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 자왈 인지과야 각어기당이라. 관과면 사지인의니라. <주석> 人之過也 各於其黨 :黨은 類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사람의 허물은 각기 그 종류가 있다. 군자는 항상 그 후함에서 실수하고 소인은 그 박함에서 실수한다. 군자는 사람을 사랑함으로 허물을 짓고 소인은 殘忍에서 허물을 짓는다.”고 하였다. 觀過斯知仁矣 :尹焞이 말하기를 “여기서 보면 곧 사람의 인과 불인을 가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허물은 각각 종류가 있다. 그가 범하는 과실을 보면 곧 그의 마음이 인한지 불인한지 알 수 있다. <묵상> 여기서 우선 우리는 공자의 사상 한 모퉁이를 엿볼 수 있다. 곧 사람은 누구에게나 허물이 있다는 것이다. 군자도 허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어떻게 허물을 저질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허물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곧 군자는 인하므로 허물을 짓고 소인은 불인하므로 허물을 짓는 것이다. 그래서 그 허물을 보고 곧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선의의 죄도 많은 것이다. 전두환 정권 초기의 일이라 한다. 출장 가던 농촌의 면사무소 공무원이 길가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지나칠 수가 없어 그를 업고 병원에 가서 입원을 시키는데 돈이 없으니 그만 그가 갖고 있던 공금으로 썼다. 그러나 그 이튿날 갑자기 닥친 감사 반에 의하여 공금유용이란 죄명으로 파직 당하였다. 그가 오히려 잔인하여 그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더라면 아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 과연 파직당하여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8.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자왈 조문도면 석사라도 가의니라. <주석> 朝 :이른 새벽 聞道 :사물의 당연한 이치를 들어 알게 된다는 말이다. 道는 사물의 당연한 이치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침에 진리를 곧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묵상> 여기서 문제는 도이다. 도가 무엇이기에 공자가 그토록 갈망하였던가? 이를 공자가 자기의 고국 노나라에 이상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도 하였으나 그렇게 좁게 보기 보다는 사물의 당연한 이치로서의 도, 곧 진리라 보는 것이 훨씬 보편적이면서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그 진리를 깨닫는다면 죽어도 좋은데 듣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깔려 있다. 그럼 공자가 그토록 추구한 진리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저마다 자기의 처지에서 말하므로 생략하는 게 오히려 현명할 것이다. 카톨릭에서는 일찍부터 도를 말씀, 곧 成肉身하신 예수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도 또한 자기의 처지에서 수용한 것이다.
6.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人矣 不使不仁者加乎其身 자왈 아미견호인자와 오불인자러라. 호인자는 무이상지요. 오불인자도 기위인의에 불사불인자로 가호기신이니라. 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유능일일에 용력어인의호아? 아미견력부족자러라. 개유지의라 아미지견야로라. <주석> 無以尙之 :그 마음이 인을 좋아하는 고로 천하의 사물이 그에게 더 보탬이 없다는 말이다. 尙은 加. 不使不仁者加乎其身 :마음이 능히 불인한 일을 버려서 조금도 그 몸에 미치지 못하게 함을 말한다. 有能 一日 句 :어떤 사람이 하루아침이라도 분연히 인에다 그 힘을 쓰겠는가? 함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인을 좋아하는 자와 불인을 미워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진정으로 인을 좋아하는 자는 세상에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진정으로 불인을 미워하는 자도 불인으로 하여금 그 몸에 더 이상 가하지 못하게 한다. 능히 하루라도 그 힘을 인에다 써 보았는가? 나는 아직 그 힘이 모자라 하지 못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대개 그런 사람이 있겠거늘 나는 아직 못 보았다. <묵상> 이 장에서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我”라는 일인칭이다. 대개 “吾”라고 쓰는데 여기서는 我라고 하였는데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공자가 보지 못한 것은 두 종류의 사람이다. 好仁者와 惡不仁者이다. 곧 인을 좋아하는 자와 불인을 미워하는 자인데 호인자가 긍정적이라면 오불인자는 부정적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얼핏 보면 호인이 오불인보다 좀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 공자의 말씀에도 호인자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여 더 높이 평가하는 듯 하다. 그러나 세상엔 호인자만으로는 안 된다. 오불인자가 없다면 이 세상에는 정의가 구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는 이 세상에 그런 호인과 오불인을 힘써 행하려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고 계신다. 하루라도 인에다 힘을 써보았는가? 인을 하려는데 힘이 모자라 못하는 사람을 못 보았다는 것이다. 있을 것도 같은데 아직 못 보았다는 것이다. 심각한 한탄이다. 오늘날도 같은 한탄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 흔히들 말하기를 가난하여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말하기를 남의 사랑이 전혀 필요 없을 만큼 부한 사람도 없다고 하지 않은가? 우리는 다 남에게 줄 사랑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만 주지 않을 뿐이요, 또한 남의 사랑을 받아야 할 만큼 비어진 구석이 있어 늘 허전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5. 子曰富與貴是人之所慾也 不以其道 得之不處也 자왈 부여귀는 시인지소욕야나 불이기도로 득지어든 불처야하며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빈여천은 시인지소오야나 불이기도로 득지라도 불거야라. 군자거인이면 오호성명이리오? 君子 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군자 무종식지간위인이니 조차 필어시하고 전패필어시니라. <주석> 慾 :喜愛, 기뻐하고 사랑함이다. 不以其道得之不處也 :부당하게 얻었으면 부귀라도 처하지 않음이다. 之는 부귀를 가리킨다. 畢浣이 말하기를 “得之”는 아래로 이어 읽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역시 한 학설을 갖추었다. 惡 :싫어함이다. 不以其道得之不去也 : 부당하게 얻었으면 빈천이라도 버리지 않음이다. 之는 빈천을 가리킨다. 대개 군자가 도를 행함에 마땅히 부귀를 얻거나 도리어 빈천을 얻더라도 그것이 그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에 마땅히 빈천에 평안하여야 한다. 거슬려 이를 버리고 망령되게 부귀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 惡乎成名 :어찌 능히 군자의 이름을 이루겠느냐? 함이다. 惡는 何, 어찌이다. 終食之間 :밥 한 숟가락 먹는 사이. 아주 짧은 시간을 말한다. 造次 :급하고 구차한 때, 곧 촉박하여 틈이 없다는 뜻이다. 顚沛 :넘어짐이다. 넘어져 어려운 때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귀, 이것은 사람이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땅하게 하지 않고 얻는다면 군자는 그것을 향유하지 않는다. 빈천, 이것은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땅하게 하지 않고 얻는다면 군자는 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군자가 만약에 仁道를 버린다면 어찌 능히 군자라 칭하겠는가? 군자는 한 숟가락 밥 먹는 동안에도 仁을 떠나지 못하고 촉박하고 급한 때에라도 인과 같이 있어야 한다. 넘어져 곤궁한 때에라도 인과 함께 있어야 한다. <묵상> 여기서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라는 말의 해석이 좀 복잡하다. 그 앞의 “부귀라 하더라도 그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면 처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해가 쉽다. 결국 부당하게 얻은 부귀라면 이를 거절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똑 같이 빈천도 그 도로써 얻지 않는다는 말은 이해가 어렵다. 위의 해석도 궤변같이 들린다. 그럼 무슨 뜻인가?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빈천이 비록 정당하게 돌아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부자 집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난다. 그 부함이나 가난은 내 탓이 아니다. 그러나 그 영향은 너무나 크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도 이를 수용하라는 말이라 생각된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빈천, 부당한 위정자의 사리사욕에 의한 희생, 이들은 다 내 탓이 아니다. 곧 정당한 방법으로 나에게 돌아온 것이 아니다. 억울하게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를 벗어나려고 나 역시 부당한 방법으로 대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수용하며 인을 지키라는 말이다. 이를 벗어나려고 나 역시 인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목적이 비록 선하더라도 그 방법에서도 언제나 인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당하게 받은 불이익이라도 이를 벗어나려 나 역시 부당한 방법은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 어떠한 목적에서라도 인을 버릴 수 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은 내 존재의 모든 근거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우리는 흔히 목적이 선하면 그 방법에서는 좀 비뚤어져도 용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안 된다는 것이다. 목적이야 물론 선해야 하지만 방법 역시 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3.子曰 唯仁者 能好人 能惡人 자왈 유인자라야 능호인하며 능호인이니라. <주석> 能好人 能惡人 :호인이란 남의 선한 것을 좋아함이고 오인이란 남의 선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 두 句는 좋아함과 미워함이 모두 理性에서 나옴을 말한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직 인자라야 능히 남의 선한 것을 좋아할 수도 있고 또한 남의 악한 것을 미워할 수도 있다. <묵상> 사람이 사람에 대한 판단은 대개 자기중심적이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은 좋고 나에게 잘 해주지 않은 사람은 싫어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올바를 판단은 나에게 중심을 둘 것이 아니라 원리와 원칙, 어쩌면 진리에 그 기준을 두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다 그 기준을 두고 好 惡를 판단하는 사람은 인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누구를 좋아함도 누구를 미워함도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나도 모르게 편벽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편벽되지 않고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분은 바로 인자일 것이다. 4.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자왈 구지어인의면 무악야라. <주석> 苟 :誠이다. 志 :마음이 가는 바이다. 無惡 :악을 하는 일이 없음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능히 진실로 인에 마음을 둔다면 악한 일은 만들지 않는다. <묵상> 지극히 당연한 원론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이를 해석함에 내가 진실로 인에 뜻을 둔다면 악이 없어질 것이다. 고 해석하면 너무 지나친 자만일 것이다. 그저 단순히 악한 일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을 워낙 불완전하고 나약하기 때문이다. 바울 같은 성자도 내가 하고자 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하고자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 고백하였다. 이게 인간의 타고난 나약함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지기를 조심하여야 하는 것이다. 잠시라도 섰다고 자만하는 순간 곧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인에 뜻을 두고 부단히 그 인을 실천하고자 하여야 겨우 악은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제 내가 인에 뜻을 두니 악이 없어지더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만이다. 끊임없이 인에 뜻을 두고 정진하여야만 악을 없이 하고 더욱 나아가 정진하면 인도 이룰 수 있는 경지에 달하는 것이다.
里仁篇은 논어 가운데 가장 오리지널한 공자의 말씀일 것이라고 한다. 문장이 매우 간결하다. 대화 자체를 그대로 옮겼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仁에 대한 말이 주종을 이룬다. 공자의 사상을 가장 집약한 것이 仁인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편으로 보고 있다. 마치 신약성경에서의 산상수훈과 같다고 할 것이다. 1. 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仁焉得知 자왈 이인·위미하니 택불처인이면 인언득지리오? <주석> 里仁爲美 :鄭玄이 말하기를 里라는 백성이 사는 곳이다. 仁者의 마을에 거하면 이것이 선한 것이다. 고 하였다. 朱熹가 말하기를 마을에 仁厚한 풍속이 있으면 아름다운 것이다. 고 하였다. 處 :居하는 것이다. 焉 :何이다. 知 :智와 같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는 마을 가운데 인후한 풍속이 있으면 아주 좋다. 만약에 사는 곳을 선택하는데 풍속이 인후한 곳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총명하다 하겠는가? <묵상>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더구나 고대에 마을을 주축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는 그 마을이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생활의 터전이었다. 그러므로 풍숙이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 살아야 함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종래의 보편적인 해석이었다. 이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里를 마을로 보지 않고 동사로 보아 산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仁에 사는 것이 된다. 그래야 좀 깊은 맛이 나는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종래의 해석은 너무 보편적인 말이어서 굳이 공자께서 강조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인에 산다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인을 강조하는 공자의 사상과 맞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에 사는 것이 아름다우니 인을 택하여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가 된다. 그래도 무언가 좀 어색한 듯도 하다. 오히려 전자의 해석이 더 순리적이지 않나 여겨지기도 한다. 2. 子曰 不仁者不可以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安仁 知者利仁 자왈 불인자는 불가이구처약하며 불가이장처락이니 인자안인하고 지자는 이인이니라. <주석> 約 :窮困이다. 樂 :안락이다. 安仁 :인에 마음이 평안하여서 맞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다. 利仁 :仁을 아는 것이 利가 됨을 알고 이를 행하는 것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하지 못한 자는 곤궁한 환경에 오래 거하지 못하고 또한 안락한 환경에서도 오래 거하지 못한다. 인자는 仁道에 평안하여 인을 행하고 지혜로운 자는 인의 좋음을 알기 때문에 이를 행한다. <묵상> 仁하지 못하면 곤궁한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는 말은 이해가 쉬우나 또한 안락한 환경에서도 오래 거하지 못한다는 말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니 그도 맞는 말인 것 같다. 안락한 환경 가운데서도 오래 살다 보면 그 환경이 좋은 줄 모르고 더 나은 환경을 요구하게 되고 또 그 환경에 오래 살다 보면 그만 무료하여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게 범인이다. 그러므로 인자라야만 곤궁하든 안락하든 그 환경을 극복하고 인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인을 오히려 利得으로 여기는 현명함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자와 지자가 나란히 나타나는데 仁者는 安仁하고 知者는 利仁한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인자가 한 수 더 높은 경지인 것 같은 감을 갖게 한다. 곧 安仁은 자연 그대로인데 利仁은 인위적인 무엇이 끼어드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인자는 요산(樂山)하고 지자는 요수(樂水)한다는 말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 것일까?
25. 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자위소하시되 진미의오 우진선야로다. 위무하시되 진미의나 미진선야로다. <주석> 韶 :舜 나라 시대의 舞樂. 武 :武王 시대의 舞樂 <번역> 공자께서 순 임금 시대의 소 음악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아름다움을 다하였고 또 선함을 다하였다. 무왕 시대의 무 음악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아름다움은 다하였으나 선함을 다하지는 못하였다” <번역>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공자는 음악의 대가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평은 아주 정확할 것이다. 또 공자의 평이라 이 자체가 그만 평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美나 善의 개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대체적으로 미는 審美的인 측면이요 선은 윤리적인 측면이 아닐까 유추하여 볼 뿐이다. 그런데 이 음악에 대한 평가가 그 나라에 대한 평가와 일치하고 있어 흥미롭다, 즉 순임금의 은나라는 평화로운 나라였으며 무왕에 의해 무력으로 세운 주나라는 살벌한 분위가 있었을 터이니 그 음악도 그리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그 곳의 음악을 듣고 그 곳의 정치까지 가늠하였다지 않은가? 그래서 이 음악을 채집하려고 세운 관청이 樂府였다. 그 음악을 듣고 그 정치를 가늠하여 보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이다. 그만큼 그 음악을 중요시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음악만 보아도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빠르고 좀 광란적인 것이다. 조용한 가운데 우아한 분위기는 없는 것이다. 영혼 밑바닥의 그윽함은 없다. 그저 경쾌하고 즉흥적이고 외향적이다. 이 사회 저변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26. 子曰 居上不寬 爲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觀之哉 자왈 거상불관하며 위례불경하며 임상 불애하면 오하이관지재리오? <주석> 爲禮 :行禮이다. 臨喪 :임하여 타인의 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변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위에 있으면서 도리어 능히 관용하지 못하고 예를 행할 때에 공경하지 못하고 상을 당함에 슬퍼하지 아니하면 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보겠는가? <묵상> 어떤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위에 있는 사람이 있고 아래에 있는 사람이 있다. 평등사회라는 개념과는 다른 차원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고 나이 적은 사람이 있으며 그 직책상 위에 있는 사람이 있고 아래에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사람은 관용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회가 매끄럽고 부드럽게 돌아간다. 그리고 어떤 의식이든지 행함에는 공경스러움이 우선이다. 공경이 없는 의식은 의례적이요 나아가 허식이다. 또한 상을 당함에 슬픔이 없다면 이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감정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 중요한 세 가지 측면을 실행치 못한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거만한 관리들에 대한 경종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23. 子語魯大師樂曰 樂其可知也 始作翕如也 從之 純如也 曒如也 繹如也 以成 자어노대사악왈 악 기가지야라. 시작에 흡여야하여 종지하고 순여야하며 교여야하며 역여야하여 이성이니라. <주석> 語 :고함(告訴)이다. 大師 :樂官名. 翕如 :흡은 合이다. 如는 뜻이 없다. 句末 어조사로 그렇다(猶然)는 것이다. 從 :놓아버리는(放散) 것이다. 純 :和諧. 曒 :밝음이다. 繹 :이어져 끊어지지 않음이다. 成 :한 자락의 음악이 끝남이다. <번역> 공자께서 노나라 악관에게 (음악을 연주하는 도리에 대하여) 말하기를 음악은 가히 알만하다. 시작에는 서로 합하여지다가 풀어지면서 화해를 이루고 밝아지다가 이어져 끊이지 않으며 끝이 난다. <묵상> 공자는 음악의 대가였다. 그러므로 노나라 악관인 대사와 더불어 음악을 논하는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화는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심오한 이야기인 것이다. 대체로 그저 음악의 화음이랄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도올 김용욱 교수는 이 장을 해석하면서 의미 있는 말을 하였다. “나는 이 장을 가장 실감나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세계에서 한국인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아악이나 향악이야말로 공자가 목도한 음악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의 공자의 음악해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관악합주곡인 수제천(壽齊天)을 연상한다. 수재천은 잘 들어보면 흡여- 순여- 교여- 역여의 구체적 의미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같이 무식한 사람은 도올의 말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24. 儀封人 請見曰 君子之至於斯也 吾未嘗不得見也 從子見之 의봉인이 청현 왈 군자지지어사야에 오미상불득현야라 종자현지한대 出曰 二三子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爲木鐸 출왈 이삼자는 하환어상호아? 천하지무도야구의라 천장이부자로 위목탁이니라. <주석> 儀封人 :의는 위나라 읍의 이름이다. 봉인은 변강을 장악하는 관리이다. 君子 :도덕과 학문이 있는 사람이다. 二三子: 의봉인이 공자의 제자를 부르는 말이다. 喪 :자리를 잃고 나라를 떠나감이다. 木鐸 :금의 입에다 나무의 혀로 된 종으로서 정사를 베풀 때 진동시켜 백성을 경종시켰다. <번역> 위나라 위읍의 변방 수비대장이 공자님을 뵈옵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군자께서 이곳을 오시면 제가 뵈옵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공자를 따르던 제자들이 그를 뵈옵게 하였더니 그가 뵈옵고 나오면서 말하였다. “여러분, 어찌 선생님께서 자리를 잃고 나라를 떠나간다고 걱정하십니까?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라 하늘이 장차 선생님을 세상을 울리는 목탁으로 삼아 세상 사람을 가르치실 겁니다.” <묵상>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異人이나 또는 현인이 있는가 보다. 이 국경의 경비 대장도 그런 분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를 바로 본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참 희한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아주 훌륭한 사람 같은데 그 사고가 아주 비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아주 비천한 사람 같은데 훌륭한 도를 가진 분을 만나는 것이다. 이 의봉인 역시 그 벼슬은 별 것 아니나 그 눈은 대단한 것이었다. 공자를 세상을 울릴 목탁으로 본 것이다. 아주 정확히 본 것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아니 그런 사람을 만날까 겁이 나기도 한다. 내 내면의 추한 꼴이 그대로 나타날까 해서이다. 하지만 오늘 이 땅에 그런 분이 나타나야 하겠다. 나타나셔서 진정으로 목탁 되시는 분을 좀 찾아주셔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 이 땅에는 목탁을 자처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으나 나중 보면 대개가 허풍이었다. 심지어는 사기꾼이었다. 그래 참 목탁이 그리운 것이다. 그 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다. 그야말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다. 그 목탁을 좀 가르쳐 다오. 나도 가서 그의 말씀을 경청하리라.
22. 子曰 管仲之器小哉 或曰 管仲儉乎?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자왈 관중지기소재라. 혹왈관중검호아? 왈 관중유삼귀하며 관사불섭하니 언득검이리오? 然則 管仲知禮乎? 연즉 관중지례호아? 曰 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 邦君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 왈 방군수색문하니 관씨역수색문하며 방군위양군지호하여 유반점하니 관씨역유반점이라. 관씨이례면 숙부지례리오? <주석> 管仲 :성은 관, 이름은 夷吾. 제나라의 대부. 제나라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였다. 器小 : 국량이 좁고 얕다. 器識이 협소하다. 三歸 : 包咸이 말하기를 세 성의 여자에게 장가감이라고 하였다. 朱熹가 말하기를 삼귀는 臺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兪樾의 <群經評議>에서 말하기를 집에 세 곳이 있다. 오늘날 三座公館이라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攝 :兼職이다. 邦君 :한 나라의 군주이다. 樹塞門 :문에다 병풍을 치고 안과 밖을 차단하는 것이다. 樹는 병풍을 새우는 것이다. 塞은 遮蔽이다. 好 :友好이다. 反坫 :坫은 흙을 쌓아 만든다. 옛날 두 임금이 서로 만남에 주인이 술을 부어 손님에게 드리면 마신 뒤에 빈 잔을 坫上에 놓는다. 이를 反坫이라 한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의 그릇이 작도다. 어떤 이가 물었다. 관중은 검소하였습니까? 관중은 세 개의 공관을 가졌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한 일만 시키고 겸직시키지 않았다. 이런데 어찌 검소하였다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관중은 예를 알았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임금이 궁궐의 문 앞에다 병풍을 세우니 관중도 자기 집 문 앞에다 병풍을 세웠다. 임금이 두 나라의 우호를 위하여 잔치할 때 正堂 양 옆에다 술잔을 놓는 坫을 만드니 관중 또한 자기 집에다 이와 같이 坫을 만들었다. 만약에 관중더러 예를 안다고 하면 누가 예를 모르겠는가? <묵상> 먼저 본문의 내용을 잘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공자 당시 관중에 대한 평가는 아주 좋았다. 그러나 공자는 조금 부정적이었다. 공자의 왕도 정치적 처지에서 보면 관중의 폐도 정치는 맞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라고 한들 공자의 이상에서는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생각을 바로 말하는 것이다. 관중의 그릇이 작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좀 더 큰, 그리고 더 이상적인 정치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관중의 그릇이 작았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들은 혹자는 그래도 관중은 검소하지 않았느냐고 항변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아주 구체적이고 직설적이다. 그가 세 개의 공관을 가졌고, 또는 다른 해석을 하면 세 여자에게 장가들고 또 한 사람이 여러 사무를 보게 하면 경비가 절약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데도 검소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자 그래도 관중이 예는 알지 않았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어디까지나 관중을 옹호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단호하였다. 임금이 안채를 안 보이게 하려고 안 채 앞에다 병풍을 치니 관중도 그렇게 하였고 임금이 다른 나라의 임금을 맞아 두 나라의 우호를 다지며 술을 마심에 필요하여 궁궐에다 반점을 두었는데 관중도 자기 집에다 반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는 얼른 보면 검소하다는 앞의 문제와 연관되는 듯 한제 그렇지 않다. 이는 참람한 일이니 검소의 대상이 아니라 예의 문제라는 것이다. 신하로서 있을 수 없는 월권이라는 것이다. 이러고도 예를 안다고 하면 어느 누가 예를 모르는 사란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지없이 관중을 폄하하는 말씀이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노나라가 제나라로부터의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렇게 제의 관중을 욕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공자를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폐도정치를 펼친 관중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관중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이중적이다. 역시 같은 논어인데도 憲問篇에서는 관중을 아주 높게 추켜세웠다. 곧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다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관중의 공적은 절대적으로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에게 있어서 관중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조금 더 큰 그릇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스며있는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 능력으로 왕도 정치를 한 번 펼칠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愛憎이 교차되는 것이다.
21.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曰使民戰栗 애공이 문사어재아한데 재아대왈 하후씨이송이오, 은인이백이오, 주인이율이니 사민전률이니이다. 子聞之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자문지왈 성사는 불설하며 수사는 불간하며 기왕불구로다. <주석> 社 :社의 主를 가리킨다. 社는 토지의 신이다. 고대에 토지의 신을 제사함에 거기 서 있는 하나의 나무로 위패를 만들었기에 이 위패를 사주라고 하였다. 신령이 의거하는 것이라 여겼다. 宰我 :이름은 予, 공자의 제자이다. 夏后氏以松 三句 :하후씨는 安邑에 도읍하였는데 그 들에 소나무가 잘 자랐고, 은나라는 毫에 도읍하였는데 그 들에는 잣나무가 잘 자라고 주나라는 鎬에 도읍하였는데 그 들에는 밤나무가 잘 자랐다. 각각 그 땅에 알맞게 자라는 나무로 사주를 제작하였다. 戰慄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재아가 각각 그 땅에 알맞은 나무로 사주를 만든다는 것에 의거하지 않고 애공에게 사주 만드는 뜻을 번복하여 답하였다. 망령되게 스스로 해석하여 周代에서 밤나무를 쓰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두렵게 하는 것이라 하였던 것이다. 遂事 : 이미 이루어져 능히 막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遂는 行이다. <번역> 애공이 재아에게 사주에 쓰는 나무에 대하여 물었다. 재아가 답하기를 하나라에서는 소나무를 썼고 은나라에서는 잣나무를 썼으며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를 썼습니다. 주나라에서 밤나무를 쓴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戰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공자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하여 다시 말하지 않고 이미 되어진 일에 대하여 간하지 않으며 이미 지난 일을 탓하지 않는다. <묵상> 여기서 말하는 社主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이 있다. 위의 주석처럼 그 社의 위패를 말하기도 하나 또 나무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위의 본문을 보면 오히려 나무로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건 무엇이든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재아의 답변이요 또 공자의 꾸짖음이다. 재아는 말을 썩 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답변은 말을 잘하는 게 아니고 아주 못되게 하는 것이다. 곧 임금에게 백성을 두렵게 부리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유약한 임금에게 드리는 충언이라고도 하겠으나 당시 권신들에게 쌓여 있는 임금으로 하여금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백성을 두렵게 할 게 아니고 권신을 두렵게 하여야 할 것인데 그에겐 그럴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결국 임금을 욕되게 하는 말인 것이다. 더구나 공자가 노한 것은 공자는 주나라를 아주 이상적인 나라로 여기는데 이 주나라에서 백성을 전율케 하기 위하여 밤나무를 썼다는 재아의 말이 공자에겐 너무도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직설적인 꾸짖음을 아니하시고 빙 둘러 지나간 일을 말해 무엇 하느냐? 하며 마무리 지었는데 이는 자칫 말의 장난에 휩쓸려 시끄럽게 될까 함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에서 공자의 깊은 한숨과 재아에 대한 원망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밤나무를 써서 백성을 전율케 하였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는 중국의 발음에서 오는 문제인 것이다. 곧 밤나무와 두렵게 한다는 말의 음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밤나무가 두렵게 한다는 뜻과 연관되어진 것이다.
20.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자왈 관저는·낙이불음하고 애이불상이니라. <주석> 關雎 :시경 국풍 주남편의 첫 편이다. 淫 :즐거움이 지나쳐 그 바름을 잃음이다. 傷 : 슬픔이 지나쳐 和에 해로움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저의 시는 표현이 비록 쾌락하나 지나침에 이르지 않고 비록 슬프나 정을 상함에는 이르지 않는다. <묵상> 관저는 시경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노래이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처음에 나오는 건 더 중요한 게 사실이다. 이 노래를 평하여 “樂而不淫, 哀而不傷”이라고 하셨다. 이는 공자의 詩觀이요, 평가 기준이다. 아울러 음악의 기준이기도 한다. 그럼 관저의 노래는 어떤 노래인가? 당시 불리던 민요이다. 민요이므로 특정한 작자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너무 존숭하고 미화하여 문왕이 그의 비 태사가 처녀로 있을 때 부른 노래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지금도 시경의 주에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억지요 왜곡이다. 그저 순수한 민요 가운데 하나의 연애시일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연애시를 공자가 찬미한 것은 그 순박하고 순수한 감정을 높이 산 것이다. 진실한 연애시는 순진무구한 것으로 인간 감정의 고결한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후대의 유학자들이 지탄하듯 그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순수한 감정의 발로인 것이다. 이제 그 시를 한 번 직접 감상하여 보자. 關關雎鳩 까악 까악 물수리 새 在河之洲 황하의 모래톱에서 窈窕淑女 날씬한 저 아가씨 君子好逑 군자의 좋은 배필이로다. 參差荇菜 들쑥날쑥 물마름 左右流之 이리 저리 흐르고 窈窕淑女 날씬힌 저 아가씨를 寤寐求之 자나 깨나 구하네. 求之不得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寤寐思服 자나 깨나 그리도다. 悠哉悠哉 기나긴 긴 이 밤이여 輾轉反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參差荇菜 들쑥날쑥 물마름 左右采之 이리저리 캐고요 窈窕淑女 날씬한 저 아가씨 琴瑟友之 금슬같이 벗하고자. 參差荇菜 들쑥날쑥 물마름 左右芼之 이리저리 삶고요 窈窕淑女 날씬힌 저 아가씨 鐘鼓樂之 종과 북으로 즐기리.
19. 子張問曰 令尹子丈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忠矣 曰仁矣乎 曰未知 焉得仁 자장이 문왈 令尹子文 삼사위영윤이나 무희색이라. 삼이지 무온색이라. 구영윤지정을 필이고신영윤하니 하여오? 자왈 충의라. 왈 인의호이까? 왈 미지라. 언득인이리오? <주석> 令尹子文 :令尹은 官名으로 초나라의 上卿으로서 執政者이다. 子文은 성은 鬪(투)이고 이름은 穀於菟(곡어토)이다. 仕 :동사로 취임이다. 已之 :벼슬을 그만둠을 가리킨다. 未知焉得仁 :겨우 그 충성스러움은 알지만 그 밖의 것은 상세히 모른다. 仁하다고는 하지 못한다. 崔子弑齊君 :제나라 대부 崔杼(최저)가 그의 임금 장공을 죽인 것을 말한다. 陳文子 :이름은 須無. 제나라 대부이다. 十乘 :40匹. 違 :떠남이다. 猶吾大夫崔子也 :타국의 집정 대신들도 또한 최자처럼 그 임금을 죽이고 난을 일으키고자 함을 말한다. 之 :앞으로 가다. 淸矣 :난을 떠나 다스림을 구하여 그 몸을 더럽히지 않음을 말한다. <번역> 자장이 물었다. 초나라 영윤 자문은 세 번 영윤에 취임하였지만 기뻐하는 안색이 없었고 세 번 직위를 그만두게 되어도 성내는 안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영윤이 되었을 때의 정황을 새로 오는 영윤에게 반드시 일러 주었습니다.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충성되다. 다시 물었다. “어집니까?” 대답하셨다. “모르겠다. 어찌 어짊을 얻었다고야 하겠는가?” 최자가 제 나라의 임금을 죽이니 진문자는 말이 십승이나 있으면서도 이를 버리고 그 나라를 떠나갔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곧 말하기를 “우리 대부 최자와 같다” 하고는 떠나갔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곧 또 말하기를 “우리 대부 최자와 같다”하고는 떠나갔습니다.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깨끗하다” “어집니까?” “모르겠다. 어찌 어짊을 얻었다고야 하겠는가?” <묵상> 초나라의 영윤 자문과 제나라의 대부 진문자의 이야기이다. 자문의 충성됨과 진문자의 맑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충성과 이 맑음으로도 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럼 인의 경지는 얼마나 깊고 높은 경지인가? 우리 범인으로서는 상상이 어려운 경지이다. 이렇게 상상도 어려운 경지를 어떻게 범인이 도달할 수가 있는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근처에라도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 하루 노력하는 자세,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17.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자왈 안평중은 선여인교라. 구이경지하다 <주석> 안평중 :성은 晏, 이름은 嬰(영), 자는 仲, 시호는 平. 제나라 대부이다. 交 :교우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晏平仲은 남과 더불어 잘 사귀었다. 오래 되어도 그를 존경하였다. <묵상>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깊은 도리를 배워야 한다. 첫째는 공자의 올바른 판단력이다. 안평중은 공자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서운하게 대한 사람이다. 공자가 젊어 제나라에 가서 벼슬을 얻으려 하였다. 제나라의 경공은 공자에게 반하여 중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안영이 반대하여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공자에게 있어서 안영은 그의 출세의 길을 막은, 참으로 미운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공자는 안영을 평함에 이렇게 높이 평하는 것이다. 이 공정한 평가는 참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덕목인 것이다. 나와의 이해관계거나 혹은 친소를 떠나 한 사람을 그대로 올바로 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이 장에서 배워야 할 바는 오래 사귈수록 공경을 받았다는 안영의 그 인격이다. 사람은 대개 사귈수록 그 단점이 발견되어 실망을 주는데 안영은 오래 사귈수록 피차 더 존경을 받았다니 참으로 인격자인 것이다. 이런 인격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부러운 인격이다. 18.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장문중 거채에 산절조절하니 하여기지야오? <주석> 장문중 :성은 臧孫, 명은 辰, 자는 仲, 시호는 文. 노나라 대부이다. 居蔡 :큰 거북딱지를 가진 집. 居는 가짐이다. 蔡는 큰 거북딱지이다. 大龜는 國君이 소장하여 吉凶을 점치는 데 썼다. 大夫는 작은 거북을 사용하였다. 山節藻梲 :기둥머리에 산 모양을 조각하고 들보 위 짧은 기둥에는 수초 모양을 그림으로 이는 천자의 꾸밈이다. 節 :기둥머리를 받치는 곳 梲 :대들보 위의 짧은 기둥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이 집에다 큰 거북딱지를 걸어 두고 節에는 산 모양을 조각하고 들보 위 작은 기둥에는 수초 모양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묵상> 공자가 아주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자기의 지위를 넘어서는 참월이다. 君君,臣臣이요, 父父 子子이어야 한다. 그런데 장문중은 일개 대부에 불과한데 왕이니 쓸 수 있는 사치를 하였다는 것이다. 자기의 분수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가 비단 그 집의 사치함에서만 분수를 넘어선 게 아닐 것이다. 정치에서도 역시 참월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롭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참월은 결국 화를 자초하기 때문이다.
15.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爲之文也 자공문왈 공문자하이위지문야오? 자왈 민이호학하고 불치하문이라. 시이로 위지문야니라. <주석> 孔文子 :성은 孔, 이름은 圉(어), 衛니라 大夫. 시호는 文. 文 :諡法에 勸學 好問曰 文이라 하였다. 敏 :聰敏이다. 不恥下問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음을 말한다. 下問은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물음이다. <번역> 자공이 물어 말하였다. 孔文子를 일컬어 어떻게 文이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聰敏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하랫 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러므로 그를 일컬어 文이라 하였다. <묵상> 敏而好學, 不恥下問. 이게 아무나 쉽게 하는 게 아니다. 민이호학은 자기 노력에서 이루어지고 불치하문은 자기 수양에서 나온다. 이 둘을 몸에 익히면 과연 文이란 이름을 얻을 기초는 닦여지리라 믿어진다. 그러나 범인은 민이호학도 어렵거니와 불치하문은 더 힘든다. 16.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자위자산 유군자지도 사언이니 기행기야공하고 기사상야경하고 기양민야혜하며 기사민야의라. <주석> 子産 :성은 公孫 이름은 僑. 정나라 대부이다. 자산은 그의 자이다. 恭 :겸손이다. 敬 :謹恪이다. 惠 :은혜를 베풂이다. 義 :合宜, 合理이다. <번역> 공자께서 자산을 평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군자가 되기에 합당한 네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몸가짐을 겸손히 하고 윗사람을 섬김에 공경스럽게 하며 백성을 기름에 은혜롭게 하고 백성을 부림에 의롭게 하였다. <묵상> 공자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은 정치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子産은 훌륭하였던 것이다. 정나라는 소국이었다. 晉 나라와 楚 나라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소국으로서 비굴하지 않고 자만하지도 않으면서 나라의 위신을 지키며 임금을 잘 받들고 백성을 잘 돌본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칭찬을 받은 것이다. 공자께서 오늘의 정치가를 보시고는 어떻게 평하실지 궁금하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옛날에만 존재하였던 낡은 사회의 유물이 아니다. 민주사회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 직장에서는 상사가 있고 선배가 있으며 집안에서도 어른이 있는 것이다. 그들을 섬김에 공경스럽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사회가 순조로이 그리고 화목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 양민이라는 말은 백성을 잘 기른다는 뜻으로 오늘로 말하면 복지의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그 복지를 아주 은혜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 사민이란 말은 백성을 부린다는 말인데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받고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등의 일을 시킴이다. 이를 의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공평하게 일을 시키면 불평이 없어지고 결국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 사회에서도 꼭 지켜야 할 네 가지 덕목이다.
5. 或曰 雍也 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容佞 . 혹왈 옹야 인이불녕이라. 자왈 언용녕이리오. 어인이구급이면 누증어인이니 부지기인이나 언용녕리오. <주석> 雍 :성은 冉(염), 이름은 雍, 자는 仲宮. 공자의 제자이다. 佞 :말 재주가 있는 것이다. 焉用佞 :공자가 당시 사람들이 말 재주 있는 사람을 어질다고 여김을 탄식하신 것이다. 安 :何이다. 禦 :抵禦, 對付이다. 口給 :言辭가 민첩함, 아른바 利口이다. <해석> 어떤 이가 “雍은 어질기는 하지만 말재주가 없습니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말재주를 쓰랴? 말재주로써 사람을 방어하면 남에게 미움을 더하리니 그가 어진지는 모르나 어찌 말재주를 쓰랴? <묵상> 공자가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말재주꾼이다. 말만 앞서고 실천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누누이 訥言을 강조하셨다. 오늘 정치가들이 좀 들었으면 한다. 6. 子使漆雕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 자사칠조개사하시니 대왈 오사지미능신이라하니 자열하시다. <주석> 漆雕開 :성은 칠조, 이름은 개, 자는 子若. 공자의 제자이다. 信 :여기서는 自信을 가리킨다. <번역> 공자께서 칠조개로 하여금 벼슬을 하게 하였더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저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하였다. 공자께서 매우 기뻐하셨다. <묵상> 공자께서 기뻐하신 이유는 아마 두 가지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첫째는 그의 겸손함이요, 둘째로는 그가 그 자신을 옳게 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무능을 알기에 오히려 그를 벼슬하도록 하셨을 것이다. 자기의 무능을 아는 사람은 큰 실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과대평가함으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5. 或曰 雍也 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容佞 혹왈 옹야 인이불녕이라. 자왈 언용녕이리오. 어인이구급이면 누증어인이니 부지기인이나 언용녕리오. <주석> 雍 :성은 冉(염), 이름은 雍, 자는 仲宮. 공자의 제자이다. 佞 :말 재주가 있는 것이다. 焉用佞 :공자가 당시 사람들이 말 재주 있는 사람을 어질다고 여김을 탄식하신 것이다. 安 :何이다. 禦 :抵禦, 對付이다. 口給 :言辭가 민첩함, 아른바 利口이다. <해석> 어떤 이가 “雍은 어질기는 하지만 말재주가 없습니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말재주를 쓰랴? 말재주로써 사람을 방어하면 남에게 미움을 더하리니 그가 어진지는 모르나 어찌 말재주를 쓰랴? <묵상> 공자가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말재주꾼이다. 말만 앞서고 실천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누누이 訥言을 강조하셨다. 오늘 정치가들이 좀 들었으면 한다. 6. 子使漆雕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 자사칠조개사하시니 대왈 오사지미능신이라하니 자열하시다.
3. 子謂子賤 君子哉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 자위자천 군자재여 약인이로다. 노무군자자인데 사언취사오? <주석> 子賤 :성은 宓(복). 이름은 不齊. 공자의 제자이다. 若人 :이와 같은 사람 곧 자천을 가리킨다. 斯焉取斯 :이 사람 어디서 이런 덕을 이루었는가? 라는 말이다. 앞의 斯는 자천을 가리키고 뒤의 斯는 그 덕을 가리킨다. <번역> 공자께서 子賤에 대하여 말씀하시길 “군자로다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라고 할 사람이 없었는데 이 사람은 어디서 이런 덕을 취하였는고?”하셨다. <묵상> 참 놀라운 말씀이다. 공자께서 이렇게 놀랄 사람을 만나다니 그 기쁨이 오죽하였으랴? 그러나 성인이라야 능히 성인을 안다고 우리 눈에는 이런 덕을 가진 사람을 만나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 그만 놓치고 마는 것이다. 나중 지나 보면 그 사람이 참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다. 느린 사람, 혹은 둔한 사람, 또 어리석은 사람은 나중에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마는 것이다. 그래 이런 분들이 세상에서 덕을 못 이루고 초야에서 썩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4. 子貢 問曰 賜也 何如 子曰 女器也 曰 何器也 曰 瑚璉也. 자공 문왈 사야 하여이까? 여기야라. 왈 하기야오? 왈 산호야라. <주석> 賜 :子貢의 이름이다. 女器也 : 여는 汝, 너이다. 자공을 가리킨다. 器 :器皿 瑚璉 :종묘에서 곡식을 담는 그릇이다. 옥으로써 장식해 그릇에서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廊廟에서 쓰일 인재라는 말이다. <번역> 자공이 물었다.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 말씀하셨다. 너는 그릇이다. 자공이 물었다. 어떤 그릇입니까? 호련이다. <묵상> 앞에서 공자께서 子賤을 군자라고 칭찬하시는 것을 들은 자공은 저는 어떻습니까? 하고 직설적으로 묻는다. 그만큼 허물없이 말할 수 있는 사이로 가까운가 보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 걸 보면 子貢도 칭찬을 들으리라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을 것 같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공자께서는 더없는 칭찬을 하셨다. 제자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은 공자님은 훌륭한 스승의 자질을 갖고 있다 할 것이다. 위대한 스승일수록 칭찬을 잘 하는 것이다. 그야 물론 호되게 꾸짖을 일이 있을 때는 꾸짖지만 제자의 능력을 최대한 펼치도록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은 교사의 기본인 것이다. 그래 공자는 훌륭한 교육자이시다. 훌륭한 교육자이기에 훌륭한 제자를 기르신 것이다.
2. 子謂南容 邦有道不廢 邦無道免於刑戮 以其兄之子妻之 자위남용 방유도엔 불폐하고 방무도엔 면어형륙하니 이기형의자처지하시다. <주석> 南容 :성은 南宮, 이름은 도(糸변에 蹈의 오른 쪽 글자를 써서 “끈 도” 글자인데 컴퓨터에 안 나온다.) 또 하나의 이름은 适. 字는 子路, 魯나라 사람. 공자의 제자이다. 공자의 형 孟皮의 사위가 되었다. 不廢 :반드시 쓰임 받음을 말한다. 免於刑戮 :亂世에 화를 면함을 말한다. <번역> 공자께서 南容에 대하여 말씀하시길 “나라에 道가 있으면 반드시 쓰임을 받을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어도 형륙을 면하리라”하시고 형의 딸로 그에게 시집보냈다. <묵상> 공자의 사람 보시는 눈을 짐작하게 한다. 곧 나라에 도가 있으면 반드시 채용될만한 능력의 소유자요, 나라에 도가 없는 난세를 만나도 어리석게 형륙을 당하는 그런 輕擧妄動하는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인물이라야 참으로 한 나라를 다스릴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24. 子曰 君子訥於言 而敏於行 자왈 군자는 눌어언하고 이민어행이니라. <주석> 訥於言 :언어가 느리고 둔함을 말한다. 訥은 느리고 둔함이다. 敏於行 :행동을 민첩하게 하고자 함이다. 敏은 민첩이다. <번역> 군자는 말에는 느리고 둔하나 행함에는 민첩하다. <묵상> 오늘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이와 반대로 한다. 곧 말에는 민첩하나 행함에는 둔한 것이다. 이는 소인들이 하는 짓이라 한다. 군자는 이와 반대이다. 곧 말은 느릿느릿하나 행함은 빠른 것이다. 이래야 군자인 것이다. 군자가 적음이 오늘의 비극이다.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많음이 오늘의 병이다. 25. 子曰 德不孤 必有隣 자왈 덕불고라 필유린이니라. <주석> 德不孤必有隣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부류가 있어 따를 것이라. 거처에 이웃이 있음과 같다. 이웃은 친근함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그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그에게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묵상> 문제는 이런 믿음을 가지느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 홀로선 것 같은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 더구나 나 홀로 좀 바르게 살아가노라고 마음 먹어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만 넘어지고 만다. 처음부터 넘어진 사람보다 더 비참하다 남에게 놀림감이 더 된다. 그러므로 바르게 살리라 다짐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내가 그럴 능력이 있느냐 잘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능력도 없으면서 바르게 산다고 큰 소리 치다가는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그리하여 바르게 살려면 나에겐 반드시 우군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믿음으로 나아가면 예상외로 이웃이 다가오는 것이다. 26.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疎矣 자왈 사군삭이면 사욕의오 붕우삭이면 사소의니라. <주석> 數 :번거롭게 자주함이다. 누누이 함이다. 疎 :소원하여져서 친하지 않음이다. <번역> 자유가 말하였다. 임금을 섬김에 지나치게 번거롭게 하면 욕을 불러오고 벗에게 지나치게 번거롭게 하면 소원하여진다. <묵상> 깊이 새길 금언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런 충신을 더러 만난다. 여러 번 간하다가 자기와 온 집안이 화를 당하는 경우를 보는 것이다. 지혜롭지 못하여 자기는 물론 나아가 나라에도 큰 해를 끼치는 것이다. 친구 사이에도 역시 같다. 충고한다고 하다가 결국엔 관계가 소원하여지는 경우를 많이 보는 것이다. 처세에서 깊이 알아야 한다. 신실한 내 마음만이 상대에게 전달되는 게 아닌 것이다.
21.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자왈 부모지년은 불가불지야니 일즉희요, 일즉구니라. <주석> 知 :기억함이다. 一則以喜 一則以懼 :그 수하심을 기뻐하면서 또 그 쇠함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님의 나이는 알지 않으면 안 되나 한 편으로는 오래 사심이 기쁘고 한 편으로는 그 쇠하심이 두려운 것이다. <묵상> 솔직한 고백이다. 부모의 연세는 자식에게 부담인 것이다. 기쁨과 두려움, 양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기쁨도 두려움도 다 없다. 아예 무관심이다. 부모의 처지에선 불효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다. 22. 子曰 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자왈 고자언지불출은 치궁지불체야니라. <주석> 言之不出 :망령되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음을 말한다. 恥躬之不逮 :친히 몸소 그것을 행함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함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사람은 말을 입 밖에 잘 내지 않았다. 경솔하게 말하고서 자기 몸이 그것을 행하지 못하면 이를 부끄러워하였기 때문이다. <묵상> 경솔한 말, 더욱이 허풍떠는 말을 삼가야 한다. 특히 오늘날에는 이 허풍이 너무도 많은 세상이다. 특히 정치인들의 허풍은 그 미치는 악영향이 너무도 크다. 그럼에도 모두들 조심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더욱 기 막히는 사실은 이 허풍에 잘 속아 넘어가는 愚衆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허풍은 더욱 활개를 치고 날아다니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허풍을 치는 사람은 나쁘고 이에 넘어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 나쁨과 어리석음이 어울려 오늘의 세상을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깨어서 허풍이 자리를 못 잡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23. 子曰 以約失之者 鮮矣 자왈 이약실지자는 선의니라. <주석> 約 :꾸며서 그대로 두지 않음이다.(不侈然自放) 곧 말을 삼가는 것과 행동을 조심하는 것 등 낭비하지 않음이 이런 것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에 대하여 절제하고 단속하면서 실수를 범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묵상> 자기를 절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말 자기를 이기는 자는 천하를 이기는 자일 것이다. 나부터 나를 이기지 못하여 저지르는 실수가 수도 없이 많다. 부끄럽지만 솔직한 고백이다. 자기 절제를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매일 나를 쳐 내 양심에 복종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특히 남을 가르쳐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에겐 이 일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도의 성자라고까지 추앙을 받는 간디에게 어느 날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왔다. 엄마가 하는 말 “이 아이가 사탕을 너무 좋아하는데 이를 좀 못 먹게 타일러 주세요. 선생님 말씀이면 아마 들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말을 들은 간디는 한참을 있더니 두 주일 후에 오라고 하였다. 두 주일 후에 가니 간디가 하는 말 “사탕을 먹으면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말라.” 하였다. 이 평범한 말을 왜 두 주일이나 기다려 하였는지 이상하여 물었더니 간디가 하는 말. “사실은 제가 사탕을 좋아하였거든요. 그래 내가 끊고 나서야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자기를 절제하고서야 남에게 절제를 권할 수 있는 것이다.
18. 子曰 事父母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자왈 사부모에 기간이니 견지부종이면 우경불위하며 노이불원이니라. <주석> 幾諫 :어른을 대함에 완곡하게 간함이다. 諫은 권고함이다. *주자는 幾는 微라고 하였다. 은미하다는 뜻이다. 見志不從 又敬不違 :간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라도 더욱 공경하고 효도하여 부모의 뜻에 감히 저항하지 않음이다. 勞 :근심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를 섬김에 은미하게 간하여야 한다. 내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더라도 더욱 공경하고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근심이 되더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묵상> 요즘 사람이 들으면 좀 웃지 않을까 여겨진다. 어디 이런 자식이 있을까?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 지나친다고 할 것이다.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문제는 오늘에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때 자식 된 자는 비록 그 어버이가 좀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참고 기다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바로 직언을 서슴지 아니하여 부모의 노를 격발하게 되면 결국은 그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부모 자식 간의 정의만 더 악화되는 것이다. 禮記에는 부모에게 세 번을 간하여도 듣지 않거든 울면서 따르라고 하였다. 그 간하는 문제보다 부자간의 정의를 더 중요한 문제로 본 것이다. 하지만 오늘에야 어디 그런 부모가, 그런 자식이 있으랴? 그렇게 배짱 좋게 버틸 부모도 없고 또 그렇게 여러 번 간할 자식도 없는 게 아닌가? 삭막한 현실이 두렵다. 19. 子曰 父母在不遠遊 遊必有方 자왈 부모재면 불원유하고 유필유방이니라. <주석> 遠遊 :문밖으로 멀리 나간다는 뜻이다. 遊必有方 :方은 일정한 거처이다. 주희가 말하기를 만약 이미 고한 곳이 東이면 감히 西로 가지 말아야 어버이가 반드시 자기의 소재를 알고서 근심을 없이할 수 있다. 또 자기를 부르면 즉시 다다라 실수함이 없게 한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가 계시면 멀리 가지 말 것이요. 가면 반드시 거처를 일정하게 해야 한다. <묵상> 오늘날 이 말씀은 부모에게가 아니고 부인에게 행하여져야 할 말씀이다. 또 많은 사람은 그렇게 행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모에게는 거의 알리지 않는다. 그게 오늘의 세태이다. 이러므로 부모는 가족 가운데서도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20. 子曰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자왈 삼년무개어부지도면 가위효의니라. 이 장은 학이편 제 11장에도 나온다.
16.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자왈 군자는 유어의하고 소인은 유어 이니라 <주석> 喩:通曉, 깨달음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로움에서 깨닫고 소인은 이익에서 깨닫는다. <묵상> 여기서 喩라는 말을 단순히 “깨닫는다.” 라고 해석하니 그 의미가 좀 애매하여진다. 이를 “민감하다” 혹은 “밝다”로 풀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목숨을 버리더라도 지켜야 할 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에서 이런 의인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17,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內自省也 자왈 견현하면 사제언하고 견불현하면 내자성야니라. <주석> 賢 :賢德者 思齊 :어진 이와 더불어 갖기를 생각함. 內自省 :내심으로 자아를 반성함이다. 자기도 이런 악이 있는지 두려워서이다.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진 이를 만나거든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만나거든 안으로 나도 저런 악이 없는지 스스로 살펴라. <묵상>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자와 불현자를 가려내는 내 눈이 문제인 것이다. 현자인 줄 알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보니 아주 불현자인 것이다. 또는 드물기는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더러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은 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 어느 경우에는 현인이나 어느 경우에는 또 그 반대로 변하는 장면을 보이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인 불현인으로 양분하는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선 내 자신부터도 혹 현인인 것 같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 아닌 것이다. 그러나 다만 우리는 그 사람 전체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우선 그의 장처를 보고 배우려 하고 단처를 보고 반면교사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