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옥산서원 내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각 안에서는 일군의 무리들이 탁본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먹 방망이로 일정한 속도로 고르게 두드리는 작업 현장엔 문화재청직원과 함께 전 불교중앙박물관장인 실상사 흥선 스님 일행이 회재 이언적 선생의 신도비 비문을 탁본하고 있었다. 흥선 스님은 탁본계의 권위자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현장에서 보는 탁본 작업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기자가 도착했을때는 탁본을 한 장 완성한 상황이었고 이어 여러번의 탁본 작업이 계속됐다. 탁본 작업을 주도하고 있던 흥선 스님은 애로 사항에 대해서 탁본의 전체 과정 전부가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하절기는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야말로 전 과정을 몸으로 하는 작업이어서 더욱 힘이 든다고. 문화재청은 최근 2018년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 대상으로‘한국의 서원’을 선정했는데 한국 대표 서원인 경주 옥산서원을 비롯해 전국의 한국 성리학 발전과 서원 건축유형을 대표하고 있는 9개의 서원이 포함됐다. 마침 옥산서원에 있는 회재 선생의 신도비 탁본 작업이 이뤄져 더욱 의미있는 현장이었다. -포항시에 있는 회재 이언적 선생 신도비, “관리 상태 좋지 않아 지자체가 보존 관리할 수 있는 방법 찾아야” 흥선 스님은 탁본을 하려면 전통 종이가 좋다면서 금석문의 크기들이 전통 종이보다 대부분 크기 때문에 전통 종이를 이어서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했다. 스님은 “현재 시점이라도 좋은 탁본을 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문들이 점차 손상돼 갈 것이다. 회재 선생의 비는 옥산서원에도 있지만 포항 묘소에도 또 하나가 있다. 사전 조사하는 팀들이 따로 조사하고 있으며 탁본 전 단계까지 만들어 둔다. 이는 이끼도 끼고 새똥이나 거미줄 등 여러가지 이물질이 있어 그들을 제거해 탁본하기 좋은 상태로 해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항 신도비의 경우 청소에만 3시간이나 걸렸다. 안타깝게도 이는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작업을 통해 현장에서 시사하는 바다”라면서 “문중에서도 고민하시겠지만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 시점으로 보인다. 지자체가 보존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흥선 스님은 또 “이 탁본 작업은 문화재청에서 예산을 집행해서 전국에 있는 금석문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사업의 일환이다. 경북지역 금석문도 올해 사업 범위 안에 들어가 있었던 차제였다.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이곳 회재 선생 신도비를 찾아 탁본하는 것을 요청해 허락을 받고 작업을 시작했다”며 이번 작업의 경위를 설명했다. -서원이나 문중에서도 회재 선생 신도비에 대한 상당한 수준 갖춘 탁본 보관돼 있어야 스님은 금석문 자료 작업 자체가 우리 문화재의 일부이므로 지금까지 잘 전해져 왔듯이 앞으로도 후손에게 전해져야 하므로 탁본 하는 과정에서 매우 신중하게 작업한다면서 “혹시라도 모를 손상에의 우려때문에 손상을 최소화하는 부분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그래서 상태를 주의깊게 잘 관찰하고 미연에 방지하는 대책을 세우고 작업에 임한다. 바로, 탁본의 대상이 되는 유물의 상태를 가장 안전하게 작업 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 첫 번째 하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또, “이 비석의 상태는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금석문 자료 전체에서도 아주 양호한 편이다. 거의 손상이 없는 상태로 보인다. 이번 신도비의 탁본 결과는 수년째 저희가 작업하고 있는 평균 정도의 수준으로 잘 나오고 있는 편이다. 이번 작업 과정에서 신도비의 이수 부분에 단청색이 남아있었음을 발견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서원이나 문중의 입장에서도 회재 선생의 신도비에 대한 상당한 수준을 갖춘 탁본들이 한 두 부 정도는 보관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탁본 수준으로는 곤란하다. 문중에서 탁본해놓은 기존의 경우와 현재 저희가 한 탁본 작업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옥산서원 내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1호 조선 중기 문신 회재 이언적 선생(1491년(성종 22) ~1553년(명종 8))의 신도비는 현재 경주 옥산서원과 포항시에 두 기가 남아있다. 옥산서원에 있는 신도비는 1577년에 건립됐다.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있는 신도비는 1586년(선조 19)에 건립한 신도비다. 두 비석 모두 경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됐는데 건립 연대나 이언적 선생의 역사적 위상 등을 고려해서라고 한다. 옥산서원 운영위원인 문산 이병환 선생은 “회재 선생의 두 신도비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있다. 경상도 관찰사 박소림이라는 이가 혹시나 이 신도비가 훼손될까 우려해 같은 비석을 하나 더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주 옥산서원과 포항의 이언적 선생의 신위를 모신 달전재사 인근에 모셔져 있는 2기가 오늘날 존재하는 연유다”고 말했다. 옥산서원 내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이 신도비는 선조 초, 추숭(追崇) 과정에서 기대승에 의해 신도비명이 찬(撰)해졌고 1577년(선조 10)에 이산해의 글씨다. 비의 전체 높이는 320㎝, 비신의 높이는 204㎝다. 9년 뒤인 1586년에는 신도비가 포항시에 있는 선생의 묘소 앞에 다시 건립되었다. 특히 옥산서원내 신도비는 이수, 귀부의 조각에서도 예술적인 가치가 있으며 건립연대나 이언적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 등을 반영하고 있어 귀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신도비는 건립 당시, 옥산서원 앞 계류 옆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해서 서원 안으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한편, 회재 선생은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여주다. 초명은‘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언(彦)’자를 더했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이다. 1531년(중종 26) 사간직에 있으면서 김안로(1481~1537)의 중임을 반대하다 파직돼 경주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 때 추관(推官)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1574년(선조 7)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고 강계로 유배돼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1569년(선조 2) 종묘의 명종 묘정에 배향됐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옥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선생은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포항 달전리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67-2호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있는 이언적 선생의 신도비 역시, 선생을 기리기 위해 1586년(선조 19)에 건립한 신도비다. 이 비석은 1577년(선조 10)에 세운 옥산서원 소재 이언적 신도비와 함께 200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비의 전체 높이는 300㎝, 비신은 180㎝이며, 비문의 글씨는 손엽(1544~1600)이 썼다. 신도비명은 기대승(1527~1572)이 지었다. 신도비 인근에는 이언적 선생의 신위를 모신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02호 달전재사(達田齋舍)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비 역시 선생에 관한 역사적 평가 등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포항에 있는 신도비는 비석 일부분이 깨지고 총탄의 흔적으로 보이는 자국 있는 등 손상 심해,‘비각 지어 보존해야’ 현재 포항시에 있는 신도비는 비석 일부분이 깨지고 깊숙하게 파인 총탄의 흔적으로 보이는 자국이 있는 등 손상돼 있는 편이다. 노천에 있다 보니 훼손 정도가 심한 실정이다. 달전재사와 함께 보물로 지정돼 있는데도 포항시의 무관심으로 관리 소홀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포항시에 있는 신도비에도 비각을 지어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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