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문화제 한글백일장에 초대 인사로 동리 선생을 모셨다. 그러니 8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아마 그 때가 서울로 올라가시고 공식적으로는 처음 경주에 오신 게 아닌가 생각된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는 자주 경주에 오시지 않았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오신 동리선생은 새롭고 신기하고 또 신비했는지 여느 때보다 신라문화제와 경주 여러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가장행렬이며 문학행사며 신라문화제 행사장 뒤편에서 열리는 난장과 장터, 품바 공연 등,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회원들과 함께 엿장수 골목을 누비며 흥겨워하던 일, 포장을 둘러 친 국밥집에서 막걸리를 맛있게 드시던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가 술이 한잔 거나하게 취하니 ‘예들아! 난 70이 넘었는데 아직도 현역(?)이야’ 하시던 말이 뚜렷이 기억된다. 김기문 시인의 오토바이를 타고 문화제 군중 속을 누비며 다니던 일이 어제만 같았다. 그날 저녁은 늦게까지 행사에 다녔고 밤에 <천우여관>에 와서는 회원들과 같이 막걸리를 기울이던 생각이 난다. 신라문화제 한글백일장 날이었다. 아침 일찍 사무국에서는 나물왕릉에서 행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준비하고 천막도 치고 각급학교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첨성대, 계림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다. 백일장 행사를 시작해야하는데 동리선생을 모시러 가야했다. 나는 김기문의 오토바이를 타고 <천우여관>에 계시는 동리선생을 모시러 갔다. 천우여관에 가니 동리선생은 세수를 하고 있었다. 동리선생의 세수하는 과정이 매우 특이했다. 물을 세면기에 받아 놓고 얼굴을 담그다가 머리를 담그다가 하면서 오래도록 얼굴과 머리를 문지르는 것이 특이했다. 세수하는 데만 30여 분이 걸리고 거울 앞에서 닦고 문지르고 하는 것 역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은 아침 10시가 가까워 오는 데 동리선생이 가셔야 행사가 시작된다. 우리는 조급하여 발을 동동 구르는데 동리선생은 옷을 갈아입고 천천히 여관을 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택시를 타고 현장에 가야하는데 행사 인파 때문에 택시를 잡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차를 탄다고 하더라도 거리를 빠져 나가는데 몇 시간이 걸릴지 문제였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동리선생을 김기문의 오토바이에 태워서 먼저 보냈다. 김기문의 오토바이에 올라탄 동리선생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벌벌 떨면서 “얘, 나 이레도 대한민국 국보야, 조심해서 가자!”하면서 쩔쩔 매는 모양이 보지 않아도 머리에 선했다. 한글백일장 현장에 도착한 동리선생은 신기한 듯이 둘러보면서 우리에게 지시하셨다. 백일장 제목과 행사에 관한 내용을 말씀하시고는 바로 마이크 앞에 나서서는 대회사를 했다. 그 첫마디가「나, 오랜만에 경주에 왔는데.....」시작하여 좀 길게 대회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동리선생은 수월(水月)선생을 연락해서 데리고 오라고 했다. 수월(조각가)선생은 조각가로서 동리선생의 죽마고우일 뿐 아니라 친분관계가 두터운 사이였다. 두 분은 서로 만나면 꼭 막걸리를 마시며 함께 즐겼다. 그래서 백일장 행사를 시작해놓고는 수월과 지부장과 사무국장과 함께 감포 쪽으로 바람을 쐬러 가셨다. 거기서 바닷바람을 마시며 오랜만에 회와 막걸리를 즐기고 돌아오셨다. 동리선생이 서울로 돌아가시고 문학지에 ‘수학여행’이란 소설이 발표되었다. 경주로 수학여행 온 여고생들의 즐거운 모습과 경주의 역사적 배경의 아름다운 경주를 소설로 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나중에 영화화되어 상영된 적도 있었다.
박목월 선생이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 시인협회 세미나를 경주 유스호스텔에서 개최한 바 있었다. 대회를 개최하기 1주일쯤 전에 목월께서 경주에 오셔서 정민호, 서영수, 이근식 시인을 찾았다. 우리 세명은 목월 선생을 모시고 시청으로 시장을 방문하러 갔었다. 그때 목월 선생은 육영수 여사의 교양 지도를 위해 청와대에 출입할 때였다. 사전에 연락을 하였을 뿐인데 시청은 야단법석이 난 것이다. 목월 선생은 청와대 출입이라는 그 하나만으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장을 만나고 시협 세미나를 경주에서 열게 되었다는 것과 시장의 리셉션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까지 전달하고 돌아왔었다. 우리는 시장실에 동리 선생의 이야기도 나누며 당시의 한국 문단에 동리와 목월이 있다는 자부심도 함께 느끼고 돌아왔다. 당일이 되었다. 전국의 시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목월은 대회사에서 ‘여기 경주는 나의 고향’이란 말을 강조하였고, 당시 경주시장의 환영사와 리셉션에서는 우리 경주가 ‘동리, 목월 같은 문인을 배출한 곳’이라는 것을 특히 강조되었다. 밤이 되니 많은 회원들이 시내에 흩어졌다. 특히 쪽샘이 어디냐고 물어서 술을 마시는 회원들은 모두 쪽샘으로 몰려갔다. 특히 대전에 있는 박용래는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고 호텔방에 들어와서 우는 바람에 그 방에 자는 사람은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아침에 투덜대기도 했다. 많은 회원들이 ‘경주의 쪽샘’을 되새기며 돌아갔다.
처음 월성군에서 ‘군민의 노래’를 제정할 목적으로 경주문협에 의뢰가 왔다. 경주 출신의 문인 중에 이름 있는 분에게 부탁해달라는 전달이었다. 목월이 아니면 동리였다. 그때 김동리 선생은 국정자문위원으로 있었기에 나와 이근식 선생이 동리선생께 의뢰하자고 했다. 그래서 월성군 내무과장인 박종택씨가 서울 김동리 선생께 부탁하러 갔는데 정민호, 이근식 선생과 함께 세사람이 가기로 한 것이다. 미리 연락을 해 놓고 일요일에 가기로 하고 동리선생께 연락을 드리고는 세사람이 서울로 동행했다. 동리선생 댁에 들리기 전에 미리 연락을 하니 동리선생께서 ‘한국일보’ 부근 어느 다방으로 오라고 했다. 우리는 그 다방을 찾아갔었다. 동리 선생과 만나서 어느 술집으로 갔다. 고향사람이 왔으니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하며 그 술집에서 거창한 자리를 만들어주셨고, 술대접을 거나하게 받았다. ‘군민의 노래’는 걱정 말고 내려가면 내가 김성태 씨에게 부탁하여 작곡까지 해서 경주에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1) 신라천년 옛 서울 경주 고을에/ 새나라 새 하늘의 새날이 왔네/ 나아가자 우리 모두 손을 맞잡고/ 지난날의 그 영광 되살려보세. 2) 첨성대 석굴암은 세계의 자랑/ 토함산 금오산은 경주의 기상/ 나아가자 우리 모두 손을 맞잡고/ 이 나라의 새 날에 꽃을 피우세. 그 후에 작사 작곡이 다 되었으니 경주에 오시겠다고 연락이 왔다. 우선 월성군에 연락을 하니 군수 외에 여려 사람이 동리선생을 환영 차 경주역에 나왔다. 김동리 선생이 직접 작사하고, 작곡가 김성태 님께서 작곡하여 그것을 가지고 경주에 내려왔었다. 그 때 경주역에 환영하러 나온 분들은 군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나왔다. 당시는 ‘군민의 노래’ 였지만, 지금은 ‘경주시민의 노래’가 되어 있다. 작곡 작사를 어디에 내놓아도 빠질 수 없는 경주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제1회 ‘신라문학대상’ 응모작품을 모아서 들고 김동리선생 댁을 찾은 것이 88년 가을이었다. 제1회 신라문학대상에 응모한 작품을 모아들고 심사를 의뢰하려고 찾아간 것이 동리선생 댁이었다. 미리 연락하여 김해석 황명, 원형갑 선생이 오시고 경주에서는 이근식, 서영수, 정민호가 동리선생 댁을 찾게 되었다. 미리 연락을 하여 댁이 강남 청담동 영동교 부근이란 것도 전화로 미리 알았으니 찾아가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해석 선생과 함께 가지 못했지만, 그날 동리선생 댁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서울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것이 오후 3시쯤, 전화를 걸어 동리선생 댁을 확실히 알아서 ‘비 내리는 영동교’를 생각하며 찾아가니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동리선생 댁이 으리으리하게 크다고나할까? 대문 앞에 서니 문패가 붙었는데, <金昌貴>였다. 동리선생의 호적명이 ‘김창귀’라는 사실도 그날에야 알았다. 마당에 들어서니 잔디며, 화단의 화초며 넓은 뜰에는 가을꽃이 한창 피어있었다. 동리선생은 마당에 나오며 우리를 맞이했다. 건평이 지하 지상하여 99평이라 하니 가히 짐작이 갈만도 하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김해석 선생과 황명 선생, 원형갑 선생이 와 있었다. 그 때는 서영은이 동리선생 댁에 같이 와 있었다. 널찍한 방안에서는 이미 술상이 벌어져 있고, 둘러 앉아 정종을 마시고 있었다. 동리선생 댁은 항상 정종(청주)이 준비되어 있어 오는 손님마다 좋든 싫든 이 술을 마셔야했다. 60대 쯤 되어 보이는 식모가 대기해 있다가 술 주전자를 데워 나르고 있었다. 정종 잔이 몇 순배가 돌고 거나하게 되었을 무렵 MBC기자 둘과 여자 한사람이 나타났다. 그 여자는 소설을 쓴다는 여기자였다. 동리선생과는 매우 가까운 모양, 상냥하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둘러 앉아 술잔을 받아 마셨다. 시간이 깊어지니 모두가 취할 만큼 취한 것 같았다. 술이 취한 동리선생은 벽장문을 열고 청주병 하나를 꺼내서 손수 부엌으로 나가서 술을 덥히고 어디서 안주까지 다시 준비하여 나왔다. 술이 취한 동리선생은 노래를 부르면서 즐겼는데 그 노래는 무슨 노래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정종 주전자를 들고 서영은에게 술잔을 주며 억지로 술을 따르는 바람에 술이 철철 넘치는 광경을 보아 동리선생이 매우 취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술에 취한 우리들은 그길로 나와서 어느 여관에서 자고는 아침 일찍 동리선생 댁으로 갔었다. 벌써 일어나시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아침식사까지 마치고 아침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먹었다고 대답하고 앉아 있으니 선생은 서재에 들어가시어 글씨를 쓰셨다. 한참 만에 작품 몇 장을 가지고 나오더니 하나씩을 주셨다. ‘開花如是’ ‘心外無法’ ‘蘭有香,菊有芳’ ‘淸風明月’ 이 그것이었다. 나는 아직 동리선생이 써주신 글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지금도 동리선생의 묵향이 베어나는 듯하다. 경주 황성공원에는 동리선생의 표징비가 있다. 이 비는 1997년에 한국문인협회가 SBS의 후원을 얻어 작고한 전국문인들의 연고지에 세운 것이다. 동리선생의 고향인 이곳 경주 황성공원에 이 표징비가 세워진 것이다. 이 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리東里 김시종金始鐘선생의 문학 동산」 이곳은 선생의 「무녀도巫女圖, 황토기黃土記, 등신불等身佛, 사반의 십자가 등, 가장 향토적이고 무속적인 한국 전통 정신에 접맥된 문학을 꽃피우기 위하여 일생을 바친 동리 김시종(1913~1995)선생이 젊은 시절 작품구상 을 위하여 소요하던 유서 깊은 문학 동산이다.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한국문인협회가 SBS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현대 문학 표징사업의 일환으로 이 글을 새긴다. -1997년 11월 8일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황명
내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을 하려고 찾아 간 것이 1960년 봄, 서울 미아리 고개를 넘은 것이 나의 운명이요, 동리선선과 만나게 된 첫 계기였었다. 나로 하여금 시인이 되게 한 것도 바로 동리선생과 그 대학이었다. 김동리 선생이 그 때 내가 입학하려는 창작과 과장으로 계셨다. 입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동리선생께 처음으로 내가 인사를 올렸다. 면접과 함께 ‘산정山頂’이란 제목을 주며 글을 한편 써내라고 해서 간단히 적어냈더니 나를 장학생으로 뽑아주었다. 그것이 나와 동리선생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해 봄, 첫 수업이 시작 되었다. 주로 소설 강의를 김동리로부터 받게 되었다. 동리선생에게 학점을 받기 위하여 몇 편의 소설을 쓰게 되었다. <蛤殼합각>이란 작품을 실기 시간에 발표했었는데, 내 소설을 남기수라는 친구가 낭독했고, 나중에 동리선생으로부터 평을 받게 되었다. 좋은 칭찬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합각>이 무난하고 구성이 쉽게 알 수 있는 구조로 쓰였다는 평을 받고 동리선생께 좋은 학점을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동급생들 가운데는 벌써 문단에 등단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문단에 등단도 못하고 그길로 바로 군에 입대를 하고 말았다. 입대하는 날 광장에서 나는 박수일을 만났다. 그 후는 까마득히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1979년 신라문화제 때였다. 서울서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을 초대문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소설가, 시인을 경주에 모신 것이다. 숙소를 천우여관으로 정하고 내일의 문학행사를 위하여 오늘의 전야제를 두 분의 선배 문인을 모시고 쪽샘 ‘향화정’에서 벌였던 것이다. 김동리 선생은 경주 출신의 작가로서 경주를 무대로 한 작품 무녀도, 화랑의 후예, 달, 바위, 까치소리, 등 수많은 작품을 써서 소설가로서 최대의 영광을 누린 분으로 경주가 자랑하는 선배 문인이요, 서정주 선생은 시집 “신라초新羅抄”로서 신라정신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한국 문단의 태두로 추앙을 받는 시인이다. 이 두 분을 경주에 초대하여 오시게 된 것은 경주 문인들은 더없이 영광이었다. 그 날 쪽샘 향화정(당시 경주 쪽샘에 있던 이름 있는 요정임)에 모인 사람들은 십여 명 정도, 김동리, 서정주 선생을 비롯하여 경주문협회원 여러분이었다. 저녁 무렵부터 저녁밥 대신 술상 앞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두 선배 문인을 모시고 경주의 후배 문인들은 그 동안의 여러 가지 안부를 물으면서 술을 마셨다. 그 때의 최고의 술은 백화수복이라는 정종 이였다. 박주일 선생은 좀 늦게 찾아 왔었다. 벌써 술에 젖어 있었다. 두 원로 문인에게 인사를 하는 과정부터 절반은 응석, 절반은 주정이 섞인 말투였다.
내가 목월의 첫 시집 ‘산도화’를 손에 넣은 것이 내 인생의 획기적인 운명적 사실이었다. 그 때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시집을 입수한 것도 우연한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시집 표지를 잡고 한참 보고 있는데, 표지 첫머리에 <詩集 山桃花>로 적혀있고 표지 오른 쪽에는 <四二八八年 十二月 朴木月>이라고 시인 자필로 적혀있었다. 그러니 서기로 1955년에 발행된 시집이란 뜻이었다. 나는 이시집을 들고 학교의 나뭇그늘, 교실, 심지어는 화장실에 앉아서까지 시를 일게 되었다. 그러니 이 작은 시집 속의 시들을 죄다 외우고 있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오리목 속잎 피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목월의 ‘청노루’ 나는 이 시를 읽고 시의 순수감정에 놀라고 말았다. 이런 자연 속에서 이런 시를 빚은 시인은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다 버리고 이 시 속에 나오는 자하산, 속에 있는 청운사를 찾아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우선 자하산은 어디 있는 산이면 청운사는 어떤 절인가하고 친구들께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산과 절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시인의 시 속에 나오는 산이며 절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나의 생각 ‘시인은 돈이 많아서 달아서 쓰지 않고 이렇게 여백을 두지 않고 몇몇 자, 몇 줄씩만 쓰나보다’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다보니 나도 시인이 되면 돈이 많아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돈을 많이 벌려면 시를 잘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 시집에는 ‘나그네’라는 시가 나온다. 이 시는 조지훈과의 만남에서 ‘완화삼’이란 지훈의 지에 화답하는 시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훈의 ‘강물은 흘러 칠 백리’가 목월은 ‘남도 삼백리’라는 시로 화답했던 작품이다. 시를 주고 받으면서 화답하는 사실을 요즈음은 찾을 수 없지만, 이 시대의 시인들은 이렇게 멋으로 살면서 시를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시집 뒤에는 발문이 나온다. 오늘날 ‘시 해’설과 같은 것이다. 첫 번째가 박두진, 다음으로 조지훈, 황금찬, 이런 순으로 되어있었다. 가장 마음을 담아 쓴 발문이 조지훈의 글이었다. 지훈이 발문을 쓴 연도가 을미년으로 되어 있으니 1955년의 일이었다.
70년대 중반 쯤 되었을까? 한국문협에서 후원하고 경주시청이 주최하는 반공문학 강연회가 있었다. 경주문협이 주관하여 3일 전부터 포스터도 붙이고 경주시청 공보실 차를 동원하여 거리마다 돌아다니며 광고 방송도 했다. 한국문협에서는 김동리, 박목월을 연사로 초청하여 내려 보냈고, 박양균 시인도 함께 내려왔었다. 경주문협 회원 중에 학교에 근무하는 사람은 그 학교에 학생을 동원하라는 부탁도 있었다. 드디어 문학 강연회 날이 왔었다. 토요일 오후2시 문화고등학교 대강당에서 강연이 시작할 무렵이었다.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청중은 거의 없고 연사도 도착하여 문화고등학교 교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와야 하는 청중이 거의 없고 맨 앞줄에 초등학교 조무래기만 오물오물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청중이 적다고 안할 수도 없고 안 하자니 지금까지 시청과 연사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어 김동리 선생과 박목월 선생이 강연을 하려고 강당에 들어서니 조무래기 초등학생만 오글오글 앉아 있으니 동리선생이 어이없다는 듯이 연단에 섰다. 첫 발언이, “경주는 나의 고향인데 내 고향이 이렇게 황폐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백 명 이내의 청중 앞에서 강연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하고는 경주문협 회원 들을 대단하게 나무라고는 “이왕 이까지 왔으니 그냥 갈수는 없고 내 자작시 한 수나 낭독하겠다” 하고 자작시 한수를 낭독했다. 달 밝은 하늘엔 나도 새가 되고 싶다 저 멀리 강물 위의 뿌연 안개 속으로 날아가고 싶다 슬픔은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골짝에 흐르고 꿈은 차라리 설운 가락 노래나 되어 돌아오는가 <이하 생략> -김동리의 자작시 ‘달밤’의 전반부 동리선생은 시한 수로 강연을 대신했다. 난 그 때까지 동리선생이 소설가로 알고 있었고, 시는 전연 쓰지 않는 걸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시로 출발하여 소설로 전향한 줄은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청중 앞에서 자작시를 낭송할 줄은 몰랐었다. 차라리 목월 같았으면 몰라도....하며 생각했다. 이 ‘달밤’은 경주와 상당한 관계가 있는 작품 같았으며 동리선생의 젊은 날의 서정이란 걸 느끼게 해준다. 그 때, 박목월 선생은 동리선생을 달래듯 은근히 강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동리선생은 머리를 쩔레쩔레 흔들며 좌석에 들어와 앉는다. 목월선생 혼자서 주어진 시간을 위하여 강연을 시작했다. 우리는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끝까지 그 강연을 다 듣고 자리를 떴다. 지금 생각해도 낯이 뜨거워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대구에서도 최정석 교수가 왔고, 포항이나 타지방에서도 문인 몇 사람이 와 있었다. 그러니 경주문협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오늘의 반공문학 강연은 완전 실패로 끝을 냈다. 아마 그길로 연사 두 분은 서울로 올라가신 것인 지, 그 후의 기억은 거의 없다. 지금도 부끄러움만 남아있을 뿐이다.
박목월 선생<인물사진>이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이 경주 ‘동부금융조합’이었다. 오늘날의 ‘농협’ 전신이었다. 1939년에 목월이 문장지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동시에 추천을 받은 세 사람이 바로 청록파 시인들이었다. 조지훈은 서울에 있으면서 문장에 등단을 하고 보니 경주의 박목월을 처음 알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조지훈<인물사진>이 박목월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조지훈은 경주에 있는 박목월에게 긴긴 사연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 편지 속에서 ‘목월, 당신을 꼭 만나보고 싶다’ 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 긴 사연의 편지를 받은 목월은 불과 한 줄밖에 안 되는 답장을 썼다. ‘경주박물관은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사느란 옥적을 마음속에 그리던 임과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오실 때 미리 전보 주시압’이 짧은 글을 받고 나는 이내 전보를 쳤었다. 목월은 편지를 보내고 조지훈이 경주에 온다는 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서울서 조지훈으로부터 전보가 날아왔다. 며칟날 몇 시에 경주 도착이라는 전보를 받고 목월은 그날 그 시간에 맞춰 경주역으로 나갔다.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이이므로 목월은 기다란 확대 끝에 <朴木月>이란 깃발을 달고 역 광장에 나가 서있기로 했다. 시간이 되어 조지훈은 역에 내려 목월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역 구내로 나오니, 어느 한 사람이 광장에 서 있는데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박목월의 ‘산도화山桃花’란 시집의 발문을 조지훈이 썼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경주의 문인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산수유>나무를 잘 알고 있다. 70년이 지난 오늘에도 고목이 되어 ‘경주문화원’ 뜰에 서있다. 지금 ‘경주문화원’으로 쓰고 있는 이 건물은 본래 조선말까지 경주부윤의 동헌東軒자리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주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사용하면서 이 지역 문화 유물유적을 보관하여 전시하던 것으로 소위 ‘경주박물관’이었다. 이때부터 이 경주박물관에는 샛노란 산수유 꽃이 이른 봄에 피어 새봄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목월이 지훈에게 쓴 글 속에 이 산수유 꽃이 등장한다. 그 때는 샛노란 꽃이 피어 봄을 알렸을 뿐 아니라 시인들의 시집에도 등장하는 중요한 문화유적이 되었다. 지금 ‘경주문화원’ 뜰에 가 보면 산수유<사진>가 고목이 되어 가지를 옆으로 뻗고 언제 어느 때 뽑혀나갈지 모르는 운명에 놓여있다. ‘경주문화원’에서는 이 고목이 된 산수유 노목老木을 늦게나마 잘 보호하여 그 목숨이 다할 때까지 보존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근식, 서영수, 정민호 세 사람이 서울에 간 일이 있었다. 이근식, 서영수 선생이 문단에 등단한 뒤였다. 우리는 목월 선생 자택으로 찾아갔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한양대학교 문리대 학장으로 있었고 ‘심상’지도 활발하게 발행되고 있을 때였다. 원효로에 들르니 목월 선생은 한양대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우리는 목월 부인과 함께 병원에 병문을 가기로 했다. 그 때만 해도 보기 드문 자가용 승용차를 귀하게 여기던 70년대, 우리는 목월 선생의 차를 타고 병원에 들렀다. 목월은 병원 침대에 누워 우리를 맞으면서 그의 병이 별것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퇴원한다고 했다. 병원에 앉아 여러 가지 문학이야기, 문단이야기를 나누다가 심상사(心象社)로 갔었다. 목월 선생 내외는 집으로, 이근식 선생과 서영수는 또 다른 볼일로 가고, 나는 목월 선생이 미리 연락을 해 둔 ‘심상사’에 갔었다. 마침 이건청 시인이 있었다. 그는 그때 ‘심상’지 주간이었다. 그는 반갑게 나를 맞으면서 목월 선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전화로 술과 안주를 시켜서 우리는 술을 마셨다. 마침 이채형이 서울에 와서 취직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곧 전화를 했다. 이건청, 이채형, 나, 세 사람은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 문예지 사무실에서 문인과 주간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 당시 풍조로 보아 드물다고 채형은 말했다. 문인이 문예지 주간을 찾아 술을 사는 게 그 때의 풍조였었다. 그러나 이번은 그 반대였다. 우리는 그냥 종일 술대접을 받고 저녁 늦게까지 이채형과 함께 어디론가 갔었는데 지금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마셨다. 깨어보니 어느 여관에서 이채형과 자고 있었던 것밖에 더 기억할 수가 없었다. 채형이는 그때 서울의 첫 직장생활에서 어려울 때였다. 목월 선생은 1978년 3월 부활절이 가까운 어느 날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서 62세를 일기로 그는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목월의 부인 유익순 여사는 충청도 공주(公州) 분으로 목월과 만나게 된 동기와 사연이 있었다. 유 여사는 그의 형부가 경주 금융조합(농협의 전신)에 근무하고 있었던 때였다. 언니 집에 와있던 처녀와 금융조합 직원인 목월 사이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자주 오가고 하다가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 여사의 형부가 경주에서 좀 떨어진 기계 금융조합에 있을 때 목월은 경주에서 기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처녀를 만났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목월과 유 여사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기술하는 것이지만, 기계는 그 분들의 연고지라 오늘에 와서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좋은 곳이기도 했다. 70년대 어느 날 우리는 목월 생가에 도착했다. 당시 초가삼간의 초라한 집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손세익 씨)이 살고 있었다. 초가지붕을 벗기고 스레트를 덮었으며 담을 블록으로 쌓았어도 형태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구조는 모두 개조하여 낯설게 되어 있었다. 고향집을 찾은 초로의 신사 목월은 그때의 감회를 못 잊는 듯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그때의 추억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 우리에게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며 들려주었다. 때마침 그 마을에 살고 있다는 목월의 어릴 때 친구 우 씨라는 사람이 찾아 왔었다. 서울서 온 친구를 만나려고 두루막의 앞섶과 동정 끝에 고운 때가 묻은 무명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머리에는 갓까지 쓴 모양이 촌로 그대로였다. 그는 목월의 손을 정답게 잡으며 “아이고 이게 누꼬. 영죄이(영종이) 아이가. 응?” 하고 순수 그대로 나누는 경상도식 인사였다. 목월은 “그래, 잘 있었나. 자주 못 와서 미안하다” 하니, 그는 “아니데이 니는 마 라디오에 자주 나오 데이. 그리고 읍내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온다 카데이. 그게 마 고향 오는 게 아이가” 했다. 함께 간 사진 기자는 열심히 사진만 찍어댔다. 우리는 그 집 방문 앞에 둘러서서 목월의 소년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을 아이들이 몰려와서 서울서 온 시인의 얼굴을 연거푸 훑어보고 있었다. 살구정 들판 밭둑에서는 송아지들이 뛰어 놀고 초가을 고운 햇살이 목월이 입고 있는 코트자락에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목월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말을 낮추고 목월은 공대를 했다. 아마 어머니의 친구인 듯 했다. 목월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걸 보니. 목월은 지갑에서 오천 원 권(당시 최 고액권) 몇 장을 뽑아 할머니께 건네주었다. 그 할머니는 처음 보는 고액권에 놀란 듯이 한참 사양하다가 받았다. “마을 어른 분들, 막걸리라도.........” 했다. 우리는 그날 경주로 돌아와서 고궁다방에 들러 차 한 잔씩을 했다. 그리고 기계에 가기로 했다. 기계는 목월 내외가 젊은 시절 그곳에서 처음 만난 곳으로 그들에게는 잊지 못할 곳이었다. 목월 내외는 대뜸 “기계에 아직 서숲, 동숲이 있나?” 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우리 일행은 기계에 갔다. 이튿날이 기계 장날이었다. 오는 날이 장날인 샘이다. 문성, 고지, 성계, 지가, 화대에서 쇠달구지가 나오고 길 따라 하얗게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날 촬영은 아주 좋았다. ‘동숲’ 과 ‘서숲’ 길을 따라가는 흰옷 입은 사람들, 먼 산등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나는 목월이 쓴 ‘기계杞溪 장날’이란 시가 생각났다. 보레이 보레이 자네, 사람 한 평생 이러쿵 살아도 저러쿵 살아도 시쿵둥 하구나. 누군 왜 살아, 사는가. 그렁저렁 그저 살믄 오늘 같은 기계장도 서고. <중략> 오늘같은 날은 지게목발 받쳐놓고 어슬어슬 산비알 바라보며 한잔술로 소회도 풀잖는가. 다 그게 기막히는 기라 그게 다 유정有情한기라. -박목월의 ‘기계杞溪 장날’의 한 부분
김동리, 박목월, 모두 경주 출신의 문인으로서 우리나라 문단에 시와 소설의 두 산맥을 이루었다. 1950년대부터 신춘문예 심사위원, 문예지 추천위원으로 한국문단의 거장(巨匠) 자리를 지켜왔었다. 그들은 한국문단에 수십 년 동안 원로로서 추앙을 받았다. 70년대 와서 한국문단은 문협의 패권 다툼 때문에 몇 줄기 유파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국문협 이사장으로 박종화 선생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이어 김동리 선생, 서정주 선생 , 조연현 선생으로 내려오면서 한국문협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등 한국문단에는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70년대의 문단은 대가들의 싸움에서 시작하여 싸움으로 끝났다. 이런 와중에서 오직 목월은 ‘한국시인협회’만을 맡아 문협의 싸움에서 벗어났다는 정평을 듣고 있었다. 나중에 전해진 말이지만 영부인의 전기인 ‘육영수 여사’ 집필로 상당한 물의가 있었던 것으로 당시 문인들 사이에 여러 가지 뒷말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목월 선생의 평생 유업의 하나는 월간 ‘심상(心象)’지의 창간이었다. 문공부에 잡지 발간의 등록을 마치고 경주에 온 일이 있었다. 그때 마침 삼중당(三中堂)에서 목월 전집 발행의 예정으로 사진작가를 대동하고 경주에 촬영차로 내려 왔었다. 목월, 부인인 유익순 여사, 삼중당 기자, 세 사람이었다. 고궁다방에서 전화를 걸어 왔다. 즉시 다방으로 나가니 세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목월 선생은 시 전문지 ‘심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경주 문인들에게 지면을 주게 되어 기쁘다고 하면서 문공부 등록을 은근히 자랑삼아 말했다. 그때 서영수의 시 추천을 들먹였다. 마침 이근식 선생이 다방에 오셔서 목월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과 함께 추천하기로 약속을 했다. 현대문학과 현대시학을 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목월과 친분관계가 있던 전봉건 시인을 생각하여 ‘현대시학’으로 결정되었다. 햇살이 따가운 초가을 우리 일행은 사진 촬영을 떠났다. 서울 손님 세 분과 이근식 선생, 나, 다섯이었다. 우선 목월 생가가 있는 모량으로 떠났다. 손경발 씨가 보내준 지프차에 다섯 사람이 터져 나갈 듯 타고 모량으로 향했다. 모량역 마을 도로 밑에 좁은 굴다리를 지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차는 찾아가고 있었다. 멀찌감치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걸어서 갔다. 목월 부인은 목월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목월 선생의 부친은 박준필 공으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한시를 잘 짓고 일찍 신문명에 눈 떠 측량 기술을 배워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당시 국토 측량에 참여한 측량 기사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월의 출생지가 경남 고성으로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거라고 우리는 짐작했다. 유익순 여사가 목월에게 시집 온 곳이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목월 생가인 것이다. 같은 마을 아래윗집에 큰어머니와 목월 생모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목월이 대구 계성중학교에 다닐 때 그는 이 마을의 유일한 학생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과 결혼해서 한때 이 마을에 와서 산 적이 있었다고 했다.
목월 선생의 내외는 행사 하루 전에 경주에 도착한다. 구, 경주관광호텔에 여장을 풀고 우리를 부른다. 연락을 받은 우리는(이근식, 정민호, 서영수, 김기문) 숙소로 찾아가 인사를 드리면 그날 저녁에는 꼭 술을 싸주었다. 경주의 몇몇 문인들은 내일 백일장 행사 준비 차로 ‘통술집’에 모였다. 의논을 마치고는 밤새도록 술을 마신다. 불국사에 가자는 누구의 제안이 있어서 술을 가득 싣고 택시를 몰아 불국사로 갔었다. 불국사 입구 가까운 도로 길섶에 술자리를 펴고 한창 마시고 있었는데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 세워 마신 것이다. 마침 목월 부부가 불국사 아침 산책 나오다가 우리를 보고 경악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밤새워 술을 마시고 사람을 못 알아 볼 정도가 되어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목월 선생이 우리를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왔다. 시내에 들어와서 다시 팔우정 해장국집에서 해장국 한 그릇씩을 먹고 목월백일장 행사에 참가했다. 목월 선생은 그때부터 경주 문인들의 술 실력을 인정해 주었다.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리는 통에 행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겨우 백일장 개막식을 끝내고 참가한 학생들이 흩어져 글을 쓰려는데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나무 밑으로 혹은 운동장 스탠드 밑으로 비를 피하여 글을 지었다. 보통 아침 10시부터 시작하여 12시쯤이면 작품을 거두고 점심을 먹는데 그날은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작품을 모아서 신라중학교 교실을 빌려 심사를 시작했다. 목월 선생은 처음부터 심사에 참여하여 끝까지 하나하나 살피면서 최고상을 뽑을 때는 다른 문인들과 합의하여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최고상은 목월상으로 초등학교 저학년·고학년, 중학교 각각 1명씩을 뽑았다. 고등부는 그후 목월 선생이 작고한 다음 박동규 교수에 의해 신설되었다. 시상식 때는 목월 선생이 직접 시상하고 수상 학생을 불러 하나하나 물으면서 당시 삼중당에서 발행한 목월 전집을 한 아름씩 상으로 주기도 했다. 70년대 초, 목월 선생이 살아 계실 때는 목월백일장 때마다 경주에 오셨다. 부부동반으로 같이 와서는 경주문인들을 격려했고, 목월 선생이 참가하는 이 행사는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전국의 문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서울에 신중신, 신규호, 유승우, 박동규(목월선생 타계한 뒤 몇 번 왔었다.) 황금찬, 윤강로, 박경용, 이건청, 이명수, 권택명, 대구의 김성도, 김동극, 신송민, 이재철, 도광의, 유상덕, 최정석, 신동집, 이태수, 서종택, 박상륜, 울산의 함홍근, 김성춘, 박종해, 포항의 손춘익, 그 외에도 많은 문인들이 왔었다. 그때 경주문협 회원들은 대회 준비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당시 지부장인 홍영기 선생님과 전회원이 당일에 사용할 도시락이며, 막걸리를 ‘말통’으로 준비하느라 여염이 없었다. 그때는 도시락을 만들어 팔지 않는 시대라 회원 5명이 자기 집에서 도시락을 20개씩 만들어 오기로 했다. 당일에는 집에서 만들어온 도시락을 참석한 손님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1968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황성공원 동편에 박목월 노래비 ‘얼룩송아지’ 노래비를 세웠다. 이는 새싹회(당시회장:윤석중)에서 신시60년을 맞아 전국에 있는 시인의 고향에다 노래비를 세웠다. 마산에 이원수, 울산에 서덕출, 서울에 윤석중, 그 외 각 지역에 세워졌는데, 경주에는 박목월 노래비가 황성공원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 때에 전국의 문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때 목월은 어머니를 모시고 왔었다. 아주 단정한 느낌을 주는 목월의 생모였다. 목월은 인사말에서「‘얼룩송아지’를 몰고 와야 하는데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소개했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그때 경주에는 ‘푸른편지’회 라는 아동문학 모임이 있었다. 제1회 때는 행사 명칭이 ‘박목월노래비건립 기념백일장’ 이라 하여 이 ‘푸른편지’회에서 주관하다가 몇 회를 치르고 나서는 경주문협으로 넘어오게 되어 그 대회가 나중에는 명칭을 ‘목월백일장’으로 바꾼 것이다. 이 노래비의 내용을 보면, 노래비 얼룩송아지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두 귀가 얼룩귀, 귀가 닮았네. 앞면에는 ‘얼룩송아지’를 세기고 뒷면에는 노래비 건립 요지를 적었다. 그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겨레 온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새긴 이 비는 신시 60돌을 기념하는 뜻에서 새싹회 후원으로 이 고장 어린이들과 뜻 있는 어른들의 정성으로 시인의 고장에 세우다’-1968년 어린이 날 박목월 노래비 건립위원회 라고 적혀있었다. 이날 박목월 노래비 건립 백일장에서 영예의 장원작품은 천북초등학교 6학년 김옥선 양의 ‘돌’이란 제목의 동시가 차지했다. 돌, 돌, 돌, 중에서 주춧돌이 되고 싶다 오두막집이라도. 정용원(동시인, 아동문학가) 선생의 말을 빌리면 “불과 다섯 행 밖에 안 되는 내용이지만 가난한 우리나라를 떠받치는 주춧돌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갸륵한 의지가 담겨있다”고 했다.
이번 경주에 있는 ‘동리목월문학관’ 관장을 맡으면서 그 소회가 남다름을 느끼고 있다. 내가 20살에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여 처음 만난 교수가 김동리 선생님이셨다. 그 때 창작과 과장이면서 소설을 지도하셨다. 목월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상처럼 생각하며 그의 시를 외고 다니던 때였었기 때문에 입학하자마자 목월선생을 찾았다. 드디어 목월선생을 만나 그의 신나는 강의를 듣는 것이 나에게는 유일한 즐거움이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분을 아직도 있지 못하고 있다. 내가 66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었을 때도 목월선생과 조지훈선생이 심사를 하셨다. 그 때 내가 목월선생 댁에 인사차 들렸을 때, 그 반가워하는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아! 너가 정민호였구나!’ 하시는 그 굵고 다정한 음성이 내 가슴 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 동리선생은 소설 실기시간에, 내 습작소설 “합각”을 보시고 빙그레 웃으시던 그 때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변변찮은 내 소설에 학점을 주시던 그 은혜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80년대에 남들이 받기 어렵다는 “한국문학상” 을 주신 것은 오직 나만을 생각하신 은혜로움으로 뇌리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나는 20대, 동리목월선생은 그 때 40대였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두 분은 돌아가시고 나도 70대의 후반이 되어 ‘동리목월문학관’ 관장으로 취임 하고나니, 동리, 목월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鄭君!” 하고 빙그레 웃으시는 것 같아서 눈시울이 뜨거워온다. 이번에 다행인지는 몰라도, 그 직계 제자인 내가 ‘동리목월문학관’ 관장을 맡고나니 자꾸 옛 생각이 나서 가슴이 울렁여오고 있다. 동리선생님, 목월 선생님. 아무리 불러보아도 아쉬움만 남는 지금, 나는 어떡해야합니까? 노을이 기우는 서산을 바라볼 때처럼 자꾸 감격이 앞서 오는 것을 선생님, 그것을 어떡해야합니까? 어제 목월선생님 생가에 다녀왔습니다. 예날 다정해 보이던 초가삼간 흔적은 사라져 없어지고 목월선생님의 동상만 말없이 서 있는 것을 바라보니 서산에 지는 노을과 함께 서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머잖아 동리선생의 생가도 복권되고 그 복원된 동리선생의 옛집을 바라보게 되면 그 때 역시 눈물겨운 옛 추억이 솟아날 것 같습니다. 동리선생님, 목월선생님, 늘 안녕히 계십시오. 지금도 하루가 지나가는 저녁 무렵입니다. -정민호 관장은 1966년 박목월, 조지훈, 송욱선생의 추천으로 思想界로 등단. 시집 『꿈의 경작』 외 16권, 시조집 『그리운 날의 연가』 외 다수, 시선집『깨 어서 자는 잠』 외 다수, 수필집 『시인과 잃어버린 팬티』등 다수 경주시문화상, 경상북도문화상, 한국문학상, PEN문학상, 한국예총예술대상, 창릉 문학상 등 수상 경주문인협회장, 한국예총경주지부장, 경북문인협회장 역임, 한국 문인협회 자문위원,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동리목월문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