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회 드시고 싶은기요? 내일 경주시내 가서 사다 드릴게요”
돌담 넘어 들려온 이 대화는 경주시 양북면 범곡리(凡谷里) 상범마을에 사는 김복기(65)씨가 회를 좋아하는 연로한 부친에게 하는 말이다.
전쟁이 나도 모를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동막골’같은 마을. 이곳은 양북면 범곡리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 역시 어찌 걱정 근심이 없으랴만, 어쩐지 우리들의 어떠한 근심도 덜어놓고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 오지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굳이 자연주의자가 아니어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는 산촌에 대한 동경은 누구나 있다.
범곡리는 양북면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동쪽에 대목들, 쇄들, 작은 건너들, 무등들 등이 펼쳐져 있다. 그 너머로 대종천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는 지역이다. 범곡 마을은 옛날 석굴암 근처 사는 범이 자주 이 마을에 나타난다 해서 이름 붙진 지명이라고 한다.
어느 봄날, 신록 우거진 숲과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이 마을 길을 따라 걷다보면 한 망태기 그득, 산나물을 캐고 돌아오는 할머니 일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수 년 전, 기자는 그 할머니 일군에게서 이른 봄기운 머금은 야생 산나물을 욕심껏 샀던 생각이 나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추령 터널을 지나 감포 가는 국도변의 오른쪽에 범곡리를 안내하는 작은 표지판이 걸려있지만, 도무지 사람이 살 거라곤, 도무지 이렇게 예쁜 마을이 형성돼 있을 거라는 상상은 할 수 없는 마을 입구였다. 그 입구를 지나 조금씩 높아지는 해발고도를 따라 가다보면 이윽고 깊은 산촌과는 어울리지 않은듯한 펜션형태의 이국적인 집들과 옛 가옥들이 병치돼 나타난다.
‘뿌꾹뿌꾹’, ‘치르치르’..., 산등성이 어디선가에는 이름모를 새들이 짝을 찾는 신호를 보내며 적막을 깨는 마을. 오지 상범마을은 그래서 더욱 ‘현재’ 같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트렌드를 반영하는 건축물에서는 이 마을과 어우러지는 절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에서 하룻밤, 주먹만한 크기로 쏟아져내릴 별들을 보면서 ‘모든걸 훌훌 버리고’ 쉬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범곡리 그 별 아래서 TV에, 월급봉투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수려한 산촌의 자연속에서 순수하게 살아가는 범곡리 상범마을을 지난 20일 찾았다. 해발 359m, 토함산 중턱에 아늑하게 위치한 이 마을은 자연스런 마을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아담하게 집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원주민들과 함께 이곳에서 정착해 이 마을을 가꾸고 아끼며 살고 있는 이들이 있어 더욱 정겨웠다.
-범곡리 상범마을...면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고지대에 위치
범곡리는 토함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로 토함산 국립공원 내에 있다.‘범곡,‘범실’등으로 칭해 왔으며 1914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범곡리로 행정명이 개칭됐다. 일명 범실이라고도 하는 이 마을은 면 소재지와 10㎞ 떨어져있으며 면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토함산 동산령을 넘어 심신 수련과 함께 문무대왕릉을 참배하러 가던 옛길이 그대로 남아있다. 범곡리는 상하범으로 나눠져있다.
이 마을의 명소로는 하범 마을 뒷산 길에 20여m가 넘는 바위가 갈라져 있는데 용이 승천하지 못하고 이무기로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특산물로는 임산물과 산양 산삼 등이 있다. 2008년 생태 산촌 만들기와 2009년 녹색농촌체험 마을 조성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는 차제다. 특히, 상범마을 20가구 중 6가구가 민박을 운영하면서 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약 3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당나무가 마을 수호, 임란이후, 전쟁 피하기 좋다고 여겨 처음으로 사람이 정착
이 마을 주민 김복기(65) 씨는 4년전 귀향한 주민으로, 연로한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요사이 보기 드문 효자 아들이다.
“여긴 안티 고향입니다. 요즘은 객지인들이 많지만 이 마을은 김해 김씨 집성촌이었지요. 7대조와 8대조 산소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마을 형성도 수 백년 됐지요”라고 했다.
이 마을 총 가구수는 현재 비어있는 1가구를 포함해 30여 호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상주) 가구는 20호다. 주말이나 가끔씩 이 마을 주택을 이용하는 주민은 6~7가구라고 한다. 주민들은 모두 20명으로 연로한 어르신이 홀로 사는 1인가구가 많다. 이 중 울산 등 타 지역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펜션을 운영하는 가구가 6가구다.
“벼농사 짓는 가구는 3가구이고 더덕이나 도라지, 산양산삼 등을 재배하는 가구가 몇 집 있을 정도입니다. 산양산삼은 공급과잉으로 현재는 경작면적이 줄었고요. 고추장과 된장을 담그고 판매하는 주민도 있고요. 3~4년전까지는 펜션 운영이 매우 잘되는 편이었지요”
마을 어귀 쪽에 있는 김 씨의 집에는 소 여러 마리가 우리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갓 태어난 송아지 두 마리도 어미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소 우리에서 나는 냄새에서는 시골 특유의 두엄 냄새가 연상되는 듯도 했다.
2016년, 시내버스가 운행되지 않았던 이곳 범곡리를 비롯해 장항리, 권이리 무점마을, 용동리 감골 등 벽지 노선을 따라 ‘수요응답형 시골버스’가 도입됐다. 25인승 마을버스가 어일장날(5,10일)에는 아침 8시 20분, 11시 30분, 오후 4시에 세 번 들어온다. 평일에는 아침과 오후 두 차례만 운영한다고.
한편, 이 마을 뒤편에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약 3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당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양북면 지정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그것이다. 몇 아름드리나 됨직한 이 당나무는 수령은 오래이나 매우 강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김 씨는 “최근엔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이 쉬지만 예전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엔 점심시간에 주민들이 거의 이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곤 했습니다”고 했다. 이 당나무 앞에서 2년전 까지만 해도 동제를 올렸다고 한다. 아직까지 동제때의 상석이 그대로였다. 이제는 객지인들이 많고 그나마 원주민들은 나이가 많아서 지금은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서 가장 고령자는 우리 아버님으로 올해 88세입니다. 지금껏 가장 장수하셨던 분은 94세셨고요. 이 마을에 주민이 정착한 것은 임란 이후, 전쟁을 피하기 좋다고 여겨, 석굴암을 넘어 처음으로 사람이 정착 했다는 설이 전해옵니다. 원래 이곳은 사람이 정착하기 어려운 곳이었으나 난리를 피해 화전을 일구며 정착한 듯합니다”
-‘이 동네 몇 백년을 살아도 대문 단 이가 없었는데 대문을 단다’
오르막이 제법이던 마을 중간 즈음이었을까. 마을이 굽이 내려보이는 곳에 ‘돌목’이라는 펜션집이 나타났다. 6월의 햇살과 기분좋게 불어오는 서늘한 산골 바람을 맞으며 된장 담그는 집과 모내기를 막 마친 오모조목한 들녘을 내려 보았다. 그 정경들과 함께 이 산촌 어디선가 불어오는 하늬바람은 평화로운 ‘치유’를 선사해 주었다.
‘돌목’이라는 상호로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 이채혁(70)대표는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다. 이 마을에 이렇듯 정착을 한 것에 대해선 “15년 전 우연하게 스케치를 하러 왔다가 정착하게 됐지요. 울도 담도 없는, 붉은 함석집 앞에 화사하게 핀 살구꽃에 반해 며칠을 그림 그리다가 얼떨결에 이 집을 ‘덜렁’ 샀습니다(웃음)”
이 집의 구석구석은 주인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오밀조밀한 공간구성을 바탕으로 화가인 주인장의 손 솜씨는 집 전체를 작품화 했다. 그래서일까. 한국관광공사 인증 우수한옥체험숙박시설로 인정받아 한옥 스테이를 운영한다.
이 대표 집을 안내해 준 김복기 씨는 “6.25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곳 주민들이 10월 초, 추석 대목장을 보러 가서야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을 알 정도로 이곳은 오지였지요. 당시는 촛불도 없이 등잔불을 밝혀 살았고 꼬부랑 오솔길이 전부일 정도로 깊은 산촌이었죠. 당시는 어일장이나 양북장 보다는 불국장에 장을 보러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숯을 굽고 감이나 과일 약간씩을 지고 석굴암 마당을 지나 장을 다녔습니다. 그 장에서 팔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 오곤 했고요”라고 회고했다.
“국민학교 다닐때 감 한 접을 지고 불국장까지 따라 가봤는데 혼이 났죠. 하하. 잠바 하나 사준다고 해서요. 이 마을 도로가 건설된 것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고서 부터였지요”
돌목 펜션 이 대표는 “내가 이 마을에 올 당시엔 예쁜 돌멩이 하나, 개나리 한 포기 없었습니다. 지금은 돌담마다 꽃이 피고 지지만요. 돌담에 ‘쪼르르’ 채송화라도 심어 특성화 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먹히질 않았지요. 겨우 한 두 사람이 따라 했고 보기가 좋으니 너도나도 돌담도 쌓고 꽃을 심더라구요” 라면서 “집을 짓고 대문을 다니까 ‘이 동네 몇 백년을 살아도 대문 단 이가 없었는데 대문을 단다’고 흉을 봤어요. 제가 왔을 당시는 대문 있는 집이 한 곳도 없었으니까요. 아마도 작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흉허물없이 서로 믿고 살았던 터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대문있는 집은 몇 집 뿐이구요(웃음)”라고 전했다.
한편, 하곡 마을은 상범마을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다고 했다. 하범마을은 상범마을과 주민수는 비슷하나 하범리는 상범마을보다 규모가 더 컸다고 한다. 현재 하범마을은 상범마을과는 달리, 농사를 짓는 가구가 대부분이며 토박이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