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연혁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대구대학 설립인가가 나온다. 1947년 9월 22일자다. 다음으로 청구대학설립인가가 나온다. 1950년 4월 10일이다. 그리고 나서 1967년 12월 22일, 대구대학 설립인가로부터 정확하게 20년 3개월이 지나서 영남대학설립 인가가 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작은 초등학교의 역사, 심지어는 개인의 이력서에도 20년 동안 아무런 언급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괄목상대할 결과나 엄청난 성장의 사실이 기록될 수 없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대학에 관한 일이라면 그 대학이 문을 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라도 되어 있어야 하는 게 원칙이다.
더구나 영남대학이라면 경상북도 일원에서는 국립대학인 경북대학교보다 더 오래된 대학이고 서울의 몇몇 대학을 제외하면 국내의 어떤 대학보다 전통 있는 대학교인데 20년 이상 단 한 줄의 구체적인 발전상도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하다.
대구대학 설립, 청구대학 설립 두 줄만 달랑... 20년을 뛰어 넘어 영남대학으로 갑툭튀!!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영남대학의 연혁 가장 밑자리, 처음 시작되는 곳에 대구대학이란 표시가 있어서 이 대학의 시작이 대구대학으로 말미암은 것임이 드러나 있다. 그것이 다행이라고 한 것은 영남대학이 박정희의 야욕으로 인해 청구대학과 통폐합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그 아버지의 뒤를 이은 또 다른 권력자가 된 박근혜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영남대학의 바탕이 된 두 대학의 존재 여부조차 영구히 사라질 뻔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사실마저 표시되지 않았다면 영남대학은 80년의 전통을 주장할 수도 없이 60년도 채 되지 않은 학교로 전락할 수도 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두 대학의 설립인가 햇수를 넣었을지도 모른다. 대구대학창립부터 영남대학의 최근까지 최부자댁 일가가 겪은 엄청난 일들은 그래서 더 뚜렷이 기록되어야 한다.
그 사건들은 지금부터 하나씩 찬찬히 설명하겠거니와 미리 말해 두지만 이러한 사실을 대구대학설립부터 박정희에게 대학이 넘어가기까지의 전 과정을 철저히 지켜보고 기억한 최염 선생의 회고와 그 당시의 다양한 언론보도를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참고로 이 기막힌 사연을 나에게 세밀히 기술해 주신 최염 선생은 조금이라도 개인적인 욕심을 부린다거나 단순히 시비를 가리려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현재 영남대학재단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문제를 독자들과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인식시킴으로써 영남대학이라는 배움의 장이 권력을 가진 특정인의 사유물이 되는 것을 막고 궁극적으로는 더 훌륭한 대학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또 전 재산을 희사하여 이 대학의 전신이자 터전이라 할 수 있는, 대구대학을 창립한 문파 선생의 숭고한 뜻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 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체계적인 목록이 필요하다. 해서 대구대학이 처음 설립되기까지의 과정을 먼저 설명하고 다음으로 대구대학이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넘어가게 된 과정, 삼성이 박정희에게 영남대학을 바치게 된 과정, 그 뒤 전두환 군사정권이 박근혜에게 다시 영남대학을 넘겨주었고 박근혜가 문파 선생이 세운 대구대학을 사유화하여 전횡한 과정을 순차적으로 이야기해 나가고자 한다.
문파의 꿈, “대학 세우면 저 수조를 가장 좋은 위치에 놓아야지...”
문파선생이 대학을 세우고자 결심한 것은 정확하게 해방이 된 직후였다. 백산무역을 내세워 독립자금으로 전재산을 바친 문파선생은 식산은행의 대부(貸付)로 조달한 거액을 고의로 부도내고 이를 독립자금으로 조달한다. 이후 선생은 자신 소유의 토지와 가옥은 몰론 집안의 중요한 살림살이까지 식산은행에 채권압류 되었다.
일제가 문파 선생을 회유하기 위해 신탁관리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체면을 유지할 만큼 생활비를 지불한 것 역시 밝힌 바 있다. 그렇게 15년을 신탁관리 당하면서 선생은 부자라기보다는 일제에 목줄을 잡힌 채 언제 파산할지 모르는 감시망을 온몸에 걸고 살아야 했다.
그러다 광복이 되었다. 광복, ‘빛이 돌아 왔다’는 말은 주권 회복으로 쓰이듯 문파 선생에게도 광복은 ‘이전상태로의 복귀’를 뜻했다. 문파 선생의 재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차압되었던 재산은 일제라는 압제가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원래 소유주인 선생의 것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문파 선생이 일제에 의해 압류당한 재산 규모는 모두 9000석에 해당하는 재산인데 돈으로 환산하면 130만엔 정도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중에서 3000석은 경남은행에 진 빚을 청산하는 데 쓰였다. 나머지 6000석 규모의 재산은 조선식산은행에 차압되어 있었는데 조선식산은행은 이 압류를 해지하고 신탁관리해온 것이다. 조선식산은행은 신탁관리를 통해 한편으로는 이자를 받아 가고 한편으로는 원금도 갚아 나가도록 조치했는데 이렇게 해서 해방 직전에 신탁관리로 남은 것이 대체로 3~4000석 규모였다. 결국 해방이 되면서 사전에 갚아 나갔던 2~3000석 규모의 재산에 이 3~4000석까지 문파 선생에게 돌아왔으니 선생은 해방과 함께 원래만큼은 아니지만 6~7000석 부자로 돌아온 셈이었다. 만약에 이 돈을 그냥 유지하고 살았다면 손자인 최염 선생을 비롯한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아무런 걱정 없이 부자로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생은 그 막대한 재산을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바친 재산이다. 이제 그 나라를 도로 찾았으니 다시 돌아온 재산은 어떤 식으로건 다시 더 나은 나라를 위해 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최염 선생이 전한 할아버지 문파 선생의 일상적인 진심이었다. 남들이 보면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문파 선생의 마음은 그것이 진심이었다.
더구나 선생에게는 일제강점기부터 생각해온 원대한 계획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경상도 일원에 대학다운 대학을 하나 만드는 것이었다.
문파 선생이 대학을 세우겠다고 생각한 것은 선생 자신의 아쉬운 경험과 특별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찍이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에 들어가게 된 것은 신문물을 제때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새로운 학문을 빨리 받아들여 나라를 일신하지 못한 탓이라 여긴 것이 선생의 생각이었다. 일본이 일찍부터 신학문과 신문물을 받아들였고 사상적으로도 일찍부터 개선하여 메이지(明治) 유신을 일으킨 반면 우리나라는 쇄국의 자물쇠를 채운 채 우물 안 개구리로 산 덕분에 나라를 빼앗겼다고 믿은 것이다. 게다가 선생은 신학문이 얼마나 많은 인재를 키우고 그들이 어떻게 국가를 끌어나가는지 똑똑히 목격하였기에 교육의 중요성, 특히 고등교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특히 당시 경상도에는 여러 고등학교에서 유망한 인재들이 양산되는 반면 그들이 마음 놓고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대구에 대구사범과 대구의학전문, 대구농림학교 정도가 단과대학 혹은 전문대학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고 제대로 된 종합대학은 아예 없었다.
선생이 대학을 세우겠다 생각하신 것은 따지고 보면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 선생이 보성전문을 인수하라고 제안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만약 백산무역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선생은 틀림없이 보성전문을 인수하고 교육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것은 뒤에 인촌 김성수 선생을 도와 고려대학 설립 이사로 참여한 것을 봐도 알 수 있고 특히 인촌이 경주 집을 드나들 때마다 사랑채 앞에 놓인 석재수조와 7000여 권의 고서(古書)를 박물관에 기증하라고 하는 것을 끝내 기부하지 않은 것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각별히 아낀 거고..., 그거 때문에 일부러 반월성에 있던 그 인왕서당을 샀다 아이가…. 언젠가 대학을 세우면 그거를 제일 좋은 건물 앞에 가져다 놓을라 캤지러”
역시 최염 선생이 기억하는 문파 선생의 말씀이다.
후일담 하나, 유구를 기념품으로 기증하려 했다는 선생의 뜻과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선생은 전 가솔의 재산과 그들이 사는 집터, 선산까지 몽땅 대구대학 설립에 희사하면서도 끝내 그 석재수조는 대학에 보내지 않고 늘 사랑채 앞에 두고 감상하곤 했다. 어쩌면 재산 전부를 다 기증했던 만큼 그 유구만큼은 흔들리지 않는 당신의 집념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삼으셨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