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가정觀稼亭은 강동면 양동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주택으로 중종조 명신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선생이 1514년 건립한 고택이다. 내년이면 관가정의 건립으로부터 500년이 되는 유서깊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관가정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어 조선중기의 남부 지방 주택의 연구 자료가 되고 있으며 1966년 보물 제442호로 지정되었다. 관가정 사랑채의 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양동마을과 들판이 탁 트이게 보여 넓은 경관을 접할 수 있다. 또한 안강평야는 우재 선생의 ‘곡식을 심어 자라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손과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관가觀稼’의 의미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정경이었다. 격식을 갖춰 간결하게 지어 우수한 건축미가 빼어난 관가정을 찾았다. 관가정, ‘곡식을 심어 자라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손과 후진을 양성하겠다’ 관가정은 우재 선생이 중종조 대사간(사간원의 최고 수장)으로 재직할때 잘못된 인사에 대한 시정을 위해 송 질 등의 사직을 청하는 수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그 뜻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대사간을 사임하고 1513년 낙향해 이듬해인 1514년 ‘관가정’이라 현액하고 짓는다. 관가觀稼의 의미는 ‘오직 자연을 벗삼아 곡식을 심어 자라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손과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뜻으로 창건한 유서깊은 건물이다. 한편, 관가정을 지은 6개월 후 중종은 다시 선생을 조정으로 불러 춘추관, 예문관, 상서원장, 직제학 등 여러 벼슬을 새로 부여한다. 이 고택은 양동마을 서향받이 언덕에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으로 자리잡고 앞쪽 좌 우로 날개가 돌출된 형태다. 동북쪽에 사당을 배치하고 담장으로 양쪽 측면과 뒷면을 둘러막아 주택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해 낮은 지대의 마을경관을 바라보게 했다. 그러나 1981년의 보수로 인해 전면에 담장을 쌓고 일각대문을 내어 경치가 많이 가려져 버렸다. 조선중기 남부지방 주택 연구의 귀중한 자료 관가정 전체의 배치는 중문을 중앙에 두고, 서쪽에 사랑채, 동쪽과 북쪽에 안채를 두고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마을 입구의 높은 자리에 위치해 마루는 앞면이 트여있는 구조로 사랑채의 건축 형식이 돋보인다. 사랑채는 방 2칸과 대청 2칸으로, 대청은 누마루로 되어 있다. 사랑채의 대청의 밑 부분만 기단을 낮추고 기둥을 세워 결과적으로 누마루가 있는 정자 건물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대들보 위와 천장 사이에 아무런 벽체를 만들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사랑방 앞과 사랑대청 주변에는 계자난간을 돌렸다. 안채는 네모 기둥을 사용했고 사랑의 누마루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에 길게 난간을 둘러 정자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안채 부엌 출입문 위에는 살대들을 비스듬히 꽂아 환기가 잘 이루어지게 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가 한 지붕으로 연결되고, 서로 모이는 부분에는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중문 동쪽에는 한 칸의 온돌방, 두 칸의 부엌, 한 칸짜리 방 두 개를 두었고, 부엌 북쪽에 연달아 2칸 크기의 작은 대청과 2칸 크기의 안방이 있으며 다시 꺾여 6칸 크기의 큰 대청을 두고, 그 서쪽에 2칸 크기의 건넌방을 두었다. 한편, 건넌방에서 남쪽으로 꺾인 곳에 2칸 크기의 광을 두고, 그 앞에 한 칸짜리 마루를 두어 사랑채의 사랑방과 연결시키고 있다. 경관이 뛰어난 입지조건을 최대한 이용해 정자 기능을 갖도록 꾸민 사랑채의 건축 형식이 돋보이고 안채의 공간 구성이 이채롭다. 양민공 손소 선생 모시고 있는 국불천위 사당인 양좌영각良佐影閣 관가정의 북편에는 우재 선생의 부친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선생을 모시고 있는 국불천위 사당인 양좌영각이 있다. 영당은 손소 선생을 봉사하고 나라에서 내사한 영정을 함께 모시던 곳인데 지금은 영정만 모신다. 사당은 따로 둘러막은 담장 속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전면에 반칸의 퇴退를 달아낸 모양으로 된 일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한편, 손소 선생의 향사는 음력 5월5일이다. 생사당 복원, 건립하기 위해 노력 우재 선생의 15대 손인 손태익(75) 어르신은 “선생은 상주목사 시절 누에를 치고 농사를 장려한다. 당시 상주에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이가 많자 선생은 사재를 털어 강동, 안강, 김해평야의 곡식을 구해 상주민들을 구휼했다”고 전했다. 이에 선정을 베푼 선생에 대한 선정비와 함께 의성군 단밀면(현재 의성군)들이 세운 사당으로 생사당(生祠堂, 오늘날의 상주 속수서원)을 건립했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버렸다고 했다. “이에 후손들이 그 당시의 생사당(감사나 수령의 공적을 백성들이 고맙게 여겨 그 사람 생시에 그를 위하고자 모시던 사당)을 복원,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선생은 청백리면서 사재로 선정을 베푼 예가 많았는데 당시 상주 사람들이 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해서 건립한 생사당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은 3년째 지금도 진행중에 있다. 이를 복원하면 전국적으로 후손들에게 사표가 될 것이다”면서 이 생사당이 건립되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예가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손태익 어르신은 또 “선생은 돌아가신 이후에도 추서(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주는 것)나 증직이 없었다. 그것은 워낙 직언을 해서인 거 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한편, 손태익 어르신은 “우재 선생을 향사하고 있는 동강서원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서원을 없애려고 서원을 가로질러 철도를 건설하려 했다. 이에 후손인 손진원씨가 주선하고 전 문중후손들이 총동원 되어서 결사적으로 항쟁했다. 이로써 철로의 설계를 바꿀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문중의 중요 행사 지금도 관가정에서 의논하기도 해 안채 대청마루 앞 ‘객거암’이란 현액은 서울에 있던 선생의 당시 집의 이름이다. 객거암은 경상도 선비들의 아지트로 당시, 청백리들이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객거암’은 조 순 전 부총리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손태익 어르신은 “문중의 중요 행사를 논의하거나 결정해야 하는 일이 있을때는 지금도 관가정에서 의논한다. 지난 14일은 위덕대학교에서 관례계례 행사를 관가정에서 치뤘다”고 했다. 관가정 앞마당의 향나무와 관가정으로 올라오는 어귀의 노거수 은행나무는 우재 선생이 관가정을 지으면서 기념으로 식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가정을 자문해주신 손태익 선생은 우재 선생의 15대 손으로 문중 일을 한지는 수 십년 이며 현재 경주손씨 문사협찬위원회 위원장이며 우재선생 속수생사당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다.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을 역임하고 강동농협조합장과 농협중앙회 대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
연신 감탄사를 남발할 수 밖에 없는 정자였다. 경주에 이렇게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니! 지헌止軒 이철명李哲明 선생을 기리는 귀래정은 강동면 다산2리에 위치하며 창건한지 260여 년 되는 조선시대의 정자다. 육각 형태의 평면구성과 독특한 조원造園구성의 귀래정 곳곳에서 발견되는 선조들의 지혜와 철학, 미학적 완성도는 진중하지 못하고 범상한 우리를 숙연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두둥실 구름위에 떠 있는 듯한 정자를 거닐라치면, 정갈한 싯구가 저절로 읊어 질 것만 같다. 그 당시의 틀을 깨는 형식의 귀래정을 설계하고 건축한 이를 예술가로 추앙하는데 한치의 망설임이 없다. 하루 종일 맑은 향기를 토하건만 난초 자신은 그것이 향기로운 것인지도 모르듯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내는 은은함이 귀래정에서 풍겨 나왔기 때문이다. 설화雪花본뜬 6각형 평면형태 하고 있어 육화정이라 불려 귀래정은 조선시대인 1755년(영조 31) 지헌 선생이 별세하자 그의 8, 9대후손인 여강이씨 천서川西문중에서 육화정이라는 가숙(집안에서 경영하는 글방)을 이 곳에 창건하고 자제들을 가르쳤다. ‘귀래정기’에 의하면 ‘귀래정의 본래 명칭은 육화정六花亭 또는 육각정六角亭으로서 정자의 규모가 넓지 않으면서 앞이 통활하고 헌사스럽지 않으면서 그윽하다. 여섯 모서리가 되도록 집을 짓게 된 것은 설창산을 마주 대하여 있어 그 산세가 설화雪花, 즉 눈의 입자가 육각인 것을 연상해 6각형의 평면형태를 하고 있어 육화정이라는 편액을 붙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1938년에 그를 추앙하기 위해 지헌의 문집인 지헌선생문집止軒先生文集을 간행하고,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귀향부歸鄕賦’를 지은 것에 근거,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귀래정’이라 개칭했다. 1991년 경상북도민속자료 제94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헌止軒 이철명李哲明 선생은 이철명(1477~1523) 선생의 자는 지지知之, 호는 지헌止軒, 본관은 여주이며, 경주부북 천상촌에서 태어났다. 1495(연산군 1년)에 진사시에 급제했고 10년 뒤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해 병례조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경주훈도, 홍문관 검교를 역임했다. 1519년 기묘사화가 발발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은거하며 이 곳에서 노모를 봉양하며 말년을 보냈다. 선생은 기묘사화 당시 여러번 상소를 올렸으나 1520년 귀향부를 짓고 돌아오고 2년 후 별세한다. 이 귀향부는 기묘사화로 사람들이 화를 당한 것을 개탄해 낙향을 결심한 뒤에 선생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모방해 지은 것으로 극변하는 조정의 앞날을 걱정하며 괴로운 심정을 읊은 것이라 전하고 있다. 정자와 포사의 출입문 분리시켜 귀래정의 독자성 강조 귀래정의 배치는 정방형의 대지에 전면에 정자를 배치하고 그 후면에는 정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항을 보조하며 지원하는 포사(관리사동)를 배치하고 있다. 외부에서 정자로 접근하는 일각대문을 설치했고, 정자와 포사는 담장으로 구분해 각각 분명한 영역을 이루고 있다. 한편, 정자와 포사의 출입문을 분리시켜 귀래정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육각형 건물에는 온돌을 두는 경우가 드문데 귀래정은 앞뒤로 나눠 앞은 마루로 하고 뒤는 온돌로 했다. 각 방에는 침구를 넣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각 방의 문살 창호도 육각형으로서 이것도 드문 경우라고.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과 빗천장과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정자이면서 강학의 기능을 갖는 경주지역 정자 유형의 특성 잘 나타나 있어 귀래정은 특히 조경 구성이 특이해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정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다. 배치의 특성으로는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북두칠성모양의 연당이 눈길을 끄는데 연당의 면이 7개다. 일반적으로 전통조경에서 연못의 모양은 네모지거나 원형의 형상이 보편적이지만 이곳은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다. 이 연못은 정자의 전면과 좌측에 걸쳐서 위치하고 있으며 다리를 건너면 정자의 전면에 접근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편, 정자와 이어주는 다리는 오작교로 비유하며 정자 전면의 좌우에는 계수나무를 상징한다는 괴석이 당시 그대로 위치하고 있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소의 혀 모양 익공형상은 일반적인 건물에서 나타나는 형식을 벗어나고 있다. 익공의 방향이 밖으로 향하고 있는데 비해 귀래정은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최영기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이자 건축학박사는 -歸來亭과 三槐亭의 건축특성-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의미에서 자기자신의 세계를 관조하는 형상이 되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공간처리 기법’이라고 했다. 이것으로도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 하면서 조용하게 은거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최 박사는 또 ‘육각형 형상의 정자는 매우 희귀한 평면으로 일반적으로 사각형, 팔각형의 단일 건물로 된 정자일 경우 누마루로만 이루어지고 방을 들이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나 귀래정은 단일평면이면서도 방을 들이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유형은 별장의 성격이 강하며 정자이면서 강학의 기능을 갖는 경주지역 정자 유형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A 귀래정의 기둥은 원형과 방형으로 하나씩 섞여 있었는데 모서리진 각진곳에는 원형기둥을 세우는 심미안과 지혜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옛 조상들이 얼마나 신중하고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헌 선생의 후손인 15대손 이진동(75), 14대손 이원봉(72)어르신은 “문화재 지정이후 담장을 새로 만들고 연당의 석축을 바꿨는데 예전 담장이 이렇게 높지 않았다” 고 하면서 “우리가 어릴때를 기억해보면 담장이 낮아서 정자의 안이 잘 보였다. 또 담장에는 ‘봉창(담장 속 담구멍)’이 있어서 공기가 순회하도록 했던 것 같다”고 했다. 또 정자의 규모에 비해 대문이 커 보인다 싶었더니 “어르신이 겨우 몸을 숙여 들어 올 정도로 작지만 옹골찬 문이었는데 대문 역시 보수하면서 다소 크게 만들어 버린감이 있다”고 두 어르신은 전했다.-정자의 난간, 보수한 지금 모습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섬세해 귀래정은 1755년 창건이후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다. 가숙으로 창건할 당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상량문에 의하면 자손들이 십시일반해서 지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두 어르신은 “정자의 난간은 예전에는 굽이치는 듯한 구름문양으로서 지금의 모습보다는 훨씬 더 화려하고 섬세했다. 난간을 보수 할 당시는 귀래정이 문화재지정 이전이어서 문중에서 자비로 보수했기 때문에 단순하게 처리했다”면서 “난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난해 보수한 정자로 연결되는 다리도 원형을 상실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본래 이 다리는 중간부분이 약간 높은 나무로 된 완만한 무지개형 다리모양이었다. 또 다리의 옆에는 높이가 나지막한 난간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화강석으로 단순하게 디자인한 지금의 다리에서는 예전의 고아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음력1월 20일 정초문례(연시총회), 후손들 정자에 모여 20여년 전까지 정자를 관리하고 심부름을 해주는 관리인이 살고 있었다고. 지헌 선생의 후손이 정자에 모이는 정초문례(연시총회)는 음력1월 20일로 이날은 각 지역의 후손들이 모인다고 했다. 최근 귀래정의 가치와 건축미를 인정받아 조심스레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 되면 귀래정으로부터 반경 500미터까지 인근주민이 각종 제재를 받는다는 의견이 많아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강동면 유금리에 위치한 형제산 중 제산 자락에 자리잡은 동강서원은 조선 전기 중종 때의 명신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선생을 향사하고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5도 유림의 공의로 건립된 서원이다. 간간이 내리는 빗속에서 뜰에 서 있던 고색한 석등이 유난히 고즈넉했다. 1996년 경상북도 중요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된 이 서원은 2010년 세계문화유산 1324호로 등재돼 있기도 한 소중한 곳이다. 우리나라 서원 중 동강, 옥산, 안동의 병산서원 3군데가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고 하니 우재 선생의 학과 행의 고귀함을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동강서원은 청백한 삶을 가풍으로 조성했으며 투철한 관료의식과 애민 사상을 지녔던 우재 선생의 정신이 원내의 곳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관직사회에서 최고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청백리에 녹선된 것도 바로 그런 맥락 아니겠는가. 현재 동강서원의 소유와 관리는 경주 월성 손씨 문중에서 하고 있다. 양민공 손소孫昭의 아들이자 1515년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 손중돈 선생 손중돈 선생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양민공 손소孫昭의 아들로서 본관이 경주이며 호는 우재愚齋. 휘는 중돈仲暾이고 자는 태발太發이다. 시호는 경절景節로서 선생은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가학을 철저하게 계승해 학자와 관료로 성장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고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한다. 1489년(성종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과거급제한 후 이듬해 경주 주학훈도에 근무한다. 예문관봉교와 여러 청환직(학식이나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홍문관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계림 손공이라고 했다. 1497년(연산군 3) 노부모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 양산 군수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성균관 사예와 사복시정을 지냈다. 중종반정 직후 1509년 상주목사직을 완수하고 우승지로 조정에 복귀한다. 대신들이 공이 청렴 결백한 덕이 있다고 천거해 1515년 중종의 특명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1517(중종 12)에는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도승지를 세 번, 대사헌을 네 번 지냈으며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ㆍ함경도 네 도의 감사를 지내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의정부의 정2품 관직이었던 우참찬(이조판서)과 세자 빈객이 되는 등 중요 요직을 두루 거친 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29년(중종 24) 향년 67세로 생을 마감한 선생은 40여 년의 세월 대부분을 관료로 봉직했다. 선생은 동강서원과 더불어 상주 속수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다. 속수서원은 중종반정 직후 상주목사로 재직해 선정을 베푼 선생에 대한 선정비와 함께 의성군 단밀면(현재 의성군)들이 세운 사당으로 생사당(生祠堂, 오늘날의 상주 속수서원)을 건립한 것이다. 이는 선생의 학자적, 관료적 면모를 높이 기리기 위해서였다. 우재 선생 도학의 철학...궁리진성窮理盡性 궁리진성窮理盡性은 우재 선생 도학의 철학으로서 주역 설괘전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사물의 이치를 깊게 연구하고 타고난 본성을 다해 천지 자연의 이치인 천리天理에 이른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선생은 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성리학을 강론했고 조정안에 성리학을 확산 시키는데 부심했다. 성리학적 소양이 매우 깊은 이였고 그 소양을 관직이라는 매개를 통해 끊임없이 국정 운영에 반영하려 했다. 16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관료로 평가되고 그의 학문을 두고 ‘이치를 궁구하여 천성을 다했다’고 평하고 있다. 선생은 집에 있을 때는 검소 절약하여 천장에 비가 새고 자리가 해어져 떨어져도 편안해했으며 공무에 있어서는 종합해 다스리는 일이 주도 면밀했다고 전한다. 또한 강직 청렴해 항상 청백리의 칭송이 따라 다녔다. 천성이 간결하고 조용하며 시끄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5도의 유생들이 뜻을 모아 창건, 무려 10여 년 세월이 소비된 거대한 역사 동강서원은 1707년(숙종33) 선생의 궁리진성의 도학을 연원으로 한 학덕을 기리기 위해 5도였던 경상, 충청, 전라, 함경, 황해도의 유생들이 뜻을 모아 창건했으며 강당 및 묘우가 완성돼 위패를 봉안했다. 동강서원의 건립은 무려 10여 년 세월이 소비된 거대한 역사였다고 전한다. 1717년(숙종43) 2월 하정에 향례를 시행했으며 1773년 누각인 탁청루를 건립한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이에 묘우마저도 사라져 1901년(광무5) 선비들에 의해 설단이 합의되고 1908년 3월 하정에 설단 제향이 시행됐다. 1917년 활원재가 건립되고 순교당은 1957년 복원된다. 1979년 동재인 궁리재, 서재인 진성재, 신도비각을 동시에 건립한다. 1999년 누각인 탁청루는 국비 2억 4천만원을 지원받아 중창된다. 지금 원내에 있는 건물로는 묘우인 숭덕사崇德祠, 강당인 순교당諄敎堂, 신문神門, 동재인 궁리재窮理齋, 서재인 진성재盡性齋, 누각 탁청루濯淸樓, 임시강당으로 쓰였던 활원재活源齋, 신도비각, 전사청, 관리사인 포사 등이 있다. 묘우의 숭덕사와 강당인 순교당의 현액은 번암 채제공의 친필이라고 한다. 이들 건물군의 명칭들은 선생의 학문적 지향과 자취를 잘 담아냈다고 한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손중돈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순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했다. 활원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현재는 서원의 큰 행사나 손님접대에 사용하고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하정에 향사 우재 선생의 후손인 손익삼(82), 손국익(80) 어르신은 “서원의 누각인 탁청루 앞으로는 낚시질도 할만큼 형산강물이 빙 둘러 흐르고 있었다. 누각은 원래 5칸 겹집이었는데 훼철이후 복원 할 당시 신도비각을 먼저 건립해 터가 협소해 칸을 줄여 지금의 3칸 누각으로 복원했다”고 했다. 두 어르신의 말처럼 수양버들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어 강물이 흐른 흔적이 있었다. 누각이 있는 서원은 종합대학으로, 누각이 없는 서원은 단과대학에 비유된다. 누각은 세우고 싶다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강당에서 공부에 전념하던 유생들이 머리를 식힐겸 누각을 올랐다고 한다. “묘우와 강당, 누각이 모두 훼철 되고 당장 기거 할 수 없어지자 1917년 활원재를 지어 임시 강당겸 서원으로 강당이 복원되기 전까지 사용했다. 묘우도 없어져 단소를 만들어 향사를 모셨다”며 이를 설단향사라 한다고 회상했다. 탁청루에는 중창기문과 함께 원래의 기문이 있었다. 원래 서원의 현판들은 양동마을 유물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동강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하정에 향사를 모시고 있다. -경절공 선생의 학문을 널리 알려 주었으면 선생의 15대이자 16세손인 손무익(62) 후손은 “올해 세계문화유산재단에서 29억이 나왔다. 그 비용으로 서원 주위 정화사업을 할 계획이다. 주차장을 만들고 신도비각을 옮길 것이다”고 했다. 원래 이 서원은 서원 앞의 철길까지 포함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서원을 없애려고 서원을 가로질러 철도를 건설하려 했다. 이에 후손 손진원 선생이 철도청을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서원을 비켜나가도록 철길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누각 자리가 지금의 철길이 난 자리에 있었는데 부득이하게 철길이 나는 바람에 지금의 자리인 뒤쪽으로 물려 복원 했던 것이다. 서원주위의 어울리지 않게 위치한 하수종말처리장에 대해 묻자 손무익 후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이어서 제재를 할 수 없었다”며 누각 앞 복잡한 풍경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2011년 경상북도 문화원 연합회에서 선생에 대해서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여기서 시사하듯, 우리가 바라는 것은 경절공 선생의 학문을 널리 알려 주었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다”며 후손들의 바람을 전했다.
본격적인 모내기가 시작된다는 절기상 소만인 지난 21일, 강동면 다산리에 있는 삼괴정三塊亭을 찾았다. 삼괴정은 임진왜란 당시 경주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동호東湖 이방린李芳隣 선생과 동생인 유린有隣·광린光隣 삼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7대손 이화택이 1815년(순조 15)에 건립한 정자다. 다산리에는 아직도 동호 선생의 청안 이씨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모내기 준비가 한창인 마을은 다소 부산해 보였다. 초여름을 암시하는 태양은 따가웠으나 오월의 바람은 삼괴정 뜰의 향나무와 정자 입구의 괴나무 잎사귀에, 정자의 계자난간에 살랑이고 있었다. ‘흡’하고 숨이 멎을듯한 적요하고 순정한 삼괴정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건립한지 200년을 넘긴 삼괴정은 경주의 고택을 찾아 다니는 기자의 심미안을 흡족케 한 것이다. 정자를 수차례 오르내리고 거닐면서 그 해사한 품격과 여유로움에 홀딱 반해 버렸다. 선애경 기자 violetta22@naver.com 삼괴정三槐亭, 1815년 건립한 조선후기 정자 삼괴정三槐亭은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로서 1992년 7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이 정자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경주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동호 이방린 선생과 동생인 유린·광린 삼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7대손 이화택이 1815년(순조 15)에 건립한 정자이다. 1812년 정자 짓기를 합의하고 3년여의 기간끝에 계유년 마침내 12칸의 큰 정자를 완성했다. 삼괴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삼형제가 의병으로 출전하기에 앞서 현재의 정자터에 괴나무(회화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놓고 출전한 것에 연유한다. 삼형제가 심었다는 괴나무는 고사해 지금은 없었지만 그 뿌리가 자라 다시 자라 신록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정자는 본채와 외삼문으로 구성된 배치이고, 전체적으로 ‘丁’자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잇댄 가적지붕 형식이다. 경사진 대지에 터를 잡아 전면은 누각으로 꾸미고, 출입은 뒤쪽으로 하게 했다. 전면에 대문이 있고 왼쪽에 일각문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경주에서 의병 일으켜 공을 세운 동호이방린 선생 이방린 선생은 경주판관이었던 박의장, 의병장 권응수와 함께 영천성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이때 화포장火砲匠이었던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경주성을 탈환했다. 이는 ‘관감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방린 선생은 계연 전투에도 공을 세우고 안동대도호부 판관 겸 부사를 역임했다. 한편, 당시 그 뛰어난 공적과 위대한 업적은 후손들의 자랑이었지만 조정에서는 적절한 포상이 없어 향인들이 두고두고 개탄했다고 전한다. 형제들의 여유만만한 태도와 더불어 돈독한 우애와 남다른 효성은 두고두고 청안 이씨 가문의 모범이 되었다. 대청 한복판 뒤쪽으로 놀라운 공간이…독특한 공간구성 수법 사용 평면은 정면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나 특기할 사항은, 다시 대청의 한복판 뒤쪽으로 ‘필경재必敬齋’칸이 뒤쪽으로 더 빠져 나가도록 하고 높이를 대청보다 50Cm 정도 높게 위치하도록 독특한 공간구성을 한 ‘놀라운 공간’이 나타난다. 일자형 평면의 구성에서 세로로 2칸의 누마루방이 접해있어 매우 특이한 평면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 또한 정자 전면에는 기둥에서 돌출한 누마루 형식의 툇마루가 있고 계자각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청마루아래에는 정자를 받치고 있는 장정의 몸통보다 굵은 원기둥들이 듬직하게 무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 위에는 작은 원기둥과 마루 위 중앙 3곳에 팔각기둥을 각각 세워 건물의 격을 한층 높이고 있었다. 필경재必敬齋, ‘화수당花樹堂’, ’포죽헌苞竹軒’ 건물의 정면에 삼괴정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2개의 방에도 각기 현판을 달았다. 대청의 필경재는 이방린을 의미하며 상청上廳이라 부르고 있으며 좌,우측방은 ‘화수당’, ’포죽헌’이라 하여 두 동생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화수당은 한달에 한 번씩 화합하듯이 큰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며 의로움을 일컬었다. 포죽헌은 정자의 토대가 더부룩하게 자란 대나무 같이 견고하고 상부의 치밀함은 무성한 소나무같다는 뜻으로 제목을 붙여 시가를 읊고 노래를 부르고 즐겼다고 한다. 뒤편 필경재에서는 예법과 음악을 또한 즐겼다고 한다. 이방린 선생의 22대손이자 문유사인 이진준(53)씨는 “백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필경재 한켠이 풍우에 기와가 벗겨지고 서까래까지 떨어져 붕괴의 위험에 처했다. 후손인 이용관은 자재와 경비를 부담하고 목공을 구해 일을 시작하고 문중노소가 힘을 모아 관리해 수리를 마쳤다”고 전했다. 문화재 지정이후 보수할 당시의 고기와가 뜰의 한켠에 차곡차곡 보관돼 있었다. 정자의 출입문인 대문은 외삼문 3칸으로 가적지붕 형식의 대문으로 정자의 본채 형식을 그대로 축소한 양식의 대문이다. 이 대문의 양식은 전국에서 두어군데 뿐이라고 한다. 건물이 서향의 배치인 관계로 정면의 창호에는 햇볕을 차단하며, 우천시 비를 막을 수 있도록 외부에 판장문을 덧대었다. 지금도 장마철이면 아궁이에 군불 지펴 습기 제거 이진준씨는 “이 동네는 청안 이씨의 집성촌으로 정자를 관리하던 하인이 살던 사택도 있다. 이 관리사동도 중수를 여러번 거쳤다. 예전에는 초가 형태였는데 후손들이 기와로 바꿔 지었다. 이 부속체는 맞배지붕에 방형기둥을 사용한 일반적인 형식이다. 예전에는 하인을 두고 삼괴정의 관리를 했으나 지금은 삼괴정 주위에 거주하고 있는 인근 후손들과 일가들이 2년에 한번씩 유사를 선임해서 조상들이 남긴 농토와 함께 삼괴정을 관리하고 있다” 고 설명했다. 이씨는 또 “정자의 양쪽방은 지금도 우리 문중의 행사시 손님들이 묵는다. 음력 섣달 그믐날(설날 하루전)에 문중 어른을 모시고 한해를 보내는 마지막 인사로 절을 드린다. 예전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정자에서 바둑도 두고 장기도 두고 했으나 이제는 경로당에 가시니 비워져 있다” “다산리 삼괴정 뒤산에는 이방린 선생의 묘소가 있다. 원래는 묘소 아래 재실이 있었으나 오래돼 붕괴되었다. 매년 시월 초열흘날 묘제를 모시는데 날씨가 좋을때는 묘소에 가서 직접 제사를 올리고 비가 오면 분향을 하고 삼괴정에서 모신다”고 했다. 삼괴정의 각 현판의 글씨가 오랜 시간탓인지 흐릿하게 지워져 가고 있었는데 “경주시 문화재과에 현판의 글씨를 복원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에 대해서 답변이 늦어지고 있어 애가 탄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무방비로 전선들이 노출되어 있어 정자의 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전선을 감추는 전기공사가 시급하다”며 부속건물인 관리사동도 누수가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지금도 장마철이면 습기가 많아서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 방의 습기를 제거하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삼괴정에 대한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외삼문의 형식과 강당 기능을 한 서원의 배치형식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삼괴정도 서원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본채의 규모가 일반적인 정자의 규모보다 크게 지어졌던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삼괴정은 순수한 정자로서 지어진 것보다도 선조를 기리며 학문을 도야하는 추념의 성격이 강하게 내포된 건물인 것이다. 농번기에도 불구하고 자문을 구해주신 청안 이씨 영남파 22대손이자 동호 이방린 선생의 13대손인 이진준 (53)씨에게 감사 드린다. 한편, 최영기 건축학박사의 ‘귀래정歸來亭과 삼괴정三槐亭의 건축특성’ 중에서 일부 내용을 인용했으며 청안 이씨 신재공파 삼괴정 문중에서 발간한 자료집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입하를 지난 13일, 경주국립공원 서악지구의 선도산 자락에 위치한 도봉서당挑峯書堂을 찾았다. 일찍 찾아온 초여름의 더위는 진했다. 정자인 연어재 마당 한켠에서는 신록을 자랑하는 사철나뭇잎이 유난히 반짝거렸고 복원한지 100여년 된 도봉서당은 태연하고 의젓해 번잡한 ‘삶의 저편’을 조용히 돌아보게 했다. 도봉서당은 조선 전기의 문신 불권헌不倦軒 황 정黃玎 선생의 학덕과 효행을 높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묘하재실墓下齎室’이었다. 도봉서당은 건축적 측면에서는 묘하재실에서 출발해 서당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인 서악리삼층석탑을 지척에 두고 있었으며 신라 제47대 왕인 헌안왕릉과 나란히 황 정黃玎 선생의 묘소가 있어 역사적 장으로서도 그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었다. 황 정 선생은 덕과 명망이 높아 청백리에 빛났으며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이에 선생의 후손들은 꾸준한 관심과 애정으로 최근까지 도봉서당 일원의 복원을 진행하며 관리하고 있었다. @IMG2@ -평해 황씨 경주입향조 황천부의 4대손 황 정黃玎 선생 평해 황씨 시조는 학사공 황 락 으로서 신라 유리왕 4년 평해 월송정에서 대대로 살았다. 여조, 즉 고려와 조선조에 와서는 검교공 황온인에 의해 평해 황씨의 본관으로 정착한다. 이후 황온인의 7대손이자 경주입향조가 된 황천부는 평해 월송정에서 ‘관지내금장’으로 있을 당시 오도순영사로 순행을 하다가 경주에 복거(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하고, 입향조가 되었다. 경주입향조 황천부의 4대손이 황 정 선생이다. 다시말해 황 정 선생은 황온인으로부터는 11대손이 되는 것이다. -수학修學과 교육에 힘쓰고 권세와 금욕金慾을 배제, 청백리의 표본으로서 후세에 귀감 황 정黃玎(1426~1497) 선생은 1426년(세종 8) 남중리, 지금의 교동에서 출생하고 자는 성옥, 호는 불권헌이며 1464년(세조10)이던 49세에 사마시와 문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경상감사 김종직의 권유로 벼슬에 나가 성종조에 혜민서 교수가 되었으며 승문원 교검,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으며 그 후 1487년 (성종 18) 승문원 교리, 경상도 도사를 거쳐 판관을 역임하고 성균관 전적을 거쳐 1493년(성종 24)시강원 찬독관(성종의 아들 딸인 왕자군을 가르치는 역할)을 지내다가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낙향해 1497년 연산군 3년에 서거했으며 현재 도봉서당에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선생의 17대손이자 이 문중의 유사이기도 한 황한섭(72)어르신은 “안타깝게도 선생의 문집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금 전해지는 선생에 대한 자료는 그간 후손들이 성균관에서 수집한 자료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 자료를 근간으로 ‘불권헌 선생 실기’를 단행본으로 펴냈다”고 설명했다. 선생은 덕행과 도덕, 수학修學과 교육에 힘쓰고 관직에 있을때는 권세와 금욕金慾을 배제하고 청백리의 표본으로서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IMG3@ -김종직 선생, 윤필상 선생 등과 교유...도봉서당과 연어재에서 시운詩韻 나눠 황한섭 어르신은 “선생과 교유한 인물로는 점필제 김종직 선생,윤필상 선생 등이며 특히 김종직 선생과는 시운의 교류가 있었다”며 “김종직 등의 인사가 황정 선생을 찾아 경주에 오면 당시 대나무가 많았던 이곳 도봉서당과 연어재에서 담소를 나누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다. 황 정 선생과 김종직 선생이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화답하며 나눈 시운이 기록에 남아있는데 아래는 그 중 한편이다. ‘연비어약(군자의 덕이 널리 미친 상태)하늘과 함께 빛나니/ 물위 근원 멀고 멀어 연못은 가득하다/ 봉창의 맑은 바람 홰나무에 불어오고/ 청아의 끼친 혜택 월성의 곁이로다/ 애벌레가 변화함에 사람이 가르침을 알며/ 사슴이 높이 뛰며 세상의 상서로다/ 가을 서선 파한 후에 자리를 같이하며/ 푸른 대나무 바라보며 술잔을 함께 한다// @IMG4@ -도봉서당 挑峯書堂, 연어재鳶魚齋, 상덕당常德堂 등 7동으로 구성 도봉서당은 황 정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545년(중종 1) 추보재追報齎라는 이름으로 후손들이 건립한 제사齊舍 건물이었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손상을 입었으며 1915년에 추보재가 있던 자리에 새로이 서원의 형태로 건물을 재배치하고 도봉서당이라 명명하고 지금에 이른다. 황한섭 어르신은 “선생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수호하다가 2003년부터 도봉서당에 관한 전국의 문화재자료를 바탕으로 수집해서 경상북도에 알리고 문화재 발굴과 자료 수집을 3년에 걸쳐 한 결과, 2006년 2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7호로 지정되었으며 도봉서당 외 연어재와 상덕당 복원의 진척이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도봉서당 일원은 외삼문인 숭앙문, 강당인 도봉서당, 동재인 추보재, 서재인 연어재, 사당인 상덕당常德堂을 비롯해 총 7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배치하고 있다. 이런 배치 형식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강당인 도봉서당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앞면 5칸·옆면 1칸 반이며 두칸의 대청에 오른쪽 방 한 칸, 왼쪽방 두 칸을 각각 두고 있다. 이 방들에는 유생들이 기거했다고.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옆쪽과 뒤쪽에 쪽마루를 두었다. 복원 이후에도 여러번에 걸쳐 중수했다고 한다. 황한섭 어르신은 “2007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었는데 원래 사당인 상덕당은 2008년에 복원 되었고 지금은 신위가 모셔져 있지 않다. 그래서 묘제를 위주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상덕당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의 형식으로서 앞면 4칸·옆면 1칸 반이다. 서재인 연어재는 2011년, 원래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남쪽과 동쪽을 각각 팔작지붕으로 처리했다. 동재인 추보재는 2010년 복원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여러 건물 가운데서도 연어재를 통해 건축미를 느낄 수 있으며 묘하재실의 기능에 맞도록 창호와 마루가 설치된 점에서 건축적 가치를 살필 수 있다. 인상 깊었던 또 하나는 오래되어 보이는 우물이었는데 사당과 동재 사이에 위치한 이 우물은 ‘1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고 있었고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다. 일찍 찾아온 초여름의 열기는 우물을 보는 순간 청량감 탓인지 다소 더위가 희석되는듯 했다. 그리고 너른 바위 하나가 선생의 묘소 올라가는 길에 있었는데 이는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갈때 선생의 묘소를 찾아 배알 하고 이 바위를 만지고 갈면서 ‘과거 급제’의 소원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수백년 전통 그대로 묘제 지내고 있어 황 어르신은 “매년 음력 10월 15일 도봉서당의 뒷산에 있는 묘소에서 묘제를 지내고 있다. 묘제는 아직까지 수백년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묘소가 가까이 있어서 묘소에 향을 피워서 모셔와서 묘제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평해 황씨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수호하다 울산에서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자문을 해주신 황한섭 어르신은 2002년부터 도봉서당의 향내 총무로서 세인들이 잘 모르는 황 정 선생의 거룩한 업적을 일깨우고 도봉서당 일원의 복원 및 중수를 진행하는데 있어 문중의 여러 후손들과 노력해 지금의 결실을 얻어낸 이다. 현재, 도봉서당은 신라문화원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신라문화원이 고택스테이를 실시하고 있는 곳 중 하나다. 고택스테이는 주로 동재와 서재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도봉서당 일원은 황 정 선생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수호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 명리에 분주하나 꿋꿋이 홀로 고절을 지키시어 저 손곡의 깊은 골짜기에 종오정이 우뚝하구나’
정자가 시원하니 봄경치가 아릿답고/ 호수가 평온하니 거울처럼 열었네/ 중략.../ 온갖 잡념 모두다 쓸어가는 곳/ 삼공자리 바꾸어도 즐겨옴직 한 곳이라/ 여기 오르니 한없는 생각 일어나는데/ 봄날은 안타깝게 먼저 기우네// 이 시는 육의당六宜堂 최계종崔繼宗 선생과 나이가 비슷했던 전식全湜 선생이 경주 부윤으로 내려와 육의당六宜堂을 찾아 읊은 시다. 육의당은 외동읍 제내리(못안리)에 위치해 있다. 외동읍과 울주군 치술령의 북쪽 견불산과 마주한 곳에 호수 ‘토상지吐上池’가 있고 거기 육의당이 있다. 토상지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는데 육의당은 바로 이 호상에 세운 것이다.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고사했음에도 400년 수령의 몇 그루가 육의당을 에워싸고있어 단촐하고 검박한 육의당의 고색古色을 돋보이게 했다. 이름 모를 새들의 한가로운 지저귐은 제내리 봄날 오후의 평화를 더욱 여유롭게 하고. 선애경 기자 violetta22@naver.com -육의당, 최계종 선생이 지은 ‘별서(별장)’ 육의당은 조선시대의 가옥으로 1991년 경북유형문화재 제263호로 지정 되었다. 조선시대 육의당六宜堂 최계종崔繼宗(1570~1647) 선생이 1619년(광해군 11)에 지은 별장으로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육의당’은 선생이 기거하던 집이고 경주 향중이 선생을 높이 모시는 서원을 둬야 한다는 간청에 의해 ‘석호정사’를 창건한다. 매년 봄 음력으로 3월 중경에 향사를 받들고 있다. 현재 육의당은 석호정사의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한차례 중건과 수차례의 중수 육의당이 정자로 규모가 갖춰진 것은 차남 백사공에 의해서다. 백사공은 구례현감에서 돌아와 육의당에 머물면서 그 규모를 증수했다. 여기에서 날마다 명사들과 함께 시가를 읊으면서 자적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터를 제공했다. 이후 육의당을 세운지 100여년이 지나자 건물이 기울어지고 상해 오세손五歲孫 최달징이 일가와 함께 중수하기로 하고 자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병신년(1776, 영조52년)에 육의당을 새로 세운다. 이것이 육의당의 한차례 중건이다. 1890년 다시 중수하는데 이는 후손 최세한 등이 주간했다. 정자가 당시 많이 퇴락되어 보수에 따른 비용이 많이 들었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종친들이 돈을 모아 갹출하고 인근 이웃 마을 사람들도 이일에 동참했다고 한다. 다시 40여년이 지난 1930년, 육의당이 퇴락해 후손 최정섭 등의 노력으로 중수한 기록이 있다. 이후 한차례 1977년에 다시 중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육의당의 소유주는 백사 선생의 주손인 최장식 어르신이다. 최계종 선생의 문중에서는 육의당과 석호정사를 관리하고 있다. -육의당六宜堂 최계종崔繼宗 선생은 선생의 자는 경승이고 호는 육의당, 본은 경주다. 최계종 선생은 23세 당시 임진왜란 때 숙부인 최봉천, 형兄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인박령咽薄嶺 노곡 계연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갑오년(1594) 무과에 급제하고 의병을 창의한 공으로 서생포 수군첨절제사를 거쳐 충청도 남포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임란이후 광해군의 난정으로 나라가 크게 어지럽자 ‘나라를 그르친 임금아래 관직을 하지 않겠다’고 해 벼슬을 거역한 죄로 함경도로 귀향을 가게 된다. 이런 와중에 충주에서 ‘한음’ 이덕형 선생이 ‘노모를 모시기 위해 벼슬을 마다한 것이지 항거한 것이 아니다’고 해 귀향을 면한다. 이후 선생은 모든 관직에 나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관직을 버리고 이곳 육의당 별장에서 일생 동안 은거하며 지냈다. 당시 형 정무공은 여러 고을의 벼슬을 역임하는 것에 비교된다. 최계종 선생의 12대손 최종식崔鍾植(86)선생은 “육의당은 여섯가지 마땅함이 있다라는 뜻으로 ‘아침과 저녁의 경치가 다르고 춘하추동 네 계절의 절경이 각기 다른 특이한 곳’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육의당에서 선생은 항상 시를 음영하며 소요하다가 여생을 마치니 향년 78세였다. 선생은 광해군 이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낙향해 자연질서의 변화속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성현의 글에 심취했던 것이다. 아울러 차남인 백사 최동은과 함께 시서를 토론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1933년 ‘석호정사石壕精舍’창건, 육의당 선생 봉안 육의당에 향사하려는 논의는 후손들 중심으로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한다. 마침내 후손 최정섭은 1922년 향의를 주도해 당시 83냥의 기금을 조성한다. 조상을 숭상하는 후손들의 열정과 성의는 1933년 육의당을 ‘석호정사石壕精舍’로 격상시키고 육의당 왼쪽 노송이 우거진 언덕에 묘우를 창건한다. 주향은 육의당 선생으로 모시고 차남인 백사 선생을 배향하고 봉안했다. 최종식 선생은 “석호정사에는 최계종 선생의 차남 백사白沙 최동은의 신위와 함께 배향 되어있다. 백사 선생은 사마시에 합격을 해 성균관 진사를 지낸 분이다. 구례현감 당시 월봉을 받지 않고 구례현을 위해 기증할 정도로 인품이 뛰어난 이였다”고 강조했다. 석호정사에는 묘우인 상의사尙義祠와 제수를 보관하는 전사청에는 늙은 소나무가 드리워져 있었다. 묘우의 삼문은 정명문貞明門이라 한다. -흔치 않은 별서別墅건축의 미 지녀 최종식 선생은 “육의당은 약 400여년 된 가옥이다. 중수는 여러번 하고 중건도 한차례 했다”고 하면서 “창건 이후 후손들에 의해 4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치면서도 영쌍창이 남아 있고 고졸한 대청 상부의 가구수법 등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육의당은 구릉지대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장방형으로 토석담장을 둘러쌓은 마당 안에 동남향으로 ‘-’자형으로 육의당을 앉혔고, 앞쪽에는 사주문, 뒤쪽에는 협문(일각문)을 내어 외부와 통하게 하고 있다.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1칸이지만 측면은 좀 긴편이고, 중앙 2칸이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이며, 마루방 양측에는 1칸 온돌방을 대칭적으로 배치했다. 양쪽문의 가운데 기둥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좌측 온돌방 배면의 중방간 위쪽 처마 밑에는 벽장이 있다. 마루방과 온돌방 앞쪽에는 모두 쪽마루를 두었으며, 양측방은 온돌방이다. 기단은 거칠게 다듬은 화강석을 2단으로 쌓고 자연석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웠는데, 마루방 앞쪽 중앙기둥만은 둥글게 세웠다. 건물의 정면과 대청의 뒷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했다. 육의당은 특이하게 미닫이창과 출입문을 내고 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 경계의 건물 앞쪽 칸에는 3분합 들문을 달고 뒤쪽 칸에는 외짝 들문을 달았다. 화강석으로 2단 쌓기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대청 중앙 한 곳에만 둥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네모진 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양측에 바람과 비를 막으려고 잇대는 널빤지, 즉 풍판을 단 맞배지붕이다. 육의당은 산자수명한 곳에 지은 흔치 않은 별서건축으로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중간 문설주(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가 남아 있는 영쌍창 등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으로 창호 형식에 볼거리가 있는 건물이다. 노구에도 심도있는 자문을 구해주신 최계종의 12대손 최종식 선생은 지금까지 석호정사의 향사나 관리에 주관이었고 문중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경주향교의 전교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경주향교의 고문으로 재직중이다. 그리고 자문을 맡아주신 후손 최종식 선생이 쓴 ‘석호정사지石壕精舍誌’와 조철제 선생의 ‘경주문화논총, -석호정사(육의당)편-’에서 참고자료로 발췌 인용한 부분이 있음을 밝힌다
오늘, 우리의 상처를 보듬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잉태 할 수 있는 인문학적 자산이 풍부하게 녹아있는 천혜의 자연 환경 속 ‘만화방창萬化方暢’하고 있는 양동마을은 봄이 만개하고 있었다. 절정을 지난 자목련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 경산서당은 유서깊은 선조들의 삶과 정신이 묻어있는 양반마을(역사마을)인 양동의 ‘물봉고개’에 위치한다. 안강평야의 넓은 벌판과 경주에서 흘러들어 마을 옆을 흐르는 기계천(안락천),형산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이다. 박제화되어 유물로만 전하는 곳이 아니라 유교문화가 여전히 현실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곳이 바로 양동마을이다. 경산서당 역시 관광자원으로서의 기능에 그치지 않고 생활속 유교의 문화마당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었다. 5월1일, 석체례 향사를 앞두고 있는 경산서당은 고졸하기 이를데 없었다. 경산서당은 조선후기의 서당으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장손이자 시대의 사표인 무첨당無 堂 이의윤(李宜潤, 1564∼1597)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서당이다. 조화롭고 즐겁게 그리고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삶을 영위하는 지침과 전통적 가치를 반영해 오늘의 실천 덕목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경산서당을 찾았다. 무첨당無 堂 이의윤李宜潤선생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장손이며, 수암 이응인의 장자이다. 1564년(명종 19)∼1597년(선조 30). 본관은 여주. 자는 수연 然, 호는 무첨당無 堂. 선생은 뛰어나게 총명하고 단아하며 조용하고 욕심이 없었다. 예절을 숭상해 나들이할 때에 반드시 사당에 고하였고 항상 아침 일찍 배알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선조를 제사하는 예절은 그 선조를 따랐다. 일찍이 정구(鄭逑: 1543∼1620)의 문인이 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독서와 효행을 독실히 행하다가 34세에 요절한다. 효도하고 우애하며 지조를 굳게 지키면서도 다른이와 화합했다. 사림에서는 선생을 추도해 사원을 세웠고 저술로는 ‘무첨당선생문집’이 있다. 경산서당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경산서당은 1838년(헌종4), 지금의 강동면 오금리 일대로 추정되는 ‘낙산’에 창건했다. 이후 1857년(철종 8) 안계리로 옮겨 세웠고 1870년(고종 7)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린 것을 1918년 재건하였다. 이후 1967년, 포항제철 공업용수댐인 안계댐 공사로 인해 안계리가 수몰지역으로 정해지고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이건 당시, 목재나 기왓장, 서까래, 기둥까지 그대로 가져와서 지었으며 관리사동도 그대로 옮겼다고 전한다. 심지어 관리사동 정원의 나무까지 옮겼다고. 경산서당 각 현판의 의미는 ‘경산慶山’은 시경의 ‘저 경산에 오르니 소나무와 잣나무가 곧고 곧다’ 에서 유래한다. 백세토록 옮겨지지 않을 묘우를 만들 재목을 취한 산이 경산이니 오랜 세월동안 기림을 말한다. ‘이선당二善堂’의 ‘이선’은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효자는 부모의 뜻을 잘 잇고 사람의 일을 잘 준행한다’ 에 나오는 두 선 자를 의미한다. 이는 효에 관한 실천적 의무에 충실했던 무첨당 공의 행적을 밝힌 것이다. ‘보인재輔仁齋’는 강당 동방 문의 현판으로 벗이 서로 선을 요구하면 덕이 날로 나아가 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심경재尋敬齋’는 강당 서방 문의 현판으로 배우는 자는 오롯하여 흔들리지 않아야 학문에 매진 할 수 있기에 이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경산서당 동재의 ‘학진재學眞齋’는 배우는 이는 반드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다. ‘양지재兩止齋’는 도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자세를 말하며 배우는 자는 반드시 죽음이후에야 그만 두어야 함을 이른다고 했다. ‘윤암 장학회’에서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 경산서당의 묘우는 훼철된 이후 복설하지 않았다. 경산서당은 강당인 이선당二善堂과 동재, 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강당은 정면 5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동재는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이선당은 정면 5칸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며 양쪽 온돌방 1칸씩을 두고 있다. 양쪽 방(보인재輔仁齋, 심경재尋敬齋)은 ‘선생’들의 숙소였다. 지금은 향사시 보인재에 초 ,아, 종 헌관이 거하며 성손들이 보좌한다. 심경재에는 대축, 집례 등 타 성씨의 손님들이 유한다고 한다. 이 강당에서는 지금도 녹색농촌마을이라는 체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사군자를 가르치기도 하고 사자소학과 충효 사상도 가르친다고 한다. 한편, 유생들의 기숙사로는 동재만을 두고 있으며 동재는 앞면 3칸에 양쪽 온돌방을 두고 있으며 맞배 지붕이다.그리고 이 강당에서는 무첨당의 문중에서 일년에 한번 무첨당 어른의 성손들이 선생의 다른 호를 따서 만든 ‘윤암 장학회’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행사를 치르고 있다. 이 시기에 맞추어 후손들은 서당에서 매년 정기 총회를 열고 있다. 경산서당 왼쪽에는 관리사가 있다. 관리사는 안채와 전사청, 곳간채의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맞배지붕이다. 관리사의 안채는 앞면 5칸의 맞배지붕으로 비교적 큰 건물이다. 서당의 대문은 단정한 맞배지붕의 삼문이다. 156년전의 ‘경산서당 입향시집사분정기’, 당시의 홀기 최초 공개 경산서당을 처음 지어서 입향할때의 ‘경산서당 입향시집사분정기’라는 고문서 그대로를 취재 당일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의 홀기 또한 볼 수 있는, ‘영광’스런 순간이었다. ‘경산서당 입향시집사분정기’에는 경산서당 첫 향사를 모실때 모든 행사를 주관하는 도집례, 집례를 위시해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밝힘은 물론 경산서당은 사당이 없으므로 당일 신위를 만들었던 제위판을 기록했다. 또 신위를 받아서 받들어 모시는 봉위판, 축祝 읽는 사람, 요즘의 사회자격으로서 식순을 적은 홀기를 들고 향사를 진행한 찬자贊者, 초헌관을 보필하고 도와주는 알자謁者, 아헌, 종헌을 보필하는 찬인贊引 등 그날의 모든 행사에 관해 각 분야별로 관리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계동 무첨당파 회장은 “특히, 이 문서중에서 ‘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들은 무첨당 선생의 학문을 배우러 온, 연륜이 많은 제자들로서 후손들이 그들을 우대하는 의미”이며 “‘이 분들이 가장 귀한 손님’이라고 전해듣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첨당 선생 후손들의 배려로 이 귀한 문서를 처음 공개해 직접 볼 수 있는 기쁨은 각별했다. 경산서당 첫 향사를 지낸 것은 1857년 당시 초헌관이었던 이정수 선생을 필두로 경산서당의 첫 향사를 지낸 것은 1857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56년전이었던 것. 경산서당 건립당시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이, 즉 경산서당의 모든 것이 ‘고항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고항록에는 경산서당을 착공하기 위한 자본을 경주 혹은 도내 향중에서 부조를 내서 지었다는 기록들이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계동 회장은 “서당을 짓기전에 경북도내 여러 문중에 통문을 보낸다. 의성빙계서원, 청송 송악서원, 영덕과 대구, 안동 하회와 영해 권씨, 수원백씨 등의 각처에서 부조를 보내왔다. 이렇게 준비를 해서 준공을 하고 첫 향사를 모신 것이다”고 전했다. 또 ‘경산서당 수계안(부조계)’에는 그날 참관했던, 축하하러 왔던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최근의 이주덕 전 향교전교의 오늘날의 기록까지 적혀 있었다. 이는 지금의 방명록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자문을 맡아주신 이계동 무첨당파 회장님과 바쁘신 가운데 도움주신 문산 이병환 선생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숭덕전崇德殿은 경주시 탑동 77번지 오릉五陵의 남쪽에 있으며 신라의 건국 시조 박혁거세거서간朴赫居世居西干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제전이다. 전체 대지가 5만7000여평에 달하는 오릉 내 숭덕전은 그 규모와 건물의 위용에서 단연 독보적이었다. 숭덕전 박제영朴濟泳(80) 전참봉의 자문을 바탕으로 숭덕전 경내를 한참동안 돌아본 뒤 신라 네왕과 알영왕비의 능으로 발걸음을 이어갔다. 오솔길을 따라가는 봄날의 왕릉길은 적요한 기품이 흘렀다. 왕릉 곳곳 대나무 숲과 일군의 소나무숲속 새들의 지저귐은 경 밖의 분주한 일상과는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신라의 건국은 고구려의 동명왕보다 20년 먼저, 백제의 온조왕보다 40년이 앞선 시점이었다. 박혁거세는 어진 왕이었으며 지혜로운 왕이었다. 62년동안 재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고 백성이 풍족하고 어진 정치를 펼친 왕이었다고 전한다. 숭덕전을 지나 네왕과 알영왕비를 모신 오릉은 높낮이가 서로 다르고 다소 흐트러진 배열이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해 엄격하지만은 않았다. 숭덕전에서 오릉을 오가며 ‘신라속으로’ 들아가 보았다. 숭덕전은 경주에서는 유일한 국전國殿, 우리나라 국전 8곳중 하나 숭덕전은 조선 세종 11년(1429)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고 숙종 20년(1694)에 수리했다. 비로소 1723년(경종3)에 숭덕전의 현판을 하사하고 ‘숭덕전’이라 불렸으며 제사를 모시는 참봉 세 사람을 두게 되었다. 또 경종 당시 젊은 선비 91명을 뽑아 숭덕전에 머물게 해 세금을 면제해준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11년(1735)에 이룩한 것으로서 지금에 이른다. 이후 영조 28년(1752) 다시 묘정에 비석을 세워 신라의 시조가 국민에게 끼친 유덕을 기록했다. 지금 경내에는 조선 영조 35년(1759)에 세운 박혁거세와 숭덕전의 내력을 적은 신도비가 있다. 박 전참봉은 “숭덕전은 경주의 3전인 숭덕전, 숭혜전, 숭신전 중에서 실질적으로 우리 5000만 겨레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박혁거세 왕을 모시는 곳이다. 그것은 제일 먼저 고대왕권국가를 창건했고 신라의 시조가 곧 우리 국민의 시조이며 우리의 국부라고도 볼 수 있는 것에 기인한다” 며 “숭덕전은 국전國殿이다. 경주에서는 유일한 국전이고 우리나라 국전 8곳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숭덕전은 1992년 7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5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에 제향을 받들고 있다. 박혁거세 위패 모신 숭덕전, 대제에 맞춰 개문 숭덕전은 조선조 영조 당시의 건물의 형태 그대로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숭덕전의 기와나 단청은 지속적으로 보수를 해왔으며 숭덕전의 초입인 홍살문을 경계로 이 문부터는 ‘신의 세계’이다. 홍살문 안쪽으로 영숭문이 있다. 박 전참봉은 “영숭문까지는 일반인이 출입을 할수 있지만 이 문부터는 허락을 받았거나 나같은 사람만이 출입을 할 수 있다”고 일러준다. 이 문을 지나면 숙경문이 나타난다. 숙경문을 지나면 박혁거세 위패를 모신 숭덕전이 위치하고 있다. 숭덕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집이다. 과연 숭덕전은 근엄하고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다. 굳게 닫힌 숭덕전의 문은 역시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숭덕전의 문은 평일에는 열리지 않고 청명대제, 춘향대제, 추분대제 등의 대제에 맞춰 개문한다고 했다. 알영왕비 탄생 설화 간직한 알영정 우물터 있어 한편, 영숭문 서편에는 박혁거세 시조왕의 업적을 기록해놓은 신도비가 있다. 숭덕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향축실과 전사청이 있고 숭덕전의 제사음식을 보관하는 전사청이 크고 작게 두 채인 셈인데 그 중 작은채가 향축실로서 향 등을 따로 이곳에 보관한다고 한다. 남쪽 숙경문을 지나면 모든 제사를 모실 때나 인선 등을 상의 할 수 있는 회의 장소로서 서재西齋인 상현재가 있다. 상현재에는 대축관과 집례가 숙박할 수 있는 2개의 방도 있다. 이 건물 바로 옆에는 300년의 수령으로 짐작되는 휘영청 몸집이 굽어진 향나무가 건재했다. 동재東齋에는 초헌관과 아헌관이 숙박한다고 한다. 상현재 남서쪽 협문으로 들어가면 숭성각이 있고 영숭문 남쪽으로는 조흥문이 있다. 서재 옆 협문을 통과하면 안마당이 있고 남쪽에 고자실 및 포사가 위치하며 북쪽에 현직 능참봉10명이 자는 곳인 추보헌이 있다. 추보헌 뒤쪽으로는 알영각이, 안마당 동쪽에는 동행각이 위치하고 그 뒤로 예빈관이 있다. 11칸으로 길게 나열되어 있어 눈길을 끄는 장랑은 전직 참봉이나 외래객들이 오면 숙식하는 곳이라고 한다. 또, 숭덕전 알영 시조왕비의 탄생의 설화를 간직한 알영정 우물터가 있다. 숭덕전의 모든 건물은 국유이다. 단지 박정희 대통령 당시에 지어진 예빈관과 식당은 신라오릉보존회(박씨종친회문중) 소유다. 숭덕전의 관리는 신라오릉보존회에서 한다. 오릉앞, ‘일자’로 웅장하면서도 단정한 일자각 박 전참봉은 “오릉 앞에는 숭덕전만의 특징으로 ‘일자각’이 있는데 대개 독립된 국가가 아니면 일자각을 세울 수 없다. 대한제국당시 일자각을 세울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은 이뤘으나 해방이후 드디어 일자각을 세울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오릉앞에서 문자 그대로 ‘일자’로 웅장하면서도 단정한 일자각을 만났다. 박 전참봉은 “이곳에는 시조왕,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 알영왕비(시조왕의 왕비) 등 다섯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는 곳이다”며 능앞에서 제사를 모시는 상을 차릴때 제물을 올리는 상이 5개 있다고 설명했다. 오릉은 신라 4왕인 시조왕,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과 알영왕비 이렇게 다섯 능이다. 오릉앞에서 오늘의 경주를 있게 한 신라의 왕들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에 가슴이 마구 맥놀이질했다. 춘추분대제와 청명대제 올리는 숭덕전 숭덕전은 매년 춘추분대제를 거행한다. 또 4월 5일 청명의 절기에 맞춰 청명대제를 올린다. 명절 추석과 구정때 역시 제를 올린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능참봉 10명과 전참봉이 합동으로 새벽 다섯시 반이나 여섯시에 숭덕전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능참봉은 각자의 능에 가서 예를 올리고 보름동안 무탈했는지 능 주위를 점검한다. 숭덕전의 박 전참봉은 매일 새벽 5시에 목욕재계하고 숭덕전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능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고 했다. 전참봉은 2년의 임기동안 숭덕전에 기거하며 숭덕전을 보호한다 전참봉은 2년의 임기동안 숭덕전에 기거하며 숭덕전을 보호한다. 중앙에 오릉보존회가 있어서 숭덕전이 하는 모든 일은 중앙에서 관리한다고. 전참봉의 임기가 다하면 중앙의 상임위원회에서 토의를 거쳐 추대를 하거나 투표를 해서 결정한다. 결정과 동시에 문화재청과 경북도에 통고를 한다. 도지사가 임명하는 임명직인 것이다. 2012년부터 2년째 숭덕전에 봉직하고 있는 박제영 전참봉은 제219대 전참봉이며 시조인 박혁거세왕으로부터 69대손이다. “박가의 시조왕인 동시에 우리 국민의 시조왕격인 박혁거세 어른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실수 있는 일은 영광스럽다. 다가오는 5월, 퇴임을 하지만 한번도 이 숭덕전을 비운 적이 없다. 숭덕전에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힐 수 없다. 올해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어 기쁘기도 하고”(웃음) 박제영 전참봉은 동아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중령으로 예편, 경북도의용소방대연합회장, 경주재향군인회장, 경주시의원을 역임하고 현재 성균관유도회 양남면 지회장을 맡고 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은 오랫동안 고려의 재상을 지내며 원나라의 강한 정치적 압박을 해소하는데 앞장 선 고려 후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이다. 문충공익재선생을 향사하고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구강서원龜岡書院은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에 있다. 구강서원은 양월리의 지형이 거북의 형태를 닮아 ‘구강’이라 전한다. 수령이 100년 넘어 보이는 잘생긴 소나무로 빼곡한 어래산魚來山이 나지막하게 서원을 품어주고 있었는데 외삼문을 들어서자 강학의 장소였던 적취당 마당에는 환하게 붉을 밝히던 석조등대가 마당에 의젓했다. 익재 선생의 고매한 학식과 사상의 깊이가 봄날의 정취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경각과 사당 뜰의 자목련과 산수유의 향기처럼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지난 3일, 성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으며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 구강서원을 찾았다. @IMG2@ 익재益齋 이제현 李齊賢선생은 익재 이제현 선생은 1287년(충렬왕 14)∼1367년(공민왕 16)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호는 익재·역옹이다. 고려 후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고려가 원의 부마국으로 있을때 간난의 시대에 생을 누린 사람이다. 그러나 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통일적 정치질서를 현실로서 시인하면서 젊은 시절에 그는 충선왕과의 긴밀한 관계아래 중국대륙을 무대로 폭넓은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원의 일류 문인, 학자와 교유交遊하고 3차에 걸친 중국대륙 여행을 경험한다. 원의 연경에서 맹활약을 한다. 그것을 통해 얻은 식견과 경륜이 뒷날 그가 정치적 문화적 국면에서 고려사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시 된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 가장 험난한 때에 생애를 보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 동아시아 세계의 시민으로 활기찬 젊은 시절을 보내고 뒷날 그것을 바탕으로 고려사회 안에 태산북두와 같은 위치를 지키며 당시의 역사발전에 일정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민현구 고려대교수 ‘14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시민’에서 인용함.) 학자로서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을 수용·발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의 제자였고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성리학은 안향-백거정-이제현-이색-권근-변계량-정도전-정몽주의 계보로 이어졌다. 선생은 수제자였던 이색이 그의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문학 부문에서도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고, 고려의 한문학을 발전시켜 한단계 높게 끌어 올렸다. 한편 사학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10권과 『역옹패설』2권이다. @IMG3@ 익재 이제현 선생 단 한 분만 모시고 있어 구강서원은 익재 이제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정과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익재 선생의 22대손인 이상천 선생은 “익재 이제현 선생 단 한 분만 모시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래는 고려 공민왕때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影堂으로 세워졌다. 이후 숙종 13년(1687)에 서원으로 다시 세웠다. 하지만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고, 1917년 140여 문중과 지방 유림의 협찬으로 복원하였다. @IMG4@ ‘학문에 도취된다’는 적취당과 사당인 문시묘 구강서원의 배치는 공간을 ‘田’자형으로 나누어 토담을 둘렀다. 그 왼쪽에는 외삼문과 강당, 내삼문과 사당을 같은 선상에 배치하고 오른쪽에는 고사와 경각을 두었다. 경각 안에는 익재영정과 익재집 책판을 보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익재 선생의 영정은 우리나라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는 고려충숙왕때 익재 선생이 원나라에 있을때 ‘진감여’라는 중국의 화공이 익재 선생의 초상을 그린 것. 이후의 여러 영정들은 당시의 영정을 보고 그대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현재 구강서원의 영정 역시 이를 보고 그린 것으로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됐다. 묘우인 문시묘文始廟, 강당인 적취당, 동제인 시술재時述齋, 서제인 시준재是遵齋, 지금의 도서관이었던 경각, 외삼문(숭앙문), 고자실, 내삼문, 대문, 소문2동(일각문), 관리사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는 공부의 공간과 제향의 공간을 앞 뒤로 구분한 것이다. 강당인 적취당은 선생의 학문의 경지가 심오해 ‘학문에 도취된다’는 뜻으로 가운데 3칸의 대청이 자리하고 양옆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마련했다. 내삼문을 통해 사당인 문시묘가 나타난다. 제수를 장만하는 전사청이 오른쪽에 있다. 문시묘에는 이제현 선생의 화상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앞면 3칸에 옆면 1칸으로 구성했다. 일년에 향례 두 번에만 개문을 해서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묘우 내부는 이날도 공개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동서재의 기능은 글을 가르칠때는 제자들이 숙식을 하던 기숙사였고 그 기능이 사라진 이후에는 제사를 모시러 오던 손님들의 숙박을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자실庫子室은 모든 제수를 장만하고 손님접대를 위해 음식을 마련하는 곳이다. 경각에는 판각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선생의 책의 일부와 향악, 영정, 경상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233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집판각은 안동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묘우 왼쪽에는 관리동이 연접해 있다. 강당의 서쪽에는 서재가 있었고 동재는 경각의 옆 자리에 있었다. 이는 ‘강당의 터가 좁았던 이유’로 동재와 서재가 분리되었다고 한다. 관리사동에는 현재 후손인 부부가 기거하며 관리하고 있다. 이 관리동은 서원보다 15여년전에 건립되었는데 대원군 당시 서원만 철폐해 관리동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이에 1987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현재 구강서원의 소유는 경주이씨양월문중이다. @IMG5@ 익재 선생 모시는 전국 몇 군데 서원 중 구강서원이 성지 이상천 선생은 “구강서원은 1917년이후 여러차례 중수되었다. 도색이나 기와, 서까래도 갈았다. 오래된 건물이라 해마다 보수 및 수리를 해야한다”면서 “유사나 나는 서원의 유지 및 보수에 신경을 많이 쓴다” 고 전했다. “우리서원은 일년에 2월 하정, 8월 하정 두 번에 걸쳐 춘계, 추계향사를 모신다. 그리고 음력 정월 초여샛날은 자손들이 선생에게 세배를 드린다”며 문유사는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에 동이 트기 전 분향을 한다고 했다. “현재 익재 선생을 모시는 곳이 전국에 몇 군데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서원이 각광 받는 이유는 다른 곳은 해방 후에 건립된 곳인데 비해 우리서원이 가장 오래된 서원이고 판각도 보관이 되어 있었던 연유”라고 밝혔다. 겸양지심으로 노구에도 성심껏 자문을 해주신 익재 선생의 22대손인 이상천(78) 선생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춘분을 막 지난 ‘수봉정秀峯亭’은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막 피어난 청매화의 향기며 안채 툇마루에 내린 나른한 햇살이 그랬다. “衣·食·住 족한 이상의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며 가진 자의 베풂을 실천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철학을 몸소 행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수봉정은 신라 제 38대 원성왕릉의 괘릉이 있으며 신라의 절터 감산사가 있는 유서깊은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하고 있다. 100여 년 고택 수봉정은 이규인(수봉)선생의 고귀한 정신의 결정체로서 선생의 단아한 기품을 집안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했다. 일제강점기에 ‘실용적 선각’과 ‘사회의 정의 및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일깨워준 이규인 선생의 진한 삶의 이야기를 간직한 수봉정은 현재 선생의 후손 이태형 수봉교육재단 이사장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IMG2@ 수봉 선생의 생애 선생의 이름은 규인圭寅, 자는 우서瑀瑞이며 수봉秀峯은 선생의 아호다. 외동읍 괘릉리에서 출생(1859년~1936년)한 선생은 ‘내 힘이 미치는 데까지 부를 이루고 이로써 이웃과 겨레를 위해 힘이 되리라’ 며 먼저 부를 축적한 후 이를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우리 겨레에 실질적인 혜택을 입히고 일제압제에 신음하는 겨레를 일깨우고자 하는 실용적 선각자였다. 선생은 당대에 만석의 부를 성취한다. 선생이 회갑을 맞은 1919년 교학과 의휼의 신조는 선생의 숭고한 정신세계이다. 선생은 일생을 통해 근검과 절약을 몸소 실천했고, 수봉정을 세워 많은 학동을 모아 가르쳤다. 어렵고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고 의료 사업을 펼치며 민생의 고난을 같이한다. 특히 선생은 독립 의사들의 편의를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독립자금 조달에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독립운동단체에 군자금을 지원하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을 보호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해외동포를 구호하는 사업에 정성을 다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몫과 사회의 정의 및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일깨워준 것이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확산될 당시 회갑을 맞이한 선생은 수봉정 안에 학당을 개설하고 훈장을 초빙하여 향리와 인근 청소년을 교육했다. 선생은 교육구국의 창학이념 아래 이수봉정李秀峯亭 명의의 자산을 포함한 거액의 사재를 들여 ‘사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려 한다. 그러나 일제의 간교한 방해 공작으로 거듭 지연되던 중 1936년 78세의 일기로 열락당悅樂堂에서 생을 마감한다. 오늘의 경주 중·고등학교는 바로 선생의 구국 교육과 학교 설립의 뜻을 후손들이 받들어 실현한 결과이다. @IMG3@ 수봉정秀峯亭, 수봉 선생의 선각과 실천궁행을 배우는 도장 수봉정秀峯亭은 근대기의 목조건축물로서 1924년 수봉 이규인李圭寅 선생이 자택의 한 쪽에 건립한 건물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홑처마인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로서 1995년 1월 경상북도 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되었다. 지역의 구휼사업 및 육영사업을 추진하면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원을 펼치던 곳이었다. 일제 침략기에 핍박받는 경주 지역 조선민중에게 배움의 터전과 의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로 학교이자 의원이었다. 1924년에 2층으로 창건되었다가 1953년에 지반이 약해지자 집을 뜯고 단층으로 개조했다. 당시의 2층이었던 수봉정의 모습은 현재 천정이 ‘우물반자’로 덮여 있고 그 속에 다락층이 남아 있다는 점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층의 모습은 사진으로 전해진다. 당시는 일제의 수탈로 인해 유리걸식하는 과객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이에 선생은 힘닿는 대로 이들을 수봉정과 본가에 수용해 숙식을 제공하고 각종 편의를 도모한다. 수봉가에 유숙하는 과객의 수는 매일 3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내부의 쓰임새를 보면 둘레에 툇마루를 두르고 중앙에 3칸 대청을 두되 대청 왼쪽에는 글방인 비해당匪懈堂을, 대청 오른쪽에는 약방인 보인재輔仁齋를 각각 2칸 규모의 온돌방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학교와 의원을 겸하도록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립 이념은 근대 민족교육의 터전과 민중 의료의 장을 개설하는 것이었음에 반해 건물 형식은 서원이나 서당 건축의 전통적인 강학당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 @IMG4@ 수봉선생의 위패를 홍덕묘弘德廟에 모시고 봉향해 수봉 선생의 일족인 이승찬씨는 “수봉정은 현재 3000여평의 대지에 두 가구(큰집, 작은집)와 곳간, 열락당, 괘정서사, 괘동서사(수봉정), 사당인 홍덕묘 등이 한울타리 안에 공존한다. 1924년 당시는 지금의 수봉정의 모습보다 여러채가 더 있었다” “당시 3형제가 한 울타리 안에서 생활했다”고 전하며 지금은 두 가구의 형태가 남아있다고 했다. 유림에서는 1998년 수봉 선생을 한 해에 한 번씩 향례하기로 결정하고 선생의 위패를 불천위로 받들어 괘동서사 홍덕묘에 모시고 봉향하고 있다. 이로써 수봉학원은 물론 경주 지역의 새로운 향례 문화가 조성되기에 이른다. 이 향례에는 인근 괘릉초등학교학생, 경주중고등학교 학생들도 함께해 수봉선생의 뜻을 기린다고. 괘정서사와 열락당은 사랑채의 역할을 한다. 이는 외부의 사람들에게 오픈 되어 있는 공간으로 남자의 공간이 밖으로 나와 있는 것. @IMG5@ 4칸의 곳간채, 당시 7000석 정도 부 축적 규모를 짐작 큰 대문의 오른쪽칸에는 근대식 시설을 엿볼 수 있는 화장실이 딸려 있는데 이것도 이 집만이 가진 근대기 건축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열락당과 연결된 대문을 통과하면 큰 집의 안채가 보인다. 한편, 괘정서사와 열락당 사이에는 작은 집의 안채가 있다. 대문을 열고 정원길을 따라가면 맞은편에서 곳간채를 만난다. 이우찬 경주시 문화재과 직원은 “두 가구 중 큰집 안채 7칸(퇴칸 포함)의 지붕은 다소 특이한 형식을 띠고 있는데 맞배지붕의 오른쪽 물림칸은 날개 지붕을 달아서 팔작지붕의 형태로 연결한 것에 반해 왼쪽 물림칸 지붕은 원래의 지붕의 형식과 같은 맞배지붕이다. 이 서로 다른 양쪽 지붕을 가진 물림칸은 후대에 달아 낸 곳으로 보인다”며 “다른 하나의 특징으로 누마루가 있는 아래 5칸의 아랫채는 사랑채 역할을 했다”고 추측했다. 또 “두 가구의 지붕 용마루 위에는 두 마리 오리로 보이는 장식물이 보인다. 이는 다산의 상징이거나 부귀영화 혹은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민가의 장식물”이라고 설명했다. 두 가구는 모두 안채, 좌우 아래채와 사랑채가 있는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트인 ‘ㅁ’자 집이다. 이로써 20세기 초의 건물임을 알 수 있는 것. 이우찬씨는 “이 인근의 근대건축물중 4칸의 곳간채의 의미는 최부잣집과 더불어 당시 7000척 정도의 부를 축적했던 집안으로서 이 집의 부를 짐작 할 수 있는 최고의 규모로 보인다. 3량가의 완전한 모습의 한옥형태 곳간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곳간채 뒤에 다른 하나의 곳간채가 더 있다”고 이 집 곳간의 가치를 힘주어 말한다. 수봉정을 다녀가면 승진한다? 한말 의병장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신돌석 장군과도 교분이 두터워 자주 수봉정을 방문했는데 지금도 열락당 정원에는 신장군이 들어올렸다는 ‘장군석’으로 불리는 큰돌이 있다. 이 일화로 미루어 보면 괘릉리 수봉선생택은 신장군 의병활동의 군자금보급처이자 은신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청포도’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육사도 선생의 도움을 받은 이 중 하나다. 육사가 의열단 활동을 하고 있을 때도 자금지원을 했으며 그가 경주에 머물면서 ‘청포도’를 비롯한 시작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수봉가의 후원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수봉정에 얽힌 이야기로는 이회창 전 대통령 후보가 낙마후 마음을 정리하러 다녀갔다는 일화가 있으며 졸업생이나 진급을 앞둔 공직자들이 하룻밤 묵고 가면 승진을 한다는 에피소드도 전한다. 수봉정을 줄 곧 지켜 온 종부 박분규(90) 여사는 남다른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자손들이 오면 수봉정이 가득찬답니다. 예전에 손님들이 많이 왔고 지금도 많이 오시지요. 봄이 오면 정원이 굉장하지요.” 과연 잘 꾸며진 화단과 정원에는 각종 정원수와 꽃들이 어우러져 있어 이 고택의 정결함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다. 봄의 전령인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막 터뜨리고 있는 경주향교는 그 위상과 역할만큼 부드러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경주향교는 교동에 있으며 총 부지가 5000여평이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향교로 전국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1985년 지정된 경북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난 2003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시범향교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11년 8월 문화재청으로부터 향교 내 대성전大成殿이 보물로 지정됐다. 현재 경북향교재단이 소유하고 있으며 관리는 경주향교에서 하고 있다. 지난 12일, 경주시 유림 인사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춘계석전대제가 봉행된 경주 향교를 찾았다. 선애경 기자 violetta22@naver.com -신라시대 국학이 설치되었던 곳, 전형적인 전묘후학의 배치 경주 향교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시대인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이 설치되었던 곳이라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향학鄕學으로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져 왔다. 고려시대에 노자와 장자, 공자와 맹자 즉,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492년(성종 23) 경주 부윤 최응현이 성균관을 본떠 고쳐 지으면서부터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대성전이 불에 타 위패를 도덕산 두덕암으로 옮겼다가 1600년(선조 33) 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위패를 다시 모셨다. 대성전을 비롯한 제향공간을 다시 짓기 시작하고 1604년 부윤 윤성이 동·서무를,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을 비롯한 강학공간을 지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이 마무리 됐다. 1668(현종 9)년과 1979년에 각각 보수했다. 건물은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墓後學의 배치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경주, 부여, 전주, 나주, 강릉 등의 향교가 이런 구조를 가진다. 이곳들은 도읍지의 역사를 지닌 곳으로 그곳의 왕들이 먼저 성인인 공자를 배알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다. 강당인 명륜당과 동재·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거하는 시설이다. 나주향교와 함께 향교 건물 배치의 표본이 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전사청, 내신문 등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와 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봄·가을에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한 4성四聖과 10철十哲, 72현을 제사지내는 의식인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향교건축의 대표적인 건물, 대성전大成殿 대성이란 공자의 시호인 ‘대성지성문선왕’에서 따서 대성전이라 한다.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으로서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동양5성, 송조宋朝의 2현賢, 한국의 18현을 제향하고 있다. 대성전은 제향을 하면서 위패를 봉안하고 학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곳 대성전에서 알묘하고 이 과정을 거쳐야만 명륜당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원래 대성전에는 136위가 있었으나 현재 총 25위가 모셔져 있다.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 공자의 손자 자사를 모시고 오른쪽에는 증자, 맹자의 위패를 모셨다. 공자의 영정위에는 구름의 형상을 그린 운판이 있어 공자를 신성시한 것을 짐작케 한다. 또한 신라때부터의 현인들이 시대별, 연도별로 모셔져 있다. 경학지존인 설총선생과 문학지존인 최치원 선생을 필두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김굉필, 회재 이언적, 조광조, 김집, 송시열 등 유학의 현인들이 모셔져 있는 것. 대성전은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한 주심포계 외1출목 이익공식(새 날개처럼 생긴 공포 양식) 건물로 연혁이 분명하고 공포와 창호 및 가구에 옛날식 기법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대성전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대성전의 중건연대와 당시 참여한 장인 등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최현재 경주향교전교는 “전국의 향교 중 신도 끝에 계단이 있는 곳은 경주 향교 뿐이다”면서 경주향교의 특징을 말해준다. 문화재청은 경북지역 향교건축의 대표적인 건물인 경주향교 대성전을 보물로 지정해 국민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보존·관리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대성전의 동·서무는 각12칸이다. 동·서무에는 원래 각36위씩 72현의 위패를 모셨던 자리다. - 국가발전 위한 지도자들 덕목 익히는 장소, 명륜당明倫堂 명륜당明倫堂은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 장소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양식 건물이다. 좌우의 방 2칸에는 강사들이 기거했다고. 이곳은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격을 연마해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들의 덕목을 익히는 장소였다. 최 전교는 “명륜당 대청에서 바라봤을때 대성전의 공자님 신위가 모셔진 중앙칸과 대성전의 내삼문 외삼문이 정확하게 일직선이 된다. 그리고 명륜당의 동, 서재와 대성전의 동, 서무도 일직선으로 맞아 떨어진다”고 했다. 명륜당의 서재와 동재는 각 12칸이며 학생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기숙사에 해당 하는 곳이었다. -신라시대의 우물로 추정되는 오래된 우물, 학계의 비상한 관심 한편, 명륜당 뒤쪽 대나무 밭에는 영재를 별도로 육성하던 곳인 육영당과 경상북도 향교 전체를 감독하던 곳인 제독관이 있었다고 한다. “육영당과 제독관은 2014년 발굴시행 후 건축물의 규모가 나오면 그 규모대로 복원할 예정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 지금의 관리사를 대밭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시 관계자는 말한다. 명륜당 뒤쪽의 존경각은 도서관의 기능을 담당한 곳으로 책도 관리하고 옛 성균관에서 내려온 글을 판각 하던 곳이었다. 이 존경각은 복원됐으나 다시 중건의 필요가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또 학사 업무를 보던 사무실과 향교의 노복들의 숙사가 있었던 구도색청사와 구직예청사 터에는 현재 발주해서 올해안 예절관으로 탄생할 예정이다. 또 내년 5월말경에는 부지 발굴후 생활관 건물이 지어질 예정이다. 한편, 일각문을 들어서자마자 관리사동 바로 앞에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추정되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올해 실시되는 ‘우물포럼’대상에 포함되는 등 그 역사적 가치가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는 우물이다. -경주향교, 시민과 함께 향교에서 매년 봄(음력 2월 초정일), 가을(음력 8월 초정일) 두번에 걸쳐 봉행하고 있는 석전대제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유교의식으로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서 지내는 큰 제사이다. 한편, 2011년부터 계속 진행되어온 전통혼례는 현재 경주문화재단과 함께 하고있다. 부대행사로 투호놀이, 국궁, 제기차기 등 전통 민속놀이도 곁들인다. 결혼을 앞 둔 미혼자는 물론, 기혼자라도 참여할 수 있는 이 혼례는 경주만의 특성적인 전통혼례로서 매주 토, 일요일 오후 3시에 치른다. 이는 시민을 위한 일이자 경주문화전승의 역할을 하는 것. 경주향교스테이는 2010년부터 시작해 매년 성년식(관,계례)반, 예절학교반, 제사의례반, 세시풍습반, 서예및 한문서당반등 5개분야별로 전통문화 및 유적지 답사 체험프로그램을 서재 및 명륜당에서 운영한다. 최 전교는 “지금까지 시민들은 향교를 제향을 주로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향교는 제향과 함께 교육기관으로서 기본적인 교육을 통해 널리 시민들을 계도하는 곳이다. 생활 속 실천에 옮기는 산 교육을 하는 장으로 만들고 싶다”며 친숙하고 편안한 향교로 시민들과 함께 하기를 바랐다. 궂은 날씨에도 자세한 자문을 맡아주신 최현재 경주향교전교(77)는 경주 유림의 대표자로서 서악서원 원장, 최씨 중앙종친회 부회장, 상서장 집례위원장 등 중책을 맡고 있다. 또한 문묘를 수호하는 한편, 지역사회의 윤리문화의 창달을 위해 활동하는 향교의 책임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치열한 당쟁의 시대, 당파를 넘나들며 폭넓은 존경을 받아온 인물이 조선중기 경주에 있었다. 바로 청백리에 빛나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1568∼1636)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 전란에서 공을 세운 유례없는 충신이었고 1647년에는 청백리로 녹선된 뛰어난 관리였다. 청렴과 겸손을 갖추어도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 있는데 공은 그렇지 않았다고 전한다. 최씨 집안을 일약 경주 명문가의 반열에 올린 정무공. 공의 의기와 충의는 세세토록 이어져 지난 5일 경칩의 절기에 찾은 생가인 충의당忠義堂 곳곳에서 공의 진한 나라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때마침 200여년 된 홍매화가 막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였다. 충의당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92번지에 있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생가로 1993년 2월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된 바 있다. 현재 경주시의 명품고택으로 지정돼 고택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 청백리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장군...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 전란에서 혁혁한 공 세워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활약을 한다. 이듬해(1594년 27세) 무과에 급제해 정유재란 때 울산전투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1607년 오위도총부 도사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그 뒤 경흥도호부사, 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인조 8) 경기수사가 되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했으며 1634년(인조 11) 전라수사를 지냈다. 공주 영장으로 있을 때 청의 침범으로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났다. 충청관찰사 정세규가 출정하면서 당시 69세였던 연로한 정무공에게 전쟁을 치르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고 참전을 만류했으나 경기도 험천에 이르러 보니 정무공이 먼저 와 있었다고 한다. 이미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잘 훈련된 청나라 군대를 당해 낼 수 없었다. 목숨이 위태롭게 되고 평소 그림자처럼 따르던 두 종 옥동玉洞, 기별奇別과 함께 1636년 12월 장렬히 순국했다. 정무공 사후 이듬해 인조는 병조판서에 증직시켰고 정려를 내렸다. 1651년 인조는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인 ‘청백리’로 녹선한다. 한편, 충의당 인근의 1699년 창건된 용산서원(도지정 기념물 88호)에 제향되는데 용산서원은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전국 3대 사액서원중 하나이다. 또 숙종 37년(1711) 향리 용산에 숭렬사우의 사액을 내리고 원호를 용산서원이라 한다. 무인으로서 향사된 경우는 희귀하지만 정무공은 장군이면서 공조참판의 벼슬을 한 문무를 겸비한 선비였기 때문에 향사에 모셔졌다. 이는 드문 경우로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향사된 예가 있다. 이에 최진립은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고 경주 최씨는 명문가의 기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남부지방 양반집의 전형인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 지닌 충의당 충의당은 정무공이 살았던 곳으로 가옥의 사랑채에 해당된다. 처음에는 당호를 흠흠당이라 했는데 1760년경 건물을 수리한 후 충의당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이 고택의 구성은 정면의 충의당을 중심으로 가구는 3량가의 간결한 구조이다. 사랑채에서는 제사를 모시고 충노 둘의 신위도 있다. 충의당은 300여년 전 중건이 한차례 있었으며 300여년 자연목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랑채 뒷면 정침(안채)은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一’자형 건물로 좌로부터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연접되어 있다. 광채와 중사랑채인 4칸의 흠흠당이 남부지방 양반집의 전형인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흠흠당은 정침 우측에 있으며 중사랑채 기능을 가진 건물로 4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흠흠당 오른쪽에는 제향공간인 3칸의 사당이 있어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전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정무공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불천위 사당 충렬사는 작은 사당이었으나 허물어져 100년 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300년의 시간을 흘렀음을 고색한 단청이 입증해준다. 사당은 전면에 툇간을 둔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상부가구는 민가의 사당으로서는 매우 화려하고 섬세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충의당 인근에는 정무공을 추모해 세워진 용산서원龍山書院과 인조 18년 (1640)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정려를 받아 세워진 정려비각이 있다.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 두 명의 종에 대한 제사 지내 이조리 충의당 종가에서 매년 12월 지내는 정무공의 제사는 일년 중 가장 큰 행사다. 나라에서 불천위 제사를 내렸고 후손들은 수 백년째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제사의 백미는 정무공의 제사가 끝나면서 부터다. 정무공의 제사상을 그대로 마루로 옮겨 두 명의 종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평소 그림자처럼 따르던 두 종 옥동과 기별에 올리는 제사인 것. 종손인 우산愚山 최채량 선생은 “어떻게 종에게 양반이 절을 올리느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우리는 정무공과 같이 친조상과 다름없이 매년 제를 올렸다. 그들도 전란에서 정무공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으므로 충노에 대한 제사인 것이다”며 더불어 사는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종가이다. 셋째아들이 교촌 최부잣집이고 넷째아들이 수운 최제우 어른의 집안이다”고 하는 최채량 선생은 더욱 기품이 있다. “청렴하고 삼가함을 내가 공경한다” 인조가 1630년 공조참판의 벼슬을 내리는데 정무공은 그런 중책을 무인으로서 맡을 수가 없다고 하자 ‘뭇사람이 우러르고 굳센 절개 공경하노라.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을 벗하지 않고 청렴하고 삼가함을 내가 공경한다’는 글을 내린다. 이 글을 종손인 최채량 선생이 사당대문 좌우에 글씨를 써 공의 절의를 상기시키고 있다. 정무공이 손수 심은 450여년 된 회화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어이 고택의 대지는 1000여평이며 주변의 충의공원, 주차장을 포함해 약 3000평이다. 충의당 이외에도 최채량 선생이 세운 것으로 함께 전사한 충노 두명을 기리는 충노각, 그리고 종택 뒤편에는 정무공이 손수 심어 보호수로 지정된 450여년 된 회화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다. 또 정무공 사당뒤에는 충노인 기별과 옥동의 불망비가 있으며 경주시의 남산권역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충의공원에는 장군의 동상이 건립돼 있다. 오는 4월 27일 정무공 유물관 개관과 함께 동상 제막식을 앞두고 있다. 사랑채의 바로 옆 경모각은 최채량 선생이 낙향해서 지은 건물로 현재 다실로 이용하고 있다고. 자세한 자문을 주신 충의당의 주인 우산愚山 최채량(81)선생은 경주유림의 지도자로서 경주최씨 중시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14세손이다. 우산 선생은 고려대 문리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담수회 경주지회장, 경주최씨 종친회 회장, 박약회 이사를 맡고 있는 한편, 충의당에서 고택을 보존, 정비하고 정무공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230여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월성주사댁月城主事宅’은 전형적인 부농의 살림집 모습이다. 월성손씨月城孫氏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11대 지손 손종호孫鍾昊가 1780년경에 건립한 조선 후기 부호가 주택으로 강동면 단구리(앞실)에 있다. 조선시대의 고가로서 당시 민가로서는 규모가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 고택은 문화공보부 전통가옥 제6호로 지정된 바 있으며 2000년 4월 10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곡성 모양의 성봉인 도음산 너머는 포항시 흥해읍이다. 경주시와 포항의 경계지역인 앞실마을은 도음산이 감싸주고 있고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대나무 숲 뒷산이 어여쁘게 주사댁을 품어 감싸고 있는 형상은 양택陽宅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주사댁 앞 개울 건너에는 너른 벌판이 있고 대청마루에서 올라보면 봄이 오는 들판이 보인다. 한편, 수 십명의 하인들이 기거하고 한 세대를 풍미했던, 인심 후한 부농의 흔적들을 이 고택의 곳간과 부엌, 사랑채와 안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궁내부주사宮內部主事’를 역임한 손명수 이후 ‘손주사댁’으로..., 손중돈 선생의 둘째아들 손영의 7대손인 손인걸과 손대걸 형제가 앞실마을 입향조入鄕祖다. 손인걸의 손자인 손수민이 정미업으로 크게 부를 쌓아 당대에 천석꾼을 이뤘다. 이에 손수민의 아들인 손종호가 1780년경에 월성주사댁을 건립하고 당호를 ‘교롱암敎聾庵’이라 지었고 ‘도음서사禱蔭西舍’라고도 불렀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민가로서 3년의 공기가 걸렸다고 한다. 건립자인 손종호의 손자인 손명수는 1866년(고종 3년)문과에 급제하고 ‘궁내부주사宮內部主事’를 역임하는데 벼슬에서 물러난 뒤 ‘손주사댁’이라 불리워진다. 이 집은 이 일대의 도음산이 병풍같이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남향집으로 겨울이면 따뜻하고 여름이면 서늘한 풍수법도에 잘 맞는 주택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동출서류’ 즉, 동쪽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흐르는 개천 덕택인지 200여 년간 천석꾼으로서 인심좋고 후덕한 집안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후손들의 사람 됨됨이가 좋고 재물이 넉넉한 집안으로 선비가를 이뤘다. 자수성가한 후손들 배출 후손들 중 손처구의 5대손인 손진원은 우리나라 초기 무역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처구의 종형인 손양구의 자손 손도익은 경동그룹을 창립, 경동탄광, 경동나비엔, 울산도시가스 등의 에너지 업체를 훌륭하게 이끌어 재벌 그룹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경동 그룹의 총수인 손경호 회장은 앞실마을 입향조인 손인걸의 8대손이다. 또 손종호의 4대손인 손관익은 복지사업으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 받은 바 있다. 이외에도 자수성가한 후손들을 다수 배출했다. 이 종택의 현재 소유자는 주사댁 건립자 손종호의 5대 장손인 손정호로 경주 중·고와 고려대 법대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삼덕무역 상무이사와 태주물산 대표이사 등을 거친 인물이다. 지금은 낙향해 조상들의 묘소를 돌보고 전원생활을 즐기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가 두 곳, 전국적으로 드문 경우 전통적 공간구분 법식 등 전통적 주거 요소들을 잘 간직한 반면 외래 주거 문화의 요소들도 적절하게 도입하고 적용한 이 고택은 당시 지형과 좋은 기운, 즉, 풍수지리를 꼼꼼하게 따져서 지은 집이다. 대지 600여평의 월성주사댁은 남녀가 유별한 집 구조로 남녀의 처소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왼쪽에 안채와 오른쪽에 사랑채를 좌·우로 배치하였으며, 각기 담을 쌓고 출입문도 따로 달아 별도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의 마당 가운데에는 초가로 된 방앗간채가 있는데 디딜방아와 외양간이 있고 사랑채의 마당 동쪽에는 초당이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ㄱ’자형 평면으로 서쪽으로 꺾이는 부분에 도장채로서 3칸 부엌이 있다. 부엌에서 남쪽으로 꺾이는 부분에 방·광·광·방으로 이어져 있다. 부엌은 보통의 민가 2배정도의 규모로 쌀과 된장등을 보관하고 크고 오래된 옹기들이 지금도 있다. 도장에는 옛 살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곡식단지, 쌀단지 등을 보관하고 있었으며 200여년 된 민가로서는 규모도 크고 살림하기에 편리하게 지어졌다. 동쪽으로 각각 2칸의 안방과 대청, 그리고 건넌방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로 통하는 대문은 3칸 규모이고 대문 양쪽에 광이 딸려 있다. 안채는 이 지방 큰 집들과 공통되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앞면으로 튀어나온 부분에는 곳간채로서 넓은 곡식 창고와 고방庫房을 두어 당시에 살림이 풍족하였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역시 ‘ㄱ’자형 평면으로 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인 도리로 꾸며 향교나 서원의 건축에 주로 이용한 ‘굴도리집’ 맞배지붕 형식이다. 서쪽으로 꺾이는 부분에 부엌이 있고 왼쪽으로부터 방·방·대청 3칸이 일렬로 연결되어 있다. 부엌을 통칸으로 하고 남쪽으로 각 1칸씩 3개의 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남쪽에는 안채로 통하는 일각문이 있다. 사랑채와 연결되는 쪽문에 소죽을 끓이는 부엌이 있고 이로써 사랑채의 방 두 개에 난방을 하는 구조다. 대청 중앙 뒷벽에는 ‘구기신림술선이후舊基新林述先貽後’ ‘도음서사禱蔭西舍’라는 글씨가 씌어진 현판이 걸려 있으며 각 방 전면에는 ‘교롱암’, ‘덕재’德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 소유자인 손정호씨는 “이 글씨는 작자가 정확치 않으나 이 집안의 인심이 후해 글씨쓰고 그림을 그리던 시인묵객들이 많이 다녀가면서 써 준 글” “‘교롱암’이란 5대조 손종호의 호를 따서 현판에 썼고 ‘도음서사’는 도음산의 서쪽에 있는 집이라는 의미다”라고 전했다. 150~200여년 가까이 천석꾼의 살림 유지, 원래는 마을에서 높은 지대에 있는 집 대청마루에 오르니 멀리 대나무밭이 보인다. 손씨는 “예전에는 대나무 밭 앞에 하인들이 거주하던 집이 너댓채 있었다. 차츰 이 집 앞의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고 150~200여년 가까이 천석꾼의 살림을 유지했다. 모친이 30여년 전 까지는 이곳에서 기거를 했다”고 회상한다. “집앞의 개천이 원래는 구곡으로 구불구불한 모습이었으나 방축을 하면서 곡선이 사라지고 홍수의 피해를 막기위해 길을 1.5미터~2미터 높였다”며 원래는 이 집이 마을에서 높은 지대에 있는 집이었는데 지금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고택 앞에는 수령이 이 고택의 나이와 비슷한 오래된 홰나무가(이 지역에서는 기와나무라고 부르는)가 있다. 예로부터 큰 집 옆에는 잡귀를 물리치는 의미로서 이 기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한편, 동네사람들이 물을 많이 길어가기도 했다는 200년 된 우물은 지금도 깊고 맑았다. 월성주사댁에 얽힌 에피소드 손씨는 “한국전쟁 당시 포항전투가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을때 동네 사람들과 아홉 살이었던 나와 가족은 집을 비워두고 경주 시내로 피난을 갔다. 뒷산에 나무가 우거지고 그 산 아래에 위치해서였는지 작전본부로 쓰였다. 아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 아군본부가 되고 인민군이 이 지역을 확보하면 인민군 본부가 되었다” 그런데 피난을 갔다 오니 이 집에 총알 자국이 하나 없었다고 한다. “우리집 근처에 큰 집들은 폭격을 맞아 사라졌지만 제일 크고 좋은 편이었던 이 집만은 건재했다. 그래서 주민들이 ‘저집은 대대손손 인심이 좋고 후덕한 집안이어서 피해가 없었다’”고 전했다
경주시 동부동에 있는 경주경찰서 맞은편의 구교육청(현, 삼락회관) 건물에 가려져 도무지 그 진가를 드러내지 못하는 700여년 세월을 버텨 온 고건축물이 하나 있다. 1985년 8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동경관東京館’. 이는 고려 때부터 내려온 객사의 부속건물로서 경주 객사를 달리 동경관이라 불렀다. 객사는 고려때부터 있어 온 지방의 중요 관청이다. 조정의 고관이나 귀빈이 오게되면 숙소와 동시에 연회장으로 사용하고 고을의 중요 문물이나 서책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특히 경주의 동경관은 웅도답게 객관의 규모 또한 웅대하고 장엄했다고 한다. 지금은 각종 건물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어 주변 경관이 우중충하다. 동경관으로 들어가는 길마저 확보되지 않아 동경관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무색하다. 구 교육청 마당을 거쳐 좁은 모퉁이를 돌아가야 겨우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웅장하고 건장한 위용에 비해 생뚱맞게 대접받는 듯해 안쓰러운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니 누가 여기가 고려와 조선조를 통하여 7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깊은 관청건물이 남아 있음을 알겠는가.’ -경주 객사, 동경관의 변천약사 동경관이란 동경東京의 객관客館이란 의미다. 경주 객사인 동경관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읍성 관아 건물 가운데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수령이 집무하는 동헌보다 규모가 더 컸다. 정청을 비롯해 동서익실東西翼室등 총 100여 칸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동경관은 당시의 경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관아였던 것이다. 객사는 단순히 내왕하는 관원이나 양반들이 묵는 곳이 아니라 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다. 건물을 옮기기 전, 동경관 정청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조선 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갖추던 곳이었다. 망궐례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각 지방의 관원이 궐패闕牌에 절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왕명을 받든 사신을 영접하고 유숙하는 기능 이외에도 신성시 여긴 곳이 바로 객사였다. 동서쪽 건물은 6관의 관방이라 하였으며 그곳에서 신라 옥피리를 비롯해 청동제 화로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경주 객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와 조선조의 수차례 화재로 인해 지금의 모습이 전해진다. 고려 충숙왕 7년(1320) 화재로 객사의 상방上房과 대청 등 71칸이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처음 보인다. 객사는 1590년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에 임란 때 일부 건물과 초석만 남아 있었다. 선조 35년(1602)에 정청 및 동서헌을 지었다. 영조 2년(1726)에 부윤 조문명에 의해 객사가 중수되었고 정조 10년(1786)에 부윤 김이용이 부임해 새로 지으니 지금의 객사 건물이다. 1907년에 대청과 동·서헌의 일부 건물을 변경하여 공립경주보통학교 교사로 활용하고 다른 부속 건물은 헐었다. 1922년에 최준 등이 결성한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신라 유물 등을 수집해 이곳에 전시하며 이용했다. 1952년에 경주교육청을 객사 서편에 신축한다는 명목으로 기울어져있던 객사 대청(솟을대청)과 동헌을 철거한다. 서헌 15칸은 헐어서 동쪽으로 약간 옮겨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경관, 일제강점기 저들의 관청 건물을 지으면서부터 헐리기 시작 동경관은 일제강점기 저들의 관청 건물을 지으면서부터 헐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정청과 부아 건물만은 남겼으나 시가지로 변하면서 객관의 서헌西軒만을 이곳에 옮겨 다시 세운 것이다. 부아府衙건물은 구 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현재 경주문화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경관의 원래 건물은 앞면 5칸과 옆면 3칸의 단층 기와집 세 채가 이어진 총 45칸의 규모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었다. 김기조 경주문화원장은 “해방후 일본, 만주, 중국 등에서 경주역에 내린 귀환동포들이 당장 고향으로 가지 못해 갈 곳이 없자 객사에서 일시 머물렀다. 또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이 내려와 오 갈 데가 없자 동경관에서 장기체류가 불가피했다. 땔감이 필요하자 마룻바닥과 문짝까지도 떼어내서 불쏘시개용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생생한 증언을 통해 회상한다. 급기야 동경관 정청건물은 1950년초에 교육청을 신축한다는 구실로 관리들의 무지로 인해 무참하게 헐리고 만다. 이에 관청에서는 정청중에서 마지막 좌익현만 남자 마저 없앨 작정을 했으나 당시 경주 유인儒人중 한 사람인 유인달씨와 몇몇이서 고려때부터 있던 건물의 중요성을 각인시켜 지금의 좌익현 건물을 보존하기에 이른다. 좌익현 건물을 오른쪽으로 이건하고 그 자리에는 구 교육청 건물이 들어선다. 지금의 동경전은 웅장하지만 무엇인가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은 인상이다. 이 건축물의 왼쪽은 팔작지붕이 드러나 있고 오른쪽에는 맞배지붕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건물을 이건하면서 가운데 정청인 솟을대청이 없어져 버렸으므로 기형적인 지붕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한 채의 건물에 수상하게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최석신이 쓴 ‘동경관東京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지금 그 현판의 행방이 묘연하다. 최석신은 조선조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던 당대 경주 최고의 서가였다고 한다. 한편, 고종 19년(1882)에 부윤 정현석이 쓴 ‘동경관’이란 현액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소실된 나머지 두 채의 주춧돌과 3층석탑, 돌기둥 남아 있어 1961년 경주문화원이 발족하면서 동경관을 관리하게 되고 그 후 구교육청이 관리한다. 현재는 경주문화원 산하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금의 동경관은 풍우에 의한 목재와 단청의 부식이 심한 편이다. 소실된 나머지 두 채의 주춧돌과 3층석탑, 돌 기단과 양각의 부처상이 새겨진 조각, 석주는 경찰서 앞마당과 구교육청의 입구화단에 남아 있다. 망궐례를 올리던 망궐전의 돌기둥인 석주에는 이끼가 연하게 자라고 있었다. 부속건물이 매우 많았으며 그중의 하나인 정자는 사진으로 남아 있다. 김 원장은 “원래는 지금의 동경관에 있는 담과 길이 없었고 숲이었다. 일제강점기 ‘야마구찌병원(지금의 화랑수련원)’이 들어오면서 숲을 없애고 입원실 , 사택, 정원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가 변모되었다”며 그 이후 지금의 도로가 생겨나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김 원장은 “원래의 모습인 3채의 동경관을 복원해야 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고려조선의 관영건축물로서 태조 이성계의 위패를 모셨던 정신적인 곳인 동시에 전국의 객사중에서 역사성과 건물의 위용과 가치로 볼 때 손에 꼽히는 건물이다. 더구나 복원 할 수 있는 옛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고 석물들도 경찰서나 구교육청 마당에 보존이 되어 있으며 한 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니 비교적 복원이 용이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정청의 본래 자리였던 구 교육청(지금의 삼락회관)을 정리하고 시민들 관심의 중심에 둬야 한다. 구 교육청의 건물을 없애면 동경관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보수 공사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지금은 그 모습이 가려져 경주 시민들조차 잘 모른다”며 동경관 복원의 당위성과 시급함에 대해 강조했다. --------------------------------------------------------------------- 김기조 경주문화원장님의 자문과 안내에 깊이 감사드리며 향토사학자 황재현의 ‘동경관의 어제와 오늘(1995)’에서 인용한 구절이 있음을 밝힙니다.
쓸쓸한 설날 밤 꺼져가는 등불 앞에 홀로 앉았으니/봄이 오는 소리가 먼 고목에서 들리네/ 덧없는 세월은 육십 하고도 육년/ 한 해가 바뀌는데 어인 일로 못 가는가// 이 시는 조선후기 경주가 낳은 걸출한 인물인 덕봉德峰 이진택(李鎭宅, 1738∼1805)선생이 귀양지에서 한 해를 보내며 소회를 적은 시다. 불국사 가는 길에 있는 덕봉정사德峯精舍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해 이번기획의 취지에 최적한 곳이었다. 숨어있는 보물을 발굴하는 기쁨을 덕봉정사가 선사해준 것이다. 경주가 배출한 조선조 ‘덕봉선생’의 발견과 훌륭한 문화유산으로서의 덕봉정사가 그것이다. 정자로 들어가는 작은 평대문의 기와에는 이끼와 와송이 무심히 자라고 있어 인적 없이 고즈넉한 덕봉정사의 운치에 세월의 무상함을 더했다. 또한 덕봉정 연못의 수면위로는 유난히 눈부신 겨울햇살이 매끄럽게 빛나고 과묵한 정자는 과객들의 눈을 호사하게 한다. 오직 의리와 명분으로써 국가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소신 정책을 펼친 덕봉선생 정신의 향기로. -덕봉정사는 경주시 마동에 있는 덕봉정사는 1995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덕봉 이진택 선생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을 양성하던 작은 초당을 후일 덕봉의 증손인 이우영이 확장, 중창한 것이다. 이우영은 1905년(고종 42)에 증조부의 유촉이 서려 있는 마동에 조용히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덕봉정사를 건립하고 덕봉을 추모했다. 중창한지는 올해로 110여년이 되는 셈이다. 지금은 경주이씨 소정덕봉공파 문중이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자연경관을 고려하여 ‘ㄴ’자 형태로 짓고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인 박공지붕과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인 ‘팔작지붕’을 얹었다. 덕봉정사는 목재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폐사찰의 건축자재를 활용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건축물의 기둥을 받쳐주는 초석인 연화대나 대부분의 목재가 그렇다. 지금의 덕봉정사德峯精舍 바로 뒤쪽에는 덕봉의 작은 초당이 있었다고 구전되어 온다. 선생이 소박하게 독서도 하고 쉬는 공간이었다고 전한다. 정자 앞쪽에는 시원스레 호방한 연못이 있고 그 안에 갖가지 초목들이 무성한 원형의 섬이 있어 조경이 뛰어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연못은 당시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연못을 갖춘 정자들이 바깥경관을 고려하지 않는데 비해 이곳은 주변의 경관을 고려해 건물도 ‘ㄴ’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정자의 기둥뿌리와 초석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보머리며 계자각난간이며 추녀며 도리들은 정교하고 세심하게 잘 다듬고 조각한 목재의 고색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전체 덕봉정의 골격은 남성적이다. -덕봉선생, 다산 정약용과 함께 실학과 개혁으로 국가재건에 전력 쏟아 선생은 부친의 명으로 명경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정조 4년(1780), 식년 문과에 합격하면서 승문원 부정자,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게 된다. 또 정조의 특명으로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선생이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한 시기는 당파 싸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정조의 신임을 받으면서도 벼슬이 사헌부 장령에 머무른 것은 정치적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당파간의 갈등속에서 개혁적이고 실학적인 그의 주장이 기득권을 가진 노론계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리라. 덕봉은 당시 정조가 펼친 탕평정책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인물로 당파간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덕봉은 오직 의리와 명분으로써 국가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소신 정책을 펼침으로써 사노비혁파에 이어 공노비해방을 보게 되었다. 특히 다산 정약용과 2년 동안 사헌부에 같이 근무하면서 실학과 개혁으로 국가재건에 전력을 쏟았다. 덕봉의 관직생활은 청렴과 악습개혁으로 일관했다. 1799년까지 관직에 있다가 정조대왕이 승하한 후에는 정약용을 몰래 도왔다는 이유로 함경도 지방의 외딴 산골 마을인 삼수갑산三水甲山에 2년 동안 유배된다. 그 죄목은 대략 실학자의 입장을 두둔하고 정약용 선생의 동생 정약전에 편의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덕봉 선생의 7대손인 이상필李相弼씨는 “당신께선 믿지 않았지만 천주교에 대한 이해도 상당부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또 그분들과 교류를 하면서 여러 가지 편의도 제공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죄목들 같다”고 한다. 2년 후 유배에서 풀려나 그 이듬해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선생의 생애는 오직 의리로 점철된 삶이었다. -원뜻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전격적인 개방 검토 이상필씨는 “연못 주변으로 나 있는 콘크리트 도로는 지금은 변형이 된 모습이다. 원래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드리워져 아취가 매우 넘쳤다. 어릴적 그 소나무에 올라가서 다이빙하고 자맥질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1905년 확장하면서 원래의 초당은 관리채로 사용하다가 헐은 지가 불과 20여 년 전이라고 한다. “내 기억속에도 그 집은 살아있다. 보존했어야 하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의 관리채에 자손들이 언제든지 와서 별장처럼 쉬어 갈 수 있도록 개방을 하려고 한다. 후손들을 비롯해 누구라도 이 고택을 다녀 갈수 있도록 하고싶다. 덕봉정사의 관리측면이나 선생의 홍보 차원에서도 그렇다. 불국사 아래여서 접근성도 좋은 편이다” 지금도 경주시에서 기본적으로 문화재 지킴이가 와서 관리해주고 있지만 단순한 관리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고 원뜻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전격적인 개방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씨는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지지 않는 방향의 보존이 되어야 한다. 이로써 덕봉선생을 알리고 새로운 부분을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고 덧붙인다. -3000여 점의 고문서와 1000여 권의 고서를 경주 동국대에 기증, 국학의 귀중한 자료로 1999년, 덕봉의 종손 소호蘇瑚 이상걸씨는 3000여 점의 고문서와 1000여 권의 고서를 경주 동국대에 기증, 소호문고로 보존되어 국학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덕봉선생의 7대손이자 소호의 종제인 이상필씨는 고문서정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덕봉선생문집해제 등을 써서 국학계승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고문서집성 제62권’, 동국대 경주도서관 ‘소정문고목록’등이 간행돼 있다. 다산과의 서간문도 동국대에 기증했다. 덕봉과 다산이 주고 받은 서신들과 다른 문서들이 다수 보관되어 오다가 1900년경 사저의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고 나머지는 불탄 흔적인 채로 보관되고 있다. 이는 앞으로 발굴해서 밝혀야 할 과제이다. 동국대학교에 기증을 한 것은 덕봉 선생의 일대기와 방대한 자료들을 토대로 학술적으로 조명 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상필씨는 “선생은 보수적인 지역에 살았지만 실학적이고 선진적인 사상을 가진 분으로 분명히 재조명 되어야 할텐데...,”하며 안타까워한다. “다른 일기는 남아있는데 비해 귀양살이 당시의 일기가 없다. 기호 지방의 사상을 여기서 거론하기가 예민했던 당시의 문제로 보이며 없앴던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이 애석하다. 선생의 사상을 조명하는데 큰 도움이 됐을텐데 그렇지 못하다” “노비를 해방하자고 당색에 관계치 않고 주장했던 앞선 분이었다. 호구 조사시 노비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당신이 과거 급제를 하면서 노비들이 줄었다는 기록이 있다. 관직에 있으면서 부리던 노비들이 오히려 줄었다는 것은 노비 해방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한다”며 우리 후손들은 이런 사실들을 규명을 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고 강조했다. 영남일보 기사의 자료 일부를 인용, 이상필 저, 소호문고목록 ‘덕봉선생문집’중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도심 한 복판에 절’이 있다. 바로 경주시 시내권 유일의 역사 사찰이며 200년이 넘는 시간성을 지닌 법장사法藏寺(철우 주지스님)다. 천마총 후문의 맞은편이자 노동동 고분군 옆에 있는 이 사찰은 불국사의 말사로서 도심에 인접해 있어 많은 경주 시민들이 마음을 위안받았고 법장사에서의 추억담을 이야기 한다. 활짝 열어놓은, 검박하지만 미려한 법장사의 ‘정문’을 지나자 경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겨울 한낮의 햇살을 받아 경쾌하고 단아한 느낌을 주는 대웅전에서는 스님과 신도의 기도가 한창이었다. 고요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며 발원한 것을 기도하는 그들, 그것이 해묵은 기도라고 할지라도 자비의 도량에서 용해시키는 듯한 부처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성스럽고 자애로워 보였다. 윤색되지 않은 참 기도와 발원을 도심속의 법장사에서 부처님에게 속삭일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문화재보호구역 내 법장사는 문화재정비사업의 일환인 철거추진계획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에 법장사를 아끼는 많은 신도와 시민들은 경주시의 이러한 계획에 거센 반발을 하고 있다. 법장사 측은 경주시에 ‘대웅전 및 정문에 대한 문화재 지정신청’을 요구한 바 있으며 이에 경주시는 “법장사에 대한 문화재적 접근이 필요하며 일방적인 철거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법장사의 대웅전 및 정문正門은. 법장사 대웅전의 초건 시기는 미상이다. 경주 최초의 경주부 관아 건물군의 일부로 원래는 ‘제승정’이라 했다. 조선 영조 30년(1754) 경주부윤 홍익삼이 중수해 일승정이라 하고 건물의 동쪽부분을 풍월루, 서쪽부분을 망경루라 칭했다.(‘동경통지’) 이후 고종 20년(1883년)부터 21년에 경주부윤 김원성이 중건해 일승각으로 개명(‘경주읍지’)하고 경주 동헌의 가장 주된 집채인 정당正堂으로 이용한다. 다시, 1937년 동부동 159-1번지에 있던 일승각 건물을 배씨 부인이 인수해 작고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위해 기림사에 기증한다. 이듬해인 1938년 현재의 자리인 노동동 275번지에 이건해 대웅전을 세우고 사찰로 개창하고 기림사 경주시 포교당으로 쓰인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의 말사인 법장사 대웅전이다. ‘정문’역시 초건의 시기는 미상이다. 경주부 관아 건물군의 하나로 지금의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중문이다. 대웅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이며 경쾌한 느낌을 주며 누각이나 정자에 많이 쓰이는 익공계 단층이다.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를 짓고 있는 지붕형식으로, 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 모양이며 측면에서는 삼각형인 지붕)의 건물로 1998년 한국문화보호 재단이 동부동 159-1번지에서 실시한 발굴 조사 결과 일승각으로 추정된 건물은 정면 5칸, 측면3칸의 규모였으나 노동동으로 이건 과정에서 규모가 확대 됐다고 밝혔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중문인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단층 맞배지붕(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의 양식이다. 현재 정문의 좌우 1칸은 판자로 막혀 있으며 가운데 1칸은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200여년의 역사적 배경 가진 명품 사찰, 법장사의 미래는 밝다. 법장사는 노동노서 고분군을 끼고 있는 위치적 요인과 200여년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경주가 명품화 되면 될수록 더불어 명품화 될 수 있는 사찰이다. 특히 도심권에 있는 법장사는 외국인이 많이 찾는다. 법장사 철우哲祐 주지스님은 “수학여행단이 반드시 거쳐 가는 고분군의 바로 지척에 우리 절이 있는데도 고분만 보고 간다.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오늘을 사는 경주에서 과연 우리 문화역사의 근간이었던 것이 불교문화였는가를 의심할 정도로 소홀하게 간과하는 경향이 안타깝다” 철우 주지스님은 “법장사는 굳이 포교를 하지 않아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포교가 되는 측면이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도심의 유적지를 관광하고 도심에 위치해 있는 법장사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미 세계정신의 중심이 된 불교를 말하지 않아도 외국인에게는 전통적인 한국의 불교가 이 신라를 통일 시키는 원동력이었음을 자연스레 알리고 접하게 되는 역할을 법장사가 하지 않는가. 법장사가 역사적인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며 다시 한 번 이러한 정신적인 부분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인자’ 독립투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행했던 아지트…법장사 법장사는 교훈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당시 청기와 다방의 맞은편에서 ‘조인자 한의원’을 운영하던 조인자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의 자금원이었으며 경주의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결사한다. 역시 독립투사였던 당시 법장사 주지 스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실천했던 ‘아지트’였다고 전한다. 그는 한의사로서 의료봉사를 하는 등 재능기부를 실천했던 사람이었으며 또한 불우한 이웃을 위한 선행을 펼친이 였다고 한다. 또한 법장사는 한국전쟁 당시 고아를 많이 보살폈던 곳이라고도 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도심에 공공의 회의 장소가 없어서 주민들의 크고 작은 행사 및 회의를 이곳 법장사에서 진행했다고 전한다. 식사를 무료로 제공했으므로 회의가 더욱 용이했고 구국기도도 많이 했다고 한다. 법장사는 200여년의 시간을 경주시민과 함께 한 친숙한 사찰로서 지금도 유명한 스님들이 찾는 전국적인 사찰이다. -법장사…시민과 함께하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강의를 맡고 있는 철우 주지스님은 “부처님 불법을 제대로 알려서 현세의 어려움을 부처님의 가르침과 명상이나 참선을 통해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고 싶다. 또 황남대총, 서봉총, 금관총 등의 역대 신라의 왕들께서 왕생극락 하라고 기도도 한다”며 이곳 법장사는 훌륭한 주변환경 덕분에 걷기를 통한 명상을 하기에도 좋으며 우리의 얼을 배울 수 있는 절이라고 강조했다. 일주일에 한 번, 매주 토요일 오전 9시에서 12시까지 진행되는 ‘자비도량참법’ 참회의 기도를 통해 신도와 시민들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공덕을 지을 수 있게 한다. 스님의 법문과 함께 이뤄지는 이 기도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도 가능하다. 이 기도로서 부처님의 자비로 가피를 입은 사람이 많다고 덧붙였다. 또 매월1, 2, 3일 ‘직장인을 위한 다라니기도’를 오후 7시~9시까지 한다. 이 기도는 불자가 아니어도 불교에 관심있는 이는 누구라도 참여 할 수 있다. 한편, 철우 스님은 외국으로부터 역수입 되어 들어오고 있는 참선을 왜 해야 하는지, 마음 밝히는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참선을 실천할 있는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있다. 철저한 교리를 바탕으로 해서 참선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참선을 유도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이 주위의 고분군을 모시고 불교식의 ‘영산재(죽은 사람을 위한 재로서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중요 무형 문화재 제50호)’를 지내고 싶다”면서 “이 일은 고분군 옆에 위치한 법장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법장사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054)772-4840로 하면 된다. -시내의 평지에 있는 유일한 사찰, 관광자원으로도 큰 기여 김성수 (사)경주문화발전주민협의회 회장은 최근의 법장사 철거론에 대해 “절대 보존하고 더욱 확장해야 한다” “경주 도심의 교회는 26곳이다. 사찰은 시내권에서 한 곳 뿐이다. 경주의 역사와 문화는 불교가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경주시와 법장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법장사는 전국에서 유명한 스님들이 수행한 곳이며 시내의 평지에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며 법장사를 보존해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했다. 또 “문화재적 가치와 함께 경주 도심을 찾는 관광객들의 높은 관심을 끌고 있으며 지역사회에 관광자원으로서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사찰이다. 더욱 명품화 될 수 있는 이 절을 당면한 정책에 의해서 없앤다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대목이다” “정치나 행정적 차원에서 좀 더 깊이 생각하고 판단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지난 23일 찾은, 강동면 왕신리에 있는 운곡서원雲谷書院은 연 3일째 내린 겨울비에 젖어 아취가 넘쳤다. 운곡서원의 반월대에 올라보니 운무가 드리워진 서원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서원의 각 건축물은 ‘口’자 모양으로 의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전국 서원을 가봐도 이런 서원이 없다’고 하는 이 서원은 탑산으로 둘러싸인 지형과 경관이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운곡서원을 둘러 보면서 탐욕을 부리던 우매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남의 악함을 이뤄주지 않는다’는 논어의 한 구절이 떠 올랐다. 더불어 살아가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이해에 대해 생각해보는 넉넉함을 서원 곳곳에 배어있는 정신의 힘으로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운곡서원의 오늘이 있기까지 운곡서원은 안동 권씨 시조이자 고려개국공신 태사공 권행權幸 선생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1784년(정조 8년)에 지방유림들의 뜻을 모아 이 지역에 ‘추원사追遠祠’를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태사공을 경주에 모신 것은 본래 신라 종성김씨 ‘김행’이었는데 ‘권행’으로 고려 태조에게 사성賜姓을 받아 그 충의가 신라에 대한 마음이었으므로 경주 향인들의 인준에 전적인 지지를 얻은 것이다. 종중의 중의가 모아진 것이었다. 이후 동쪽으로는 단종의 이모부인 죽림공 권산해權山海와 서쪽으로는 귀봉공 권덕린權德麟을 더해 세 선현을 모시며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3년 이곳에 설단設壇을 해 태사권선생, 죽림권공, 귀봉권공에 대한 향례를 올렸다. 1930년 유허지에서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6년 향의에 의해 ‘운곡서원’으로 개편해 일본거류 후손들의 성금과 전국 후손들의 성금으로 완전 중건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혁근(76) 운곡서원관리위원장은 “묘우나 강당을 지을때는 기본적인 서원의 예가 있어 그것을 토대로 복원하지요. 기본적인 골격에 어르신들의 구증을 바탕으로 중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1976년 운곡서원으로 중건복원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정자 ‘유연정’, 기적의 은행나무 ‘압각수’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인 경덕사景德祠, 신문神門, 5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1칸의 동무와 서무,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으로 이뤄져 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은 6칸의 유연정悠然亭이 있다. 묘우(신위를 모신 사당)인 경덕사에는 권행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동무에는 권산해, 서무에는 권덕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정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으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서재와 유연정은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던 곳이다. 사당인 경덕사 옆에는 태사권공 신도비가 있고 외삼문인 견심문 앞에 서원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반월대가 있다. 유연정은 동편 계곡 ‘용추대’ 위에 태사공과 죽림공, 귀봉공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순조 11년(1811)에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자연 폭포수가 정자 앞으로 흐르고 있으며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한 것으로 1998년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45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운곡서원의 건축물 중에서 훼철 되지 않은 건축물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여덟 팔 자 모양의 지붕을 얹었다. 정자에 오르니 계곡을 따라 무심히 흐르는 물소리에 더욱 명료해지고 명철해졌을 유생들의 체취를 맡는 듯 했다. 서원 경내 좌측에는 옛 모습 그대로인 ‘관리사’ 동이 따로 있는데 이 건축물도 훼철되지 않은 예전 그대로였다. 이 관리사의 규모만으로도 훼철 되기전의 옛 서원의 규모와 위상이 짐작될 정도였다. 현재 관리사에는 두 명의 관리인이 거주 하고 있으며 서원을 관리한다고 했다. 또 운곡서원에는 신목神木 한 그루가 있다. 아름드리나무 밑둥에 풍성한 가지를 하늘로 뻗어 올린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하는 수령 330년의 은행나무다. 이 은행나무는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 등이 처형되자 죽었다. 그러나 이들이 복권되면서 200여 년 후 되살아난 기적을 일으킨 금성단(사적 제491호)의 압각수 가지를 꺾어 한 달여 후에 이곳에 심었는데도 그 가지에서 움이 돋아 또 한 번의 신비함을 보여 지금껏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고 전했다. 향유사가 ‘충’하면 초헌관인 원장이 ‘돌’ 하고 대답한다 이 서원에서는 연중 한 차례 춘향春享을 지낸다. 3월(초정初丁, 첫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제관들은 4~50명이 모인다고. 권 위원장은 “경주 향인들 중 각 성씨 대표들, 유림으로서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올 수 있습니다. 타 성씨도 많이 참석합니다. 경주 여러 문중의 인준을 받아 이 서원을 지었기 때문에 향중사람들이 참석하는 향중서원입니다”고 설명한다. 제수 장만에 대해 묻자 “향유사는 타 성씨의 사람이 한 명 있고 우리 권씨 문중 사람으로 문유사가 한 명이 있어서 이 문중 유사가 집안 사람들을 모셔와 향례를 치룹니다”고 한다. 안동 권씨 시조를 모시고 있는 이곳에 전국의 안동권씨 문중 사람들이 참배하러 오며 다른 성씨들도 방문해 참배 하기도 한다. 그럴때마다 권용호(문유사, 65)가 서원을 안내해준다. 권씨 문중출신의 문유사의 임기는 1년이다. 문유사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마다 분향을 한다. 한편, 향례시 ‘감생監牲’을 한다. 감생이란 향례 하루 전날 제수로 쓰여질 돼지의 상태를 살펴보는 과정을 일컫는다. 향유사가 제관들 앞으로 땅을 울리면서 네 모퉁이를 다니고 이 과정을 세 번 반복한다. 손을 씻어 돼지를 쓰다듬고는 다시 손을 씻고 읍을 하면서 ‘충’하면 초헌관인 원장이 ‘돌’ 이라고 한다. 이것을 세 번 외치면 건강하고 살이 찐 돼지가 제수로서 합격점을 받는다고 한다. 또 모든 제물은 익히지 않은 날 것으로 준비한다고. “그저 할아버지 소所에서 일한다는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합니다” 권 위원장은 “저희들은 개인이 출혈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할아버지 소所에서 일한다는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문중에 걱정 끼치지 않고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합니다. 문중의 뜻도 잘 모아집니다”고 해 운영위원장으로 힘드는 점에 대한 질문을 한 기자를 머쓱하게 했다. 또 “우리는 영리 목적의 어떤 관광자원화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현재의 형편에 맞추어 조경을 좀 더 보완하는 정도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요. 서원의 이미지 훼손이나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우려하는 차원입니다”며 서원의 관광 자원화에 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한편 올 한해 문유사를 맡은 권영호씨(65)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 일찍 사당의 문을 열고 분향하러 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라는 말에 권 위원장이 “문유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학식도 뛰어나고 배우겠다는 의지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문유사 권씨를 칭찬한다. ‘봉심 아뢰오’ 촬영을 위해 사당의 문을 열 즈음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기자의 말에 ‘아녀자는 무방’하다고 했다. 위패 여는 것을 ‘개독’이라 하는데 이때 ‘봉심 아뢰오’라고 고한다. 이는 신주를 보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사권공, 죽림공, 귀봉공 세 분의 위패를 개독하고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겨울비가 내린 쌀쌀한 날씨속에서 촬영과 인터뷰에 협조해주신 권혁근 운곡서원관리위원장과 권용호 문유사 두 분 어르신께 깊이 감사드린다
“옛날부터 문구멍이 성한 데가 없어야 집이 된답니다” “김 호 장군 할아버지가 항상 우리 후손들을 지켜 주신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텅 비어있는 고택이 아니라 아직도 장작에 불을 지피고 메주를 손수 만들어 장을 담그는 김호 장군 14대 종부(이영숙, 56)가 살고 있는 고택이 있다. 경주시 탑동의 너른 들녘을 지나 좁은 마을길을 따라 가다보면 임진왜란 당시 노곡蘆谷에서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김호(1534~1592)장군의 고택이 나온다. 신라 유적이 즐비한 이 길에서 만나는 유일한 조선시대 유적지다. 지척지간에는 이 고택의 정자로서 김호 장군의 호를 따서 지은 ‘월암재’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온기가 넘쳐야 집 수명이 길어진다는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이씨는 14대손이었던 남편의 기일을 하루 앞두고 있어 장을 봐 왔다고 했다. 그녀는 두 아들의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 생업을 겸하며 이 고택을 관리해왔다고 한다. -14대 종부...그녀는 꽃처럼 붉고 애련하다 14대 종부 이영숙씨(56)는 수줍음이 많고 단아한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네다. 절개와 기상 또한 그녀의 가녀린 풍모 곳곳에 스며있다. 김호 장군 14대 종부로서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녀 덕에 이 고택의 다양한 앵글 속 세간들과 사소한 공간에서조차 반들거리는 윤기와 따스한 온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것은 부지런한 그녀와 그간 다녀간 이들이 유기적으로 만들어낸 온기였다. 물론 김호 장군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은 그녀 최고의 수호자였다. “내 개인은 없어요. 가문에 누가 될까봐 내가 책임 질 수 있고 끝까지 할 수 있는 일만 해왔죠. 올해 체험 프로그램을 하면서 종가체험이나 다도체험 프로그램의 경우도 막연하게 운영하는것 보다는 기왕이면 명품고택체험과 더불어 하룻밤 묵으면서 제사체험이나 종가체험을 직접 겪어보면 더 보람있겠다는 생각에 경주시 프로그램과의 연계를 생각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명품고택사업’을 시행해보자는 시의 제의에 동의했다고. 고택, 종택명품화 지원사업은 전통한옥체험을 통해 종가의 전통이 살아있는 종택을 명품화해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 및 고택의 품격을 제고시키는 목적의 사업이다. 고택의 역사가 최소 150년 이상 또는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으로 종손이나 종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종가로서 고택고유의 음식 등 생활문화의 체험이 가능한 고택이어야 하는데 김호 장군 고택은 이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 “생업을 하면서도 제사 한 번 소홀히 한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밤이나 새벽까지 제수를 손수 준비했어요” “평생을 이 집안의 종부로서 내 머릿 속에는 애들 잘 키우고 조상님 제사 모시는 일밖에 없었어요” 라는 이씨는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이 고택을 관리하며 두 형제를 훌륭하게 장성시켰다. -김호 장군(1534~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경주 부근의 각 군현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 적진을 공략하였다. 1592년 8월 경주노곡싸움에서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는 싸움을 벌이고 전사했다. 본관은 경주로 자는 덕원, 호는 월암月庵이다. 1570년(선조 3년) 무과에 급제하고 20년의 관직생활 끝에 하향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도대장에 임명된다. 경주 부근의 각 군현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수시로 적진을 공략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전곡과 전천 등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부산첨사에 제수되었다. 또 의병 1400여 명을 이끌고 경주 노곡에서 적군과 맞부딪쳐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적군의 북상을 저지하다가 언양에서 진격해 온 약 500기에 달하는 적군과 싸워 적을 섬멸하였다. 그러나 그도 경주노곡싸움에서 큰 부상을 입고 전사한다. 이 싸움에서 의병은 경주 일원의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끝까지 추격을 감행했다. 그 전과가 커 1758년(영조 34) 다시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월암 김호 장군 사후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두 아들도 전사하게 된다. 이에 막내아들이 가문을 유지하게 된다. 한편, 김호 장군과 친분이 있었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동시대의 잠와 최진립(1568∼1636) 장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아서 김호 장군의 업적과 생애가 더 정확하고 널리 알려지기를 원하는 바람을 후손들은 가지고 있다. -약 400년의 모습 유지하고 있는 중요 민속자료 34호…김호 장군고택 17세기전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본채의 경우 약 400년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편이다. 1977년 중요 민속자료 34호 로 지정된 이 고택의 집터는 신라시대 절터였다는 설이 있으며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석조물이 있고 마당의 우물돌은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선 정면에 안채, 왼쪽에 아래채, 안채 오른쪽 뒤편으로 김호장군 사당이 모셔져 있다. 원래 사랑채가 동쪽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자리만 남아있다. 종부 이영숙씨는 “시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원래의 집은 ㄷ자 기와집이었으며 아래채의 지붕도 기와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전소가 되었고 전쟁 중 응급조치로서 초가로 급하게 짓게 되었다고 해요”하는 말에 안채의 규모에 비해 아래채의 규모가 조화롭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은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고 건의도 해 봤어요. 증거 자료를 제시하라는 바람에 무산되었지만요. 구증보다 실질적인 증거가 필요한거겠지요” 한다. “지금의 대문자리에 중문이 있었고 지금처럼 안채가 바로 보이는 대문의 형태가 아니었다고 해요” 시아버지가 병환 중이었던 1977년 중요민속자료료 지정이 되고 당시의 트렌드였던 볼거리로서 초점이 맞추어져 용인민속마을의 초가개념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원래 옛 가옥의 형태를 더욱 시원스레 살 릴수 있었으면 바람을 가져보는 대목이었다.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1칸 규모에 왼쪽부터 부엌, 방, 대청, 방으로 단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집을 처리한 기법들은 옛 법식을 따르고 있고 대청 앞에는 문짝을 달았다. 아래채는 앞면 3칸, 옆면 1칸이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굴뚝을 부뚜막 한쪽에 설치해 구성의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한편, 사당은 국가에서 김호 장군의 탁월한 공적을 인정해 불천위를 명한 사당이다. 따로 담장을 둘러 세운 맞배지붕집으로 안쪽을 모두 터 놓은 통칸이다. 이 고택은 가장 오래된 민가 건물 중 하나로 옛 건축 수법과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이 들락거리고 밟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예약제로 한옥체험업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이씨는 “원래 대가족이 살던 집이었는데 혼자 있으니 사람이 들락거리고 밟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한다. 불을 지펴야 자연건조도 되고 순환이 된다며 더울때도 장작불을 계속 땠다고 하는 이씨는 “저 혼자 있어도 잠시도 쉬지 않고 닦고 쓸어요. 하하. 고택협회경리보수팀에서 얼마 전 다녀가면서 구석구석 손질이 너무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할 정도예요. 고택 체험을 하고 간 사람이 다시 찾지요”한다. 한편, 지난 14일, 고택을 찾은 날 고택·종택 명품화 지원사업에서 김호 장군고택체험 프로그램이 이번 정기추경때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올해부터 사업이 실시되는 것이다. 그 준비작업에 더욱 긴장하고 있는 그녀는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문중에서 전해오는 책자 및 자료를 바탕으로 관광객의 이해를 돕기위해 각색하는 부분에 나도 참여하고 김호 장군과 남산 주변의 경관도 볼 수 있는 영상물 제작에도 의견을 개진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예정이다”고 전했다. “경주시의 관심과 함께 여러 사람이 와서 보기도 하고 내가 힘 닿는 데까지 알리면서 이 고택을 가꾸고 지켜 우리 아들들이 대를 이어 이 고택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동안 나는 더 열심히 할 것이다” 경주시의 지원이 사실은 어깨가 무겁다며 어떻게 운영의 묘를 살려 관리를 잘할까가 고민이라는 이씨. “내 안목이 명품고택 사업에 미치지 못할까 봐 걱정”이라는 그녀는 김호 장군 14대 종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사찰, 향교, 고택, 서원은 옛 선현들의 숨결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우리 지역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번호부터는 지척에 두고도 잘 알지 못해서 그 가치가 묻혀있는 이러한 문화재 혹은 비문화재들을 매주 기획해 소개하고자 한다. 지역의 사찰은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사찰 15곳을 포함해 360여곳의 사찰이 있다. 서원은 원院,사祠,당堂을 합해 43곳이 있으며 제향을 모시는 곳은 37곳이다. 이 중에서 경주시에서 향사비를 지급하는 곳은 30군데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고택은 양동마을의 향당, 서백당, 관가정, 무첨당, 안강의 독락당, 내남면의 충의당, 탑동의 김호장군고택, 황남동 숭혜전, 숭덕전, 숭신전 등으로 모두 11곳이다. 이들 중 우리의 이목을 새롭게 집중시킬 명소를 발견해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보며 연재를 시작한다. 김유신 장군과 신라학자인 최치원, 설총을 모신 곳…서악서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까이 있는 자들이 기뻐하며 멀리 있는 자들이 오게 하여야 한다”고. 경주시 서악동 615번지에 위치해 단정한 운치와 함께 웅장미를 뿜어내는 서악서원은 그런 맥락에서 합당하다. 뒤쪽으로는 포근하게 선도산이 감싸고 있어 서악서원이 안겨있는 듯한 형국으로 서원 본연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해사한 풍치는,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 한겨울 늦은 오후에 일점이 되었다. 강당인 시습당時習堂에는 유교의 도를 지키며 학문을 하는 유생들의 경전외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해 옛 선인들의 숨결이 손에 잡힐 듯 그윽하다. 서악서원은 경북도 기념물 제19호로서 김유신 장군과 신라학자인 최치원, 설총을 모신 곳이다. 이곳은 조선 명종때 경주부윤 이정(1512∼1571)이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1561년 사당을 세웠으나 당시 경주지역 선비들이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함께 모실 것을 건의했다. 선비들과 뜻을 함께 한 이정은 퇴계 이황과 의논하기에 이르렀고, 그 뜻이 받아들여져 명종 18년(1563)에 ‘서악정사西岳精舍’를 건립했다. 서악정사는 퇴계 이황이 직접 명명하고 그의 글씨로 현판을 달았다. 이후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1602년 3인의 위패를 모신 묘우와 1610년엔 강당과 동·서재를 새로 지었다. 또 인조 원년(1623년)에는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현재 시습당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당시 명필인 원진해가 쓴 것이다. 서악서원은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전국 650개 서원 중 살아남은 중요서원 47개 중 하나다. 경주지역에서는 옥산서원과 함께 당시의 서원철폐령을 피했던 귀한 서원. 마치 궁궐같이 웅장하고 시원스러워 서악서원의 건축은 여유롭고 마치 궁궐같이 웅장하고 시원스럽다. 영귀루에서 시습당까지 양옆의 동재, 서재와 함께 평지이면서도 시원스레 관통하는 구조를 자랑한다. 외삼문인 도동문道東門으로 들어서면 맨 처음 만나는 누각인 영귀루詠歸樓가 늠름하다. 이어 시습당과 신위를 모신 묘우 등이 차례로 배치돼있다. 사당까지의 일직선 배치가 시원스럽다. 사당까지는 강당인 시습당을 지나는데 대문 3칸, 사당대문 3칸, 사당문 3칸등 모두 9개의 문을 통과해 갈 수 있다. 즉 앞에는 강당을, 뒤에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인 것이다. 또 80여칸 정도의 규모로서 서원으로서는 웅장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편, 서악서원은 대문이 딸려 있는 곳간채, 행랑 대문채, 행랑채, 안채, 화장실채 등 다섯 행랑채를 거느리고 있다. 서악서원의 사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이며 지붕면이 양쪽 방향으로 경사진 지붕을 가진, 즉 八자형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먼지 앉았던 서악서원, 새로운 활기를 띄다 이 서원은 역사적, 건축적인 가치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주말 문화답사를 위한 여행객들이 간간히 찾고 있을 뿐이었다. 이 먼지 앉았던 문화재는 문화재청으로부터 문화재 상시 활용프로그램 지원에 힘입어 시행된 신라문화원(원장 진병길)의 ‘월암재’ 정비이후 빛을 보게 된다. ‘월암재’ 정비를 긍정적으로 지켜보았던 최현재 경주향교전교의 서악서원 관리요청제의로 지금의 서악서원이 새로운 활기를 띤 것이다. 전국적으로 서원의 현실이 어려웠던 차제였다. 3년전 서악서원은 문화재청, 경북도, 경주시의 도움으로 대대적인 청소 및 수리가 진행된다. 전기시설의 재점검과 벽면을 보수해 숙박 및 문화행사를 접목할 수 있는 장으로 변모한다. 상시적인 숙박을 하고부터 보다 나은 관리가 이뤄지게 되었고 설총, 김유신, 최치원, 세 분을 모시고 있는 만큼 이 세 문중의 공감대를 이끌어 낸 것은 지역유림들의 오픈마인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악서원의 성공적인 활용사례를 통해 여타의 경주서원들의 문의가 이어졌다. 진병길 신라문화원 원장은 “2012년 12월, 전국서원연합회 200여군데 중 서악서원 활용의 경우를 우수사례의 한 예로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 또 전국의 서원과 향교를 대상으로, 개보수를 통해 숙박을 할 수 있는 지원공모사업에서 전국향교 10곳과 서원 2곳 중 경주는 향교와 서악서원이 결정되면서 5000만원을 지원 받아 조만간 서원의 공간을 수리하게 된다. 수세식 화장실로 개조하고 창고를 휴게공간으로 변모시켜 문화체험이 용이하도록 돕게 된다”고 밝혔다. 서악서원에서는 1일 최대 20~30명까지 숙박이 가능하고 선비체험을 비롯해 청소년이나 직장인들의 문화재 가꾸기 봉사체험, 다도나 예절 체험 등의 문화체험, 원어민 대상의 한국문화체험, 택견, 투호놀이, 국악공연, 시·시조 낭송, 판소리 공연, 달빛기행, 다도, 서당체험 등과 전통결혼식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 한 커플의 결혼식1호도 치룬 바 있다. 서악서원에서 유留한 유명 인사들이 남긴 기분좋은 에피소드 서악서원은 전국의 서원 대부분이 조선시대 선현을 모시고 있는데 반해 신라시대 선현들을 모시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과 함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약 2㎞의 위치에 있어 내외국인들의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점도 장점이다. 또 서악서원의 주변으로는 김유신 장군 묘와 무열왕릉이 에워싸고 있다. 주위의 선도산이 신라의 전설을 품고 있으며 선도산 자락에 서악동 삼층석탑, 그리고 영경사지 삼층석탑·선도산 마애삼존불 등이 있으니 주변의 여러 유적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김유신, 설총, 최치원 이 세 신라인의 서기가 서려있는 상서로운 곳이기도 하다. 재밌는 것은 이 서원에서 유留한 최광식 문화재청장이 판소리 한 대목을 뽑았는데 한 달 뒤 문광부 장관으로 발령이 났고, 하나은행 행장 부인이 유하고는 바로 하나은행 회장 부인이 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런 스토리는 이곳을 다녀간 유명 인사들이 남긴 기분좋은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 서악서원은 상시적으로 개방 되어 있어 숙박도 할 수 있고 때에 따라 차도 한 잔 할 수 있어서 더욱 친근하다. 지난해의 경우 이 서원에는 1500명 정도가 숙박했다고 한다. 고택 서원으로서는 욕실과 화장실 도입 1호였다. 진 원장은 “올해 5월중에는 안장헌 문화재사진가가 전국의 서원을 테마로 한 사진을 서악서원에서 전시 할 예정이다. 특히 올 4~6월 문화재청의 ‘문화재생생프로그램’이 이곳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펼쳐진다”고 전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엄숙하고 경건하게 선현을 추모하기 위한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모임장소였던 서악서원의 경우는 문화재 보존은 지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 시대 사람들이 활용함으로써 더욱 보존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문화재를 직접 가꾸고 체험해보면 더욱 애정을 가지고 보존하려 하는 선 순환이 이뤄지는 것. 서원 본래의 기능인 교육의 장과 후학배출의 목적을 유지하면서도 전국에서 서원을 가장 잘 활용해 교육적, 문화적인 효과를 내고 있는 서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