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지난호(1277호, 경주재발견127회)에서는 ‘35년간 경주말 수집하고 정리한 김주석 선생’편을 실었다. 이번호에서는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을 통해 경주말의 원형과 활용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김주석 선생이 발굴한 조선시대 마지막 해학가 ‘정만서’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 기사는 김주석 선생과의 인터뷰와 김주석 선생이 쓴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을 바탕으로 구성했다. 또 ‘경주말[語]의 보존과 활용’에서 ‘김주석 선생이 채록한 춘강 정만서 이야기’ 및 임종욱 문화평론가의 ‘김주석 선생의 경주말 수집·정리의 경과와 의의’에서도 인용했다.
춘강 정만서(1836~1896)는 개화기때 평생 야인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불의한 세상을 기지와 풍자와 골계로써 조롱하며 맞섰던 블랙 코미디언의 대가로서 봉이 김선달, 천하잡보 방학중과 같은 유형의 골계적(滑稽的) 인물이었다. 괴짜 중의 괴짜인 경주 사람으로 인생을 만화처럼 살다 간 위인이었다.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정만서와 관련된 설화 재현하면서 대화를 모두 경주어로 장식
경주말을 수집하고 정리한 김주석 선생은 건천읍 건천리 고지마을이 배출한 기상천외한 행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해학가의 일생에도 주목했다. 조선시대 말기를 살다간 정만서의 생애와 기행, 일화 등을 발굴해 채집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만서는 영덕지역에서 비슷한 기행을 펼쳤던 방학중과 함께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기인(奇人)이었다.
임종욱 문화평론가는 ‘김주석 선생의 경주말 수집·정리의 경과와 의의’에서 ‘김주석 선생은 동시대뿐만 아니라 이후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구비 전승된 그와 얽힌 이야기들을 채집하기 시작했는데, 단순히 흥미 중심의 기행담 수집을 넘어서 경주말의 원형을 되살리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이 책은 정만서와 관련된 설화를 재현하면서 안에 나오는 대화를 모두 경주어로 장식하고 있다. 경주어 사전이 갖는 어휘 수집, 경주 속담 사전이 갖는 촌철살인의 금언모음에 이어 실생활에서 쓰인 경주어의 움직임을 보여주어 경주말의 원형과 활용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큰 구실을 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경주 지역을 두루 답사하면서 많은 설화 제공자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정리해 선생은 먼저 만화 같은 인생 ‘정만서 해학(1989년)’을 냈고, 이어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글누림, 2011년)’을 출간해 전승되던 정만서 설화들을 집대성했다. 모두 53개의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
-발랄한 기지는 서민에게 웃음 선사, 점잖은 이들은 아무도 그의 행적을 거들떠보려 하지 않아
‘경주가 낳은 해학가인 정만서는 본관은 동래며 ‘양반이 사는 마을’이란 뜻의 건천읍 고지(高志) 마을에서 태어났다. 정만서는 병신년(1836) 탄생해 다음 번 병신년(1896)에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딱 60 평생이다. 본명은 용서(容瑞)이고, 자는 만서(萬瑞)였다. 호는 춘강(春岡)을 썼다. 경주이씨 이선진의 딸과 결혼해 두 아들을 슬하에 두었다. 아명이 ‘범이’였던 장남 정자규는 일찍 죽었고, 둘째 정재규(보통 ‘재선’으로 불렸다)가 대를 이었다.
정만서가 네 살 되던 해에는 천주교의 대탄압인 기해사옥이 일어나서 ‘죽고 싶어서 까부느냐?’는 뜻의 ‘너 지금 천주학 하느냐?’는 속담이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에 천재적인 두뇌와 재주를 타고난 정만서는 문란한 현실에 혐오감을 느낀 나머지, 과거를 포기한 채 기행을 일삼게 되었다. 어느 날 정만서는 양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추켜든 채 고개를 숙이고 땅과 하늘이 도치되도록 바라보는 치기를 스스로 연출했다.
그러면서,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 더러운 세상, 아예 더럽게, 아주 철저히 어긋나게 살자’ 하고 속으로 다짐했던 것이다. 이렇듯 물구나무서기로 세상을 보는 ‘도립사상(倒立思想)’을 싹틔우면서도, 어떻게든지 착실하게 살아보려고 했다. 그래서 결혼도 하고 두 아들까지 보았지만 그는 맏아들인 ‘범이’를 잃게 되었고 결국 처자와 고향을 등지고 영원한 방랑길에 오르게 된다.
타락한 세상을 등쳐멱는 짓에 익숙했으니 한 끼는 굶고 다음 끼는 거르는 방랑길에서 언제나 어긋나고 짓궂고 엉뚱하여 발길이 닿는 마을마다 기인의 행적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상례였다. 정만서가 참으로 셀 수 없는 기발한 얘기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점잖은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행적을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에 관한 기록은 영영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엇길로만 빠진 그의 평생은 신소리와 풍자로 점철되었으며 반골의 야인이었던 그의 생애는 ‘춥고 배고픈’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발랄한 기지는 서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고 쓰고 있다.
-중후한 웃음 유발시키는 웅숭깊은 해학가, 경주사회에는 정만서 이야기가 깔려 있을 정도
김주석 선생이 35여년 간 경주말을 채집한 강력한 동기 중 하나가 정만서로 인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경주사회에는 정만서 이야기가 깔려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정만서 문자 아니라도’ 라는 표현을 어르신들은 거의 다 사용할 정도였다고. 김주석 선생은 “정만서라는 인물에 대해 매력을 느꼈습니다. 정만서를 보는 관점은 유가적, 도덕적으로 파렴치한 부분도 있지만 먹고 사는 것이 힘든데도 웃고 사는 것에 반했던 것이죠. 우리 외조부께선 그를 직접 봤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은 셈이지요. 실체가 분명한 이였던 것입니다. 그의 무덤은 건천읍 용명리 밀구 뒷산에 동남향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지금도 묘가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고 전했다.
“저는 그를 멋지고 여유있는 사람으로 봤습니다. 웃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요즈음은 냉소, 즉 ‘썩소’를 끌어내는 반면, 정만서의 해학은 잠들기 전 ‘무릎을 탁 치며’ 의미를 알려주는 멋진 위트였습니다”
김주석 선생은 “정만서는 ‘거꾸로 선 채’ 세상을 바라본 조선시대 마지막 해학가였습니다. 재담으로 얄팍한 웃음을 자아내는 개그맨이 아니라 ‘으흐흐흐’하거나 ‘클클클클’하는, 자다가도 웃을 법한, 중후한 웃음을 유발시키는 웅숭깊은 해학가라 할 수 있지요. 기지와 풍자와 골계로써 어긋나게 살기를 고집한 거지요”라고 했다.
-정만서의 기행은 권태로운 초당방 사람들에게 신선한 만화처럼 통쾌한 웃음 선사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에서 김주석 선생은 ‘정만서는 스스로 남을 웃기겠답시고 행동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결과적으로 그의 말이나 행동을 지켜 본 다른 사람들이 웃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이런 그의 기행은 권태로운 초당방 사람들에게 신선한 만화처럼 통쾌한 웃음을 선사했다. 수구와 개화의 물결이 정신없이 소용돌이 치는 개화기때 소외된 계층으로 억눌려 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반골인 정 공은 야인답게 항상 술이 있어야 했고 정만서의 입은 술만 들이켰고 들어간 술만큼 익살이 되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익살 속에 사는 재미를 심던 정만서가 저승에서는 신소리를 퍼지르고 싶어 어찌 살까? 술을 퍼먹고 싶은 건 또 어찌 참고 있을까?’고 쓰고 있다.
‘김주석 선생이 채록한 춘강 정만서 이야기’ 중에서 ‘범이의 죽음(채록문)’ 전문을 보면, 주먹을 들어 눈시울을 훔쳐야 하는 순간에 아비로서의 마지막 애정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큰아들 이름이 범인데, 아들이 죽엇……’
누가 거짓말로, 참 거짓말로 햇던 모냉이지?
“친구, 너거 아들, 야아, 범이가 죽웃단다.”
카니까네
“범이 죽어? 범이 죽엇으면, 어디 포수가 총을 솟능공? 그넘 포수 참, 일자 포수구나. 범을 잡앗는 거 보니” 카더란다
-정만서는 해학가의 실상 생생하게 보여줘, 경주지역 대표하는 문화인물
임종욱 평론가는 ‘김주석 선생은 ‘거꾸로 본, 정만서 세상’에서 이름으로 진즉부터 알려져 왔던 정만서에 대해, 날것으로만 전해지던 정만서 관련 설화들을 모아 의미를 해석하고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서 우리 시대의 의미까지도 되짚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는 김주석 선생이 처음이 아닐까 한다’고 했다.
또, ‘그의 기행을 보면, 때로 그는 의인(義人)의 행색으로 보기에는 난감한 일들도 숱하게 저지른다. 탐관오리의 수탈에 시달리는 민초들을 극악한 방법으로 속여 ‘등쳐먹는’ 비열한 행각을 자행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는 ‘막 가는 세상’에서 ‘막 가는 언동’으로 세상을 조롱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 조롱의 화살이 박힌 지점은 자신의 가슴이었겠지만, ‘의인’도 ‘의적(義賊)’도 되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자학적이고 파괴적인 기행으로 수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또 ‘이 책에는 한 해학가의 기행에서 자신의 삶과 언행을 되새겨보라는 권유와 설득이 도사리고 있다. 과연 정만서가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나아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이끌었다’고 평했다.
임종욱 평론가는 “경주 건천 출신의 해학가 정만서의 생애와 일화를 재구한 작업은 자칫 우스개 이야기꾼으로 자리할 뻔한 뛰어난 해학가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경주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인물로서 그 가치를 선양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가까운 영덕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의 해학가 방학중의 삶과 일화를 바탕으로 지역 인물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을 생각하면, 선생의 이런 작업은 숨어 있는 경주 문화의 뿌리를 북돋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