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조금씩 하늘로 올라간다/ 나의 입김/ 나의 울음/ 나의 목소리/ 나의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떠난다/ 하늘로 간다/ 같은 빛깔/ 같은 소리/ 같은 냄새로/ 하늘서 만난다/ 만나서 엉기며/ 엉겨서 흐른다/ 길게 길게 흐른다. -김동리詩, 은하- 보고픈 얼굴 별 되어 박힌 은하(銀河) 길을, 한 입 꽉 깨물어 뱉어버린 흉터자국으로 입술 꼭 다문 초승달 흘러가고 있다. 한 뼘 눈물뼈로 반짝이는 밤하늘별들 건드리면 한꺼번에 쏟아져, 달빛 별빛 다 받아 치마폭 감싸는 첨성대는 지상의 속 깊은 품안으로 아늑하다. 닳아진 달력의 마지막 장을 기억 속에 감는 시계의 초침소리 무엇 그리 급한지, 낡은 신발을 끌고 쌓은 돌 견고한 첨성대 기대보는 12월, 하마 까마득한 천년이 짧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삼국사기】‘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덕만(德曼)이며,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닌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질이 어질고 명민(明敏) 하였다. 진평왕이 별세 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 처음 여성이 왕으로 계승되자 시대에 뒤지는 무리들에 의해 반란을 일으킨 기록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16년 봄 정월,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을 도모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당시 파격적 기정사실이면서도 불가사의하게 받아들여졌을 여왕의 등극. 나라 안팎으로 반란과 전쟁이 끊임없던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도 제위3년 분황사, 제위4년 영묘사, 제위14년 자장의 권유로 세워진 황룡사구층목탑, 그리고 첨성대 등, 삼국사기·삼국유사 기록 속 호국불교의 부흥과 더불어 역사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덕여왕. 삼국사기 선덕왕조〔저자(김부식)의:견해〕“하늘의 원리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며, 사람의 원리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편견과 경계의 대상이었던 시절, 대학자도 분별력 없이 인간평등의 존엄을 상기하지 못하고 서술한 것이리.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과 리더의 덕목을 갖춘 선덕여왕은 나라와 백성을 다스릴, 왕권확립의 신망 두터운 방편으로 그 시기 주술적 첨단과학으로 대두되던 천문관측을 이행하였을 것이다. 중국 고대 복희씨(伏羲氏) 음양오행사상을 근간으로, 천지간(天地間) 변화와 순환의 공간속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의 섭리를 점괘(占卦)쳐, 천지만물의 질서를 밝히려 듯 우주적 기운으로 공들여 쌓아진 첨성대, 내부 구조는 출입구까지 흙과 돌을 섞어다진 적심으로 채워져 있다. 화강석 벽돌 겉면은 매끄럽게 다듬었지만 내부 석재들은 울퉁불퉁 다듬지 않은 상태다. 상부 바깥쪽 양면 귀틀처럼 돌출된 부분은 내부⤧ 모양 장대석설치구조다. 맨 꼭대기 원통부분 반쪽이 판석덮개로 앉은뱅이책상인 양 놓여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36대 혜공왕(765~780) 15년 6.7지진으로 100여명이 사망했단 기록에도 불구하고, 지진을 대비한 내진설계 안정성을 추구한 기술력으로 천문관측 첨성대는 끄떡없었다. 신라궁궐 반월성 성곽에서 약 300m 위치에 기초도 튼튼하게 땅을 다지고, 총 380여개 부재로 구성된 화강암 올곧게 쌓아, 하늘 땅 유연한 곡선미와 강직한 직선미로 점성술 당찬 옛사람들 삶의 달력 첨성대, 세월을 관측하는 별 품은 숨결로 흘러가는 천년이 깊기도 하다.
그러는 동안 박주오 시인은 다시 포장마차로 가서 몇 사람이 또 마셨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5차는 해야 한다는 술자리가 6, 7차나 되었다. 중간에 가요주점에서 마시고 노래 부른 것까지 치면 8차는 됨직 하리라.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725호실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근식, 박주영, 박주오 세분의 시인들이 자는 방에서 박주오 시인의 팬티가 없어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난 박주오 시인은 잃어버린 팬티를 찾으려고 온 방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나 문제의 팬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없어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몸속에 입었던 것이 남이 벗겨갈 일이 만무하며 스스로 벗어 던진 일이 없는 그것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불과 요를 아무리 뒤져도 나오질 않았고 이불장, 문갑, 서랍, TV뒤에, 화장대까지 뒤져도 잃어버린 팬티는 나오지 않았다. 박주영 선생은 “이 사람아, 정신 차려서 찬찬히 생각해 보아. 그게 어디 갔단 말인가” 하고 찬찬히 찾아 볼 것을 권유했지만 잃어버린 것은 방안에는 없었다. 박주영 선생이 화장실 갔다 오다가 박 시인의 팬티를 찾아낸 것이다. 어젯밤 술이 취한 박시인은 방에 들어오자 말자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더운물로 사워를 하고 돌아오면서 펜티는 거기에 두고 온 것을 깜박 잊었던 것이다. 그러니 술이 깨어 안 입은 팬티가 걸쳐져 있을 리가 만무했다. 웃지 못 할 일은 727호실에도 발생했다. 밤 3시까지 마신 우리는 불을 끄고 잠이 들었는데 안양의 시조시인 한 분이 깜깜한 방에서 일어나 문쪽 반대편 벽에 붙어 서서 볼일을 시작하는 찰라, 마침 잠이 깬 노종내 회원의 주선으로 간신히 홍수를 모면한 일이 있었다. 그냥 두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벽에다 대고 실례를 했다면 그 방에서 잠잔 사람들이 웃지 못 할 변을 당할 번 한 것은 뻔한 일이며 아침에 일어나 범인을 찾아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부자리 세탁비까지 톡톡히 변상해야하니 가난한 시인이 그 돈이면 소주 몇 병 더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말끔히 세수를 하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식당에 모였다. 분주하게 해장국을 먹고 해장술을 마셨다. 아침 해장술에 벌써 얼큰히 취해 주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머리는 아프고 ‘작취(昨醉)가 미성(未醒)’이라, 차에 올라 해양연구소까지 가는 도중에 속이 울렁거렸다. 약을 먹고 조금 있으니 속이 내려가고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해양연구소 슬라이드를 보는 시간에 어느 누구의 코고는 소리가 어둠 속의 적막을 뚫고 고요히 들려왔다. 정민호 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그동안 연재해왔던 ‘시와 술과 경주문인들의 숨은 이야기’는 이번호(제1399호)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지금까지 좋은 글을 보내주신 정민호(시인) 동리목월문학관장님께 감사 드립니다.
경주문협과 안산문협은 1993년 자매 문협을 결성하여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이문회우(以文會友)라 했던가. 서로 글로써 맺어진 벗인 동시에 자매 문학협회이다. ‘93년 여름 안산문인들의 초대를 받고 찾아간 것이 <라성>호텔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자매 결연식을 갖고 경주와 안산이 자매 문협으로서 발족한 것이다. 그날 저녁 안산문협 회원들과 경주문협 회원들이 한데 어울려 문인 술 마시기 대회라도 하듯이 얼마나 마셨는지 지금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다. 경주의 이희목 시인은 차에 오르는 차 중에서부터 술이 거나하게 되어 ‘목마와 숙녀’를 거뜬히 외우기도 했다. 그날 밤에는 김동리 선생의 부인 서영은 씨가 경주의 회원들을 위해 갖다 준 안동소주 한 박스(대형 소주박스)를 여류 시인들이 홀랑 비우는 바람에 한 밤중 병원 응급실까지 실려 가는 소동이 벌어지고 닝겔 주사를 꽂고 헛소리를 하는 Y 여 회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모처럼 가정으로부터 해방된 여류 문인들이 세상사를 잊어버리고 마음껏 마시니까 그럴 수밖에-. 1994년 경주 신라문화제 때였다. 안산 문인들을 초대하여 쪽샘 술집을 방황하면서 밤새도록 마시다가 이튿날 신라 문화제 백일장이 있는 것까지 잊고 아침에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던 일을 생각하면 술이란 결코 범상한 음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5년 가을에는 안산문협이 우리를 초대했다. 초대를 받은 경주문협 회원들은 신흥 공업도시이며 서해안의 공단기지인 안산으로 갔었다. 마침 그 날은 제1회 성호문학상 시상식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자매문협의 문학작품 낭독회가 있었다. 이 날의 성호문학 수상자는 소설을 쓰는 신상성 작가였다. 우리는 미리 준비된 식장에 들어가서 뷔페로 식사를 마치고 ‘문학의 밤’을 시작했다. 그 날은 주로 시작품을 낭독했으며 안산, 경주 시인들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그 날 김해석 선생께서는 어정거리며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열심히 마시고 뜨겁게 사랑하자고 하면서 오늘밤은 아마 5차는 해야 하는데 미리 각오하라는 말을 했다. 재미있는 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문학의 밤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 족발 집으로 들어가니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밀려 나왔다. 벌써 1차를 끝낸 샘이다. 그래서 어느 불고기 집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고기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곧 쫓겨 나왔다. 그러니 2차가 끝난 샘이다. 3차로 들어간 집이 해장국집인데 그 집에는 술과 안주가 무진장 준비되어 있었다. 안산 문인들은 주로 소주를 마시고 경주문인들은 맥주를 마셨다. 나중에는 맥주와 소주가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청탁을 가릴 여유조차 없이 마구 마셔댔다. 3차에서 벌써 술이 취하여 정신을 잃을 정도였으니 가히 짐작이 갈 것이다. 문인 치고, 아니 시인 치고 술 못 마시는 사람 보았는가? 닥치는 대로 먹고 마시고 밤이 가는 줄을 몰랐다. 시간은 어느덧 12시가 훨씬 넘었다. 한 사람씩 숙소로 들어가고 끝까지 남은 사람은 김해석, 이근식, 정민호, 박주오, 안의선, 김종섭, 조신호, 이희목, 노종내 등, 십여 명 정도였다. 우리는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마침 광장에는 포장마차가 있어 늦게까지 영업을 하고 있었으니 그 쪽으로 몰려갔다. 우리는 다시 술과 안주를 시켰다. 소주에 맥주, 안주 몇 접시를 갖다 놓으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우리는 자꾸 술과 안주를 시켜 마시고 먹었다. 온갖 잡담 농담 소리를 다 하다가 늦게야 방으로 돌아 왔다. 안양에 사는 시조시인 안의선이 방에 숨겨 두었던 맥주를 꺼내어 또 술을 시작했다. -정민호 (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운원 옵니버스 ‘신의 원죄’를 넘기면 ‘감나무’란 수필 작품이 있다. 그 속에 나오는 감나무가 이 글을 쓴 운원 본인과 꼭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그 집에 있는 한 그루 감나무는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다. 가지를 쳐준다거나 퇴비를 주는 일도 없을 뿐더러 열매 같은 것을 솎아 주는 일조차 없이 그대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스스로 자라서 지붕을 덮는 한 그루의 감나무는 전연 주인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할 뿐더러 간섭까지도 받지 않는 우리 옛 할아버지들이 키우던 방식으로 키워서 자란 감나무다. 그 집에 서있는 한 그루 감나무를 나는 본적은 없지만 이 글에 나타난 감나무는 자유분방한 글쓴이의 그 자체인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일찍이 오류선생(五柳先生)이 버드나무를 심었듯이-. 권윤식 선생은 별다른 일이 없으면 거의 매일 맥주 집에서 맥주를 마신다. 몸이 불편하거나 특별한 경우만 집에 있는데 내가 집에 전화를 걸어서 그대로 받으면 이상할 정도로 그는 자기 집보다 술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경주에 있는 맥주 집 몇 군데만 연락을 취하면 당장 찾을 수가 있다. 술집에 없을 때는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을 때다. 그의 술은 애주가의 도를 넘어서 주선의 경지에 가깝다. 술을 한꺼번에 들어 마시며 폭주를 하는 법은 없고 서서히 장시간을 두고 즐기는 편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그의 특유의 행동으로 손이 자주 안경을 올리게 된다. 눈꺼풀은 내려와도 그의 눈은 더욱 반짝거린다. 그의 노래 솜씨는 또한 수준급이다. 시시한 유행가를 버리고 품위 있는 클레식을 즐겨 부르는 편이다. 그는 철학을 전공했다. 그의 철학적 인생이 자주 술좌석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술을 마시면 술값을 묻지 않는다거나 외상 술값에 대해서 하나 하나 따지지 않는다거나 술값이 싸든 비싸든 관계하지 않으며 또 남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대범한 스케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어느 날 쪽샘에서 마음 맞는 주붕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누군가의 제안으로 밤 한 시에 화장터로 찾아가서 인생을 명상하고 돌아 온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인생을 알려면 화장터에 가봐야 한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는 바람에 세 사람은 의견일치를 보아 택시를 잡아타고 화장터로 갔다. 한 사람씩 차례로 그 안에 들어가서 5분씩 묵상을 하고 나오기로 했으니 권윤식, 서영수, 양덕모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술을 마시면 취하게 되고 취하면 가장 순수하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술 마시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못하고 술에 취하면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산되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이다. 이런 화장터에 가는 일은 술에 의한 기발한 생각의 발로로 평범한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갑년을 넘긴 권 선생은 문학에 대한 집념도 대단했다. 그가 추천된 “문학세계”의 당선 소감을 보면, “70에 능참봉........그러나 어쩌겠는가? 대낮에도 쓸데없이 어정거리다가 낮잠으로 소일했더라도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문단 등단이 늦은 것이 무슨 대수냐. 이왕에 갈 길이라면 늦거나 빠르거나 무슨 상관이랴” 그의 문학과 술에 두루 영광 있기를 빈다.
가을 햇살이 따가운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여 자주 들리는 다방으로 갔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약속한 사람이 없으니 친구를 만날 수도 없었다. 주말, 그것도 맑게 갠 가을날-.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날에 그냥 멍하니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막걸리가 한 잔 생각나는 계절에 집으로 들어가서 낮잠을 자기도 그렇고 책읽기도 따분했다. 나는 기발한 생각을 하나 해낸 것이다. “세 번째 사람” 우연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길로 다방에서 나와 어느 대포 집으로 들어가서 술과 안주를 시켜놓고 오후 3시가 땡 치게 되면 이 대포 집 앞으로 지나가는 세 번째 술꾼과 술을 마시기로 작정했다. 지금부터다. 창가에 앉아 길을 지나가는 “아는 사람” “세 번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둘 지나가고 이제부터 남은 한 사람이 결정적으로 나와 술을 마실 사람이다. 조금 있으니 드디어 아는 술꾼 한 사람이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소리쳐 불렀다. 바로 권윤식 선생이었다. 권윤식 선생 이야말로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가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안심하고 불러들였다. 나는 그에게 그가 세 번째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오늘은 운명적으로 그와 술을 마셔야 한다는 이유를 또 설명하였다. 주선(酒仙)에 가까운 그가 술과 술친구를 두고 그냥 가버릴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그 날의 술은 물어 보나마나다. 권윤식 선생은 아호를 운원(雲園), 또는 소정(素丁)이라 했다. 그는 철학을 전공하면서 수필을 쓰는 문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神의 原罪’라는 희곡을 쓰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주로 술 이야기, 문학 이야기, KBS에서 방영되고 있었던 ‘이산가족 찾기(잃어버린 30년)’ 등에 관해서 이야기 한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때 영남일보에 <千字春秋>를 썼는데 거기에 찬주론을 쓰면서 술에는 장점도 많다는 것을 역설해서 주당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사실을 아직 상기하고 있다. 문학과 술은 떨어 질레야 떨어질 수 없는 함수관계가 작용한다고 우리는 느끼면서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무슨 글을 쓰느냐는 우리대로의 술에 대한 철학을 역설하기도 했었다. 운원 선생의 그때의 주론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도망갈 수 있도록 그물을 뚫어 놓고 마신다고 했다. 술 상대가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도 좋다는 것이다. “체력이 부족하면 언제든지 가라” “재력이 부족하면 언제든지 가라” 다시 말하면 돈 없고 술을 못 이기면 언제든지 빠지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자라면 언제든지 가도 좋은데, 잡거나 붙잡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운원 선생의 음주철학이다. 나는 이 말에 박수까지 치면서 호응했다. 처음 들으면 술꾼의 체면과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하면 운원 선생의 지론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는 그 만큼 술을 아끼고 술을 사랑하고 술에 대해서 자신을 가지고 술을 마시는 ‘찬주론자’이기 때문이다. -정민호 (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서영수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청마 유치환을 만나 그의 애제자(愛弟子)로 청마의 사랑을 받았다. 벌써 중학교 다닐 때부터 학생문단을 주름잡던 서영수이기 때문에 그의 시는 그때 이미 전국에 알려진 학생시인이었다. 그는 전국 백일장에 ‘안압지에서’란 시를 써서 ‘어린 왕처럼 거닐고 싶다’는 패기를 보이기도 했다. 서영수는 학교 다닐 때 청마의 문학수업을 받았다. 그래서 ‘별과 야학’이란 학생시집까지 낸 일이 있었으니 전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전국백일장에 나가기만하면 장원 아니면 차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래서 한 번은 진주 개천예술제 전국백일장에 출전을 했는데, 그 당시 진주지방에 있는 고등학교 문예반 학생들은 이번에 경주의 서영수가 오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중대 관심사였다. 백일장 당일 고등학생들이 몰려와서 경주 서영수가 누구냐? 하고 묻는 바람에 순순히 따라 나갔다가 봉변까지 당한 일이 있었다. 그가 누군가하면 당시 진주고등학교 재학생으로 나중에 경주에 와서 사적관리소장을 하던 정재훈씨었다. 그도 그때는 문학의 꿈을 가지고 백일장에 참석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지훈, 박목월, 서정주 이런 유명 시인까지 백일장 심사를 맡았기 때문에 서영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대학으로 진학할 때 청마 선생이 써 준 추천서 1장으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지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면장학생으로 졸업을 하기도 했다. 이영도 시조시인이 마산 부산이 생활 근거지였었는데, 잠시 서울로 가서 우거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서영수는 서울에 대학을 다녔으니 청마 선생의 편지를 가지고 가서 이영도에게 배달부 역할을 단단히 했던 것이다. 청마는 거의 매일 편지를 쓴다고 했다. 그것도 이영도 여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를 말이다. 그것을 열흘이나 스무날을 써 모아 한꺼번에 보낸다는 것이다. 마침 서영수가 서울서 방학을 맞아 내려왔다가 올라갈 때, 청마에게 인사를 드리러가니 모아 두었던 편지를 한꺼번에 쥐어주며 배달을 부탁하고 갖다 주라는 전갈이었다. 청마는 그만큼 서영수를 믿었기 때문이리라. 서영수 시인은 그것을 받아 서울로 올라가는 야간열차 안에서 거의 다 읽고 난 다음 그 중에서 몇 편을 슬쩍해도 알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5일분 정도를 빼내고 갖다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청마가 돌아가시고 이영도 시인은 청마에게 받은 편지를 모두 모아서 책으로 묶었으니 ‘사랑 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청마 유족 측에서는 “본인이 죽고 무덤에 흙도 안 말랐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야단을 한 적이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서영수 시인도 일흔을 넘기고 그가 가지고 있는 청마의 러브레터도 세월 속에 묻히게 되었다. 서영수 시인은 가끔 청마의 편지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하는데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 번도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있어도 안 보여주는 것인지, 없어져서 못 보여주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꿈같은 일인 것이다.
경주에서 권윤식, 서영수, 양덕모는 술꾼 ‘삼총사’로 이름이 높았다. 서영수는 시인이요, 권윤식은 수필가 이면서 고려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양덕모는 K고교 영어교사로 세 사람은 자주 같이 다니며 술을 마시는 술친구로 경주 쪽샘 거리를 누비며 다녔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술꾼 삼총사’ 라 부르고 있었다. 한 번은 어느 쌀쌀한 가을날 밤, 경주 쪽샘에서 밤늦게 술을 마시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누가 ‘인생은 화장터에 가서야 배운다’ 라고 했다던가? 아마 철학을 전공한 권윤식 선생의 말일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손뼉을 치면서 옳다고 호응했다. 그렇다면 오늘 밤, 1시가 넘었으니 당장 한 번 가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세 사람은 또 손뼉을 치면서 의기투합하여 당장 화장터로 가기로 합의 했다. 세 사람은 술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서 택시를 잡았다. 세 사람이 모두 택시에 동승을 하니 운전기사가 어디로 모실까요? 했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화장터”했다. 운전기사 섬뜩하여 “어디요?”하고 되묻는다. 또 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화장터”했다. 늦은 밤 화장터까지 가는대는 애로가 많았다. 안 가려고 하는 기사를 꼬여 택시비를 따따블로 주고 화장터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 화장터 송장 굽는 ‘철 침대’에 누워 <인생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화장터가 전근대적 시설로(70년대 화장시설), 시신을 태우는 그 속에 들어가서 5분씩 묵상을 하고 나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시신을 눕혀 태우는 침대에는 아직 덜 식어서 따뜻한 철제침대(?)에서 차례대로 드러누워 5분씩 묵상하면서 참된 인생을 체험하고 있었다나. 갑자기 저쪽 수위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누가 시체 훔치려 왔노!!” 하고 버럭 소리 지르며 어느 한 사람이 이쪽으로 뛰어나왔다. 냉정한 현실에서는 “화장터에 인생을 묵상하러 왔다”는 말로는 이해시키기는 어려웠다. 현실은 냉혹했다. 또 “묵상하러 왔다”는 것으로 세속인들에게는 말로 이해되지 않는 범법행위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웃지 못 할 이 이야기가 그날 밤에 이 세 사람에 의하여 체험되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 지역 경주에 전설처럼 남아있다. -정민호 (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그날 밤에 경주 향교 뒤 나물왕릉에서 ‘셔벌 향연’ 이 있었다. S시인은 우연히 그 자리에서 정재훈 씨와 최귀주(근화여고) 최영식(근화여중)을 만나 한잔씩을 거나하게 했다. 그리고는 2차로 간 것이 최영식 선생 사랑방이었다. 거기에 가서 숨겨둔 술을 마신다고 했다. 정재훈 씨는 고향이 진주로서 개천 예술제 백일장에서 고등학생 시절 S시인을 만나 익히 잘 아는 사이였다. 이런 인연으로 경주에서 만난 것이다. 그 때 정재훈 씨는 경주사적관리소 소장으로 있었다. 우연히 만난 이들은 최씨 댁 사랑(舍廊)에서 술을 마셨다. 막걸리로 시작해서 법주로 끝을 내려고 모였던 것이다. 쌀쌀하게 저물어 가는 가을밤, 귀뚜라미는 울고 가을 달은 밝아 술 마시기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서영수 시인은 그 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빠져 도망갈 준비를 하면서 때를 노리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정재훈 소장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술이 어느 정도 취하여 몽롱한 상태가 되었을 때 서 시인은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것을 알아차린 정재훈 씨도 같이 따라 나섰다. 밖으로 나온 S시인은 일단 화장실로 가서 볼 일을 마치고 잠시 숨어서 동정을 살폈다. 마침 가을 추수를 끝낸 짚동으로 변소 주위에 세워 놓아서 숨기에 좋도록 되어 있었다. 일단 짚동 뒤에 숨는다고 들어갔는데 한 쪽 발이 시골 통 변소에 빠지고 말았다. 한 쪽 다리가 흠뻑 젖어버린 것이다. 오, 나의 실수-. 큰일이었다. 그 길로 교촌 건너편 문천(蚊川)으로 나와 흘러가는 냇물에 열심히 빠진 다리를 씻어서는 젖은 상태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도망 오는데, 택시 기사가 냄새를 열심히 맡더니, “이게 무슨 냄새요” 한다. “몰라요” 했다. 덜 씻긴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수돗물을 틀어 놓고 다시 씻었다. 그렇게 씻어도 냄새는 속일 수가 없었다. 온 집안, 온 방안이 고약한 냄새 때문에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동해남부시 동인모임이나 경주문협 모임에는 항상 그가 빠지지 않는다. 80년대쯤으로 기억된다. <통술집>에서 모임을 갖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데 그가 술을 마시다말고 사라진 것이다. 끝까지 남은 회원들이 술을 끝내고 그를 찾으니 그가 없어진 것을 그 때서야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집으로 쳐들어가자! 했다. 이구동성으로 가자! 가자! 하면서 찾은 것이 그가 살고 있는 국민주택 164호였다. 찾아가서 대문 밖에서 ‘아무개 선생-’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불은 있는데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대문을 발로 찼다. 또 ‘아무개 선생-’ 하고 불러도 깜깜무소식. 그래서 누군가가, “사람도 없는데 문패는 말라꼬 달아 놓노” 하면서 문패를 떼어 집 안을 향해 집어 던지니 문패는 ‘팽-’하면서 소리 내어 날아가서는 그 집 화단에 꽂혔다는 사실. 며칠 후 본인의 입을 통해서 듣고서야 알았다. 이것이 제1의 <문패수난사건>이었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한 번은 문인 몇 사람과 자주 만나는 주당들과 낮부터 ‘봉황대 집’에서 같이 술을 마셨다. 그날은 아침부터 마셨으니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다. 술이 취하면 뿔뿔이 흩어지게 마련. 거나하게 취한 S시인은 비틀거리며 술집에서 도로변까지 나와 지나가는 빈 택시를 손을 흔들어 세웠다. 아마 술이 취하였으니 집까지 걸어가지는 못할 테고 차를 타고 갈 양으로 택시를 세운 것이리라. 그런데 그는 택시를 세우고는 문을 열고는「신발을 얌전히 아스팔트 위에다 벗어놓고는 택시를 타고」자기 집으로 갔었다. 아마 자기 집 현관 앞인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집에 가서는 그냥 술에 골아 떨어져 방에 누워서 잠을 잤다고 했다. 문제는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출근을 하려고 보니 어제 맞추어 신은 새 신발이 없어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불러 내 신발 어디다 감추었느냐 하고 식구들을 다그치니 아무도 그 신발 본 사람이 없었다. 아무렇게나 헌 신발 하나를 신고 그날은 출근을 했다고 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술집 ‘봉황대 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도로변 아스팔트가 있는 그 옆 구멍가게 주인이 S시인을 보더니 반갑게 맞아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보아도 잘 모르는 사람인데 그 가게 주인은 아마 아는 모양이다 하고 가까이 가보니 자기 신발을 꺼내놓지 않는가? S시인은 기쁘고 신기하여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선생님께서 그날 술이 취하여 택시를 타면서 아스팔트 위에다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기에 주어다 놓았다가 지금 드리려고 가져왔노라는 하는 것이 아닌가? 기쁘고 고맙고 감사하여 네, 네, 하면서 신발을 찾아 신고 왔다는 사실을 지금도 경주문인들끼리 배꼽을 잡는 일화로 남아있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목월백일장이 시작된 것이 1968년, 목월노래비 제막식을 한 그 해부터 실시했다. 처음에는 경주시내에 초등학교 문예지도 교사들의 모임인 <푸른편지회>에서 맡아 하다가 나중에 경주문인협회에서 주관 주최했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모임인 <푸른편지회>는 교사들의 전출 때문에 그 모임이 없어지고 경주문협에서 맡았던 것이다. 그 때에는 목월선생이 직접 경주에 오시고 행사에도 참석하여 백일장 심사까지 해주셨다. 참가범위도 초등학교로 한정했으나 참가학생 수는 무려 1000여명이 넘었다. 경주는 물론이요 대구, 울산, 포항, 영천, 심지어는 부산에서까지 행사에 참가 하러 왔었다. 1977년 제10회 목월백일장이 5월에 실시됐다. 당시 지부장은 이근식 선생이었는데 백일장을 앞두고 많은 회원들이 행사를 도와야 하는데 그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해에도 목월선생이 직접 오시기로 돼 있어서 손님 맞을 준비까지 지부장인 이근식선생 혼자서 다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근식선생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다녀야만했다. 나는 그 때 경주문협의 어느 회원의 혼사문제가 있어 그 때문에 포항에 갔었고, 서영수 선생은 몸이 불편해서 방에 누워있는 형편이 되었다. 워낙 급한 지부장이 서영수선생에게 전화를 하니 아프다고 못나온다고 했다. 그럭저럭 지부장 혼자서 일을 처리하고 나니 마음이 몹시 좋지 않았었다. 당일이 되어 많은 회원들이 행사장에 나와서 백일장 행사를 끝내고 모두 <통술집>에 모여 앉았다. 십여 명의 회원들이 둘러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지부장은 목월선생의 가방을 들고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전송을 하러 갔었다. 회원들은 행사를 마친 홀가분한 마음으로 연거푸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회원으로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대충 10여명, 서영수, 정민호, 손경호, 김홍주, 구석본, 박해수, 김기문, 그 외에 몇 사람이 더 있은 듯하다. 우리는 열심히 막걸리 주전자를 비우고 있는데 목월선생을 전송하고 지부장이 돌아왔다. 지부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모양이었다. 행사를 마쳤다고 앉아서 막걸리만 마시고 앉았구나 하는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지부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식식거리며 “어느 놈은 집에 앉아 전화통만 들고 앉았고, 어느 놈은 중신한다고 포항에 가버리고 나 혼자 어쩌라고, 어찌 행사 하라고? 응?” 했다. 그냥 아무 말 말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갑자기 “지부장님! 어째서 화살이 갑자기 내한테로 날아옵니까? 예?” 했더니, 지부장은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하여 주전자를 들고 좌석에 집어 던졌다. 나 한데로 날아오는 주전자를 내가 피하는 바람에 곁에 앉아있던 구석본 시인이 정통으로 바로 맞아 막걸리 세례를 받고 말았다. 지부장은 “나는 인자 지부장 안한다. 너거들이 해라!” 하면서 서영수에게 한마디 하고는 나가버렸다. 우리는 그날 늦도록 술을 마시면서 우리가 너무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이근식 선생이 지부장은 안할 것 같고 부지부장인 서영수 선생이 지부장을 맡아야겠다. 하면서 그때부터 지부장이 서영수 선생으로 자연스럽게 돌아온 것이었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한번은 경주문협 회원 몇 사람이 사방 약수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느 철둑길 작을 오솔길을 가고 있는데, 지나가던 기차가 찌익-하고 굉음을 내며 철길에 그냥 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관수인 김정석 수필가가 기관실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 무슨 괴상망칙한 짓인가? 달리던 열차가 우리회원들을 보고 너무 반가워 함께 경주까지 태워주려고 설 자리도 아닌 자리에서, 역도 아니 논둑 옆 철둑 가에서 기차를 세운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지금에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는 그만큼 순수하고 단순한 사람이었다. 김정석(金汀錫). 그는 1928년 경북 영일군 오천면에서 출생하여 1961년 교통부 지령 70호 기념 현상문예 작품모집에 소설로 입상. 그 후 수필을 다수 발표했다. 그는 철도청 경주 기관차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글을 쓰는 기관사였었다. 일찍이 경주 문협에 회원으로 있으면서 경주 문인들 간에 심심찮게 이야기에 오르내리는 사람이다. 그는 술을 좋아하여 문협 회의 때마다 끝까지 남아 술을 마시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보이곤 했다. 그는 1975년 ‘동해남부문학’ 동인회의 창립 멤버로 활약했으며 그때 수필 ‘아득한 山, 山을 향하여’를 발표했고, 한흑구 선생을 소재로 쓴 실명소설 ‘우리들의 꼰대 검은 갈매기’는 당시 문학인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며 기행을 남기곤 했는데,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 북천 다리(지금 황성교) 위에 서서 시원하게 볼일을 보다가 갑자기 잠이 들어 깜박하는 순간 그는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마침 다리 밑에는 고운 모래가 깔려 있어 떨어졌어도 다치지는 않았고, 잠시 졸도하여 잠을 잤는데, 손발이 차가워 잠이 깨니 두 손은 물 위에 잠겨 있고 몸은 고운 모래 위에 얹혀 그냥 잠을 잤던 것이다. 무사했다. 술이 취하면 그의 특유한 애칭 '쐐빠질'을 연발하고, 항상 허허허 하며 호연지기를 자랑하는 그는 1988년 교통사고로 작고했다. 그때에도 술 모임에서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도중,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여 숨을 거두었다. 그가 남긴 많은 원고가 햇빛을 못보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고무신 선생은 그 후 거의 해마다 신라문화제 행사에 참석했었다. 초청장이 있든 없든 백일장에나 심사장에 나타나 큰 소리로 작품을 읽으며 농담으로 일관하는 그의 말솜씨에 같이 웃기도 했다. 어느 해 가을 신라문화제 때에 시인 김구용(金丘庸) 선생을 초청하여 문학행사를 했는데, 그때 지부장은 이근식 선생이었다. 그때는 아예 여관방을 몇 개 전세를 내 놓고 그 여관에는 문인들로 들끓었다. 대구, 서울, 부산, 포항, 울산 등지의 문인들이 한데 모였다. 모여서는 각각 술을 마시다가 저녁 늦게 숙소인 <천우여관>으로 돌아오곤 했다. 고무신 선생은 어디 갔다가 12시가 넘어 술이 취한 채로 돌아왔다. 여관 복도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지부장인 이근식 선생과 고무신 선생이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내용인즉, “지부장은 뭐 하는 거야. 왜 독방을 마련하지 않았어!”했다. 늦게 와보니 자기 방에 딴 사람이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협 회원이 쓰는 방을 함께 쓰라고 지부장이 말한 모양. 이 말에 서울 손님으로 다 같이 초청해 놓고 김구용 선생은 독방을 주고 나는 왜 합숙을 시키느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여관에 모인 문인들 모두 잠이 깨어 복도에 나와서 한 마디씩 하게 되었으니 여관은 떠나가듯 시끄럽고 나중에는 여관집 주인까지 나와 영업 방해라고 고래고래 야단법석이었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우리는 <티파니>다방에서 나와 거리로 걸었다. 김기문, 이채형, 고무신, 필자, 그 외 몇 사람이 더 있은 듯하다. 찾아간 곳이 <옥이집>이란 대포집이였다. 우리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이채형은 막걸리 다섯 되를 한꺼번에 불러 놓고 고무신 선생에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한복에 두루마기를 차려 입은 젊은 선비답게 왼 손으로 오른쪽 두루마기 소매를 잡고, 선 자세도 아니요 앉은 자세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무신의 빈 술잔에 술을 따른다. 그는 매우 정중했다. 좌중에 모두 막걸리 잔이 놓아지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주로 문학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채형이 문학 이론에 열을 올리며 음성이 높아가기 시작하니 고무신은 젊은 이채형의 하는 행동과 말씨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는 요즈음 대학생들의 문학 이론과 서울 문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중용(中庸)에 관한 한문 이론으로 넘어 갔다. 이것을 듣고 있던 고무신 선생이 갑자기 역정을 부리며 “젊은 친구가 뭐 말라죽은 게 문학이냐” 하고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 술좌석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 입을 다문 것이다. 이 말에 기분이 나빠진 이채형은 “주모, 여기 큰 대포 사발 한 개 주이소” 하고 주인에게 고함을 치듯 말했다. 주인은 얼른 우동 사발처럼 생긴 큰 대접을 하나 가져 왔다. 이채형은 손수 주전자에 들어 있는 막걸리를 콸콸 소리가 나도록 따라서 연거푸 세 잔을 마신다. 넉 잔째 술을 따르고 주전자를 탁자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놓고는, “어이, 선생님. 당신 시가 시요?”했다.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한 이체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무신은 어이가 없는 듯 “촌놈치곤 제법 똑똑 하군” 했다. 이 말을 들은 이채형은 “뭐요? 당신 시집, 응, 응, 습지(濕地)? 양지(陽地)? 그게 시집이요?”하고 이채형은 흥분하여 말까지 더듬으면서 패기 넘치는 젊은 문인답게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이채형은 넉 잔이나 마신 막걸리가 이제야 그 효력을 발생한 것이다. 이래서 술자리는 깨어지고 모두 흩어져 갔다. 그 길로 이채형은 모처럼 강동 단구에서 신라문화제 행사에 나온다고 한복까지 곱게 차려 입고 있다가 술자리에서 술 세례로 얼룩졌다. 그날 그 시간 이후의 이채형의 음주 편력은 알 바는 없지만 그날 저녁 백일장 심사장에 나타난 이채형의 모양은 말이 아니었다. 명주 바지와 저고리는 모두 찢어지고 게다가 술에 흠뻑 젖어 검은 두루마기는 흰 막걸리에 범벅이 되어 흰옷이 되었다. 옷고름은 죄다 떨어져 없어지고 신발도 한 짝이 없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후와 같았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어느 해 가을, 신라문화제 때 고무신 선생을 초대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미당 서정주 선생도 함께 초대되어 왔었다. 당시 고무신은 서울서 거주하고 있었고, 박주일 선생은 경주문협 지부장으로 있을 때이니,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그 때 미당 서정주 선생도 초대되어 시화전을 열고 동시에 백일장, 문학의 밤을 신라 문화제 축제의 행사로 실시했다. 그 때 고무신 선생은 문학 강연회에서 즉흥 연재로 ‘청마와 미당’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내용인즉, 청마는 경주의 시인으로서 신라인답게 생활한 분이요 미당은 백제인으로 서울에 살면서 그것도 신라와 전연 관계없는 사람이 <신라초(新羅抄)>등, 시집으로 ‘신라를 우려먹는 사람’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는 그의 취중연설을 통하여 청마와 미당을 비교함으로 장내를 시끄럽게 한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는 연설을 마치고 웅성거리는 강연장을 빠져나와 혼자 대포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나중 문학행사가 끝나고 전체 회원과 초청 인사들이 모이게 되는 ‘옥이식당’에 고무신이 나중에 나타나서 술상에 막걸리 잔을 던짐으로써 그 날의 행사는 막걸리 세례로 막을 내렸다. 이튿날 고무신 선생이 나타난 것은 문협 시화전이 열리는 ‘티파니’ 다방이었다. 몇 명 회원들이 <티파니>에 나가 시화 작품을 지키고 있을 때, 강동 단구에 있는 젊은 작가 이채형이 명주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까지 걸치고 유쾌한 표정으로 경주에 나타났다. 그는 그때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에 재학하고 있었다. 귀향하여 고향인 강동에서 작품을 쓰고 있다가 문협 행사에 모처럼 성장(盛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날 오후 우연히 <티파니>에 앉으니 김기문, 이채형, 고무신, 필자, 시청 문화과 직원 몇 사람이 시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고무신 선생은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오늘 아침 해장을 했고, 그 해장술이 오후가 넘도록 깨지 않는 듯 얼굴이 구릿빛이요 입과 코에서는 연신 술 냄새가 계속 풍겨 나왔다. 이채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무신이 앉아있는 앞까지 가서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다. 이것이 후배가 선배에게 올리는 예의 바른 인사였다. 그런데 고무신 선생은 다리를 꼬고 앉아 다방 천정만을 쳐다보며 관심 없다는 듯 “흥”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이채형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무신은 그 옆에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앉는다. 고무신은 이채형과 이야기하는 것이 귀찮은 표정이었으나 이채형은 어떡하더라도 고무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박 선생님, 하고 이채형이 고무신 선생을 불렀다. 고무신은 이채형의 부르는 소리에 “왜 불러”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다시 다리를 고쳐 꼬며 천정만을 쳐다본다. 이채형이 다시, “선생님,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막걸리 한잔 사겠습니다”하고 정중히 말했다. 그러나 고무신은 대답도 없이 한 번 훑어보고는 또 말이 없다. 그래서 이채형은 다시 “선생님, 저 촌에서 살고 있는데요. 선생님 모시고 대포 한잔을 올리고 싶습니다. 실례가 안 되면 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하고 최대로 정중한 말투였다. 지극한 공손은 오히려 상대를 기분 나쁘게 했는지 그것이 고무신한테는 불만인 모양이다. 이윽고 고무신이 입을 열었다. “젊은 그대가 원하신다면 먹어 줄 용의는 있지” 했다. 주위에 있는 우리는 속으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그 후에 문협 지부장으로 성학원에서 홍영기선생으로 경질되었다. 그 이유인즉, 성학원 선생의 아드님이 경주고에 다녔는데, 학교에서 과외비를 받는다는 이유로 경북도 교육위원회에 투서를 했다는 사실이 도 장학사에 의해 성학원지부장으로 밝혀졌다. 당시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던 회원이 많았기에 그것을 문제 삼아 지부장을 바꾸어야 한다는 여론 때문에 홍영기선생으로 지부장이 바뀌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서영수 선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사꾼’이 되어 성학원지부장의 눈 밖에 나기도 했다. 그 후 성학원지부장은 신라중학교에 근무하면서 고혈압과 당뇨가 심해서 오십 대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경주로 근무지를 옮겨오고는 그해 여름으로 기억된다. <옥산서원>으로 문협 소풍을 떠났다. 홍영기 지부장, 전문수 사무국장, 이춘담, 서영수, 김홍주, 정민호, 김기문, 이동태, 이채형, 그리고 여자회원이 몇 사람 더 있었다. 마침 서울에서 고무신 박종우 선생이 오셔서 함께 떠나기로 했다. 안강역까지 기차로 가서는 옥산 서원까지는 걸어서 갔었다. 산대를 거처 시름시름 걷기 시작하는 그야말로 소풍날이었다. 안강역에서 <옥산서원>까지 잠시도 입을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고무신이었다. 고무신의 해학적인 말솜씨에 노상 그의 입만 처다 보고 걸었다. 고무신 왈, “소 다섯 마리 몰고 가겠나, 선생 하나 몰고 가겠나?” 하면 “나는 소 다섯 마리 몰고 가는 것이 낫겠다” “소열마리 몰고 가겠나, 신문기자 하나 몰고 가겠나?” 하면 “나는 소 열 마리 몰고 가겠다” “소 열 다섯 마리 몰고 가겠나, 시인 한사람 몰고 가겠냐? 하면 “나는 소열 다섯 마리를 몰고 가겠다”하면서 모두 하, 하, 하고 손뼉을 치면서 웃는다. “나는 소 백 마리 몰고 가겠다” “나는 시인 10사람 몰고 가겠다. 어떤 사람은 나는 어렵다는 시인 한사람만 데리고 가겠다”하면서 웃으며 걸어가니 어느덧 <옥산서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흐르는 물가 바위에 앉아 밥을 짓고 막걸리를 마시며 놀았다. 홍영기 선생이 색다른 음식을 많이 준비하여 왔었다. 배가 부르고 술이 거나하게 취하니 우리는 현장에서 3행시 백일장 대회를 열었다. 제목을 고무신선생이 내고, 고무신선생이 심사까지 맡았다. ‘서라벌’ 이란 두음의 3행시 백일장이었다. 서라, 서라, 서라 가다가도 서라. 라, 라, 라, 흥겹게도 막걸리 한잔 더 벌판의 끝없는 하늘 푸르기만 하여라. 이런 내용의 시가 그날 장원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이미지였는데 아마 젊은 회원의 작품인 듯하다. 아니면 어느 여자회원의 작품이 아닌가 하기도 하다. 세월 속에 까마득하게 묻혀가고 지금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는 않는다. -정민호(시인·동리목월문학관장)
필자가 경주문협에 처음으로 가입하니 성학원(소설가) 선생이 문협 지부장으로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까마득한 옛날 같이 기억된다. 회원이 모두 십여명, 경주시내 국어과 교사들이 주로 회원으로 있었다. 부지부장으로는 홍영기선생, 박주일, 이근식, 전문수, 김녹촌, 김영식, 정용원, 서영수, 김홍주, 정민호였고, 고무신 박종우 선생이나 김해석 선생은 이미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그 후에 김기문, 정진채, 이동태 회원 등이 더 들어왔었다. 초등학교 문예지도 교사도 있었고, 지금은 이름마저 잊어버린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도 더 있은 것 같다. 회의는 월례회로 자주 열었는데 주로 <통술집>에서였다. <통술집>은 지금 영국제과 부근으로 생각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통술집>에서는 ‘성동양조장’ 직매점으로 주로 막걸리를 팔았고, 안주는 꽁치 구이나 두부찌개나 비지찌개를 내 놓았다. 비지찌개는 그냥 얼마든지 퍼주는 서비스 안주였었다. 십여 명 남짓한 회원들이 한 방에 앉아서 월례회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시간은 주로 퇴근 후에 모이니까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신라문화제 때는 외부 문인들을 초대했는데 외래문인을 초대할 때는 지부장, 부지부장, 사무국장 외에는 그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손님이 있는 자리니까 회원들이 처신없이 손님과 동석하는 것을 꺼려 곧장 성학원 지부장이 회원의 이름을 거명하며 축출시켰다. 그래서 그 유명 인사를 초청한 방에는 을신 못하고 멀리 떨어져 밖에서 마시거나 아예 나타나지 못했다. 그러나 김영식 같은 사람은 그 방에 들어가서 온갖 재미있는 잡담이야기를 잘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차비’를 ‘신체운반비’ 로, ‘생전처음’ 이란 말을 ‘두상출모지호(頭上出毛之後)’란 말을 써서 자주 웃기곤 했었다.
어느 날 아침 조회 때 교장 선생님께서 오늘 떠나는 선생님의 이임 인사가 있겠다고 소개했다. 바로 고무신 선생이 포항고등학교를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교장의 말씀인즉, 이런 내용이었다. 교장 자신은 고무신 선생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는 훌륭한 교사인데, 기성회장의 건의에 의하여 전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성회장의 건의 내용은 교사(고무신 선생)가 대포 집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술집 작부를 희롱하는 것은 교육자로서 심히 잘못된 짓이며 또 길가는 학생을 불러 들여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설사 그런 선생님이 실력 있고 잘 가르치는 교사일지라도 배우는 학생이 그의 행동을 본받을까 염려되니 전출시키라는 압력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고무신 선생은 시인으로서 실력 있고 유명한 교사라는 것은 나도(교장) 잘 알고 있지만 학부형의 건의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곧 이어 고무신 선생은 교단에서 취임 인사 때처럼 이임 인사도 유머러스하게, 하나도 슬프거나 구겨진 말을 하지 않고 유창하게 이임 인사를 하고는 그 길로 바로 교문으로 나가는 것이 지금도 매우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바로 그 길로 안동고등학교로 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1960년 나는 서라벌예대에 입학했다. 문예창작과에는 고교 때 글 쓰던 친구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각 지역 시인이나 고교 때 시인 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모이면 빈번하게 고무신 선생도 화제에 떠오르게 되었다. 같은 (6)학과에 김길원(안동고 졸업)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고무신의 제자였다. 어느 날 명동 ‘돌채’에 고무신 선생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김길원과 함께 ‘돌채’에 간 일이 있었다. 그는 고교 교사를 그만 두고 상경하여 무의탁으로 떠돌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고무신은 ‘습지(濕地)’라는 시집을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 시인의 서문을 받아 출간했었다. 오상순의 청동시대(靑銅時代)에 함께 휩쓸려 명동에 나가던 때였다. 우리는 돌채에 찾아가서 기다렸으나 그날에는 고무신이 나타나지 않아 못 만나고 돌아왔다. 소문에 의하면 60년대 최고의 여배우 전 아무개와 ‘목하연애중(目下戀愛中)’이라고 했다. 고무신 시인이 영화배우와 연애한다는 사실을 고무신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때 고무신 선생은 일정한 주소가 없이 제자 자취 집을 찾아다니며 전전했었다. 안동고의 제자인 시인 김용진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그러니 불편한 쪽은 양쪽 모두였다. 특히 담배가 그러했다. 술도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고무신은 같은 방에 기거하는 제자에게 금연을 강요하지는 못했다. 선생과 제자가 맞담배는 곤란하지만 돌아앉아 피우고 술은 마주앉아 마셨다. 그때에 발간한 그의 시집 ‘濕地’를 제자들이 들고 다니며 팔아오게 해서 그것으로 함께 자취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길원(金吉源)은 시집 ‘습지(濕地)’를 들고 다니면서 국학대학, 동국대학, 예술대학 학생들에게 팔기도 했었다. 고무신 선생은 재향군인회 출판부에서 근무하게 되면서부터 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했다. -정민호(시인. 동리목월문학관장)
한 번은 P고등학교 최 교장이 “민주교육” “학생 여론”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교장실을 개방하여 학생 여론을 청취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여론이란 것이 고무신 선생에게 불리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선생의 비행이 모두 학생을 통해 교장의 귀에 들어가는 일, 수업 시간 중에 헛소리하는 일, 술집 아가씨와 어떻게 된 이야기, 이런 여론이 교장의 귀에 바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고무신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고무신이 열려 있는 교장실 문에 들어섰을 때, 교장은 부재중(不在中)이고 교장의 책상 위에는 책이 펼쳐져 있고 책이 펼쳐져 있는 책갈피에는 파카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당시 미제 파카 만년필이면 최고급품이다. 이때다, 교장 길들이기 좋은 기회. 그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파카 만년필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유유히 교장실을 나왔다. 그 후 아무 일 없이 며칠이 지나 갔다. 직원회의 때 교장이 자기 만년필 분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혹시 보신 분이나 학생들이 가져간 일이 있으면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고무신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교장 선생님, 그것 보십시오. 학생 여론을 청취한다 하시면서 교장실 문을 개방하신 것부터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이대로 나가다가는 어찌 만년필뿐이겠습니까? 교장실 좋은 물건 거의 도둑맞게 생겼으니 교장 선생님, 이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고 말했다.(실은 그 만년필은 벌써 술집에 가서 잡히고 술 마신 지 오래지만...) 그 후부터 교장선생은 교장실 문을 철폐하고 학생들의 출입을 막아버렸다. 한 번은 아침 조회 때에 교장 선생의 훈화에서 연세가 든 분의 말씨에 흔히 쓰이는 “학습을 학십, 연습을 연십”이라고 발음하니까 학생들이 ‘하하하’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교장선생의 훈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교단에 뛰어 올라가서 학생 여러분, 방금 교장 선생님께서 “학습을 학십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엄연한 문법체계에 의한 것입니다. 최현배 선생의 말본을 보게 되면.........”하고 교장 선생의 말이 문법적으로 타당하다는 이론을 억지로 설명하고서는 교단에서 내려오는 모양이 또한 배꼽을 잡는다. 그냥 계단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토끼처럼 조회대 위에서 팔을 흔들어 넓이 뛰기 하는 모양으로 땅에 뛰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었다. -정민호(시인. 동리목월문학관장)
필자가 P고교 재학시절에 고무신 선생이 전근을 왔었다. 아침 조회 때 부임 인사차 조회대 위에 올라온 고무신 선생은 한 말로 가관이었다. 어젯밤 새도록 술을 마셨는지 얼굴은 부은 것 같기도 하고 검은 듯 붉은 듯 눈꺼풀은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 않는 그런 표정이었다. 마치 잠자다가 뛰쳐나온 사람 같았다. 그러나 일단 단상에 올라서서 하는 부임 인사 하나는 요즈음 말로 끝내주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웃다가 하나같이 감탄하며 그의 달변에 혀를 내돌린다. 청중을 휘어잡는 그의 말솜씨는 대단했었다. 그날 오후 넌닝 셔츠바람으로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굴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아침 부임 인사를 한 고무신 선생이었다.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운동장에서 공을 굴리고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을 붙잡고 같이 공을 차자고 으름장을 놓고 했었다. 그는 그만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예의나 체면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부임하여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말본’ 시간이 되어 처음으로 우리 교실에 고무신 선생이 수업하러 왔었다. 그는 분필 한 개와 출석부만 달랑 들고, 뛰다시피 하여 교실에 들어 와서는 들어오자 말자 유치환 선생의 ‘울릉도’를 소리 높여 낭송했다. 어느 친구가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구근 수근 “저 선생님이 시인선생 이란다” 하면서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날 한 시간 수업은 여러 가지 잡담으로 일관했었다. 최현배 선생의 추종자인 그는 최현배 문법에 대해 이야기했고 대학에 강의했던 이야기, 그리고 경남 진주에 삼인 시집(설창수, 조진대, 이경순) 출판 기념회에 참가했는데, 출판기념회 석상에서 “이번 3인 시집 저자가 설창수 조진대 한 사람은 누꼬” 하고 ‘조진대’ 라는 말에 액센트를 주어 발음하다가 설창수 선생한테 호되게 당했다는 이야기, 심지어는 음담패설까지 동원하여 한 시간 수업을 끝냈다. -정민호(시인. 동리목월문학관장)
역시 고무신 선생과 함께 진주 개천예술제 백일장에 참석했던 것이다. K는 당시 학생이고 고무신 선생은 경주공고 교사로서 경주 시내 문예반 학생을 인솔하고 갔었다. 대다수의 백일장이 그렇듯이 지도교사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인솔 교사가 자기가 인솔하여 온 학생이 입선하기를 희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가서는 지도할 시간과 기회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K학생이 참석한 개천예술제는 백일장에 참석한 학생들을 모두 교실에 모으고 감독교사까지 배치했는가 하면 교실에서 제목을 발표하여 백일장을 무슨 입학시험을 치르듯 엄하게 실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무신 선생은 학생을 지도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다 못한 그는 비상수단을 썼다. 그것은 발표된 제목을 보고 그 제목에 맞는 시를 써서 K학생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그러나 교실 안에서 백일장에 참가한 학생에게 넘겨주는 일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무신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보드라운 종이에다 시를 적어 가늘게 말아서 자기 만년필에 넣고 뚜껑을 닫아 K학생이 있는 교실로 가서 넘겨주게 되었다. 교실에서 열심히 그 제목에 따라 작품을 쓰고 있는 K학생을 큰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경주에서 온 아무개 학생_” K학생은 유리창 밖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는 고무신 선생을 보고 깜짝 놀라 대답했다. 고무신 선생은 “야- 임마, 장가가는 놈이 XX두고 간다더니, 백일장에 가는 놈이 만년필을 잊어버리다니. 에키 놈”하면서 그 학생에게 만년필을 무사히 건네주었다. 만년필을 받아든 그 학생의 머리에서는 뭔가 잡혀오는 것이 있었다. 고무신 선생,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만년필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얇은 종이에 시를 적은 것이 꼬깃꼬깃 접혀져 있었다. 고무신 작품을 백일장에 제출하여 장원했다는 소문은 못 들었지만, 고무신 선생이 만년필 속에 자기가 지은 시를 넘겨준 사실은 고무신 본인의 입을 통해 익히 들었던 것이다. 언젠가 고무신 선생이 개천예술제에 가서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추대되어 학생 작품을 심사하러 심사장에 나타났다. 어제 저녁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퍼마셨기 때문에 심사할 때 원고지의 글씨가 가물거려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원고를 보려고 해도 잠이 오고 피곤하여 원고지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침 화장실 가는 길에 여관집 주인이 먹으려고 약탕기에 끓이고 있는 인삼탕을 봐 둔 것이 생각났다. 그는 그릇을 준비하여 주인의 눈치를 살펴가며 인삼이 끓고 있는 약탕기의 내용물을 몽땅 붓고 거기에다 물을 가득 부어 불 위에 도로 올려 두고 그것만 들고 나와서 심사장으로 왔다. 심사하고 있는 원고지 옆에 인삼 끓인 물을 놓고 조금씩 마시면서 심사를 했다. 그러니 눈이 빤하게 뜨이더라는 것이다. 당시 심사 위원으로 조지훈, 설창수, 이경순, 조진대, 그리고 고무신 선생 등, 여러 문인들이 있었다고 했다. 고무신 선생이 갑자기 무릎을 치며 장원 작품이 나왔다고 큰 소리 치는 바람에 좌중 심사위원들은 흥분하여 읽어보라고 했다. 고무신은 감정을 섞어 시 낭독을 했다. 워낙 낭독에 뛰어난 고무신인지라 그 소리만 듣고서도 심사하는 분들은 감탄을 했다. 그 작품이 경주 학생의 것임에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것도 모르는 조지훈 선생은 그것을 도로 받아서 감정을 넣어 다시 시 낭독을 하면서 무릎을 치곤 했다. 그 작품이 바로 그 해의 장원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정민호(시인. 동리목월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