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아, 니 여어가 어딘지 기억이 나나?”   경주에서 소달구지에 실려 아침부터 점심나절까지 찾아간 곳에 넓고 높은 서원이 하나 있었다. 교촌의 집보다는 좀 좁지만 산의 사면을 따라 올라가며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세워진 집인데다 처마가 높아 얼핏 보기에도 장엄한 모습이다. 현판에는 ‘용산서원(龍山書院)’이라는 글자가 힘찬 필체로 쓰여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몇 번 와 본 적 있던 준의 얼굴이 조금 찡그려졌다. 다시 아버지의 장광설이 시작될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무리 어린 준이지만 그쯤은 눈치챌 만할 때였다. “허허......., 제대로 기억이 안 나제?” 준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거려 아는 척해 보였다. 다시 그 긴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 머리 위에 걸린 현판을 가리켰다. 가암파, 정무공, 최진립... 조상의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최준      “여쩌게 ‘숭렬사우(崇烈祠宇)’라 카는 현판이 붙어 있제. 여어가 우리 중시조 어른이신 진짜립짜 할배를 모신 사당이라꼬. 니인테는 10대조, 우리 경주 최씨 가암파의 시조이신 정무공 진짜립짜 어른이시다. 옛날에 나라를 위해가 큰 공을 세우고 충성시럽게 돌아가신 분인기라”   아버지는 준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마루에 앉은 준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버지를 쳐다 보았지만 하늘 높이 떠 있는 태양의 역광으로 인해 아버지 얼굴이며 몸이 보이지 않았다. 준은 아버지를 보려고 눈살을 찡그려 보았다. “그분 계시던 시절에 왜놈들도 우리나라를 쳐들어오고 뙤놈들도 쳐들어 왔는데 그 할배께서 여러 곳에서 그놈들을 막아 내셨지러. 결국 돌아가신 곳도 전쟁터랐지...! 우리 집안뿐 아이라 이 일대에서 충성이라카믄 젤로 치는 큰 어른이셨다. 알았제?” 준이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아버지는 짐짓 걸음을 옮겨 준이 앉은 대청마루에 걸터앉았다. 아버지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준의 얼굴이 아버지가 그늘로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펴졌다. 아버지는 그런 준을 보며 싱긋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사당은 바로 그 할배를 기려서 세운 곳인데 너거 7대조 할배이신 의짜 기짜 할배 시절에 세았지러. 문중캉 유림들이 뜻을 모아가 사당을 짓고 임금께 청을 드래가지고 사액이라 카는 거를 받은 기라.” 아버지는 사액(賜額)이라는 것이 임금이 공 있는 사람에게 특별히 주는 것이므로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집안뿐 아니라 고을의 자랑이라고 다시 강조했다. “그렇게 지내오다가 한 해 후에 사당 밑으로 서원을 지으믄서 이름을 지금맨치로 용산서원이라꼬 지았던 기라. 단디 기억해나야 댄데이. 알것제?” 엄숙한 표정으로 기억해놓으라고 하시니 준은 그저 ‘예’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숭렬사가 뭔지 용산서원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무슨 파니 무슨 공이니 하는 말들 역시 어렴풋이 감만 잡힐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아버지께서 언제나 엄숙하고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 자체로 가암파, 정무공, 최진립이라는 명칭만큼은 머릿속에 분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준의 가문, 다시 말해서 경주최부자의 터를 닦으신 조상님과 준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1890년 여름..., 준의 나이 예닐곱 살 무렵의 희미한 기억 속 이야기이다. 조선 4부 중 한 곳 경주, 그중 영향력 큰 교촌, 전기와 전화도 최부자댁에 가장 먼저 들어와 당시의 경주는 영남 일대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신라의 수도로 무려 1천 년을 지속했던 고장답게 경주는 이 일대 정치·경제의 중심지였고 문화와 산물이 유통되는 가장 큰 시장이었다.    경국대전이 만들어지고 전국의 행정구역이 정비되었던 1460년의 기록만 봐도 경주는 당당한 4부의 일원이었다. 당시 조선의 지방행정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가 경주에 설치된 것만 봐도 경주의 중요성이 입증된다. 평양과 전주, 그리고 북방의 군사적 요충지인 영흥 등 불과 네 곳에만 부를 두었던 것만 봐도 경주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부의 장관인 부윤의 품계만 해도 종2품으로 이는 중앙의 참판, 8도의 관찰사와 품계가 같을 만큼 고급 행정관료였다.    해방 이후 70년대까지만 해도 포항, 영천, 울산 등 경주를 둘러싼 도시들은 경주의 입장에서는 위성도시 수준에 불과한 작은 읍촌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은 각각 인구 45만의 포항과 100만 인구로 광역시가 된 울산이 산업화 이전에는 법원이 없어 경주로 재판을 받으러 와야 했을 정도였다. 경주는 특히 내로라하는 쟁쟁한 가문들이 빳빳이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향리였다.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 박씨, 김알지를 시조로 한 김씨, 석탈해를 시조로 한 석씨 등 이른바 왕가의 성씨만 세 성이 있었고 우리나라 성씨의 뿌리가 되는 최, 정, 손, 배, 이, 설씨 등 이른바 신라 육부의 성들이 모두 경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나라 유교의 효시라 불리우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 조선 성리학의 태두격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 그를 훈육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같은 거유들의 후손이 제각각 조상의 품격을 지켜가고 있는 고장이었다. 누구건 경주에서 가문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풍설이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닌 것이다. 이곳 경주에 9명이나 진사를 지내고 10대나 만석 재산을 지켜온 부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경주 최부자였다. 고운 선생의 후손으로서 유학의 기품을 이어가듯 조선의 국립학교인 향교(鄕校)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교촌(校村)최부자라는 명성을 얻고 있기도 했다. 조선에서 만석꾼이 어찌 경주 최부자밖에 없었을까만 적어도 경주라는 유서 깊은 고을에서 무려 12대를 명가로 이어온 데다 10대를 만석으로 지내왔고 누대에 걸쳐 생원과 진사를 지내왔으므로 양반의 체모도 잃지 않았다. 더구나 당대의 권문세가와 당당히 사돈을 맺어온 만만치 않은 저력이 경주 최부자의 명성을 한층 높여 주고 있었다. 교촌이라는 동네도 유서 깊은 곳이었다. 향교가 자리 잡고 있었고 향교를 지나면 경주의 성스러운 신령이 깃들었다는 계림이 그 울창한 수목의 기운을 떨쳐내고 있었다. 그 계림을 둘러싸고 신라의 왕성인 월성이 반월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그 반월성의 등을 타고 내려오면 경주 남쪽의 젖줄이라 불리는 남천이 넉넉한 수량(水量)으로 흘러 마을 서쪽으로 흘렀다. 그 남천을 건너가면 작은 도당산을 지나 경주의 영산(靈山)인 남산의 은근하고 자애로운 기운이 교촌과 정면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최부자댁의 터 역시 신라시대 태종무열왕의 딸로 원효대사를 만나 설총을 낳았다는 요석공주의 집이 있던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더구나 지척에는 신라 삼국통일의 원훈 김유신 장군이 살고 있던 찬란한 황금칠을 한 금입택 중 하나인 재매정택이 있었다. 무엇보다 향교가 교촌에 있었던 것은 교촌이라는 이름을 따게 된 이유이자 이곳이 경주 유림의 뜻과 행동강령을 모으는 곳이라는 상징성을 드러냈다. 경주의 내로라 하는 명문가 자제들이 전부 경주로 몰려들었을 것이며 그 향교의 운영 대부분을 지원하는 최부자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경주에서 행세깨나 하는 양반들이 모여 앉아 부윤을 윽박지르고 경주의 정치를 주무르던 사마소도 교촌에 있었다. 교촌과 경주부와는 경주 관아와도 걸어서 불과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적절한 거리에 있었다. 최부자댁을 둘러싼 교촌은 경주에서도 가장 부유한 마을로 알려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부자계 가솔들 대부분이 교촌을 벗어나 살지 않았기에 동네 전체가 대부분 최부잣집 친족들이 사는 넓고 큰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또 이들을 도와 경작과 살림을 맡고 있던 소작인들과 노비들의 집, 최부자댁에 이런저런 생활용품을 대고 있는 장인들이 반월성 주변과 인근 놋전 근처까지 뒤덮어 살면서 자연스럽게 경제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교촌은 이를테면 최부자댁 마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고 그 자체로 부자 동네였던 것이다. 1800년대는 물론 1900년대 초까지 경주의 중심은 교촌이었다. 물론 최준이 어린 시절에는 경주부가 존재했고 각종 부에 따른 행정기관들도 경주읍성을 테두리로 이 영역 안에 몰려 있었다. 읍성 대부분은 임진·정유의 왜란을 거치면서 거의 허물어졌지만 그 흔적은 군데군데 남아 성벽의 전체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 성안에는 많은 백성들도 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관과 가깝게 지낼 만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성안에 살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른바 ‘성내 사람들’이라는 명칭이 쓰였을 만큼 읍성 안은 경주의 행정중심지이자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을 때다. 그럼에도 경주에서 가장 먼저 전기와 전화가 들어온 곳은 바로 교촌이었다. 경주에서는 누구보다 영향력 있는 최부자댁이고 최부자댁 가솔들이 고루 퍼져 사는 곳이 교촌이었다. 어떤 향리이건, 심지어 성내 사람들조차도 교촌을 무시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고 모든 행정과 문화의 전파가 교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왔고 민간으로서는 경주에서 최초로 최부자댁에 전화가 신설되었던 것이다. 그런 시대 그만한 가문의 차세대 가주로 태어난 준이기에 그의 어깨에는 많은 권한과 의무들이 걸려 있었다. 집안뿐 아니라 경주 사람 대부분이 준을 지켜보고 있었고 당대의 권문세가들이 자연스럽게 준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린 준을 향해 굉음을 쏟으며 달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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