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향가에서-향가 제작법 칼럼을 마치며 향가 연구가 급진전을 이룬 것은 고 양주동 박사님 묘소를 찾았을 때 섬광처럼 스쳐 지나치던 영감을 붙잡으면서부터였다. 필자는 그 영감에서 시작해 마침내 비밀의 동굴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서울 광화문 경희궁 고등학교 시절 이후 향가의 실체를 찾는 50여년의 여행 끝에 다다른 끝지점은 ‘신라향가 제작법’이란 것이었다. 무엇이 향가인가? 이것은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14편을 향가라고 말하고 있을 뿐, 향가를 본격 연구하기 시작한 지난 100년 동안 향가가 무엇인지 만족할 만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향가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향가는 ‘신라인의 향가 제작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필자는 향가 제작법을 찾기 위해 신라의 향가를 한 글자 한 어절 낱낱이 분해하여 문자들이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분석해 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라인들의 향가 제작 방법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어 제작법을 균여 대사가 지은 향가 14편에 적용해 보았다. 그 결과 균여대사는 신라의 향가 제작법을 신라인보다 더 모범적으로 지켜가며 향가를 제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향가를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은 필자가 찾아낸 신라의 향가 제작법이 진실이거나 최소한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고려향가는 향가에 대한 각종이론의 진위여부를 가름하는 도구가 된다. 고려향가를 명쾌하게 해독해 내지 못하는 향가이론은 폐기되어야 한다. 신라향가 제작법을 압축해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향가는 표의문자로 기록되었다. 2.향가의 문자들은 한국어 순서로 배열되어 있었다. 3.향가에 사용된 문자들은 노랫말, 보언, 청언이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분류되었다. 하나의 문자는 세 가지 중 한 가지에만 해당되었다. 1자 1기능(一字一機能)이다. 4.일부 문자들은 의미를 확장하여 사용되었다. 5.향가는 많은 사람이 불러야 한다. 6.천지귀신을 압박하거나 감동시켜 청(請)을 이루어지게 한다. 7.향가에 사용된 명사들은 향가의 제작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 8.향가는 암호문이다. 일반인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뜻을 감추어 놓았다. 향가 제작법은 향가의 해독을 뛰어넘어 향가의 실체를 명백히 드러내 주었다. 향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향가는 뮤지컬이나 연극의 대본적 성격을 가진 작품이었다. 향가는 서정시가 아니었다. ■향가 제작법은 신라향가와 고려향가를 완전히 해독할 수 있게 하였다. 지난 1000년 동안 해독해내지 못한 의미들을 풀어 주었다. ■제작법을 알면 현대에서 향가를 지을 수 있다. 드디어 우리는 경주시에서 향가 백일장을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향가제작법으로 외관이 유사한 다른 작품들이 향가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작품들로는 고려시절 제작되었다는 균여향가와 도이장가가 있고, 일본의 만엽집 작품 4516편, 필사본 화랑세기에 포함된 노래 1수가 있다. 이들 하나하나가 향가 제작법에 의해 그 성격이 판정될 경우 그 파장들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이것 외에도 향가제작법이 가진 의미 중 놓칠 수 없는 것이 있다. 향가는 우리민족이 가진 최초이자 위대한 어문학적 창작 경험이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중국으로부터 한자를 빌어왔으나, 그것을 우리화 하였다. 새로운 문학 장르로서 종합 예술 표기법을 만들어 내었고, 한자의 의미도 우리만의 의미로 만들어 썼다. 향가 창제에서 단련된 우리의 창의력은 계속 이어진다. 고려에서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한글을 창제하는 민족적 저력이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내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향가는 우리 민족이 이루어낸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지적창조 활동의 결과물이었다. 문화의 빛이 향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의 바탕이 된 땅이 경주였다. 경주시민들에게 향가 창제의 영광을 돌려드린다. 필자의 졸렬한 글을 읽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향가 제작법에 대한 글을 허용해주신 경주신문에 또한 감사드린다. 향가의 힘이 독자분들과 경주신문과 경주시의 꿈을 이루어 줄 것으로 믿는다.
향가백일장, 향가를 창작해보자. 향가제작법이 검증받으려면 향가를 제작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 편에서는 과거 향가가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드리겠다. 제작법에 의해 향가가 만들어 질 수 있다면 우리는 향가 백일장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상황극 하나를 설정하겠다. 화랑처럼 마음이 착한 경주 동국대 학생 한 명이 예쁜 여학생에게 차이게 되었다고 하자. 그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 한 구절로 소원을 비는 향가를 짓고자 한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가실 길에 아름따다 뿌리오리다/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사뿐이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1단계로 이 시를 한자로 바꾸어야 한다. 네이버 사전에 우리말의 뜻을 입력하면 한자어가 나온다. 그것을 한국어 어순으로 배열한다. ㅇ영변 약산 진달래꽃→寧邊藥山 杜鹃花/영변약산 두견화 ㅇ가는 길 아름 꺾어 뿌리다→去道 抱折 撒/거도포절살 ㅇ가는 걸음걸음 놓은 그 꽃→去 步步 置 其花/거보보치기화 ㅇ가볍게 밟고 가다→輕踏去/경답거 2단계로는 청언을 배치한다. ‘불운에 맞서주시고, 나를 가엾게 여겨주시고, 나의 슬픔을 달래 주시고,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 있도록 해주시고, 옛날처럼 좋은 사이가 되게 해 주세요’가 학생의 바람이다. 이 의미에 맞고 우리말 소리와 어울리는 한자어를 찾아 배치한다. ㅇ근심을 다스려 달라→다스리다 리(理) ㅇ불운에 맞서 달라→맞서다 여(如) ㅇ나를 가엾게 여겨 달라→가엾어 하다 은(隱) ㅇ옛날처럼 좋은 사이가 되게 해 달라 →옛 고(古) ㅇ그녀에게 좋은 일이 있도록 해 달라→길하다 량(良) 노랫말 한자어 사이사이에 청언 ‘리리여은고량(理 理 如 隱 古 良)’을 배치한다. ㅇ영변약산 두견화/寧邊藥山 杜鹃花 ㅇ거도포절살 리리여(理理如)/去道抱折撒 理理如 ㅇ거 은(隱) 보보치기화/去 隱 步步置其花 ㅇ경답 고(古) 거 량(良)/輕踏 古 去 良 3단계는 보언을 배열한다. 보언이 존재하기에 향가가 연극이나 뮤지컬이 된다. 보언은 향가에서 핵심적 요소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라고 지시한다. 다음이 그 보언이다 ㅇ님이 배를 타고 떠나간다→노젓는 소리 애(乃) ㅇ죽여 시체로 만들다→시체 시(尸) ㅇ악기소리를 울리라→소리울리다 힐(肹) ㅇ화살을 쏘아 맞추라→화살의 상형 의(矣) ㅇ떠나는 모습에 탄식하라→탄식하다 오(烏). ㅇ깔린 꽃을 밟는 그녀에게 몸을 굽혀 절하라→굽다 을(乙) ㅇ여인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악기를 연주하라→음률 음(音) 완성된 모습은 다음과 같다. 아마도 향가 제작법이 잊혀진 후 신라인의 향가제작법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향가가 될 것이다. ㅇ영변 애(乃) 약산 두견화/寧邊乃 藥山 杜鹃花 ㅇ거시힐(尸肹) 도의(矣) 포음(音)절 살리 오(烏) 리여/去尸肹 道矣 抱音折 撒理烏理如 ㅇ거 시(尸) 은 보음(音) 보음(音) 치 기화 을(乙)/去 尸 隱 步音步音 置 其花乙 ㅇ경답고 거 시(尸) 량/輕踏古 去 尸 良 935년 신라는 1000년간 전해오던 월성의 불빛을 꺼뜨리고 말았다. 향가 제작법도 잊혀졌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의 승려가 향가의 역사에 나타났다. 신라말에 태어나 고려초엽을 살다 가신 균여라는 스님의 일대기가 1075년 편찬되었다. 균여가 지은 향가 11편이 그의 전기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어 일연 스님께서 1512년 삼국유사라는 역사책을 저술했다. 그는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편을 수습했다.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향가의 하늘에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향가는 암흑 속에서 100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숨을 할딱거리며 숨어 있었다. 향가는 이 땅의 후손 누군가가 자신들을 발견해주기를, 구조해주기를 기다리면서.
향가 속에 문화의 시작점이 있다. 8세기 초부터 9세기에 전 지구적으로 ‘암흑 한냉기(dark age cold period)’가 있었다. 작은 빙하기였다. 이 8세기~9세기 소빙기론은 유럽에서는 바이킹이 남하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마야문명이 쇠퇴하였으며, 아시아 대륙에서는 당과 신라의 혼란을 설명하는데 이용된다. 지구를 찾아온 암흑 한냉기는 향가에까지 큰 상처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상흔은 모죽지랑가에 새겨져 있다. 효소왕 대(692~702년) 작품이다. 암흑 한냉기가 절정이던 때의 작품이다. 그대가 가는 봄, 모든 것이 마치 풀과 나무가 겨울을 맞은 것 같사옵니다. 아, 낭도들을 사랑하고 지탱해주오은 모습. 세월은 서둘러 흘러 움직이지 못하는 손발, 천으로 가린 눈. 향불만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일곱 분이 맞이하고 대접합니다. 죽지랑이여,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 사람들이 어찌 상여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길에는 성대한 행렬. 길에서 당신을 지켜야 하는 밤이 있습니다. 모죽지랑가의 노랫말은 죽지(竹旨)라는 화랑의 장례식에서 그를 추모하고 있는 향가임을 알 수 있다. 향가와 관련된 이름들은 작자의 향가 제작 의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본 작품 속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당시 신라에는 늦봄까지 지속되던 한파로 인해 대기근이 들었고, 사람들이 죽어갔고, 왕실차원의 대책들이 제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대가 가는 봄, 모든 것이 마치 풀과 나무가 겨울을 맞은 것 같사옵니다”라는 구절은 늦봄까지 지속된 이상한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봄이 다 가도록 겨울처럼 춥다고 하였다. 봄이 다 가도록 추위가 계속되어 봄농사가 망쳐 죽도 먹지 못하는 극심한 기근이 들었다. 이에 따라 왕실에서는 공사 막론 부역을 금지하고, 재산이 있는 자는 곡식을 풀어 굶주려 죽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아야 본 향가의 배경설화에 나오는 여러 가지의 이야기가 납득이 될 수 있다. 본 향가의 제작 의도는 흉년으로 인한 구휼에 있었던 것이다. 추위의 강도에 대해서도 묘사되고 있다. ‘익선’이란 자의 큰아들을 궁정의 연못에 빠뜨려 씻겨주려 했는데 그만 얼어 죽고 말았다 하였다. 강추위였던 것이다. 화랑 죽지(竹旨)의 이름을 한자의 뜻으로 풀어보면 ‘죽도 맛이 있다’는 뜻이었고, 그의 또 다른 이름 죽만(竹曼)은 ‘죽도 없었다’는 뜻이 된다. 작자 득오곡(得烏谷)의 이름이 가진 뜻은 ‘곡식을 얻어 환호한다’는 의미다. 거국적으로 쌀을 절약(能節米)하고 있었고, 세곡을 받아들여 쌓아 놓은 정부 기관(富山城)에서는 쌀을 풀어 백성 구휼(益宣)에 나서고 있었다. 왕실의 영을 어길 경우 어긴 자의 출신지역 관리나 승려들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연대책임을 물었다. 거국적 위기관리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었다. 일련의 상황이 가리키는 방향은 기근과 구휼이다. 이처럼 모죽지랑가는 암흑한 냉기가 덮친 신라의 흉흉했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한 본 향가 속에는 신라시대 장례 풍습이 묘사되고 있다.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은 시신, 천으로 가린 얼굴, 입에 넣는 불린 쌀, 피어오르는 향불, 조문객 접대, 상여를 뒤따르는 성대한 행렬, 중도에서의 상여 지키기. 장례식의 모습이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다. 모죽지랑가에 담긴 신라의 장례식 모습은 전통 장례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처럼 향가 속에는 당대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향가는 우리 문화의 시작점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향가제작법은 당시의 속살을 낱낱이 보여준다.
기파백(耆婆栢)의 제언, 신라의 국목은 잣나무였다. 대한민국의 나무는 소나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는 애국가가 그것을 말해준다. 경주시의 나무도 소나무다. 삼릉의 소나무 숲을 보면 왜 시의 나무가 소나무인지 짐작이 간다. 신라에도 나라사람들이 사랑하던 마음속의 나무가 있었다. 그것은 잣나무였다. 향가 14편에는 잣나무가 2번 언급된다. 향가에는 관목으로는 철쭉(헌화가), 나무로는 잣나무(찬기파랑가, 원가)가 언급된다. 신라인들은 휘하에 많은 사람들을 거느린 책임 있는 사람을 잣나무에 비유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휘하의 사람들로 인해 노심초사하던 사람들이 잣나무였다. ‘찬기파랑가’의 잣나무를 보자. 다음의 구절에 잣나무가 나온다. 잣나무는 화랑 ‘기파’였다. ‘잣나무 같으신 화랑이여. 그대는 가지들을 높이 닿게 하기를 좋아 하였습니다.’ 삼국통일 전쟁이 끝나고 100여 년이 지나자 경주에는 평화의 꽃이 난만하게 피었다. 화랑도 역시 평화에 젖어 기강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기파랑은 휘하의 낭도들이 고도의 기강을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 높았던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신라는 찬란했던 영광을 뒤로 하고 하대라는 긴 혼란의 암흑기 속으로 빠져들어 가야 했다. 또 하나의 잣나무는 ‘원가’라는 향가에 나온다. 효성왕이 아직 왕이 되기 전 친한 이들과 함께 궁정의 잣나무 아래 앉아 정치와 인간의 의리를 이야기했다. 월성 뜰에는 큰 잣나무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 나무를 사랑했다. 잣나무는 신라인들에게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잣나무 가지들은 백성들이었고, 잣나무 줄기는 아랫사람들을 지탱하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왕이나 화랑 같은 인물이었다. 신라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힘들어 할 때 그 나무를 보고 백성들을 생각했고, 자신들이 맡고 있는 책임의 무게를 느꼈다. 다음은 ‘원가’라는 향가다. 만백성을 사랑하고 지탱하시던 잣나무 같으신 분. 당신이 떨어짐이여. 가르침에 따라 당신의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우러르는 얼굴, 바꾸어 준 얼굴. 달이 벌인 그림자, 옛날이 인연이 되어 이르는 곳. 장례를 치르자니 눈물이 흐르옵니다. 아, 망인이시어. 아미타불께 가시기를. 대를 이으리. 방방곡곡 퍼지리. 덕이 뛰어 나온 당신의 이야기가. 후구 잣나무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본 작품은 효성왕이 사망한 후 치러지던 장례식장에서 지어진 향가다. 효성왕에 대해 “만 백성을 사랑하고 지탱하시던 잣나무 ”라고 했다. 신라인들이 백성에 대한 사랑과 직책의 무게를 되새겼던 나무가 바로 궁정 안의 잣나무였다. 그 잣나무가 서있던 월성이란 어떠한 곳인가. 월성은 서기 101년 파사왕 때부터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 신라와 흥망성쇠를 함께 한 왕궁이었다. 이 위대한 유적지에 대해 경주시, 경북도, 문화재청이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꿈같은 제안이 있다. 월성 조경 복원 사업의 포인트로 궁정 안 잣나무가 서있던 자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찾으려고만 하면 아름드리였을 그 나무의 흔적을 못 찾을 것도 없을 것이다. 그 곳에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잣나무를 찾아 옮겨심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아름다웠던 화랑, 기파랑(耆婆郞)을 기려 나무의 이름을 기파백(耆婆栢)이라고 지어주기를 꿈꾼다. 그리하여 경주를 찾는 이들이 그 나무 아래서 천 년 전 신라의 영화를 이야기하고 무너지지 않을 신라를 꿈꾸었던 꽃 같은 젊은이 기파랑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보언에 대한 이해 없이는 향가를 알 수 없다. 향가를 향가답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 보언이다. 이번 편에서도 보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3회에 걸쳐서 보언을 이야기함은 보언을 알지 못하고 향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향가에 자주 나오는 보언으로 ‘애(乃)’라는 글자가 있다. 지금까지의 향가 연구자들은 이 글자를 ‘서울에, 학교에’ 에서와 같이 ‘에’를 한자로 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과 달리 향가 작자가 이 글자를 쓴 이유는 ‘노젓는 소리를 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네이버 한자 사전에서 ‘애(乃)’라는 글자를 찾아보면 모두 16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16개 중 맨 끝으로 가야 ‘노젓는 소리 애’ 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처럼 거의 쓰지 않는 글자이지만 ‘노젓는 소리’라는 내용을 향가 작자가 써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애(乃)’라는 글자는 신라향가와 고려향가에 모두 6번이나 나온다. 25편에 불과한 향가에서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 중 5번이 ‘노젓는 소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음이 확인된다. ‘노젓는 소리’를 향가에 써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라인의 내세관과 연결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죽고 나면 그의 영혼이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를 건너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다. ‘노젓는 소리’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리고 갈 때 배를 모는 뱃사공이 내던 소리였던 것이다. ‘(乃)’ 는 글자는 향가 작자가 향가를 공연하는 배우들에게 ‘어기영차’ 노젓는 소리를 내라고 지시하는 보언이었다. 죽은 자의 영혼이 배를 타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종교를 넘나들어야 했고, 그리스 신화까지를 알아야 했다. 이를 아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반야용선이라는 배를 타고 고해의 바다를 건너 무량수불 앞으로 간다고 믿는다. 배가 바다를 건널 때는 비록 돛배라 하더라도 노를 저어야 했다. 그래서 향가 원왕생가를 만들면서 ‘무량수불 앞으로 간다’는 노랫말 다음에 ‘노저으라’는 지시어를 사용했다. 그것이 ‘애(乃)’라는 글자였다. 불교뿐만이 아니다. 신라의 왕실도 배를 타고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다.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흙으로 빚어 만든 자그마한 배가 이를 증명한다. 크기는 15cm도 안 되게 자그마했지만 의미하는 파장은 크다. 그 배에는 한 사람의 뱃사공이 옷도 입지 않은 채 노를 젓고 있다. 노 젓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혀를 내놓기까지 했다. 무덤의 주인이었던 신라 왕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해 데리고 가는 뱃사공으로 생각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우리 곁을 지키던 전통 상여도 그러했다. 상여에 매단 나무판에 용을 새겨놓고 있다. 상여가 용선이었던 것이다. 상여가 용선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상여를 메고 가는 상두꾼들은 뱃사공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만가는 노젓는 소리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상두꾼이 젓는 용선을 타고 그들이 부르는 뱃노래를 들으며, 정들었던 가족과 이웃을 등지고 저승으로 갔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저승의 강을 건너는 배가 있다. ‘카론’이라는 뱃사공이 망자의 영혼을 배에 태워 ‘스틱스’라는 강을 건너 저승으로 안내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죽게 되면 죽은 자의 입에 은화 한 닢을 물려주었다. 영혼이 카론에게 낼 노잣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종교나 지역을 떠나 죽은 자들은 배를 타고 이승을 떠났다. ‘애(乃)’는 영혼이 바다를 건너간다는 고대인들의 내세관을 말해주는 글자였다. 그렇기에 향가 작자들은 사람이 죽거나 장례식을 치르는 내용의 향가에 ‘애(乃)’라는 글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글자가 나오면 향가를 공연하는 백댄서들은 노를 젓는 춤을 추며 뱃노래를 낭랑하게 불렀다. ‘애(乃)’라는 보언은 신라인들의 내세관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화석과도 같은 글자다. 지질학자들이 5억4000만 년 전 고생대 캄브리아기 삼엽충의 화석을 연구하듯이, 향가 연구자들은 화석어가 되어 있는 1000여 년 전의 향가 문자들을 선입관 없이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5억4000만 년 전의 것도 하고 있는데 1000여 년 전의 것을 못할 것이 무어 있겠는가. 보언을 모르면 향가를 알 수 없다.
초대받은 자, 보언을 모르면 향가의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 오늘은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연구 도중 놀랐고 글을 읽을 독자들은 읽는 도중 놀랄 것이다. 그러나 믿는 것이 좋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필자 스스로도 믿을 수 없어 수없이 검증을 하였지만 결과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신라왕릉을 지키는 무인석 중에 이국적인 모습이 있다. 처용을 울산에 온 이슬람 상인이라고 주장하는 논문도 있다. 필자는 이러한 연구결과가 말하는 신라의 글로벌한 모습에 대해 예전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가볍게 넘겼었다. 그러다가 이국적 요소를 빼놓고는 신라를 이야기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향가 속에 흉노, 돌궐, 곤이, 사타 등 고대 아시아 대륙의 지축을 흔들던 민족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향가의 작자들은 향가 속에 이민족의 맹장들을 내세워 자신들의 조상을 치켜세우거나 천지귀신을 위협하는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처용가의 해당 구절을 살펴보자. 可 入良 沙 寢矣 見 昆 극 입량 사 침의 견 곤 들어와 방을 보니 오랑캐 임금의 이름 극/들다 입/ 잠깐 량/사타족의 약자 사/자다 침/어조사 의/보다 견/종족의 이름 곤 극(可)과 사(沙), 곤(昆)이라는 세 개의 글자가 나오고 있다. ‘극(可)’은 돌궐의 왕 칸(可汗)이고, 사(沙)는 돌궐의 한 부족이던 사타(沙陀)이고, 곤(昆)은 주나라를 괴롭혔던 곤이족(昆夷族)이다. ‘극(可)’이라는 문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뜻이 ‘오랑캐 임금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돌궐족은 그들의 왕 칭호를 ‘칸(可汗)’이라고 했다. ‘극(可)’은 바로 ‘칸(可汗)’의 약자였다. 극(可)은 14편의 신라 향가 중 원왕생가, 처용가, 헌화가에 출현한다. 칸(可汗)은 돌궐에서 왕을 부르던 말이다. 돌궐의 왕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칸은 제2대 묵철 칸(默啜可汗, 재위 691 ~ 716년)이었다. 그는 측천무후 당시 당나라를 공격하여, 당나라 남녀 9만 명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천하를 뒤흔들던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초대받은 칸은 아마도 ‘묵철 칸’이었을 것이다. 사(沙)라는 글자는 사타돌궐(沙陀突厥)의 약자다. 신라 향가에 총 8회나 나타나고 있다. 살던 곳이 천산산맥 부근의 사막 지대였기에 사타(沙陀)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 비록 지금의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신라에서는 어린아이까지 알았던 용맹한 민족이었을 것이다. 이들 글자는 연출자에게 백댄서나 백 코러스를 출연시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라고 지시하던 글자였다. 이들은 고유의 의상을 입고 무대에 나와 민족의 고유한 춤을 추었다. 신라는 요즘 못지않은 글로벌한 나라였다. 향가 제작법에 따르면 처용가는 이랬다. 토함산 떠오를 때의 달 아름다워라. 밤에 일하는 벼슬이라서 여기저기 돌아다님이어. 잠깐 들어와 방을 보니 다리 넷이 좋아하고 있어라. 둘은 내 아래오고 둘은 누구 다리 아래이고 본래 내 아래여마오는 아내 빼앗긴 남편을 어찌하여 하릿고. 공연 도중 당나라 측천무후를 경악에 빠뜨렸던 묵철 칸과 사타돌궐족, 곤이족이 몰려나와 관객을 공포에 빠뜨렸다. 그는 처용의 아내를 괴롭히던 천연두 역신에게 썩 물러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겁먹은 역신이 처용 앞에 납작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안도했고 환호성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처용이 추던 공포의 춤은 서역의 돌궐, 사타, 곤이 민족의 이국적 춤이었다. 서라벌의 밤은 이들의 경연장이었다. 처음 들어보신 이야기 일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이민족의 왕과 군사들이 경주에 다녀갔음을 향가 제작법 속 보언이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한 밤이 신라의 밤이었다. 보언을 모르면 신라의 밤을 알 수가 없다. 보언을 모르고 풀면 향가의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
보언은 반드시 필요한 향가의 핵심 보언은 향가를 다시 보게 한다. 보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자 한다. 조금 거시기한 이야기다. 향가를 연구하다 보면 그 속에 노골적인 섹스이야기가 있어 질겁하게 된다. 옛날 경주 땅에 섹스학 강의를 몸으로 시연하시던 공주님 한 분이 계셨다. 그녀의 제자는 왕궁에 근무하던 어린 하인들이었고, 실습위주이던 교과 내용은 섹스 체위 중에서도 후배위 자세를 최종병기로 하고 있었다. 짐작하셨을지 모르지만 서동요 이야기다. 향가 제작법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선화공주님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라고 요구한다. 그것도 전면적으로 바꾸라고 한다. 서동요는 배경설화로 보아 신라와 백제가 새로이 결혼동맹을 맺어 양국간 전쟁을 멈추고, 장인 좋고 사위 좋고 하자는 노래였다. 신라는 시집보낼 여인을 엄밀히 골랐다. 선발된 여인은 섹스 기술에 매우 능했다. 월성에 근무하던 어린 하인들에게 섹스를 가르칠 정도였다. 하인들은 어려서 그런지 그 방면에는 완전 숙맥들이었다. 지체 높으신 공주님은 친히 가르쳐 주시기로 하고 밤이 되면 그들을 방으로 불러들여, 안고 이리저리 뒹굴면서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녀가 자랑하던 체위는 후배위였다. 어린 하인 앞에서 엎드려 포즈를 취해주면서, 후배위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직접 체험해보라고 하면서 친절히 가르쳐 주니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향가제작법은 공주는 실제의 공주가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한다. 향가는 어디까지나 소원을 비는 노래이고, 많은 사람이 부르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힘에 의해 서동요가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관중으로 동원된 가운데 공연되었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구경 나왔던 경주사람들은 배를 잡고 굴러야 했다. 너무너무 재미있더라는 소문이 어항을 채우는 물처럼 월성을 채웠다. 추측이나 멋대로 하는 풀이가 아니다. 제작법이라는 설계도에 따라 서동요를 들여다보면 이런 내용이 정확히 나온다. 그러기에 ‘향가제작법을 모르면 향가를 알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향가 제작법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단연코 보언이다. 보언은 향가를 향가답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공연할 것인지 가르쳐 주는 말이다. 뮤지컬 배우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지시하는 문자들이다. 노래와 악기, 무용을 어우러지게 한다. 향가를 입체적 뮤지컬로 만드는 것이다. 공주의 이름 선화(善化)는 ‘잘가르친다(잘하다 선, 가르치다 화)’는 뜻이다. 그녀가 잘 가르치던 것, 그에 해당하는 보언은 을(乙)이었다. ‘구부리다’라는 뜻을 가진 문자다. 섹스에서는 후배위를 뜻한다. 옥편을 찾아보시라. 모두 틀림없다. 서동요에서는 어린 하인 앞에서 엉덩이를 드러내고 몸을 구부리는 공주의 모습을 연기하라고 지시하는 글자다. 이 글자는 신라향가뿐 아니라 고려향가에도 수시로 나온다. 부처님 앞이나, 놀라운 것 앞에서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라고 지시하는 글자였다. 서동요 노래가사를 보자. 가르침에 능한 공주님은 남 모르게 시집간 남편 두고 어린 하인을(乙) 방으로 불러 밤이면 누워 뒹굴(乙)며 안고 보내는 거여. 진평왕 때 서동요가 공연되었다. 노랫말 선(善)과 화(化), 보언 을(乙)을 실마리로 하여 서동요가 가지고 있던 천년의 비밀을 알아내게 하였다. 이들은 공주와 어린 하인이 누워 뒹군다고 가리키고 있다. 서동요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보언이 콕 짚어 낸다. 공주가 어린 하인들에게 후배위 자세를 체험시키는 장면이었다. 나라의 동량들을 길러내시기 위하여 솔선수범하시는 공주님이시다. 진평왕은 섹스 기술에 능한 공주를 백제의 무강왕에게 비록 향가 속이지만 시집보내려 했다. ‘너는 백제왕에게 기술을 걸어 두 나라를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고, 서로 번영하도록 하라’ 이것이 진평왕이 선화공주에게 내린 임무였다. 향가제작법 중 한 두 가지는 생략된 채 만들 수도 있고 변화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보언은 생략할 수 없다. 보언이 없다면 더 이상 그것은 향가가 아니다. 뮤지컬이나 마당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향가제작법의 핵심, 보언(報言)이란 것이 있었다. 서라벌 하늘에 불길한 혜성이 나타나고 국경에는 왜군이 쳐들어오는 일이 벌어졌다. 혜성은 불길한 징조였다. 놀란 왕실이 ‘융천사’라는 승려를 불러 위기의 수습을 맡겼다. 그는 향가를 지어 혜성이 뿜어대는 불길한 기운이 신라 쪽이 아니라 왜군을 향하도록 해달라고 기원했다. “혜성의 불길함을 없애주시고, 우리가 왜군을 무찌르도록 하여 주시라.” 융천사는 향가 속에 보언(報言)이라는 글자를 집어넣고서는, 공연 연출자들에게 그 글자가 가리키는 대로 춤을 추어 혜성을 위협하면 된다고 했다. 보언이란 향가를 공연할 때 배우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던 글자였다. 혜성가 속에 보언이 어떻게 씌어 있고,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보자. 道尸掃尸星 利 望良古 도시소시성 리 망량고 길쓸별(혜성) 이 바라보였고 (길 도/ 시체 시/ 쓸다 소/ 시체 시/ 별 성/ 이기다 리/ 바라다 망/ 길하다 량/ 옛 고) 위는 혜성과 왜군의 출현에 대항해 융천사가 지었다는 ‘혜성가’의 첫구절이다. 혜성을 뜻하는 사전 속 우리말은 ‘길쓸별’이다. 한자로 쓰면 ‘도소성(道掃星)’이다. 작자는 ‘도소성’이라는 글자 사이에 ‘시(尸)’라는 두 글자를 못을 치듯이 단단히 박아 넣었다. ‘도시소시성(道尸掃尸星)’이 된 것이다. ‘시(尸)’라는 글자가 바로 보언이다. 노래패, 춤패, 밴드들이 이 글자에 따라 적을 시체를 만들어 버리는 춤과 음악을 연주하였다. 지시하는 보언을 가지고 있었기에 향가는 시가 아니고 뮤지컬이 되었다. 노래패들은 노래를 불렀다. 혜성가의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오래토록 다스린 동쪽 땅 강의 물줄기가 말라 막힘없이 트이게 되어 적이 돌아 다니오는 성이 되었어라. 경계병을 세워 망을 보라했고. 왜가 다스리기 위해 군사를 두어 와 봉화가 타올랐사온 변방은 늪 지역이었도다. 세 명의 화랑이 풍악산을 보아 주오시려다가 이야기를 들었고, 한 달여 왜가 여덟 번 쳐들어 와 여러 차례 베었나니. 그 후 길쓸별이 바라보였고. 혜성이었다. 혜성은 ‘배반’이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나니. 후구 막힘없이 트였다 함은 맞닥뜨린다는 것이다. 시체가 되어 물에 떠다니는 것은 왜군들이야. 이는 우군과 왜군이 견주었다는 것이로다. ‘혜’라는 글자는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나니. 혜성이 겁을 먹고 왕실과 융천사의 뜻을 이루어주었다. 신라는 일본군들을 물리쳤고, 혜성의 불길함도 해결하였다. 향가는 뮤지컬의 대본이었다. 공연을 위해 마당에 무대가 마련되었다. 노래패들이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이 춤패들은 보언에 따라 춤을 추고, 밴드들은 악기를 연주했다. 보언이 가지고 있는 대담함에 놀라게 된다. 무대 위에서 보언을 연출하는 춤패들은 상대 배우를 몽둥이로 때리고, 시체로 만들고, 파묻고, 칼로 능지처참했다. 화살을 쏘아 죽이고, 따비로 땅을 파 묻었고, 사나운 돌궐족과 흉노의 왕과 군사들을 떼로 보냈고, 무찌른 상대방의 시체를 들판에 내버리고, 그들의 시신을 땔나무로 덮는 춤을 추었다. 고대 경주 땅 어느 마당에서 향가패들은 때로는 장엄하게, 때로는 흥겹게, 때로는 격렬하게 마당극을 공연하였다. 세계사로 보더라도 서기 6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공연되던 무대예술의 시나리오를 14편이나 가진 민족이 우리 말고 또 어디 있나 싶다. 향가는 경주시가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무대 예술이다. 연출가의 상상력을 더해 향가를 새로이 각색하여 지난 여름 1,000만 관중을 모은 디즈니 영화 ‘알라딘’못지않은 경주 문화의 컨텐츠로 만들 필요가 있다. 멋진 후손들이 되어보는 것도 비록 힘은 들겠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일일 것이다.
7. 많은 사람이 부르게 하기 삼국유사에는 향가는 유행가처럼 많은 사람이 부르게 해야 한다는 제작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동해 바닷가였다. 남편을 따라가던 수로부인이 용에게 납치되어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남편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자, 한 노인이 나타나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여러 입은 쇠를 녹인다고 했습니다. 용이라 하더라도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노래를 지은 다음 백성들을 불러 모아 부르게 하십시오” 남편은 그에 따라 ‘수로를 내 놓으라’는 내용의 노래를 지었다. 그리고 인근의 사람들을 모아 바닷가에서 떼창으로 부르게 하자, 용이 겁을 먹고 수로부인을 내다 바쳤다. 남편이 사람들을 모아 바닷가에서 떼창을 부르게 한 것은 ‘여러 입은 쇠를 녹인다’라는 향가제작법에 따른 것이었다. 신라인들은 향가를 제작하며 여러 사람이 부를 수 있도록 조치했고, 이러한 장치에 의해 향가는 쇠를 녹이는 힘을 갖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부르면 부를수록 향가의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래서 향가제작자 중 권력을 가진 이들은 백성들을 강제적으로 동원해 향가를 부르게 했고, 백성을 동원할 수 없는 이들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 부르도록 가사를 재미있게 만들었다. 권력을 동원하여 부른 대표적인 노래가 안민가다. 가사의 내용까지 좋아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용될 정도이다. 안민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君隱 父也 군은 부야. 임금은 아버지야. 임금 군, 근심 은, 아비 부, 둥글넓적한 그릇 야. 이 향가는 충담사라는 승려가 지은 것이다. 경덕왕은 그해 삼월 삼짇날 월성의 귀정루에 나와 햇빛을 쪼이다가 길 가던 충담사를 불러 이 향가를 짓게 했다. 왕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경덕왕이 숙환을 앓고 있었고, 병을 낫게 해준다는 풍습에 따라 삼월 삼짇날의 ‘차’를 마시고 ‘햇살’을 쪼이기 위한 나들이 행사가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안민가의 진정한 목적은 왕의 쾌유를 비는 데 있었을 것이다. 경덕왕과 신하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안민가를 ‘향가 제작법’이라는 설계도에 따라 해체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임금은 아버지야 신하는 사랑을 주시는 어머님이야 민이란 정처 없이 떠도는 아이고. 민, 이들은 임금과 신하들이 자신들에게 해주심을 알고, 임금과 신하들이 자신들을 사랑하심을 아는 고여. 삶의 터전을 다스리고 민을 살게 하라. 사는 집을 보전하고 여기에 양식을 다스리라. 그렇게 한다면 민은 비록 이 땅에 버려지고 저승으로 보내진다 하더라도 나라를 지켜야 함을 알고, 나라를 보전해야 함을 알고여. 후구 임금과 신하가 많은 민들을 사랑해주면, 민은 임금과 신하와 같이 나라를 지키고 보전하여 나라가 태평함이여. 음미하면 할수록 감탄하게 된다. 천년 사직 서라벌 정치 엘리트들의 마음가짐에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라는 임금을 중심으로 하여, 신하들이 앞장서고 백성들이 뒤따르던 나라였다. 무엇이 중한데? 안민가는 먹고 사는 문제라는 정치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다. 천 년 전 경주 삼화령에서 작자 충담사가 끓이시던 맑은 차향기가 안민가에 실려 오늘에 내려오고 있다.
1글자 2역할, 향가문자는 암호문이었다. 암호문이란 관계된 사람만 그 내용을 알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도록 트릭을 써둔 문장이다. 경주 땅에 암호문자가 있었다. 향가문자다. 제작자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천지귀신에게 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향가문자들을 조립하면서 그 내용을 일반인이 알지 못하도록 감추어 놓았다. 애써 감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소원에는 개인적 프라이버시가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엄중한 국가 기밀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알려져 모두가 알게 된다면 될 일도 안 되고 소동만 일어날 것이다. 그 옛날 경주 사람들이 만들어 낸 정교한 암호 기법을 깨뜨리고, 그 속으로 들어가 본다. 제망매가다. 첫구절의 향가문자들은 다음과 같이 조립되어 있다. 生 死 路隠 此矣 有 생 사 로은 차의 유 생과 사의 길은 여기에 있어야 하나니. 날 생, 죽다 사, 길 로, 근심 은, 이 차, 어조사 의, 있다 유 내용을 전하는데 꼭 필요한 향가문자는 ‘생사로 차유(生死路 此有)’ 라는 다섯글자 뿐이다. 여기에 ‘근심 은(隠)’이라는 문자가 추가되어 있다. 이 글자는 군살 같지만 꼭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의도적이다. ‘은(隱)’이라는 글자가 맡고 있는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말 ‘~은’을 표기하고 있다. 또 하나는 ‘근심을 없애달라’는 뜻을 표기하고 있는 데, ‘근심’이라는 뜻에 머물지 않고 ‘근심을 없애달라’는 뜻으로 까지 확장되어 있다. 하나의 글자가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생과 사의 길’이 가진 의미는 ‘나이든 사람이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자식이 부모 앞에 죽고, 누이가 오빠 앞에 죽는 비극적 사건이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자 월명사(月明師)의 이름에도 이런 일을 막아달라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월(月)은 ‘세월 월’이었고, 명(明)은 ‘질서가 서다 명’이었다. ‘세월의 질서가 바로 섬, 즉 어린 자가 부모나 오빠 앞에 죽는 비극을 막아 달라’는 소망이 이름에 담긴 뜻이었다. 제망매가 전체를 감상해 보자. 생과 사의 길은(隱) 여기에 있어야 하나니. ‘밥을 몇 번 먹었느냐’라는 말을 보내도 ‘나는(隱) 가여’ 하고 ‘죽는 것은 나이 차례여’라는 말을 보내도 ‘나는 가여’ 하였고니. 가을날 서둘러 부는(隱) 바람이 아님에도 여기에 저기에 떠올랐다 떨어지는 나뭇잎들이여. 한 무리 잎들은(隱) 나뭇가지로부터 나왔으나 가는(隱) 곳은 나이 순 아니더라. 아야, 아미타불이여 누이를 맞이해다오. 나 재 올리라 해놓고 누이 맞이해주기를 기다리고 있고여. 겉으로 보기에는 누이의 극락왕생을 비는 노래가 분명하다. 그러나 ‘은(隱) 또는 는(隠)’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늦게 태어난 자가 먼저 죽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소원을 천지귀신에게 전하는 노래로 반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경주 땅의 지적 엘리트들이 만들어 낸 은밀한 소통법이자 향가제작법의 하나였다. 이렇게 의도를 감추어두는 제작법은 신라향가 14편 모두에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고대 어느 민족도 이렇게 독특하고 치밀한 암호기법을 만들어 낸 예가 없다. 암호 전문가의 평가에 따르면 향가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암호문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만들어진 암호 중 가장 치밀한 암호라고 하였다. 그랬기에 지난 100여년 간 유수한 암호 해독가들이 고배를 들고 말았다. 경주인들의 향가문자는 인류의 언어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 작품이다. 향가는 인간과 신 사이의 암호문이었다.
5. 향가 제작 제3법칙 소원을 비는 문자가 없다면 향가가 아니었다. 수로부인 이야기는 감포 앞바다 어장과 같았다. 거기에서 월척급 향가 제작법들을 낚아 올릴 수 있었다. ‘소원 빌기’, ‘많은 사람이 부르게 하기’, ‘보언의 사용’이라는 법칙이 그것이다. 이번에는 제3법칙인 ‘소원 빌기’에 대해 말씀 올리도록 하겠다. 신라 향가 14편 중에는 누가 보아도 소원을 비는 노래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는 작품들이 여러 개 있다. 당시 경주 땅 한기리라는 마을에 살던 희명(希明)이라는 여인의 아이가 실명하였다. 분황사 천수관음 그림 앞으로 아이를 데려가 노래를 부르게 하자 아이가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불길한 혜성이 나타나자 해와 별의 질서를 바로 잡아 달라 하였다는 노래, 역신으로부터 미인 아내를 구해달라는 노래도 있다. 모든 향가는 단 한 편의 예외도 없이 소원을 비는 노래들이었다. 소원을 비는 문자가 없으면 향가가 아니었다. 이는 차츰 확인될 것이다. 수로부인은 널리 알려져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잠자리에 배가 고파 툭하면 남자를 따라 가버려 사람들의 애를 태웠다. 수로(水路)라는 이름 속에 감추어 둔 뜻은 ‘물길’이었다. 물길이 사라졌다는 말은 가뭄으로 논밭에 물을 대는 수로가 말라 없어졌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수로가 있느냐 없느냐는 농사 짓던 신라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어느 날 수로부인이 동해 바닷가에서 용에게 잡혀 갔다. 한 시라도 빨리 수로를 구해내야 했기에 그녀의 남편은 부랴부랴 백성들을 모아 호소하도록 했다. 노래 가사를 소개한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 남의 부녀 앗아간 죄 얼마나 클까 네 만일 거역하고 바치지 않는다면 / 그물로 잡아 구워서 먹으리 수로가 말라 사라졌으니 가뭄이 든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수로를 내놓으라’고 빌고 있다. 비가 오게 해달라는 말이다. 이 노래와 함께 묶여 있는 향가 속에는 비가 내리게 해달라는 말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헌화가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紫布岩 乎 过 자포암 호 과 자포암 지나가는 길에 들리셨네. 자줏빛 자, 베 포, 바위 암, 감탄사 호, 지나가는 길에 들리다 과 ‘한자의 뜻을 우리말 순서로 배열한다’는 제작법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작법에 따라 풀어보면 남녀교접을 좋아하는 수로부인과 변강쇠 같이 힘세고 노련한 노옹(老翁)이라는 사내의 밀고 당기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포암, 지나가는 길에 들리셨네. 잡은 고삐 놓아 어미소 버리라 하신다네. 부인께서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신다면 한 묶음 꽃 꺾어 바치리요. 수로가 남자를 따라 가버리면 물길이 말라 논밭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다. 농민들의 마음이 갈라지느냐 아니냐는 수로부인에게 달려있다. 작자는 남편 순정공에게 수로가 노련 남을 따라가지 않도록 일심으로 지키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름조차 수로에게 매달리라고 순정(純貞)이라고 했다. 정황으로 볼 때 헌화가는 기우제 향가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독자들께서 보시듯 비오라는 내용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향가 작자들은 기원하는 내용을 향가의 문자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향가 제작법을 알아야 찾을 수 있다. 다음 편에서는 경주 시민의 조상님들께서 소원을 어떻게 감추어 두었는지 알아볼 것이다. 세상은 몰라도 경주 시민들은 알아야 한다. 할아버지들의 솜씨이기 때문이다. 김유신 장군의 후예인 필자가 그들의 방법을 1000여년 만에 폭로해 보여 드릴 것이다. 모든 향가는 소원을 비는 노래였다. 소원은 문자 속에 숨겨 두었다. 소원을 감추어 놓은 문자가 없다면 향가가 아니었다. 이것이 향가 제작 제3법칙이다.
한자의 뜻으로 적는다 / 우리말 순서로 배열한다 향가 제작법을 알려면 신라인들이 문장을 어떠한 방식으로 썼는지 알아야 한다. 난 5월 23일 경상북도 발 기사 하나가 서울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울진 성류굴 속에 신라 때의 글들이 새겨져 있고 그것을 판독했다는 기사였다. 심현용 울진군 학예사와 이용현 경주 박물관 학예사 두 분의 이름이 남녘의 지평선 위에서 두둥실 떠올랐다. 두 분은 자신들이 말하신 내용이 향가 제작 제1·2 법칙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까? “560년 6월,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 둘이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다” 신라인들은 왕의 행차를 기록하며 성류굴 속에 한자의 뜻을 우리말 순서로 배열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두었다. 찬기파랑가 첫 구절 속에서 이를 확인하자. 咽 嗚 爾 處 米 열 오 이 처 미 목이 메어 슬프다 당신이 처형됨 이 목이 메다 열 /슬프다 오 / 너 이 / 처리하다 처 / 쌀 미 한자의 뜻 그대로를 우리말 순서에 따라 배열해 놓은 문장이란 걸 알 수 있다. 신라 향가 모든 문장이 약간의 예외를 빼놓고 다 이랬다. 이러한 법칙으로 찬기파랑가를 해독해보자. 목이 메어 슬프다, 당신이 처형됨이. 이슬 내린 새벽 기운 달은 그물에 걸려서리. 흰 구름이 달을 좇아 떠가고 있는데. 그는 어찌하여 아랫사람들을 바로 잡으려 하였는가. 여덟 명을 죽게 한 것은 물을 맑게 하는 이치였습니다. 억센 화랑의 일 처리 하심은 도리에 합당하심이었습니다. 그는 늪같이 느리게 흐르오는 내를 다스렸습니다.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서덜을 싫어했던 화랑이었습니다. 낭도들을 지탱해 주오려는 마음을 가진 다른 화랑을 보지 못해서 그를 좇음이라. 아사. 잣나무 같으신 화랑이여. 그대는 가지들을 높이 닿게 하기를 좋아 하였습니다. 눈이 내립니다. 풀과 나무들이 겨울을 맞았습니다. 꽃이 집니다. 맨 끝 구절을 다시보자. 끝 구절 세 글자가 우리의 가슴을 치고야 만다. 花 判 也 화 판 야 꽃이 집니다 꽃 화 / 지다 판 / 넓고 큰 그릇 야 화랑 ‘기파(耆婆)’의 이름을 제1·2법칙으로 보면 향가의 의미가 더욱 선연해진다. 이름의 한 자는 ‘억세다 기(耆)’, ‘사물의 형용 파(婆)’다. ‘억센돌이’라는 뜻이었다. 화랑도는 통일 전쟁이 끝나고 100여 년이 지나자 기강이 해이해졌음이 분명하다. 기파랑은 이를 바로 잡으려 하였다. 그러다 벌어진 예기치 않은 참사로 어느 눈 내리다 그친 날 새벽 즈음 달빛 아래서 그는 경주 땅 어디에선가 칼날 아래 꽃잎으로 지고 말았다. 그가 경주 땅을 떠난 지 1300여년이 지났다. 그를 잊지 못하는 경주 시민들과 함께 기파랑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기파랑이 말한다. 향가 제작 제1법칙은 ‘한자의 뜻’이고, 제2법칙은 ‘우리말 순서’라고.
현재의 향가풀이는 일본의 고대문자 해독법이었다. 인류에게 어느 날 집단 기억상실이라는 사건이 생겼다고 하자. 그날 이후 1500여년이 흐른 미래인들이 우리가 쓰던 핸드폰을 동굴 속에서 발견했다. 기능도, 용도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물건. 미래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다. 어떤 사람이 자판의 버튼 몇 개를 눌러보았더니 내장돼 있던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들은 소리를 담아놓은 기계라고 결론 내렸다. 핸드폰이 가진 여러가지 기능까지는 알지 못했다. 미래인들이 핸드폰의 복잡한 구조는 상상도 못한 채 그 속에 내장돼 있는 몇 마디 소리만을 듣고 소리 기계라고 주장한 것이다. 지금까지 향가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이 이랬다. 향가를 알려면 불편한 이웃나라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일본에는 1500여년 전의 책으로 만엽집이라는 게 있다. 파고 들어가는 데 일가견을 가진 그들은 몇 백 년 동안 그 책을 연구했고, 서기 600년대를 전후해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을 소리 그대로 써둔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일본제국은 조선 말 우리나라를 침략해 와서 식민지 정책을 연구했고, 그러던 중에 향가를 발견했다. 그들은 신라의 향가 역시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소리를 써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방법으로 향가 25편 전체를 해독해낸 사람은 오쿠라신페이(小倉進平)였다. 그들은 왜 남의 나라 고대문자에 관심을 가졌을까.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郞)라는 학자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가나자와는 언어학자로 조선어와 일본어는 같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내선일체라는 침략정책에 앞장 선 것이다. 일제는 학자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독립군을 처형하고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키는 각종 서적을 소각했다. 민족말살이라는 배경 하에서 이러한 학자들이 향가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오쿠라의 향가해독은 민족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냈다. 이에 우리 민족이 향가 해독 전쟁을 시작했다. 대표적 인물이 양주동 박사로 그의 분노는 역사를 바꿨다. 그는 훗날 민족이 총과 칼로만 망하는 것이 아니더라고 그 때를 회고했다. 양주동 박사는 오쿠라의 논문을 읽은 다음 날부터, 향가 연구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오쿠라의 해독을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었고, 반박했다. 센세이셔널한 반응이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당황했고, 우리 민족은 환호했다. 어느 일본인은 조선의 학자들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다고까지 말했다. 향가 연구로 한일 학계의 주목을 받다가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오쿠라는 발끈했다. 자신이 잘한 것에는 눈을 감고, 틀린 것만 지적했다면서 분개했다. 10년 후 다시 양주동 박사와 대적하겠노라고 결연히 선언했다. 그러나 오쿠라는 7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대표선수가 향가라는 링 위에서 맞부딪칠 대혈투는 무산됐다. 하지만 양주동 박사는 상처받은 민족의 자존심을 치유한 일대 기린아가 되셨고, 민족의 사랑을 받았다. 뜻밖에도 이 과정에 예기치 않은 일이 잠복해 있었다. 양주동 박사가 천려일실을 한 것이다. 일본인들이 이식한 해독법, 그 가설이 과연 우리 향가에도 적용될 수 있는 지 여부를 철저히 검토해보지 않으신 것이다. 일본인이나 양주동 박사님 모두가 일본식 해독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이후의 학자들도 이에 대한 큰 문제의식 없이 오쿠라 이래 해독 결과의 수정보완에 매진했다. 하지만 이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필자가 향가 제작법을 연구하면서, 향가의 구조를 해부해 본 결과 일본식의 방법은 외과 수술을 하면서 돌칼을 들고 덤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향가 속에는 구조라는 것이 들어 있었다. 향가는 시가 아니었고 뮤지컬이나 연극과도 같은 무대예술의 대본이었다.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최고의 기술로 핸드폰이 제작됐듯이, 당시 경주를 중심으로 한반도에 살던 지적 엘리트들이 심혈을 기울여 설계하고, 만든 것이었다. 상상을 뛰어넘은 첨단 제품으로서, 세계에 유례없을 최고수준의 제품이었다. 그들이 만든 향가라는 첨단 제품은 한반도는 물론이려니와, 동북아 전체로 수출돼 소비되고 향유됐던 것으로 밝혀진다. 필자의 칼럼은 향가 제작법을 향가의 주인이신 경주 시민들께 돌려드리고, 향가 제작법의 로제타스톤을 남겨주신 원효대사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자는 글이다. 본격적으로 향가 제작법에 들어가 보자.
2. 이름 속에 숨겨둔 뜻 수로부인과 노옹의 이름 속에 숨은 적나라한 바람기 행여나 감치거논 아제나 아지메 있으면 손잡고 동해바다 헌화로에 가볼 일이다. 수로라는 사모님이 1000년도 더 전에 높은 자리 발령받아 가는 서방님 뒤따라 가다가 억수로 멋진 한량 만나 서방질 했던 길이라더라. 그 짓하려면 토함산 으슥한데 차 세워놓고 하거나 대구 가서 해야지,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그랬으니 소동 안 나겠나. 들통 날 일 하기는 왜 해. 그 일 때문에 지금까지도 지저분한 소문이 나 우리 경주 처자들 혼사길 어려워져. 옛날 같으면 이른 손자 볼 서른 넘은 나이에 시집도 못가고 있는 것이 보통 일인가. 쓸 만 한 직장 아들 둔 어미들이 동네 처자 대학 다닐 때 행실 까탈스럽게 살핀다는 소문까지 났어. 향가에 나오는 사람, 이름 지을 때 허투루 짓는 법 없다 카데. 사람 팔자 이름 팔자라니 손자 낳아 작명소 갈 때 만 원짜리 두어 장 더 쥐어 주더라도 깊은 뜻 넣어 달라고 신신당부해야 한다. 수로(水路)라는 이름 살펴보자고. ‘물길’이야 그렇다 치라도 심상치 않은 내용이 있는 것 아니가. ‘주수로(走水路)’란 말 살펴보소. ‘남녀가 성교한다’라는 뜻이 있다 하네. 이런 망측할 일이 있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꼬 그 날도 이름 값 단디 했다카지 아메. 바닷가에서 노옹(老翁)이라는 남자를 만났다고 테레비에도 나고, 아이놈들 학교 교과서까지 실렸다 카데. 그 놈 이름 한번 들어 보라고. 얄궂게도 노련하다는 노(老) 자라꼬. 거기다가 사내 놈 그것이 엄청 크고 기까지 잔뜩 오른 것을 말할 때 쓴다카네. 옹(翁)자라는 그 글자가 기가 콱 막히제. 경주 남자 모두 야코죽이는 어마무시한 사람 아이가. 숙달되고 노련하고 물건은 거대하고 힘까지 잔뜩 오른 남자라 카네. 그런 놈 싫어할 년 누가 있겠나? 몇 달 굶은 년이 남정네 만나 귓속 말 나누었으니 좁은 바닷가 동네방네 시끄럽지. 자주빛 철쭉꽃 백송이로 매질하는데 좋아라 안자빠질 년 천지간에 누가 있나? 서방놈만 불쌍하제. 지만 모르고 있었겠제. 서방 이름이 순정(純貞)이라든가 뭐라든가 했어. 마누라 하나만 안다카데. 정조? 정조만 지키면 단가, 짐승 노릇할 때는 해야 사내지. 그런 꼴에 즈그 마누라 꽁무니 쫄쫄 따라 다닌다 하지 않나. 뻔하다꼬. 마누라 바람필까 봐 그카는 거제. 답답다 카이, 진짜로. 꼴에 벼슬은 강릉태수란다. 우리 임금 성덕왕이 사람이 너무 좋아 한 자리 내 준 거제. 이번 인사 끝난 뒤 월성 총무과장이 경상도지사님한테 전화해 알려주었는데 왕님이 각별히 챙겨주셨다 카데. 신이 난 강릉태수 임지로 마누라 데리고 출발하며 양양 A급 송이버섯 꼭꼭 챙겨 먹고 뭔가 보여주겠다고 의욕이 대단하더라고 했어. 잘 생각했지. 참 강릉은 신라 때는 없었다 아이가? 고려 때 처음 나온 지명이라꼬? 웬 영문인지는 나도 몰라. 인사 명령지 보니 강릉태수(江陵太守)라고 꼼꼼하게 박아났다카데. 옥편을 찾아보니 강(江)은 큰 수로를 말하고, 능(陵)은 물에 담근다 캤어. 큰 수로에 물을 채우는 자리니 요새 말로 수리조합장 아닌감? 그년 마음에 철쭉꽃 피어 가뭄 오지게 들면 서방님은 불철주야 한 눈 팔지 않고 물 관리에 매달려 수로가 마르지 않도록 정신없이 일했다 카데. 일편단심 수로만 지킸다꼬. ‘순정(純貞)’이라는 이름이 씨가 되고 말었어. 그래도 이제 고위직 공무원 마나님 되었으니 행실 조신해야 하는데 제 버릇 어디 갈까? 떠나자 말자 한눈 팔기 시작했다 카네. 삼각관계여. 그년은 무슨 팔자에 복이 그리도 많나. 서방은 지 각시 수로에 물 채워주는 데만 매달리고 월급만 제때 꼬박꼬박 갖다 주는데 또 한 놈은 천하잡놈이라 “싸모님, 가정을 포기하세요” 카메 날마다 철쭉꽃 바쳤다 카네. 서방님 곁 조신하면 수로 찰랑찰랑 흥건해지고, 숨겨둔 놈 따라가면 수로 말랐다고 시끄럽지. 농민들은 수로 실종 신고 내고 가뭄 들었다고 기우제 지내고 부녀자들은 산꼭대기 올라가 아랫도리 내놓고 오줌을 쌌제. 수로는 사내 복은 많아도 연애복은 없어. 멋진 놈 따르자니 천하지대본 농민들이 울고, 순정을 따르자니 사는 재미가 없꼬. 수로는 물의 여신이고, 노옹은 가뭄의 신이라 카데. 제발 이름 잘 짓자고, 향가 팔자 이름 대로니. 그래서 어제 밤 9시에 향가 지으려는 화랑들이 서울 강남 작명학원에 등록했다는 뉴스까지 떴어.
이번호부터 모두 14편에 걸쳐 향가의 새로운 해석법을 내놓은 김영회 선생으로부터 향가를 해석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향가학계에서 처음으로 ‘향가를 만드는 방법’을 본지 독점으로 공개한다. -편집자주 1.보언(報言)의 발견 양주동 선생의 묘소에서 고통을 하소연하다 문득 스파크 하나가 튀어 올랐다. 왜 향가 제작법을 찾으려 하는가. 47년 전부터 이를 찾아다니던 필자에게 많은 사람들이 묻던 말이었다. 그러면 나는 말했다. ‘문화의 시작점에 서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가 향가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72년 서울 광화문통에 있던 경희궁 터에서였다. 그 곳에 있던 학교에서 고교 생활을 했었고, 그 때 향가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 날은 전율이었으나 제작법을 묻는 필자에게 웃음 외에는 답이 주어지지 않았다. 필자는 제작법을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그 날의 작은 결심 이래 4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필자는 우리민족으로는 향가를 최초로 해독해 내신 양주동 박사님의 묘소를 찾았다. 원왕생가라는 향가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 원왕생가는 모두 85자의 한자로 되어 있다. 그 날까지도 향가를 구성하는 글자들은 잘 짜여진 암호문처럼 서로가 서로를 단단히 결박하고 있어서 어떤 예리한 나이프로도 베어지지 않았고, 어느 날카로운 송곳으로도 뚫리지 않고 있었다. 묘 앞에 앉아 지하의 양주동 박사님께 암호와도 같은 향가 문자 해독의 고통을 하소연하던 그 때였다. 영감 하나가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혹시 원왕생가 속에 있는 ‘향언운 보언야(鄕言云 報言也, 우리말로 보언이라 한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 앞 ‘질(叱)’이라는 글자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바로 돌아와 자료를 펼쳐놓고 확인에 들어갔다. ‘질(叱)’이라는 글자는 ‘꾸짖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다. 신라 향가 979자 중 37번이나 나오는 핵심 글자다. 향가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나를 주의 깊게 살핀 것이다. 그 동안 수 없이 찾아왔던 영감 대부분은 필자를 배신하고 떠나갔으나, 그 날 만큼은 아니었다. 그 글자는 향가를 만들던 작자가 연출하던 이들에게 ‘꾸짖는 소리를 내라’고 지시하던 말임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질(叱)의 쓰임을 알게 됨으로써 그 주위 글자들의 쓰임 역시 알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다른 향가문자들의 작동 원리까지 알 수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향가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어 나갔다. 마침내 길을 나선지 40여 년 만에 천년이 넘도록 잃어버리고 지냈던 향가의 문자 체계를 발견한 것이다. 숨 막히는 긴장 속에 나와 향가만의 문답이 진행되었다. 향가의 비밀이 드러나던 그 때, 필자는 샹폴레옹이라는 프랑스인이 이집트 그림문자 체계를 발견해 낸 운명의 시각을 떠올렸다. “1822년 9월 14일 정오 쯤, 샹폴레옹은 자기 집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거리를 단숨에 달려, 형의 사무실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가 소리쳤다. “발견했어!” 그는 몇 마디를 던지고는 기절해버렸다. 그의 형은 그가 죽은 줄 알았다.(문자를 향한 열정, 레슬리 엣킨스, 로이 엣킨스 저) 향가로 들어 갈 수 있는 틈바구니 하나를 발견하고, 이빨 빠진 나이프로 주변을 파헤쳐 입구로 만든 다음 깜깜한 동굴 속으로 조심조심 기어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우리가 이름으로 들어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토함산 자락에서 달을 보며 흘리던 처용의 눈물, 남녀교접에 굶주린 수로부인과 두 남자의 삼각관계, 나이 어린 하인들에게 섹스기법을 가르치던 선화공주의 평화를 향한 임무에 대한 이야기들도 먼지 쌓인 궤짝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거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원효대사님의 호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향언운 보언야(鄕言云 報言也)’라는 글자를 원왕생가 속에 무심결에 써두었던 그 분의 친절이 뜻밖에도 향가 속에 보언(報言)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해주는 단서가 되었고 이를 실마리로 하여 마침내 향가의 제작법을 찾아낸 것이다. 천금과도 같이 소중한 17자, 국보 이상의 의미를 가진 그 글자들은 다음과 같다. 惱 [叱古音 (鄕言云 報言也) 多可 攴] 白 遣賜 立 뇌 [질고음 (향언운 보언야) 다극 복] 백 견사 립 번뇌할 때는 밝은 불법을 보내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