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세계의 대세와 ~ ~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후략)”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를 통해 일본 히로이토(裕仁) 일왕(日王)의 항복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일왕의 목소리는 여느 방송 때와 달리 ‘심각한 잡음을 섞어’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미·영·중·소 등 4개국에 항복을 선언하는 것임에는 분명했다.
항복선언은 다시 말해 대한의 해방, 광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경술국치 이후 만 35년, 을사늑약 이후 40년의 세월은 약관의 젊은 문파 선생을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버지와 함께 북향사배하며 나라를 되찾겠다는 다짐을 했던 젊은 청년이 환갑 넘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해방을 맞은 경주는 우리나라 여느 도시와 같이 태극기의 물결로 넘쳐났다.
어디로 도망간단 말이고, 남의 눈에 피눈물이라도 흘리게 했더나?
그러나 교촌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최부자댁 권속이라 정국 돌아가는 것쯤은 라디오를 통해 알고 있었던 일이었고, 해방은 태평양전쟁의 추이로 봐서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래도 해방을 확신하기까지는 이틀이 걸렸다고 한다. 워낙 오랜 기간의 일제강점기라 긴가민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이다. 최부자댁 주요 인사들이 일제히 문파 선생의 사랑채로 몰려들었다. 거대한 변화 속에서 향후 정국이 돌아가는 추이를 어떻게 볼 것이며 그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둘째 최윤 선생의 모습도 보였다. 이미 곳곳에서 친일파들이 성난 군민들의 공격을 받아 도주하거나 잡혀갔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으니 최윤 선생 역시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최윤 선생은 가장 먼저 문파 선생에게 어디 마땅한 곳으로 피신이라도 할까 물어보았다. 그에 대해 문파 선생은 잘라 말했다고 한다.
“니가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은 맞지만 그거 하면서 남의 눈에 피눈물 날 일은 안 했으이 가만 있어라. 그라고 도망을 간다고 쳐도 조선 천지가 다 친일파라 하면 쥐잡듯 잡아 죽일라 칼 낀데 도망을 가믄 어디로 갈 끼고. 어디를 간들 일가붙이 많은 여기처럼 안전하겐노?”
결국 최윤 선생은 도망갈 생각을 단념하고 집안에 머물렀다고 한다.
해방을 맞은 정국은 재빨리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활약은 그런 부분에서 누구보다 빠르고 눈부셨다. 일제 총독부는 한반도 퇴각을 위해 긴급히 특별한 전략을 세운 바 그것이 국내에서 독립운동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어 놓고 국민들 속에서 신뢰를 받아오던 여운형과 그를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건국동맹’에 행정권과 치안권을 넘기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의 즉시 석방,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간섭하지 말 것 등 몇 가지 조건을 전제로 총독부로부터 행정권과 치안권을 이양받고 즉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구성했다. 건준은 그때까지 국내에서 항일활동을 벌이고 있던 좌익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선인민위원회를 결성, 두 달 동안 전국적인 행정관리와 치안유지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곧 이은 미군정의 진입과 한반도에 반공산세력의 정부를 세우려던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중심으로 한 우익의 활동이 정국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건준은 유명무실해졌다. 더욱이 여운형이 우익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하고 인민위원회는 치안권과 행정권을 반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빨갱이’로 몰려 탄압받으면서 오히려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후 정국은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를 비롯한 상해임시정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한독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친미세력, 박헌영(1900~1956)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등의 할거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 3국의 외상 회의 결과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가결되고 한반도는 남북분단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여기에 처음 신탁통치에 한 목소리로 반대했던 북한의 김일성(1912-1994)이 돌연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북한이 분단되는 첫 빌미를 제공했다. 남한에서는 민족의 분단을 막으려는 김구 등을 중심으로 한 ‘선통일 후정부 수립’ 파와 반공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 파가 극심한 이념적 반목과 대립을 가속화 하기에 이른다.
이런 와중에 미군정은 1948년 5월 10일 남한에 한해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국회를 구성했다. 이때 김구의 한국독립당,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등의 중도파, 공산주의자들은 선거에 불참했다. 국회는 당해 7월 17일 대통령 중심제의 민주공화국 체제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을 선출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1868-1953)이었다.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수립을 선포했고 유엔 총회는 그해 12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여운형의 건준은 미군정 진출로 와해되고 이승만은 친일파를 등용, 반민특위를 방해한다.
이때부터 민족사적인 비극이 시작된다. 다소의 말썽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이 국권을 쥐게 되었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인해 실질적인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최대의 악수를 두게 된다. 바로 일제 강점기 친일파 행정조직과 경찰조직에 몸담았던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한 것이다. 해방 후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추고 쥐 죽은 듯이 살던 친일파들은 일거에 예전의 권좌에 복귀하게 되었고 언제 빼앗길지 몰랐던 재산들을 고스란히 수중에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그들은 독립운동까지 했다며 천인공노할 허울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쓸어버리기는커녕 오히려 친일파들을 비호하고 나섰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반민특위 해체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를 줄인 말이다. 반민족 행위란 다름 아닌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부역하거나 일본을 위해 현격한 공을 세우면서 반면에 조국과 동포를 억압한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이에 앞서 남조선과도 입법의원들이 친일잔재청산을 위해 1947년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법안이 자신들에게 온갖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친일경찰, 친일관료, 친일정치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그 인준을 거부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정부수립 후인 1948년 8월부터 제헌의회가 다시 입법을 제안하여 그해 10월 12일 마침내 그 구성을 완료하였다. 이어 반민특위는 세부적인 법률안을 정비하고 실질적인 활동 조직을 구성하여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1월 8일 최초로 박흥식을 체포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친일 수사관인 노덕술, 최난수, 홍택희 같은 악질 친일파들이 암암리에 반민특위 주요 인물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등 이승만 정권의 훼방이 자행되었다. 이승만은 급기야 자신을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을 동원하여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였으나 부결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당시 대법원장 김병로는 이러한 이승만에게 반민특위는 불법조직이 아니니 정부가 협조해야 한다며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승만은 이런 민의와 헌법의지를 무시하고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한 사건을 조작한다.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대표적인 반민특위 와해 공작이었다. 국회프락치 사건은 1949년 3월,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적인 소장파 국회의원 13명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체포한 사건으로, 이로써 반민특위 활동이 상당히 위축되고 말았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같은 해 6월 반민특위가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한 경력이 있는 현직 경찰간부를 조사하자 중부경찰서 소속 경찰 80여명이 특위 사무실에 불법적으로 난입하여 특위 직원을 폭행·연행하고 친일파들에 대한 조사서류를 압류한 사건이다. 이승만이 지시한 사건들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승만은 한편으로는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을 회유해 정부 요직을 제안하며 반민특위 활동의 자제를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충복이던, 역시 친일 판사 출신의 내무부 차관, 장경근을 시켜 친일 경찰을 동원, 반민특위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특위 위원들을 거꾸로 체포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조직적인 방해공작 끝에 결국 1949년 8월 22일 국회에서 반민특위해체안이 통과되고 반민특위는 그 고단했던 1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만다. 처음부터 정권의 방해로 인해 마음껏 조사활동을 벌일 수 없다 보니 이 사이 조사된 반민족 행위는 고작 682건, 기소 221건에 불과했다. 이 과정에서 노덕술, 김태식 등 친일 경찰과 최남선, 이광수 등이 체포·구속되었지만 이들 반역자들의 재판 중 판결이 확정된 것은 38건에 그쳤다. 그나마 형량도 사형 1건, 징역 12건, 공민권 정지 18건 등으로 가벼운 정도였는데 사형집행은 끝내 이루어지 않았고 징역 역시 6·25전쟁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
이것이 일제치하 35년간 친일했던 자들에 대한 단죄였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런 결과는 3년 정도 나치 치하에 있었던 프랑스가 해방 후 나치에 부역했다는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 사람이 15만8000여명, 재판과 즉결처분으로 처형한 사람이 무려 1만여명이었던 것과 완전히 대조적이다.
이승만을 영웅시한 영화 건국전쟁은 다른 것을 다 떠나 이 부분을 완전히 무시한 철저한 반민족 영화였던 것이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국내나 상해임시정부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했던 것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였다. 더구나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가 탄핵까지 당한 인물이 이승만 아닌가? 이런 그를 무턱대고 추종해서는 안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