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나 발굴 현장에서 옛사람들의 뼈나 유물들을 발굴하고 수습하는 고고학자에 대한 동경은 누구나 한 번 쯤은 해봤을 것이다.
경주는 일년 내내 문화재 유적의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발굴은 땅 속 매장 문화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쪽샘지구발굴현장만해도 조사 범위가 넓어 수 십년간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며 경주 월성과 황룡사지 등도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평소 접근이 어려웠던 발굴현장을 일반에 제한적으로 공개하기도 한다. 경주 월성 발굴조사 현장 등이 그것이다. 월성에 관한 안내판이나 발굴조사에 대한 설명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돼 있어 점차 발굴의 신비한 베일이 벗겨지고 있는 차제다.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최영기 원장)과 황룡사 내 유적발굴현장을 찾아 발굴의 절차 및 과정과 발굴이후의 수순 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우리나라 전체 문화재 발굴 비용은 2000~3000억원, “땅 속 유물은 국가 소유”
대체적으로 발굴에 대해 일반 시민들은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간이 오래 경과된다는 등속의 피해 의식이 그것으로 현재는 소규모의 발굴은 국비로 충당하지만 발굴 비용 부담이 많다는 지적은 늘 있어왔다.
(재)신라문화 유산연구원 최영기 원장은 “국가도 정책적으로 그런 비용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은 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문화재 발굴 비용은 2000~3000억원이 채 되지 않는다. 결국은 국가 정책의 우선 순위에 따른다는 것으로, 이는 국가 경제력과 밀접한 부분이며 타 선진국의 경우와 견주어보면 문화재 발굴 비용의 지원은 평균적인 편”이라고 했다.
일본의 경우는 조사 기관이 대체로 국가 기관이다. 각 지자체에서 조사기관을 설립해 국가나 지자체에서 실시하고 인건비나 기관 운영비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운영 유지하고 발굴의 직접 경비는 발굴 행위자에게 부담 시킨다. 전체 발굴비용의 30%정도는 본인에 부담시키고 나머지 70%정도는 국가나 지자체에서 부담을 하는 식이다.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일반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내 땅은 땅 속의 것도 내 것’이라는 인식이다. 법률적으로 땅은 개인 소유지만 땅 속 유물은 지하자원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것이고 채굴을 하려면 문화재도 마찬가지로 국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발굴해서 유물이 나올시 국가 귀속인데 개인이 발굴비용을 부담해야하는 것은 그 땅을 그대로 보존한다면 발굴하지는 않는다는 원칙에서다. 그러나 개발로 이득을 취할 경우는 비용을 개인이 부담한다는 것.
지역에 따라 처음부터 발굴이 바로 되는 경우와 입회하에 일차적 기초 조사를 통해 유물이 있을 개연성이 확인될 단계에서 즉각적으로 발굴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또, 시굴 트렌치(test trench, 좁고 길게 구획해 시굴해보는 것)로 구역을 정해 시범 발굴해 발굴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발굴기관에서는 각각의 유물층을 미리 파악해 시굴 트렌치를 통해 데이터를 확보하고 발굴한다. 제토 작업부터 시작해 토층을 보고 판단해 발굴한다”고 했다.
-경주시 발굴전문조사기관은 13~4곳, 학술발굴조사와 개발을 전제로 하는 발굴 있어
경주시의 경우 발굴전문조사기관은 13~4곳이다. 그 중 국가기관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한국문화재재단 등으로 세 곳이고 경주시 공기관 발굴기관은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하나다. 이 외에는 민간 법인들(성림문화재연구원, 계림문화재연구원 등)이다.
문화재 보존 정비를 위한 학술발굴은 국가기관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주로 시행하고 있다.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진행한 재매정과 천관사지처럼 이미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경우는 복원이나 정비를 위한 발굴이다. 경주시로부터 의뢰를 받아 학술발굴조사를 한 것이다. 이처럼 이미 국가에서 부지를 매입해 문화재로 보존을 하고 있는 지역에 대해 정비나 복원을 위한 학술 발굴이 있고 아파트 등을 짓기 위해 개발을 전제로 하고 발굴을 하는 경우가 있다.
발굴 조사가 끝나면 건물을 짓는 개발 행위를 하게 된다. 이 경우 전산화 된 문화유적 분포지도를 통해 인근의 매장문화재 분포 유무를 파악할 수 있다. 유물의 매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 전문 기관에 의뢰해 발굴 조사를 하라는 건축 조건부 명령을 내리고 사업자는 조사 기관에 의뢰를 해야 한다. 민간일 경우는 문화재청이 인정한 기관에 의뢰하고 해당 발굴 건 자체 전부를 문화재청에 허가 받은 뒤 발굴이 실제로 이뤄진다.
-유물면에서는 의료용 메스나 이쑤시개 까지 동원해 섬세한 작업 통해 유물 노출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일단, ‘지표 조사’로서 땅 위에 문화재 흔적이 있어 육안으로 파악될 경우, 10분의 1정도로 부분적으로 파서 시굴 조사를 하고 육안으로 직접 확인한다. 석조 유적 등은 레이저 탐사 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시굴에 이어 본 발굴이 진행되는데 토층을 정확히 살피기 위해 토층 둑을 네모지게 칸을 만들어 둑을 남겨 놓고 발굴을 진행한다. 유물의 상황이나 시대, 종류에 따라 네모진 칸의 크기는 5m~25m로 달라진다. 이는 가장 보편적인 발굴형태로 흙의 퇴적 상황으로 유물의 선후가 다른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했다. 지층의 형성 시기로 판단해 유물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평면 위치와 수직적 좌표를 설정하고 층위를 기록하고 그 과정을 보고서에 기록한다.
“대개는 트렌치로 도랑의 형태로 먼저 파보고 상황을 파악한 뒤 흙을 제거한다. 논의 경우, 경작토가 이미 20~30㎝ 있으므로 경작토는 포크레인으로 걷어낸다. 이후 삽이나 호미 등으로 제거하고 유물면에 직접 다가가서는 섬세한 의료용 메스나 심지어 이쑤시개 등으로 하나씩 세심하게 제거하며 유물을 노출시킨다. 이때 흙을 제거하는 ‘붓질’을 하기도 한다”면서 크고 작은 기구들을 다양하게 사용한다고 했다.
-발굴 현장에서는 보존처리자와의 긴밀한 협조 필요, 발굴이후에도 발굴과 유사한 시간과 인력 필요
철제류, 토기, 기와 등 유물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천 여 년 이상 땅 속에 매장돼 있다가 공기와 만나면 어스러질 정도라고 한다. 철제류의 경우도 자칫하면 유물 자체가 훼손된다.
이재현 실장은 “유물들이 노출된다고 해서 다 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과정을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고 3D스캔으로 작업하는 등 현대의 첨단 장비를 총동원한다. 발견된 유물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노출되면 부식이 급격히 진행된다. 그래서 유리나 토기 등은 접합을 하고 철이나 금속 등은 부식이 진행되므로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실내작업을 한다”고 했다.
응급처치로 경화 처리를 요하는 경우도 많아 조사 기관은 반드시 보존처리요원을 두도록 하고 있다.
발굴 현장에서는 보존처리자와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보존과학자는 발굴 기간 동안 현장에서 발굴자와 함께 발굴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항시 대기할 정도로 보존처리 유물 발굴이 안 될 경우는 발굴 책임자의 도움 요청이 있거나 보존처리가 필요할 때 보존과학자가 정기적으로 현장에서 공동 작업을 하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발굴하는데 필요한 기간과 인력은 발굴이후에도 기간과 인력이 거의 비슷하게 소요된다고. 유물 출토의 양에 따라 유물을 실측하고 보고서를 발표해야 하는 과정 등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발굴 당시 유물이 훼손된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1970년대 안압지(월지와 동궁)에서 출토된 주령구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기술 부족으로 태워버린 예가 있었다고 한다. 또 즉각적으로 처리하지 않아 산화가 돼 없어져 버리는 예도 있었다.
천마도의 예가 그것이다. 발굴 당시부터 보존 처리해 용기액 속에 보존해두었다가 공개된 것이다. 아직도 보존액속에 그대로 두고 있는 유물의 경우도 있다. 현대의 기술로도 원래의 상태대로 공개할 수 없는 유물들도 많다는 것.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서 만난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성윤 조사연구팀장은 “불과 수 십센티미터 아래서 기와, 토기, 청동이나 우물의 흔적, 씨앗 등이 발견되고 있다. 기와 등이 수습되면 세척해서 기록하고 그 중 중요한 유물로 추정되면 보고서를 통해 보고를 하고 이들은 국가귀속 절차를 밟아 국가에 귀속된다. 이들 유물은 다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돼 그 중 귀한 유물은 전시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 신라월성 학술조사단 이인숙 학예연구사-“‘발굴’이란 계속해서 사랑해야 할 존재”
최근 발굴이 진행 중인 월성(사적 제16호) 서쪽 성벽에서 1500년 전 사람을 제물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2구와 월성해자에서는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토우 중 가장 이른 시기인 6세기로 판단되는 유물 등이 발굴됐다.
이들 유물의 언론공개회를 가지면서 스포트 라이트를 받은 학예사가 있다. 그는 월성 A지구 성벽 조사 중 인골을 최초 발견한 ‘유적 운이 좋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 신라월성 학술조사단 이인숙 학예사(39)다.
그는 “유독 두 인골이 나오는 바람에 특히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라면서 겸손해 했다.
지난 23일 월성 발굴현장에서 그를 만나 생생한 발굴현장에서의 성과와 에피소드를 들어 보았다.
-“경주는 고대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 수 있어서 새롭습니다”
이인숙 학예사는 우리나라 중요한 유적의 발굴을 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으로, 2014년 월성 발굴 시작서부터 발굴 팀원으로 일하고 있다. 석빙고 앞 C지구 시굴조사에서부터 시작해 월성 성벽 A지구의 조사원으로 현재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올해 학예사 12년차로, 그가 거쳐간 유적은 낙산사, 경복궁 등이었다. 국민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 훌륭한 유적에 대한 조사를 해왔던 편이었고 그 현장의 중심에 있었던 것. 그는 경북대학교에서 고고인류학을 전공했다. 동대학원에서는 고고학을 전공한 정통파로 학창시절 국사와 지리를 유독 좋아했다고 한다.
이 학예연구사는 “경주에서 2년 남짓 조사를 하고 있는데 제가 주로 조사했던 경복궁이나 낙산사의 경우는 중세 이후 조선시대 유물이 대부분인데 비해, 경주는 고대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 수 있어서 새로웠습니다. 제 전공이 기와 중에서도 평기와였는데 경주의 더 이른 시기의 유물을 직접보고 막새기와도 상당수 출토되기 때문에 병행해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에 대한 논문도 냈습니다”라고 하면서 신라 지역의 독특한 기와에 대해 더욱 연구하고 기와에 대한 연구 영역도 넓혀 나가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대퇴부 다리 하나를 확인, 절묘하게 인골 있는 부분 팠습니다”
그는 인골 발굴 당시, 성벽문이 있던 자리에서 성벽의 축조 형태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성벽에서 인골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1980년 월성 해자 안에서 인골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제가 절묘하게 인골이 있는 부분을 팠습니다. 그 트렌치 중 조금만 어긋났어도 발견하지 못했을 거예요. 처음에는 대퇴부 다리 하나를 확인했는데 나뭇가지일 가능성도 생각했습니다. 계속해서 정형성을 가지고 대퇴부가 발견돼 뼈임을 직감했구요. 바로 동아대학교 인골 전공자 김재현 교수에게 연락해 공동으로 조사하게 됐습니다”
인골은 약해서 쉽게 부서지기 쉽다. 공동으로 조사해 유구를 완벽하게 찾아낸 것이었다.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실감났죠. 습한 지형이라 좀 더 인골이 완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큰 이슈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건 인골을 최대한 온전하게 수습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라며 제물용이라는 근거를 밝혀야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고 기뻤던 반면, 걱정스러운 면도 컸다고 했다.
일단은 실측 및 완벽하게 사진으로 남긴 다음, 물기가 많은 상태에서 발견됐으므로 물기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 중성지에 싼 다음, 건조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인골의 성별, 키, 병의 흔적, 외상의 흔적을 찾고 부러진 뼈의 경우 접합과 복원을 해서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 처리했다.
인골은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것으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다양한 연구도 수반된다. 대퇴부에서 DNA를 추출하면 인간의 유전학적 정보를 알 수 있으므로 현재, 대퇴부 일부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처리실에 의뢰해 놓은 상태라고 했다. 이후 인물 복원 연구도 같이 병행할 계획이라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세트장 같은 복원 하지 않기 위해 최선 다해 발굴합니다”
월성은 현재 A지구 성벽, 석빙고 앞 C지구 건물지, 성벽 밖 해자 등 세 개 지구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다. 성과로는 C지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건물지 군이 확인됐고 A지구에서는 이번 인골이 확인되면서 초축을 5세기 전후로 추정해 밝혔다는 것과 해자에선 ‘병오년(丙午年)’이라고 기록돼 정확한 연대가 최초로 확인된 목간이 발굴되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소그드 인 토우 발견은 신라와 페르시아와의 활발했던 교류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향후 해자는 올해 안으로 조사를 완료한다고 했다.
서성벽을 발굴하는 이유도 월정교와 연결되는 서문을 찾기 위해서다. 제대로 된 복원을 위한 발굴인 것이다. “정확하게 복원하기 위한 것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세트장 같은 복원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최대한 정확한 규모나 위치를 찾아서 복원을 해야 하니까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철저한 고증과 연구가 병행돼서 고대에 가까운, 좀 더 완벽하고 상징적인 월성을 대표할만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한 것이죠. 후대에도 부끄럽지 않은 건축물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월성에도 건축연구사가 따로 있어 복원의 우수 사례, 향후 복원의 방향 등 복원정비에 관련한 연구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A지구는 성벽의 문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로, 하반기에는 일제강점기 조사했던 성벽을 전면 조사해 성벽의 전반적인 초축이라던가 마지막 단계의 성벽의 축조모습 등을 정확하게 판단해 내년쯤 성과들이 공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월성은 역시나 어느 유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중요한 유적입니다. 이 유적을 조사하고 있는 일원으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철저하게 조사연구 해야겠다는 압박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다”
“연구 분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요. 단순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새로운 유물이 계속해서 확인되고 있어서 공부해야하는 부분이 많은 거죠. 천천히 공부하면서 많은 정보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월성 성벽은 저로선 처음으로 조사를 한 것이니 이 분야에 대해 더욱 많은 공부를 해서 연구자 반열에도 합류하고 싶습니다”라며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밝혔다.
긍지와 신념이 그의 표정은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얼굴에서 더욱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