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연혁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대구대학 설립인가가 나온다. 1947년 9월 22일자다. 다음으로 청구대학설립인가가 나온다. 1950년 4월 10일이다. 그리고 나서 1967년 12월 22일, 대구대학 설립인가로부터 정확하게 20년 3개월이 지
“아이고 참봉어른 그기 정말입니꺼?” 큰 사랑채 방문이 활짝 열린 가운데 문파 선생과 동네 소작인 한 명이 마주 앉아 실랑이하고 있었다. 소작인은 누대에 걸쳐 최부자댁 전답을 붙여 온 사람으로 최염 선생 말씀으로는 ‘우리 집안을 먹여 살려온 일등공신’이라는 사람이었다
“해방이 되고 한참 뒤, 반민특위라 카는 게 맹글어져서 친일파들을 무조건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때 작은 할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대구 반민특위로 잡해 가셨어요!” 반민특위와 관련해 최염 선생이 가장 기억되는 일로 작은 할아버지 최윤 선생이 반민특위에 체포된 사실을 꺼
“짐은 세계의 대세와 ~ ~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후략)”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를 통해 일본 히로이토(裕仁) 일왕(日王)의 항복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일왕의 목소리는 여느 방송 때와
이쯤 되자 문파 선생도 단안을 내렸다. 선생은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채로 나왔다. 아리가는 선생이 몰라볼 정도로 수척한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아니, 최선생, 편찮으시다는 말씀만 듣고 속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이렇게 몸을 상하시다니요…” 아리가는 진
아리가는 조선의 문화에 관심이 많은데다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라 전통적인 양반가이자 부잣집인 최부자댁에 상당한 호기심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여행을 좋아하고 고건축에 대한 취미를 가진 터라 경주를 좋아해 자주 최부자댁을 찾은 인물이었다. 이에 더해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문파 선생은 ㈜백산무역을 경영하는 것을 핑계로 최부자댁 모든 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승화시키며 아름답게 마감했다. ㈜백산무역이 파산하고 최부자댁이 압류상태에 놓이자 문파 선생은 모든 것을 깨끗이 단념하고 부자의 명성은 물론 그때까지의 호의호식을 포
문파 선생의 문화적 업적 중 하나는 경주의 역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동경통지(東京通志)를 편찬한 일일 것이다. 동경통지는 1933년에 한문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없던 것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다. 원래 1669년(현종10년)에 민주면(閔周冕)이라는 사람
문파 선생이 가장 열심히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던 시기는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창립한 1919년부터 독립자금 대는 일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진 후 주주 간 분쟁으로 안희재 선생과 대표이사직을 맡았던 문파 선생이 물러났던 1925년 사이가 절정기라 할 수 있다. 뒤에 백산은
헌병대 하면 지금은 군의 기강을 잡을 뿐 민간과는 별 상관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헌병대는 지금의 헌병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일제는 군국주의 국가였다. 당연히 군이 최고의 권력을 가진 곳이었다. 헌병대는 그 중에서도 군을 감찰하고 통제하는 곳이었다. 일제
이전 회에서 문파 선생이 어떤 방법으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만들었는지 설명했다. 여기서 실제로 많은 투자자들이 문파 선생을 믿고 사업에 투자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주최부자라면 무려 10대 넘게 부잣집으로 소문 난 명문가에다 더구나 문파 선생 당대에
‘백산이 거액의 독립자금이 필요해서 급히 최준을 찾아가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최준은 그런 거금을 구할 수 없다며 어려움을 표했다. 어쩔 수 없이 백산은 다른 곳으로 돈을 구하러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최준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 “자, 이 수표에 2만원 금액
문파 선생이 대구대를 설립한 것은 세상이 잘 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왜 문파 선생이 대학을 세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흔히 말하듯 민족교육이니 사회사업적인 면에서 해석하긴 하지만 실제로 누구의 어떤 영향을 받아서 학교를 세우게 되었는지에 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 역시 천도교의 전국적인 조직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3·1운동의 핵심정신은 독립선언문에 녹아 있는데 이것을 초안한 사람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다. 또 불교계의 대표인 만해(
‘예수에게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 제자가 있었다면 천도교에는 ‘주옥경 여사’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천도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분으로 여기는 여자 신도 한 분이 있는데 그분이 ‘주옥경 여사’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 유명한 요리집인 ‘명월관’의 기녀로 손
최부자댁에 많은 인물들이 묵어갔지만 이들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신돌석 장군일 것이다. 신돌석 장군은 머문 기간도 길지만 오랜 세월 최부자댁에서 산 덕분에 적지 않은 이야기도 남겨 놓았다. 아래 이야기는 최염 선생이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를 사료를
문파 선생의 독립정신을 말할 때 짧은 인연 속에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위청척사의 화신으로 이름 높은 면암 최익현(1833-1907) 선생이다. 최익현 선생은 최준이 한창 혈기방장하던 18세 무렵에 최부자댁으로 찾아와 달포 동안 머문 것으로 전해져 온다. 면암 최익
“준이라 캤나......니가 올해 몇살이고?” 서당에서 글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준이 막 사랑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며칠 전부터 작은 사랑채에 묵고 있던 할아버지가 마침 댓돌에서 신을 꿰고 있다가 공손히 읍하는 자신을 불러 세웠다. 준이 마루에 앉은 할아버지를 마주
“준아, 니 여어가 어딘지 기억이 나나?” 경주에서 소달구지에 실려 아침부터 점심나절까지 찾아간 곳에 넓고 높은 서원이 하나 있었다. 교촌의 집보다는 좀 좁지만 산의 사면을 따라 올라가며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세워진 집인데다 처마가 높아 얼핏 보기에도 장엄한 모습이다
문파 선생은 그 시대 부자로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희사한 분이다. 그렇다면 그 결연한 의지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마지막 경주최부자 문파 선생에 대한 정말 궁금한 주제였다. 문파 선생은 전통적인 유생의 길을 걸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