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교 아래에 유교(楡橋)가 있었고 귀교(鬼橋)도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1986년 2월 월정교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월정교 하류 19m 떨어진 지점에서 뜻밖의 목교 교각 부재가 발견되었다. 이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원효 스님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는 문천교와 월정교가 같
문천에 있었다는 일정교와 효불효교는 같은 다리일까? 문천 즉 남천과 그 주위에는 월정교 이외에도 춘양교, 효불효교, 유교, 귀교 등 많은 다리가 있었다. 월정교와 춘양교 두 교량은 이름만으로도 그것이 설치된 지역이 하나는 동쪽, 다른 하나는 서쪽이라는 것을 알 수
월정교는 문천 최고의 교량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경덕왕 19년(760)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월정교는 신라 왕경 서쪽 지역의 주된 교통로로 이용되고 춘양교는 경주 남산과 남쪽 외지를 연결하는 다리였을 것으로
문천은 서라벌에서 중요한 하천이었다 서라벌의 옛터인 경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으로 토함산과 명활산, 동대봉산, 함월산. 남으로는 금오산, 고위산, 마석산. 서쪽으로는 송화산, 선도산, 벽도산. 북으로는 금강산, 금학산, 약산이 에워싸고 있다. 동쪽을 제
계림 속에 계림비, 그리고 향가비가 있다 경주는 예로부터 숲의 도시였다. 북천 변으로는 고성수, 오리수, 임정수가 있었으며, 서천 변에는 왕가수, 남정수, 천경림, 어대수, 고양수 등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도 일부 숲은 남아 있으나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지금
계림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경주에는 다른 도시에 비해 숲이 많은 편이다. 왕릉을 비롯한 고분들은 대부분 숲속에 안온히 안겨있다. 이곳 계림은 그냥 숲이 아니다.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신성한 곳이다. 요즈음 계림은 초등학
첨성대는 최초 여왕의 위상과 성조(聖祖) 탄생을 형상화?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천문관측대로 일반에 알려져 왔다. 첨성대란 말 자체가 ‘별을 바라보는(瞻星) 대(臺)’라는 것으로 일본인 학자 와다유지(和田雄治)는 첨성대 위에 목조 건물이 있었고 그 안에 혼
사서(史書)에는 첨성대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첨성대의 축조 시기를 밝힌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유사』 ‘선덕여왕지기삼사조’에는 ‘선덕여왕 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만들었다[鍊石築瞻星臺]’고 하였다. 또, 「왕력(王曆)」에 제17대 내물마립간릉 위치와 관련하여 점성대(占星臺)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권12 지리지에 있는 동경유수에 관한 기록에도 첨성대가 있으며 ‘신라선덕여주(善德女主)가 쌓은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권 150 경주부에는 선덕여왕 2년(633년)이라는 축조 시기와 함께 첨성대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첨성대는 경주부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633년(선덕왕 2년)에 선덕여주가 쌓은 것이다. 돌을 다듬어서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 5촌, 위의 둘레는 21척 6촌, 아래 둘레는 85척 7촌으로 속이 통해 있어서 사람이 그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에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그 말미에 “이곳에서 천문을 관측한다.”고 덧붙였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16년(647년)에 첨성대를 만들었다. 돌을 다듬어 대를 쌓은 것인데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고 높이는 19척이다. 그 속이 통해 있어 사람이 그곳을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한다. 경주부 동남 3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시기는 647년은 진덕여왕 원년에 해당하며 『세종실록지리지』의 633년과 차이가 있다. 이상에서 축조연대를 633년, 647년으로 달리 기록하고 있으나 선덕여왕 때 축조되었고 천문을 관측한 곳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분석 결과로 천문대가 확실하다. 한국천문연구원 김봉규 박사는 “신라시대 축조된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첨성대가 상징적인 건물이라거나 제사를 지내던 제단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김 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린 고대 천문관측기록을 분석한 결과,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640년대 이후 기록된 유성이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다.”며 “이는 첨성대에서 유성을 관측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어 “첨성대가 완성된 이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며 “기록된 내용도 매우 정밀해졌다.”고 덧붙였다. 즉, 541년부터 640년까지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이 3건에 불과했지만, 첨성대 축조 예상 시점인 641년부터 740년까지의 기록은 38건에 달하고 있다. 또 첨성대 축조 전인 467년 10월 『삼국사기』 기록에는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떨어졌다.’는 식의 막연하고 간단한 내용이 있지만, 첨성대 축조 후의 718년 11월 삼국사기 기록에는 ‘유성이 묘수(황소자리)에서 규수(안드로메타자리)로 들어갔는데…’라는 식으로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돼 있다고 김 박사는 설명했다. 김 박사는 특히 “신라가 별에 대한 제사를 본피유촌(本彼遊村)에서,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문열림(文熱林)에서, 오행성에 대한 제사를 영묘사(靈廟寺) 남쪽에서 지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도 확인했다.”며 “이는 신라가 첨성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천문과 관련된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첨성대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아님을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이후 충북 청주 충북대에서 열리는 한국천문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한편, 이어 영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도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지금까지는 결정적 증거 없이 그저 막연하게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말해왔지만, 신라가 남긴 『삼국사기』 기록들이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며 “영국에서 열리는 학술발표회에서 인정받으면 첨성대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 첨성대에 대한 후속 논의를 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첨성대 기능에 대해서 이런 주장도 있다 첨성대(瞻星臺)는 글자를 풀이해 보면 ‘볼 첨(瞻)’ ‘별 성(星)’으로 별을 관찰하는 건축물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첨성대가 천문대라는데 의심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첨성대가 과연 천문대였는가에 대해서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와다유지(和田雄治)였다. 그는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 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 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1917년 ‘조선고대관측기록 조사보고’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우리나라 학자인 홍이섭도 ‘조선과학사’에서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 평가했다. 박동현도 첨성대가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첨성대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한 사람은 1962년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 홍사준이었다. 그는 첨성대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내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첨성대가 개천설(중국 주나라 때의 우주관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하여 천원지방이라고 표현)에 의거하여 백제인이 세운 신라 천문대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8·15해방 전부터 1960년대까지 정설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후 상설 천문대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이전까지도 천문대, 즉 천문관측을 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으나, 이후에 이단자(異端者)들은 현존하는 첨성대가 평지(平地)에 있다는 것과 첨성대 자체의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 등으로 이설이 제기되어 어떤 이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고 하고, 또 국방과 관련하여 봉화대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상징적인 달력 건축물이라고 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설과 이견이 속출하고 있다. 물론, 이런 설에 대하여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첨성대는 천문현상을 관찰했던 곳이기 때문에 『삼국유사』에서도 첨성대를 점성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주장도 있다. 첫째, 첨성대가 규표(圭表)를 중심으로 한 다목적관측대일 것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개방식 돔으로 관측하기에 불편한 내부구조를 근거로 상설 천문대로 보기 어려우며 백제인들이 주비(周髀)의 법(개천설과 동일)에 따라 세웠을 것이라는 주장, 둘째, 이와 비슷한 견해로 첨성대가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이 아니며 다만 수학 및 천문학에 관한 당대의 권위서였던 주비산경(周髀算經, 중국의 천문 수학서)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축조한 상징적인 탑이라는 주장, 셋째, 첨성대는 천문관측과는 관련이 없으며, 다만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는 주장이 있고, 끝으로 첨성대는 넓은 의미의 천문대로 평가하면서도 겉모양은 불교의 수미산을 따랐으며, 토속적 신앙에 따른 농업 신인 영성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인 천문대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 창문 양 기둥 아래에 사다리를 걸치기 편하게 홈을 판 흔적이 있고, 그 안쪽에도 사다리를 걸치기 편하게끔 튀어나오게 끼워 넣은 석재들이 있다. 이렇게 사다리를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 정치와 사회에서 역학(曆學)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농업 위주의 고대사회에서 기상의 관측은 실용적인 면으로 중요함은 물론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옛 사람들은 일월성신(一月星辰)의 움직임으로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나라의 일관은 이런 면에서 중요한 임무를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일식과 월식은 민심에 미치는 영향이 컸으며 이를 예언하기 위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따라서 동양의 고대 사기(史記)에는 여기에 대한 기록이 특히 면밀하다. 『삼국사기』의 기록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일식과 월식에 대해서 빠짐없이 기록됨은 물론이고 일부 기록 내용은 중국 측 사서보다 더욱 정확하다. 경주 하동에 있는 민속공예촌 내의 신라역사과학관에서는 경주의 왕경복원도 및 첨성대의 구조와 천문관측 방법 등을 축소 모형과 그림으로 재구성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첨성대의 구조와 수리적(數理的) 의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대(臺)를 쌓았는데,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이며 그 속은 비어서, 사람이 속으로부터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한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이 있기는 하나 『석씨계보(昔氏系譜)』에 의하면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에 석탈해왕의 16세손인 석오원(昔五源)이 첨성대 건축을 감독하여 돌을 다듬고 쌓아 올려 만들었다고 한다. 첨성대의 형태는 원주형(圓柱形) 구조물로서 높이가 약 9.48m, 밑지름 4.9m, 윗지름이 2.8m이고, 기단석으로부터 4.16m 높이에 거의 정남쪽으로 한 변의 길이가 약 0.95m의 정사각형 창문이 나 있다. 전체적 구조는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가 올려지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가 얹혀진 모습이다. 이와 같은 구조의 상징성을 살펴보면 아래는 네모지고 위가 둥근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한다.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것이다. 기단부 아래의 땅속에는 잡석과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기단부는 남쪽 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도 정도 돌아서서 있는데, 이 방향은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한다. 또 13단에서 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16도 되는 방향을 향하여 정방형의 창구가 나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동서남북으로 2개씩 장대석이 걸쳐 있어 정(井)자를 이루고 있다. 제27단의 원통 부위에는 각 4개씩으로 짜여진 정자석(井字石)이 두 단에 걸쳐 놓여져 정상부의 사각형을 이루는데 기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것은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상부의 정자석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자리를 바로 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수리를 했다고 한다. 수리를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나, 현재는 남쪽 면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8도 정도 돌아가 있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첨성대는 우리 민족의 수리적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종류의 구조물은 동아시아 3국 중 우리가 유일하다. 첨성대는 27단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신라 제27대 왕임을 상징한다. 여기에 맨 위에 얹혀진 정(井)자 모양의 돌을 합치면 28단, 즉 기본 별자리수인 28수(宿)가 된다. 그리고 또 첨성대를 받치고 있는 맨 밑의 기단석을 합치면 29가 되는데 이는 음력의 한 달에 해당한다. 기단 부분은 12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이는 1년 12개월을 의미한다. 몸체 중앙의 네모 난 창을 기준으로 보면 창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 된다. 이는 일 년 열두 달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이 둘을 합치면 24가 되어 24절기가 된다. 1단에서 27단까지 사용된 돌의 개수 362는 음력 1년의 날 수와 같다는 주장도 있다. 또, 양력 1년의 날수와 맞추어 본다면 정자석과 기단석을 제외하고 1단에서 27단까지 362매, 남측 문주 2매, 상단(27단)의 판석 1매를 합하면 정확히 365매가 되어 1년의 날수와 같게 된다. 종래 석재의 수는 365개로 1년의 날수와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문주와 상단 판석 포함 여부에 따라 달라지므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1962년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 홍사준은 기단부를 제외한 1단에서 27단까지 362매, 지대석 8매, 상부의 정자석 8매, 남측 문주 2매, 27단의 판석 1매로 도합 401매라고 주장하고 있다. 밑받침의 돌은 동서남북 방향이고 맨 위의 돌은 8방위에 맞추었으며 창문은 정남향이다.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에 태양이 정확하게 남쪽에 있을 때 햇살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환하게 비친다. 그러니까 동지와 하지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는 분점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지금도 정확하게 맞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그 당시 신라의 수리적 정밀성을 보여준다.
첨성대가 월성 앞에 우뚝 서 있다. 첨성대는 신라 왕경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사방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첨성대 남쪽으로 계림과 월성, 금오산의 게눈바위[蟹目嶺]가 차례로 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론 선도산 너머 멀리 단석산도 보인다. 또 북쪽에는 경주 시가지가 펼쳐지고, 동북 방향으로는 야트막한 소금강산과 동으로 돌아가며 보문 단지, 명활산, 낭산이 있고, 그 뒤로는 토함산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까이는 월성과 월지가 보인다. 다음은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 옛 신라의 첨성대를 보고 읊은 시이다. 瞻星臺兀月城中(첨성대올월성중) 첨성대는 월성에 우뚝 서 있고 玉笛聲含萬古風(옥적성함만고풍) 옥피리소리는 만고의 바람 머금었네. 文物隨時羅代異(문물수시라대이) 문물은 때에 따라 신라와 달라졌으나 嗚呼山水古今同(오호산수고금동) 아아 산과 물은 고금이 한 가지로다. 첨성대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기네스북에는 ‘세계 최초의 천문대’로 등재되어 있고,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석탈해왕의 16세손인 석오원이 축조한 것으로 되어있다. 첨성대 인근 지역을 과거에는 속칭 ‘비두골’, ‘비두거리’라고 했는데 이는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해서 국가의 안위와 길흉화복을 점쳤다는 뜻이다. 천문, 기상, 역법은 농경사회에서 매우 긴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정치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고대사회에서는 자연을 움직이는 것은 하늘이며, 이 하늘을 정치 이념의 중심으로 삼았다. 따라서 일식, 혜성, 지진 등과 같은 천문현상은 국가의 흉조(凶兆)로 여겨 국왕은 이를 하늘로부터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국가적인 사업의 일환으로 기상 및 천체를 관측하기 위하여 첨성대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첨성대가 실제로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던 실용적인 건조물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누각박사(시간측정 전문가), 역박사(역법 전문가), 일관(천체 기상 관측자) 등의 관리를 두고 있으며, 가뭄·홍수·폭풍·우박·서리 등에 대한 이상 기후와 천체 현상과 관련한 일식·혜성·유성·지진 등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첨성대가 천문·기상과 관련이 있는 구조물임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칠팔십 년 전 첨성대 사진과 지금 사진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 1920년대 일본 사람들이 첨성대 바로 북쪽에 신작로(新作路)를 만들었다. 그 후 6.25동란 때 동해안에 착륙한 미군 포병부대가 첨성대 북쪽에 주둔하면서 장갑차와 탱크들이 지축을 울리며 꼬리를 물고 그 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여 그 진동으로 북쪽으로 10도 가량 급격하게 기울어졌을 것으로 인근 주민들이 믿고 있다. 건축 당시 땅 밑을 여물게 다졌기에 그 정도로 기울고 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휴전이 되고 몇 년 지난 뒤 군용차를 동원하여 굵은 밧줄 타래를 동여매어 남쪽에서 잡아당겨 바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지금의 상태로 기울어졌다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진 첨성대가 1400여년의 풍상을 겪은 지금 육안으로 보아도 한쪽이 땅속으로 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측 결과 북쪽으로 7.2㎝, 동쪽으로 2.4㎝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1970년대에 북쪽 길을 뭉개고 부근에 있는 인가도 없애고 주변 정화 작업을 한 후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길을 새로 냈다. 전문가의 탄성파 탐사와 학술논문 발표 등에 의하면 첨성대가 기우는 이유는 북동쪽 지반이 남·서쪽에 비해 물기가 많고 지형이 덜 딱딱하기 때문에 첨성대의 밑바닥 기단석이 북동쪽으로 약 2.07도 기울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도 더 기울어질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다.
동궁 복원에 문제가 있다. 동궁과 월지 터에 전각 3개 동을 우선 복원하였는데 일부에서 복원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전각의 구조는 대체로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여 복원한 것 같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점 등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 귀족들의 주택인 금입택이 있었다고 한다. 금입택이란 ‘금을 입힌 저택’이란 의미이다. 9세기 중엽 헌강왕 때 신라의 수도를 묘사하면서 금입택이 36채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 저택의 명칭을 들고 있는데 실제로는 36채가 아닌 39채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대의 궁궐 건물은 금속 장식물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경계했던 조선 시대와는 달랐을 것이다. 귀족들의 주택이 금입택이었다면 궁궐은 훨씬 더 화려했을 것이다. 즉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고, 햇빛이 비치는 날이면 건물이 황금빛으로 번쩍거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런 끼우는 금동 장식 유물들이 월지에서 다수 출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원된 3개 동의 건물에는 이런 장식 유물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또, 현재 월지에 복원된 3동의 건물이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 기와를 활용한 점은 이해가 되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프다는 지적이 있다. 단청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시대에 유행한 상록(上 綠) 하단(下丹) 단청을 입혔기 때문이다.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있었으므로 상록 하단 단청이 삼국시대에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단청이 보편화된 것은 고려 말부터다. 신라시대에 어떤 단청을 칠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이 부분은 결론이 안 나오지만, 신라는 기둥을 붉게 하고 금색 단청을 칠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현재 칠해져 있는 상록 하단 단청은 신라시대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기록이라든가 당시의 건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원형을 추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현재 계속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월지 북동쪽에서는 여러 대형 건물과 수세식 화장실을 비롯한 유물들이 대규모로 출토되고 있어서 동궁의 중심지가 월지 호수 서쪽이 아닌 북쪽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 월지 북동쪽은 바로 황룡사 터와 쭉 이어진다. 동궁이 월지 북동쪽까지 뻗어 있었다면 자연스레 황룡사와 동궁, 월성의 궁궐 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이 무리해서 크게 중건한 경복궁보다도 더 넓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까지 동궁의 발굴을 통해서 밝혀진 규모가 신라의 전성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다는 것은 이번 월지 북동쪽 발굴 조사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그런데 동궁과 월지 복원 사업이 유네스코(UNESCO)의 반대로 중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는 동궁과 월지의 복원이 ‘세계유산 협약 이행을 위한 운영지침’(86조)에 어긋난다며 복원에 대한 반대 의견을 경주시와 문화재청에 각각 통보했다. 이 때문에 동궁과 월지 복원이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의 중단 권고는 황룡사와 월성의 복원계획에도 차질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동궁과 월지의 야경이 경주의 대표적인 야간 관광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주말에는 입장객이 너무 많아 주차하기가 곤란하고 월지 주위 산책로도 상당히 붐빈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현재는 운영 시간이 22:00까지이고, 입장 마감 시간은 21:30이다. 외국인들도 상상 이상으로 많이 찾는다. 월지 야경을 본 후에는 가까이 있는 월정교, 첨성대와 대릉원의 야경도 볼만하다. 미국 정치학자인 조세프 나이(Joseph Nye)는 21세기는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하드 파워가 아니라 문화와 문화정책, 국가적 가치관 등 소프트 파워를 가진 문화국가가 강국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근 한류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월지와 동궁을 비롯한 신라의 유적 유물을 적극 홍보하여 문화강국으로의 모습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출토 유물 중 목선과 주령구가 특히 주목된다 출토품 가운데는 목선을 비롯하여 통일신라 건물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건축 부재의 파편, 당시의 글이 적힌 목간(木簡), 그 밖에 신앙이나 생활에 관계되었던 유물들이 많아 당시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 유물 중 목제품은 많지 않은데 이것은 우리나라 토양이 산성인 탓에 땅에 묻혔던 것이 오래 보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월지에서는 바닥의 갯벌층 속에 많은 목제품들이 출토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외부의 공기가 차단된 뻘층에 묻혀서 부식이 크게 되지 않은 상태였다. 출토품 가운데는 목선을 비롯하여 통일신라 건물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목재 건축 부재의 파편들, 당시의 글이 적힌 목간(木簡)들, 그 밖에 신앙이나 생활에 관계되었던 유물들이 많아 당시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주요 유물로는 건축 부재 파편인 난간, 부연(浮椽), 첨차(檐遮), 주두(柱頭), 연목(椽木), 평교대(平交臺), 나무배(木船), 노(櫓), 물마개, 주사위[酒令具], 남근(男根), 인물상(人物像) 등이 있다. 월지에서 출토된 목재 중 가장 주목을 받고있는 것이 주령구이다. 주령구는 정사각형 면 6개와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로 참나무로 만든 일종의 주사위이다. 주사위는 굴렸을 때 각 면이 나올 확률이 같아야 한다. 그러려면 정다면체라야 한다. 수학적으로 정다면체는 6, 8, 12, 16, 20의 다섯 경우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신라인은 각 면의 면적이 거의 같은 14면체 주사위를 창안한 것이다. 이 14면체 주사위는 높이 4.8cm로 정사각형과 육각형의 면적의 차이가 0.01㎠로 거의 같았다. 1987년 단국대 수학교육과 이강섭 교수가 학생들과 이 주사위를 7000번 던져서 각 면이 나오는 통계치를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각 면이 500번에 수렴하는 것을 확인했다.(7000번 / 14면 =500번) 주령구는 정삼각형의 일부를 잘라내어 육각형으로 만들고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으로 14면체를 만들었는데 정다면체가 아니라서 각 면이 나올 확률이 다른데 주령구는 각 면이 나올 확률이 1/14이 나온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러한 형태의 주사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한다. 14면체 주령구 각 면에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 금성작무 (禁聲作舞)- 소리내지 않고 춤을 추기, 중인정비 (衆人朾鼻)- 다른 사람 코 때리기, 음진대소 (飮盡大笑)- 크게 웃으면서 술잔 비우기, 삼잔일거 (三盞一去)- 술 석 잔 한 번에 마시기, 유범공과 (有犯空過)- 덤비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자창자음 (自唱自飮)- 스스로 노래하고 술 마시기, 곡비즉진 (曲臂則盡)- 팔뚝을 구부린 채 다 마시기, 농면공과 (弄面孔過)- 얼굴을 간지럽게 해도 가만히 있기, 임의청가 (任意請歌)- 아무나 노래시키기, 월경일곡 (月鏡一曲)- 달을 보면서 노래 한 곡 부르기, 공영시과 (空詠詩過)- 시 한 수 읊기, 양잔즉방 (兩盞則放)- 두 잔이 되면 즉시 마시기, 추물막방 (醜物莫放)- 더러운 것도 버리지 않기, 자창괴래만 (自唱怪來晩)- 스스로 괴래만이라는 노래하기 또한 이 주령구의 전개도를 그려보면 그 형상이 거북이가 된다. 그런데 ‘용왕신심(龍王辛審)’ 또는 ‘신심용왕(辛審龍王)’ 등의 명문이 새겨진 토기들이 이곳 월지에서 출토된 바 있다. 이 토기들은 용왕전에서 제기로 사용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주령구의 전개도와 토기의 명문과의 관계도 흥미를 끌고 있다. 주령구의 전개도인 거북과 명문 토기의 용을 조합해 보면 별주부전이 연상된다. 여기에 무슨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이 주령구 보존처리 과정에서 불에 타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였다. 출토된 주령구 속의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수 제작된 전기 오븐에 넣어 건조하는 과정에서 온도조절기 고장으로 과열되면서 하룻밤 사이에 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되어 있는 주령구는 복제품이다.
월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이런 유물이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고고학의 연구 대상은 대부분이 묘지에서 출토된 유물이었다. 실생활에 사용하던 유물이 대규모로 발굴되기는 월지가 처음이었다.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3닝3000여 점이나 된다.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이곳에서 연회를 할 때 못 안으로 빠뜨린 것과 935년에 신라가 멸망하여 동궁이 폐허가 된 후, 홍수 등 천재(天災)로 인하여 이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 신라가 망한 후 누군가에 의해 동궁이 의도적으로 파괴되어 못 안으로 휩쓸려 들어간 것 등이 있을 것이다. 월지 서편의 건물이 있던 지역에서는 건축 부재와 불상 등이, 동쪽과 남쪽 호안에서는 목재, 토기류, 농기구 등이 뻘 층에서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유물로는 금동가위, 금동판불, 숟가락, 벼루, 주령구, 목간, 칠기류, 토기, 짐승 뼈, 다양한 기와, 전(塼) 등이다. 이전의 유물은 고분이나 절터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출토품을 계기로 신라시대 궁중생활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출토유물 중에서 금동가위, 금동판불 등은 일본 정창원 소유 유물과 거의 같은 것으로, 이로 미루어 볼 때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쏘쇼인[正倉院] 소장 유물의 상당수가 신라시대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발굴된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단일 지역에서 발굴된 문화재로 박물관의 한 관을 조성한 것은 월지의 경우가 유일하다. 이곳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고분 출토품과는 달리 당시 왕실에서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유물들이 대부분이다. 출토된 유물 중 금속공예품 중 식생활에 관계되는 그릇류로는 청동으로 만든 완(盌), 합(盒), 접시, 대접, 숟가락 등이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도구나 장신구로는 금동가위, 거울, 동곳, 비녀, 반지 등이 있고, 생활 장식품으로는 금동제인 용두(龍頭), 귀면 문고리(鬼面門扉鐶), 봉황장식, 발걸이 장식, 연뇌형 장식(蓮蕾形裝飾), 옷걸이 장식 등이 있다. 못 서쪽 5개소의 건물터를 중심으로 한 연못 안의 갯벌 층에서는 많은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못에 접한 서쪽 건물터 가운데 제일 큰 건물이 있던 곳 주변에서 금동 광배편, 광배 장식 수정과 다량의 화불들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월지에서 많은 불상들이 출토된 것은 당시 신라에 호국불교가 성행하였던 점과 궁궐[東宮] 안에 내불당(內佛堂)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출토된 주요 불상과 불구류를 살펴보면, 금동 아미타삼존 판불 2구, 금동 보살 판불 8구, 금동 여래 입상 6구, 금동제 부처님 귀, 다수의 금동 광배편, 광배 등에 입체적으로 장식되었던 수많은 화불, 보주, 비천 공양상 등이 있다. 월지 출토의 삼존불상 등 판불상 10점은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상들의 표현이 사실적이며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양식적으로는 7세기 말 통일신라와 중국, 일본을 포함한 국제적인 조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도상이나 양식면에서 일본 법륭사에 있는 판불들이나 법륭사 금당 서벽 아미타정토의 본존불상과도 비교된다. 둥글고 통통한 얼굴과 자연스러운 옷주름 처리에 보이는 조각의 사실적인 표현은 중국 당나라 전성기 불상 양식을 반영하면서도 7세기 후반 통일신라 불교 조각의 뛰어난 표현력을 잘 대변해준다. 이 10점의 상들은 하나의 삼존불상과 4보살상이 한 세트로 두 종류의 소형목제 불감과 같은 구조물에 부착되어 예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조기법 및 기량이 뛰어난 10점의 월지 출토 판불상들은 7세기 말 통일신라 초기에 새로이 유입되는 국제적인 조각 양식을 반영하는 중요한 예들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으며, 당시 한·중·일 불교 조각의 양식 비교 및 전파 과정과 영향 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에 ‘R=VD’라는 공식이 있다. 생생하게(Vivid) 꿈꾸면(Dream) 현실화(Realization)된다는 것이다. 당시 삼한일통을 완수한 신라인들이 이 공식을 이곳 동궁과 월지에 적용한 것은 아닐까?
발굴조사 결과 이런 건물터를 찾았다. 1974년 경주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월지 준설 작업을 하다가 유물이 다수 출토되자 작업을 중단하고 1975년부터 2년여에 걸쳐 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연못 내부와 주변 건물지 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게 되었다. 이 발굴조사에 의해 건물지 26동, 담장터 8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조사를 마치고 3년 뒤인 1980년에 발굴 결과를 토대로 서쪽 호안에 접한 건물지 중 일부를 복원하고 나머지 건물지에는 원래의 자리에 새로 초석을 놓았다. 발굴 결과 서쪽으로 남북 일직선 위에 4동의 큰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 건물은 모두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남북 축선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건물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문을 들어서면 회랑 내의 공간이 되는데 그 중앙에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정전(正殿) 정전은 수조하지처(受朝賀之處)라 하여 왕이 문무백관과 왕세자, 척신, 사진 등으로부터 조하를 받던 곳이다. 정전은 궁궐 건축에서 최상위에 위치한다. 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다. 또 이 건물의 북쪽으로 정면 5칸, 측면 5칸의 편전(便殿) 편전은 왕의 일상적 집무시설이다. 이곳에서 왕의 일과가 대부분 이루어진다. 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다. 이 건물지의 북쪽으로는 좌우 익사(翼舍)를 가진 침전(寢殿) 침전은 일상적 생활을 당당하던 공간으로 가장 내밀한 영역이다. 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이들 건물 추녀 끝 바닥에는 물이 흘러가는 석구(石溝)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연못 주위의 호안 석축을 따라 5동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그중 3개 동의 건물(남쪽으로부터 제1, 3, 5호 건물)을 복원하였다. 건물의 복원에는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옥개부재, 공포부재, 가구부재, 난간부재와 기와류, 전류(塼類) 등 건축부재와 철물장식 등을 고증자료로 활용하였으며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과 탑의 양식 등을 참고하였다. 건물에 사용된 단청은 고구려 고분 벽화,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등에 남아있는 단청문양을 참고하여 화려하지 않고 검소한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제1호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건평 21.4평의 주심포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이 건물의 복원에는 봉정사와 부석사 무량수전, 그리고 발굴유물 등을 참고 하였다. 세부 양식은 배흘림기둥 위에 제공과 첨자를 결구하였다. 건물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아 마감하였고 건물 외부로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제3호 건물은 복원된 3건물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정면 5칸, 측면 4칸, 건평 56.64평의 겹처마 2고주 9량의 팔작지붕이다.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하고 지붕마루에는 역시 치미를 올려 장식하였다. 제5호 건물은 3건물 중 가장 규모가 작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13.18평 겹처마 사모지붕으로 하고 화강석 절병통을 올렸다. 주위 발굴에서 수습된 고증자료에 따라 바닥은 방전을 깔아 화강석 기단 갓돌을 두르고 3면의 석축 변에는 돌난간을 돌렸다. 복원된 3호 건물에는 월지 전체의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이곳 월지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하고 월지모형만 남겨져 있다. 못 남쪽으로도 긴 건물터가 동서로 놓여있었는데 이들 건물지의 바닥에는 보상화문 등의 문양전과 무문전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복원을 하지 않은 건물지의 유구는 성토한 후 잔디를 심고 회랑지를 제외한 건물지에는 그 해당 위치에 287개의 초석을 새로 깔아 배치하여 건물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초석으로 건물 배치와 그 규모 등을 짐작할 수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신재로 깔아 옛 맛을 잃고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서쪽 멀리 떨어진 공터에는 복원에 사용되고 남은 일부 석재가 놓여있다. 동궁과 월지를 나오려는데 문득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다음 글귀가 떠오른다. ‘정말 소중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보인다’ 이곳에서 발굴된 건물지 등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전은 수조하지처(受朝賀之處)라 하여 왕이 문무백관과 왕세자, 척신, 사진 등으로부터 조하를 받던 곳이다. 정전은 궁궐 건축에서 최상위에 위치한다. **편전은 왕의 일상적 집무시설이다. 이곳에서 왕의 일과가 대부분 이루어진다. ***침전은 일상적 생활을 당당하던 공간으로 가장 내밀한 영역이다.
월지는 과학적으로 조성되었다. 월지의 규모는 동서 약 200m, 남북 약 180m로 전체 면적이 1만 5658㎡(4738평)이다. 호안 석축의 길이는 1005m이고, 섬을 포함하면 1285m이다. 서쪽은 연못을 내려다볼 수 있게 5.1m의 높은 대(臺) 위에 건물을 짓고 남·동·북은 1.2m로 낮게 호안을 조성하였다. 건물이 있던 서쪽과 남쪽은 호안을 직선으로 처리하고 직각으로 꺾어 못 안으로 돌출시키고, 동쪽과 북쪽은 절묘한 굴곡으로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연못의 어느 쪽에서 보아도 전체를 볼 수 없도록 하여 바다를 연상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문인화가 동기창은 ‘소중현대(小中現大)’라고 하여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월지라고 하는 작은 연못을 조성하면서 바다를 표현한 신라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동기창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신(神) 즉 자연은 곡선을 만들고 인간은 직선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 당시 신라인들의 안목에 할 말을 잃는다. 연못 바닥은 두께 50cm 정도의 점토와 자갈 등을 섞어 강회다짐을 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하였고, 바닥 전체에는 굵은 모래와 자갈을 깔았다. 연못 한가운데에 한 변이 120cm인 정(井)자형의 나무곽을 만들어 그 속에 연꽃과 같은 수초를 심어 못 전체로 번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연못의 동쪽과 북쪽은 낮은 언덕을 조성하여 중국 초나라 양왕이 선녀들과 노닐었다는 고사에 등장하는 무산12봉을, 그리고 연못 속에는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을 상징하는 영주·방장·봉래의 세 섬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곳은 도교의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공 바다였던 것이다. 월지의 시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입수부와 배수부이다. 입수부는 물을 끌어들이는 장치를 한 곳으로 못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다. 동남쪽의 계류나 북천에서 끌어온 물을 거북이를 음각한 것 같은 아래위 두 개의 수조에 고이게 하였다가, 자연석 계단으로 흘러 폭포로 떨어져 연못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위 수조에는 용머리 토수구(吐水口)를 설치하여 용의 입으로 물을 토해서 아래 수조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 용머리는 없어지고 지금은 용머리를 끼운 자리만 남아 있다. 아래 수조에서 연못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높이는 약 1.2m 정도이다. 또한 물이 입수부의 완충 수조를 지나 못으로 수직 낙하하는 지점에 판판한 돌을 깔아놓았는데, 이는 못 바닥의 침식을 막기 위한 것이다. 심산유곡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현상을 재현한다는 미적 감각도 놀랍지만 수조를 거치는 동안 물속에 있던 찌꺼기가 걸러지고 그 물이 폭포로 떨어지면서 용존 산소를 높였을 것으로 생각할 때 당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조상들의 지혜가 놀랍다. 또 못 안으로 들어온 물이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입수부 바로 앞에 섬을 배치하여 그 좌우로 물이 갈라져 못 전체로 물이 흐르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던 것이다. 입수부를 통해 들어온 물은 연못 안의 곳곳을 돌아 동북쪽으로 나 있는 출수구로 흘려보냈다. 출수구에는 상하로 뚫린 3개의 구멍이 있는데 나무로 된 마개로 수위를 조절했음이 밝혀졌다. 정원(庭園)의 물은 성(聲)·류(流)·광(光)의 세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월지의 입수 부분에 폭포를 이루어 물이 떨어지니 소리가 들렸을 것이고(聲), 입수구에서 끊임없이 물을 공급하고 앞에 있는 섬을 휘돌아 연못 전체 물이 흘렀을 것이며(流), 찌꺼기를 거르는 장치를 두어 항상 맑은 물을 공급하여 바닥까지 빛이 비치는(光) 등 이곳 월지는 정원수의 3요소를 충분히 갖추었던 것이다.
월지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월지는 4, 50년 전까지 여름이면 이 못 가장자리에서 미역을 감는 개구쟁이들이 있었고, 겨울철이 되면 스케이트나 썰매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간간히 낚시를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마치고 학년 말 방학을 앞둔 2월의 어느 일요일 친구들과 썰매를 타러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날씨가 풀려 못 가운데에는 얼음이 거의 다 녹고 가장자리에는 고무 얼음(날씨가 풀려 두꺼운 얼음이 녹으면서 고무처럼 신축성이 있는 상태의 얼음)이 되어 있었다. 고무 얼음 위로 썰매를 탈 때는 빨리 지나야만 얼음이 깨지지 않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담력이 큰 아이들은 못 가운데 쪽으로 가서 타기도 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 아이가 깨진 얼음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모두 놀라 못 밖으로 나오는데 두 아이가 서둘러 구조를 하러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었다. 얼음 속에 빠진 아이의 형과 쌍둥이 동생이라고 했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몇몇 어른들은 가까이 다가가 구조해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긴 나무 막대를 던져 주기만 한다. 그런데 구하려 가던 그 아이들이 서 있는 곳의 얼음마저 깨어져 세 사람이 모두 허우적거렸다. 두 아이는 어떻게 해서 빠져 나왔는데 결국 한 아이는 물속으로 몇 번 오르내리더니만 결국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순사(순경)가 오면 모두 잡아가니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한다며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면서 서둘러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온 적이 있다. 6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일찍이 이곳 월지는 신라 삼기팔괴(三奇八怪)의 하나인 ‘압지부평(鴨池浮萍)’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못의 부평초는 뿌리가 땅에 닿지 않아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고 하여 ‘압지부평’이라 했다. 원래 부평초는 개구리밥을 의미하지만 경주지방에서는 마름을 이르는데 말밤[末栗]이라고도 한다. 이 말밤은 9월 초에 마름모꼴의 열매가 맺히는데 양 끝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조심해서 열매를 깨물어 하얀 속살을 먹기도 했다. 여름이면 이 말밤이 수면을 가득 덮었다. 아이들은 말밤이 없는 못 가장자리를 골라 물놀이를 하기도 했었다. 60년대 초반 어느 날 휴가를 나온 두 장병이 헤엄을 쳐서 못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중 한 사람이 이 말밤에 몸이 감겨 끝내 익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외에도 이 못에서 익사 사고가 가끔 있었다. 인근 지역에서는 이 못에 귀신이 있어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들 했다. 못 속에서 소복을 차려입은 잘 생긴 젊은 여인이 유혹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처녀가 더 많았다. 청년이라면 여인의 유혹으로 익사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처녀가 물귀신의 유혹으로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혹 처녀를 유혹한 귀신은 남자 귀신이 아니었을까? 당시 못 서쪽으로 주춧돌만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동북쪽에는 기둥의 반이 물속에 잠긴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임해전이라고 했다. 실제 이 건물은 신라 때의 임해전이 아니다. 1920년 경주 유림들에 의해 세워졌던 건물로 이 장소에 본래 없던 건물이다. 유림에서 정자로 활용했으면 ‘임해전(臨海殿)’이 아니고 ‘임해정(臨海亭)’이라 했어야 하는데…. 여름방학 시즌에는 무전여행을 다니던 대학생들이 이곳 임해전에서 취식을 하고, 또 농번기에는 주위에 농토를 가진 농부들이 점심이나 새참을 먹던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 후 이 건물을 헐어서 황성공원 안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이 있는 독산 서쪽으로 옮겨졌다. 현재 궁도인(弓道人)들이 활터의 정자로 활용되고 있는 호림정(虎林亭)이 바로 월지에 있던 임해전이다. 『장자』 「추수편」에 ‘관규려측(管窺蠡測)’이라는 말이 있다. 대롱으로 보고 소라껍데기로 바닷물의 양을 잰다는 의미이다. 작은 소견이나 자기 견해를 겸손하게 말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다. 워낙 대단한 유적인 이곳 월지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필자의 경험담이 대롱이고 소라껍데기일 것 같다. 장자의 질책이 귀에 따갑다.
문헌으로 살펴본 동궁과 월지 월성의 동북쪽에 있는 이 유적은 임해전지 혹은 안압지라고 알려져 왔으나 2011년 7월부터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이유는 임해전은 신라 별궁인 동궁에 속하는 하나의 건물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동궁으로 변경한 것이고, 안압지는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안(雁)]와 오리[압(鴨)]들이 날아들자 묵객들이 안압지라고 하였는데,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등으로 신라시대에는 이곳이 월지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명칭인 월지로 변경한 것이다. 현재 국가유산청에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경주 동궁과 월지’로 등록되어 있다. 월지와 임해전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신라본기」와「직관지」등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무왕 14년(674) 2월.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문무왕 19년(679) 8월. 동궁(東宮), 즉 태자궁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지었다. 효소왕 6년(697) 9월. 군신들을 임해전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경덕왕 11년(752) 8월. 동궁아(東宮衙)를 설치하고 상대사(上大舍) 1인과 차대사(次大舍) 1인을 두었다. 혜공왕 5년(769) 3월. 신하들을 임해전(臨海殿)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소성왕 2년(800) 4월. 폭풍으로 임해(臨海)‧인화(仁化) 두 문이 파괴되었다. 애장왕 5년(804) 7월. 임해전을 중수하고 새로 동궁 만수방을 지었다. 헌덕왕 14년(822) 1월. 동생 수종을 부군(副君)으로 삼고 월지궁(月池宮)으로 들였다. 문성왕 9년(847) 2월. 평의전(平議殿)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헌안왕 4년(860) 9월. 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았다. 경문왕 7년(867) 1월. 임해전을 중수했다. 헌강왕 7년(881) 3월. 군신을 임해전에 모아 잔치를 열고 주연이 한창일 때 왕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의 신하들은 노래를 부르며, 지극히 즐겁게 놀고 마셨다. 경순왕 5년(931) 2월. 고려 태조를 임해전에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삼국사기』 「잡지(雜誌)」 ‘직관조(職官條)’에는 동궁관·동궁아·세택·월지전·승방전·월지악전 등의 기록이 보인다. 이상의 기록에서 임해전은 왕궁의 면모를 갖춘 채 통일신라 말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의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49대 헌강왕 이후에는 50여 년 동안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있다가 경순왕 대에 와서 고려 태조를 초빙해서 연회를 베푼 것이 사실상 마지막 기록이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이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 성종 17년(1468)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안압지는 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으며 문무왕이 궁 안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 12봉을 상징하여 화초를 심고 짐승을 길렀다. 그 서쪽에는 임해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주춧돌과 섬돌만이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동국여지승람』과 유사한 기록이 보이나 단지 임해전에 관한 부분만 “애장왕 5년(804) 갑신에 중수되었다”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또 조선 현종 10년(1669)에 경주부윤 민주면(閔周冕)이 경주 향교 중수 때 임해전 터의 초석을 많이 옮겨 갔던 사실과 숙종 대의 부윤 권이진이 이곳을 둘러보고 ‘고궁옛터’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이곳을 둘러보고 읊은 것으로 추정되는 ‘안하지구지(安夏池舊趾)’란 시가 있다. 钁池爲海長魚螺(곽지위해장어나) 못을 파 바다 삼으니, 고기 헤엄치고 소라 기네. 引水龍喉岌峩(인수용후급아) 물을 대는 용의 목 그 형세 우뚝도 하다. 此是新羅亡國事(차시신라망국사) 이 모든 풍광이, 신라의 망국을 부른 일인데 而今春水長嘉禾(이금춘수장가화) 이 봄에 물을 대어, 벼 논 적시누나.
월성은 지금까지 방치되고 있었다. 이어령의 수상집 『지성에서 영성으로』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워싱턴 포스터’에서 사람들이 정말 음악을 알아듣는 귀가 있나를 시험한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Joshua Bell)에게 거리의 악사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400만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시시한 깽깽이처럼 들고 연주를 해 보라고 했다. 자기네가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워싱턴 데팡스 지하철역에서. 조슈아 벨은 연주회 입장권이 수천 달러나 하는 스타니까 사람들이 사인해 달라고 마구 덤비면 어떡하나 걱정하기까지 했다. 아침 7시에서 8시 반까지 출근시간에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조슈아 벨을 알아보기는커녕 그 아름다운 음악을 귀담아 듣는 사람조차 없었다. 다들 휴대전화로 통화하느라 정신이 없고 바삐 출근하느라 걸음을 멈추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구두닦이만이 그 음악을 알아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조슈아 벨인지는 모르고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월성을 찾는 사람들이 텅 비어있는 이곳을 마주하며 찬란한 신라 천 년의 진수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휭 들러보고 가버리지는 않을는지…… 그래도 혹 신라 천년의 꿈을 되새기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 구두닦이처럼.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상고기 도성은 금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 금성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기원전 37년(박혁거세 21) 경성인 금성을 축조했고, 101년(파사왕 22)에 월성을 축조해서 거처를 옮겼다고 하였다. 그런데 139년(일성왕 5)에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했고, 393년(내물왕 38)에 왜병이 금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으며, 415년(실성왕 14)에는 금성의 남문에서 관사례(觀射禮)를 거행했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월성을 축조한 파사왕 이후에도 금성이 왕성으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그 뒤 475년(자비왕 18)에 명활성으로 이거했다가 488년(소지왕 10)에 월성으로 이거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즉 상고기에는 명활성으로 이거한 475~488년을 제외하면 금성과 월성이 왕이 거주한 기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금성이 개별 성곽이었다는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488년 이후는 주로 월성이 왕성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파악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월성은 현재의 월성으로 비정되는데, 이곳에서는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금성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금성을 월성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왕도의 대명사로 파악하여 금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금성에 관한 내용이 후대에 윤색되었을지는 모르나 금성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월성은 현재 4개 지구로 나누어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중 B지구 ‘월성이랑’ 사무실 서쪽으로는 지면이 장방형으로 주위보다 높다. 이곳에서 과거 수년 전 관광객을 대상으로 국궁체험장, 승마장으로 활용한 적이 있다. 월성에 이런 유흥시설을 허가했다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얼마 후에 이런 시설은 철거되었다. 월성에 대해서 2007년 지하레이더(GPR)탐사 결과 최소 20개 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이후 일부 발굴 조사 결과 중앙부인 C지구에서만 17개 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월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2014년 12월 개토제를 지내면서 시작해서 원래는 2025년으로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기한에 제한을 두지 않고 계속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월성에서 발굴된 것은 대부분 기와편으로 40여만장에 이른다. 이중 C지구에서 출토된 기와에 새겨진 ‘전인(典人)’이라는 글자와 토기에 새겨진 ‘도부(嶋夫)’라는 글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라 주목되고 있다. 전인은 기와와 그릇을 담당하는 와기전 소속의 담당자를 가리키고, 도부는 토기를 만든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다. C지구의 남쪽에 있던 숭신전은 8간 석주만 남기고 1980년에 현재 탈해왕릉 앞으로 옮기고 현재 그 주위로는 우물과 비석 받침이 남아 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숭신전을 옮기기 전 주위에 민가가 있었고 부근은 밭으로 경작이 되고 있었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제3대 유리 이사금 때 얼음 창고를 만들었으며,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11년(505)에는 얼음 창고를 만들고, 이 일을 맡아보는 관청은 빙고전(氷庫典)이라 하였다. 그러나 신라 때 축조된 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다. C지구의 북쪽 성벽 아래에 있는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에 축조되었다. 흔히들 이 석빙고가 월성에 있어 신라 때의 석빙고로 잘못 알고 있다.
월성 안의 궁궐 유적을 발굴하다. ‘作新宫室 儉而不陋 華而不侈(신작궁실 검이불루 화이불치)’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편 기사이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번 월성 발굴에서 밝혀지고 있는 신라 궁실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출토 유물도 검박한 편이다. 따라서 ‘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의 궁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월성 전체를 발굴하면서 궁성을 이루는 주요 건물들이 모여 있는 중앙 건물지인 C지구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지구에서 정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싸인 통일신라 후기 건물지 17개 동이 확인되었고, 공무수행 기록 등이 담긴 목간, 벼루, 각종 토기와 토우 등 다양한 유물도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다수의 벼루는 이곳이 관청이었음을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유물이고, 터번을 쓴 토우는 서역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흔적이라 주목을 하게 되었다. 월성에 대한 여러 기록 중에는 문헌 외에도 목간(木簡)과 기와나 토기에 새겨진 여러 문자 자료가 있다. 목간은 지금의 종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길쭉한 나무 위에 간단한 글을 써서 정보를 전달하거나 남기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양이 산성이 강한 탓도 있지만 유기질인 나무이기에 남아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특히 이번 발굴 과정에서 수습된 목간은 주로 행정문서용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문제, 윗사람의 명령 지시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2016년~17년에 출토된 목간 중에 ‘병오년(丙午年)’이라는 완전한 간지(干支) 목간이 처음 발견되었다. 병오년은 526년(법흥왕 13), 또는 586년(진평왕 8)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오년 목간에는 ‘지방민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일벌(一伐)이라는 관직을 가진 자가 이들을 통제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6세기 무렵 지방민을 동원할 정도의 대규모 정비 사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목간에는 ‘전중대등(典中大等)’이라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관직명이 등장하였고 중국 주(周)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의 이름도 보인다. 신라는 6세기 이전에는 신라 고유한 말로 이름을 지었으나 6세기 후반 즈음에는 중국의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목간 외에도 기와나 토기에 찍거나 새긴 문자 자료가 있다. 확인되는 문자 자료는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 한(漢), 한지(漢只), 정도(井桃), 습부정정(習部井井), 정(井), 주(朱), 본(本), 동궁(東宮; 태자, 또는 태자가 사는 곳), 전인(典人; 신라의 하위 행정기관)과 도부(嶋夫; 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긴 사람 이름으로 추정)’ 등이 있다. 이들은 어떤 특정 시점을 지칭하거나 신라 6부 및 궁궐과 연관된 자료로 추정된다. 토기나 기와에 새겨진 문자는 한문에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구분한다. 또, 신라 사람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출토 유물로는 토우나 토용, 석인상 등이 있다. 월성 해자에서도 사람과 동물을 작게 본떠 만든 토우가 나왔다. 사람은 두 팔을 벌린 모습, 말을 탄 모습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터번을 쓴 소그드 사람(중앙아시아의 이란계 민족)으로 추정되는 토우도 있어 신라와 서역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동물 토우는 말, 염소, 돼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앞으로 당시 신라 사람들의 궁중을 비롯한 백성들의 생활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월성의 발굴과정과 그 성과를 알아보고자 한다면 먼저 월성 발굴현장에 있는 ‘월성이랑’을 찾고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https://nrich.go.kr/gyeongju/)에서 발간한 안내 책자 ‘찬란했던 신라 왕궁 세상에 나오다, 월성’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또 최근에 교촌마을 건너편에 개관한 숭문대를 찾으면 월성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