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작품을 마지막으로 일본 만엽집을 다룬 장장 32회에 걸친 칼럼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본 칼럼을 통해 한국은 물론이려니와 일본에서도 다루어져 본적이 없는 만엽집의 핵심이 다루어졌다고 본다. 만엽집의 해독은 향가를 모르고는 불가능하다. 또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향가를 모르고는 해독될 수가 없었다. 필자는 향가 연구자이지 본격적인 만엽집 연구자가 아니다. 일본어에 대해서도 아주 기초적 지식밖에 없다. 향가에 흥미를 갖고 오래토록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연을 만나 신라 향가의 창작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 활용하여 신라 향가 14장을 완독한데 이어 균여전의 향가까지 완독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현전하고 있는 향가 25장 해독을 마친 것이다. 필자는 향가 해독을 마쳤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 후 우연히 신라 향가 창작법을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고시가집 만엽집에 적용하여 보니 일본인들이 지난 천년 간 알고 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나왔다. 그러나 풀이 결과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했고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도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필자는 만엽집에 수록된 4516장 중 1000여장의 해독을 거쳐 만엽집이 명백히 한반도에서 건너간 디아스포라들이 만든 향가집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민족이 현해탄을 건너 갈 때 향가를 가지고 갔다. 신라에서 출발한 ‘소잔오’라는 무인이 일본서기 1번가를 지었다는 내용이 명백히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이 일본 열도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향가로 만들어 담아내었다. 일본의 향가가 신라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한 나라의 국문학을 정의할 때 한 민족이, 그 나라 언어로 기록한 문학을 말한다. 만들어진 장소가 어디인지는 묻지 않는다. 만엽집이란 명백히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한반도어로 만든 작품들을 모아놓은 고시가집이었다. 현대의 우리민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뉴욕에 살며 우리나라 언어로 시나 소설, 대본을 써 모아놓은 작품집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만엽집은 우리나라 문학의 한 갈래이다. 이러한 작품을 유이민 문학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밝히게 된 것은 신라향가로 부터 시작되었다. 경주신문 독자들에게 신라 향가가 만엽집을 풀게 했고, 일본 최초의 향가가 신라에서 간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최초로 보고드린다. 경주시민들은 신라 향가의 본고장이기에 신라향가 창작법이 일본의 창작법을 풀어내는 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맨 처음 보고받을 자격이 있다고 본다. 한국의 향가와 일본의 만엽집은 고대 동북아인들이 남겨놓은 푸른 바다의 진주였다. 그 속에는 역사의 풍랑에 부대끼던 고대 한국인과 그 후손들의 사랑과 염원이 담겨 있었다. 경주시민들께서 향가를 사랑해주시고, 신라를 거쳐 일본으로 간 만엽 향가 역시 사랑해 주시기 바란다. 이를 바탕으로 한일 우호관계가 더욱 탄탄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엽집 해독이 한일국민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거나, 한일 갈등을 증폭시키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다. 본 칼럼을 게재할 수 있도록 지면을 허락해주신 경주신문 관계자들에게 큰 감사를 드리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아주 낯선 내용을 끝까지 읽어주신 경주신문 독자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천지천황의 후손들은 천무와 지통천황에게 빼앗긴 황위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엄중한 감시 하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향가의 힘을 빌어 황위를 찾고자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지천황 측 인사들은 향가를 만들어 천무천황 후손들간 골육상쟁을 벌이기를 빌었다. 마침내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천무와 지통의 후손들은 골육상쟁 끝에 이리저리 갈라져 황위를 이을 후손들이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천지천황의 친손자인 광인(光仁)천황이 마침내 즉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231번가> “고원산으로 가는 들가에 / 가을 능금 나무 열매가 열렸다가 흩어진다. / 바라보니 황위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 고원산(高圓山)은 높고도 원만해야 하는 자리, 천황의 자리를 은유하고 있다. 고도의 암시법이 사용되어 있다. 그만큼 천지천황의 후손들은 감시 속에 살았을 것이다. 작품 속 ‘아(芽)’는 파자법으로 풀어야 한다. 芽=十十 + 牙으로 파자가 된다. 이십번을 어금니로 씹어 먹는 과일, 즉 능금을 말하고 있다. 추자(秋子)는 지통 후손들을 암시하고 있다. 늦가을 들판에 붉게 익은 능금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있다. 언듯보아 그림같이 아름다운 정경이다. 그러나 내용은 냉혹하다. 지통천황(=秋)의 후손들(芽子 능금 열매)이 골육상쟁을 벌여 서로 죽이고 있다는 것이다. 황위를 지켜야 할 사람조차 남아나지 않았다. <232번가> “황자께서 삿갓쓰고 산으로 가네. / 들가로 난 길에 큰 구름이 끼어 있다. / 거칠어 오래 걸리는 나라 찾는 길” <233번가> “고원산 들가에 가을 능금나무 열매가 흩어지네. / 너희들이 흩어지니 황자님의 모습이 눈앞에 밟히고 또 밟힌다. / 슬픔에 눈물을 뿌린다” 천무와 지통의 후손들이 서로 싸워 황위를 지킬 사람조차 남아나지 않았다. 이제 천지의 후손인 지귀(志貴)황자가 나서 황위를 되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하여 이러한 때 그가 죽고 말아 슬프기 그지없다는 작품이다. <234번가> “삼립산(三笠山) 들가 따라 떠도는 머나먼 길. / 매우 멀고 거칠다. / 멀기로 소문난 곳” ‘매우 멀고 거칠기로 소문난 곳’이라는 구절 역시 황위를 되찾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암시한다. 삼립산(三笠山)은 ‘삿갓 쓴 세 사람이 갔던 산’이다. 세 사람은 천지천황 가족관계 표에서 찾아보면 천지의 아들 지귀(志貴)황자, 손자 광인(光仁)천황, 증손자 환무(桓武)천황으로 볼 수 있다. 이들 후손 세 사람은 부끄러워 하늘의 해(천무, 지통 천황 등)를 차마 바라 볼 수 없어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 뜻이 될 것이다. 황위를 잃은 천지후손들의 고난을 그린 수작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만엽집 권제2가 끝이 난다. 황위를 되찾기까지의 천신만고의 여정을 그린 작품들이 만엽집 권제2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향가는 한반도에서 건너갔다. 우리의 향가는 그곳에서 일본 황실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필자는 만엽집을 해독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엽집에 담은 예언은 84번가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권제2의 마지막 부분에는 저주까지도 담아놓았다. 작자를 정체불명으로 처리해 놓았다. <228번가> 妹 之 名 者 千代 尒將流 姬嶋 之 子 松 之 末 尒 蘿生 萬代 尒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의 악명은 천대에 전해지리 / 그녀 아들의 끝은 쑥이 나 만대에 이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妹)이란 지통천황을 말한다. 우매한 여인이란 뜻일 것이다. 지통천황을 얼마나 저주했을까. 작자는 그녀의 악명이 천대에 전해지도록 해달라 빌고 있다. 본문 속 나생만대(蘿生萬代)라는 구절은 ‘쑥이 나 만대에 이르다’는 뜻이다. 지통천황의 아들은 초벽황자이다. 초벽황자 후손들의 패망을 기원하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강렬한 증오심이 없으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얼핏 보면 ‘모자의 치세가 이끼가 날 때까지 만대를 가라’로 해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심받지 않도록 겉보기로만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향가에는 이면에 또 이면이 있기에 조심스럽고 치열한 접근이 필요하다. 백 번, 천 번 읽어야 그 진의가 나온다. 그러기에 향가의 해독에는 집단지성이 필요하다. <229번가> 難波 方 塩干 勿 有曾祢 沉之 妹 之 光儀 乎 見 卷 苦 流 思 母 “나니와(오사카)의 소금내는 일꾼들은 힘이 빠지지 않는다네 /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妹)이 기세 있게 거동하고 다니니 괴롭고 슬플 뿐”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妹)이란 지통천황을 말한다. 지통천황이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녀가 아들 초벽황자를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뜻일 것이다. <228번가>에서는 지통천황의 악명이 천대에 이를 것이다, 지통천황의 아들의 끝은 쑥이나 만대에 이를 것이라고 그녀를 저주하였다. 그러더니 <229번가>에서는 그녀가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비난하고 있다. 지통천황의 후손들을 저주하는 작품들이 만엽집 권 제2 결론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엽집의 성격 규정에 중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그러면서 만엽집을 국서라고 한다. 심지어는 만엽집을 마음의 고향이자 민족의 정체성이라고 한다. 일본 천황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일본에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지통천황이 저승으로 떠나고 난 뒤 84번가가 배치되어 있다. 84번가는 만엽집 권제1의 마지막 작품이자 권 제1 최대의 문제작이다. 84번가는 천무천황의 아들 장황자(長皇子)가 천지천황의 아들 지귀황자(志貴皇子)를 불러 함께 연회를 가졌을 때 만든 작품이다. 秋去 者 今 毛 見 如 / 妻 戀 尒 / 鹿將鳴山 尒 高野原 之 宇 倍 “가을(秋=持統天皇)이 가고나니 이제 나타남이여? / 그대를 그리워했다오. / 사슴이 장차 울게 될 산 고야원(高野原)의 집에 그대를 모시리” 원문 속 ‘추(秋)’는 추관(秋官)의 생략어이다. 중국 주나라의 관직으로서 형률을 관장하는 직위다. 여기에서는 지통천황을 말한다. 지통천황은 매우 혹독하게 형률을 집행한 천황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친언니의 아들인 대진(大津) 황자를 조사도 없이 하루만에 모반죄로 처형하였다. 지통천황을 추관(秋官)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추관이 갔다(秋去)’라는 구절은 ‘지통천황이 사망했다’로 풀어야 할 것이다. “가을(秋=持統天皇)이 가고나니 이제 나타남이여?”라는 구절은 천지천황의 아들인 지귀(志貴) 황자가 지통천황 치하에서는 무서워 숨소리도 내지 않다가, 그녀가 죽고 나니 나타났다는 의미이다. 천지 천황의 후손들은 지통천황에 의해 엄중히 감시받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하면 엄중히 처벌되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천무천황은 형 천지천황이 사망하자 난을 일으켜 조카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였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과 같다. 천무와 지통의 후손들은 십 대에 걸쳐 황통을 이어갔다. 천지천황의 아들 지귀황자가 천무천황의 아들 장황자에 의해 모임에 초대받았다. 지귀황자는 지통천황 치하에서는 숨도 못 쉬고 지내다가 지통천황이 사망하니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은인자중하며 지냈던 지귀황자의 아들이 훗날 천황으로 등극하게 된다. 광인천황(光仁, 770~781)이다. 드디어 천지천황의 손자가 천무천황계를 물리치고 황위를 되찾게 된 것이다. 이로써 만대를 이어가고자 했던 지통천황의 후손들로 이어지던 황통이 단절되었다. 84번가에 고야(高野)라는 고유명사가 있다. ‘사슴이 장차 울게 될 산 고야원(高野原)’이라는 구절이다. 지통천황 후손들의 황통을 끊고 즉위한 광인(光仁)천황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고야신립(高野新笠)이라는 여인을 황후로 맞았다. 광인천황과 고야황후 사이의 아들로서 황위를 승계한 이가 간무(桓武)천황이다. 이후 지금까지 그들 부부의 후손들에 의해 황위가 이어지고 있다. 누군가 ‘사슴이 장차 울게 될 산 고야원(高野原)’이라는 구절이 있는 84번을 마지막으로 만엽집 권 제1을 끝냈다. 여기에서의 사슴이란 제왕을 말한다. 만엽집 최대의 문제 구절에 나오는 고야(高野)라는 이름의 황후에 의해 천황이 태어났다. 이를 우연이라고 볼 것인가. 향가시대의 사람들은 향가의 힘이 황위의 교체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누군가가 만엽집의 체제를 바꾸었다. 만엽집 권 제1에 고야의 후손들이 황위를 이어가게 주술을 걸었다. 향가의 힘은 이처럼 가공스럽다.
만엽집을 연구하면서 느끼는 미스터리 하나가 있다. 만엽집 최대의 수수께끼일 것이다. 현재 만엽집 권제1에 수록된 작품 수는 84장이다. 84라는 숫자는 만엽집의 숫자 개념으로는 있을 수 없는 파격의 숫자이다. 만엽집의 숫자 개념을 권 제1에 적용하자면 만엽집 권 제1은 마땅히 80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8은 ‘많다’의 개념이다. 사통팔달, 팔선녀 등에서 이러한 숫자 개념을 본다. 그래서 80은 무한대의 숫자를 상징한다. 하나하나의 향가도 힘을 가지고 있는데 무한대의 향가 작품으로 구성된 만엽집은 초강력 힘으로 지통천황 후손들의 치세를 이어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해 만엽집 편찬자는 당연히 80번가로 만엽집 권제1의 끝을 맺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가 80이라는 무한대의 숫자를 파괴해버리고 84로 만들었다. 의도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숫자가 나왔다. 여기에는 특정한 의도가 숨어있다. 누군가 지통후손들의 황통을 끊어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를 위해 4편의 향가를 만엽집 권제1에 추가하였다. 그것이 81~84번가이다. 지통으로 부터 이어지는 황통을 끊고자 하는 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선 사람들 마음에 둥지 틀고 있는 지통천황을 저승으로 보내버리고자 했다. 틀림없었다. 그녀의 치세를 마감하기 위한 향가 3편이 권제1에 추가되어 있었다. <81번가> “산 너머로 지통천황이 정자(井字) 꼴로 구획하여 지은 등원경이 떠나가는 게 보인다. / 지금까지의 공적을 알려 그대를 이롭게 하리. / 귀신의 바람처럼 대단했던 그대의 기세를 이세신궁의 처녀들이 드러내고 있다” 711년 지통천황 치세를 상징하는 등원경이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81번가부터 만엽집 작품 구조에 강렬한 단층선이 나타나고 있다. 등원경과 지통천황을 저승으로 보내고 있다. 없어도 될 작품이 배치되어 있다. <82번가> “포구에서 등원경이 저승배 타는 것을 도우라. / 정들었던 옛 도읍이 저승배 타는 것을 도우라. / 그대에 대한 사랑은 오래도록 굳세어 변함없을 것이다. / 하늘에 가시어도 온 나라에서 절하고 있는 우리를 응당 보시리” 이 작품 역시 등원경을 환송하고 있다. 붙잡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83番歌> “바다 밑 물굽이 치는 나루에 하얀 물결이 솟구친다. / 밭 위의 산을 어느 때 사슴이 넘어갈 것인가. / 세상물정 모르는 분께서 마땅히 나타나시어야 하리” 등원경을 보내더니 이번에는 지통천황을 환송하고 있다. 이로써 한 시대가 마무리되었다. 작자는 지통천황에게 갈 때가 지났으니 비록 저승바다에 흰 파도가 일더라도 이제는 떠나셔야 한다고 저승길을 재촉하고 있다. 한 시대가 강제로 보내어지고 있다.
황실에 막중한 영향력을 가졌던 지통천황이 건설한 등원경을 버리고 새로운 수도 평성경으로 천도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예민한 사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평성경(平城京) 천도를 둘러싸고 주의 깊은 배려가 있었다. 등원경(藤原京)을 폐기하지 않도록 했고, 또다른 조치로 새로운 도읍인 평성경(平城京)과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샤머니즘적 방안까지 강구되었다. 이것은 저승에 가 있는 지통천황의 노여움을 방지하는 일방, 그녀의 정통성을 대대로 승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80번가> 青丹 吉 寧樂 乃 家 尒 者 / 萬代 尒 / 吾 母 將 通忘 / 跡念 勿 “푸르고 붉게 화톳불이 켜진 평성경, 남녀노소 편안하리라. / 우리는 만대를 이어가리라. / 등원경과 평성경을 왕래하는 수고로움을 생각지 않으리라. / 지통천황의 공적을 잊지않으리라” “우리는 만대를 이어가리라” 작품 속 이 구절이 당시 천황가의 염원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도읍으로 옮겨 가며 그들이 행했던 주도면밀한 조치를 살펴본다. 천도를 하지만 등원경과 평성경 두 곳은 매우 가까운 곳임을 강조하고, 두 곳 중간중간에 수많은 집을 지어 마치 두 도시가 이어지는 것처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 남녀를 선발하여 두 도시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토록 조치하였다. 이것은 두 도시가 한 도시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새로운 도읍 평성겸(平城京)에는 붉은 깃발을 매달아 놓도록 했다. 붉은 색은 천무천황과 지통천황이 임신의 난을 일으켰을 때 그들의 군사들로 하여금 사용하게 했던 색깔이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이 붉은 색은 천무천황과 지통천황의 상징색이 되었다. 단절을 막고, 정통성을 잇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샤마니즘적 조치가 뒤를 이었다. 이로써 본 작품을 지은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통천황의 공적을 잊지않으리라. 우리는 만대를 이어가리라” 지통의 후손들은 향가의 힘을 동원해 자신들만이 독점적으로 만대를 이어 황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들에게 향가는 자신들의 염원을 이루어지는 마력의 힘을 가진 주술가였고, 황위를 보장했던 도구였던 것이다. 지통천황의 후예들은 향가의 힘에 의해 자신들이 황통을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를 위해 향가집이었던 만엽집을 만들고, 향가집의 힘으로 소원을 현실화하고자 했다. 고대인들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힘의 노래였던 향가는 한편의 작품으로도 천지귀신을 움직일 수 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여러 편의 향가를 한 곳에 묶어 놓으면 향가가 가진 힘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향가에서 8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80은 무한대를 말하는 숫자다. 만엽집의 만은 1만이 아니었다. 무량의 숫자였다.
지통천황은 황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어 손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그 손자가 문무천황이었다. 그러나 그 손자도 황위를 물려받은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다. 할머니 지통천황으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았으나 24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초벽황자와 문무천황 두 부자가 연이어 단명으로 삶을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날벼락이 없었다. 어머니 아폐황녀가 눈물가를 만들어 바쳤다. <76번가> “문무천황께 활 쏘는 소리가 어찌해 나는가. / 사람들과 대신은 방패 되어 서 있거라. / 슬프구나.” 아폐황녀는 아들의 죽음에 ‘활을 쏘는 것이 무슨 이익(利)이 된다는 말이냐. 아무 소용이 없다’라며 오열하고 있다. 어머니 황녀의 말에서 고대인들이 망자에게 활을 쏘는 행위는 떠나가는 이에게 ‘이익(利)이 된다’고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어머니였던 아폐황녀가 직접 즉위하기로 하였다. 문무천황이 너무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뒤를 이어 즉위할 손자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원명(元明)천황이다. 원명천황은 아들 문무천황이 죽고 난 다음 3년만에 등원경( 藤原宮)을 떠나 평성경(平城京)으로 또다시 천도를 결심하였다. 지통천황이 등원경으로 천도한지 16년 만이었다. 아마도 등원경(藤原경)이 길지가 아니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랐을 것이다. 원명천황이 새로운 수도 평성경(平城京)으로 가는 도중 가마를 멈추게 하고 멀리 보이는 아스카 청어원궁(淸御原宮)이라는 궁을 바라보며 <78번가>를 지었다. 길지 않은 기간에 세 번의 수도 이전이 있었다. 아스카 청어원궁(淸御原宮)에서 등원궁으로, 등원궁에서 평성경(平城京)으로의 천도였다. <78번가> 飛鳥 明日香 能 里乎 / 置 而 / 伊 奈婆 君 之 當 者 不 所 見 香 / 聞 安 良武 “그동안 날아가는 새나 아스카 청어원궁과 이웃으로 지냈으리. / 지통천황께서 아스카 청어원궁을 폐기하셨지. / 그대에게 지통천황이 벌을 주어 없애버리라고 하였지. / 보고해 오기를 등원궁(藤原宮)은 아무 탈 없이 평안히 지내도록 조치하였다 하는구나” 지통천황이 아스카 청어원궁(淸御原宮)을 버리고 등원경(藤原京)으로 천도한 원인이 언급되고 있다. 무엇인가 벌을 내리는 차원에서 아스카의 궁을 폐기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아들 초벽(草壁)황자가 요절한 데 대한 문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등원궁도 길지가 아니었다. 문무천황 역시 그곳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평성경(平城京) 천도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원명천황은 길지가 아니었다고 하나 등원경(藤原京)을 폐기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비록 천도는 하나 등원경(藤原京) 관리에는 성심껏 조치를 다했다. 지통천황과의 단절이 아니라 지통천황의 정통성을 이어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등원경(藤原京)은 천도 다음 해인 711年 불에 타고 말았다.
지통천황이 702년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사망하였다. 그녀의 공을 말할 때 향가의 대중화에 대한 업적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향가는 지통천황에게 종교에 해당되었다. 향가는 앞서 하늘로 떠난 아들을 보호하여 주었고,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었다. 지통천황은 전국에서 향가를 잘 짓는 사람들을 찾아 불러들여 그녀의 곁에 두고 다량의 작품을 만들도록 하였다. 향가의 힘을 일본 각계에서 믿도록 했고, 적극 수용되도록 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향가가 그녀의 후원에 힘입어 봄날 화단의 꽃처럼 일본 땅에 화사하게 만개하였다. 향가는 황실을 주변으로 구성원들의 개인적 소원을 이루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수도 건설과 같은 국가적 토목사업의 성공을 위하여서도 향가가 가진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향가를 아름답게 만개시킨 지통천황을 ‘만엽향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가 불러 일으킨 향가의 꽃바람이 일본을 뒤덮었다. 현재 일본에 전해지는 4516장이나 되는 대규모 향가집의 모태가 되었다. 그녀가 사망하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그녀의 영혼을 환송하기 위해 수많은 눈물가를 만들어 바쳤다. 그중 몇 작품을 선별해 감상해 보도록 하자. <66번가> “천무천황의 큰 반려이셨던 높으신 스승께서 물가로 가신다. / 저승배들이 베틀의 북처럼 들락날락하더라도 / 배에 타지 않고 바닷가에 누워 편히 주무실 것이다. / 굳센 분이셨다” *지통천황은 운명의 힘에 의해 정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되었다. 남편 천무천황과 함께 일본 고대사 최대의 난이라고 하는 임신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여러 명의 비 중 유일하게 남편 천무천황을 따라가 승리에 힘을 보탰다. 천무천황의 공이 50%라면 그녀의 공이 50%라는 말까지 있다. 그래서 본 작품에서는 지통천황을 천무천황의 큰 반려라고 하는가 하면, 매우 굳세었던 분이라 하고 있다. <73번가> “우리의 세상물정 모르시는 분께서 아들에게 가려고 새벽에 나가신다. / 물가에 바람이 부는데도. / 왜국의 유순한 백성들이 울고 있다. / 아버지와 어머니가 묘에 계시니 나는 아무리 추워도 손에 입김을 불지 않으리. / 지통천황이시여, 서두르지 마시라” * 지통천황이 외아들 초벽황자에게 가려고 바람이 부는데도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새벽에 길을 나서지 않아야 하는데도 세상물정을 모르기에 길을 나섰다. 되돌아 올 수 없는 저승길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서둘러 갔다고 탄식하고 있다. <75번가> “등원경 건물 사이 산에서 불어오는 새벽 바람이 차다. / 여행길 사람들이 옷이야 응당 빌려주겠지만 /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이시여, / 남이 옷 빌려 준다고 오래 여행하시지 말고 곧 돌아오셔야 하리”
지통(持統) 천황이 694년 새로운 수도 등원경(藤原京)을 지어 천도하였다. 그녀는 궁에 자신의 아들 초벽(草壁) 황자의 영혼을 불러오기 위해 향가 작품 하나를 만들었다. <50번가>이다. 이 작품은 일본 만엽집 400여년 사상 최고봉에 해당한다. 험준한 봉우리가 일품이다. 장대한 산세가 마치 일본 알프스와 같다. 50번가는 수천 장의 만엽집 중심에 우뚝 서서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작품들을 빛내준다. 작품을 해독해 보니 새로운 수도 건설의 목적이 또렷이 나오고 있다. 지통천황이 5년 전에 죽은 아들 초벽황자의 영혼이 땅에 깃들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멋진 수도와 궁을 지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새 수도를 지어놓고 하늘에 있는 아들을 부르는 어머니 천황의 마음이 작품 속에 녹아 들어 있다. 그때 지어 아들에게 준 새로운 수도 등원경(藤原京)은 지금 폐허가 되어 있으나, 작품만은 전해져 사람들에게 그때를 회고하게 한다. 690년대에 이러한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시며, 만엽집 50번가를 감상해 보시기를 권한다. 그리고 혹시 후일 일본 등원경 사적지 관광을 가시면 일본인들에게 이 작품 이야기를 해주시라. 일본인들은 작품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만엽집을 오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전혀 해독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으로 도거한 우리의 향가가 일본의 신수도 건설에 참여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작품을 감상해 보자. “온 나라 사람들은 생전의 공적을 알리라, 우리 대왕님(초벽황자)에게. / 하늘 높이서 비추는 해이신 황자께서는 거친 땅을 말할 수 없이 빼어나고 훌륭하게 하신다. / 등나무 덩굴이 자라는 벌판에 궁을 지어 황자를 모시리. / 나랏일에 전력을 다해주는 사람들은 새로 지은 궁전이 얼마나 높은지 알리라. / 황자의 영혼은 오래도록 권력을 가져야 하리라. / 황자께서는 집이 하늘과 땅에 있어야 할 것이다. / 궁을 건설하는 인부들은 머뭇거리고 종종걸음하며 일을 하라. / 맑은 바다 나라 관복을 입은 사람들은 밭 위의 산으로 가 나무 베는 일을 돕고 노송나무를 끌어오게 하라. / 여자들은 사람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주어 화목하게 하라. /수많은 성씨의 사람들은 강에 황자의 생전 공적을 꾸며서 띄워 보내 황자를 모셔 원한을 흩어지게 하고, 황자와 우리가 오래 화합하게 하라. / 사람들이 황자를 잊고 있고, 황자의 공적을 알리지 않고 있다. / 사람들이 띄워 보낸 것들이 물에 떠다니고 있다. / 이 글을 짓는 것은 황자께서 저승으로 거둥해 가실 때 생전의 공적을 알리는 것이 아니다. / 나라의 큰 권세이셨던 황자께서는 길을 좇아 가셨다. / 나라에서 황자의 생전 공적을 꾸며 삼십 명이 생전공적을 기록한 책을 짊어지게 하였다. / 영험한 거북이가 새로이 대를 이어갈 것이다, 여러 샘과 강물에 어리어 있는 달처럼. / 나무 베는 일에도 삼베 입은 사람 백 명으로는 일손이 부족하여 오십 명을 더 불렀다. / 그들은 황자의 궁을 크게 만들어 놓고 배를 타고 떠나갔다. / 그대여 되살아나 오래도록 등원경(藤原京)에 모습을 보이시라. / 황자께오서는 우리의 청을 따르시라”
노야황후는 황위를 이어갈 외아들이 죽자 자신이 직접 즉위하였다. 지통(持統)이라 불리는 천황이 바로 그녀이다. 지통천황은 넋을 잃고 방황하였다. 아들의 묘를 찾아다니고 아들과의 추억이 서려 있던 곳을 찾아다녔다. 또 그녀는 아들이 죽어 해가 되어 하늘에서 세상을 비친다고 믿고 그 해를 보기 위해 멀리 국토의 동쪽 끝까지 행차하였다. 신하들은 그녀의 방황을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방황을 말리는 신하들의 작품을 보자. 만엽집 44번가이다. 吾妹子 乎 去 來/見 乃 山 乎 高 三 香 裳/日 本 能 不 所 見/國遠見 可 聞 “우리의 사리에 어두우신 천황께서 아들에게 갔다오마 하시네. / 황자를 볼 것이라네, 산 높이서 세 여인이. / 해가 떠오르는 곳에서는 응당 황자를 보지 못한다네. / 황자께서는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나타나신다고 아뢰어야 한다네” 본 작품의 배경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691년 3월 지통천황이 동쪽 이세(伊勢)라는 곳에 행차하고자 하였다. 떠오르는 아들을 보고자 함이었다. 이때는 농번기였다. 신하들이 ‘농번기를 앞두고 가셔서는 안 된다’고 강력 만류하였다. 그러나 천황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마땅히 농번기를 피하여야 함에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보러 출타하여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천황에 대해 신하들은 ‘세상 사리에 어두운 여인(妹)’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이 작품은 내용보다 ‘매(妹)’라는 향가문자가 ‘세상 사리에 어두운 여인(妹=昧)’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향가이기에 향가 해독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매(妹)’라는 한자를 네이버 한자사전에서 찾아보면 ‘누이, 소녀, 여자, (사리에) 어둡다(=昧)’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연구자들은 사전적 의미도 아닌 ‘아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오매(吾妹)’를 ‘나의 아내’로 풀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이 작품이 창작되는 배경이 기록되어 있다. 신하 삼륜(三輪高市磨)이 ‘농번기를 앞두고 행차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고 있다. 즉 ‘매(妹)’는 사전에 있는 4가지 의미 중 ‘사리에 어둡다(昧)’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고 추정되었다. 다른 작품의 ‘매(妹)’에도 이를 적용해본 결과 모두가 ‘사리에 어둡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매(妹)’를 ‘사리에 어둡다(=昧)’로 최종 확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누이’나 ‘아내’라는 의미로 풀어놓은 향가의 해독이 오독으로 판명되었다. 신라향가에도 ‘매(妹)’라는 글자가 나오는 향가가 있다. 제망매가(祭亡妹歌)가 그것이다. 지금까지는 ‘죽은 누이를 제사 지내는 향가’로 해독되어 왔다. 이제 ‘세상 사리에 어두운 누이’라는 의미로 풀어보았다. 그랬더니 ‘사람이 죽는 것도 나이 순서에 따라야 하는 데 오빠(월명사)보다 먼저 죽는 것은 세상사리 모르는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은 내용의 작품이었다. 제망매가라는 제목도 ‘세상 사리 어두운 누이를 제사 지내는 향가’로 풀어야 했다. 이처럼 향가 문자의 의미를 잘못 알고 푼 경우가 상당수 있을 것이다. 향가 문자의 의미가 재발견되는 경우가 있다면 다시 되돌아가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만엽집 하지말고 향가에만 집중하라고. 그 말도 맞다. 일본의 만엽집에는 향가의 배경기록과 같은 이론이 없었다. 만엽집에는 일반 이론은 없지만 4516장이나 되는 풍부한 사례가 있다. 따라서 향가의 해독은 한반도 향가에서 시작한 다음 만엽향가로 들어가야 했다. 만엽향가에서 사례의 세례를 받은 다음 또다시 한반도 향가로 되돌아와야 한반도 향가가 풀렸다.
천무 사망 3년 후 일본 천황가가 흔들렸다. 아버지를 이어 천황에 오를 초벽(草壁)황자가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초벽 황자는 천무천황과 노야(鸕野讃良)황후 사이의 외아들이었다. 황후가 섭정하며 초벽황자를 황태자로 삼았으나, 황자는 어머니의 여망과 달리 황위에 오르지 못한 채 27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황자의 아내였던 아폐(阿閇) 황녀의 눈물가다. 만엽집 35번가다. 此 也 是 / 能倭 尒 四 手 者 我戀 流木 / 路 尒 有 雲 / 名 二 負 勢能山 “황자의 묘를 찾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계속 이어져야 하지. / 응당 왜국의 사람들이 사방에서 와 황자를 그리워해야 하나니. / 저승 가는 길에 끼어 있는 구름. / 황자의 생전 공적을 기록한 글을 두 사람이 짊어지고 세능산(勢能山)으로 가는구나” 황자의 장례일 구름이 끼어 있었다. 저승바다에 구름이 끼면 저승배가 순항할 수 없다. 그래서 바다에 구름이 걷히고 파도가 잔잔하게 가라앉아 초벽황자가 탄 배가 무사히 저승에 갈 수 있기를 천지귀신에게 비는 눈물가를 만들었다. 두 사람이 짊어지고 가야할 정도로 수많은 눈물가였다. 일본인들은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독하고 있다. 필자의 해독과 비교하여 주시기 바란다. “이거야말로 야마토(大和)에 있을 때 / 내가 그리던 키지(紀路)에 있다고 하는 그 유명한 세(背) 산이네” 초벽황자가 사망하자 대규모 향가폭발이 있었다. 엄청난 양의 향가가 이때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향가의 수는 25장이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 전해지는 향가는 만엽집에 실린 것만 해도 4516장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찌하여 우리의 향가가 일본에 비해 이리 적은가” 하고 필자에게 묻는다. 이러한 숫적 차이가 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초벽 황자의 장례시 일어났던 향가폭발과 관련되어 있었다. 대규모 폭발로 인해 향가의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대중화된 향가는 향가의 양산으로 이루어졌다. 아들의 죽음에 노야(鸕野讃良)황후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위로하고자 했다. 당대의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눈물가를 지어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본 작품에서 나오듯 두 사람이 짊어지고 갈 정도로 많은 수의 눈물가가 만들어졌다. 초벽황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눈물가로서 만엽집 1권에 게재된 것만 해도 28장(35~62번가)에 이른다. 이때의 작품들 모두 두 사람이 지고갈만한 양의 향가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제1권에 수록된 작품이 84편이니 무려 33%에 이른다. 초벽황자의 사망을 기점으로 눈물가가 대량 만들어 지게 된 것이다. 마치 지각을 뚫고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아 필자는 이를 향가폭발 현상이라 한다. 이러한 향가폭발 현상은 당연히 최고의 권력자이던 어머니 노야(鸕野讃良)황후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비통한 마음에 힘입어 일본에 건너간 향가가 온 들판 가득 꽃을 피웠다. 초벽황자의 사망이 뜻하지 않게 한반도애서 건너간 향가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향가가 일본 사회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아들을 잃은 그녀의 비탄이 향가의 역사를 크게 바꾼 것이다. 향가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천무천황이 사망한지 한 달 무렵 대진(大津)황자가 모반하였다. 노야황후는 모반사건이 제보되자 조사도 없이 다음 날로 교수형에 처했다. 대진황자의 아내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뛰어나가 황자와 같이 죽었다. 모두가 흐느껴 울었다. 모반을 일으킨 황자는 노야황후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대진황자가 처형된 후 그의 죽음을 애닯아 하는 눈물가 6편이 그의 누이 대래(大來)황녀에 의해 만들어진다. <만엽집 105번가> 吾勢祜 乎/倭邊遣 登佐/夜深 而 鷄鳴/露 尓 吾 立所 霑 之 “내 권세와 복록의 근본이여. / 나라의 변두리로 보내졌구나. / 밤이 깊어 닭이 우는데 / 이슬을 맞으며 나는 서서 젖고 있지” 황자는 깊은 밤 목이 졸려 죽은 것으로 보인다. ‘야심이계명(夜深而鷄鳴)’이라는 구절은 황자가 깊은 밤에 닭 잡는 것같이 목 졸려 죽었다는 것을 은유하고 있다. <만엽집 106번가> 二人行 杼/去 過 難寸 秋山 乎 如/何君 之 獨越 武 “둘이 갔어야지. / 나도 가기에 어렵지 않은 가을 산이 아닌가. / 어찌 그대는 홀로 넘어갔는가” <만엽집 163번가> 神風 乃 伊勢 能 國 尓母 有益乎奈/何 可来計武/君 毛不有尓 “신풍 같은 너의 군세는 응당 나라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 어찌하여 그대가 모반을 계획했겠는가. / 그대는 가고 없네” <만엽집 164번가> 欲見 吾 爲/君 毛 不有 尒 奈/何 可來 計 武/馬疲 尒 “원한다, 너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를, 나에게. / 그대는 가고 없나니. / 어찌 모반의 계획을 세웠겠는가. / 말도 지치는 머나먼 저승길 그대 떠나갔구나” 황녀는 동생의 모반을 믿지 않고 있다. 동생에게 모반을 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 보이라고 탄식하고 있다. <만엽집165번가> 宇 都曽 見 乃/人 尓有 吾 哉 従/明日 者 二上山 乎/弟 世登 吾 将 見 “동생의 무덤이 있는 곳이 멀리 들판에서 보인다. / 사람이 있어 나를 따른다. /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이상산에 올랐다. / 동생이 나에게 나타난다” <만엽집 166번가> 礒 之於尓 生 流 馬 酔 木 乎/手折目 杼/令視 倍 吉/君 之 在常 不言 尓 “바위에서 물이 나와 흐르니 말이 가던 걸음 멈추고 마셔댄다. / 따르는 사람이 손으로 나무를 꺾고 눈을 두리번거리며 동생의 무덤을 찾는다. / 보라고 안내한다. / 그대는 평소처럼 말이 없다” 말이 물 마시는 소리가 무덤가의 정적과 비교되어 더욱 크게 느껴진다. 무덤의 황자는 평소처럼 과묵하다. 대래황녀의 작품은 만엽집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절창이다. 한 글자 한 글자가 푸른 바다에 남겨진 진주와도 같다. 대래황녀를 만엽향가 최고의 가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천무천황이 686년 사망했다. 황후가 천무천황이 가는 저승길에 눈물가를 지어 바쳤다. 만엽집 159번가가 그것이다. 八隅 知 之/我 大王 之 暮去 者 召賜良 之/明 来者 問賜良 志/神岳 乃 山 之 黄葉 乎/今日 毛鴨 問給 麻 思/明日 毛鴨 召賜 萬旨 其/山 乎 振放見乍/暮去 者綾 哀/明 来者 裏佐備 晩 荒妙 乃/衣 之 袖 者 乾時 文 無 “온 세상의 사람들아, 천무천황의 업적을 알리라 / 대왕께서 해가 질 때 가시려 하니 가지 못하게 눈물가를 지어 불러주라 / 날이 샐 때 가시려 하니 알려주라, 생전의 공적을 / 그대가 가는 산(神岳山) 황엽이여 / 오늘 그대에게 눈물가를 부르며 사람들이 슬퍼한다 / 내일도 천황께 생전의 공적을 알려 주라 / 천황께서 산으로 떨쳐 가시는 게 언뜻 보이는구나 / 해가 질 때 가셔도 슬프도다 / 젊은 시절에는 충심으로 어머니 제명천황을 보좌하였고, 나이 들어서는 거친 세상을 아름답게 하였다네 / 옷소매가 마를 때 없이 눈물이 흐르는구나” 황후의 슬픔이 작품 속 한 글자 한 글자에 짙게 배어 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를 슬퍼하며 환송했다. 본 작품에는 몇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우선 한자를 이용해 한반도어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표기법인 향가체 표기가 눈에 띈다. 召賜良(부르다 소, 주다 사, 길하다 라)=불러주라. 問賜良(아뢰다 문, 주다 사, 길하다 라)=아뢰어주라. 위에서 보듯 ‘불러주라’, ‘아뢰어 주라’라는 말은 한국인이 아니면 구사할 수 없는 말이다. 본 작품이 한국어로 표기되었다는 것은 작자가 한반도어를 구사하는 사람임을 말한다. 작자는 누구인가. 훗날 지통천황으로 즉위하는 노야(鸕野) 황후였다. 황후이자 천황이 될 그녀는 한반도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일본 황실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우리나라 일각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또 다른 표현이 있다. 산의 노란 단풍은 상복을 말하고 있다. 현대인들이 입는 삼베 상복의 색은 노란색이다. 그 당시 일본인들도 한반도에서 입고 있던 노란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한반도어와 노란 황엽은 고대 일본에 끼친 한반도의 영향력을 증명한다. 그대가 가는 산(神岳山) 황엽이여. 오늘 그대에게 눈물가를 부르며 사람들이 슬퍼한다. 천무천황이 편안히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비는 작품이다. 그녀는 노래를 지으며 천무천황의 생전 공적을 미화하고 있다. ‘젊은 시절 충심으로 어머니 제명천황을 보좌하였고, 나이 들어서는 거친 세상을 아름답게 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처럼 눈물가를 만들며 망자의 생전 공적을 꾸미는 기법을 미화법이라 한다. 미화법을 모범적으로 구사하는 작품이다. 일본의 연구자들은 천무천황을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천황이라고 평가한다. 그러함에도 불구 만엽집 1권에는 천무천황에 대한 눈물가가 단 한 작품만이 수록되어 있다. 대접이 말씀이 아니다. 추후 이야기하겠지만 훗날 지통천황으로 남편을 뒤이어 즉위하는 노야(鸕野讃良) 황후에 대한 눈물가는 압도적 비중으로 그 숫자가 많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만엽집 편집자의 의도는 명백하다. 만엽집의 주인은 바로 노야황후(鸕野讃良)라는 것이다.
반란을 일으켜 조카 홍문(弘文) 천황을 살해하고 집권한 천무(天武) 천황이 앓아 누웠다. 천무천황은 병석에서 ‘천하의 모든 일을 황후(훗날의 지통천황)와 자신의 아들인 초벽(草壁)황자에게 보고하여 일을 처리토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에 따라 황후와 초벽(草壁)황자모자가 공동으로 권력을 쥐었다. 황후는 천지천황의 딸로 태어났다. 천무천황은 천지천황의 동생이니 그녀는 숙부와 결혼한 것이다. 황후는 남편과 함께 난에 직접 가담할 정도로 맹렬한 성정을 가진 여인이었다. 비록 어머니가 다른 동생이지만 친정 남동생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것이다. 난에 이겨 천무천황이 즉위하자 그녀는 남편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그녀는 형률을 혹독하게 집행하기로 이름을 떨쳤다. 그랬기에 만엽집에서는 그녀를 ‘추(秋)’라는 글자로 표기하고 있었다. ‘추(秋)’는 ‘추관(秋官)’이란 단어의 약자이다. 중국 주나라에서 형률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지금의 검찰에 해당하는 조직이었다. 남편의 지시로 권력을 쥐게 되자 그녀는 온 천지에 경고를 날리며 권력의 정점에 등장하고 있다. 그녀는 등장하면서 향가를 만들고 있다. 만엽집 <28번가>는 병든 천무천황으로 부터 권력을 위임받고서 황후가 직접 만든 작품이다. <28번가> 春過 而 夏 來良 之 白妙能衣乾 有/天 之 香 來 山 “봄이 지나니 여름이 왔어라 흰 옷 입은 백성들과 훌륭한 관복을 입은 신하들은 응당 옷을 깨끗이 빨아 말리라. 천향구산에” 찬바람이 부는 작품이다. 권력을 손에 쥔 황후가 '천무천황이 다스리던 봄같이 좋은 시절은 가고, 이제 자신이 다스리는 여름같이 혹독한 계절이 왔으니 백성들과 신하들은 정신 바짝 차리라'고 겁을 주고, 기강을 잡는 내용이다. 혹독하게 형률을 집행하겠다는 예고에 다름 아니다. 짜르르하다. 일본의 잡지를 보면 그녀는 형률을 혹독하게 집행하여 벽을 피로 바른 천황(지통)이라고 쓰고 있다. 역사에 악명을 남겼다. 그녀의 정치는 혹독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의 향가 발전에 크게 기여한 천황(지통)이 된다. 만엽집 1권에 수록된 84편의 작품 중 63% 정도가 그녀와 관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녀를 만엽집의 어머니라고 한다. 만엽집의 중심에 황후가 서 있다. 만엽집 <28번가>를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해독하고 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온 것 같네. (시로타헤노) 너를 말리고 있네. 하늘 향구산이여’ 지금까지의 해독과 같이 이 작품 역시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특히 일본인들은 원문 속의 ‘백묘능(白妙能)’이라는 세 글자를 ‘시로타헤노’라는 일본어 발음으로만 처리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 글자를 뜻이 없는 문자로 보고 있다. 만엽집 연구자들은 이러한 글자를 ‘마쿠라고토바(枕詞)’라고 한다. 본 작품을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황후의 후원에 의해 일본의 만엽집은 절정을 맞게 된다.
한반도 백마강 전투에서 패배한 천지천황이 몇 년 후 깊은 병에 들었다. 일부 신하들이 천지천황의 동생 대해인이 정치적 야욕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천지천황의 사후 후계자가 될 대우(大友)황자에게 큰 위협이 될 터였다. 그래서 그의 속 마음을 떠보고 의심이 사실일 경우 후환을 제거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천지천황은 사람을 시켜 동생 대해인을 궁에 들어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천황의 입궁 명령을 전하러 갔던 신하의 배신이 있었다. 그는 대해인의 비밀 정보망이었다. 대해인에게 황궁의 불길한 움직임을 이야기해주며 ‘조심하시라’고 은밀하게 경고하였다. 천지천황이 입궁한 동생 대해인에게 말했다. ‘내가 병이 심하다. 내가 죽고 나면 뒷일을 그대에게 맡기고자 한다’ 미리 대책을 마련해 왔었지만 대해인은 소름이 돋았다. 설마 했던 형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해인은 자신의 목을 조이려는 올가미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사전에 준비해온 답을 형에게 말했다. ‘저에게 뒷일을 맡긴다는 말씀은 당치 않습니다. 저 역시 이미 병이 들었습니다. 속세를 떠나 수도에 매진하고자 합니다. 그러하니 아들 대우황자에게 모든 정치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대해인은 형을 만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곧바로 머리를 깎았다. 아내와 아들, 몇몇의 종만을 거느리고 요시노(吉野)라는 곳으로 가 은거에 들어갔다.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천지천황은 동생이 순순히 은거에 들어가자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더 이상의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젊어서는 국정을 농락하던 권신을 어머니 천황의 면전에서 참수하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그토록 단호했던 그가 은거라는 미지근한 조치를 내린 것이었다. 병이 깊어 마음이 심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신하들이 ‘범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땅을 치며 탄식하였다. 일생을 풍운 속에 살았던 천지천황이 4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후계 황위는 천지천황의 뜻에 따라 아들 대우황자에게 승계되었다. 그가 홍문(弘文)천황이다. 멀리 요시노 숲속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조카에게 황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대해인이 요시노에서 조카 홍문천황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에게 은밀한 정보가 전해져 왔다. ‘오미(近江) 조정에서 천지천황의 능을 만들 인부들에게 무기를 지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단순히 능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닌 것같습니다. 큰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은거하고 있었으나 실상 대해인은 건곤일척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정보전이었다. 그의 정보망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천황이 그에게 입궁하라고 하자 즉각 천황의 의도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고, 능을 만들기 위한 사소한 군사들의 움직임까지 보고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정보는 약과였다. 그에게는 권력의 심부에 심어놓은 효율적인 정보망이 있었다. 그의 최고 정보망은 액전왕(額田王)과 십시(十市)라는 여인이었다. 대해인은 액전왕과의 사이에 십시라는 딸을 두었다. 자신의 딸 십시가 천지천황 사후 즉위한 홍문천황의 황후가 되었다. 대해인은 액전왕과 십시 모녀라는 여인부대를 홍문천황의 주위에 심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홍문천황의 동정이 대해인에게 광속으로 새어나고 있었다. 은거하고 있던 호랑이가 마침내 거병을 결단하였다.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홍문천황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패배한 홍문천황이 목을 매어 자결하자, 대해인의 부하들은 그의 목을 베어 대해인에게 바쳤다. 마침내 대해인이 승리하였다. 그가 천무(天武)천황이다.
만엽집 <15번가>는 한반도어로 읽히고 있다. <15번가>는 왜국의 제명 천황 장례식 때 그녀의 아들이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하며 눈물로 지은 향가였다. <15번가>를 해독하면 다음과 같다. 渡 津 물을 건너가는 나루 海 乃 豊旗 雲 尒 바다 에 에끼 구름 이 (끼어 있구나). 伊 理 比 沙之 그대는 다스림에 나와 나란하삿지. 今 夜 乃 오늘 밤 에 月 夜 淸 明己 曾 달이 밤 깊도록 맑아 (길을) 밝히겠지 한자로 써놓고 한반도어로 읽고 있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한반도어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다음의 구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海乃 바다에 雲尒 구름이 比 沙之 나란하삿지(나란하다+사지) 夜乃 밤에 明己曾 밝히겠찌(밝다+기+찌다) <15번가>가 고대 한반도어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작자 중대형 황자가 한반도어를 구사하였을 수 있다. 이는 일본 천황가가 백제 왕족과 혈족 관계를 갖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증거가 될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고대 한반도어로 된 향가를 누군가가 암송하면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현대 한국의 사찰에서 천수경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깨끗하구나, 깨끗하구나, 아주 깨끗하구나, 묘하게 깨끗하구나, 모든 것이 원만하게 성취되리라)’를 낭송하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뜻을 모르고 있듯이. 고대 한반도어로 표기되어 있기에 한국어를 모르는 일본인들은 만엽집을 해독하는데 있어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만엽집이 고대 한국어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일본인들은 지난 천 년간 만엽집 해독에 주력했으나 아직도 완독해낼 수 없었다. 이 점은 앞으로도 일본인들을 크게 좌절시킬 핵심 포인트이다. 만엽집이 고대 한국어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은 만엽집을 우리의 고문학으로 볼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근대 이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우리의 역사와 한일 관계사를 일방적으로 재단해 왔다. 그러나 이제 거꾸로 우리의 프레임으로 일본의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만엽집을 자기 민족의 정체성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일컬어 왔다. 더 나아가 만엽집을 국서라고까지 추앙해 왔다. 그러한 만엽집이 한민족의 언어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민족의 언어로 만엽집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인문학적 영토를 넓힐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인문학 연구자들의 책임이 막중해진다. 필자가 본 칼럼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향가의 세계다. 그곳에 가보니 충격적 사실들이 가을 들판의 가창오리떼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가 만엽집이 한반도어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원주민과 앵무새가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 것처럼 <15번가>가 향가의 세계를 다녀왔다는 증거물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여러분들을 천년 망각과 전설의 세계로 초청한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원래 지도 제작업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서쪽으로 가다 보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허황하기 그지없던, 한낱 지도 제작업자의, 말을 믿고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이 그를 후원하기로 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아끼던 보석까지 팔아 콜럼버스 대항해에 투자했다. 조선의 역사로 치면 정확히 임진왜란 100년 전인 1492년이었다.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를 위시한 배 3척으로 선단을 꾸려 90여명의 선원과 함께 스페인을 떠났다. 2달이 넘는 긴 항해 끝에 마침내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하였다. 콜럼버스는 그 곳을 인도로만 알았다. 스페인으로의 귀환 길에 나선 콜럼버스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증거물을 챙겨 가기로 했고, 고심 끝의 증거는 그곳의 원주민과 앵무새였다. 그가 내놓는 증거를 보고 유럽 사람들은 그를 믿었다.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다녀왔듯이 필자 역시 향가라는 망각의 세계를 다녀온 바 있다. ‘내가 그곳에 다녀왔고 그곳은 놀라운 세계였다’라고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떠들었다. 그러나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았다. 어느 신문사는 보도에 앞서 공인받기를 원했고, 교수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떠드는 나를 멀리하려 했다. 겨우 몇 사람만이 나의 말을 인정해주었다. 콜럼버스가 원주민과 앵무새로 사람들을 설득하였듯이, 나에게도 사람들을 설득할 무엇인가 증거가 필요하였다. 만일 필자가 향가 세계에서 발견해낸 사실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필자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 지금은 별세하셨지만 이영희 포스코 교수 등 몇몇 한국의 만엽집 연구가들은 ‘일본의 만엽집이 한국어로 읽힌다’고 주장해 왔다. 만일 이 사실이 증명될 수 있다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일 두 나라에 일파만파의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영희 교수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일부 근거를 제시하였으나, 일본의 연구자들을 설득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그녀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자, 급기야 부작용까지 생겨났다. 이솝의 ‘양치기 소년과 늑대’ 이야기처럼 사람들은 ‘우리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들을 탓할 수 없다. 충분한 입증의 책임은 언제나 주장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우연에 힘입어 향가의 세계로 들어가 보니 그곳에 일본의 만엽집이 있었고, 만엽집의 작품들은 한반도어로 읽히고 있었다. 만엽집 4516장의 작품 중 1000여 장을 검토해 본 결과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배척 받았지만 이영희 교수 주장은 비록 일부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만엽집 한 작품을 예로 들어 보이겠다. <15번가>는 다음과 같이 한자로 씌어 있고, 한반도어로 읽히고 있다. <15번가>는 서기 661년 왜국의 제명 천황 장례식 때 그의 아들이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하며 지은 눈물에 젖은 향가이다. 渡 津 물을 건너가는 나루 * 渡 물을 건너다 도, 津 나루 진. 海 乃 豊旗 雲 尒 바다 에 에끼 구름이 (끼어 있구나) * 乃 노젓는 소리 애, 豊 굽 높은 그릇 례, 旗 깃발 기, 尒 아름다운 모양 이. 伊 理 比 沙之 그대는 다스림에 (나와) 나란하 삿지. * 伊 너 이, 理 다스리다 리, 比 나란하다 비, 沙 사공 사, 之 가다 지. 今 夜 乃 오늘 밤 에 *今 오늘 금, 夜 밤 야, 乃 노젓는 소리 애. 月 夜 淸 明己 曾 달이 밤 깊도록 맑아 (길을) 밝히 겠찌 * 夜 깊은 밤 야, 淸 맑다 청, 明 밝다 명, 己 몸 기, 曾 찌다 증, 明己 밝기다. 위의 작품은 한자로 써놓고 한반도어로 읽었음이 분명하다. >>다음화에 계속
천지천황은 백제 멸망기 백제인들에게 희망의 끈이었다. 또 그는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유민들이 의지했던 기둥이었다. 그러했던 그가 백제 망국 11년 후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몇 달 앞둔 671년 1월 하녀의 소생이었던 대우(大友)황자를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태정(太政)대신에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몇 달 후 병으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겨우 46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눈물가가 만들어졌다. 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 천무천황에 대한 눈물가인 151번가를 소개한다. 작자는 천지의 동생 대해인(大海人)의 여자에서 천지천황의 여인이 되었던 액전왕(額田王)이었다. 如是有乃/懷志/勢婆大御船泊之登/萬里人標結麻思乎 “이럴 수가 있음이여? / 눈물을 가슴에 묻고 눈물가를 만드나니. / 기세 있는 모습으로 대어선(大御船)이 정박하네.(돌아올 때 길을 잃지 말라고) / 만리의 사람들이 / 표를 묶으며 슬퍼하고 있구나” *대어선(大御船)은 천지천황의 영혼이 타고 저승바다를 갈 배를 말한다. 폭포가 쏟아지는 것처럼 직설적으로 슬픔을 표현한 작자의 역량이 놀랍기만 하다. 만엽집 속 수많은 작품 중 이와 같이 격한 구절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액전왕이 천지천황과 사적관계가 아니라면 이토록 격정적 작품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소 전문적이지만 첫 구절 ‘여시유(如是有)’라는 구절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럴 수가 있음이여?’라고 읽혀야 한다. 이 구절은 한반도어를 모르고서는 절대 구사할 수가 없는 표기일 것이다. 왜 한반도어라고 하지? 잠시 생각을 거듭하며 읽어 주시기 바란다. 이 고비를 넘겨야 향가에 대한 심원한 이해가 가능하기에 수고로움을 청하는 것이다. 如是有 - 이럴(是) 수가 있음(有) 이여(如)? / *是 : 이 시, 有 있다 유, 如 맞서다 여 몇 번 생각해 보아도 이 구절은 일본어로 읽히지 않고, 한반도어를 한자로 써놓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구절이 고대 한반도어로 읽혔다면 일본으로 건너간 향가는 일본어가 아니라 한반도어로 읽혔다는 말이 된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인문학을 뿌리째 뒤집어 놓을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사안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설명은 본 칼럼에서는 일단 보류하겠다. ‘만엽집은 한국어로 읽힌다’라는 생각을 저서와 칼럼을 통해 발표한 한국인이 있다. 이영희라는 교수이다. 그녀는 1931년 도쿄에서 태어나 귀국했다. 이화여고를 나온 뒤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한국일보에서 문화부장을 지내고 국회의원을 지낸 명사이기도 하다. 이후 그녀는 한일친선협회 부회장, 한일 비교문화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그녀는 조선일보에 ‘노래하는 역사’라는 만엽집 관련 기고문을 통해 우리나라에 만엽집을 대중화시키기도 했다. ‘만엽집은 한국어로 읽힌다’라는 그녀의 주장을 현재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은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녀의 아이디어는 그리 쉽게 부정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의 탁견은 지속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었다. 필자는 연구 과정에서 그녀를 찾아 만엽과 고대 한반도어의 관계에 대해 고견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필자의 뜻은 뜻하지 아니한 그녀의 사망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쉽게도 그녀는 2021년 사망했다. 본 칼럼을 통해 만엽집 연구사에 빛나는 등불 하나를 매달아 놓은 그녀의 업적을 기리며 명복을 빈다. 다시 만엽집 151번가로 돌아가 보자. 액전왕은 한반도어를 완벽히 구사하고 있는 여인임이 분명하다. 수많은 연구자들은 그녀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의 후예로 확신하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기록이 없을 뿐이다.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만엽집 151번가에서 네이티브가 아니면 사용하지 못할 능숙한 한반도어를 구사하고 있다. 이 사실은 액전왕의 한반도 관계설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그녀는 한반도인의 후예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한반도어로 노래를 만들었다. 또하나 천지천황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가를 감상해보자. 만엽집 153번가이다. 천지천황의 황후가 지은 작품이다. 鯨魚取 淡海 乃 海 乎 奧放 而 榜 來 船 邊 附 而 榜 來 船 奧津 加 伊 痛 勿 波祢曾 邊津加 伊 痛 莫 波祢曾 若草 乃 嬬 之 念 鳥立 “고래와 물고기를 잡는 맑은 바다. 그대께서 바다의 물굽이로 떠나가신다. 노 저어 와 저승배가 물가에 닿았는가. 노 저어 와 저승배가 물굽이 나루에 닿았는가. 그대가 떠나가니 애통하여 우네. 저승배가 물가 나루에 닿았는가. 그대가 떠나가니 애통하여 우네. 그대가 바다가 아니라 풀밭으로 가신다면 몸이 약한 나도 함께 갈 것을” 고대 전통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다. 위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믿음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천지천황의 영혼이 타고 갈 배가 나루에 닿으려 한다. 천황의 황후는 애통해 하며 눈물을 쏟고 있다. 저승 가는 길이 험한 바다를 건너가지 않고 평탄한 풀밭이라면 몸이 약한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탄식하고 있다. 천지천황은 여인들이 뿌린 눈물 강 나루에서 배를 타고 저승으로 건너 갔다.
“많은 사람들이 왜국에 들어와 씨를 뿌리고 또 씨를 뿌리고 있지. / 마땅한 일이라면서 가래를 끌고 있으나 전례에 따라 관위를 주어야 한다네. / 그들은 언덕을 날듯이 뛰어다니며 농사를 짓고 있지. / 그들은 산과 들을 날듯이 뛰어다니며 농사를 짓고 있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고위직들의 신산했던 삶을 이야기한 위의 향가는 일본서기 671년 1월달 해당 내용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산과 언덕을 개간하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험한 일을 하면서도 ‘이러는 게 마땅하다’ 라 말하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우리가 무슨 면목이 있어 좋은 것을 원하겠는가. 땅을 파며 힘들게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라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산과 들에 흩어져 잊혀지고 있었다. 그때 뒷골목의 아이들이 그들의 존재를 언급하며 그들을 소환해 낸 것이다. 작품의 내용을 볼 때 고대 일본에서는 백제인들이 입국해 정착할 경우 본국에서의 신분에 따라 적절한 관위를 주는 게 관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관례에도 불구 백제의 고위직들이 백마강 패전 후 일본 땅으로 들어온 지 8년이 지났음에도 관위 수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향가는 힘을 가진 노래이다. 그러한 향가의 힘 때문이었을까. 천지천황이 이때 백제인들에게 관위를 주었다. 그것이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물론 지극히 현대적 시각을 가진 필자는 ‘설마 향가 때문이었을까?’하며 의심하고는 있다. 아마도 이 향가는 천지천황의 측근들이 만들어 유포했을 것이다. 천지천황은 매우 세심했던 성격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백제 파병을 앞두고도 군수물자를 공평하게 부과하고, 병력을 징발함에 있어 모두에게 공정하게 하라는 내용의 동요를 사용한 적이 있다. 그는 백제인에게 관위를 수여함에 있어서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기존 일본 관리들의 반발을 의식해 ‘유민들에게 전례에 따라 관위를 주어야 한다’는 내용의 향가를 만들어 널리 유포시켰을 것이다. 그래야 토종 관리들이 이것이 천심이자 민심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조치에 수긍할 것이라고 믿었다. 천지천황은 민심의 향배를 중시하는 지도자였음에 틀림없다. 천지천황이 의도했느냐 아니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돌아다녔다. 노래는 백제 고위직들의 반성하는 마음과 관례에 따라 등용하라는 내용을 가사로 만든 것이었고 춤은 백제인들이 따비를 끌고(원문 속의 曳), 괭이질하던(원문 속의 矩) 모습이었다. 향가에 동요가 나온다. 동요는 민심이었고, 집권층은 그러한 민심에 귀를 기울였다. 이후 백제인들은 어찌 되었을까. 역사의 진행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해 말 천지천황이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후계자 경쟁에서 조카에게 밀려 탈락되었던 동생 대해인(大海人)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조카 대우황자를 살해하고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백제 유민들은 낯선 이국땅에서 그들을 잊지않고 챙겨주었던 최대의 후원자를 잃고 말았다. 한반도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대해인의 집권기간 내내 백제인들은 은인자중을 강요받게 되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일이다. 침묵의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백제 유민들을 등용하라는 내용의 이 노래를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多致播那播於/能我曳多曳多那例例/騰母陀麻爾農矩/騰岐於野兒弘爾農俱 귤나무 열매는 각각 다른 나무에 열려있지만 이를 실에 꿸 때는 다 하나가 되지요” 다 하나인데 왜 백제인들을 중용하려 하느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일본 연구자들은 백제인 등용을 비난하는 작품이라고 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이러한 풀이는 오류다. 실제는 백제 유민을 받아들이라는 노래였다. 천지천황의 사망과 그의 아들의 패망으로 인해 신산했던 디아스포라의 길이 그들의 앞에 놓이게 되었다.
필자는 일본으로 간 향가에 대한 칼럼을 쓰는 중이다. 향가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향가에 어떠한 내용을 담았을까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일본인들이 우리에게서 바구니를 사갔는데 그 바구니에 무엇을 담았나 살피는 것과 같다. 이번 칼럼에서 다루는 향가에는 백제 망국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유민들의 삶이 들어있었다. 백마강 패전 이후 수많은 백제인들이 남해안에 위치한 ‘대례성’이라는 곳에서 일본 수군의 배를 얻어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초기 정착은 만난을 무릅써야 했을 것이다. 낯선 땅에서 어떻게 살다가 일본 민족 속으로 스며들어 갔을까. 사실상 이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자료가 부족하기에 온갖 추측과 상상만이 난무하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확실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의 흔적이 함박눈 내리는 날 눈 위를 걸어갔던 나그네의 발자국처럼 일본서기에 찍혀 있었다. 백마강 대패 후 신라와 당나라의 보복공격에 대비해 아스카에서 오미(近江)로 도읍을 옮긴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천지천황은 화급했던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났고, 이때쯤이면 균열되었던 민심도 어느 정도 봉합하여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671년 1월 5일자의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천지천황은 아들 대우황자를 태정대신(당시 일본 최고의 관직)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백제로부터 온 좌평 여자신과 사택소명에게 대금하(大錦下)라는 관위를 주었다... 달솔 등 50여 인에게는 소산하(小山下)라는 관위를 주었다” 아들을 최고위직에 임명하고, 백제 유민들에게 관위를 주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했다는 말이다. 천지천황은 오미로 천도한 후 민심 수습을 위해 동생 대해인(大海人)을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혹시라도 권력을 넘볼 수 있는 동생을 후계자로 삼아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그것은 겨우 3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했던 천지가 이제 그 조치를 철회한 것이다. 그가 동생을 버리고 아들을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 전쟁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느냐라는 관점의 문제였을 것이다. 자신은 백제 구원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동생 대해인은 형과 입장을 달리했다. 그러했기에 천지는 백제를 구하러 가던 배 위에서 끓는 탕처럼 화내며 활로 동생을 겨누기까지 했던 것이다. 황위세습에 있어 동생을 배제한 것은 이러한 관점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가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백제 유민들에게 관위를 주었다는 기록은 천지천황이 이러한 시각을 가졌음을 입증한다. 그는 냉혹한 국제 관계에서 이제는 쓸모없어져 버릴 수도 있었던 망국 백제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천지는 오히려 자신과 아들의 집권기반에 백제 유민들을 대거 포함시키고자 했다. 백제에 대한 부정은 자신에 대한 부정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 동요 하나가 유행하였다. 아이들이 농부가 따비로 밭을 일구고 곡괭이로 땅을 파는 동작을 흉내내면서 뒷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놀고 있었다. 이때의 동요는 매우 유명하다. 백제 멸망 후 일본에 간 망명 유민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일 역사가들은 역사 해석의 힌트를 얻을까 하여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또 소설가들도 그들의 상상력을 다하여 글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그 작품은 다음과 같다. 노래는 일본으로 떠난 백제 고위직들의 고된 삶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多致播那播於/能我曳多曳多那例例/騰母陀麻爾農矩/騰岐於野兒弘爾農俱 ‘많은 사람들이 왜국에 들어 와 씨를 뿌리고 또 씨를 뿌리고 있지. / 마땅한 일이라면서 가래를 끌고 있으나 전례에 따라 관위를 주어야 한다네. / 그들은 언덕을 날듯이 뛰어 다니며 농사를 짓고 있지. / 그들은 산과 들을 날듯이 뛰어 다니며 농사를 짓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