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5월 5일은 어린이 날이다. 64년 전 어린이들에게 경주의 중요성과 경주의 문화유적이나 유물의 소중함을 심어주기 위해 개교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의 역사적 값어치가 더욱 진해지는 시기다. 지난호에서는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태동과 연혁을 중심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번호에서는 이 학교가 배출한 동문이야기와 에피소드, 개교를 위해 초기 헌신했던 이들을 다뤄 보았다. 이 기사는 제1회 수료생 김윤근 경주문화원 원장의 자문과 경주박물관학교 50년‘아! 우리어린이경주박물관학교(국립경주박물관)’를 참고했다. -어린이박물관학교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 동생 업고 들어와 수업 중에 울음소리도 들려 경주박물관학교 50년‘아! 우리어린이경주박물관학교(국립경주박물관)’에서 경주문화원 김윤근 원장(경주박물관학교 1기)은 ‘경주박물관학교 50주년을 회고하며’ 라는 글을 썼다. ‘이 학교를 떠올리면 걸어 온 지난날이 넉넉한 조건이 아니고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며 이어온 길이라 더욱 값지고 빛이 난다. 개교한 1954년은 한국 전쟁이 일어난 4년 뒤라 나라 사정이 매우 어려웠고 살기가 바빠서 문화재에 대한 가치를 따지고 보호할 겨를이 없었다’ ‘1954년 10월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의 문을 열었다. 박물관장실의 의자들, 수업에 지장되는 도구들을 모두 바깥으로 옮기고 긴 의자 열 개를 들여놓고 역사적인 수업이 시작되었으니 그날이 10월10일이었다. 특히 문화재 미술 공부는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환등기를 빌려다 시청각 교육을 겸했으니 그 노력과 정성은 가히 놀랄만했다. 경주에서 한 대 박에 없는 환등기에 비출 슬라이드는 박물관 전속 사진사였던 박영도 님이 맡아 여기저기 다니면서 실물도 찍고 책도 복사하기도 하고 마운트는 종이 상자나 마분지를 오려 두 겹 사이를 벌려 사진을 넣고 풀로 붙여 사용했다. 그때 이미 우리들은 박물관학교에서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 다시 들을 수 있었고 책에서나 말로만 듣던 유명한 음악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박물관학교는 오늘날 교육이 가장 강조하는 열린 학습, 자율학습, 시청각교재를 통한 흥미롭고 신명나는 수업을 했던 것이다. 충실한 강의로 우리를 사로잡아 울렸다 웃겼다 하였으니 얼마나 선지자였던가? 더구나 높은 어른들이 코흘리개 가르친다고 사무실 집기를 모두 들어내고 수업을 준비하고 수업이 끝나 원상태로 돌리는 일은 얼마나 번거로웠을까?’ ‘이렇게 시작된 어린이박물관학교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당시 집이나 학교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시청각 교재인 환등기로 수업을 하고 종종 영사기로 짧은 영화나 뉴스를 보여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영사기는 대구까지 출장가서 어렵게 빌려와 사용했다고 한다. 점점 박물관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늘어나 일찍 오지 않으면 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또 동생을 업고 들어와 수업 중에 울음소리도 들리고 문을 닫고 안막을 치고 환등기로 수업하는 날은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기도 했다. 수업을 마치고는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정원에 있는 유물을 그리고 흙으로 빚어보기도 했다. 이렇게 공부하던 이들이 자라 훗날, 금속명장 김인태 님이 되고 주종의 일인자인 오해익 님, 조각가 김 번 님, 화가 조필제 님, 박진수 님이 되었다’ -이론 수업도 중요하지만 현장 학습이 얼마나 값진 생명있는 산교육인가를 증명해 ‘개교 4년째를 맞아 좀 더 활발하게 움직여 보려 할 때 진홍섭 관장님이 문득 미국 순회전시건으로 떠나고 당분간 박물관 학교는 휴교하게 된다. 머리를 숙이고 기운없이 돌아가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측은해 보였다. 그후부터 박물관은 조용했지만 윤경렬 선생님의 집은 시끌벅적했다. 그동안 문화재 공부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이 선생님 댁으로 몰려가 현지답사를 하면서 공부하자고 졸랐다. 그 후 일요일이 되면 불상이 있는 곳으로, 탑이 있는 곳으로 찾아다니며 그려도보고 실측도 하는 현장 공부를 했으니 교가에 ‘하늘도 내 교실, 땅도 내 교실’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3년간 계속된 현장 학습은 문화재 공부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때 공부한 이들은 훗날 문화재 분야 전문가가 되고 교사가 되어 이론 수업도 중요하지만 현장 학습이 얼마나 값진 생명있는 산교육인가를 증명해 주었다. 한편, 경주어린이향토학교로 교명을 바꿨던 당시, 1956년에 창립된 신라문화동인회와의 만남은 향토문화를 공부하는 목표가 공통인 점도 중요했지만 윤경렬 선생이 어린이향토학교 교장이면서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이 모임의 회원들이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수업까지 맡으면서 운영을 적극 도운 김태중, 김주식, 최영식, 김인태, 최용주, 손윤락, 윤자야 님들이 있었고 박물관 학교 1기 또래들이 대학생이 되어 신라문화동인회를 도와 향토학교를 뒷바라지를 한 이들로는 이철수, 김광해, 김윤근(필자) 등이 있었다. 이때 초중고등학생들로서 배우며 도운 이들이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박방룡 님이고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함순섭 님, 신라문화학교 교장 이홍렬 님, 영남대학교박물관 학예사인 김대환 등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있다’ -경주박물관학교 교본 1권, 2권, 지금까지도 경주 문화재 공부에 가장 유익한 책으로 평가 ‘1972년 경주어린이학교 뒷받침회를 만들어 향토학교 교본이 만들어진다. 당시 이 교본은 문화재 안내서가 없던 시절에 문화재의 아름다운 가치를 알리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교재 1집은 김태중 선생님이 집필한 토기편이고 2집부터 28집까지는 윤경렬 선생이 집필하셨는데 내용은 성덕대왕신종, 불상, 불국사 석굴암, 십이지신상 이야기, 신라 왕릉 이야기, 금관, 임해전터와 안압지, 기와 무늬 이야기, 신라의 궁성 등이었는데 쉽고 재밌게 유익해 회원 수대로 프린트 판을 내고 나면 책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성화가 대단했다. 이 교재는 다시 ‘경주박물관학교 교본 1권, 2권으로 간행됐는데 지금까지도 이 책은 경주 문화재 공부에 가장 유익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당시 어린이 날을 맞아 필자는 우리 향토학교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 윤경렬 선생께 건의해 ‘제1회 경주 어린이 꿈 잔치’가 시립도서관 시청각 실에서 열렸다’ ‘숱한 행사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을 기쁘게하려는 일념으로 찾아가면 어려워하지 않고 선뜻 도와준 많은 얼굴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고마움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오늘도 그 전통을 이어 동인회 회원, 아우들이 봉사하는 모습을 볼 때, 만사를 제쳐두고 놀이지도를 하는 선생님을 볼 때, 박물관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볼 때 우리경주박물관 학교의 미래는 무한히 밝다는 생각을 한다’ -“병아리들처럼 담 아래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한 사람을 위해 수업을 안 할 수 없었다” 국성하 (독립기념관 학예연구사)의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연구’에서는 ‘박물관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수학과 영어가 아닌 우리 문화였다. 그것도 유물을 보면서 설명을 들으면서, 슬라이드를 보면서, 답사를 하면서, 때로는 연극발표와 전시회를 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배우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기억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윤경렬이다. 어린이박물관학교를 진홍섭 관장과 함께 만든 이다. 선생처럼 45년을 한결같이 박물관학교에 헌신한 사람은 없었다. 그 헌신 때문에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가 유지될 수 있었다. 윤경렬은 함경도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개성에 있을 때 고유섭 개성박물관장으로부터 들었던 ‘우리 것을 찾으라’는 말 때문에 1949년 경주에 오게 되었다. 신라인의 숨결이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을 찾기 위해 남산을 수없이 올랐으며 발로 밟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경주 남산의 답사기 ‘겨레의 땅 부처님 땅’을 저술한다. 무엇보다도 그가 평생 가꿔 온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는 아직도 경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1997년 여든이 넘은 때에 어린이 전통예술 실기대회를 심사하는 모습은 얼마나 오랫동안 박물관학교와 그 안에 어린이들에게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30여 년간을 박물관에 빠진 일이 없었다. 눈보라 치고 찬바람 부는 날 누가 나왔으려니 하면서 나가보면 한 두 사람은 꼭 와 있다. 병아리들처럼 담 아래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한 사람을 위해 수업을 안 할 수 없었다. 어린이들과의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어린이들과 사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박물관학교 덕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경주가 굉장히 앞서간 박물관 교육 활동을 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2004년 10월, 경주박물관학교 50주년 기념 대담회에서 이난영 제3대 경주박물관학교 교장은 “일본의 릿교 대학의‘Mouseion’이라는 잡지에 우리 박물관을 소개하면서 특히, 경주박물관에는 전쟁 중에 싹튼 ‘어린이박물관학교’가 있다고 밝혔어요. 경주가 굉장히 앞서간 박물관 교육 활동을 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라고 했다. 진홍섭 초대 박물관학교 교장은 “경주박물관학교 그동안의 역사는 100년, 200년 후를 돌아볼 수 있는 기록을 남기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존을 하는 노력이 앞으로도 계속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주박물관은 앞으로 영구히 계속되겠지만 공식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그런 길을 마련해서 어떤 박해와 천재지변이 있더라도 보존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고 했다. 당시 유병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현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은 “박물관학교가 오랜역사를 지녔음에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진 자료뿐만 아니라 대담 자료도 잘 모아 두었다가 외부에 알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학문적으로도 조명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