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봉황대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어요. 이곳을 자주 오긴했지만 밤에 보는 봉황대는 신비롭습니다”경주를 찾은 관광객의 말이다. 세계 유일의 고분에서의 라이브 음악회가 매주 열리는 곳으로 시민들에게 친숙한 그 곳. 바로 노동동 고분군에 속해있는 봉황대다. 우리나라에서 단일 고분으로는 가장 큰 무덤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무덤이기보다는 작은 동산인 듯 싶은 고분 중턱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정경으로 인해, 특히 야간에 비추는 조명과 함께 나무들의 정령들이 노닐고 있는 듯한 몽환적 신비감을 준다. 마치 ‘어린왕자’의 한 장면처럼 작은 별의 바오밥 나무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봉황대 한켠에는 ‘봉황대(鳳凰臺)’라고 쓰여진 작은 비석도 하나 있다. 봉황대라고 자연스럽게 늘 부르던 이 고분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봉황대의 상징이 된 11그루 노거수들(느티나무 7그루, 팽나무 2그루, 오동나무 1그루, 측백나무 1그루)의 수령과 수종, 봉황대라고 불리워지는 원래의 의미와 비석에 쓰여진 ‘봉황대’라는 글씨의 주인공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쉬웠던 것은 경주시 사적관리과 등 여러 곳에 자문을 구했지만 왕릉으로 추정되는 곳에 어떻게 나무들이 그대로 존치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풀 수 없었다. 유독, 봉황대에만 수령 200~300년 수령의 여러 노거수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아직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봉황대(鳳凰臺)...단독 원분(圓墳)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무덤 봉황대는 경주노동동고분군에 속하며, 경주평지에 산재하는 단독 원분(圓墳)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무덤으로 분구의 높이는 25m, 지름은 82m, 높이 22m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내부구조 및 성격은 알 수 없으나, 봉황대 고분은 봉토의 정상부에 함몰 현상이 관찰되어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황대 고분은 지금으로서는 어느 왕의 능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앞에 위치한 금령총, 식리총, 그리고 옆에 나란히 있는 금관총(金冠塚)의 조사결과와 관련해 보면 500년 무렵의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함께 5세기 말∼6세기 초로 편년되고 있고, 노동동 고분군의 서편에 인접한 금관총 역시 5세기 말로 편년되고 있어 봉황대 고분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분들이 분포하는 일대 1642평이 1963년 사적 제38호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경주봉황대고분이 있는 노동동고분군이 대릉원 일원에 포함되어 사적 제512호로 지정됐다. -“봉황대의 노거수들은 살아있는 문화재, 문화유산과 함께 아름다운 생태관광자원” 현재 봉황대에는 느티나무 7그루, 팽나무 2그루가 자라고 있다. 느티나무나 팽나무는 향토 수종으로 이 고분의 정취와 잘 어울린다. 고사한 노거수를 베어낸 흔적이 있는 그루터기도 보였다. 오동나무와 측백나무는 봉황대 입구 쪽에 있다. 이 두 그루 나무는 예전 민가와 혼재돼있던 시기에 집 안에 키우던 나무들로 추정된다는 설이 있다. 고분에 소가 올라가 풀을 뜯어 먹는 풍경도 60년대까진 흔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경주대학교 조경도시개발학과 최재영 교수는 “봉황대의 노거수들은 살아있는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 문화유산과 함께 생태관광자원인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경사진 고분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수분이 메마르기 쉬우므로, 평지에서 자라는 나무보다 더디 자란다. 가뭄이 심하면 환경은 더욱 척박해진다. 이들 노거수들은 가지가 말라가는 한 그루 빼고는 생육이 좋은 편이다”고 설명했다. “느티나무들은 200~300여 년 수령의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팽나무 두 그루는 150~200여 년 수령이다. 팽나무는 잘 자라지 않는 수종이다. 평지와는 다른 경사진 생육 환경에도 건강한 편이다. 이 팽나무는 일명 ‘포구나무’라고도 한다”고 했다. -‘봉황대’... ‘봉황의 알은 내시(內市)에 수없이 많은 고분들을 가르쳐 말한 것’ 경주시에서 1980년 발간한 ‘신라의 전설집(경주시 문화재연구팀 제공)’에서는 봉황대 이름의 유래에 대해 ‘신라 9세기 중엽, 궁예가 이끄는 후고구려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가 신라의 땅을 침략해 신라는 명맥을 유지하기 힘든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궁예의 뒤를 이은 고려의 왕건은 신라가 망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크게 유행하던 때라 어느 풍수가가 왕건에게 “신라 서울의 지형은 배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언젠가는 좋은 바람을 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신라를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면 신라 서울의 배를 침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 풍수가는 신라 임금에게는 “신라 서울의 지리는 봉황의 둥우리처럼 생겼으므로 천년 동안이나 크게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지나서 봉황이 둥우리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한다. 따라서 서울 장안에 봉황새 둥우리 같이 생긴 둥글둥글하게 큰 알을 많이 만들어 둔다면 봉황은 알을 두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신라 임금은 곧 많은 이들을 동원해 서울 복판에 둥글둥글하게 흙을 쌓아 산더미 같은 알을 수없이 만들었다. 풍수가가 봤을 때 이는, ‘떠나가는 배 위에 많은 짐을 실은 격이 된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만족한 풍수가는 알 모양이 가장 많이 만들어져 있는 미추왕릉 부근의 율림(栗林) 속에 우물을 파 놓고 고려로 도망갔다. 이것은 짐을 많이 실은 배 밑 바닥을 뚫어 놓은 격이 되었으니 그 후로 신라는 영영 침몰해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봉황의 알은 내시(內市)에 수 없이 많은 고분들을 가르쳐 말한 것이니, 이때부터 경주 사람들은 고분을 봉황대라 부르게 되었다. 밤숲에 있는 우물은 율림정(栗林정)이라 해 해방된 직후까지도 미추왕릉 부근에 남아 있었다. 남산의 북쪽 기슭의 작은 봉우리를 도당산이라 하는데 일명 단두산(檀頭山)이라고도 한다. 단두산이란 배의 돛대가 되는 산이라는 뜻인데, 서라벌의 돛대는 도당산에서 해목령까지 뻗어있다 했다. 지금 왕정곡에서 식혜곡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패어져 있는 것은 고려 사람들이 신라가 다시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돛대를 끊어 놓은 흔적이라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기조 전 경주문화원장은 “경주가 분지이므로 인공 소산을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노거수들을 보면 혹시 왕릉이 아니지 않을까 추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비석 ‘봉황대’ 서체의 주인공은 조선조 세 명의 경주 부윤 중 한 사람의 글씨로 추정 한편,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교수인 김성춘 시인의 ‘경주에 말을 걸다 -봉황대, 아름다운 서체의 주인공은)’ 편에서는 ‘봉황대’ 글씨의 주인공을 추정하고 있어 인용한다. ‘비석 뒷면에는 기해청화태수서(己亥淸和太守書)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즉, 기해년 4월에 태수가 썼다라는 뜻이다. 태수란 관직은 지방장관 관직을 뜻하며(고려엔 대수라는 관직도 있었음)19세기 마지막 기해년은 1899년이다. 이로부터 한 갑자인 60년씩을 거슬러 올라가면 1599년(선조 32), 1659년(현종 원년), 1719년(숙종 45)이 된다. 그리고 당시 경주 부윤들의 이름은 박의종(1599년), 엄정구(1659), 이정익(1719년), 세 사람의 경주 부윤이 있다. 따라서 이 세 분 중 한 분이 바로 봉황대 글씨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것이 국립경주박물관 측의 추정이다’ 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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