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대 신라 최고의 엘리트 최치원(崔致遠,857(문성왕 19)~?), 최언위(崔彦撝, (868~944), 최승우(崔承祐,생몰년 미상)는 역사의 격동기에 저마다 다른 인생을 선택했다. 세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성이 같고 경주 출신이며, 6두품이라는 출신에 당나라 유학 경험이 있는 신라 최고의 엘리트라는 점이다. 그러나 후삼국이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저마다 다른 길을 걸었다. 최치원은 신라가 거의 힘을 잃고 고려와 후백제가 자웅을 겨루고 있는 가운데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조국 신라가 기우는 것이 안타까워 남은 생을 신라를 개혁하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개혁은 멀었고 신라는 망할 날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그는 고려와 후백제에 몸을 맡기지 않고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벗어난다. 최언위는 최치원의 사촌 동생이었다. 최치원과 같이 당나라에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과거에 합격한다. 42세에 신라로 돌아와 여러 벼슬을 했다. 최언위는 최치원과 생각이 달랐다. 현실에 발을 담그고 그의 뜻을 펼치고 싶어한다. 그래서 후삼국의 지도자 중에서 민심에 귀를 잘 기울이는 이가 누구인지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 최승우는 890년 당나라에 유학을 가고 3년만에 과거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하다가 신라로 돌아왔다. 최승우는 귀국후 누구보다 신라에 실망을 한다. 혼란의 시대를 겪으면서 지도자가 강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개혁도, 백성의 민심을 얻는 것도 강한 힘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강한 힘과 결단력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들 세 사람을 ‘경주 3최(崔)’라고 부르고 천재라하여 칭송했다고 한다. 이 기사 일부와 사진은 향토와 문화 63호, ‘대구경북 고려역사 문화도감’에서 발췌하고 인용했다. -‘경주 3최’는 저마다 다른 길을 걸었다 최치원은 893년 진성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개혁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그는 시무책에서 권력자들의 부패를 폭로하고 이로 인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고발했다. 왕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 들이려하지만 권력자 중에서는 최치원에게 동조하는 이는 없었다. 환멸을 느낀 그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전국의 산과 사찰을 떠돌았다. 유교의 충의 사상이 강해 다른 나라에 귀순하지도 않았다. 세상을 떠돌던 어느날 가야산 해인사 입구에 신발 두 짝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다고 전한다. 한편, 최언위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935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후 고려 왕건 휘하에 들어갔다. 고려 정부에서 한림원령평정사 등 높은 벼슬을 지냈다. 왕건이 죽은 뒤에도 고려를 위해 봉사했고 944년 7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네 아들도 고려시대 초기에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승우는 최치원 못지않게 극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신라의 현실에 절망했고 그 대안으로 후백제의 견훤을 선택했다. 그는 즉시 견훤이 아끼는 인물이 됐다. 견훤은 왕건과 적대할 때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빼어난 글 솜씨를 가진 최승우는 견훤의 편지와 대외 문서 작성을 도맡았다. 그러나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경주 3최’로, 천재라 칭송받았던 그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최치원,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 따라주지 못했던 `난세`를 살다 최치원은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 출신으로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중에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 새로 성장하는 6두품 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고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한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 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토황소격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고 황제에게 인정도 받았으나,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28세에 귀국을 결정한다.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쳐보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된다.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해 중앙 정부를 위협하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국가의 재정은 어려웠다. 889년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최치원은 외직으로 떠돌며 대산군·천령군·부성군 등의 태수를 역임했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지만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이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최치원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지증·낭혜·진감 등 선승들의 탑 비문을 썼고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했다.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46의 제 3장 최치원 부분(출처 : 국사출판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최언위, 고려 태조 대신해 견훤에게 쓴 답신이 최언위 작품으로 알려져 처음 이름이 최신지(崔愼之)로 경주사람이다. 품성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글을 잘했다. 신라후기, 고려전기의 문신으로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한 빈공제자의 한 사람이다. 신라 말년에(885) 18세의 나이로 당에 들어가 발해 재상 오소도의 아들을 물리치고 장원급제했으며 빈공과 마지막 급제자로 알려졌다. 909년, 42세에 귀국할 때까지 25년간 당에 머물렀으며 최치원·최승우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마흔둘에 신라로 돌아오자,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로 임명됐다. 935년(태조18년)에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가 태자사부가 되고 문한을 위임받아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궁원의 편액은 모두 그가 지었던 것이며 그 당시 귀한 가문에서는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특히 고려 초 승려들의 비문은 거의 최언위 작으로 나타나는데, 그가 고려에 오기 이전인 924년에 지은 봉림사진경대사보월릉공탑비는 최인연 찬이라 하여, 신라에서는 인연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며 태조에 귀부한 이후 지어진 글에는 모두 최언위라 했다. 결국 고려 태조의 현존하는 비문 8편 중 7편이 모두 최언위가 지은 것으로, 이것은 고려 초의 문풍이 경주 육두품 출신의 빈공제자들에 의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고려 태조를 대신해서 견훤에게 쓴 답신이 최언위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혜종 원년(944)에 일흔일곱으로 별세한다. [국역고려사, 열전 , 경인문화사에서 발췌] -최승우, 후백제의 견훤(甄萱) 아래에서 봉사 본관은 경주. 890년(진성여왕 4년) 중국당나라에 건너가 국학에서 3년간 공부하고, 893년 당나라의 예부시랑양섭 아래에서 빈공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있다가 귀국했다. 신라 말기의 6두품 출신 중에서 새로운 지식계급으로 대두하는 가장 대표적인 가문인 경주 최씨 출신이다. 특히, 경주 최씨 중에서도 최치원 최언위와 더불어 ‘신라 말기의 3최(三崔)’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후백제의 견훤 아래에서 봉사했다. 견훤을 대신해 고려태조에게 보내는 격서를 짓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927년(견훤 36)의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로서 지금도 『삼국사기』·『고려사』·『고려사절요』·『동문선』 등에 실려 있다. 한편, 『동문선』 권12에는 ‘경호(鏡湖)’를 비롯한 칠언율시 10수가 수록돼 있다. 이들 작품들로 미루어 당나라에 있는 동안 그의 교제범위가 최치원 못지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아마도 절도사의 막부에서 종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문장에 능해 사륙집(四六集) 5권을 저술해 호본집(餬本集)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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