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부터 1908년 사이, 국민들의 모금으로 국채를 갚기 위해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은 전 민족적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당시 대한제국이 안고 있던 (주로 일본에서 도입)외채 1300여 만 원을 갚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모금활동을 벌인 운동으로 115년 전 이 땅, 경주에서도 거세게 전개됐음이 2018년 경주최부잣집에서 발견된 여러 관련 문서 속에서 증명된 바 있다(보다 자세한 관련내용은 본지 1400호, ‘경주의 국채보상운동’ 참고). 국채보상운동에 당시 경주지역민들도 선도적인 참여를 했던 문서 자료들로서는 단연회사경비분배기, 경상북도 경주군 금연회사 설립취지서, 광고문안, 경주국채보상의연금성책, 향교연성회사규칙, 국채보상금검사소 편지 등이 이를 방증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대 여러 신문을 통해서도 전국적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경주의 국채보상운동에 관련한 보도도 많았다. ‘국채보상 의무를 다하려는 경주 군민들의 노력이 남다르다’, ‘관리에서부터 유생, 상인, 기생까지 모두 참여한 경주 국채보상’, ‘화적들도 국채보상으로 양민이 되다’, ‘경주군 여러 면리의 납부’ 등의 제목으로 경주국채보상운동 소식들이 실렸음을 볼 수 있었다. 송아지를 팔고 떡을 팔고 점 봐 준 돈을 납부하고 은비녀를 팔아 이 운동에 동참했던 경주 민초들의 충정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전해졌다. 당시 발행된 각 신문에 게재된 기사 중, 경주국채보상운동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짐작할 수 있는 기사를 모아 살펴보았다. 경주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신문들을 취합해 정리하고 자문해준 (사)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와 최혁 연구위원께 깊이 감사드린다. -경주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기사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에서 찾아 볼 수 있어 국민이 담배를 끊어 그 성금을 상환해 독립의 기초적 실력을 튼튼히 하고자 전개된 이 운동은 1908년 초까지 전국으로 확산됐으나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좌절됐다. 이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한편,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1904. 7. 18~1910. 8. 28, 타블로이드판으로 6면의 일간지), 황성신문(1898. 9. 5~1910. 9. 14, 국권피탈 이전의 대표 일간지로 이 신문에서의 의연금 게재는 ‘국채보상의무금집송인원급액수’에 실림), 만세보(1906. 6. 17~1907. 7. 22, 천도교의 기관지로 창간됐으나 민중의 계몽에 창간 목적을 둠), 공립신문 등에 기사가 실렸다.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를 제일 먼저 보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다.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서가 신문에 실리자 이에 호응해 의연금이 신문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중앙의 여러 신문들이 국채보상취지서를 게재하고 국민들의 동참을 호소하자 전국각지에서 불길처럼 호응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 고종 역시도 동참하는 뜻으로 단연했다. 이렇듯 국채보상운동의 시작과 국채보상취지서, 의연금 명단 등과 관련된 소식들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채보상을 위한 모금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것. 특히 운동본부 역할을 한 대한매일신보에 가장 많은 기사가 실렸으며 다음으로 황성신문, 만세보, 제국신문의 순으로 보도됐다. 경주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기사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에서 찾아 볼 수 있었고 공립신문에는 보도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경주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어떤 내용들이 당시 신문들에 보도됐을까. -만세보 1907년 4월 27일자에 실린 ‘경주군 금연회사 설립과 취지서’ 금연회사설립, 경상북도 경주군 사는 전교리 이중구, 전참봉 최현식씨 등 수 십 인이 국채보상사에 대하여 금연회사를 조직했는데 그 취지서가 다음과 같다. ‘우리 금연 동맹이여! 일찍이 듣지 않았습니까. ... 우리나라 외채가 1300만원에 이르렀으니 지금 갚지 않으면 장차 갚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 국가의 수치와 백성의 치욕이 오늘이라도 닥칠 것인데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담배를 끊어 빚을 갚을 목적의 단체가 달부(대구)에서 만들어져서 서울에서도 모임이 이뤄졌습니다. 나라를 위한 소박한 정성이 궁궐에 닿아 대황제 폐하께서 담배를 끊으시니 무릇 우리 백성이 황송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 동포여! 이러한 사연을 한 번 전하고 두 번 전하면 천 명이 깨우치고 만 명이 깨우치게 되고 일 원 이 원이 모이면 몇 천원 몇 만 원이 되나니, 이러한 의무를 빨리 이루어서 우리가 스스로 가다듬을 기초를 회복한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광무 11년 음력 2월 5일’ -만세보 1907년 4월 28일자에 실린 ‘국채보상 의무를 다하려는 경주 군민들의 노력이 남다르다’ ‘경주 군민들의 국채보상 의무가 남다르다. 경주군 주민 여러 명이 국채보상의무금을 그 군의 금연회에 납부하니 그 의무심이 특히 열렬하다는데 강서면 김득철은 송아지 판 돈 일백 냥을 냈고 동몽 이성률은 올해 삼십에 고용임금 30냥이요. 양학봉은 가옥 2칸을 팔아서 가액 25냥이오. 강동면 김갑의 처는 떡을 판 돈 10냥이오. 강서면 정여복은 점을 봐주고 받은 돈 10냥이오. 내동면 구황리 한성문의 처 이씨는 은비녀 한 개요. 거창군 과객 허형두씨는 경주에 왔다가 국채보상하는 것을 듣고 짚신 판 돈 1냥을 마련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2일자에 실린 ‘관리에서부터 유생, 상인, 기생까지 모두 참여한 경주 국채보상’ ‘오늘의 기쁜 소식, 경주군 주사 김한은 씨가 국채보상의 일을 열심히 했는데 우선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고 경내의 상인들을 결탁하니 김덕헌, 김주복 등 단연을 동맹한 자가 30여 명이고 한편으로 선비 고을 우리 경주를 권기하여 국채보상동지회를 규합하였으니 같은 군의 관리와 기생 등도 각각 그 무리들에게 모이자고 연락해 의연금을 모집하는 자가 허다하다더라’. -황성신문 1907년 6월 7일자에 실린 ‘경주 각 동네, 기생과 무녀의 국채보상’ ‘경주군 단연상채회에서 김시권, 손명순 씨가 읍성 아래 각 동네 사람들에게 열심히 권유하고 지도해 제1회 모집의금을 대구상채회로 기송한 금액이 다음과 같다. 북정, 좌리, 황오, 노동, 북부, 동내, 황남, 나원, 성북, 보문, 서부, 재동, 성서리, 천북면, 손곡, 동문내, 청하 봉대면 광천리 이상 16동네의 합계 금 202환 64전. 남초상경중 합계 금 4환. 기생 옥련 몽금, 분향, 농옥, 금파, 기화 등 16명과 무녀 희이 1명 합계 금 18환. 이상 세 가지의 합계는 금 224환 64전’.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9일자에 실린 ‘화적들도 국채보상으로 양민이 되다’ ‘화적이 양민이 되다, 영천 경주 등지의 화적당이 도로에 방을 부쳤는데 ‘지금 국채보상에 대하여 귀천과 남녀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의연을 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들만 이와 같이 양민들을 침해하겠는가. 지금 이후로 우리들도 양민이 되어 국채를 보상하기를 원하니, 만일 이전과 같이 악행하는 자가 있으면 우리들이 함께 공격할 것이다’ 하였으니...’ -황성신문 1907년 5월 24일자에는 ‘소를 팔고 새경을 맡기고 가산을 변통해 국채보상을 한 소식’ ‘영남에서 온 사람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번 국채보상을 맞아 경주군 구강리 김득철 씨가 농사짓는 소를 팔아 40원을 준비했고 그 고을 강서면의 고용인 이동씨는 새경으로 받은 돈 6원을 주인집에 맡겨 놓았고 합천 사는 정사용 씨는 가산을 변통해 100원을 대구단연상채회로 보내 납부했다고 하니, 이 세 사람의 국민 된 의무는 과연 감탄하겠더라’. -대한매일신보에 가족과 개인 참여 기사와 경주군 상무소국채보상단연동지회의 참여 소식 실려, 황성신문에선 황남리 주민의 국채보상 참여 소식 알려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27일과 9월 13일자 등에는 부내면 황남리 김한근씨 가족의 납부소식과 경주 박인순씨의 납부 소식이 게재돼 있다. 또 1907년 5월 24일자에는 경주군 상무소결성회와 상무소국채보상단연동지회의 참여 소식도 실렸다. 황성신문 1907년 6월 21일자에는 경주 부내면 황남리 주민의 국채보상 참여를 알 수 있도록 주민들의 이름과 납부한 금액이 게재되었다. ‘김종헌 10환, 김기욱, 김기일 각 1환, 이규복, 백성채, 김우진, 이팔용 합 2환18전...’ 등으로 개인이나 여럿이서 합한 돈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대한매일신보 1908년 1월 9일, 2월 8일자에서는 ‘경주군 여러 면리의 납부’라는 제목으로 ‘1월 3일 경주군 각 면리 39환60전, 1월 4일 경주군 각 면리 59환42전...’ 등으로 납부했음을 실었다. 그리고 ‘경주 국채보상 의연금 서울 본부 납부’ 기사가 대한매일신보 1908년 월 30일자에 국한문판 기사와 한글판 기사 모두에 실렸다. 경주 국채보상금을 재무 임천식의 아들 임휘태가 서울 본부에 납부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밖에도 경주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기사가 더 실렸으나 지면에서 모두 소개하지 못했음을 밝힌다.
올해도 어김없이 삼일절(3·1 만세 운동)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는 103주년. 애국선열지사들의 고된 삶이 더욱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경주 독립유공선열의 명예를 선양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자 우리 후대의 막대한 책무다. 국가보훈처에 본적이 경주와 월성으로 서훈된 독립유공자는 2020~2021년 새로운 서훈자가 세 명 추가되면서 모두 56인이 되었다. 경주남부보훈지청 관계자는 “국가보훈처에서 경주지역 독립유공자를 경주시와 월성군으로 나눠 기록한 것은 1955년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고 외곽 읍면 지역이 월성군이 되면서 당시 유공자의 호적상 본적에 따라 경주와 월성으로 나눠진 상태 그대로 표기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국가보훈처 분류에는 ‘월성’과 ‘경주’로 아직도 나누어져 있고 56명 중 아직도 10명은 월성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 56인은 다음과 같다. 김만득, 김봉규, 김종철, 서달수, 손진형, 이순구, 장경탁, 정내영, 정수기, 황병기, 김기도, 김두오, 김민환, 김봉식, 김성권, 김성길, 김세종, 김은충, 김일성, 김재호, 김종호, 김철, 김필권, 김학봉, 김화섭, 노말수, 박문홍, 손경익, 손동창, 손문익, 손석봉, 손시헌, 손진창, 신동하, 양태원, 이대백, 이두만, 이무범, 이석채, 이인석, 이중근, 이치용, 이판득, 이홍석, 정을기, 조경규, 조근만, 채순봉, 최명표, 최상제, 최성렬, 최수창, 최완, 최준, 최해수, 허장환. 한편, 서훈 된 이들 중에서 실제로 경주 사람인데 다른 지역명으로 기재되었거나 혹은 본적이 어딘지 모르는 ‘미상’으로 기록돼 있는 14명의 경주독립유공자를 찾아내 현재까지 56명에서 모두 70명이라고 밝힌 이가 있다. 바로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혁 연구위원이 그 주인공. 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에서는 경주의 독립유공자 발굴과 선양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일련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재판기록이나 여러 자료들에서 그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 독립유공자로 반드시 서훈되어야 할 여덟 명의 경주 유공자도 발굴해냈다. 최혁 위원의 자문과 인터뷰를 통해 잃어버린 경주의 독립유공자 14명과 서훈되어야 할 8명의 선열들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정리해 보았다. 지면을 빌어 고향 경주로 돌아오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의 이름만이라도 호명해보았다
최근 두 폐사지가 지리했던 복원을 마무리하고 일반에 더욱 다가왔다. 원성왕의 원찰이었던 숭복사지(崇福寺址)와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이야기가 전하는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가 그것이다. 그 예전 영화를 누렸던 숭복사에는 양 탑의 기단부에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어 원찰의 위엄을 갖추고 있는 금당지 앞 두기의 탑과 석조 부재들이 남아있다. 교동 천원마을 주변의 너른 들판에 복원된 천관사지 아름다운 삼층석탑에도 따스한 온기가 더해졌다. 그러나 두 곳에서의 석탑들의 복원과 정비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이 교차했음도 숨길 수 없다. 두 폐사지는 예나 지금이나 말이 없다. 그저 후손들의 손에 그 정체성을 맡길 수밖에 없다. 숭복사지와 천관사지 모두 사람들의 발길이 오래도록 머물러 방문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위로처로서의 유적이 되길 바라본다. -경주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으로 5년여 천관사지 정비사업 진행 경주 천관사지는 도당산 기슭 논 가운데 있는 절터로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수 년째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제 복원 전의 그 천연덕스러웠던 풍광들은 사라져버렸지만 이내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을 것이라 생각하니 다소 위안이 됐다. 천관사지삼층석탑의 기단부와 몸돌 일부에는 석재로 훼손된 부분을 메꿔 놓았는데 최근 복원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른 겨울 저녁 찾은 천관사지의 주변 집들에서는 별들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이 ‘천관’의 애달픈 사랑을 따스하게 달래주는 듯 했다. 고려중기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에 천관사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청년시절 김유신은 기생 천관과 사랑에 빠져 지내다 어머니의 꾸중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 맹세한다. 어느 날 김유신의 말이 술에 취한 그를 천관의 집 앞으로 데려가자, 김유신은 말의 목을 베고 냉정하게 천관을 뿌리친다. 이를 슬퍼한 천관이 목숨을 끊었고 이후 김유신은 천관이 살던 집에 천관사를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빈다. 창건 이후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동경잡기에 고려 중기의 이공승이 천관사를 지나면서 지은 시가 전한다. 천관사는 2000년부터 수 차례 주변을 발굴 조사해 천관사 건물터와 탑의 터, 우물 등을 확인한 바 있다. 경주시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에 걸쳐 천관사지 정비사업을 진행했다. 15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건물지를 정비하고 석탑 복원, 탐방로 정비, 조경과 관람편의시설, 야간조명등 설치 등의 내용으로 복원정비사업을 한 것이다. 이와 함께 천관사지의 금당지와 강당지, 추정승방지, 문지 등의 건물지에 대한 주춧돌과 지대석들을 제 위치를 찾아 자리에 두고 잔디를 심어 천관사의 범위를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 주요 사업 골자였다. -천관사지 삼층석탑…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3층 옥개석의 진위 여부 때문에 한때 공사 중단되기도, 삼층석탑은 사각기단에 팔각탑이 올라가있는 이형탑(異形塔)으로 복원 특히, 천관사지 삼층석탑을 복원 중이었는데 천관사 탑도 2020년 복원 완공이 계획이었지만 복원 과정을 둘러싸고 학계와 경주시간 이견을 보여 준공이 늦어져 최근 마무리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3층 옥개석의 진위 여부 때문에 한때 공사가 중단되었던 적도 있었다. 결국, 남아있던 탑의 몸돌과 바닥돌 부재를 참고해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팔각형의 몸돌을 얹은 삼층석탑 1기를 복원했다. 이 탑은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연꽃 모양으로 된 점이 독특하다. 천관사지 석탑지는 8매의 지대석 위에 갑석(甲石)이 얹힌 상태로 탑의 하층 기단이 완전하게 확인되었다. 갑석 상면에는 각형의 2단 탑신받침이 평면 팔각으로 각출되어 있는데 받침의 형태로 보아 1층 탑신은 팔각이다. 따라서 탑의 전체 형태는 사각기단에 팔각탑이 올라가있는 이형탑(異形塔) 임을 알 수 있다. 옥개석(지붕돌)은 1매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상륜부의 보륜으로 추정되는 석물 1매가 건물지 1북쪽의 배수로에서 출토되었다. 천관사지 삼층석탑은 2층 방형 기단 위에 8각 3층 구조의 이형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최초로 나타난 형식이어서 주목받았으며 옥개석 또한 연화문이 새겨진 아름다운 형식의 팔각지붕으로 눈길을 끈다. -경주 숭복사지(慶州 崇福寺址)… 숭복사지동서삼층석탑은 부족한 부재 보충하지 않은 채 복원하고 기단부에는 이질적인 석재로 훼손된 부분 보완해 숭복사지는 괘릉(원성왕릉)에서 걸으면 거의 30여 분 걸리는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동쪽 토함산 자락에 위치한다. 숭복사지도 최근 복원과 정비를 마쳤다. 정비 후 예전에 비해 더욱 휑한 풍경인 듯 했다. 숭복사지동서삼층석탑은 여전히 부족한 부재를 보충하지 않은 채 복원공사 전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나 기단부에 이질적인 석재로 훼손된 부분을 메꾸어 놓은 것이 크게 달라진 점이다. 다소 불안했던 삼층 석탑의 구조도 조금은 안정된 모습이었다. 숭복사지 금당지 앞에는 감나무를 한 그루 남겨 두었고 남쪽 방향으로 두 기의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옛 사지 주변에는 초석과 사찰에 사용되었을 석재들이 정비돼 있고 금당지에도 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석재들이 남아있다. 정비 이전, 과수원 한 가운데서 나무에 둘러싸여있던 두 기의 석탑과 금당지는 그나마 확 트여 전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무너져있던 석탑이 지금의 모습으로 세워진 후 도괴의 위험이 있어 두어 번 유지보수작업이 있었지만 전면해체 복원작업이 2년여 이뤄진 것은 처음이었다. 복원 작업이 끝난 탑지 주변에는 허연 마사토가 뿌려져 있어 자연과 동화되었던 폐사지로서의 풍광은 사라져 버렸다. 언제쯤 자연스러운 풍광으로 자리잡을지 ‘멋’이 사라지고 없는 절터를 한참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숭복사는 괘릉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괘릉의 주인을 속시원하게 밝혀준 이곳은 선덕왕 이전 파진찬 김원량이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곡사, 혹은 동곡사였다. 조선 이후 이곳은 거의 잊혀지면서 숭복사라는 고유한 이름을 잃은 채 이곳 지명을 따서 ‘말방리절터(말방리사지, 末方里寺址)’라는 이름으로 전해왔다. 1931년 입실소학교에서 소풍을 왔는데 그때 깨진 비편을 발견하고 당시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있던 조선금석총람과 대조한 결과 이곳이 숭복사 터임이 밝혀졌다. 다시 숭복사의 정체성을 되찾은 것이다. -지금의 원성왕릉 자리에 있던 ‘곡사(鵠寺)’를 이곳으로 옮겨와 ‘대숭복사(大崇福寺)’로, 2014년 ‘초월산 대숭복사비’ 복원 숭복사지는 지금의 원성왕릉 자리에 있던 ‘곡사(鵠寺)’를 이곳으로 옮겨와 ‘대숭복사(大崇福寺)’ 라고 했는데 최치원이 절을 옮기게 된 배경과 과정을 ‘초월산 대숭복사비’에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숭복사비는 진성여왕 10년(896)에 세웠으며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이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숭복사(崇福寺)’는 원래 원성왕의 어머니인 소문왕후의 외삼촌이자 원성왕비인 숙정황후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 김원량이 창건한 ‘곡사(鵠寺)’에서 기원하였다. 그 뒤 원성왕릉을 곡사에 만들면서 사찰을 지금의 숭복사터로 옮겨 새로 세웠다. 후에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뵙고 사찰을 크게 수리하여 왕릉의 수호와 왕의 명복을 빌게 했다. 헌강왕 11년(885)에 절 이름을 곡사에서 숭복사로 바꾸고 다음해,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는데 진성여왕 10년(896)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일찍이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으며 비석을 받쳤던 쌍귀부와 비편 몇 조각만이 전하고 있었다. 이에 경주시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필사본으로 전해져오던 비문을 교감(校勘)하고 행렬을 맞추어 최치원이 짓고 쓴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글씨를 이용, 비문을 집자해 새겼다. 또 숭복사비의 쌍귀부는 일제강점기 때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관리되고 있는 원품을 그대로 복제했다. 없어진 이수도 고증해 2014년 금당지 남쪽에 비석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81cm, 비신의 높이는 204cm, 두께는 33cm, 폭 100cm다. 숭복사지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94호)은 숭복사 터의 금당지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쌍탑이다. 두 탑은 동일한 규모와 형태로 2층의 바닥돌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올렸으나 동탑은 2층 몸돌과 머리장식 부분이 없어졌고 서탑은 1층과 2층의 지붕돌만 남았다. 바닥돌의 위층 네 면에 2구씩 팔부신중상을 새겼고 1층 몸돌에는 문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의 아래 받침은 4단이다. -꼼꼼한 복원에는 미흡… 자칫, 경주시의 이중 예산 낭비로 이어질뿐더러 방문객의 불편을 초래하는 점에서 이번 복원의 한계 지적 한편, 이들 두 건의 폐사지 복원을 두고 시민들과 전문가들이 아쉬운 점을 몇 가지 꼽고 있다. 우선, 숭복사지 탑의 복원 시 서탑은 몸돌을 그대로 포개어두고 동쪽 탑은 그렇지 않은 것에서, 혹여 재복원의 여지가 제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몸돌을 포개놓을 것이 아니라 그 비례를 추정하고 찾아서 이번에 복원했어야 하며 또 몸돌과 옥개석 사이에 간격(구멍)이 보여 꼼꼼한 복원에는 미흡하다는 것. 이는 자칫, 경주시의 이중 예산 낭비로 이어질뿐더러 방문객의 불편을 초래하는 점에서 이번 복원의 한계를 지적했다. 천관사지 탑의 경우도 옥개석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데 진위 논란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도 아쉬운 대목으로 꼽았다. 추후에라도 진위가 명확히 밝혀진다면 박물관 석재를 사용해 복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두 복원지의 석탑 기단부를 기존의 탑재와는 다른 석재로 보완해 메꿔 복원해 보기에 불편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 시민은 “복원의 흔적을 남기고 후대에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유럽 석조건물의 경우, 전체가 큰 석조건축물이어서 다른 석재로 복원했음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작은 석조물인 탑의 경우엔 복원 시 다른 재질과 색으로 복원해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겁니다. 커다란 석조 건물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봅니다. 수 백 년이 흘러도 얼룩덜룩한 지금의 모습으로 남을 것인데 차라리 비슷한 재질과 색깔의 석재로 기존의 탑재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복원했으면 좋았겠습니다” “복원 전후를 굳이 알리고 싶었다면 작은 안내판에 복원 전후의 사진으로 비교해 모습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이왕 복원하려면 예산을 충분하게 확보해서 한꺼번에 제대로 해야하는데 이중 삼중의 복원경비와 과정에서의 불필요한 낭비를 우려한 의견들이 많았다.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다. 카페 바흐는(CAFE DE BACH). 경주 하동에 있는 카페 바흐에선 여기저기 비치돼 있는 책을 읽어도 좋고 투명한 유리창 너머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봐도 좋다. 코로나로 말이 단절된 상황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연결해 주는 카페 바흐는 사람과 사람 사이 끊긴 이야기를 이어주고 ‘느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안식처로 여겨지고 있다. 방문자들과 다각적인 문화 마인드로 접근해 온 카페지기 최병한 대표는 음악 카페라는 정체성에 부합하면서도 연중 독서토론, 작은 음악회, 인문학 강좌, 영화 감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2016년 1월 개업한 이후로 지난 6년간 카페 바흐의 작은 공간에서는 수시로 음악회가 열리고 작은 공연들이 이어졌었던 것. 이 공간에서 유명 예술가들의 내밀한 스토리를 엿볼 수 있는 이색 전시가 열리고 있다. 최병한 대표의 오랜 지기인 최부식(시인, 전 경주문화원 이사, 전 포항 MBC편성제작국장)씨의 소장전 ‘예술가들의 사적인...’전이 오는 2월 26일까지 열리는 것이다. 최 시인은 미술애호가로서 전국에서도 컬렉터로 손에 꼽힐 정도다. 최 대표는 음악 카페를 운영할 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고 최 시인은 미술 전반에 전문적 애호가니 그 하모니는 말 할 필요가 없겠다. 음악과 미술의 콜라보인 셈인데, 두 고수의 만남으로 최근 이 공간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카페 바흐에서 2월 26일까지... 전직 PD 출신 최부식 시인의 36년 컬렉션 소장작 중, 예술가들의 편지글 한 자리에서 감상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최부식 시인은 전직 방송 PD였다. 그림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안목으로 36년 간 컬렉션 한 이로 지역에서는 컬렉터로도 그 이름이 높다. 1984년 방송국에 입사해 문화 다큐멘터리와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미술과 컬렉션에 눈을 떴다. ‘겸재 정선, 청하의 가을을 보다’, ‘경술국치 백년, 석굴암 100년의 진실’ 등 지역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찾는 다큐를 제작하면서 그의 그림 수집은 가열차졌다. 그림에 미쳐 녹록치 않았던 월급쟁이 컬렉터로서의 어려움, 강요배 화가의 작품을 보고 너무 좋아 화랑에 통사정해서 할부로 사게 된 사연, 해외 인터넷 미술경매에 참여해 사게 된 작가들의 작품이야기 등 그의 컬렉션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끝이 없다. 그의 작품 구매 패턴과 영역은 세계 곳곳에 걸쳐 있었다. 그가 소장한 에곤 실레 등의 작품들 면면이 이를 방증한다. 또 그간 해외를 다니며 박물관이나 헌 책방, 음반가게를 뒤지며 만난 소장품들도 많다. 1989년 방송국 재직시절, 도굴꾼들을 다룬 다큐로 받은 상금으로 해외 여행길에 올랐다. 런던과 파리, 스위스를 여행하다가 런던의 음반 가게를 뒤지다 우연히 음악가 윤이상의 사인이 들어 있는 LP 음반을 보고 바로 구입한 것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또 헌책방에서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 저자 사인본과 드뷔시의 ‘녹턴’ 악보 초판본을 손에 넣으면서 색다른 컬렉션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피카소의 드로잉 모음 스케치북, 드뷔시의 녹턴 초판 악보 등이 함께 전시된다. 그간의 컬렉션을 펼친 소장전으로는 2016년 포항시립중앙아트홀에서 ‘최부식 소장전-그림과 시인’ 컬렉션전을 열어 주목 받은 바 있다. 애지중지하던 그의 소장품을 공개한 것이다. 2021년 7월, 제주도 갤러리 누보에서 ‘최PD의 그림 중독-에곤 쉴레에서 강요배까지’전에서는 에곤 쉴레, 르 코르뷔지에, 마티스, 마네, 장 꼭또, 루이 이까르 등의 해외작가와 변시지, 강요배, 김구림, 남관 작품 등의 국내 작가를 포함한 총 30여 점을 전시했다. 2021년 6월에는 100년 ‘황남정미소’에서 40여 점을 특별 전시했으며 10월, 갤러리 카페 화에서도 전시 한 바 있다. 모두 지역 주민과 함께 나누기 위한 전시였다. 카페 ‘바흐’에서는 이번이 두 번째 전시. -예술가 생가나 박물관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진귀한 전시... 르누아르나 밀레 편지글은 미술시장에서도 보기 힘들고 국내에 소개된 예도 거의 없어 최 시인은 “카페 바흐 오픈 6주년을 기념해 ‘늘 향기로운 친구인 최 대표의 친구로서 축하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 전시를 제안했습니다”라며 예술가들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부분에서의 소장품을 모아 전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마침 유명 예술가들의 친필 편지를 모아 두었기에 선별해 전시할 수 있었던 것. 편지글들은 일일이 번역을 의뢰해 친절하게 해석해 두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밀레의 판화작품과 친필 편지글 등 네 점, 쇼스타코비치 편지글, 오펜바흐의 글씨, T.S.엘리어트 타자 편지글과 사인, 르누아르 편지글, 샤를 구노 작곡가의 편지글, 로댕의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느낄 수 있는 친필 편지글, 생상스의 편지글, 루빈스타인 지휘자의 초상 판화, 윤이상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LP 음반(윤이상은 경주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한 이로도 유명) 등이다. 친필 편지글들의 경우, 예술가의 생가나 박물관에 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진귀한 전시가 아닐 수 없다. 예술가들의 친필 필체를 음미해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특히, 르누아르나 밀레의 편지글은 미술시장에도 잘 나오지 않으며 국내에 소개된 예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간 소장자가 발품 팔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공수 해온 작품과 자료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최 시인의 공력에 감사할 뿐이다. -아래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예술가들의 편지글들이다. -르누아르(1841~1919) ‘친애하는 위세나에게. 내일 밤 저녁 식사를 저와 함께 가실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시다면 매력적인 몽마르뜨 극장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당신이 거부하지 못할 만큼 멋진 계획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신의 친구, 르누아르’. -T.S. 엘리엇(1888~1965), 1951년 4월. ‘카펜터 씨에게. ...당신의 시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보내주신 시는 다른 출판사에도 읽어보라고 보냈습니다. 이후, 저는 건강상의 이유로 일하는 것을 벗어나 쉬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가 매우 인상적이기는 하나, 그 시들은 매우 높은 비용과 적은 수요로 인해 우리가 시 목록을 한도 내로 제한해야 하기 때문에 저희로서는 이 시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까미유 생상스(1835~1921), 1885년 5월 24일 파리에서 쓴 편지. ‘...만약 콘서트 일정을 바꾸실 경우라면, 정해진 일정보다 좀 더 늦게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정보다 앞당기면 제가 안 되는 것은 코믹오페라가 다가오는 계절 초입에 내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고 파리 극장들은 늘 일정이 지연되는 경향이 있어서입니다...’ -로댕(1840~1917), 1913년 2월 11일 편지. ‘부인, 사과를 해야겠습니다. 지난 일요일 2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워크숍이 있어서 라투르 레스토랑에 있습니다. 기억력이 감퇴하고 있나 봅니다. 부인의 방문을 제가 놓쳤네요. 부디 용서하세요’ -샤를 구노(1818~1893) 1983년 11월 5일 편지. ‘사랑하는 나의 작은 친구여. 추억을 위한 멋진 징표와 당신에게 키스할 수 없었던 저의 수천가지 걱정과 후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비그니의 건강으로 인해 고문 받는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서둘러 그리고 슬픔을 담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1954년 11월 1일 모스크바에서 쓴 편지. ‘당신에게 이런 부탁을 드려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것을 E.A.Mravinsky에게 전달 바랍니다. 큰 부탁을 드리게 되는군요. 용서하세요. 마음을 담아, 쇼스타코비치’ 이런 서간문 이외에도 샤걀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 판화, 1965년 샤갈의 자화상을 커버 사진으로 해 친필 사인이 표기 돼있는 ‘타임’지,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 그림 그리고(주로 스케치) 편지 쓴 것을 책으로 묶은 서화집(1951년, 프랑스), 보자마자 바로 구입한 피카소 화첩(1948년 프랑스), 드뷔시 ‘녹턴’ 1900년 초반 초판 악보, 샤갈 화집, 로댕 화집, 밀레 화집 외에도 폴 새그뉴, 프랭클린 화이트의 회화 등도 전시하고 있다. -“경주에서 저희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문화적 기쁨을 나누는 것으로 행복합니다” 전시를 제안한 최부식 시인은 “최 대표는 문화의 본 무대 뒤켠에서 여러 루트를 통해 문화예술의 지평을 넓히고 문화 운동을 부흥시키고 있는 친구입니다. 지켜보고 응원하다가 다르게 나아가고자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이야기 거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미흡하지만 제 소장작들 중에서도 ‘예술가의 사적인,,,’ 전을 준비했습니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최병한 대표는 “지난 2년간은 코로나로 정례적으로 해오던 행사를 하지 못해서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기쁨을 주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음악 들으면서 작품도 감상하니 미술과 음악이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손님들이 너무 좋아하십니다.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죠. 친구가 좋은 작품을 많이 소장해서 가능한 일이지요. 경주에서 저희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문화적 기쁨을 나누는 것으로 행복합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은 각각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 전문가적 수준의 경지에 있는 이들이라 믿고 감상할 수 있는데다, 카페 공간이니 누구나 쉽게 들러서 감상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예술가들의 사적(私的) 은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번 전시를 놓치지 마시라.
바다와 가장 가까운 성당이 경주에 두 곳 있다. 경주 양남성당(주임 서준영(라파엘) 신부)과 감포공소(허연구(모이세) 신부)는 두 곳 모두 각각 양남면과 감포읍의 동해 푸른 바다를 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국제통상마이스터고(구 감포고등학교) 입구와 같은 길을 사용하고 있는 감포공소는 개항 100년 감포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고 양남면 주상절리와 월성원자력공단 사이 언덕위에 위치하는 양남성당은 바로 지척의 나아리 바다를 조망 할 수 있다. 드라마에도 등장한 적 있을 만큼 천혜의 풍광을 끼고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물론, 두 성당은 마치 형과 아우처럼 본당과 공소로 지역민의 위로처로 역할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8일, 평소에도 눈여겨 보아두었던 아름다운 두 성당을 찾았다. 특히 감포공소에서의 허연구 신부님과의 인터뷰는 두 성당의 스토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노사제(老司祭)인 신부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양남성당...드넓게 펼쳐진 청정 나아 동해바다의 절경이 발아래, 1995년 준공 양남성당은 경주시 양남면 양남항구길 103-4에 위치하며 양남면 주상절리와 월성원자력공단 사이 언덕위에 있다. 이 성당에선 드넓게 펼쳐진 청정 경주 나아 동해바다의 절경이 발아래서 펼쳐진다. 양남성당 관할공소로는 감포공소가 있다. 양남성당은 1983년 2월, 신자들의 최초 모임 이후 1983년 가정공소 예절을 시작으로 1984년 양남공소로 정식 인준 받는다. 1987년 양남성당 신축 계획 및 부지를 매입해 1994년 4월, 양남성당 공사를 착수한다. 이듬해 1995년 양남성당은 준공되었고 1997년 양남본당으로 승격돼 초대주임신부로 박홍도 치릴로 신부가 부임했다. 1999년 교육관을 준공하고 1999년 감포공소 건립 계획 확정과 기금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2000년 제2대 정춘석 아우스딩 신부가 부임하고 2001년 ‘엠마오(교육관)’ 피정 공간을 확보했다. 2001년 실외에 14처를 준공하고 2002년 성당 내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다. 2003년 제3대 태진석 세레자요한 신부가 부임했고 2005년 9월, 감포공소가 준공됐다. 현재 서준영 라파엘 주임신부가 양남성당을 이끌고 있다. -‘십자가의 길 14처’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갖추고 있는 작지만 옹골찬 성당 양남성당 내부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매서운 겨울대기가 성당 가득 매콤한데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오전의 겨울햇살은 투명하게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푸른빛이 다양하게 투영된 성당은 영적 정신성을 더욱 깊게 반영하는 듯 했다. 어렵지 않게 그려져 있는 벽화는 성화를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제대 뒤에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비해 제대 전체를 감싸고 있는 성전이었다. 뚜렷한 원색의 스테인드글라스 또한 친숙한 성화로 표현하고 전체적으로는 푸른빛이 돌아 신비롭게 보였다. 성당 입구로 오르는 좌측에는 예수상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매운 한파에 시달려 잎사귀가 불그레해진 동백은 그래도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엠마오(Emmao, 교육관)’ 공간 옥상으로 오르니 앞바다가 바로 지척에서 펼쳐졌다. 성당 마당은 넓었고 입구서부터 제1처가 시작돼 정원을 가로질러 예배당까지 제14처까지 ‘십자가의 길’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신자들과 방문객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도 마련돼 있다. 양남성당은 전국의 본당 중에서도 규모가 작아서 아담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자그마한 공동체다. 그러나 14처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갖추고 있는 옹골찬 성당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동해바다가 지척인 전망 좋은 곳에 있어서인지 여름에는 피정 등으로 외부 손님이 넘쳐난다고 한다. 한편, 해안가에 인접해있어 매년 태풍의 피해가 잦은데 지난 2020년 9월엔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으로 인한 피해가 더 컸다. 성당이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파도로 인한 피해는 없었지만 강풍을 고스란히 맞았던 것이다. 연이은 태풍으로 식당뿐만 아니라 성당 창고, 사무실 등이 파손됐었다. 성당 식당과 창고, 사무실 등 복구에 큰 비용이 필요했지만 양남본당 신자들은 한뜻으로 마음을 모아 함께 복구를 했다고 한다. -양남성당 감포공소...“제가 있는 동안 감포공소가 본당이 될 수 있도록 전념할 생각입니다” 경주시 감포읍 감포로12길 19-8에 위치한 감포공소는 신자들의 피정(避靜) 장소로도 추천될만한 곳이다. 감포항은 물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송대말 등대도 한 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일품이다. 개항 100년의 감포항을 이렇게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이 성당의 위치를 따라올 장소는 없다. 1980년대 두 명의 신자들로 시작된 이곳 감포공소는 다른 공소에 비해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천주교’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곳에서 당시 소속인 성동성당까지 매 주일 미사 참례가 힘들어 함께 공소예절을 하게 되면서부터 성동성당 주임 신부로부터 ‘감포공소’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천주교’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이곳에서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공소예절을 거쳐 미사를 봉헌하게 되면서 차츰 신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그러나 그 건립과정이 순탄치 못했는데 1980년대 부지를 구입했지만 들어오는 입구가 감포중학교 소유인 탓에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자들의 간절한 바람으로 2004년 다시 공사가 시작되었고 드디어 2005년 9월 최영수(요한) 대주교 주례로 감격스러운 봉헌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공소는 코로나로 일 년간 미사조차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절망스런 상황속, 이 성당에 감포 본당 설립을 위해 부임한 노사제가 있다. 허연구 모이세 주임신부는 지난해 2021년 3월 1일자로 이곳에 부임했다. 감포공소는 신부가 있어도 신자가 한 두 명에 그친 공소였으니 사제들도 선뜻 자청하는 곳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부가 된지 56년째인 올해 89세의 신부는 스스로 ‘노사제’라 자칭한다. 허 신부는 사제생활 50년 동안 가톨릭농민회와 노동운동에도 헌신해왔던 사제로서 청소년사목 활성화를 위해 전 사재를 털어 대철장학회를 설립하고 바른 청소년 성장을 돕기 위한 물질적·정서적 지원에 기여하기도 했던 이다. 허 신부가 아무도 없는 이 공소에 온 후부터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성모상 주변을 정비하고 스산했던 마당에 잔디와 꽃들을 심어 정성껏 가꾼 외적 변화 이외에도 전국에서 신자들이 이곳으로 찾아오는 것인데, 아마도 헌신적인 사제로서의 삶을 실천하고 살아온 허 신부의 영향력의 방증인 듯 했다. 허 신부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호흡하고 살며 이곳을 감포의 또 다른 명소로 가꾸고 더 큰 교회로 성장하도록 기도한다. “주교님께 간청했어요. 주교님 이하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이곳에 자청해서 왔습니다. 저는 은퇴 20년이 지났지만 자원해서 기꺼이 이곳으로 왔습니다. 양남본당에 속하는 감포공소를 본당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처한 것입니다. 내년에는 사제관을 만들 예정입니다. 제가 있는 동안 감포공소가 본당이 될 수 있도록 전념할 생각입니다” -대구대교구에서는 유일하게 감포‘읍’이지만 양남‘면’에 속하는 감포공소, “아름다운 공간을 공개해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우리 성당은 원합니다” “1984년 경주 성동본당에 있던 박도식 신부가 감포 성당 터와 양남성당 터, 모화 성당 터를 마련하셨습니다. 2005년 이 성당 건물 70평을 지었고 월성원자력공단이 있던 양남면에 25년 전 양남성당을 지었었지요. 당시 양남성당엔 신자들이 300명이 넘었고 월성원자력공단 직원과 가족들이 그 성당 주 신자들이었죠. 한편, 감포엔 부지는 사두었지만 교우들이 없어서 공소로 역할 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러니 교우들이 모이는 장소로서의 ‘공소’였습니다” 신부가 상주해야만 본당이 될 수 있는데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대구대교구에서는 유일하게도, 감포읍이지만 양남면에 속하는 공소가 된 것입니다. 2005년 준공 후 지금까지 면 단위에 속한 읍 단위의 공소지요” 감포를 찾는 많은 이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것을 알고 성당 입구에 ‘감포성당’이라는 안내표지판을 내건 것도 허 신부의 전략이었다. 자연스레 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점차 성당의 존재도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 공소가 활발했을때도 신자는 20명이 넘지 않았다고 한다. “제가 부임했던 지난해만해도 코로나로 신자가 더욱 줄어들어 3~4명에 불과했고 그야말로 황폐일로의 공소였습니다. 지금은 17명으로 늘어났고 앞으로는 더 늘어갈 것이고 교회도 발전할 테니 보람있는 나날이지요. 노사제가 여기 와 있으니 제가 옛날에 세례를 줬던 교우들이 전국에서 찾아오고 있어요(웃음)” 허 신부는 이곳 공소의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일반인에도 널리 알리고자 한다. “아름다운 공간을 공개해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우리 성당은 원합니다. 봄이 되면 이곳 감포공소가 더욱 아름다워질 겁니다. 코로나가 조금 누그러뜨려지면 50~70명 정도로 신자를 늘이고 싶어요. 지역사회에서 문화적 사업에도 참여해 성당의 외연도 확장시키고 싶습니다.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건강하게 변화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 밑거름 역할을 할 것입니다. 가장 버려진 땅에 단단한 반석을 다져놓고 싶은 거지요. 힘닿는데 까지 일하려하니, 저를 도와주는 발길이 이어지고 기쁘고 감사한 일이죠” 감포공소는 일반인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도 환영한다. 감포공소의 미사시간은 주일 오전 11시, 토요 특전미사 오후 7시 30분, 평일(화, 목)오전 11시, 평일(수, 금) 오후 7시 30분이다.
‘해녀들의 하루 시작은 늘 푸르른 바다를 가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바다에 묻는다. 오늘 하루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지, 지연에서 주는 선물을 기꺼이 수확해도 되는지. 바다만 나를 받아준다면 언제라도 힘을 낼 수 있다’ -해녀 이정숙의 ‘해녀의 바람’中 연동마을은 경주시 감포읍 오류리에 속한다. 오류1리는 선창, 2리는 척사, 3리는 오류, 4리가 연동이다. 우리에게 연동마을은 경주에서 유일하게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 연동마을에 아름답고 원숙한 인어 모녀가 살고 있다. 연동에서 20년간 나잠어업(裸潛漁業, 해녀들이 특별한 산소호흡 장치없이 바다에 잠수하여 해산물을 캐내는 어업)을 해 온 해녀 이정숙(52)씨가 그 주인공이다. “해녀 안했으면 어쩔뻔 했어요? 다른 일은 잘 하는 게 없어서 아마 구박 받았을걸요?”라며 환하게 웃는 그녀는 감포읍 100여 명 해녀들 중 가장 젊은 해녀다. 그녀는 물질은 물론, 해녀와 관련한 이야기는 죄다 모으고 구체화하는 작업까지 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 잔잔한 바다와 따사로운 햇살, 그리고 바다 속에서 만나는 작은 생명들과의 눈맞춤은 오늘도 해녀 이정숙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의 풍경이다. 집 앞 1분 거리의 바다에서 마을 해녀들과 물질을 해대는 그녀는 연동마을 해녀들 중 최연소 해녀이지만 작업에서만큼은 고수다. 베테랑 해녀인 어머니(김순자, 74)의 딸답다. 2대째 해녀 일을 하는 그녀. 최근에는 남편에게도 물질을 권유한다는 정숙씨는 천상 ‘해녀’가 천직이다. 지난해 문을 연 ‘연동사랑방’은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감포 해녀들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으로 미니해녀박물관, 해녀의 일기, 연동행복다방, 연동사진관, 조개색칠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갖추고 한 걸음씩 감포 해녀의 역사와 행보를 알리고 있는 곳이다. 지난 7일, 겨울바다 내음 가득 실은 햇살 밝은 연동사랑방에서 감포 바다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하는 해녀 이정숙씨를 만나 어머니에 이어 이제는 그녀의 딸까지 함께 이어가는 해녀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아껴 지역사회 발전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해녀가 감포읍 연동마을에 살고 있었다. 억척스럽다거나 신산하고 고된 삶의 표상쯤으로 이미지화된 해녀는 이제 그만! 반전의 해녀 이정숙은 달랐다.
‘식집사’를 아시는지. 식물과 집사의 합성어로 반려식물을 키우며 기쁨을 찾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집사 같은 자세로 반려식물 시중을 든다는 의미로 코로나로 집콕 생활이 길어지고 ‘코로나 블루’가 일상을 힘겹게 하면서 식물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반려동물처럼 식물을 돌보고 가꾸는 반려식물이 등장한 것인데, 정서적 안정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자연 친화적이고 편안한 분위기를 위해 실내 곳곳을 식물로 꾸미는 ‘플랜테리어(식물(plant), 인테리어(interior))’의 인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최근 1~2년 사이 더욱 확산되고 있는 이 트렌드는 이제 일상적 현상이 됐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식물업계에서 재테크 대상으로까지 번진 이른바 희귀식물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짭짤한 부수입을 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 식물의 가격 기준은 단연코 희소성과 아름다움이다. 희귀식물 ‘레어템(희소한 아이템)’으로 소문나면 금세 팔려나간다. 경주에서도 유일하게 희귀식물을 키우면서 용황동에 식물카페를 연 선두주자가 있다. 식물카페 ‘아단소니’의 최윤정 대표가 그 주인공. 최윤정 대표는 2010년 대구매일 신춘문예에 최연소 당선자로 등단(당시 32세)한 경주 문단의 총아기도 하다. 지난 2일, 천부적인 문재를 지닌 문인으로 살면서 식물카페도 열어 누구보다 일찍 희귀식물을 접했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린그린’한 식물의 세계에 ‘풍덩’ 홀릭했던 시간이라 올 한해를 더욱 푸르게 각색해줄 것 같았다. -경주서 희귀식물 카페를 겸하는 공간으로는 처음...희귀식물은 검역단계에서 차단되는 수입 금지품목이라 더욱 가치 높아 도심 속에서 만나는 색다른 이색 공간인 이곳에 커피 마시러 왔다가 ‘풀멍(풀을 멍하게 쳐다보며 휴식하는 것)’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주로 울산, 부산, 대구 등 인근 도시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 오후 네 시경까지는 손님들이 북적이다가 오후 다섯시경 부터는 다음날 팔 것, 다음 달 팔 것, 내년에 팔 것 등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 같은 업종은 서울 경기권에는 있으나 충청 이남으로는 거의 없는 편이어서 이곳이 중간 지점 역할을 해 전국구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이전에는 희귀식물을 파는 꽃집으로 장사하는 집들이 있었으나 카페를 겸하는 공간으로는 저희가 처음이었죠. 굳이 식물을 사지 않더라도 사진으로만 봤던 식물들을 보고 직접 볼 수 있어 편안하게 커피 한 잔을 곁들이면서 감상하시곤 해요. 커피를 마시면서 이 공간에 머물 수 있고 구매 가능한 식물이 눈에 들어오면 구매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취미생활을 하다가 저처럼 생업으로도 연결되기도 해요” 최 대표는 20년 전인 2000년 초반부터 집에서 일반 관엽식물을 키우다가 SNS에서 식물을 좋아하는 동호회 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모르는 식물이 거의 없게 됐다고 한다. 당시 지역에선 다육식물이 거의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고가의 희귀 다육들을 멕시코 등지에서 소량 수입해서 팔기도 했다. 찾는 이에 비해 수입하는 이가 없어 사진으로만 봐온 이들이 실제 구매로 이어지니 반응이 뜨거웠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우연하게, 일반 화초보다는 고가였던 식물을 알게 되었으나 당시 사람들은 희귀식물의 가치를 모를 때였다. “최근 4~5년부터 조금씩 매니아 층이 형성되기 시작했어요. 저는 3년 전부터 희귀식물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코로나 직전, 혼자 집에서 키우고 조금씩 사고 팔았어요. 마치 중고물품 거래하듯요. 그때는 이 시장 자체가 그런 분위기였어요” 희귀식물은 ‘바나나 선충병’이 있는 식물군으로 검역단계에서 차단되는 수입 금지품목으로 이제는 수입할 수 없다. 금지품목 이전에 들여와 서로 사고팔던 식물들이 번식돼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수입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치는 오르고 수요는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지난 4월에 ‘몬스테라 보르시지아나 알보 바리에가타’의 한 마디(잎 한 장)를 45만원에 판매했는데 지금은 80만원에 거래되고 있어요. 딱히 권장가가 정해진 것은 없으나 자연스런 시장 경제 흐름에 따라 가격이 정해집니다. 초창기엔 가격 변동의 폭이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당시 가격과는 큰 차이가 있는 품목도 있구요. -돌연변이로 생긴 하얀색 무늬가 특징인 몬스테라 ‘알보’가 가장 인기...잎 한 장 당 80만원 정도에 거래되고 한 포기 완전체가 1500만원에 거래되기도 에피프레넘, 라피도프라, 필로덴드론, 몬스테라 등 종은 무척 다양하다. 종마다 가장 고가의 식물이 있기 마련인데, 몬스테라 중에서는 ‘알보’가 가장 인기 있다. 큰 잎에 구멍이 나거나 갈라져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는 열대성 관엽식물인 몬스테라 알보는 잎 한 장 당 80만원 정도에 거래된다. 원래 몬스테라는 초록잎이 정상이지만 돌연변이로 생긴 하얀색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흰 무늬가 많을수록 비싸지만 흰색 부분이 너무 많으면 가치가 떨어진다. 흰색부분은 자체 광합성이 되지 않아 초록색의 광합성으로 흰색부분의 생장을 유지시키기 때문에 흰 부분이 너무 많아지면 결국은 까맣게 녹아서 잎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결국 가치가 떨어지므로 흰색과 초록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야 가격유지가 된다. 최근 희귀식물을 찾는 수요가 폭증해 알보의 경우, 두 배로 올랐고 다른 식물들은 코로나 초기 갑자기 폭등했다가 너무 많은 이들이 키우고 잘 자라서 되팔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유일하게 알보만 아름다운 무늬 때문에 가격이 유지되고 있는 것. 한 포기 완전체가 1500만원에 거래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곳은 특히 알보가 많기로 유명하다. 종류나 가격대가 다양한 것은 물론, 하프(반반) 무늬, 산반(무늬가 흩어진듯한)무늬 등 무늬가 약하거나 좋은 다양한 종류와 작고 큰 알보로 가득하다. 알보는 관엽의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로 관엽의 여왕이다. 초창기부터 1위였고 지금도 1위로, 부동의 1위다. 몬스테라 보르시지아나 알보 바리에가타는 좋은 잎 한 장에 80만원 정도다. 봐서 예쁘면 비싸다. 독보적으로 아름다우면 한 장 당 150만원 정도라고. “식물이 하는 일을 사람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무늬를 낼지는 식물의 마음인거죠. 알보가 가격이 오르고 유지되는 이유는 번식을 해서 열 개로 만들어도 각기 다르게 자란다는 겁니다. 항상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키우다가 무늬가 좋지 않으면 되팔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무늬를 내며 자라주면 너무 행복한거죠. 그래서 ‘식멍’이라고도 해요. 예쁜 무늬를 가진 잎을 바라만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거죠. 하하” -한 두 종 키우다보면 자연스레 커뮤니티 형성되고 상호 교환 통해 종 늘리다보면 자신에 맞는 종 알게 돼 “초보자들에게는 굉장히 무난하고 착한 식물인 필로덴드론 종을 권하고 싶어요. 이 종은 잘 키우든, 못 키우든 버티는 애들이라 첫 도전에 적합하니까요. 키우기 쉽고 가격이 높지 않고 예뻐서 키우는 재미도 있고 사고팔기도 쉬운 종입니다” 한 두 종 키우다보면 자연스레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새로운 식물을 알게 되면서 상호 교환도 하고 종을 늘리고 키우다보면 자신에 맞는 종을 알게 된다고 한다. 이 식물의 최적의 조건은 환경적 영향 보다는 종 자체의 모체가 얼마나 훌륭한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아름다운 모체에서 커팅된 개체는 다음에도 아름다울 확률이 높은 것이다. 좀 더 아름다운 무늬를 내기 위한 인위적 장치들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질소 성분이 많은 비료는 엽록소 활동을 돕기 때문에 알보의 경우 하얀 무늬가 적절한 것이 아름다우므로 질소 비료는 주지 않아야 하는데 흰 잎이 지나치게 많아 생장이 위험하면 질소 비료를 투여해 초록의 비율을 늘리기도 한다. 또 잎의 성장을 돕는 식물생장등으로 보완하기도 한다. -이곳 찾는 손님의 99% 정도는 타지역인, 3월에는 현곡면에 본점 이전해 오픈하고 지금 이곳은 분점으로 운영 거의 모든 종을 가지고 있는 이곳에는 몬스테라, 에피프레넘, 라피도포라, 일반관엽, 안스리움, 베고니아, 칼라데아 등을 구비하고 있다. 이들의 잎 한 장당 가격 폭은 넓다. 10만원 이하에서 수 백 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 카페를 오픈 한 지 1년 반인 이곳을 찾는 손님의 99% 정도는 타지역인이다. “경주 사람은 1% 정도인데 그나마 막 입문한 제 지인들이죠. 경주에서는 저와 무관하게 희귀식물을 키우는 이들이 몇 사람 밖에 없어요. 일 년 키우면 잎이 열장이 되니 가격이 유지된다고 봤을 때 큰 이득이죠. 물론 처음 구입할때는 다소 고가라서 도전하기를 망설이지만 수입과 연계된 취미생활을 즐기는 측면에서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봐요. 저도 그렇게 시작했고요. 이렇게 본격적으로 장사할 생각은 없었어요. 올 3월에는 현곡면에 본점인 이곳을 이전해 오픈하고 지금 이곳은 분점으로 운영하기로 했어요” -“고가의 식물이므로 구매자가 키우다가 당황스러운 일은 저희도 만들지 않습니다” 문인활동도 병행하고 있는 그녀에겐 식물이 곧 훌륭한 글감이 되곤 한다. 그녀는 “이건 일이고 시는 시였는데 요즘은 자연스레 창작활동과 연계되더라구요. 새 잎을 내고 다양한 모습으로 번식하는 것을 보고 생명에 대한 시상을 옮겨 시로 표현해보았죠”라고 했다. “지금 당장 식물초보자가 취미생활도 하고 재테크도 하겠다면 사전에 온라인으로 공부하거나 저희 가게 등에 직접 오셔서 정보를 얻으면 됩니다. 구매시 기본적으로 고를 수 있는 식물을 자세한 설명과 함께 판매하고 분갈이에 서툰 이들에게는 분갈이까지 해드립니다. 사후 케어까지 진단해 드리고 자세한 생장에 도움 될 수 있는 세세한 방안을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판매한 식물들은 끝까지 책임지려 합니다” 무늬 종의 경우 무늬가 그 식물의 가치와 금전적인 수준을 결정하므로 양호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식물은 애초에 팔지 않는다고 한다. “고가의 식물이므로 구매자가 키우다가 당황스러운 일은 저희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예측가능한 범위 내에서 문제가 있을만한 식물은 팔지 않고 좋은 무늬가 나올 것 같은 식물만 팔고 있습니다. 교환의 책임은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거죠”
경주 보문관광단지 내 육부촌, 보문탑, 호숫가 오래된 호텔들, 쇼핑센터였던 상가들...이들 건축물들은 1979년 조성됐다. 이들 건축물은 화려하고 웅장한가하면, 때론 단촐한 한옥 형태로 1970년대 당시의 건축양식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특히 단지 내 상가건물들은 수년째 비어있음에도 사람들이 유유자적 산책하고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는다. 현재 보문상가에는 13개 동에 34개 점포가 남아 있는데 적당하게 잘 발효된 술처럼 건물과 주변 경관은 중앙의 아름다운 물길과 함께 잘 스며들어 어느새 심미적 감상자가 되게 한다. 한편, 보문상가는 단지 내 노른자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슬럼화가 가속됐었다. 그러다가 지난 2019년 12월, 경북문화관광공사는 보문단지 내 2만5000여㎡의 보문단지 상가를 매각했다. 이로써 1980년대 소규모 기념품매장 위주의 구조로 영업하다 수년째 문이 내려진 채 방치된 보문단지 중심상가가 민자를 통한 활성화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민간자본을 유치는 했으나 매각에 바로 이어진 코로나 사태로 일련의 변화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곳을 지나는 많은 경주시민과 관광객들은 현재 비어있는 이곳에 대한 스토리나 방치된 연유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물론, 민자에 유치된 만큼 속히 정상화되어 보문관광단지의 활성화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27일,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 홍보팀 김병찬 전문위원을 만나 보문관광단지 조성 배경과 단지 내 현재 방치돼있는 상가 건축물들의 연혁과 숨겨진 스토리에 대해 들어 보았다. -상가 건물 사이 정원들은 널찍, 전돌은 거의 연꽃 문양, 바닥은 화강암이나 전돌 단지 내 상가 건물 사이사이 정원들은 널찍해 답답하지 않았다. 바닥은 화강암이나 전돌을 크게 깔았거나 정방형으로 작게 깔아 놓은 곳이 대부분이다. 전돌은 거의 연꽃 문양이다. 화강암은 인도를 겸해 차도로 다니는 곳에 깔았고 전돌은 인도 전용으로 깔아 놓았다. 상가 건물을 오르내리는 계단 대부분은 화강암이다. 상가에 식재된 조경 수종은 향나무, 목련, 백일홍, 명자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등이었는데 유독 목련이 많았다. 40년 이상의 조경수들은 제법 시간의 나이테를 두텁게 하고 있었다. 이제 나뭇잎들은 모두 지고 매서운 겨울바람에 맨몸으로 흔들리고 있지만 그리 스산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상가 건축물이 아기자기한 덕인 것 같았다. -1979년 아시아태평양관광총회(PATA) 유치하면서 경주보문단지 조성...국내 유일 관광객 수용 위한 관광유원지지구로 조성 보문단지를 조성하게 된 첫째 이유는 1979년 우리나라에서 아시아태평양관광총회(PATA)를 유치해 개최했던 것에 기인한다. 아시아태평양관광총회 본회의는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하고 워크숍은 고도 경주에서 개최하자는 중지가 모여졌으나 당시 경주에는 그들을 수용할 관련 시설이 없었다. 기껏해야 불국사 철도호텔이나 경주시내 경주관광호텔 정도였던 것이다. 그 외에는 수학여행단을 위한 숙소 뿐인 시절이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급하게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에는 경주 유적지 정비(주차장과 화장실 정비 정도)를 비롯해 관광유원지조성이 포함됐다.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한 관광유원지지구가 바로 보문관광단지 조성이었다. 조성 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원 마련이었는데 차관 없이는 실행하기 힘든 사업이었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차관 신청한 금액은 당시 2200만 달러였다. 당시 국민소득이 1734달러였던 시절이었으니 실로 엄청난 금액의 투입이었다. 공업시설도 아닌, 그야말로 위락시설에 대한 정부의 과감한 투자였다. 차관을 했으니 그 빚을 갚아야했고 경영으로 관리할 주체가 필요했었다. 김병찬 전문위원은 “이를 위해 정부가 경주관광개발공사를 발족시켰습니다. 현재의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의 전신이 되겠지요. 저희는 보문관광단지 전체를 관리하면서 관광용지를 분양해 은행 차관을 모두 갚았습니다. 한 번의 연체 없이 모두 갚은 경우는 우리나라, 경주관광개발공사 뿐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육부촌은 연회와 컨벤션 장소로 경회루 본떠서 짓고 공연장으로는 보문탑, 쇼핑센터로 상가 조성//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 콘셉트 정해 직접 지시 보문단지 조성 당시 육부촌 건물과 상가 건물들은 동시에 지었다. 1975년 착공해 1979년 4월 6일, 준공식을 겸해 아시아태평양관광총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총회 날짜에 맞추어 완공했던 것. 이들 건물들과 동시에 준공한 건축물은 콩코드호텔(구 도쿄 호텔), 코모도 호텔(구 조선호텔), 옛 ‘거구장’ 건물 등이었다. 육부촌은 국제회의장으로 컨벤션(convention)용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육부촌 인근 보문호숫가에 새로 지은 두 호텔에서는 숙박을 하고 지척에 있는 지금의 상가건물은 쇼핑센터로 지었다. 쇼핑센터인 상가들은 맞배지붕의 단칸 한옥 형식이어서 쇼핑센터로서는 다소 비효율적이었다. 소규모 기념품매장 형식이었다. 한편, 이들과 유사한 경주에서 보는 1970년대 대표적 건물로는 ‘통일전’, ‘화랑의 집’, 각 유적지의 화장실, 진현동의 숙박시설 등을 꼽을 수 있는데 대체로 기와지붕에 콘크리트 구조의 몸체로 거의 같은 유형의 건물들이 많다. 건물 벽면 색은 거의 미색을 사용해 건령을 바로 짐작할 수 있다. 건물들 사이로는 향나무와 목련이 한옥 앞에 식재된것도 1970년대 시대적 특징의 한 단면이라고 한다. 이들 건축물은 다소 국적이 불분명한 건축물이라는 평도 있지만 그 시대에 지은 독특한 건축 유산이라는 의견도 많다. 이때 조성된 육부촌과 상가들도 이 형태를 고스란히 반영해 지었고 오늘까지 당시 한옥의 특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문단지 내 사람들이 붐볐던 집결지로서 역할했던 보문탑(일명 팔각정)은 국내외국인이 경주를 찾았을 때 공연할 장소로 만든 것으로 수 년 전까지는 활발하게 운영됐다. 보문탑 바로 입구에는 보문관광단지 조성의 배경을 간략하게 기록해 두었다. ‘1971년 6월 12일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신라천년의 찬란한 민족문화 유산을 길이 보존하기 위해 경주관광종합개발을 지시하셨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관광객을 위한 휴식공간으로서 보문관광단지를 개발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탑을 건립하였다. 1979년 4월 6일 건설부 경주개발건설사무소’. 김 위원은 “보문단지의 전체적 디자인 콘셉트는 ‘청와대 4인방(청와대 경주종합개발사업단)’이라 불리는 팀에서 맡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 콘셉트를 정해 직접 지시할 때 웅대, 찬란, 정교, 유연, 우아 등을 고려해 조성할 것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한옥 형태를 띠되, 꽃담을 갖추는 등 옛 궁궐형식을 도입해 모티브를 잡은 것 같습니다. 육부촌은 연회와 컨벤션 장소였으므로 경회루를 본떠서 지었고 팔작지붕으로 크고 화려하게 지었죠. 육부촌과 바로 연결해 쇼핑센터인 상가 건물은 맞배지붕으로 단촐하게 지었고 공연장으로 보문탑을 지었는데 법주사 팔상전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합니다. 인근 호텔서는 숙박하도록 했고요. 당시 건설부 경주개발사업단에서 공사를 시행했고 설계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가 맡았어요”라고 설명했다. 한편, 보문관광단지 조성을 지시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에 서거해 예정되어 있었던 경주종합개발 2차 계획은 무산된다. -민간에 매입된 상가건물의 기본골격은 무너뜨리지 않고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닥 잡아 이 보문탑 공연장을 포함해 상가 운영은 당시 신세계백화점에 맡겼다고 한다. 일반 상인은 영어 구사에 어려움이 있었으니 정부에서 강제로 떠맡긴 셈이었다. 그러나 일 년 만에 적자가 심해 경영을 포기한다. 쇼핑센터로는 다소 비효율적 형태인데다 평일 수입이 시원찮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민간기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경주상공회의소에서 몇 년간 운영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이후 경주관광개발공사가 맡아 상가들을 임대했다. 1985년 경 임대했으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공기업 구조조정으로 민간이 운영할 수 있으면 최대한 민자화하라는 방침이 내려졌고 강력한 기조였다. 이곳이 상가였으므로 이들 상가들도 1990년 초반부터 매각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문관광단지의 건폐율은 20%(보문단지 내 녹지와의 균형)로 매우 낮은 편이어서 투자 대비 사업성이 낮은 편이어서 매각에 진통이 뒤따랐다. 지난 2019년 12월, 경북문화관광공사는 20여 년에 걸쳐 보문단지 내 2만5000여㎡의 보문단지 상가를 민간에 매각하기에 이른다. 김병찬 전문위원은 “상가 부지이므로 매입한 이들도 아직은 건물의 기본골격은 무너뜨리지 않고 보존한다는 기조는 바뀌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지 상가건물의 경우, 한옥이고 폐쇄형이기 때문에 골조는 유지하되 상가건물의 내부에 대해 효율적인 구조변경을 포함한 리노베이션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또 중간집적시설로서 보문탑은 이벤트나 광장으로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존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지금까지는 사업의 방향성을 계속 타진하고 있어서 다소 지지부진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라며 공사측에서도 매입주에게 건축물군의 보존방향으로 가닥을 잡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45년 전 일반 저수지 옆, 황무지 땅이었던 보문단지에 지금은 연간 1000만 명이 찾는다. 이렇게 국제적인 관광단지로 발돋움하기까지는 초기 경주관광개발공사와 현재의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이들의 노력과 함께 민간에 유치된 단지 내 상가가 활성화 돼 주변 경관과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보문단지를 기대해본다.
경주 오릉 근처 탑동에는 구슬 서 말을 꿰어 보배로 만드는 이들이 있다. ‘최고의 보존은 활용’이라는 맥락에서 공연과 체험, 해설과 전시 등을 통해 경주의 문화재를 다각도로 선보이고 체험하게 하는 이들은 2018년 발족해 올해 4년차로 이 분야 사업계에선 신출내기에 속한다. 그러나 사업 시작한 지 불과 수 년 만에 문화재청이 시상하는 상을 수 차례 수상하더니 지난 15일엔 전통산사문화재 활용사업인 ‘칠불암 5감 힐링체험’으로 문화재청 ‘명예의전당상’에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정착하기까지 좌충우돌 하며 굵은 땀방울 흥건했을 그들,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이들은 문화재를 다각도로 접근해 입체적으로 해설하고 참여자들의 오감에 가 닿으려 애쓰며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 문화유산 활용의 중심에 최경남 원장과 김용목 선생(예술감독,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이수자)이 있다.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적극 활용해 콘텐츠를 개발하고 복합적인 전통문화축제(공연, 퍼레이드, 전시, 학술, 체험)의 기획 및 연출, 무형문화재 전승 교육, 재현 등의 다양한 창작과 연구 활동을 하는 단체다. 특히 주 사업인 ‘문화재활용사업’은 유·무형 문화재의 심미적 체험을 유도하고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 제고와 지속적인 문화재 향유의 기회를 확대하여 지역의 관광 명소화에 뜻을 두고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연구원 구성원들은 대개 순하고 흥이 넘쳐 풍류가 몸에 배어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큰 욕심 없이 프로그램 참여자들과 문화유산을 공유하기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문화재 활용 사업 진정성 돋보여... 문화재청 ‘명예의전당상’에 이름 올리는 경사 맞이해 사업에 대한 진정성이 돋보여서일까. 올해 문화재청 ‘명예의전당상’에 이름을 올린 이 수상은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연속 3회 우수사업 선정(문화재청)을 수상한 결과로 이어진 쾌거였다. 그리고 취약계층 문화유산 향유 프로그램 ‘동행’으로는 경북권역에서 2021년 우수사업(문화재청)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HERITAGE KOREA AWARD 2021 문화재 활용 부문(경주시)’에서 수상하는 등 발족한 이듬해부터 이어진 수상행렬은 이들의 행보에 강력한 기폭제가 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을 간단히 살펴보면, 문화재청의 ‘전통산사문화재활용 프로그램(칠불암, 칠불암가는 길 입구)’은 2018년부터 시행한 프로그램으로, 전통 산사 문화재의 역사와 예술적 가치를 부각하고 참여자의 심미적 체험을 유도하는 문화유산 힐링 프로그램이다. 이 행사는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과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그 대상 문화재다. ‘세계유산 활용 프로그램’은 경주 역사유적지구 중 남산일원(육부전, 나정, 일성왕릉, 남간사지 당간지주, 남간마을 등)을 대상으로 한다. 올해 첫 사업으로 전통산사문화재활용 사업인 칠불암에서의 노하우들을 접목하고 문화재의 보고인 세계문화유산의 특성을 잘 살렸다는 평을 얻어 문화재청 우수사례로 추천되는 기염을 토했다. 또 ‘취약계층 세계문화유산 향유 프로그램 ‘동행’’은 전액 국비사업으로 지난해부터 경북권역을 이들이 담당하고 있으며 올해 우수사업(문화재청)에 선정됐다. 세계문화유산 감성여행 ‘동행’은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문화재 향유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어르신, 다문화가정, 시청각장애인, 보호아동 등 우리사회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진행 중이다. 또 ‘생생문화재 활용 프로그램(경주읍성)’은 올해 첫 프로그램으로 경주 읍성을 중심으로 시민과 관광객에게 경주에서 만나는 조선과 근대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를 편안하게 전달하고 문화재를 향유하는 프로그램이다. 경주읍성 생생나들이 프로그램은 2022년도 예약이 이미 끝난 상황이라고 한다. 최경남 원장<인물사진>은 “저희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은 크게는 등록문화재와 관련된 사업과 세계문화유산활용사업, 취약계층문화유산활용사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 세 사업 모두 문화재청 우수사례로 선정됐습니다. 전통산사문화재활용 프로그램(칠불암)의 경우는 2018년 저희 첫 작품으로 2019년부터 연속 3년간 우수사업으로 인정돼 감사하게도 올해 ‘명예의전당’상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상의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 분발할 것입니다” “저희 프로그램 대부분에는 예술적 감각과 감성이라는 코드를 넣어 대상자들을 만족시키려 합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각 대상자별 특성이 다르므로 어르신에게는 어르신에 맞는, 장애인이라도 장애의 경우가 모두 다르므로 각기 특성에 맞춰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있구요. 다문화 가정의 경우에도 세대 간 문화 차이를 고려해 한국의 전반적인 문화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하게 프로그램을 짜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비지땀 흘리며 고락 같이 한 지 여러 해...뜨거운 동지애로 똘똘 뭉친 구성원들,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는다’ 최 원장은 “저희는 우연하게 이 일을 하게 됐어요. 2015년 경주엑스포 때 처용무를 의식무로 추는데 있어 처용무 발상지인 경주시 자체의 처용무를 만들어야한다는 취지에 따라 처용무를 배우기 위해 몇몇이서 모였었죠. 당시 처용무를 추기위해 모였던 이들이 우리 사업의 초기 멤버입니다. 김용목<인물사진> 선생이 문화재 활용사업에 대해 제안을 하셨고 경주의 수많은 유무형 문화재와 관련된 역사성 있는 주제로 공연을 해보자는 취지로 프로그램들을 시작했죠. 그러다가 활용사업 공모를 알게 되었고 각 팀들이 모여졌고요. 협업 단체로는 문화재해설(신라사람들), 공연팀, 사회협동조합인 ‘문화와 나눔’, 화랑인형극단, 그 외 개인 예술활동자가 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칠불암 사업(‘신라의 불국토, 경주 남산을 가다’)을 김용목 선생의 자문을 구해 첫 활용사업프로그램으로 선보이게 됐습니다”며 활용사업에 뛰어든 배경을 설명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3년간은 프로그램을 계속 조정해 나갔다고 한다. 전통산사문화재활용 프로그램의 경우, 거대한 남산 속 칠불암을 중심으로 남산의 매력을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고민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프로그램을 대폭 조정해나갔고 2019년부터는 오감힐링체험으로 구성해 프로그램을 안착시킨다. “문화재청 전통산사문화재활용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전국의 큰 사찰들이 주요 대상프로그램이었는데 저희는 ‘칠불암’이라는 작은 암자에다 한 시간 이상 산을 올라야 하는 조건이라 평가 항목에서 접근성이나 안전성에서 매우 불리한 조건에 해당됐어요. 그럼에도 칠불암으로 정한 것은 경주 남산 유일의 국보를 지니고 있는 사찰인데다 칠불암의 문화재가 개방돼 있어서였죠. 칠불암 스님들께서도 매우 수용적이어서 저희가 프로그램을 마음껏 표현하면서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 행사를 하기 위해선 해설사팀이나 참여하는 예술인들이 텐트 옮기는 일부터 모든 장비(스피커, 의상, 도구, 악기)를 직접 들고 산에 올라가야 했다고 한다. 비지땀을 흘리며 고락을 같이 한 지 여러 해. 이제는 뜨거운 동지애로 똘똘 뭉친 이들은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행사를 진행하면서 진한 감동과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란다. 이들은 스케일보다는 차별성있는 질 높은 콘텐츠로 승부하며 기존의 유사한 프로그램들과의 차별성을 두려고 노력한다. 국·도·시 보조금을 받으면서 소외계층을 좀 더 적극적으로 유치해 폭넓은 관객층을 개발하기 위해 여행 상품을 개발중이기도 하다. 전국 여행사와의 모니터링과 자문을 통해 2022년에는 여행 상품에 박차를 가할 계획인 것. 코로나 이후 변화할 관광패턴에 대해 교육도 받고 전문가와의 자문을 통해 우리 것을 어떻게 관광과 결합시켜 상품화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먼저 저희들이 감동 얻습니다. 가장 큰 수혜자는 저희입니다”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는 사학자나 문화재 관련 연구자 집단이 아니어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일들이 많았어요. 아주 간단한 문화재 소개글을 작성하는데도 여러 전문가의 자문을 구해야 했던 거죠. 공연 소품을 한 가지 사용하더라도 일일이 자문을 구해 그림을 파서 세공을 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항상 지역 어른들께 자문을 구하고 문화재 관련은 ‘신라사람들’과 연구하고 자료 수집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먼저 자신들이 감동을 얻곤 한다고 했다.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 복지 ‘동행’ 같은 프로그램은 문화재청 사업으로, 지난해 처음으로 경북권역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직접 찾아가 그들의 니즈(needs)를 파악하고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 프로그램에 대한 진한 고민을 한다. 복원한 발굴 유물들을 만져보고 직접 느끼도록 하는가 하면, 신라대종의 경우 시의 양해를 구해 타종하고 만져보게도 하고 듣게 해 감동을 이끌어냈다. 춤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에게는 몸을 통해 춤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청각장애인에게는 진동으로 소리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올해는 콘텐츠 개발에 집중했으니 프로그램들 좀 더 안정시키고 내년엔 여행상품으로 만드는 과정에 주력하려 합니다” 최 원장은 “어떤 프로그램을 체험하더라도 참여하는 분들이 만족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이미 확정돼 시행하고 있는 사업들은 좀 더 안정시키고 여행상품으로 만드는 과정들과 홍보 마케팅에 주력하려고 합니다. 올해는 콘텐츠 개발에 집중했으니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면서 핵심적으로는 관객을 개발하고 대상 계층에 대한 다각적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산의 경우 국내 거주 외국인의 유치 등을 통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단체들과의 협력으로 확산될 수 있는 부분들에 집중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가장 첫 번째 수혜자는 우리’라면서 ‘일하는 우리가 행복하고 행복한 일을 하면서 밥은 먹고 산다’고 말하면서 활짝 웃는 최 원장은 대상자에 맞게 그들이 제대로 알고 느끼고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최대 목표라고 힘주어 말한다. “지역 사회의 공익성이나 공공성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도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작지만 경제적 안정도 누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현재는 사무실, 창고, 연습실을 따로 사용해서 다소 사업 진행상 효율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살펴보고 있는 차제이고 그것이 우리의 숙원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친근한 미소를 띄면서 말을 걸어왔다. 새로운 전시를 감상하며 우아하게 쉬어가라 한다. 국립경주박물관이 단순한 역사정보의 전달이 아닌 휴식의 공간, 힐링의 공간을 제공하고자 획기적인 전시 환경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를 보다가 전시장 내에서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휴식 공간을 마련해두었는데 벤치와 소파, 평상, 아늑한 조명등의 배치는 그래서 전시 관람을 신선하고 즐겁게 한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최선주)은 신라의 역사와 문화라는 주제로 매년 두 세 차례 특별전을 열고 있는데 지난달 24일부터는 새로운 특별전시와 새롭게 문을 연 상설전시실이 첫 선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특별전으로는 2022년 3월 20일까지 열리는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다름이 만든 다양성’ 전이고 신설 전시공간인 신라미술관 ‘불교사원실’의 상설 운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두 전시장을 찾은 이들은 경주박물관 이전 전시환경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뜻밖의 전시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박물관 전시환경의 변화가 가히 혁신적이라는 평을 얻고 있는 것. 이번 특별전시와 신설 전시공간을 기획하고 일반에 선보이기까지 국립경주박물관 최선주 관장은 물론, 박물관 직원들은 주말도 없이 특별전과 신설상설전시실 개관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는 후문이다.
흔히들 석조문화재는 변치 않는 문화재로 인식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지난호에 이어 석조문화재 수리의 필요성과 수리보수의 시공법, 관리의 필요성과 함께 경주지역 석조문화재 훼손에 대한 경주시의 의견도 함께 들어보았다. 이번호에서도 문화재 보존·관리·활용을 위해 경주에서 20년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학과장인 도진영 교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구성했음을 밝힌다. -우리나라 석조문화재의 대부분은 화강암이 50%정도, 석굴암 부처님은 토함산 화강암, 분황사 석탑은 안산암,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은 응회암 도진영 교수는 석조문화재는 돌로 된 문화재이므로 돌의 종류부터 파악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변성암 지대로 화강암이 많은 편이다. 우리나라 석조문화재의 대부분은 화강암이 50%정도며 그 외 소수는 응회암, 안산암 등으로 다른 종류의 암석을 이용했다. 화강암은 매우 견고하고 내구성이 강하지만 불에 약한, 내화성이 약한 결점이 있다. 화강암도 그 종류가 매우 많은데 석조문화재에 사용된 화강암은 조립질 흑운모화강암, 세립질 흑운모화강암, 화강섬록암 등으로 다양하다고 한다. 다음으로 안산암인데, 분황사의 석탑 탑재로 쓰인 것이 그것이다. 응회암은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에 쓰인 암석으로 감은사 석탑재로도 사용됐다. 감은사 석탑 수리 시 장항리 일대를 뒤지니 인근 뒷산에서 채석지를 확인하고 암석을 수급해 수리했다는 일화도 있다. 대리석은 원래는 실내용으로서 산에 약해 외장에는 부적당하다. 유럽 대부분의 석상이 대리석이다. 한편, 석회암은 동해안 쪽에 많다고 한다. 도 교수는 “석굴암 부처님도 정밀진단 후 토함산 화강암이라는 것이 밝혀졌지요. 그래서 정밀진단 후 암석의 종류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했다. -왜 진단을 해야 하는가...진단 통해 훼손 원인 알아내고 상태를 파악하고 처방하기 위해 “암석의 특징을 파악했다면 앞으로 어떻게 파손, 훼손될 것인가의 위험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대책을 마련해 적절한 보존 대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에 진단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에 따른 진단법으로는 현장에서의 육안 진단, 일부 시료를 채취해 실험실에서 분석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나마도 원인 파악이 되지 않으면 석조문화재의 환경과 유사한 환경을 실험실에 그대로 조성해 인공풍화실험을 거치게 된다. 어느 부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도면으로 작성한 후 심각 정도를 표시한다는 것. 자연원인에 의한 손상인지 과열탈락에 의한 손상이지, 미생물 서식에 의한 손상인지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전체적인 손상 원인별 훼손 도면을 도출해낸다. 또 현장에서 기계측정도 하는데 이는 비파괴적 이어야 하므로 살살 두들겨보거나 초음파로 암석을 측정하기도 한다. 최근엔 3D스캐너로 정밀하게 측정을 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서 초음파 측정의 결과를 얻는다. 또 풍화 정도를 정밀하게 알기 위해선 드릴저항시험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로써 약화된 정도에 따르는 약을 처방할 수 있는데, 이 방법은 외국서는 매우 활용도가 높다고 합니다. 저도 하나 장만했습니다만 한국서는 적용을 하지 못하고 있네요. 하하. 천공을 해 실험실에 가져오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우리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후 X선 회절분석, 전자 현미경 조사 등 실험실분석을 하지만 이마저도 답을 얻지 못할 경우 인공적 풍화 환경을 만들어 견디게 하는 실험을 한다. 이 모두는 진단을 통해 훼손의 원인을 알아내고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 다음엔 처방을 해야 하는데 수리는 훼손된 문화재를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모든 조치로서 실측설계, 보수, 복원, 사이트 환경 정비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작업이라고 도 교수는 재차 강조했다. 수리의 영역에서 가장 문제는 해체 후 다시 복원(재건립, 문화재가 구조적으로 안전에 문제가 있는 경우, 구조를 해체 후 기초를 튼튼하게 한 후 다시 원 상태로 건립하는 작업)시키는 작업이다. 또 세척, 탈염(문화재의 표면이 각종 오염물 및 생물 서식에 의해 경관상 및 보존상 문제가 있는 경우 오염물 제거), 강화처리(강도가 약화되어 문제가 있는 경우 풍화된 암석에 강화처리제를 침투시켜 새로운 조직으로 단단하게 강화시키는 작업), 발수처리(표면에 발수제를 도포해 빗물 등 수분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시공), 수복(문화재를 보수해 문화재의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시키는 조치) 등을 한다. -경주시...석조문화재와 관련해 대학교수 등으로 구성된 문화재위원과 전문가 자문 구하고 있어// “세척도 신중하게 정확한 방법을 찾아야 해요” 보존과학적 보존처리에서는 세척의 경우 돌 표면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척을 한다. 그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을 찾는데, 이때 효과적이라는 것은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 뿐 만 아니라 돌이 상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 “국립경주박물관 내 분황사 출토 세 부처는 2001년~2006년까지 세 차례 세척을 했으나 돌 안에 있는 생물까지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생물체가 올라오기 때문이죠. 따라서 세척도 신중하게 정확한 방법을 찾아야 해요. 특히 다공성 돌에서의 생물 제거는 과연 얼마나 효과적이냐가 문제이지만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가시적 효과가 있어야 하므로 일단 세척을 하는 것입니다. 원론적으로는 생물이 문화재에 영향을 미쳐 부식시키므로 고려해야 할 일지만 그 방향성과는 달리 세척이 잦고 다시 되돌아가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경주시 문화재과 담당자는 석조문화재들은 별도의 관리 여건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제했다. 사실 최근의 파손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에 걸쳐 풍화 등의 작용이 있어왔다면서 서악리마애불의 경우 원래 암석 자체가 잘 쪼개지는 안산암이어서 복원은 어렵다고 전망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까지도 대략 3~5년 단위로 데이터를 모으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의 영향인지, 바람에 의한 것인지, 풍향계와 풍속기 등을 설치해 지속적으로 계측하고 있다는 것. “석조문화재와 관련해 대학교수 등으로 구성된 문화재위원과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에게 기술지도와 자문을 구해 보수를 시행하고 있으며 관리를 잘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분황사의 경우 수 년 단위로 보존 처리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1962년 이후 문화재 관리가 본격적으로 실시됐는데 당시 공법으로 문화재 안에 무엇을 넣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백화 현상등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면 해체보수를 해야 합니다. 모전석탑이다 보니 전면해체가 어렵고 해체 후 정확한 복원도 힘든 일 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꾸준히 다니며 문화재를 찾아보는 이들이 가장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보존은 전문가가 하고 관리는 일반인도 할 수 있어요” 도 교수는 분황사 모전석탑의 백화 현상이 심각해 세척을 했으나 백화는 계속 반복됐다고 했다. 이것은 탑재 안에 탑을 쌓기 위한 엄청난 양의 회가 들어가 있어서라고 한다. 옥개석에선 물이 새고 물이 들어가니 회가 다 녹을때까지 백화 현상이 지속적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2021년 세척이 완료됐다고 해서 검사 차 가보니 마침 비가 와서인지 위에서부터 물이 스며든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물이 새면서 석회가 녹은 물이 생기고 이를 방치하면 종유석처럼 경화되는 것이죠. 이와 같은 사례는 세척을 하더라도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음을 방증해 줍니다. 피부의 트러블 원인을 치료하지 않고 진한 화장으로 덮어버리는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까요. 원인을 잘 파악해서 그것부터 처리해야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한편, 모니터링에 의한 점검 관리는 진단에 의한 처리와는 달리, 일반인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경주시 문화재과 인력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소홀하게 관리되는 문화재는 현장에 너무 많습니다. 꾸준히 다니며 문화재를 찾아보는 이들이 가장 전문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관심있는 이들이 문제해결의 관리자인 거죠. 경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문화재에 대해 관심과 애착심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보도록 권하고 싶어요” 문화재 보존이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조치라면 문화재 관리는 행정적이고 기술적인 보호 조치인데 진단과 분석을 통해 보존관리 방안을 낸다는 것이다. 보존은 전문가가 하고 관리는 일반인도 할 수 있다는 것. -“비지정 문화재는 관리 상태도 더 나쁘고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습니다. 그런 문화재 관리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경주에는 여러 문화재 관리 단체가 있다. 그 중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기 오래전부터 국립경주공원이 문화재를 보호하는 방법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오랜 시간 관리했다고 한다. 이후 경주시 일부 부서에서 담당하다가 2006~2007년 경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다시 관리하고 있다. “늘 다니며 체크하는 그 직원들을 대상으로 어디가 문제가 되는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교육을 자주 시행했고 그분들이 그간의 자료를 집대성 해 둔겁니다. 문제가 되는 사항은 전문가에게 보고하고 전문가와 함께 현장 답사를 하는 식이지요. 국립공원에서 오랜 시간 모니터링 한 결과 정밀진단이 필요했던 경우엔 문화재청에 즉시 보고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문화재 관리는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자주 가서 계속 보고 객관적 자료인 기록으로 남겨주시면 됩니다. 단순하지만 관리를 잘 할 수 있는 측면입니다. 또 문화재 자체도 중요하지만 문화재를 둘러싸고 있는 사이트 환경도 중요합니다” 이는 지반 안전 상태, 빗물 유입 및 침수, 보호각의 상태, 주변수목 및 수풀에 위한 훼손 등을 점검하는 것이라고 한다. 석조문화재 보존관리 체크리스트를 작성해두고 점검 결과를 상부에 보고한다. 도 교수는 끝으로 “사실 지정 문화재는 꾸준하게 의무적으로 관리가 되고 있습니다만 비지정 문화재는 관리 상태도 더 나쁘고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습니다. 그런 문화재 관리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주인이 없는 문화재임에도 상당히 중요한 문화재들이 수리에서 뒷전으로 밀리더라구요. 그래서 주인 없는 문화재가 서러운 겁니다. 우리 시민들께선 이들 비지정 문화재들을 조금 더 살펴봐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라고 했다.
조상이 남겨놓은 찬란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은 현재를 사는 우리의 임무 중 하나다. 민족 문화유산을 미래세대에 보존계승할 이론과 방법을 개발해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런 일련의 문화재 보존·관리·활용을 위해 경주에서 20년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학과장인 도진영 교수다. 도 교수는 문화재청 보존분과 문화재위원회 문화재전문위원, 경상북도, 대구시, 울산시, 경상남도 문화재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이번호 상편에서는 도진영 교수를 통해 문화유산 중 특히, 경주지역 석조문화재의 손상과 훼손 실태와 손상의 종류, 손상된 석조문화재의 안전상태 진단에 대해 알아보았다. 흔히들 석조문화재는 변치 않는 문화재로 인식하는 것에 경종을 울린다. 실외에서 오랜 세월 견디는 암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어질 하편에서는 석조문화재 수리의 필요성과 수리보수의 시공법, 관리의 필요성과 함께 경주지역 석조문화재 훼손에 대한 경주시의 의견도 함께 경청할 예정이다. 전국의 손상된 여러 문화재가 있으나 본 기사에서는 경주의 훼손 석조문화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음을 밝혀둔다. -서악리마애불,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선각육존불...박리와 박락, 착색 진행돼 도 교수는 먼저 선도산 서악리마애불의 깨진 부처 얼굴에서 경주 석조문화재의 실태를 보여주면서 관리 방안까지 제안했다. 양 옆 협시불도 깨지긴 했지만 본존불에 비해선 양호한 편으로 보였다. 두 협시불은 화강암이고 본존불은 안산암으로 이뤄져 암석 자체가 두부 깨지듯 조각조각 깨지는 돌이라고 한다. 그 틈 사이로 물이 새어 들어가거나 풍화작용으로 자연스레 박리가 된 것이다. 또 경주서남산 꼭대기 상선암 바로 위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의 양 옆 바위면이 떨어지기도 하는 상태다. 이 부처는 암석결을 잘 이용해 만들긴 했으나 결이 보존상 큰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큰 절리와 작은 절리가 진행돼 나무나 물이 스며들고 있는 것인데 아랫부분 바위들이 떨어져나가고 있는 상태다. 이는 구조적으로 육안으로도 쉽게 보일 정도다. 이로써 이 문화재가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산 삼릉계곡 첫 번째 지정 문화재인 ‘선각육존불’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1호다. “여섯 부처가 새겨진 바위인데 시커멓게 적흑색을 띄고 있습니다. 미생물이 바위를 가득 뒤덮고 있는 상황으로 보이는데요. 여기서도 자세히 보면 절리가 발견되고 있어요. 면이 얇게 박리되고 있는 것으로 선각의 두께는 불과 1센티 정도로 이뤄져 얇은 면이 박리가 되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사라지는 것이죠. 그야말로 돌덩어리가 될 뿐입니다. 박리도 손실이지만 면이 사라지는 것도 큰 손실이자 우려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도 교수의 우려다. 절리의 틈으로 물이 흘러나오고 생물이 자라는데 어떤 생물인지에 따라 암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검버섯처럼 생긴 생물종은 서서히 암벽을 부식시켜 암석 입자가 떨어질 정도의 영향을 미친다. 약수계곡 마애불입상에서도 양각으로 도톰하게 부처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도 전체적인 큰 균열이 발견된다. 아래 조각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문화재도 훼손되기 전 관리를 통해 손상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문화재 보존의 원칙은 나빠지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 가장 기본” 도 교수는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진행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문화재를 어떻게 관리하고 보존해야 하는 것일까요. 더 이상 손상되지 않도록 관리해서 우리 후손들에게 오랜 시간 머물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개입해 문화재의 생명을 늘려보자는 것이 저희가 연구하는 분야입니다”라고 했다. 이런 문제들의 가장 좋은 방안은 보호각의 설치지만 미관상 문제가 심각하다는 맹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보존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 그렇다면 석조문화재의 손상과 훼손은 무엇일까. 또 현재의 손상상태를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 석조문화재의 수리와 보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대목은 석조문화재의 관리입니다. 관리는 시민들도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시민들의 관심과 협조가 절실한 대목입니다” 보존이란 인간이 개입정도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지는데 문화재는 누군가의 눈으로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를 모니터링이라 하는데 이점을 등한시하는 편이라고 지적했다. “문화재도 훼손되기 전 관리를 통해 손상을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문화재는 한 번 망가지면 되돌릴 수 없으므로 회복불가입니다. 나빠지면 그 선에서라도 머물도록,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할 뿐이지요. 호전될 순 없습니다. 잘 관리해서 더 이상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인거죠. 다시말해, 문화재 보존의 원칙은 나빠지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 가장 기본이고 손을 댄 듯, 안댄 듯 조치를 취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보존입니다. 한편, 복원은 유실된 부분을 새로 재건하는 것인데 경주에도 복원하려는 문화재가 여럿 있습니다. 복원은 추정하거나 창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원은 예전과 똑같이 재건하는 것을 말하는데 형태와 재료, 기술까지 원래와 똑같이 해야 하는 작업이므로 엄중하게 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추정에 위한 복원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풍화작용에 의한 석조문화재 훼손...서악리마애석불상, 보문리석조, 낭산마애삼존불, 구황리삼층석탑,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아치 아래쪽 등에 손상 진행 흔히 석조문화재는 돌로 만들어진 문화재로 영구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사실은 실외에 노출돼 있고 오래된 제작시기로 양호하지 못하다고 한다. 석조문화재의 훼손과 손상의 요인은 풍화나 빗물, 수분동결, 지반의 습기, 지반 불안정, 암석의 물성상의 문제, 생물의 서식, 최근 대두되고 있는 대기오염물, 인위적 요인 등의 매우 다양한 요인에 따라 손상이 진행된다고 한다. 이들 중 가장 큰 원인은 물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손상 현상들의 유형으로는 풍화작용에 의한 훼손으로 파손이탈, 다편파열(결에 따른 균열로 경주 서악리마애석불상 등), 균열(경주 보문리석조, 낭산마애삼존불), 박리(분황사석탑 하단부,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표면의 박리 등), 두껍게 떨어지는 박락, 입상분해(풍화에 의해 입자들로 분리돼 나오는 현상으로 경주 남산리 동삼층석탑 등), 천공(구멍이 나는 현상으로 경주 남산 화강암에서 자주 보이며 경주 구황리삼층석탑, 나원리오층석탑), 착색(돌의 철광물이 비를 맞으며 붉게 물드는 것으로 탑의 균형을 맞추면서 그 사이로 무쇠편을 집어넣으면서 무쇠편이 산화되면서 탑을 벌겋게 만드는 현상), 오염물 침착(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아치 아래쪽에 허연 부분으로 1960~1970년대 복원하면서 회를 다량 사용해 물이 스며들었고 다시 그 오염물이 흘러나온 것으로 보임) 등이다. -생물서식에 의한 석조문화재 훼손과 구조 상태에 따른 훼손, 과거 보수 물질에 의한 손상...분황사모전석탑, 삼릉계석불좌상 그리고 생물서식에 의한 훼손으로는 이끼(선태), 지의류(고착, 엽상, 수상 지의류 등으로 유기산을 분비해 돌 입자를 긁어냄), 녹조류인 미세조류와 시아노세균 등은 그나마 국부적 손상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더욱 심각한 구조 상태에 따른 훼손으로는 중심침하(땅의 풍화작용), 연약지반, 내부의 절리 및 균열 등이 있다. 다음으로 과거 보수 물질에 의한 손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아래의 백화 현상, 분황사모전석탑의 경우도 백화현상이 심하다. 분황사는 2010년부터 표면을 세척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 변색과 형태의 변화로 손상이 되는데 잘못된 성형이 그 예다. 삼릉계석불좌상은 수리하면서 광배 부분을 복원했으나 부처의 손상 부위를 수리하는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얼굴부분이었다. “부처 얼굴의 복원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료의 부재로 고심을 하게 되는데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여러 불상의 얼굴에 맞춰 만들어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석조문화재 심하게 풍화되기 전에 육안 및 정밀 진단 실시해 더 이상 손상, 훼손 되지 않도록 보존방안 강구해야” 그렇다면 진단은 크든 작든 전문가가 해야 한다고 한다. 문화재의 안전 상태 진단은 더 이상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보존방법을 찾기 위해서란다. 문화재도 반드시 진단하고 수리를 해야 한다. 즉 석조문화재가 심하게 풍화되기 전에 육안 및 정밀 진단을 실시해 더 이상 손상, 훼손 되지 않도록 보존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 안전상태 진단은 보존과학 전문가에 의해 진행한다. 도 교수는 “전문가와 함께 일반인도 함께 점검하고 관리하는 영역에서 모니터링해 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육안으로 진단을 하는데 문화재 주변 환경상태와 암석의 풍화상태 정도, 생물 서식 상황, 기울기 등의 구조 상태 등을 보면서 종합대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상태는 정밀 안전진단을 해야 하는데요, 복잡한 과정의 진단으로 최첨단 기계로 진단합니다. 문화재의 주변 환경 진단, 구조 안전성 진단, 풍화 훼손 진단 등을 하게 되지요”라고 했다. >>다음호에 계속
감포읍내에 들어서면 중요 요지에 유독 ‘다방’ 간판이 자주 눈에 띈다. 아직까지 다방이 흔하게 있어 다방 ‘아가씨’들이 커피 배달을 하는 일상이 흔한 감포읍. 유난히 향토색 짙은 감포항구라 그런지 유독 다방이 많은 듯하다. 지금의 MZ세대는 다방이 어떤 곳인지 생경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항구 근처엔 항구와 바다를 차경(借景)한 전망 좋은 깔끔한 카페보다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건축물에 뱃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다방이 훨씬 많은 곳이 바로 감포다. 그래서 삶의 다양한 이면이 이곳 다방들에 득실거린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드라마 세트장 같은 감포읍 거리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시가지로, 1970~80년대 소도시에서나 봄직한 풍경으로 아릿하게 다가온다. 오늘날까지 감포읍내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2층 목조 건축물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으며 지금도 가게나 살림집 등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항구다방’도 그들 중 하나다. 다방들은 낮고 허름한 간판들을 달고 감포읍민의 생의 터전으로, 읍민의 민낯으로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 감포 항구 하얀 등대와 정박한 선박들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시간엔 이미 항구다방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감포항구가 지척이어서 ‘항구다방’ 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려보인다. 그런 감포에도 최근 기존의 다방에 새로 문을 연 카페가 들어서고 있어 그 지형도가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감포항구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아직 감포 뱃사람들을 ‘꽉 쥐고 있는’ 항구다방 김외숙(65) 사장을 공들여 만났다. 자그맣고 여배우 같은 인상의 소유자인 그녀는 기자와 함께 쌍화차 한 잔을 나누며 20년간 감포에서 운영한 항구다방의 이력을 조근조근 들려주었다. 그녀는 천상 다방 마담이었다.
경주시민과 애환을 함께해 온 103년 경주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활용방안이 모색되는 시점이다. 경주시는 경주역 부지의 임시활용을 제시한 상태고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수렴을 거치고 있기는 하다. 기능이 상실될 경주역 및 광장을 시민은 물론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보고 싶은 명소로 만들기 위한 경주역의 활용방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본지 1509호부터 이어진 ‘아! 경주역! 굿바이 경주역!’은 모두 세 편으로 구성해 이번호(1512호)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경주시민이라면 경주역에 얽힌 사연과 기억이 없을 수 없겠다. 이번호에서는 시민들이 체감하는 경주역 폐역에 대한 소회와 경주역에 대한 추억담을 들어보았다. 시민들은 한결같이 폐역 후 경주역사 보존과 활용에 입을 모았다. 지난 2일에는 저녁 6시 35분경 경주역을 찾아보았다. 경주역 광장 한 모퉁이에서 쭈그리고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던 어느 시민을 보자니 가슴 한켠이 저려왔다. 역 내 대합실과 플랫폼에는 평일 저녁 시간이었는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마침 6시 50분 무궁화호를 이용하려고 드문드문 플랫폼 의자에 앉아있는 승객들은 기차를 기다렸다가는 곧 떠났다. 그들은 곧 폐역될 경주역의 운명을 알고 있을까. 우리는 경주역이 폐역되더라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한다. 10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경주시민뿐만 아니라 경주를 찾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적이거나 혹은 특별한 삶의 한 부분을 감당해 낸 공간이었다. 이제 그 공간이 다시 문화적 자산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경주역이여! 굿바이!
-103년간 경주역의 명멸(明滅)을 갈무리할 경주역 마지막 역장 이순호 역장...“폐역 하루 직전까지도 역의 모든 기능은 하게 되고 대부분의 경우 자정 24시 기준으로 진행될 예정” 경주역이 개역한 이래 103년째, 경주역의 숱한 명멸을 지켰던 여러 수장들 중 그 마지막의 대미를 장식하는 역장은 이순호 경주역 역장(한국철도공사 대구경북본부)이다. 1984년 입사 후 37년째 근무중인 이 역장은 직전에 코레일 대구본부서 근무했다. 그는 서경주역, 나원역, 건천역을 거쳐 대구본부로 갔기에 경주역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는 역장이다. 이 역장은 경주역 폐역의 모든 순간을 지휘할 예정이다. 최근 부쩍 폐역에 대한 문의 전화가 많아졌다고 전하면서 시민들의 경주역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이순호 역장은 “역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요. 특히 경주역은 말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막상 부임해 와보니 엄두가 나질 않았어요.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경주역은 그간의 기능이나 역할, 히스토리나 상징적 의미에서도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역 중 한 역이므로 폐역은 상당히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인 경주의 관문으로서 경주역은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역이고, 경주역에 관한 추억은 누구나 한 자락 정도 간직하고 있을 겁니다. 5~6년전만해도 수학여행단이 경주 와서 가장 먼저 첫 발을 내딛는 곳이 경주역이었잖아요. 이런 경주역이 통째로 없어지고 폐역된다는 것에 대해 늦게나마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라면서 첫 운을 뗐다. “11월 폐역 이야기가 대두됐으나 신경주역에 새로 생기는 선로의 시설물 점검이나 영업 시운전 등 법적으로 정해진 절차가 남아있어서 오는 12월 20~30일 경으로 결정이 날 걸로 예상됩니다. 폐역 하루 직전까지도 역의 모든 기능은 하게 되고 대부분의 경우 자정 24시 기준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경주역은 새로 생기는 역들의 개통에 맞물려 본격적 이사 준비 시작되고 폐역하게 돼 이순호 역장은 “기존 노선에서 변경되는 새로운 노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지금은 태화강역에서 호계역, 입실역, 불국사역, 경주역, 서경주역을 거쳐 운행됐다면, 호계역부터는 없어지고 호계역에서 신경주역으로 바로 연결이 되는 형식이 있습니다. 또 신경주역에서 새로 생기는 신나원역에서 포항으로 들어가는 형식이 있고요. 따라서 사라지는 역은 입실역, 불국사역, 경주역, 서경주역, 나원역, 안강역 등이죠. 그 중에서 안강역은 위치를 옮겨 다시 짓고 나원역도 신나원역으로 옮깁니다. 또 하나는 영천에서 내려오는 노선인데 서경주역, 경주역으로 들어오는 라인은 선로만 약간 변경돼 중간에 아화역이 새로 생기고 대구서 무궁화를 이용하려면 영천에서 새로운 아화역을 거쳐 신경주역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경주역의 위치보다는 도심으로의 접근성이 지금보다는 다소 용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저희도 걱정입니다. 접근 노선은 정책적으로 결정되는 부분이라서 어쩔 수 없지요”라고 했다. “역을 새로 여는 것보다 문을 닫는 작업이 훨씬 걱정이 되고 힘드는 작업입니다. 경주역의 ‘문을 닫자’ 하고 경주로 왔습니다. ‘문을 닫는다’는 것은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의 심적 동요를 일으키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근무지가 문을 닫으니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걱정안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문을 닫는 순간까지는 여전히 사고 우려도 있으므로 일단 문을 닫는 날까지 안전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는 28일부터 새로 개통되는 역에 대한 영업 시운전이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 역장은 “신나원역(가칭), 안강역, 새로운 아화역, 모량신호장 등에 대한 영업시운전이 끝나야 하고 한 달여 시운전이 끝나면 이용자 점검 등 여러가지 점검을 하고 보완할 점에 대해 보완한 뒤 12월 말경 개통하게 됩니다. 경주역은 새로 생기는 역들의 개통에 맞물려 이후 본격적 이사 준비가 시작되고 폐역하게 되는 것이지요” 라고 했다. 따라서 폐역 D-day는 영업 시운전이 끝나봐야지 정확한 날짜를 알릴 수 있다고 한다. -“정말 텅텅 비게 될 것 같습니다. 경주역 건물 안의 모든 것을 비우게 된다는 의미지요” “경주역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경주역 안의 여러 별도의 소속과 기관들이 없어지게 됩니다. 즉, 경주역 내 경주기관차 승무사업소와 소속 기관사 인원들, 시설팀, 건축사업소, 신호, 전기나 시설사업소 등 철도에 필요한 모든 사업들이 함께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죠. 동시에 일괄적으로 모든 기능들을 잃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필요한 장비 등은 포항역 쪽으로 이전, 통합하게 되고 나머지 건축물 등은 경주시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남습니다. 소소하게 비품이나 장비 등을 옮길 것과 폐기할 것을 분류해서 정리해야 하고요. 정말 텅텅 비게 될 것 같습니다. 경주역 건물 안의 모든 것을 비우게 된다는 의미지요” 경주역은 큰 규모의 역이어서 한꺼번에 옮겨가야 하는 현재로선 여러모로 일들이 산적해 있으며 경주시와의 인수인계 과정이 남아있다고 했다. “자산관리는 코레일 본부 자산관리팀에서 인계를 하고 경주시에서는 경주 역사 건물, 주차장 등과 연관해서 임대 형식으로 운영관리하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역장은 폐역의 가장 마지막 절차로는 코레일이 국토해양부에 폐역 고시를 하고 국토부에서 고시가 되면 완전한 폐역의 수순을 밟는 것이라고 했다. -경주 철도교통의 백년대계 보는 시각 아쉬워...시 외곽지인 신경주역에서의 주변 교통편을 확충한다고 해도 지금 같은 편리함은 누리기 어려워 경주역이 문을 닫게 되면 일제강점기 이후 지표 조사를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3만2000평 역사부지에 대한 지표조사만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발굴이 끝났다 하더라도 보존이냐 박물관으로 옮길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시간이 또 걸린다고 한다. 경주역 존립과 폐쇄의 문제는 그만큼 간단치 않은 것이다. 경주역의 모든 기능이 신경주역으로 흡수될 경우, 수도권이나 대전, 부산 등에서는 빠른 접근을 할 수 있지만 연계 교통편의 경우 경주역이 훨씬 우월했다. 경주역을 통해 많은 관광객이 유입되고 역 주변에 대표 관광지가 밀집돼 있어 시 외곽지인 신경주역에서의 주변 교통편을 확충한다고 해도 지금 같은 편리함은 누리기 어렵다는 것이 지론이다. 이에 대해 허남태 전 경주역장은 “동해선과 중앙선의 복선전철화가 완료돼 경주역이 폐쇄되고 현곡면 새 역이 개업하면 머지않아 포항 가는 ktx가 간간이 설 수 밖에 없고 상황은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경주 철도교통의 백년대계를 보는 시각이 아쉬운 대목입니다. 불국사, 경주, 서경주 이 세 역의 기능을 신경주역이 흡수해야 하는데 사실은 거의 기존고객 3분의 2는 흡수하지 못할 것입니다. 현곡역도 서경주역처럼 많은 기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포항에서 영천, 동대구, 부전가는 열차만 이용할 수 있으니 역사 위치가 다소 문제지요. 경주를 거쳐 가는 많은 일반열차이용객들은 거의 흡수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했다. -경주시, 경주역 운행 종료 아쉬워하는 시민들에 소소한 이벤트 준비, 경주역은 100년의 시간동안 3세대에 이르는 시간적 역사적 가치가 존중돼야 할 자산으로 미래의 먹거리 폐철도 활용 전담기구인 경주시 폐철도활용사업단 TF팀 관계자는 “폐철도 활용사업은 도시재생, 신교통수단 도입, 관광,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도시발전의 새로운 이정표다”라고 했다. 또 “향후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의 복선화 사업이 종료되면 경주시와 철도시설공단, 한국철도공사 세 기관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폐철도 역사(驛舍) 활용방안이 대립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주시의 주도적이며 주체적인 의지에 따라 그 활용도가 달라질 것이다”라면서 “폐철도 자원은 일제강점기 잔재이지만 100년의 시간동안 3세대에 이르는 시간적 역사적 가치가 존중돼야 할 자산으로서 미래의 먹거리로 경주시가 적극 반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경주역 운행 종료를 아쉬워하는 시민들의 정서를 달래기 위해 ‘경주역 기차여행단(가칭)’을 모집해 경주역에서 불국사역 정도로 떠나보는 간단한 이벤트를 다각도로 구상중이다. 코레일 측과 협의를 해서 결정할 것이다”고 전했다. 이런 움직임은 민간에서의 여러 기획들로도 감지되고 있는 차제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떠나고 싶었을 때 우리는 기차를 탔다. 특히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 쯤은 다녀갔을 법한 경주역(성동동 40번지(원화로 266))은 우리들 기억과 회한이 서린 역일 것이다. 영원한 아날로그의 상징인 기차와 철로와 수많은 사연들을 품었을 경주역. 협궤열차(경동선)로 개통된 1918년 이래 지금까지 103년째, 총 영업일수 3만8855일이라는 세월동안 우리들 곁에서 자신의 넉넉한 품을 말없이 내어주었다. 때로 경주역 광장에선 학도병 지원을 결정한 참전 학도병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두르고 역 광장에 집결했다. 경주 시민들이 열렬한 환송을 해주었던 역 광장은 정치유세 1번지로 촛불집회, 월드컵 거리응원, 노동자들의 하소연과 집회 등 우리들 환희와 울분을 터뜨리는 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오는 12월경, 동해선과 중앙선의 복선전철화가 완료돼 기존 철로는 폐선이 되는 수순을 밟는다. 기존 경주역은 신경주역과 통합될 예정으로 신경주역에 동해선 승강장 및 선로를 마련한다. 역으로서는 그 기능과 역할을 종료하게 되니 기차 경적소리는 사라지고 구도심의 핵심 부지가 당분간 거대한 공터로 바뀌는 현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경주역은 경주의 문지기로, 우리와 같이 존재했고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그 명운을 함께 할 것이다. 경주역사의 운명은 이제라도 그의 노고를 인정하고 그와의 추억을 기억하며 그와 더불어 살아가려고 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경주의 큰 별이 또 하나 지고 말았다. 우경(偶耕) 윤광주(尹光柱, 1945~2021) 선생이 오랜 지병 끝에 77세를 일기로 지난달 20일 별세했다. 우경 선생은 영원한 신라인이자 문화인이었던 고청 선생의 자제로서, 고청의 열정과 뜻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구현한 이다. 부친인 고청 선생의 평생노력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작업과 함께 유물과 유적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수많은 문화재를 복원하고 복제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영역으로의 작업의 확대 발전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전국 국가 박물관은 물론 문화재 관련기관과 일반 사업장의 주요 유물복제 제품과 옛 현장 재현은 거의 선생의 손길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선생의 끊임없는 연구와 열정, 노력 덕분이었다. 경주 토박이로서 고청 선생의 업적을 고청기념관으로 이어가는 그의 행보는 열정적이었지만 소박했다. 그런데 약 한 달 여 기념관 준공을 앞두고 위태롭던 선생의 건강이 결국 무너졌다. 상량식은 보았지만 준공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한 우려가 적중했던 것이다. 미완의 유업만 남겨둔 채다. 지난 8월 24일, 그토록 염원하던 고청기념관 착공 직후 이뤄진 선생과의 인터뷰는 이제 마지막이 되었다. 그날 유난히 음성이 낮고 잦아들어 선생의 건강이 무척 걱정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부친인 고청 선생의 업적을 제대로 조명할 수 있는 공간에의 기대감을 비추며 희망을 이야기했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문화의 현장에선 아프고 고단한 몸을 이끈 선생을 거의 예외 없이 만날 수 있었다. 선생은 문화예술을 최우선으로 꼽으며 기여하기를 바랐고 또 큰 공로를 세우고 떠났다. 유족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49제를 올리고 이제 막, 3제를 지냈다고 한다. 유족들은 번갈아가며 고택을 방문하고 조용하게 유업을 받들기 위해 의논하며 고심하고 있다. 한편, 49제를 마칠 즈음 현재 남산 자락에 묻혀있는 고청 선생 부부와 함께 우경 선생도 유족이 마련해 둔 내남면 비지리 땅에 묘소를 새로 마련할 예정이라고 한다. -오랜 시간동안 기념관 건립 염원하고 애타게 기다려왔기에 준공까지 보고 가시기를 기도했으나 결국 영면에 들어 때로는 시기가 너무 늦어져서 그 의의와 가치가 손상되는 일들이 더러 있다. 하물며 그것이 어떤 선각자의 정신을 기리는 일 일 때면 더욱 한탄스럽다. 우리 지역에서는 고청기념관 건립의 건이 그 대표적 사례였다. 지난 8월 20일에서야 우여곡절 끝에 양지마을 고청고택 바로 옆 부지에서 개토식을 시작으로 기념관 건립의 그 첫걸음을 알렸었다. 우경 선생은 생전에 “2019년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아까운 기록들이 얼마나 유실됐는지 몰라요. 비닐하우스 안에 보관돼있던 서적과 자료들이 속수무책으로 물에 잠겼었지요. 그러니 기념관 건립이 늦어진 것이 원망스럽기끼지 했어요. 그전에 지었더라면...,”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기념관이 착공은 되었으나 당시 지병이 부쩍 악화되었던 선생의 소회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선생의 얼굴에서는 기념관 건립을 두고 진척에 어려움을 겪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읽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기념관 건립을 염원하고 애타게 기다려왔기에 준공까지 보고 가시기를 기도했으나 결국 영면에 드신 것이다. -“참 좋은 친구이자 예술가, 문화인을 잃어버렸어요. 문화재를 가장 흡사하게 되살리는 전문가를 경주가 잃어버린 것입니다” 50여 년간 우경 선생의 절친한 지기이자 고청기념사업회 김윤근 회장은 “우경(偶耕)은 그의 아호입니다. 허재비 우, 인형 우(偶)에 갈 경(耕) 자인데 흙 인형 만들고 신라 토우를 만든다고 그리 지었다고 합니다. 그 호에 자신의 갈 길을 담아 둔 것 같아요. 몸을 굽혀 흙을 빚어 토우를 만들고 밭과 논을 가꾸는 것처럼 문화와 예술을 일구는 일을 하겠다는 다짐이었겠지요. 우경의 정신이 거기 깃들어있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신라문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국내최고의 유물복원전문가였습니다. 한국 최고의 전문가였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경주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물을 복원하고 재현했던 열정과 의지를 저에게도 알리고 의견을 나누었던 우경이었습니다. 참 좋은 친구이자 예술가, 문화인을 제가 잃어버렸어요. 문화재를 가장 흡사하게 되살리는 전문가를 경주가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아직 매일 전화가 올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기리는 연구관을 잘 짓기 위해 그렇게 애썼잖아요. 기념관 지붕의 맨 끝 기둥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 다음날 운명했는데, 고청기념관 완공에 대한 자세한 구상과 계획을 전하고 떠났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원했던 기념관 준공은 보지 못하고 떠났으나 그의 혼과 정신은 기념관에, 그가 만든 예술품에 살아남아 영원하리라 생각합니다” 김 회장은 이어 “워낙 어린시절부터 부친이었던 고청이라는 거목의 큰 그늘 아래 있었고 아버지의 정신과 혼을 배워서 문화재를 복원하고 재현했지만 경주에선 덜 알려진 측면이 있습니다. 늘 고청이라는 아버지의 그늘을 욕되지 않게 하려고 애썼지요”라고 말했다. “기념관이 완공되면 고청 선생은 물론, 우경의 정신을 기리는 각 자료들도 함께 구성할 계획입니다. 아쉬운 것은 여러 공적과 기여에도 그의 생전에 아무런 시상이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고청기념관이 준공될 즈음 작은 문화상이라도 시상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고인이 된 이후지만 그의 공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도 마련할 생각입니다” “경주에 살면서 많은 일을 했으나 그의 업적을 미처 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기술적으로나 문화예술적으로도 조상님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 친구입니다. 몸 굽혀 문화를 일깨우려 최선을 다한 친구였습니다” -경주읍성 재현 등 문화재 복원 및 복제 사업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워...역작인 광개토왕비는 실물 크기 그대로 완벽하게 복제 우경 윤광주 선생은 1945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부친인 고청 선생의 손에 이끌려 경주로 내려왔다. 경주의 문화 일꾼을 길러낸 ‘고청 사숙’, ‘경주어린이박물관’이 뿌린 씨앗들 중 윤광주 선생도 있었다. 선생의 만만치 않은 이력처럼 유물 복원복제 전문가라는 수식이 있는데 고청 사숙, 어린이박물관학교를 거치면서 배우고 익힌 눈썰미가 바탕이 되었다. 경주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공예과에 진학했으나 집안에 닥친 우환으로 공부에 전념치 못했고 가구 공장 디자인 실장직을 맡았다. 군을 제대하자마자 서울에서 옹기와 전돌 등을 굽는 공장을 차렸고 테라코타 기법을 연구하며 각종 장식과 건축 일에 나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복원 복제 쪽으로 전향해 일생을 매진해 왔다. 1974년 선생의 첫 작품인 한국 최초 대형 테라코타를 만들었다. 이후 경주읍성 재현 등 문화재 복원 및 복제 사업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통일전 벽면 부조(1975), 부산코모도호텔의 고대문양(1977), 국립경주박물관 선덕대왕신종 전면문양(1981), 잠실롯데민속박물관 석굴암 재현과 석기유물(1984), 국립진주박물관 가야의 마갑과 갑주(1985) 등 수많은 유물복제 작업을 했다. 용산전쟁기념관 역사관의 화포를 재현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의 복원, 경주사람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도 복원했다. 관련 전문가들은 선생의 솜씨를 칭찬하고 그 실력을 인정했다. 특히 주목할만한 작업은 1982년에 제작한 실물크기 그대로였던 광개토왕비, 황룡사치미, 금동대탑 등 여러 유물을 실물 크기 그대로 완벽하게 복제 제작했다. 이들 작품들은 지금도 독립기념관에서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는 선생의 자랑스런 작품들이다. 특히 광개토왕비는 선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유물복제전문가로 그 명성이 자자할 때였다. 이 제작을 위해 중국 지안(集安)에서 현지 전문가 도움을 얻어 대왕비 보호각 문을 걸어 잠그고 사흘 밤낮 비석을 실측하고 그를 토대로 실물 그대로 대왕비를 복제해 독립기념관에 안치한 일은 선생의 혼과 솜씨를 담아 웅장하고 당당하게 구현해낸 역작이었다. 한편 소설가 최인호와 작업한 ‘잃어버린 왕국’ 다큐 영상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다. 경주민속공예촌을 건설해 우리의 문화재를 복원할 공간을 만들었던 것도 선생의 디자인이었다. 또 신라대종 조각의 방향과 디자인 문양 부분(단청 부분 포함)에 자문위원을 맡으며 신라적 단청의 해법을 제시했다. 그러니, 전국 국가 박물관은 물론 문화재 관련기관과 일반 사업장의 주요 유물복제 제품과 옛 현장 재현은 거의 선생의 손길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선생의 끊임없는 연구와 열정, 노력 덕분이었다. 고서란 고서는 다 뒤적이며 고청의 가르침과 자신의 부단한 노력 끝에 나온 최고의 경지였다. -에필로그...‘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우경 선생과는 각별했다. 지역의 여러 문화현장과 현안에 대해 늘 애정을 가지고 자주 제보 전화도 해 주셨던 분이었고 자문을 구하는 인터뷰라도 할라치면 전해줄 메세지를 일일이 연필글씨로 써서 함께 전해주곤 하셨다. “선 기자, 오늘 기념관 기둥 올라갔데이!” “네! 선생님, 곧 한 번 다니러 가겠습니다” 그 통화 사흘 뒤 선생은 영면에 드셨다. 바람 앞에 촛불 같이 하루하루 겨우 버티시다가 결국 고청기념관 준공도 보지 못하고 황망히 떠나시니 안타까운 소회 금할 길 없다. 세간에선 그래도 착공이라도 보고 가셨으니 다행이라 하는데 그것으로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기념관이 완공되면 고청 선생이 아이들에게 즐겨 이야기를 들려주던 대청마루에선 다시 어린이들과 후학들의 토론과 담소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우경 선생도 그들 틈에서 예의 그 자상한 미소로 함께 계실 것 같다. 고청기념관이 세워지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면서 소박하고도 한결같이 염원했던 선생은 가고 없지만 그 정신과 혼은 후학들에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선생은 늘 대학노트 한 권과 노트 사이 펜을 끼워 다니시며 메모를 즐기던 분이었다. 베레모를 즐겨 쓰고 다소 구부정한 모습으로 천천히 걸으며 기나긴 항암치료에도 언제나 자상한 미소를 머금으며 체화된 귀족적 풍모로 멋을 냈다. 수년 전 어느 봄날 모처럼 황사와 미세먼지에서 모처럼 벗어나 활짝 개인 하늘을 보며 “저 하늘 좀 봐봐. 이 미풍은 또 어떻고!”라며 맑게 걷힌 하늘을 올려다보던 선생의 그윽한 눈길을 잊을 수 없다. 자연을 예찬하며 평생 골몰했던 문화와 예술에 대한 동경과 탁월한 식견과 탐미는 선생의 일생을 관통했다. 이제 선생은 가고 안계시니, 선생의 외롭고 고단했던 발자취를 한 줄 기록으로나마 선생의 영전에 갈음할 뿐이다.
문화재 전문사진작가 오세윤(58)은 그의 경력과 ‘업적’에 비해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경주에 살면서 40여년간의 사진작업을 하는 동안 지난 2013년 서울에서 ‘신라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첫 개인전을 가진 것에 그친 정도다. 신라 천년의 시간을 되짚어 보았던 전시에 이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10월 3일까지 진행되는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전에 참여하고 있으니 기나긴 사진 작업 끝에 고작 두 번째 전시를 가지는 셈이다. 이번 전시는 그간의 노고와 그가 흘린 땀의 결실의 일부로 오롯한 결정체로 구현됐다. ‘사진가는 카메라 뒤에 있어야 한다’며 매스컴에 오르내리기를 꺼려했던 이유일까. 책자에 ‘사진촬영 오세윤’이라는 이름 외에는 노출되는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까. 문화유산계에서 오 작가는 문화재 전문사진작가로 통하고 국립박물관이나 문화재청에서 나온 보고서나 도록에 실린 무수한 사진이 그의 손을 거쳐 발행된 것에 비하면 그의 명성은 그리 높지 않다. 전업 사진작가라면 종종 겪는 경험담이겠지만, 드론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경비행기를 타고 항공촬영을 하기도 했다. 큰맘 먹고 장만한 1억짜리 카메라가 박살나 애를 태우기도 했고 남산탑골마애상 촬영 때는 뱀에 물려 혼비백산했다고도 한다. 좋은 사진 찍겠다며 국내 문화재 현장은 물론, 타클라마칸 사막 모래밭을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 그가 2002년부터 촬영을 해 지금까지 발간한 책이 193권이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도록의 면면에선 수많은 그의 작품너머 감지되는 굵은 땀방울을 읽을 수 있다. 천년 고도인 경주의 오늘에 자신이 서 있으며 옛 신라로부터 계승해 내려온 역사와 정신을 되짚어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작가 오세윤을 드디어 만났다.
마을 입구에서 쭉 뻗은 도로를 따라 바라보는 마을 원경은 아름다웠다. 큰 산 자락에 울긋불긋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한참 무르익고 있는 너른 평야의 벼들은 녹색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산과 들판이 맞닿아있는 그 사이에 집들이 들어서 있는 형상이다. 바로 도초(道草)마을이다. 도초마을은 경주톨게이트 맞은편에서 서남산을 마주 바라보는 마을로 삼릉이 지척이다. 경주 시내서 10여 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비교적 접근이 용이하지 않아선지 마을의 규모나 위상에 비해 덜 알려진 마을이었다. 그러나 수 년전 부터는 빠르게 변화하며 신풍속도가 이뤄지고 있는 마을이다. 신라때부터 자연부락이었던 도초마을을 오른쪽으로 끼고 조금 거닐다 보면 시원하게 탁트인 전경과 형산강 물줄기가 나온다. 물줄기를 따라 예부터 이곳 도초마을 원주민들은 논농사를 주로 지으며 토마토 재배 등 복합영농도 하고 있다. 이 마을은 다른 농촌과는 달리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고 있다. 예전 약 100호 정도 가구에서 지금은 140여 호로 늘어났다고 했다. 최근 신축펜션이 유난히 많이 들어서 있는 편이고 농촌 마을임에도 규모가 제법 큰 카페도 두 군데였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크지 않은 집들이 옹기종기 연이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널찍널찍하고 길쭉하게 집들이 배치돼 있어 마을의 규모가 더욱 확장돼 보인다. 마치 평야 같이 트인 넓은 경작지 따라 주택들이 조성돼 있는 듯 했다. -도초(道草)...경주에서 남으로 길을 나오면 풀 있는 곳이 처음으로 보인다고 해 명명 율동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도초(道草) 마을은 신라시대 경주에서 남으로 길을 따라 나오면 풀이 있는 곳이 처음으로 보인다고 해 명명됐다고 한다. 또 ‘경주풍물지리지’에 따르면 마을이 산의 베개와 같은 모양이라 하여 ‘뒷침이마을’로 불리다가 조선 초기부터 ‘뒷초(草)’로 고쳐 불렀으며 일제강점기 ‘도초’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고도 한다. 현재 선두길, 도초길 이라는 도로명으로 구성돼 있는 이 마을에는 원주민들의 집들과 함께 띄엄띄엄 신주택들이 조성돼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택지를 조성해두고 분양을 하는 곳도 여럿 보였다. -100년도 넘은 정미소 올해 초 영업 정지, 50년은 족히 넘은 구판장도 역시 올해 초까지 운영 마을 한복판 즈음, 주택들 사이로 붉은 양철집이 눈길을 끌었다. 양철을 덧대어 지붕을 덕지덕지 이어놓은 정미소가 칠이 벗겨져 더욱 세월의 더께를 더하고 있었는데 정미소 바로 옆에는 역시 오래돼 보이는 마을 구판장이 있었다. 구판장 앞에는 팔다 남은 듯한 막걸리 병들이 상자에 쌓여 있었다. 그 바로 앞 정자에서 한 어르신이 오후 한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미소의 상호를 묻자 ‘이름도 성도 없이 운영’됐다고 한다. “마을 입구 쪽 ‘황남정미소’라는 곳은 생긴지 3년여 째입니다. 우리마을은 곡창지대라 정미소의 역할이 크고 규모도 크게 지었지요. 그리고 이 정미소는 100년도 넘은 정미소라고 알고 있어요. 모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탕탕’거리는 구식 기계로 작업하는 정미소였어요. 미질이 다소 떨어지긴 했어도 오랫동안 이 마을 사람들이 애용했던 정미소지요 ” 그런데 안타까운 이야기가 곧 들려왔다. “올해 초 영업을 정지했어. 주인이 팔려고 내놓은 상태지요. 마을 입구에 새로 생긴 정미소도 있고 재래식 기계여서 운영이 잘 안됐거든” 한편, 정미소 바로 옆에 위치한 구판장도 문을 닫았는데 이곳 역시 올해 초까지 운영됐다고 한다. “이 구판장도 50년은 족히 넘었어요. 구판장에서 막걸리 사서 이곳 정자에서 마시며 쉬고 이야기 나눴지. 이제 문을 닫았으니 많이 아쉽지요” -이런 느끼함 그리웠다. 시카고 피자 & 아이스아메리카노... ‘카페 바나’ 마을 중간쯤에 이제는 허름해진 버스승강장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을 깊숙히 안쪽으로는 서남산이 더욱 가까이 위치한다. 이곳에는 새로 지은 건축군들이 우뚝한데 가장 앞쪽에는 개업한 지 1년 반 정도 되는 ‘카페 바나(27, 조윤형 대표)’가 마을의 지형을 바꾼듯했다. 이곳의 주인장은 오랜 기간 탄탄한 준비 과정을 거친 청년 창업주였다. 직접 만든 도마와 플레이팅 나무접시들도 카페 한쪽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농촌 들판 한 가운데 위치한 카페인데도 손님이 많은 편이었던 이 카페가 다소 신기했다. 우리는 치즈가 듬뿍 들어간 ‘시카고 피자’와 시원한 커피를 주문했다. “우리 가게에는 우연히 마을을 지나다 들르시고 조용해선지 단골손님들이 많아요. 현곡면에서 오시는 분들도 있고 시내권에서도 많이 오세요. 지난해보다 평일 손님 비중이 많아지고 있구요. 일부러 이곳까지 오시는 것이 감사해서 쿠키 등은 단가를 낮추고 인건비는 거의 남기지 않고 저렴하게 제공해 드리고 있어요. 스물한 살부터 베이킹(baking) 일과 펍 (pub) 등에서 일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어요. 브런치 카페만도 세군데서 메인으로 일하고 핵심 제빵사로도 일한 경력이 있어요. 원래 제 목표가 이런 일이었거든요” 그녀는 “마을 반장님이 이곳에 정착하라고 개업 때 화분도 사주시고 개인적인 정기모임도 여기서 가지셨어요. 또 주민들은 손님이라도 오시면 저희 카페를 이용해주시죠. 그런 마음들이 감사해서 저도 커피 한잔씩 드리곤 해요. 요즘은 자주 땀 식히러 들르시기도 합니다” “저희집 근처 잡초도 베어 주시고 정원에 심어둔 나무와 꽃들도 주민들의 정원에 있는 꽃들을 나눠주시며 ‘손님들도 같이 봤으면 좋겠다’고 하세요”라고 하면서 정원 한쪽의 그네도 주민 한 사람이 쓸모가 없다고 기증해 준 것이라 귀띔했다. 마을 주민들에 잘 스며들어 공존하는 그녀가 참 예뻤다. 마을을 빛나게 하는 활력소였다. 이 카페 뒷동에는 펜션이 나란히 들어서있고 각 동마다 주인이 다른 시스템이어서 각각의 운영을 하고 있었다. 이미 주중에도 ‘만실’일만큼 성업중이라고 한다. 펜션에서 하룻밤 묵으며 바로 앞 카페에서 커피와 간단한 브런치를 즐길수 있으니 여행객들의 환영을 받을만했다. -‘카페 도초(道草)’...브런치& 간편한 식사 곁들인 커피 한 잔 즐기기 좋은 공간// 카페 인근 주택들에선 거실서 경주시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최고 전망 이 마을 가장 높은 곳으로 보이는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1,2층으로 구성된 ‘카페 도초(이유형 대표)’가 지난 7월 개업했다. 카페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시내권역이 한 눈에 시원스레 펼쳐진다. 초록초록한 들판의 풍경과 높아만가는 초가을의 하늘을 자연스레 카페안으로 차경해 더욱 여유로운 공간으로 연출한 주인의 안목이 돋보이는 공간이었다. 천혜의 뷰(view)가 워낙 뛰어나다보니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카페에선 경부고속도로가 멀리 보이고 이 도로를 휙휙 지나는 차들은 정적인 이곳의 산야에선 매우 동적인 요소로 보여 묘한 밸런스를 연출했다. 카페 도초는 요리를 즐겨하는 안주인이 간단히 즐길 수 있는 브런치 메뉴와 간편한 한식도 개발 중이라 식사를 곁들인 커피 한 잔을 즐기기 좋은 공간으로 보였다. 이 대표는 “들판이 넓은 아랫마을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마을입니다. 이곳은 아랫마을과는 다소 분리돼 있는 위치입니다. 원주민은 아랫동네, 새로 조성된 주택부지는 동네 윗부분에 있는 편이죠” “경주가 고향인 저도 떠나 있다가 이곳에 집을 지어 정착하고 카페도 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곳 출신 친구들이 건강하고 몸이 좋았어요. 워낙 곡창지대라 밥은 실컷 먹었던 것 같아요. 하하. 이곳 언덕배기 집들은 야트막한 야산을 개발해 한 채씩 건축허가를 얻어 지은 집들입니다”라고 했다. “저희 카페 주변 집들은 수년 전만 하더라도 몇몇 주택에 불과했는데 빠른 속도로 집들이 늘고 있어요. 직업군이 다양한 분들이 이사 오시는데 입주 후 만족도가 높다고들 합니다. 이웃의 대부분 집들에서는 거실서 경주시내가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조성돼 있거든요” -도초마을은 고속도로 진입의 반대방향에 위치하고 있어 마을 가기 위한 이정표 등 안내 표시 필요 이 카페를 내려오자 ‘미각도예’라는 공방도 나타난다. 전통 한옥 방식을 고수한 ‘경주한옥펜션’도 이웃해있는데 고즈넉하고 조용해 진정한 마음 쉼터로 추천이 많다고 한다. 굵은 서까래와 대들보는 꽤 남성적인 한옥의 풍경이다. 툇마루의 난간도 굵은 목재를 사용해 중후한 한옥의 멋이 흘렀다. 경쾌한 새소리가 들리는 한가로운 농촌 풍경을 즐기기엔 최적지다. 한편, 경주인터체인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1.3km 지점인 이 마을은 경주톨게이트를 지나 100미터 즈음에 도초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그런데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진입하기 전 도초마을로 돌아가는 이정표가 없어 초행길에는 톨케이트로 진입하는 실수가 종종 있다고 한다. 현재 톨게이트 진입 바로 직전 ‘광명’, ‘율동’은 이정표에 크게 표시되어 있으나 도초마을 관련 표시는 없었다. 도초 마을 안으로 처음 가보는 기자도 헛갈렸다. 도초마을은 고속도로 진입의 반대방향에 위치하고 있어 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톨게이트 아래로 우회해서 진입했다.
고청 윤경렬(古靑 尹京烈, 1916~1999) 선생. 경주서 ‘고청 선생’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다. 그만큼 널리 그 업적과 자취가 알려진 이가 드물 정도로 지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로 기억한다. 그래서 지역민의 고청기념관 건립에 관한 염원과 관심은 지대했다. 아직도 고청 선생의 모습과 활동들이 기억에 생생하다는 시민들은 하루라도 속히 기념관 건립을 염원하고 있던 차제였다. 드디어 지난 20일, 그 첫걸음으로 고청고택에서 개토식을 시작으로 기념관 건립을 알렸다. 2002년 선생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고청기념사업회(회장 김윤근, 관장 윤광주) 창립총회에서 기념관과 추모비 건립 등의 중요사업을 확정지은 후 19년여 만이며, 2010년경 고청 옛집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매입해 국가유산으로 관리하면서 고청기념관 건립 추진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는 소식이 있은 지로는 11년만의 개토식이었다. 그 긴 시간동안 문화유산국민신탁과 고청기념사업회, 경상북도, 경주시가 함께 건립을 진행해왔지만 기념관 건립은 뚜렷한 진척 없이 여러 차례 설계가 수정, 축소되었었다. 결국 3억5000만원의 예산(문화유산국민신탁 지원금 2억7000만원, 도·시비 보조금 6000만원, 고청기념사업회 2000만원)으로 조촐하게나마 단층으로 올해 12월경 준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기념관은 선생이 남긴 그림 한 폭, 원고지 한 장, 토우로 전해지는 신라인의 미소가 소중한 자료로 보존되고 선생이 하고자했던 더욱 많은 이야기를 담아 숭고한 뜻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어린이 박물관 산실인 고청 고택에 대해 역사적 가치와 이해를 하고 기념한다는 것이 기본 가닥이다. -“그 실천으로서 매우 늦은 감이 있으나 님의 자취와 가르침을 실천하며” 고청기념사업회 김윤근 회장은 이날 개토제 축문에서 “스승의 자취는 우리들의 모습으로 남는 것이요, 우리들의 모습은 그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니 물려주신 문화유산을 잘 지키고 아껴 더욱 공부하여 새문화 창조의 길로 가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그 실천으로서 매우 늦은 감이 있으나 기념관을 하루 속히 건립하여 생활관에는 유품을 전시하고 공연과 사랑방 운영을 통해서는 님의 자취와 가르침을 실천하며 학문과 예술에 모두 전심전력으로 갈고 닦아 나아가겠습니다. 고도 경주를 빛내고 나라에 힘을 밝히는 새문화 창조의 터전으로 하겠사오니 천지신명과 토지신명님이 보호하시고 스승님이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아울러 이 기념관 공사가 다 이뤄질때까지 아무 탈없이 지어지도록 도와주시옵고 이로써 모두가 바라고 원하는 일들이 이뤄지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쓰고 늦었지만 순조로운 공사진행의 염원을 곡진하게 담아 읽어 내려갔다. -고청기념관...당초 계획보다 축소된 규모로 3개월여 공기 거쳐 오는 12월 준공예정 지난했던 기념관 설립 추진은 처음에는 자발적인 민간 주도에서 출발되었다. 2002년 8월 한국자산관리공사 권리소유인 고청기념관건립 예정부지 일부 경매에서 고청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에서 입찰해 등기이전을 완료한 것이 그것이다. 당시 고청기념사업회 회원들 모금액은 십시일반으로 1311만원에 달했다. 같은 해 11월, 창립총회에서 기념관과 추모비 건립 등의 중요사업을 확정짓는다. 그리고 2006년 10월 국립경주박물관 동편에 ‘하늘도 내교실 땅도 내교실’이라는 기념비를 건립했다. 2009년 11월에는 고청 10주기 추모식을 개최하고 제1회 고청상 시상과 추모음악회, 학술발표 등을 개최했다. 한편, 선생의 타계 후 자택과 공방이 한때 경매로 넘어가는 등 난관에 직면했으나 선생의 업적과 사랑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과 문화재청, 문화유산국민신탁의 도움으로 2010년 10년 만에 옛집을 되찾기도 했다. 고청 옛집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매입해 고청고택을 국가유산으로 관리하게 된 것이다. 2011년 1월 문화유산국민신탁과 고청기념사업회 간 고청고택관리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고청사업회 소유 인왕동267-3(91평) 부지를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부한다. 2014년 고청사 보수공사(문화유산국민신탁, 문화재돌봄사업단,고청기념사업회 공동)를 하고 고청기념관 설치제안서를 문화유산국민신탁과 경주시와 경북도에 제출한다. 2017년 고청사업회에서 고청기념관 기본설계계획안(1, 2층으로 약 80평)을 마련해 문화유산국민신탁에 제출해 문화재청의 신축 승인을 얻는다. 2018년 계림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을 완료하고 5필지-439평에 대해 문화재청에서 발굴을 결정한다. 2019년 발굴을 완료하고 고청기념관 건축 재승인(문화재청)이 된다. 그러나 지난해 2020년 기념관은 다시 축소 변경돼 재설계에 들어갔고 9월경 설계(단층, 31평으로 축소)가 완료돼 문화유산국민신탁의 계획상에는 올해 2021년 3월 착공예정이었으나 지난 7월 18일에야 경주시의 건축허가를 얻었다. 기념관 건축시공자결정을 입찰공고해 결정하고 지난 20일 기념관 개토식과 착공식을 거쳐 고청 22주기 추모식 및 제4회 고청상 시상식도 함께 가졌다. 정상적인 기념관 운영을 위해 문화유산국민신탁과 고청기념사업회는 그 목적에 맞는 프로그램을 추진해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노력할 것을 천명했다. -“고청 선생은 이제라도 건립되는 것을 기뻐하실 거예요. 그분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분이었거든요” “선생이 전하고자 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후학들에게 어떻게 전파할 지가 가장 큰 과제” 기념관 건립의 첫 삽은 뜨게 됐지만 만시지탄을 금할 수 없다. 고청기념사업회 관장이자 고청선생의 아드님인 윤광주 선생을 개토제를 마친 지난 24일 만났다. 최근 건강악화로 부쩍 수척해진 선생의 얼굴에서는 기념관 건립을 두고 진척에 어려움을 겪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읽을 수 있었다. 원래의 계획보다 축소되고 단촐해진 규모의 기념관이 건립될 것이기에 선생의 소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윤광주 선생은 기념관 건립에 경주의 많은 인사들의 노력에 먼저 감사하면서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 이영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등이 문화재청, 국민신탁과의 연계한 공적을 언급했다. “개토제가 끝나고 가만히 앉아 묵상에 빠졌어요. 고청 선생의 생전 모습과 교류하던 친구분들이 당시 어울리시던 모습이 스쳤어요. 애초에는 기념관에 대한 꿈이 많았어요. 지금 못다한 사업과 프로그램은 후학들에게 맡겨야죠. ‘작게라도 시작하자’며 이번에 결정이 났고 설계 완료, 신탁과의 계약완료가 됐습니다” “기념관을 짓는다는 것은 한 개인의 히스토리 공간이자 그 공간에서 본받을만한 것이 있을 때 짓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2019년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아까운 기록들이 얼마나 유실됐는지 몰라요. 비닐하우스 안에 보관돼있던 서적과 자료들이 속수무책으로 물에 잠겼었지요. 그러니 기념관 건립이 늦어진 것이 원망스럽기끼지 했어요. 그전에 지었더라면 하는...,” “그리고 기존 고청 고택은 완전히 비워 활용할 예정입니다. 수많은 서적과 자료들은 기념관으로 모두 옮기고 옛날 고청 선생이 살던 모습을 보여주고 그의 흔적을 유추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할 것입니다. 고청의 체취를 느끼고 추억할 수 있도록 공간을 채울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고청 선생이 아이들에게 즐겨 이야기를 들려주던 대청마루에선 다시 어린이들과 후학들의 토론과 담소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다. 1970년 초에 건립된 고청 고택에는 당시 후학들과 그 후손들의 대를 잇는 발길이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고청 선생도 이제라도 건립되는 것을 기뻐하실 거예요. 그분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분이셔서 그러실 겁니다. 기념관 건립의 건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발안될 당시만 해도 건립에의 열기가 뜨거웠지요. 그러나 지금은 많은 이들이 떠나, 선생이 전하고자 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후학들에게 어떻게 전파할 지가 가장 큰 과제입니다” -“운영 주체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이지만 관리주체는 고청기념사업회, 유지 받들고 이어가는 구심점 만들어야” 고청기념사업회 박임관 부회장은 “고청기념관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건립하는 기념관입니다. ‘기념관은 고청 선생이 남기고 간 가장 큰 유산인 경주의 혼과 신라의 숨결을 이어간다’는 것을 기본적인 방향성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청 선생은 30대에 경주에 내려오셔서 50여 년을 사시는 동안 신라 문화재의 우수성에 대해 일깨우셨고 아끼고 보존하는 문화를 마련한 분입니다. 그 유지를 받들고 이어가는 구심점을 만들어가는 면에서 기념관 건립은 큰 의의가 있습니다”라고 기념관 건립의 의미를 짚었다. 그는 또 “경주시민 및 관광객을 대상으로 고청선생 유품 및 작품 전시, 작품 재현 판매 및 체험, 문화재 관련 교육 등을 비롯하여 경주 문화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운영해 나갈 것입니다. 운영 주체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이지만 관리주체는 고청기념사업회입니다”라고 했다. 당초 계획보다 축소되고 변형된 고청기념관 건립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안타깝기만 하다. 마치 밀린 숙제처럼 건축물 하나를 짓는 게 능사는 아니다. ‘작게 시작이라도 된’ 그 다음에는 후학들과 고청의 정신을 계승할 우리들의 과제로 남을 것이다. 고청 선생께서 무척이나 사랑하셨다는 경주 남산의 끝자락 양지 바른 이곳에서 영원한 신라인이자 문화인이셨던 선생의 열정과 뜻을 기리는 공간이 무탈하게 준공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