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후배들과 남산 산행이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단석산 신선사에 대해 계속 글을 쓰고 있어 후배들과 동행할 처지가 아니다. 홀로 또 신선사를 찾아 길을 나선다. 산을 오르다 보면 지금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된다. 헨리 소로우는 산책한 시간만큼만 글을 쓰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했다. 니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렇게 일갈하고 있다. “가능한 한 앉아서 지내지 마라.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면서 얻은 게 아니라면 어떤 사상도 믿지 마라” 이런 대단한 분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필자 또한 등산이나 산책을 하면서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해 구상을 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신선사 석굴 앞이다. 신선사 석굴 북편 작은 입구 쪽에 ‘미륵전’이라는 팻말이 있다. 미륵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서편의 주 출입구를 들어서면 맞은편인 동면 불상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그런데 이 불상이 주불은 아니다. 남면에 있는 조상명기(造像銘記)에 의하면 주불은 북면 안쪽에 있는 미륵불이다. 그리고 동쪽과 남쪽 바위에는 각각 보살상을 조각하여 삼존의 형식을 이루었다. 주존불의 좌측과 맞은편이 협시불이다. 일반적으로 삼존불이라면 주불을 가운데로 하고 좌우로 협시불을 모신다. 그렇다면 동면 불상이 주불이어야 하지만, 바위 규모와 형태 등을 고려하여 부득이 이와 같은 변화를 꾀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올라오는 길 100여m 아래에 있는 안내판에는 동암이 관음보살, 남암은 지장보살, 북암이 미륵본존이라고 한다. 본존인 미륵불은 입상으로 동안에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머리 위로는 육계가 이중으로 우뚝하다. 삼도는 없고 양손 모두 다섯 손가락을 펴서 여원인과 시무외인의 통인을 하고 있다. 옷차림은 통견의로서 좌우대칭의 조각 기법을 따랐으며 옷자락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려 발 아래까지 이르고 있다. 비록 딱딱하고 다소 서툰 듯 하지만 전체 높이가 약 7m로서 삼국시대 초기 마애불의 최고 최대의 작품이다. 동쪽 면에 새겨진 보살 입상은 보관이 생략되었으며, 왼손을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을 잡고 있다. 마멸이 심하여 분명하지 않지만 남면에도 광배가 없는 1구의 보살입상을 새겨 앞의 불보살상과 함께 삼존을 이루고 있다. 남면의 안쪽에는 이 불상군을 만들 당시에 새긴 400여자의 경주상인암조상명기(慶州上人巖造像銘記)가 있다. 상인(上人)이란 최고의 덕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혜가 있고 덕이 뛰어난 스님들을 높여 부르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불보살을 아울러 지칭하고 있는 듯하다. 미륵불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김유신 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용화’는 미래불인 미륵이 후세에 인간세계에 하생(下生)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인연있는 사람들에게 3회에 걸쳐 설법을 행한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며, ‘향도’는 불교신앙단체이다. 즉 김유신을 따르는 화랑도가 불교의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고문헌에서 김유신과 단석산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고 있으나, 이곳에 주존불로 모시고 있는 불상이 미륵불이라면 이곳 단석산과 김유신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조상명기 14행에 ‘높이 3장의 미륵석상 1구와 보살상 2구를 만들었으니…’라는 구절이 판독된다.
“엄마, 요즘 인스타에서 핫한 곳에 가서 우리도 사진 찍으면 안 돼?” “엄마, 아빠 오늘까지 끝내야 할 작업이 있어서 안 돼!” “다른 사람들은 멀리서도 일부러 사진 찍으러 오는데, 우린 가까이 있으면서 그것도 못 해? 친구들은 주말마다 가족끼리 놀러 다닌다는데... 엄마, 아빠는 주말이면 더 바쁘다고 하고...” 딸아이의 힘 빠진 말에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지난 주말 대릉원으로 향했습니다. 절정을 이룬 벚꽃 덕분인지 화창한 날씨 덕분인지 황리단길부터 대릉원 후문 입구까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무색할 정도로 말이죠. 대릉원에 들어가면서 펼쳐지는 한적한 풍경에 일상에 대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자연만큼 좋은 약은 없다고 했나요? 초록색 나뭇잎과 곳곳에 개화한 목련, 벚꽃, 산수유 등 봄꽃의 향연에 시작하는 설렘과 심리적 안정감이 느껴졌습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도 함께 말입니다. 고분과 고분 사이 목련나무 포토존에는 꽃이 지는 시기임에도 사람들의 줄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우윳빛 뽀얀 자태를 뽐내며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목련은 봉우리때도 활짝 피었을 때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반면 꽃이 떨어지고 색깔이 시커멓게 변해 초라해지기 시작하면 다른 봄꽃들의 등장으로 금세 외면을 받죠. 하지만 대릉원 목련나무만큼은 예외입니다. 꽃이 화려하게 필 때도 꽃이 질 때도, 푸른 잎이 무성할 때도,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을 때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죠. 주위 고분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진 풍광, 목련나무 중에서는 가장 축복받은 나무가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딸아이는 대릉원 곳곳을 누비며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셀카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목련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은 오래 기다린 관광객들에게 양보한다고 합니다. “엄마, 난 경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 남들은 계획하고, 오랫동안 차 타고 와야 하는 것을 난, 잠깐 엄마 아빠만 설득하면 올 수 있잖아” 딸아이의 고단수 설득에 걸려든 것이었을까요? 그래도 좋습니다. 시간을 쫓기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경주를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아이 말대로 누군가는 계획하고 시간을 내서 찾는 이 곳이 직장에서 5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는 것이 참 행운입니다. 대릉원에서 마주한 자연, 주위 고분과 조화를 이루며 매력을 뽐내고 있는 목련나무. 생생한 기억의 조각들이 분명 머지않아 저의 발걸음을 다시 이 곳으로 옮기게 할 것 같습니다.
드로잉 시작! 학생들 손이 분주해집니다. 5분도 채 안 되는 사이, 김유신묘를 수호하던 십이지신상들은 학생들의 스케치북에서 기품 있고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불교미술을 전공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한 번씩 야외 스케치를 나갔고, 김유신묘와 경주박물관, 남산 등 경주의 곳곳은 그렇게 우리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지난 주말, 완연한 봄날이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봄의 기운을 듬뿍 느끼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20여년 전의 추억이 가득한 김유신장군묘를 제안했고, 흔쾌히 아이와 길을 나섰습니다. 대학시절 같은 과 선후배로 만난 우리 부부는 목적지 설정과 동시에 풋풋했던 대학시절 추억을 소환시켰습니다. 김유신묘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따뜻한 날씨 탓인지 주차장에는 이미 차들로 가득했습니다. 연애시절 남편과 자주 즐겼던 커피 자판기도 여전히 자리해 있었습니다. 겨우내 얼었던 흙은 향긋하고 풋풋한 냄새를 풍기며 아련한 옛 시절 향수를 끄집어냅니다. 대학시절 빠질 수 없는 추억 중 하나는 야간작업입니다. 그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동기들과 실기실에서 밤새 작품에 몰입하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혹시라도 늦게까지 작업을 하던 ‘차 있는 선배’라도 마주치는 날에는 새벽녘 김유신묘 주차장에서 자판기 커피까지 얻어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남편도 그 자판기 커피와 분위기를 공감했습니다. 새벽녘에 즐기는 김유신묘 자판기 커피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미술과 관습이라고 했습니다. 김유신묘를 향하는 소나무 숲길을 따라가는 동안, 봄 향기 가득한 신선한 공기는 우리 가족을 즐겁고 경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아이도 신이 났는지 지치지 않고 재잘거립니다. 사실 대학시절에 보았던 김유신묘는 저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10분, 5분, 3분 점점 빠른 드로잉을 요구하는 교수님 덕분에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북을 넘기기 바빴습니다. 그 이후에도 지인들과 김유신묘를 찾을 때면 대학시절 중요하게 여겼던 십이지신상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전 TV프로그램 스펀지에 방영돼 이슈가 됐던 ‘글자가 변하는 비석’이 그 곳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저의 관심은 오롯이 십이지신상에만 꽂혀있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바뀐 사회 분위기 탓인지, 조급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나이 덕분인지 이번에 찾은 김유신묘는 조금 달랐습니다. 묘 사방에는 봄빛이 완연했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와 그 너머 보이는 산들은 파릇파릇 생동감이 흘러넘쳤습니다. 그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표정에도 여유가 느껴집니다. 돌기둥 난간에 드리워진 그림자마저도 운치를 더합니다. 2022년 봄에 만난 김유신묘는 저에게 그랬습니다. 송화산 중턱에서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김유신묘는 저에게 정겹고, 개성이 충만한 공간이었습니다.
어느덧 경주의 풍광들을 통해 기억을 소환하고 찾아다닌 지 수 년이 되었습니다. 주로 사라질 위기에 있거나 기록해야겠다고 판단했던 소재들이 대부분이었죠. 경주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삶의 자잘한 일상과 현장에도 주목했고요. 동국대 서양화과 김호연 교수님과도 작품으로 구현된 경주풍광과 함께 오랜 시간 연재를 해왔습니다만 교수님께서 편찮으신 바람에 저 혼자 연재를 이어왔습니다. 골목길 걷는 것이 취미인 제가, 며칠 전에도 구석지고 허름한 구황동 원효로 밤 골목길을 걸으며 상념에 빠졌습니다. 어두운 골목길을 밝고 따스하게 밝혀주는 가로등 불빛같이 노오란 희망을 김 교수님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김호연 교수님의 빠른 쾌유를 빌어봅니다. 이곳 골목 구석구석에선 오래되어서 정겹고 순박한 생활의 민낯들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골목길 걷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년전부터 황리단길의 북적함을 피하면서 아날로그 감성을 즐길 수 있는 동네로 구황동과 황오동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시내권 여행지와 멀지 않으면서도 경주의 일상적 ‘생활의 발견’에 젖어들고 싶을 때 이 동네들을 떠올리는 거죠. 천천히 걷는데도 제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컹컹’ 굵은 볼륨의 개 짖는 소리가 조용한 골목에 가득 찹니다. 저녁이 깊은 구황동 원효로 골목은 이제 차갑지 않았습니다. 겨울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별 변화없는 골목길인 듯해도 대기는 온화해졌고 살짜기 달달해진 온기가 얼굴에 와 닿더라구요. 구황동 골목길을 어김없이 밝히는 가로등들은 참 이상하게도 통일된 디자인이 아니었고 가로등마다 크기나 불빛의 밝기도 달랐습니다. 얼기설기 모양새도 허름했구요. 그런데도 이 오래된 동네의 골목과는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봄볕이 짙어질 구황동 골목에서는 나른하게 낮잠에 취할 고양이들을 만날테고 주민들이 일군 작은 텃밭에는 푸른 생명들이 돋아날 테죠. 담장 너머로 보이는 빨래들은 바삭바삭 햇볕에 구워질 테고요. 목련이니 모란이니 앞 다퉈 꽃들도 자지러질 테죠. 골목길에 켜진 소박한 가로등 불빛이 더욱 살갑게 다가오는 봄밤이었습니다. 좁고 구불한 구도심의 허름한 골목을 따스하게 밝혀주는 골목 속 가로등 하나는 안전하고 편하게 골목 속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길고 지리한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텐데요, 그런 우리의 긴 터널과도 같은 골목길에서 그 가로등 하나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따금씩은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을 의지하며 경주의 봄밤 속을 걸어보세요. 시간은 흘러가고 오래된 동네 골목의 풍경들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을테니까요.
“기해일 동제를 봉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살기좋은 고장으로 전통 풍속을 지키며 신의 영험한 힘으로 이 터전에서 대대손손 살아왔습니다. 신의 영험이 온 동네를 감싸 안으시매, 상서롭지 못한 일은 막아 주시고 질병과 고통을 없애 주시므로 집집마다 좋은 일과 은광(恩光)을 주오시니 신의 크나큰 은덕입니다” 지난 15일은 정월대보름이었습니다. 정월대보름은 우리 세시풍속에선 매우 중요한 날로 설날만큼 비중이 큽니다. 우리 지역에선 봄을 재촉하는 빗님이 내린 뒤 휘황찬란하게 두둥실 떠 오른 달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경주 여러 지역에서도 다소 축소된 형식으로 동제(洞祭)들이 치러졌겠지요. 동제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이면 한 해의 무사 안녕과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 행사지요. 지금까지 세시풍속으로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지역이 많습니다. 지역에서도 지난 14일 밤 12시, 제36회 정월대보름 황오동제가 열렸습니다. 달빛이 유난히 교교했던 황오동 제례 현장에 저도 다녀왔습니다. 성동장미아파트 남쪽 당수나무 아래 북정(北亭) 제단에서 동제가 열렸는데요, 이 동제는 황오동발전협의회와 황오동행정복지센터에서 주관했다고 합니다. 코로나로 동제 자체를 치르지 않은 곳이 많은데 비해 이곳만큼은 유지가 되고 있었습니다. 제단 위에 제물을 가득 올리고 여러 제관들이 지극정성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는데요, 황오동장을 포함해 수 십명의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된 동제에서 주민들의 표정은 달빛 아래 환하게 밝았고 각자의 소원을 비는 모습은 행복해보였습니다. 한편, 성동동 421-43번지 도로가에 있는 당수나무는 회화나무로 올해 100세를 맞이합니다. 이 나무를 심은 이는 김억술, 김용재 부자(父子)입니다. 100여 년 전, 이곳의 기존 당수나무가 불에 타서 죽은 자리에 일제강점기인 1928년 김억술, 김용재 부자가 자택인 경주시 북부동 5-2번지 성터 위에서 자라고 있던 5년생 회화나무를 이곳 북정으로 옮겨 심었다고 합니다. 이후 아들인 김용재 선생은 생전에 매년 막걸리 한 말씩을 이 나무에 부어주며 동민들과 함께 무사안녕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이 나무 아래 매년 음력 보름 전날 밤(음력 1월14일)에 황오동 주관으로 마을 주민들이 동제를 지내고 있으며 올해도 정월대보름 황오동제를 지낸 것이죠. 이 당수나무를 심었던 오는 5월에는 재식자인 김용재 씨의 자손들이 이 마을 출신 주민들과 함께 100세 수령을 기념해 잔치를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당수나무 주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8명의 개구쟁이 꼬마들은 이제, 경향각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으며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모임을 기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모임 이름은 ‘회나무회’라고 한다지요. 예전의 당수나무 아래서 지내던 동제를 그 자리에 새롭게 식재한 당수나무를 키워 전통을 잇는 마음으로 동제를 지내니 참으로 보기 드문 귀한 풍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황성동 경주예술의전당과 현곡면 금장대를 잇는 첫 자전거 교량인 ‘월령교’가 지난해 12월 준공돼 개통됐습니다. 월령교는 길이 237m, 폭 5m로 자전거나 사람은 통행이 가능하지만 차량 통행은 금지됩니다. 이 교량으로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금장대와 발 아래 굽이치는 형산강 물줄기를 감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특히 김동리 선생의 소설 무녀도에서 무당 모화가 생을 마감하는 예기청소의 현장이 지척이라 이야깃거리로도 손색이 없는 위치입니다. 또 청동기 시대 바위그림으로 알려진 경주 석장동 암각화를 보다 수월하게 둘러 볼 수 있게 됐지요. 준공된 후, 두 어 차례 이 다리를 건너보았습니다. 양쪽으로는 형산강의 물살이 제법 세차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오리 떼는 유유자적 강물 위를 둥둥 떠다녔고요. 다리 건너 금장리 주민들은 경주예술의전당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금장쪽에서 걸으면 경주예술의전당이 바로 정면으로 보여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겠습니다. 다리 가장 자리쪽에는 보행자들이 잠깐 쉴 수 있도록 휴게 공간을 두었습니다. 이 교량이 준공돼 공개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야간 조명등에는 불빛이 들어오지 않아 야간경관을 조망할 수는 없었고요. 애초, 이 다리는 부산지방국도관리청에서 형산강 수위와 유량 조절을 위해 197m 길이의 ‘월령보’로, 물막이 공사만 하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경주시가 시민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공도교로 만들어 줄 것을 제안하면서 지금의 월령교를 전액 국비(45억원)로 건설하게 되었다고 하니 잘 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경주시는 향후 주민의 생활 편의 개선은 물론 지역관광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대목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 다리 공사가 한창일 때도 디자인을 섬세하게 고려하지 않은듯해서 몇 몇 지인들과 안타까워했었는데 준공된 후 다녀와 보니 예상한대로 그저 그런,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지은 교량이 경주에 또 하나 등장했더군요. 이왕이면 디자인과 안전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었는지... 다른 지자체도 모두 그런 디자인이라구요? 우리는 아름다운 고도 ‘경주’에 살고 있잖습니까. 디자인이 아름다운 교량 하나 정도는 가지고 싶었거든요.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자전거와 보행자 전용 교량인 만큼 친근한 공공 미술작품이나 자연친화적 소재의 벤치라도 설치해 콘크리트와 쇳덩이 일색의 이 다리에 아날로그적 따스한 온기를 더해주길 바라봅니다.
새해입니다. 며칠간 겨울 날씨 답지 않게 포근했던 날들이 이어졌고 중국발 미세먼지가 마치 봄날 황사처럼 대기를 뒤덮었었죠. 무언가 맑은 바람 한 줄기를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바다였으면 더욱 좋았겠기에 감포 푸른 바다를 찾았습니다. 감포에 사는 오랜 지인을 만나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어르신 한 분이 커다란 대야 가득 멸치를 가득 담고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막 감포항구에 멸치잡이 배가 정박해서 멸치들을 털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종이 무엇이든 만선의 선박에서 손에 잡힐 듯한 어부들의 진한 땀방울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을 좋아했던 지라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감포항구에선 심심찮게 만선의 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날도 감포항에선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만선의 기쁨과 함께 멸치를 터는 고단한 작업을 볼 수 있었는데요, 정박한 어선에선 그물에 잡힌 멸치들을 털어내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어부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서서 멸치 터는 작업을 하면서 감포항은 예의 그 본분을 다하며 활기를 띄고 있었습니다. 다른 어선의 경우, 조업을 하고 항구에 닿으면 대부분의 일이 끝나는 반면 멸치잡이 배는 귀항 한 뒤 본격적인 일이 시작됩니다. 멸치를 잡아 올리는 것보다 항구로 돌아와 그물에 걸린 멸치를 털어내는 일이 훨씬 더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켜보는 우리에겐 속이 후련해질만치 진한 삶의 현장으로 다가와 케케묵은 일상의 찌뿌둥함을 한 번에 날려주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장면입니다. 큰 언덕 정도의 멸치 더미를 보자니 아직 우리의 바다가 건재한 것 같아 슬며시 안도가 되었고요. 선원들의 얼굴과 몸에는 멸치비늘로 뒤범벅이 돼 만선의 기쁨과 교차됩니다. 감포항 멸치는 초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많이 잡힌다고 합니다. 멸치 경매는 감포 수협에서 수 분만에 정해지고 감포 바다에서 잡은 멸치는 전량 젓갈용으로 저장됩니다. 이 멸치잡이 어선은 많을 때는 하루에도 몇 대씩 들어온다고 합니다. 갈매기들이 어선 주위를 빙빙 돌면서 호시탐탐 먹이를 낚아챌 준비를 합니다. 이렇게 고기들을 수중에 넣으려는 갈매기들 수 십 마리가 기회만 엿보며 어선 주위를 선회하는 것이죠. 그 모습도 장관입니다. 멸치 터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선박 주위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그 비린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어부들은 살아 갈테죠. 우리의 삶에도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순정하고 진지한 땀방울이 스며들고 있을까요? 혹시 그들을 비루하고 억척스럽게만 보진 않나요? 감포항에서 오랜만에 생명력 넘치는 역동적인 어부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상한 삶의 베일 따윈 말끔하게 걷어내고서요.
2021년 12월 27일, ‘밤 11시 16분 경주역 발, 동대구역 도착 무궁화 기차’가 103년간 운행된 경주역의 가장 마지막 열차였습니다. 괜스레 울컥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2021년 12월 28일은 동해남부선에 역사가 새로 쓰인 날이었습니다. 103년 경주역이 폐역되던 지난 27일 마지막 영업일에 경주역을 다시 찾았습니다. 저녁 무렵 찾은 경주역 광장에는 큰 현수막으로 영업종료를 알리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2021년 12월 27일 23시 59분까지 운행된 경주역은 28일 24시부터 길고 따뜻했던 호흡을 멈추었습니다. 경주역을 비롯한 역들의 업무가 신경주역으로 모두 이관돼 이 과정에서 경주역, 서경주역, 안강역, 불국사역, 건천역, 호계역이 여객취급정지 됐습니다. 이제 경주시내권으로 열차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지요. (신)아화역, (신)서경주역, (신)안강역 등의 새로운 역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보다는 걱정과 안타까움이 훨씬 큰 것은 비단 저만 그렇게 느끼는 감상적 기분일까요? 변경된 새로운 열차 운행 구간과 새로운 역들을 간단히 설명해놓은 안내판에도 왠지 정이 가질 않았습니다. 벌써 역 구내 자판기도, 은행입출금기도, 안내 데스크도 모두 비어있었습니다. 경주역 광장에는 경주시가 28일 진행할 폐역 기념 문화행사 준비로 부산했고 각 행사진행용 부스들로 가득했습니다. 몇몇 가수들이 출연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그리움을 남겨두고 경주역에 대한 추억들이 이렇게나 덧없이 갈무리 됐습니다. 조용하면서도 뜻깊은 행사로 경주역의 노고를 기억할 수는 없었는지, 여론에 떠밀려 급하게 치러지는 일회적 행사가 영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국에서 찾아온 유투버들과 사진동호회 회원들과 사진가들이 카메라 장비로 경주역 여기저기를 찍어댔습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휴대전화기로 경주역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추억을 담고 있었고요. 경주역 육교 위에서도, 대합실이나 플랫폼에서도요. 못내 떠나보내기가 아쉬운 것은 인지상정이었나 봅니다. 영업종료를 앞두고 전국에서 찾아온 많은 이들은 일부러 경주역을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곧 멈출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대합실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플랫폼에도 사람들이 줄 지어 열차를 기다렸고 각지에서 이 소식을 듣고 몰려든 것 같았습니다. 역 구내 출발 시간을 알리는 방송도 이날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역 구내매점에서 6년간 영업했다는 주인은 26일, 27일 물건들이 거의 동나 다시 채워 넣고 있었습니다. 27일은 저녁 8시까지 문을 열어 손님들에게 따뜻한 물과 음료수라도 제공해야겠다며 그녀 역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주인장은 “마무리 잘하고 싶어요. 코로나 이후로 페역 된다는 소식을 듣고 손님들이 정말 많이들 오시네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경주역과 사연이 많은 어르신들은 우는 분들도 있었어요”라고 전합니다. 기자는 그간 경주역에 관한 내용이라면 어떤 매체보다 빠르게 심층적으로 경주역이 지닌 가치와 스토리에 대해 여러 차례 보도해 왔습니다. 최근엔 ‘경주역’ 역명 존속에 대해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텅 비어있을 무인역이 된 경주역이 다시 시민들과 경주역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알찬 콘텐츠로 거듭 태어나 사랑받기를 바라면서 경주역의 또 다른 출발을 응원하며 지켜보겠습니다.
‘그는 나정의 전설을 신이 나서 말하다가 오른편 울창한 송림을 가리키며 오릉이라 하고 이어 알영정이 그 옆에 있다고 합니다. 사릉(蛇陵)이라는 오릉을 바라만 보고 지나치려든 나는 알영정이라는 말을 듣자 정차하기를 청하여 솔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립던 옛 터를 찾아 신라 고도의 경주로’, 조선일보, 1934년, 박화성 글 중에서. ‘문천 남쪽 언덕 오릉의 동남방에 알영정을 찾으니 우수수 하는 대수풀 한 귀퉁이에 알영정이라 한 목표(木標)가 있고 그 앞에 알영정과는 아주 딴판인 흙무더기가 있고...-‘경주행’, 개벽, 제18호, 1921년, 권덕규 글 중에서. 경주유적지 중에는 고분들과 능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경주를 찾는 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능으로는 대릉원이 으뜸이겠지요. 그러나 능역도 넓고 사계절 아름다운 오릉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오릉은 경주시 탑동에 위치한 능묘이자 사적입니다. 짧은 겨울햇살을 만끽하면서 고요하게 산책하기 좋은 오릉을 찾았습니다. 오릉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차차웅, 제3대 유리이사금, 제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능으로 사적 제172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아직 발굴조사가 실시된 바 없어 각 능의 구조를 알 수 없으며 경주일대에서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원형봉토분의 구조형식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알려진 피장자와 직접 연관시키기는 아직 이른 실정이라고 합니다. 오릉 동편에는 지금도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덕전이 있으며 그 뒤에는 알영부인이 탄생한 알영정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동절기인 요즘 오릉을 관람시간은 아침 아홉시부터 오후 다섯시까지입니다. 넓게 공원처럼 조성된 능역 안에는 모과가 아직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대나무 숲길 또한 잘 가꿔져 초록이 귀한 겨울 능역에 활기를 더해주더군요. 이 대나무 숲길은 중앙으로 산책길이 나 있어서 걷다보면 오릉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품있는 소나무 숲 뒤로도 시야 가득 오릉이 들어오기도 하지요. 알영정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대나무 숲은 이맘때쯤 제법 대나무 잎사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깊어집니다. 연중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릉원도 훌륭하지만 이곳 오릉은 오릉만의 여유와 힐링을 선사해주는 공간입니다. 특히 겨울철 오릉은 능역의 규모나 능의 적요한 아름다움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선지 다소 적막하기까지 한데요. 한가롭게 거닐기에는 오릉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릉을 산책하며 한 바퀴 도는 시간은 천천히 걸었을 때 약 1시간여 걸립니다. 코로나 상황이 심상치 않은 시국입니다. 우리들 발자국 소리 기다리는 오릉을 찾아 외롭고 답답한 심사를 신라왕들에게 토로해도 좋을듯합니다.
수년전부터 오래된 대중목욕탕을 새롭게 꾸민 카페이자 각종 체험, 전시 행사 등을 활발하게 진행하는 복합문화공간이 하나둘 늘고 있습니다. 경주 감포에도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오래된 목욕탕을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켜 콘셉트로 활용한 복합문화공간이 문을 열었습니다. ‘1925감포’라는 이름으로요. 지역청년기업 ‘마카모디’와 (주)함께가는길이 상생의 공감터를 마련한 것인데요. 지난달 26일, 감포 지역민에겐 구 목욕탕으로 불린 ‘신천탕’에 지역재생공간으로서 새로운 간판 하나가 붙은 것입니다. 이 이름은 1925년 개항한 감포항이 오는 2025년 개항 100주년을 맞이하는데 착안했습니다. 개항 100주년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새겨볼만한 이름으로 보입니다. 감포에 새 물결을 일으키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보이는 ‘1925감포’ 신천탕 공간재생은 공모사업인 테마체험관광자원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역주민단체인 ‘함께가는길’에서 사업을 주관했습니다. 이에 지역에 활기를 더할 지역청년기업인 주식회사 ‘마카모디’와 MOU를 맺어 진행한 결과물로 지역사업 운영에서 힘들었던 지속성과 확장성을 더했다고 합니다. 감포읍내 멀리서도 한 눈에 보이는 굴뚝을 가진 이 목욕탕은 주변사람들의 말로는 문이 닫힌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고 합니다. 감포 지역 최초의 목욕탕이자 유일한 목욕탕이었다죠. 마카모디 관계자는 다 쓰러져가는 지붕아래 30년 동안 시간이 멈춘 채 박제되어있는 목욕탕을 보며 원석을 찾은 느낌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런 설렘으로 공간재생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간을 재생하면서 예상치 못하게 생겼던 여러 어려운 상황들을 주민들의 격려와 배려로 잘 이겨냈다고 합니다. 페인트로 쓴 큼지막한 숫자가 쓰여진 나무 베니아판 소재의 사물함, 목욕탕 매표소에서 돈을 담아두던 금고, 글자가 입체적으로 튀어나와있는 형태의 간판 등 목욕탕 옛 물건들도 고스란히 활용했습니다. 훈훈하게 챙겨준 주민들 덕에 개업할 수 있었다며 개업 소감에 진심을 담았습니다. 이 사업을 시작으로 지역의 자원들을 재발견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이 계속 이어지리라 지역민들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억을 담는 목욕탕 신천탕은 ‘COMMUNITY + ARCHIVE COFFEE + BAKERY + GOODS’를 담아낼 예정입니다. 감포마을여행도 진행하는데 깍지길인 해국길 숏코스와 감포 롱코스로, 투어는 마을해설사가 함께 합니다. 감포의 새로운 이름 ‘1925감포’는 대형 인더스트리얼 재생 공간에 비하면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날것 그대로의 빈티지함이 아늑하게 전해지는 공간입니다. 앞으로 많은 이들이 찾아 감포의 역사와 숱한 스토리를 재발견하는 핫플레이스로 등극하기를 바라봅니다.
11월은 늦가을의 정취가 최고조인 나날입니다. 만추의 정취를 제대로 선사하는 숲이 우리 지척에 있습니다. 아무데서나 카메라 셔트를 눌러도 척척 ‘착한’프레임이 연출되는 치유의 숲인데요, 바로 동남산자락 통일로에 있는 산림연구기관인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입니다. 최근 ‘경상북도 지방정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커다란 돌에 새겼더군요. 경상북도의 각종 산림사업을 수행하는 연구기관으로서, 기후변화에 대응한 산림 생산성 향상 등 산림산업을 선도하고 있는 곳입니다. 꽤나 유명한 포토스팟인 메타세쿼이아 나무들 사이로 가로질러진 외나무다리가 있는 공간은 연구기관 건립 등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가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맞은편에도 크고 작은 다양한 수종들의 나무들이 시원스럽거나 혹은 오밀조밀 숲을 이루고 있는데요. 숲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시원하게 쭉 뻗은 50여년 수령의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 숲을 만납니다.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어느 숲을 연상시킨 달까요?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식물낙우송과의 낙엽침엽교목으로 높이는 35미터, 지름은 2미터 정도며 잎은 마주나고 가을에는 적갈색 단풍이 드는 나무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키로 곧게 자라는 이 수종은 어느새 우리 산야에서 어렵지 않게 보는 나무가 됐습니다. 11월 오전의 찰나적 햇살은 치명적으로 투명하게 이 숲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경주를 찾은 많은 관광객들도 이 숲의 진가를 알고 있는지 숲엔 사람들이 일렁이고 있었지요. 나무와 숲 사이를 걸으며 사람들은 참 행복해했습니다. 느릿느릿 숲 속을 산책하며 무척 편안해보였거든요. 우리 곁에 이런 숲이 있어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들과 호흡하는 내내 맛보는 충일감은 어떤 순간보다 절대적인 행복감을 선사하니까요. 그리고 도로변에 조성된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으면 먼 곳으로 여행 온 듯한 이국적 정취를 느끼게 됩니다. 다소 짧은 구간이어서 아쉽기는 했지만요. 입소문난 경주의 숨은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경주 시민들은 이곳을 잘 찾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을 숲이 짙어지고 더욱 깊어져 잎들을 분분히 떨구는 계절입니다. 바람에 홀연하게 지는 낙엽들 따라 우리들 근심도 날려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 곧 무성했던 잎들을 떨궈내곤 긴 겨울을 견디는 시간이 오겠지요. 그러나 여전히 그 빈 공간에는 늦가을 한때의 기억을 간직한 따스함이 남아 있을 겁니다. 비어있는 충만으로요. 이즈음 생각나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늦어도 11월에는’ 이라는 소설인데요, 그 책을 끼고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메타세쿼이아 숲을 또 걸어야겠습니다. 숲을 한 바퀴 천천히 돌면서 곧 저물어갈 올 한해에 대한 탐색의 시간을 가져볼 생각입니다.
어린 왕자는 “굉장히 슬플 때는 누구나 저녁노을을 좋아하게 되어요”라고 했었죠. 우리의 경주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저녁이 오면서 번지는 노을의 아름다움은 아주 잠깐의 황홀한 우주 쇼 같습니다. 기자는 한 달 전 아버지를 여의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다시 제 삶터인 경주로 돌아왔습니다만 슬픔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골목에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저녁시간일 즈음 ‘어둑어둑’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아릿한 복통을 동반하는 슬픔이었습니다. 문득 노을을 마흔 네 번이나 바라보았던 어린 왕자의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평소 좋아하던 보문 마을 진평왕릉에 미치도록 가보고 싶었습니다. 급히 캠핑 의자를 챙겨둔 차를 몰고 해가 지기 직전이라 서둘러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여섯시를 갓 넘겼을 뿐인데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혹여 노을을 보지 못할까 콩닥거리며 도착한 왕릉 주위에는 이미 해넘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누며 혹은 담담하게 진평왕릉에서 바라보는 일몰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왕릉을 에워싼 고목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제게, 와있던 사람들의 풍경이 또 다른 감상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입니다. 어느덧 그들과 한 풍경이 되어 가만히 앉아 일몰이 진행되는 짧은 순간을 바라본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해는 넘어갔어도 오래도록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연이 선사하는 찰나적 붉은 노을과 문화유산이 콜라보를 이루는 장관을 바라보며 한없는 상념에 빠져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숨을 가다듬고 호흡을 고르려 했지만 얼핏 눈물도 흘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은 고요해지고 맑아졌습니다. 금세 더욱 진한 어둠이 잦아들었고 아릿하게 저렸던 가슴 한켠이 후련해지는 듯했습니다. 헛헛하기만 했었던 마음이 데워졌던 것일까요? 어린 시절 자주 업어주셨던 따스한 아버지 등에서 느낀 체온 같은 그리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러고는 왕릉 주위를 천천히 걸어보았습니다. 영면에 드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골똘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하는 아버지를 여의고 눈물방울 매달고 있었던 제게 진평왕릉 노을이 불현듯 스친 건 왜였을까요? 다시 한 번 자연에서 큰 위안을 얻는 시간이었습니다. 작가이기도 한 유홍준은 ‘꼭 보아야 할 경주의 세 가지 중 하나’로 진평왕릉을 꼽았습니다. 책에서 그는 ‘왕릉으로서의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고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경주의 숨은 명소이기는 하나, 그 고졸한 아름다움에 대해 아는 이들은 다 아는 곳이 바로 진평왕릉입니다. 누구나 한 번씩은 아버지를 여의는 슬픔을 겪겠습니다. 크고 작은 상처나 아픔으로 힘들 때 이곳 진평왕릉에서의 노을은 담담한 위로로 당신을 ‘복구’시켜줄 것입니다. 저도 얼마나 많은 노을을 바라봐야 어린 왕자의 마음을 따라갈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가을이 깊이 익어가면서 가을걷이가 한창인 계절입니다. 농부들의 가을 일들이 차곡차곡 갈무리 되어가는 요즈음이죠. 지난 주말,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화들짝 놀라 움츠려 있다가 모처럼 탑리 천관사지가 바라보이는 들녘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올해도 폭우와 거센 바람을 잘 견뎌준 곡식이 대견하리만치 가을 황금 들녘은 풍요로웠습니다. 교동과 월정교 맞은편에는 탑동 ‘천원마을’이라 불리는 아담한 동네가 있습니다. 한편, 오릉 맞은편에는 ‘탑리’라는 점잖은 동네도 있지요. 숭덕전(경북문화재자료 254), 오릉(사적 172), 천관사지(사적 제340호) 등 이 마을 전체가 조상이 물려준 문화재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모습입니다. 탑리나 천원마을에서 천관사지가 바라보이는 들녘에선 지난 8일 경부터 벼 수확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올해 첫 벼 베기는 지난달 초 도지동의 한 농가에서 시작됐다고 하니 한 달 여가 지나서죠. 논두렁을 따라 자생한 억새도 은빛 자태로 들녘의 풍성함에 운치를 보태고 있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가을 장맛비가 지리하게도 내렸습니다. 벼 수확기에 내리는 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수확하지 못한 벼에 검은 반점이 생기는 등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오랜 비가 그치고 며칠 가을햇살이 따가웠습니다. 이 마을 농부들도 기다렸다는 듯 바로, 연이어 벼를 베기 시작했다는군요. 그동안 잦은 비로 질퍽한 논바닥 이어서 추수를 미뤘다가 다행히 논바닥이 꾸덕꾸덕해지면서 별 무리없이 콤바인이 지나다니고 있었습니다. 들녘을 종횡무진하는 ‘콤바인(combine)’ 이라는 기계는 농삿일에 혁신을 불러온 일꾼입니다. 콤바인은 농토 위를 주행하면서 벼나 보리, 밀 등을 동시에 탈곡하거나 선별작업을 하는 수확기계를 지칭합니다. 수확한 곡식알은 그대로 탱크에 저장하거나 부대에 넣어서 건조장으로 운반되고요. 금방 콤바인이 지난 자리에는 벼 씨알들이 탈곡통에 채워지고 난 뒤 볏짚들은 머잖아 사료로 쓰일 모양새로 ‘촤르르’ 가지런히 참하게도 누워있습니다. 그런데 기계만이 능사가 아니었습니다. 콤바인이 진입하기 힘든 구간, 즉 논의 가장 모서리 부분은 직접 낫으로 벼를 베어야 콤바인이 진입할 수 있다고 하니까요. 우리가 사는 경주는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이런 가을의 풍경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경주는 농어업 종사자가 많은 도농복합도시의 대표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황금색 들녘도 머지않아 황량한 빈 벌판으로 남겨져 다시 봄을 기다릴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들 마음의 빈 공간에도 거둬들인 알곡들로 가득 채워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때로는 시기가 너무 늦어져서 그 의의와 가치가 손상되는 일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어떤 선각자의 정신을 기리는 일 일때면 더욱 한탄스럽겠습니다. 우리 지역에서는 고청기념관 건립의 건이 그 대표적 사례라 생각됩니다. “기념관을 짓는다는 것은 한 개인의 히스토리 공간이자 그 공간에서 본받을만한 것이 있을 때 짓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2019년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아까운 기록들이 얼마나 유실됐는지 몰라요. 비닐하우스 안에 보관돼있던 서적과 자료들이 속수무책으로 물에 잠겼었지요. 그러니 기념관 건립이 늦어진 것이 원망스럽기끼지 했어요. 그전에 지었더라면 하는...,” 고청선생의 아드님인 윤광주 선생의 말씀이셨습니다. 고청 윤경렬(古靑 尹京烈, 1916~1999) 선생 고청기념관 건립에 관한 시민과 후학들의 염원과 관심은 지대했습니다. 고청 선생의 유업과 업적을 기억하고 있는 시민들은 하루라도 속히 기념관 건립을 염원하고 있던 차제였었지요. 드디어 지난 20일, 양지마을 고청고택 바로 옆 부지에서 개토식을 시작으로 기념관 건립의 그 첫걸음을 알렸습니다. 2002년 선생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고청기념사업회(회장 김윤근, 관장 윤광주) 창립총회에서 기념관과 추모비 건립 등의 중요사업을 확정지은 후 19년여 만이며, 2010년경 고청 옛집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매입해 국가유산으로 관리하면서 고청기념관 건립 추진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는 소식이 있은 지로는 11년만의 개토식이었습니다. 그 긴 시간동안 문화유산국민신탁과 고청기념사업회, 경상북도, 경주시가 함께 건립을 진행해왔지만 기념관 건립은 뚜렷한 진척 없이 여러 차례 설계가 수정, 축소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작게라도 시작하자’는 것의 발로로 착공이 되었습니다. 현재 많은 이들의 관심과 응원 속에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만시지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번 공사는 기념관 바로 앞 문천내가 범람해도 안전하도록 기초를 매우 높여 짓는다고 합니다. 2019년 태풍으로 인한 홍수 피해로 많은 자료와 서적들이 유실되고 손상된 것에 대한 깊은 우려라 보여집니다. 그리고 최근 착공이후부터 고청 선생의 기념관을 기다렸던 시민들이 공사 현장에 다녀오고 공사 진척 과정을 sns에 올리고는 합니다. 한편, 아드님인 윤광주 선생의 건강이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최근 지병이 부쩍 악화되셔서 마음이 편칠 않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기념관 건립을 염원하고 애타게 기다려 오셨기에 그 소회도 각별할 수밖에 없을텐데 정작 착공이 되면서 컨디션이 안좋아지시니 말입니다. 당초 계획보다 축소되고 변형된 고청기념관 건립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기자도 기념관 건립 건에 대해선 여러 번 보도한 바 있지만 건립 과정을 더욱 공고히 해 무탈하게 준공할 수 있도록 지켜봐야겠습니다.
양남면 주상절리와 월성원자력공단 사이에 읍천1,2리가 있습니다. 그 중 조용한 포구 읍천항을 끼고 있는 마을이 읍천1리이고 그와 이어지는 월성원자력공단 쪽 마을이 읍천2리 입니다. 큰 고깃배보다는 작은 고깃배들이 정박해있는 한적한 어촌 마을 읍천항에서 중간 지점 정도의 한 낚시집을 기점으로 읍천1리와 읍천2리로 나뉘어집니다. 읍천2리는 자연부락명으로 ‘죽전리’라고도 불렸는데요, 읍천1,2 모두 해안선을 따라 옹기종기 형성돼 있었습니다. 방파제를 경계로 작은 벤치나 포토존을 마련한 작은 공원과 쉼터도 조성해 두었고요. 방파제 뒤로는 자잘한 몽돌로 이뤄진 깨끗한 해변이 형성돼 있고 상가로는 낚시편의점이 눈에 띄었고 읍천항을 따라 횟집이 쪼르르 이어집니다. 그 읍천2리 바닷가 도로변에 ‘문화조개구이’라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허름한 집 한 채가 거친 동해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약 2년 전 폐업을 했다는 이 집은 덩그러니 비어 있는 채였습니다. 마침 이 집 바로 맞은편에 살고 있다는 가게 주인할머니가 하릴없이 망중한 중이었습니다. 여느 시골 어르신들처럼 바람 쐬러 나와 계셨던 것이지요. “예전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가게도 잘되고 대성황이었어. 3~4년 전부터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었는데다 코로나가 겹쳐 장사가 되질 않아 결국 문을 닫았지” 코로나 이전에는 곧잘 장사가 되어 길게 줄까지 서서 먹었다는 이곳 조개구이집은 주인 할머니의 딸이 운영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비어있는 외딴 가게로 바닷가 한 모퉁이를 장식하고 있지만 아직 예전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시절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합니다. 이 지리한 상황이 종식되면 다시 이곳 읍천항과 해변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까요? 그리고 혹시 이 가게는 유행을 좇는 트렌디한 카페 등으로 활용되기도 할까요? 이 가게 바로 뒤편으로는 넓고 짙푸른 청정 동해 바다가 출렁입니다. 이곳 해변과 바다를 좀 더 가까이 느끼며 걸어보고 싶다면 방파제 따라 자연스레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듯한 길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 갈 수 있습니다. 깨끗하고 자잘한 몽돌이 깔린 해변을 걷다보면 작고 호젓한 어촌 바닷가가 주는 평온과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해변은 그리 넓지 않지만몽돌 해변길을 걸으면 몽돌 밟는 소리가 일품입니다. 또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파도가 몽돌 사이에 깊이 스며들다가 순식간에 ‘따그르르’ 거리며 빠져나가는 소리는 얼마나 경쾌한지요. 유명 해수욕장의 번잡함 보다는 이곳의 진가를 아는 이들만 찾아선지 이 해변을 즐기는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때론 텐트를 치거나 그늘막을 치고 조용하게 여름바다를 즐기고 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끝없이 시원한 수평선을 자랑하는 이곳에서 아무 생각없이 멍때리기를 해보는 것도 좋을듯 합니다.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그림=김호연 화백
하늘이 유난히 맑고 투명한 요즘입니다. 청명한 대기 속으로 뽀얀 구름떼가 두둥실 떠다니는 풍경은 한낮의 더위를 환기시켜 줄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 하늘은 여름밤이 깊어져도 퇴색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핑크빛에 가까운 보름달이라도 뜰라치면 경주의 사위(四圍)가 온통 환한 달빛의 축복 아래 머물지요. 가벼운 옷차림으로 보문호반길을 걸었습니다. 코로나와 무더운 여름 날씨로 쉬이 지치는 이럴 때면 시원한 바람 한 자락이 간절해집니다.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은 더위에 지친 여름날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죠. 하루 일과를 마친 저녁이면 한여름 더위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보문호반길을 걸어봄직 합니다. 보문관광단지 호수변에 조성된 이 길은 호수 사방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뷰를 감상하는 호사도 덤으로 누릴 수 있으니까요. 여름밤 호수길은 한적하기도 하니 최적의 힐링코스라고 생각됩니다. 보문호반길의 총 둘레가 6.5㎞로 1시간40분 정도 소요된다고 안내하고 있지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걷다보면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곤 합니다. 살짝 물비린내가 올라오기도 하지만 그 역시 호숫가 여러 풍경중 하나라 나쁘진 않습니다. 혼자 걸어도 좋을 이 길을 마음 맞는 이와 함께 걷는다면 금상첨화겠습니다. 지난 24일은 6월 보름이었습니다. 호반길을 한참 걷다보면 힐튼호텔 쪽으로 건너가기 전 경주월드의 청룡열차와 바이킹 롤러코스터 등 놀이시설과 원형 대관람차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보문관광단지의 랜드마크로 자리하고 있기도 하죠. 또 경주세계엑스포 공원에 높게 세워진 경주타워(높이 82m)인 황룡사지 구층목탑 투각에는 야간 조명으로 음각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고 그 건너편에서는 모 기업의 연수시설로 쓰이는 황룡사 구층목탑 형태를 모방한 건축물이 멀리 바라보입니다. 경주월드와 경주힐튼호텔 사이 위치한 ‘황룡원’ 건물이 그것인데요. 황룡원은 역사 속 유물인 신라시대 황룡사 구층탑 양식의 중도(中道)탑을 중심으로 정신문화, 의식교육 공간으로 사용되는 연수원이라고 합니다. 고대 건축물을 현대의 과학기술과 건축 공법으로 재해석한 건축물이죠. 야간 경관도 뛰어나답니다. 바람결 속에서 호반길을 걸으며 문득 밤하늘도 한 번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글쎄, 그 건물 꼭대기 즈음에 보름달이 둥실 걸려 있는 거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만월(full moon, 滿月) 이었죠. 비록 재해석한 황룡사 구층목탑 건축물이었지만 보름달이 걸려있는 풍광은 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서정적이었습니다. 유난히 크고 환한 달빛은 연한 오렌지 빛을 띄며 영롱한 달빛을 쏟아 내리고 있었습니다. 보름달의 기운을 제대로 받았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참 행복했습니다. 한여름 밤, 달빛 샤워 한 번 해 보시죠...,
‘남천내 마을’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의 재매정길에서 좁디좁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포석로 샛골목에서 여러 꽃들로 마당이 정갈하게 가꿔져있어 단박에 시선을 끄는 집이 있습니다. 65년간 이 마을에서 나고 성장한 토박이가 이 집 주인인데, 여느 주택가 담벼락에서처럼 부착돼있는 전기계량기 안이 초록 담쟁이 이파리로 꽉 차 있었습니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이었기에 계량기 속은 습기로 가득했구요. 그런데 ‘남의 집’에 무단침입(?)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동거하는 이 녀석의 친화력과 생명력에 새삼 감탄했습니다. 이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리도 억척스러울줄은 몰랐죠. 담쟁이덩굴은 울타리나 담에 기어오르며 사는 덩굴이란 순수 우리말로 처음부터 ‘담쟝이’, ‘담장이덩클’ ‘담장이넝굴’ 따위로 불려왔습니다. 담쟝이는 울타리의 ‘담’과 접미사 ‘장이’의 합성어로 ‘담에 붙어사는 녀석’이란 뜻이랍니다. 한자어로는 ‘파산호(爬山虎)’라고 하는데 ‘산에서 기어 다니는 모진(매서운) 풀’로 풀이하며 한번 정착하면 좀처럼 죽지 않는다는 식물입니다. 이 식물은 돌담이나 바위 또는 나무줄기에 붙어서 살고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주로 미관을 위하여 건물이나 담 밑에 심으며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 식물이기도 하지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개구리 발가락처럼 생긴 덩굴손 끝부분에 흡반(吸盤)이라고 하는 빨판 같은 것이 보이는데 이는 매우 강한 흡착력으로 담을 기어오르는 강력한 매개가 됩니다. 이 기막힌 동거를 한참 바라보자니, 어느 영화에 등장한 대사 한 부분이 스쳤습니다. ‘삶은 이다지도 약한 것을’...,이라는 대사였는데 연약하고 불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삶에 비해 이 작은 식물의 지치지 않는 에너지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길어지는 코로나로 인해 점점 지쳐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단단한 틈 사이를 비집고 터를 잡아 당당히 살고 있는 강인한 생명력이 부러웠습니다. 역경을 극복하는 유전자가 우리 몸속에 있다는 말로 서로에게 힘이 되기도 하는 요즘, 한가로운 마을에서 만난 계량기 속 담쟁이 넝쿨에서 여러 단상이 떠오르는 한 때였습니다.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그림=김호연 화백
최근 우리나라 전역에서도 수년전부터 업사이클링(up-cycling) 공간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전국적 핫플레이스가 된 곳을 살펴보면 버려진 공간을 활용해서 주목받고 있는 곳이 많아졌습니다. 오래된 공장, 버려진 방앗간, 농수협 창고 등의 트렌디한 변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들 공간은 인기명소로 등극해 아날로그적 풍광과 함께 전 세대를 아우르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우리들 기억 속에 자리하는 예스러움과 최신 유행의 선각적 감각과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뤄내는 것입니다. 세월의 흔적이 또 다른 감성적 장치로 작동해 우리의 기억에 저장되기에 이들 공간을 찾는 발길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이끌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경주 황리단길 한 켠에도 오래돼 잊혀진듯한 정미소가 최근 갤러리 공간으로 탈바꿈해 발길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인데요, 바로 대릉원에서 황리단길로 진입하는 포석로에 있는 황남정미소 갤러리가 그곳입니다. 이곳 정미소는 경주출신 재미화가 김영길 작가의 본가로 알려져 있으며 김영길 작가가 미국으로 이전후인 1990년부터 30여 년 간 폐가처럼 방치돼 있었습니다. 이를 ㈜사랑의 집수리, 망치와 벽돌 이정환 대표와 락희원 이상문 대표가 김영길 작가의 허락을 얻어 문화공간으로 꾸미자는데 합의해 지금의 공간으로의 변신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빈티지한 정미소의 집기들과 도구 등 예전 정미소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이곳의 본분은 정미소였음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시와 함께 빛바랜 추억을 환기시켜줍니다. 지난 4월엔 경주 어반스케치 회원과 영남 어반 스케치 회원들이 참여해 뜻깊은 전시회가 열려 경주시민과 관광객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 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는 7월18일까지는 최부식 소장전 ‘낡고 오래 되어도 빛나는’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소장자 최부식 씨는 경주문화원 이사이자 경주문화재야행예술감독을 지낸 바 있는 경주 문화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소문난 콜렉터입니다. 수 십 년간 수집해 온 미술품의 일부를 선보이고 있는 것이죠. 상업화 일변도의 황남동과 황리단길에 새로운 명물로 급부상하고 있는 이곳 황남정미소에 우리가 거는 기대는 아름답고 큽니다.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거듭나 우리 곁에서, 황리단길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청량제 같은 쉼표로 역할 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칠이 벗겨진 채 허름하지만 그대로 하나의 조형물로도 손색없는 황남정미소의 양철 외관, 투박하지만 손때 묻어 반지르한 집기 등에서는 스르르 무장해제 되는 푸근함이 번집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에서 잠깐 한 눈 팔고 와도 참 좋을 듯합니다.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그림=김호연 화백
대구 서문시장 야시장, 전주의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 등은 여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야시장들 입니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야시장은 이제 트렌드로 자리 잡은 여행 필수 아이템 중 하나인 듯합니다. 경주에도 성건동 경주중앙시장 야시장(만남의광장 푸드코트, 금성로 295)이 매주 금, 토, 일 오후 6시부터 밤 11시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황리단길, 대릉원, 동부사적지 등의 핫 스팟들에 가려 경주에서도 밤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야시장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녁 7시경이면 멀리서 보아도 이미 이 일대 주변이 환하게 빛나고 이곳을 찾은 많은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붐비던 시장 입구서부터 한 켠으로 테이블을 놓아 먹거리 장터를 찾는 이들이 편하게 앉아 대화를 즐기며 이곳 음식들을 나눠 먹습니다. 다양한 먹거리 부스들이 쭉 이어져 있어 여러 종류의 분식 뿐 만 아니라 이 시장의 대표 음식인 육전까지 맛볼 수 있습니다. 닭강정, 비빔만두, 팟타이, 막창, 삼겹 김밥, 스테이크, 케밥, 우동, 육전, 떡볶이, 닭발, 멘보샤, 초밥 등의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죠. 우리 음식들과 함께 이국적인 메뉴도 보입니다. 이 중에서도 인기 있는 메뉴의 포차에는 길게 줄을 서야하고요. 철판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지글지글’ 재료들이 굽히는 소리는 참 정겹게 들립니다. 코로나19 시국에도 야시장을 찾은 많은 이들로 시끌벅적 하고요. 물론, 철저하게 개인위생과 방역에 철저를 기하고 있죠. 또 만원에 네 곳의 부스에서 4가지 메뉴를 맛볼 수 있는 ‘만원의 행복’이라는 특별한 이벤트를 진행 중이어서 조금씩 맛보고 싶은 여행자들에게 환영받고 있다고 합니다. 시장통에 들어가서 메뉴를 둘러보면서 먹고 싶은 메뉴 4가지를 정해 4곳 중 아무 포차나 가서 먹으면 된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술 한 잔 곁들여도 감성 끌어 올리는데는 그만이겠죠. 날씨가 좋아 초여름 바람이라도 살랑살랑 불어올라치면 분위기는 더욱 금상첨화겠습니다. 야시장이 너무 붐빈다면 시장 안쪽으로 이어진 원래의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 보아도 좋습니다. 야시장이 인기를 얻자, 늦은 시간까지 장사 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어묵과 떡볶이, 순대 등 분식은 물론, 수산시장이 늦게까지 열려 있다고 합니다. 경주를 찾아 도심이나 외곽에 있는 유적지나 인기 명소를 다니느라 다소 지쳤다면, 이곳 중앙시장 야시장을 찾아 수런수런 대화 나누며 소박하지만 특별한 먹거리를 즐겨 보세요. 경주에서의 색다른 추억 하나를 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짝 찾아온 허기를 야식으로 달래며 매력적인 경주의 밤을 더욱 풍성하게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요.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대형할인마트와 편의점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구멍가게는 확연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들과는 다른 이색적인 공간으로 보이는 구멍가게들은 이제는 우리들 향수의 대상으로 간간이 명맥만 유지할 뿐입니다. 월성동(구 인왕동) 선덕여고 옆을 지나칠려면, 비탈진 집들 사이로 옛 기와가 초록색 어닝(차양)과 잘 어우러져있는 작은 슈퍼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최근, 이곳 맞은편에는 새롭게 문을 연 베이커리 카페와 세련되게 단장한 카페들이 서 너 곳 들어서 성업 중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큰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모양새의 작은 가게가 바로 ‘송화슈퍼’ 입니다. 정감이 넘치는 송화슈퍼의 주인장은 최국이(75세) 어르신입니다. 사라져가고 있는 대표적 업소인 이곳 송화슈퍼의 오래된 진열대에는 동네 작은 가게가 그러하듯, 오밀조밀 군것질 거리들과 생필품들이 가지런하게 진열돼 있죠. 이곳 주인장은 예전에 세를 놓은 이후, 인수해 장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슈퍼는 특히 바로 옆 선덕여중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하는데요, 1968년 선덕여중이 신축이전하자 집을 짓고 가게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가게를 연지는 53년 정도 됩니다. 그 중 40여 년간은 제가 장사했지요. 내 집이니까 이곳에서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사가 가장 잘되었던 시기는 30년 전 정도인 것 같아요” 이 근처에 세 곳의 슈퍼가 더 있었지만 하나둘씩 그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주인 할머니는 주로 여학생을 대상으로 오래 장사해서인지 아직도 맑고 고운 피부를 가진 동안이셨습니다. ‘요즘은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소일거리 삼아 담배나 팔고 야간자습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에게 군것질 거리나 팔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오뎅 삶고 떡볶이, 라면, 계란도 삶아 놓기 바빴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학생들 스타킹부터 학생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이 다 구비돼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학교 구내식당과 매점이 있어 매상이 영 시원찮다고 하십니다. 맞은편 골목에 살던 동네 주민들도 철거로 인해 이 동네를 다 떠나고 없는 상태라고 하지만 오가는 어르신들이 이곳 가게 앞에 놓인 평상에서 삼삼오오 쉬어가는 모습을 자주 보곤 합니다. 그런 모습도 하나의 어여쁜 풍경이 되곤 하고요. 원래 이 집 간판은 ‘송화상회’였는데 8년 전 ‘송화슈퍼’로 개명해 디자인한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옛 간판이 없어져 세월의 운치가 다소 덜해 안타까웠지만 가끔씩은 내외국인들이 사진을 찍어 가기도 한다는 송화슈퍼. 아직도 우리 지척에는 53년이나 한 곳에서 우직하게 버텨 온 구멍가게가 있다는 것이 참 따뜻하게 다가오는 저녁입니다.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 그림=김호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