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가위가 되면, 명절 차례 음식을 준비하다가 가족 간 갈등과 불화가 반복되어 사회적 문제가 되어왔다. 요즘은 가정마다 자체적으로 간소화하고 있지만, 상차림을 크게 해서 지내는 것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김으로써, 여전히 차례와 제사를 준비함에 있어서 변화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1801년 공노비 해방 후, 100여년은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민란의 시대였으며, 그 정점은 동학이 주창한 개벽세상(평등)을 위한 1894 동학농민혁명이었다. 그 해, 갑오개혁으로 사노비가 폐지되며,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제례의 제약 또한 없어져, 점점 화려하게 지내오며 오늘에 이르렀다. 불가나 선가의 제례형식도 있지만, 음식을 차리고, 신위를 모시고, 조상님이 찾아와 흠향한다고 믿으며 유교식 제례를 행함이 오랜 관습이 되어왔다. 이제 그 관습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변화를 우리의 동학사상에서 찾아 시대에 부응하는 미래지향적 새로운 제례문화를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니, 제사와 차례를 지낼 때 정성스레 준비한 맑은 청수 한 그릇을 모셔 놓고, 조상과 부모님의 은덕을 기리는 것은 전혀 부족함이 없으니, 허례허식을 떨쳐버리자”고 제시한 아름다운 의례가 있었다. 해월 최시형선생의 “마음을 다한 청수 한 그릇의 제례법”(1875년)이 그것이다. <그림참조> 경제적 이유라기보다는 형식적인 제사가 아닌,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동학농민혁명 후, 해월 최시형은 1897년 4월 5일 스승 수운의 득도일을 기념하며, 조상의 위패를 벽에 기대는 향벽설위를 하지 말고, 자신의 앞쪽을 향하는 향아설위를 하라고 제시하셨다. 향아설위의 이해를 위해서는 수운 최제우의 동학사상인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를 먼저 이해해야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코스모스(Cosmos)의 세계를 초월과 내재, 개체와 전체, 인과성과 초인과성, 불연과 기연, 유위와 무위의 이원적 대립관계가 아닌,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생성적 관계로 보는 것이다. 또한, 수운의 시천주 사상은 모든 사람 각자 몸(내면)에 ᄒᆞ늘님(용담유사 인용)이 모셔져 있는 존엄하고, 신성한 주체적 인격체로 설명되니 결국, 우주적 생명체로서 나의 생명은 조상의 영혼과 하나의 기로 연결되어있다는 철학사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몸에 ᄒᆞ늘님이 모셔져(시천주) 있으니, 조상의 혼백 또한 내 마음속에 모셔져 있다는 것이 동학의 가르침이요, 이것이 해월 선생님이 말씀한 향아설위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제사를 받드는 것은 마음을 다한 청수 한 그릇으로도 충분하니, 조상과 부모의 혈기와 정신이 남아있는 나를 향해 평상시 식사하듯 자신을 위해 베풀고(향아설위), 선조가 남기신 교훈과 말씀을 기려야 한다”고 하셨다. <그림참조> 향벽 또는 향아라는 위(位)의 공간적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옛 조상들의 과업과 조상의 덕으로 미래를 복 받겠다는 생각 말고, 부모가 살아계실 때 효도하고, 지극한 정성을 다하며, 제례를 통해서 나의 몸과 마음속의 ᄒᆞ늘님께 고(告)하는 것이다. 우리 고유의 위대한 정신문화인 동학사상의 최고 절정인 것이다. 올해부턴, 간소한 상차림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향아설위 제례법을 각가정에서 행해보기바란다. “경주, 동학의 향아설위로 대한민국의 제례문화를 새롭게 바꿔 나가고있다”란 기사가 뉴스, 신문과 포털사이트에 소개되기를 바라며, 그 시작이 동학의 발상지인 경주였으면한다.
1827년 3월 황오동 277번지(주차타워 건설중)에서 아버지 최종수와 어머니 월성 배씨의 아들로 태어난 최경상은 6세에 어머니를, 15세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생계를 위해 누이동생과 포항 신광으로 이주하여 머슴살이와 제지소에서 일하며, 19C 혼란한 시기에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결혼 후, 흥해 검곡에서 화전민의 힘든 삶을 살다가, 1861년 6월(음력) 경주에서 무극대도(동학)의 큰 가르침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최경상(34세 해월 최시형)은 약 80리 길인 고향 경주 용담으로 한 달에 3~4번씩 수운 최제우 선생을 만나러 다녔다. 1861년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 최한기의 영향을 받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나온 해 이기도 하다. 이 역사적 운명적 만남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진정한 근대사가 시작될 수 있었고, 청년 최경상이 걸어온 그 깨달음의 길이 경주시에서 조성 중인 ‘동학가는 길’이다. 수운의 가르침을 받은 학자와 제자는 많았지만, 수운이 도통 전수자로 해월을 선택한 것은 지식과 학식이 아닌 해월이 갖춘 인품의 깊이와 순결한 의지로 그의 무극대도가 왜곡됨 없이 인류에 펼쳐질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해월 최시형은 수운의 유언인 고비원주(높이 날고 멀리 뛰어라)를 실천하며, 동학 도인들과 함께 우리민족의 세계적 저서인 수운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관군을 피해 산간벽지를 다니며 간행을 계속이어갔다. 용담유사는 한글가사로 누구나 베껴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암송되어 민중 속으로 수운의 말씀이 수운의 언어로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해월의 사인여천 사상에 의해 개벽세상의 간절한 염원이 프랑스혁명보다 더 위대했고,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전국적 동학농민혁명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경주시민과 학생들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여름 방학과 휴가를 이용해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 특히, 용담유사(도올 김용옥 역 통나무 출판사)는 19C 중엽 순우리말로 표현된 민중을 깨우치기 위한 수운이라는 한 인간이 고백한 아름다운 노랫말로 한글 가사문학 (8수)의 극치이다. 국정 국어 교과서에 문학작품으로 반드시 실려야하며, 경주문화재단의 창작뮤지컬로 용담유사가 무대에 올려져 전국적 공연과 아울러, 동학의 주도권을 경주시가 가져와서 발상지다운 지위와 역할을 다하는 관심, 노력과 투자가 지속되어야한다. 황오동 해월생가복원도 초가집 형태의 공원화가 아니라, 남여노소 누구나 동학사상을 체험할 수 있는 해월사상체험관으로 조성해서 관광상품화하여 동학브랜드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야한다. 동학농민군들과 전봉준 장군이 전투에 임하기 전, 마음을 가다듬으며 밤새워 구송한 수운의 숭고한 철학을 담은 21자 주문소리와 용담유사를 암송한 옛 민중의 목소리가 개관을 앞둔 수운기념관의 컨텐츠에 반드시 담겨져 온 국민이 함께 그 가치와 이미를 공유해야한다.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만남을 통해 삶의 의미를 채워나가고 있다. 내가 오늘 걸어가는 그 길이 내일의 역사가 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임을 느끼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한다.
인류는 질병이 전염·확산되는 상황을 겪고, 극복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역사를 크게 뒤흔드는 수많은 변곡점들에 의해 만들어져왔고, 세계사는 질병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금 코로나19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 또한 그러하다. 과거 우리나라도 공포의 대상이었던 괴질(악질)이 오랫동안 반복해서 전염되어 마을마다 길거리에 원인 모를 죽음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해월 최시형 선생께서 동학을 펼쳐나가시던 때의 기록에도 “6월 하순부터 전국에 괴질이 크게 유행해 마을 전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찬 바람이 불자 겨우 가라앉았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팬데믹의 힘든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국가방역시스템이 없었던 시절, 해월 선생은 집집마다 다니며 “부엌이 깨끗해야 ᄒᆞ늘님께서 복을 주고 간다”고 하시며, 질병예방을 위한 위생 준칙을 다음과 같이 실천하게 하여 많은 동학 도인들의 집은 괴질이 피해 갔다고 하니, 당시 가장 효과적인 K-방역이었던 것이다. <동학 웹툰 삽화> 1.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고, 묵은 음식은 새로 끓여서 먹도록 하라. 2. 침을 아무 곳에나 뱉지 말며, 대변을 본 뒤에는 땅에 묻고 가라. 3.가신 물은 아무 곳에나 버리지 말라. 4. 집안을 하루 두 번씩 청결히 닦도록 하라. (1886년) “목욕을 자주 하며, 항상 몸을 청결히 하라” 등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위생수칙이지만, 당시 “동학을 하면 전염병도 침범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도했다고 한다. 해월 선생이 전라도에 처음 간 것은 국가의 외교적 위기 상황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1884년 갑신정변이 있은 해다. 훗날 동학 장군으로 활약했던 훌륭한 지도자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전봉준과 동학의 최고 리더 해월 선생과의 만남에 의해 그들 모두 동학에 입도해 전국적 조직으로 더욱 확대돼 나갔다. 이와 더불어 민중을 깨우치는 순 한글 가사(8수) 용담유사와 동경대전이 해월 선생과 동학 도인들에 의해 계속 발행 보급돼 민중들의 가슴속 깊이 전해졌고, 거대 조직을 컨트롤할 실천윤리인 임사실천십개조(1891년)를 제시하며, 포접제를 다져나갔다.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 세력이 크게 늘어나자 동학은 유교와 다른 이념을 가진 이단으로 몰아, 유생들과 관원들의 탄압도 점점 심해졌다. 30년 이상 탄압돼왔는데, 급기야 지방 수령들은 동학도인들의 재물을 빼앗고, 집을 불태워 도인들이 떠돌이 신세가 되거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외세의 압력과 부정부패로 인해 조선왕조가 해체기에 접어들어 기존의 질서는 무너지고 있던 암울한 시기에,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대안으로 민중과 함께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을 통한 개벽세상을 꿈꾸며, 보은집회와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전 국민에 의한 사회 대개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오늘의 우리는 해월 선생의 삼경 사상 ‘敬天, 敬人, 敬物’로,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통해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지구 과열화, 식량위기와 팬데믹의 질병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슬기와 지혜를 동학사상에서 재발견해 인류의 생존, 번영과 이상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동학은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사례들은 동학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 민주 집회 1893년 ‘보은 취회’, 세계 최초 주민자치기구 1894년 ‘집강소’, 세계 최초 독립 만세 혁명 1919년 ‘3.1 만세혁명’, 세계 최초 어린이 인권해방선언 1923년 ‘어린이 날’. 그 외 김구 선생이 만든 항일독립비밀조직 역시 동학의 조직 포접제를 모티브로 하는 등 근대 역사적 대업들이 가능했음은 경주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 해월 최시형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월 선생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새소리, 여인이 생계를 위해 베 짜는 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라 하시며, 인간존중, 생명존중을 넘어 천지자연을 부모처럼 소중히 여기라는 자연존중의 ‘삼경사상’을 주창했다. 하느님은 수운이 민중을 깨우치기 위해 한글 노랫말로 저술한 ‘용담유사’에 나오는 ᄒᆞ느님으로, 애국가 ‘하느님이 보우하사’이다. 카톨릭의 하나님이 아니라 고조선 이래 우리 민족의 의식 속 내재돼 온 그 하느님으로 천도교에서 한울님으로 표기한다. 아동, 여성인권, 남녀평등, 노비 해방의 주창은 160여년 전, 경주에서 최제우의 시천주에서 시작돼 해월의 사인여천, 의암 손병희의 인내천 사상에 의해 민중이 주체가 돼 서로 존중받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사회운동으로 실천돼 나갔다. 처음 동학을 접했을 무렵, 해월 선생의 ‘부화부순’ 말씀은 나의 관념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엄격한 유교 전통문화에서 ‘부부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진실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절을 하며, 이해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현대에도 실천하기 힘든, 부부갈등의 해결 방안을 이렇게 명쾌하게 제시할 수 있었는지,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자랑스럽다. 동학의 최고 리더로서 도를 실천함에 부부의 화순과 가정의 화목을 으뜸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5월 21일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국가 기념일로 제정한 ‘세계부부의 날’이었다. ‘부부의 날’은 1886년 해월께서 말씀하신 ‘부화부순’을 모태로 우리의 사상 동학에서 그 연원을 확립해야 실로 세계 최초라는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해월 선생의 말씀의 몇 가지 어록을 살펴보면 △ 어린이와 부녀자의 말이라도 배울 게 있으면 나의 스승이니라 △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어린이를 때리는 것은 ᄒᆞ느님을 때리는 것이니라 △ 누가 베를 짜고 있느냐? 제 며느리가 짜고 있습니다. 아니다! ᄒᆞ느님께서 짜고 계시니라 △ 모든 사람을 ᄒᆞ느님으로 대하라. 집에 손님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하지 말고, ᄒᆞ느님이 오셨다 하라 △ 네가 먹는 밥 한 그릇이 곧 ᄒᆞ느님이고, 온 생명의 근원이니라. 세상 진리는 밥 한그릇에 있다 △ 천지자연은 곧 부모님이다 △ 제사상은 청수 한 그릇으로 족하느니라, 우주생명의 근원인 청수 한 그릇이 ᄒᆞ느님이다 등이 있다. 수운의 유언을 받들어, 해월의 35년 고비원주를 통해 동학은 이미 19세기 말 전 국민에게 보편화돼 있었고, 해월의 설법은 너무도 간절히 민중들의 가슴속으로 전해졌다. 새로운 개벽 세상을 간절히 염원한 그들로 인해 갑오동학농민혁명이 가능했으며, 3.1만세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질 수 있었다. 황해도 팔봉접주로 동학혁명에 함께한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는 ‘해월 선생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 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 하시니 선생님의 이 말씀이 곧 동학농민혁명의 총동원령(총기포령)이었습니다’고 전한다. 해월 선생은 피체돼 러시아공사가 찍은 한 장의 사진만을 남기고 1898년 6월 2일(음력)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순도했다. 동학농민혁명을 촉발한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재기하여 재판장이 돼 판결하니, 부끄러운 역사의 아이러니로 잘못된 단추가 이미 채워지고 있었다. 요즘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황성공원 해월 최시형 동상 방문해 소개 안내판 글도 읽고, QR 소개 영상, ‘동학은 흐른다~’ 노래를 감상하고 있다. 야간 LED 경관조명도 곧 설치된다고 한다. 울창한 황성공원 자연 숲에서 다양한 콘텐츠로 구성된 위대한 경주의 동학문화자산과 더불어 황오리 해월생가 복원, 해월학습기념관 건립은 민중을 위해 인도의 간디보다 더 처절한, 더 숭고한 삶을 살다간 해월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꼭 필요하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해월 이상의 인격을 갖춘 훌륭하고 위대한 지도자가 이 땅에서 배출되기를 고대한다.
어린이날이 제정된 지 100주년이다. 어린이란 말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그 이전에는 어린이를 어떻게 불렀을까? 장유유서, 남존여비 등 우리나라에 유교사상이 전래되던 예전에는 어린이, 부녀자를 귀하게 대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어린아이를 ‘애 녀석’ ‘아이놈’ ‘이 자식’처럼 아무렇게나 불렀다. 방정환 선생(1899~1931)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어린이도 어른처럼 존중하기 위해 1920년 ‘어린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그는 어린이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하시고, 어린이를 만나면 머리 숙여 인사를 나눴으며, 아동문학가, 어린이 인권운동가 활동을 하시며, 어린이날을 만든 장본인이다. 사회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의 또 다른 형태였던 것이다. 방정환 선생은 어떻게 어린이날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됐을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힘든 유년기를 보낸 그는 인간·생명·자연 존중의 동학사상에 영향을 받아, 어린이날을 만들게 됐다. 그럼, 누구의 영향을 받았을까? 경주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 해월 최시형이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85년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을 치는 것이니 ‘아이를 때리지 말라’라는 ‘물타아’를 널리 설법하셨다. 그의 영향으로 훗날, ‘방정환에 의해 1923년 세계최초 어린이 인권선언을 선포하며, 어린이날을 만드는 사상적 배경이 됐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사위이기도 하다. 어린이날의 출발은 바로 이곳 경주다. 지난해 3월 뉴스 앵커가 마무리 멘트로 스페인의 교육자 프란시스코 페레를 예로 들며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했다. 해월 선생의 생명존중을 담은 훌륭한 말씀이 그보다 앞서지만,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서양의 사상, 문화, 종교를 추종하는 결과라고 판단된다. 방정환 선생은 일제 억압의 어려움 속에서 손수 글을 쓰고, 어린이 잡지를 편찬 발행했다. 우리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선, 우리말과 글, 위대한 우리 문화와 역사의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줘야 한다며, 연극, 이야기, 잔치, 강연회 등 어린이를 위한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천도교 소년회를 창립하고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소년소녀 운동을 제창했고, 김기전, 정순철, 윤석중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사회적으로 보편화시켰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지 ’개벽‘ 창간호 발행됐고, 개벽 3호에 방정환의 ’어린이‘ 용어가 탄생했다. 이어 1922년 5월 1일, 첫 노동절에 ‘어린이날’을 선포했다. 또 1923년 봄,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과 ‘동화 및 동요를 중심으로 하고 아동문제까지 연구한다’는 취지로 ‘색동회’를 조직했다. 윤극영의 ‘반달’, 이원수의 ‘고향의 봄’ 등 창작동요를 발표했으며 그 해 5월 1일 천도교 대교당에서 ‘첫 어린이날 행사’를 통해 어린이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제는 어린이날의 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공휴일로 만들고, 창덕궁을 창경궁으로 만들어 어린이날에 무료로 개방했으며, 상업화된 선물과 유희적 놀이로 어린이들의 해방 정신을 약화시켰다. 고인이 된 경주의 향토 사학자 고청 윤경렬 선생 또한 방정환 선생이 펴낸 ‘어린이’ 잡지를 어릴 적 많이 읽으셨다. 당시 일제 강점기라 우리 역사에 관한 올바른 이야기는 싣지 못했지만, 어린이 잡지에 경주를 무대로 한 신비롭고 찬란한 이야기들로 인해, 그때부터 경주는 선생의 동경의 대상이 됐고,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곧장 경주로 내려와 깊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고 전한다. 결국 고청 선생께서 방정환 선생의 영향으로 이곳 경주에서 우리나라 최초 ‘어린이 박물관학교’를 만들고, 고고학 발전을 도모하며 많은 후학을 길러낸 것이다. 건강 악화로 33세의 아쉬운 짧은 생애를 마친 영원한 어린이의 벗 소파 방정환! 어린이를 통해 희망을 보고, 어른과 같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주체적인 인격체로 판단했다. 지식 위주의 틀에 박힌 특정 교과 중심의 교육시스템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재능과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교육을 방정환 선생은 100년 전 ‘어린이 해방선언’에서 갈망했던 것이다. 그것의 궁극적 실현을 위해 독립을 염원했던, 한 분의 독립운동가였다. 경주시가 아동친화도시, 여성친화도시로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동학 발상지에 그 사상적 연원을 두고 있는 경주의 정체성인 것이다.
4월 5일은 식목일이기도 하지만, 1860년 4월 5일은 37세 청년 수운이 경주 용담에서 나라를 바로 세우고 역사의 주인공으로 인간답게 살아가자는 동학의 무극대도를 깨달은 날이다. 수운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걱정하며, 민중에게 각성을 요구하며, 각자 삶의 개혁을 통해 보국안민의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교의 메시지가 아니라 사회 개벽을 이루어 내고자 한 것이다. 그는 1년 동안의 반추 또 반추의 심사숙고 후 그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포덕을 시작한다. 수운이 처음 한 일은 한문이 아니라 민중을 깨우치기 위해 아름다운 한글 가사로 ‘용담가’를 짓는 것을 시작으로 전라남도 남원을 오가며, ‘동경대전’ ‘용담유사’를 집필했다. 163년 전, 수운 선생께서 이 땅에 동학을 심은 해이자 실학자 최한기의 영향을 받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세상에 나온 해이기도 하다. 동학의 발상지에 살아가고 있는 경주시민들은 과연 수운 최제우와 동학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동학을 말하면 동학농민혁명보다는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 선생을 먼저 떠올릴 때, 동학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경주 최씨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7대손인 수운 최제우는 1824년 10월 28일 현곡면 가정 1리에서 경주의 대유학자 근암공 최옥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가녀의 아들로 태어나 벼슬길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아버지 근암공의 사랑과 지극한 교육아래 수준 높은 학문적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시천주라는 인간존중 사상을 바탕으로 신분 철폐, 척왜를 통한 보국안민을 주창했다. 링컨이 정치적 목적으로 노예제 금지를 주장했다면 그보다 앞서 최제우는 자신의 노비 중 1명을 수양딸로, 1명은 며느리로 받아들이며, 진정한 신분 철폐와 인간 평등을 실천했다. 3년의 치열한 공생애를 살다 영남 유생들의 모함과 위기의식을 느낀 지배세력에 의해 혹세무민하는 서학으로 몰려 억울하게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순도했으니, 그의 나이 41세였다. 우리는 그날 19C 세계사에 기록될 천재 사상가, 철학자이자 조선 최고의 시·문장가인 수운이라는 대학자를 잃은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제자 해월 최시형과 동학인들에 의해 ‘동경대전’ ‘용담유사’로 간행돼 영원히 이 땅에 남길 수 있었다. 동학을 알아가는 방법으로 몇 권의 도서를 권장한다. 추천도서로 저학년은 ‘Who? 한국사 최제우, 최시형’ / 청소년은 ‘동경대전(풀빛 출판사)’ 성인은 작년 4월 도올 김용옥 선생님께서 평생의 대업으로 역주한 ‘동경대전(통나무 출판사)’과 ‘용담유사’를 꼭 접해보길 권한다. 책을 통해 수심정기, 혼원지일기, 외유기화, 성경신, 무위이화, 동귀일체, 불연기연의 의미를 알아갈 때 비로소 수운과 동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경대전은 서양의 사상, 철학, 과학을 뛰어넘은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와서 경주의 수운 최제우에 의해 완성된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바이블인 것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근대사를 출발시킨 동학은 인류의 미래 이상이며, 경주의 정체성은 동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경주가 낳은 수운 최제우를, 해월 최시형을, 동학을 시민들이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음이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하다. 이는 우리의 책임이고 우리의 무지인 것이다. 수운은 동학을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21자로 함축했으며, 순도 35년 후 전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당시 동학농민군들과 전봉준 장군은 밤새 주문을 외우며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날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오늘의 우리는 수운이 자신의 숭고한 철학을 표현한 21자 주문의 의미를 되새기며, 천지자연에 경외심을 갖고 인간·생명·자연 존중의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평등, 평화, 공정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고, 나아가 기후·생태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천지개벽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수운은 ‘동학’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인간 내면의 혁신을 이루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고자 했던 경주가 낳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자 세계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다. 동학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학은 우리 모두의 역사이고, 문화이고, 경주의 콘텐츠다. 동학이 경주시의 미래전략인 만큼 동학의 역사, 문화를 활용한 콘텐츠 제작 및 공간 활용 방안 등을 다방면으로 모색해야 한다.
올해는 3.1만세운동 103주년 되는 해다. 동학 발상지 경주가 3.1 운동을 낳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윤봉길 의사 역시 동학의 훈도를 받고 자란 인물들이다. 3.1 운동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돼야 할 충분한 가치를 지닌 독립을 향한 민중들의 피맺힌 숭고한 항거였기에 필자는 이하 ‘3.1만세혁명’으로 칭한다. 3.1 만세혁명을 이야기하면 누구나 유관순을 제일 먼저 떠올리지만, 우리가 잘 몰랐던, 그래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민족대표 33인의 대표 손병희 선생이 있다. 손병희 선생은 충북 청원의 평범한 가정에서 서자로 태어나 21세 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하게 대접한다’는 말을 듣고 동학에 입도해 14년간 해월 최시형을 스승으로 모셨다.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지휘했고, 25년 후 동학의 최고 리더로서 3.1만세혁명을 이끈 위인이었다. 국운을 다한 조선의 보국안민과 척왜양을 위해 수운은 해월에게 고비원주를 명했고, 해월 최시형에 의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동학의 도를 이어받은 그의 제자 의암 손병희에 의해 1919년 3.1 만세혁명이 가능했다. 신분철폐와 인간존중의 삶을 갈망하며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했던 동학인들은 조선왕조 지배세력들과 일본군에 의해 30만명이 넘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른 후, 흩어져 항일 의병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척왜와 독립을 위한 3.1만세혁명은 동학농민혁명의 변주곡으로 이 땅에 다시 태어났다. 일제는 동학인들이 항일 독립운동으로 이어가자 동학을 영원히 몰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손병희 선생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며 이에 대한 항거로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보성사를 운영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고, 민족대표 33인중 15인이 동학(천도교), 그 중 9인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리더로 활약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와 동덕여학(동덕여대 전신)를 인수하며 교육을 통한 구국에 헌신했던 소파 방정환의 장인이기도 하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종로) 건립을 위해 당시 300만 교인들이 남자들은 짚신을 삼고, 여자들은 삯바느질, 논밭과 황소를 팔아 모은 100만원 중 건축비용 27만원을 제외한 거금을 3.1만세혁명,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두 사용했다. 당시 한옥 1채가 1000원이었으니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로 인해 대교당 건립도 1921년으로 늦어졌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결국 천도교의 자금과 인적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3.1만세혁명과 임시정부의 실현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손병희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임시정부 대통령에 추대됐지만 독립을 위한 길을 선택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출소 후 1922년 5월 결국 순국한다. 지난해는 천도교 대교당 건립 100주년이었으며, 올해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년의 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동학의 ‘보국안민, 광제창생’ 정신을 계승해 ‘대한민국 임시헌장(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을 만들었다. 이는 외래 사상이 아닌 바로 청년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포덕한 궁극적 가치였다. 근대사 출발의 구심점이 되는 경주 용담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에서 해월 최시형, 그리고 의암 손병희로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해 백범 김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우이동 봉황각 손병희 묘역이었다. 그는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선생님 이제사 돌아왔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가 오늘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고 전해진다. 경주에는 3.1만세혁명 성공기원과 국권회복을 위한 49일 기도처도 있었다. 해월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는 1920년 8월 ‘최동희 음모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대구의 부호인 윤홍열, 경주 최부자집 둘째 아들 최완 등과 만나 민족혁명 방침에 대해 논의하다 일제 경찰에 의해 9월에 체포돼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것이 바로 동학을 얘기하지 않고 3.1만세혁명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다. 많이 늦었지만, 봉황대 옆 3.1운동 표지석이 설치됐음은 참으로 다행이다. 경주시는 서양의 사상, 철학, 종교를 뛰어넘은 위대한 동학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관광 콘텐츠를 조성해주길 호소한다. 경주시가 전국에 퍼져있는 동학의 주도권을 하루 빨리 찾아와 역사·문화도시로서 경주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시키고, 세계 초 일류국가로 나아가는 중심이 될 수 있길 간절히 원한다. 이는 동학인들의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