 감포 인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 중 조선인들에게 평소 우호적인 일본인들만 심사해 당시 그들이 운영하던 기선저인망 선박을 감포인들에게 귀속시켜 주는 조건으로 일본까지 무사히 귀국시켜 주었다고도 한다.
-1950년경 ‘목포의 눈물’ 영화 촬영지가 감포항, 감포의 50년대 배경 선명
아래 기사는 ‘감포읍지(2013, 감포유림회, 감포 향토사학자 전달술 선생의 고증)’에서 발췌인용했다.
‘감포는 많은 어류 중에서도 명태, 대구, 갈치, 오징어, 방어 등은 계절을 따라 이곳 어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수 없는 귀한 어종들이다. 감포의 기후는 동해의 기후 및 해류의 영향을 크게 받는 지역으로 특히 한난류의 교차 지역이다. 경주시에서도 감포읍은 작은 면적이어서 해안선을 안고 장반원형으로 남서북 삼면이 고저의 구릉지대로 경사도가 높은 곳이기에 평야가 작다’
‘이 곳 최초의 금융설립은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의 중심이 된 금융조합의 설립으로 시작됐다. 소위 한인 보호권이라는 명분으로 감포금융조합 설립이 그 기초인 것이었다. 그 후 일제말 조흥은행 감포 출장소 외 서민금융이 있었으나 자취를 감췄다. 1950~70년까지는 사금융이 성행하기도 했다. 혼란기 감포에 있었던 조직과 단체로는 감포적산관리소, 해무소, 소방서장(미 군정 당시의 기관) 등이 있었다’
‘일제초창기에는 조선업, 철공업, 제염업, 수산물 가공업 등이 성업중이었으며 현재도 조선, 철공업 외 가내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또, 1950년경 감포에서는 영화 촬영도 했다고 한다. 송대갑 유료 수족관은 황폐된지 오래인데 자연 경관은 사람들의 입으로 유전돼 한국영화예술 초창기에 전옥과 김칠성 주연, 독고성이 조연한 ‘목포의 눈물’이라는 영화의 배경지가 감포라고 한다. 송대갑과 그 앞바다 위에 부상하고 있는 감방안을 중심으로 감포내항으로 들어오는 광경과 육거리 중심에서 방파제로 가는 물양장 내항에 정박중인 크고 작은 선박들이 배경들이었다. 그 영화만 보면 감포의 50년대 배경을 알 수 있는데 아쉽게도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지금의 수협 건물과 냉동공장도 주무대장으로 이용됐으며 촬영요원들과 소속 배우들은 ‘삼산여관’과 ‘일심여관’을 이용하고 분장은 ‘낙원미용원’에서 이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