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룡암 경내 삼층석탑은 바람이 매섭다. 12월 하순, 골짜기를 내려온 바람은 한기가 세서 뼛속까지 파고든다. ‘쨍~’하게 시리다는 말을 실감한다. 안양교를 건너니 하늘에 걸린 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내린다. 여긴 곧 봄이 올 것만 같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옆
피안에 이르는 길 안양교(安養橋) 바람이 차다. 찬만큼 시리다. 시린 만큼 눈부시다. 탑곡마을에서 골짜기로 발을 들이면 이내 고적한 풍경에 홀리게 된다. 절집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는 하나, 매혹적인 풍경에 사로잡혀 절집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탑곡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엔
‘흥(興)’ ‘왕(王) 자 새겨진 기와 바람이 차다. 찬 기운도 반가운 가을이다. 숨이 막히도록 무더웠던 여름, 우리는 얼마나 힘들었던가. 여름을 잊고 이제 차갑디 차가운 계절을 반겨 맞아야 하리. 거리마다 잎들이 모여있다. 제 근원이 어디인지 굳이 생각하지 않으며
남산 용장골을 오르며 경주 남산엔 수많은 골짜기가 있다. 어느 곳으로 오르든 신라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중 가장 큰 골짜기는 용장골로 길이가 3㎞에 달한다. 신라시대 용장사(茸長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용장골’로 불리며, 아직도 탑이 남아있어 ‘탑상골’로 불리운다. 남산은 해발 500m도 안 되는 산이지만 발길 닿고 눈길 머무는 곳마다 석불이요, 석탑이요, 절터다. 이 골짜기만 해도 용장사 터 외에 20여 개의 절터가 있다고 알려졌다. 불교가 왕성했던 시절엔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끊일 날 없었을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서라벌을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이라고 묘사했다. ‘절과 절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졌고, 탑들은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섰다’ 했을 만큼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이었다. 용장사 가는 길 설잠교(2000년대에 설치한 용장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김시습의 법명 ‘설잠’을 따서 붙인 이름)를 지난다. 길이 무척 가파르다. 지금까지 물소리, 바람 소리 벗하며 한가롭게 자연을 음미하며 걸어왔다면 여기서부터는 힘겨운 고행이 시작된다. 빼곡히 숲을 이룬 대나무 군락 사이로 몸을 숙여야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길이 나 있다.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미묘한 느낌이 든다. 대숲이 보이면 유난히 반갑다. 절터나 집터같이 인간이 기대 산 흔적이 가까이 있다는 표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숲을 빠져나와 가파른 길을 오르니 그리 넓지 않은 평지가 펼쳐지고 이내 시야가 탁 트인다. 가쁜 숨을 고르며 풍광을 눈에 담는다. 가슴마저 ‘뻥’ 뚫린다. 용장사 터는 금오봉이 남쪽으로 뻗어 내린 봉우리에 있다. 한 칸 법당만 겨우 존재했을 만큼 좁은 터지만, 풍광만큼은 고고하고 장엄하다. 욕심을 버리고 이상적인 삶을 좇는 사람이라면 지나치지 못할 풍광이다. 용장사와 매월당 김시습 ‘갑술삼월일용장사(甲戌三月日 茸長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용장사는 신라 유가종의 종조 대현스님이 기거했고, 그 후 어느 시절에 무슨 연유로 폐사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폐사된 후엔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숨어 살면서 《금오신화》를 집필하기도 했다. 조선 초, 단종이 폐위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김시습은 대성통곡하며 읽던 책을 모두 불살랐다. 단종의 복위를 꿈꾸던 신하들마저 참형을 당하자 벼슬의 꿈을 끊고 승려가 되었다.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수년간 전국의 명산대찰을 유유자적하며 떠돌다가 용장골에 들어와 은둔했다. 김시습이 용장골에 있는 것을 안 세조가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했으나, 김시습은 건너편 골짜기로 몸을 피했다. 세상에 인걸은 많으나 내 사람으로 곁에 두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위 벼랑 아래, 단출한 암자 하나 짓고 밤낮으로 법등 밝히고 살았을 김시습을 생각한다. 바람이 문 두드리면 ‘뉘시오? 그저 시나 한 수 읊고 가시오’ 할 것만 같은 키 작은 탁발승. 김시습은 골짜기마다 미친 척 희희낙락하다 결국엔 산기슭 꽃 한 송이, 바람 한 점에도 슬퍼하며 북향화를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꺼억꺼억’ 울었을 탁발승은 세월 따라가고, 그가 홀로 서성였을 벼랑엔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 서서 그를 대신한다. 그가 가고 흐른 세월을 생각하니 저 멀리 풍요로운 들판도 그새 많이 변했겠다 싶다.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용장사 터를 뒤로하고 조금만 더 오르니 높은 대좌에 머리 없는 부처가 앉았다. 보물 제187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이다. 자연 바위에 동그란 좌대를 3단으로 쌓아 꼭대기에 앉아 서쪽을 향하고 있다. 부처의 자태가 정갈하다. 가볍게 흘러내린 가사의 주름이 섬세하고, 조여 맨 옷고름의 맵시가 뚜렷하여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훌훌 풀어질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 시절, 용장사 주지 대현이 매일 탑 주변을 돌며 염불을 하자, 석상의 얼굴도 함께 돌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니 이 머리 없는 석불을 두고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미륵불로 보기도 한다. 간혹 석불의 머리가 없는 것을 두고 일제강점기 때, 민족말살정책에 의한 훼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자연적인 상실과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숭유억불정책에 의한 훼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용장사 터 석조여래상은 뒷목 쪽에 내리친 흔적이 있다하니 자연 상실보다는, 어떠한 이유가 됐든 훼손에 가깝다는 견해가 크다. 얼굴이 없으면 어떤가. 얼굴이 있어야만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따뜻하고 환하게 웃고 있어도, 속은 어둡고 냉골인 사람이 있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부처의 표정도 있는 것이다. 내가 웃으면 부처도 웃고, 내가 슬프면 부처도 슬프다.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석불 뒤로 병풍을 세운 듯 암벽이 펼쳐져 있다. 보물 제913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다. 약간의 돋을새김으로 있는 둥 마는 둥 앉아있는 여래좌상은 고고한 느낌을 풍긴다. 옷자락엔 얇고 잘게 주름이 잡혔다. 가사의 흘러내림이 물결처럼 촘촘하고, 굴곡진 선이 여울지듯 자연스러워 가벼운 느낌이다. 마애여래불 바위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三層石塔 大正 十一年(삼층석탑 대정 11년), 三層佛塔 大正 十二年(삼층불탑 대정 12년), 小石毾 殘部 大正 十三年 春 再建(소석탑잔부 대정 13년 춘 재건)’ 삼층석탑은 대정 11년(1922년), 삼층불탑은 대정 12년(1923년) 도굴로 무너진 상태였지만 부재를 모아 대정 13년(1924년) 봄에 새로 쌓았다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우리 문화재 수탈이 심했던 터라 조선총독부의 복원 명문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용장사곡 삼층석탑 마애여래불 오른쪽을 돌아 가파른 암벽 사이를 오르면 눈앞에 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이 나타난다. 석탑은 용장골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벼랑에 서있다. 해발 400m의 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쌓아 올린 석탑은, 늠비봉 오층석탑과 함께 산 전체가 탑이고, 탑이 산이 된 셈이다. 몇 번의 도굴로 사리함은 사라졌고, 벼랑 아래 무너져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복원해 세웠다.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탑은 건강하고 잘생긴 청년 같다. 삼단의 지붕돌 모서리는 살짝살짝 치솟아 날아갈 듯하다. 비록 사람의 손을 빌려 섰을지언정, 그 모양새나 위치가 자연과 더불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앞으로는 고위산과 용장골, 은적골의 능선이 힘차게 흘러가고, 서쪽으로는 경주의 너른 들판이 훤히 내다보인다. 탁 트인 시야 속에 유유히 흘러가는 형산강과 평화로운 들판이 걸림 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다보면 산봉우리나 골짜기나 지척인 것을. 탑은 저 들판이 변하고 변하는 것을 묵묵히 보아왔을 것이다. 다시 용장사 터로 내려와 자리를 튼다. 이 깊은 골짜기에 법등을 밝혔던 용장사는 어디로 가고 까마득한 터만 남아 나를 불렀을까. 이쯤에 법당이 있었을 테고, 부처는 또 이쯤에 놓였을 것이다. 올려다보면 머리 없는 석불이나 석탑이 모두 한 능선 아래로 나란하고, 여기서 기도를 하면 석불도 석탑도 다 들었을 것이다. 용장사는 가고 터만 남았지만, 탑과 부처는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며, 그저 오가는 이들이 무탈하기를 살피고 있다. 내려오는 동안 대숲 사이사이에서 많은 기와 조각을 보았다. 실처럼 시작된 계곡을 따라 무수히 많은 기와가 옛 흔적을 따라 아래쪽으로 이어졌다. 설잠교를 건너 바위에 앉아 저무는 볕을 쬐었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임천사 터를 찾아서 북천(北川, 알천) 천변에 서있다. 황룡동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한 북천 물줄기는 덕동호와 보문관광단지의 보문호를 지나 시내를 적시고 황성동 황성대교 언저리에서 서천인 형산강으로 가 섞인다. 옛날엔 홍수가 잦았던 북천(알천)이지만 이제는 점점 말라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 잦다. 1975년 북천 상류에 경주의 식수원인 덕동호가 건설되면서 더욱 말랐다. 지금은 하천 산책길과 체육시설을 갖추어 말끔한 모습이지만, 한때는 맑은 물비린내와 물안개가 일고 무성한 물풀 사이 새들이 둥지를 틀거나 물고기들이 산란하며 종(種)을 잇는 자연 그대로의 하천이었다. 북천 천변을 찾은 건 통일신라 때의 사찰 임천사 터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호 방향으로 가다 보면 동천동 헌덕왕릉(憲德王陵, 사적 제29호) 남쪽 북천(알천) 천변 어딘가에 임천사 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말만 들었을 뿐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앱이나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 옛 터에 무엇이 남아있을까마는 완전한 소멸을 이루어 아무것도 남겨진 것 없는 터에 무작정 서 보고 싶었다. 세상 어디 영원한 것이 있던가. 생겨난 때가 있으면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가 있을 뿐 소멸하는 때가 있지 않은가. 천재지변 유독 많았던 성덕대왕 대와 임천사 성덕대왕(聖德大王, 691~737, 신라 제33대 왕) 때 유독 천재지변이 잦았다. 703년(성덕왕 2) 7월, 영묘사에 불이 난 것을 시작으로 같은 달 서라벌에 홍수가 나 많은 백성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태 뒤 705년(성덕왕 4) 5월, 가뭄이 들었다. 왕은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민심을 안정시켰다. 706년(성덕왕 5)에는 냉해가 닥쳐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아 흉년이 졌다. 707년(성덕왕 6) 정월에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져 굶어 죽는 백성이 많았다. 굶주림에 시달리며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는 백성이 늘었다. 708년(성덕왕 7) 지진이 일었다. 709년(성덕왕 8) 또다시 심한 가뭄으로 농사가 되지 않았다. 714년(성덕왕 13) 심한 가뭄과 전염병으로 많은 백성이 죽었다. 715년(성덕왕 14), 또다시 가뭄이 들었다. 정월부터 6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임천사는 신라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715년 성덕대왕 때 가뭄이 들자 임천사에서 비가 내리도록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 성덕왕 본기 14년(715년) 十四年六月 大旱王召河西州龍鳴嶽居士理曉 祈雨於林泉寺地上則雨浹旬 십사년유월 대한왕소하서주용명악거사이효 기우어림천사지상칙우협순 정월부터 6월까지 크게 가물었다. 왕이 하서주(河西州, 지금의 강릉) 용명악(龍鳴嶽)에 사는 음양 풍수가인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연못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니 비가 열흘 동안 끊이지 않고 내렸다. 이듬해 6월에도 가뭄이 들어 같은 방법으로 제를 지내니 비가 내렸다고 한다. 오랜 가뭄에 천문을 읽은 이효의 영험함인지, 임천사의 영험함인지는 모르나 기도가 통해 비가 내렸으니 얼마나 복된 일인가. 북천 범람하면 물에 잠기던 헌덕왕릉 헌덕왕릉의 위치는 천림사(泉林寺) 북쪽으로,《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기록된 장지와 일치한다. 조선시대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능묘조’에도 헌덕왕릉이 마을의 동쪽인 천림리(泉林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왕릉 묘제를 연구한 이근직에 따르면 헌덕왕릉은 역사의 기록과 실제 위치가 동일한 8기(선덕여왕릉, 태종무열왕릉, 문무대왕릉(대왕암), 성덕왕릉, 원성왕릉(괘릉), 흥덕왕릉, 경순왕릉) 중 하나라고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 헌덕왕 본기 18년 (826) 十八年十月 王薨諡日憲德葬于泉林寺北(왕훙시일헌덕장우천림사북) 헌덕왕 18년(826) 겨울 10월, 왕이 죽었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유사] 왕력 陵在泉林村北(능재천림촌북) 능은 천림촌 북쪽에 있다. 《삼국사기》는 기우제를 지낸 곳을 임천사로 기록했고, 헌덕왕(憲德王, 신라 제41대 왕, 809~826)의 죽음과 능 조성과 관련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일하게 천림(泉林)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임천사(林泉寺)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천림사(泉林寺)는 한자의 나열만 다를 뿐, 모두 헌덕왕릉의 남쪽 천변에 있다 하므로 같은 곳이다. 헌덕왕릉은 깊은 소나무 숲에 쌓여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울울창창한 소나무 사이로 들면 나무와 나무 사이 유연한 곡선의 봉분이 보인다. 능 주변은 풀이 무성하고 조금만 더 들어가면 마을과 능을 잇는 길이 나타나는데 근래 비가 오지 않았으나 물이 빠지지 않아 질척거린다. 옛날부터 비가 많이 오면 북천은 자주 범람했다. 북천 천변 평지에 자리 잡은 헌덕왕릉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잦았다. 능을 감싸고 있던 석물도 쓸려갔다. 능 둘레 버팀돌인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중 쥐, 소, 범, 토끼, 돼지 상 5개만 남았을 뿐 나머지는 면석만 남았다. 능 안내문에 의하면 조선 영조 18년(1742)에 북천이 범람하면서 능의 십이지신상 중 일부가 유실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능을 지키던 서역인 무인상은 현재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있다. 일화에 의하면 홍수 때 떠내려간 것이라 한다. 원성왕과 북천 지금은 수량이 많지 않지만, 알천은 관리하기 까다로운 강이었다. 북천은 옛날부터 범람이 잦았다. 때로는 누군가의 운명을 가르기도 했다. 원성왕(元聖王, 신라 제38대 왕)이 즉위할 때의 일이다.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했다. 북천 건너에 살던 김주원을 대궐로 맞아들이려 할 때, 북천 물이 갑자기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김경신(원성왕)이 먼저 월성 대궐로 들어가 즉위했다. 김주원을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새로 등극한 임금에게 엎드려 절했다.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은 지금의 강릉 지역인 명주로 가 유력한 호족이 되었다. 월성에서 분황사를 지나 북천 건너 능 남쪽 제방에 절터가 있었다. 말끔히 정비된 북천 천변에서 임천사 터의 흔적은 이제 찾을 수 없다. 715년 임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전에 창건한 것이리라.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나 절터에서 나온 석조물들을 수습해 북천가에 모아두었었다. 그러나 1991년 태풍으로 많은 비가 쏟아졌고 북천 물이 불어 잠겼다가 일부가 유실되었다. 이후 경주박물관 뒤뜰 야외 전시장으로 옮겼다. 알천제방수개기 헌덕왕릉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금학산 끝자락 바위에 경주 알천제방수개기(慶州 閼川堤防修改記)가 있다. 움푹 꺼진 곳에 자그마하게 자리 잡은 바위라 지나치기 쉽다. 잦은 홍수가 발생하자 1707년(숙종 33) 무너진 제방을 보수했다. 당시 부역을 지휘한 사람들의 이름과 보수한 내용을 ㄷ자형 바위에 새긴 비문이다.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516호로 지정되었다. 북천을 벗어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한다. 뒤뜰 야외전시실에 수많은 석물이 연대별로 전시돼 있다. 특별히 임천사 터 석재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돌고 돌기를 반복하다 지칠 무렵 자그마한 안내판이 보였다. 임천사 터에서 출토된 석조 유물은 가을볕 아래 고요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사람들의 소란도 세상의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익어가는 가을의 정취 속에 고요만 맴돈다. 석재 위로 노랗게 물든 낙엽이 하나, 둘 떨어져 잠을 청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경주 금강산을 아시나요? 경주에는 다섯 개의 큰 산이 있다. 신라는 왕경 내 다섯 개의 산을 정해 신성시했다. 왕경오악(王京五岳)은 북악 금강산과 표암봉 일원, 동악 토함산, 서악 선도산, 남악 남산, 중악 낭산이다. 북한 강원도와 대한민국 강원도에 걸쳐 있는 금강산이 유명해서일까. 경주 금강산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177m 높이의 야트막한 경주 금강산은 북한과 강원도 일대의 금강산보다 훨씬 이전부터 금강산(金剛山)으로 불렸다. 고려 개국 이전에는 경주의 산만 금강산이었고, 강원도의 산은 풍악산·개골산 등으로 불렸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금강산은 모두 경주의 금강산을 일컫는다. 신라시대 금강산은 특별한 산이었다. 신라의 수도 계림에 있기도 했거니와 화백회의가 열리는 장소 중 한 곳이기도 했다. 경주 이씨의 시조 알평(謁平)이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 당도한 표암봉(瓢嵒峰)과 신라 제4대 왕인 석탈해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디 이뿐이랴. 법흥왕 시절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려는 왕에 맞서 귀족들은 기존의 토착 신앙을 고수하려 했다. 이때 법흥왕의 측근이자 사인(舍人)의 직책을 맡은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는 불교 국가로 탈바꿈했고 급속도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통일신라에 접어들면서 이차돈을 성자로 높이 평가하며 무덤 인근에 사당을 지어 기렸다. 이차돈의 무덤이 있던 곳이 바로 금강산이다. 금강산에는 신라시대 왕이 자주 찾았다던 백률사와 기도의 영험한 소문으로 지나는 사람들이 손을 모은다는 굴불사 터가 있다. 바위 사방에 부처 새긴 굴불사 터 금강산 백률사 초입에 특별한 부처가 있다. 사방에 각기 다른 부처를 새긴 석조사면불상이다. 세상 어디든 자비로운 마음으로 굽어살피겠다는 의미이리라. 남산의 칠불암도 안강 금곡사 터의 사방불도 처음 대할 땐 적잖이 놀랐다. 부처는 산 중 홀로 있거나 근엄하고 위엄 서린 모습으로 법당 위 협시불과 함께 있는 것만 봤었다. 노지 바위 사방불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다. 보물 제121호로 지정된 굴불사 터 석조사면불상(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은 통일신라 작품이다. 3m쯤 되는 높이의 바위면에 입체·양각·음각의 다양한 기법으로 입상·좌상 등을 가리지 않고 조각했다. 동쪽에는 약사여래 좌상이, 서쪽엔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삼존불, 남쪽엔 입불상 2구를 양각했으며, 북쪽엔 양각의 입상 보살 1구와 음각의 입불상 2구를 새겼다. 부처들은 모두 풍만한 체구의 건강한 모습이다. 나는 사면불 중 특히 동쪽 약사여래 좌상을 좋아한다. 부처의 모습이 이질적이지 않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쪽 바위 면은 앞쪽으로 살짝 굴곡이 져 부처의 몸도 앞으로 살짝 굴곡져 있다. 마치 세상을 보듬어 안으려는 듯 아늑하다. 부처 뒤에 새겨진 불꽃 문양의 광배도 섬세해 영혼의 절대적인 신(神)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사면불을 돌며 손을 모은다. 동쪽 약사여래불 앞에서는 더욱 마음을 정갈히 하며 약사불의 왼손을 어루만지게 된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명예를 얻고 재산이 많아도 몸이 성치 않으면 허사다. 인간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건 건강을 잃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몸뚱어리가 가장 귀하다는 것은 건강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굴불사는 누가 창건했나 금강산 백률사 초입에 있었다던 굴불사는 『삼국유사』에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굴불사는 흔적 없이 사라졌고 자연 암석에 새긴 사방불(四方佛)만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조(四佛山掘佛山萬佛山條) 편에는 굴불사와 경덕왕의 일화 전하고 있다. ‘경덕왕이 금강산 자락에 있는 백률사로 행차할 때, 산 아래에 이르니 땅속에서 불경 외는 소리가 들렸다. 신하들을 시켜 그곳을 파 보게 하였더니, 네 면에 사방불이 새겨진 큰 돌이 나왔다. 왕은 사면불이 나온 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掘佛寺)라 하였다. 지금은 사찰 이름이 잘 못 전해져 굴석사(掘石寺)라 한다’. 이 내용으로 보아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 굴불사를 굴석사라 불렀던 것 같다. 금강산 백률사와 경덕왕 당시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유사』 탑상 ‘백률사’ 편을 보면 계림의 북악 금강령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백률사는 언제, 누구에 의해, 왜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영험하다고 소문난 대비상(大悲像)이 하나 있다고 전한다. 전설에는 대비상(금동약사여래입상, 국보 제28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이 일찍이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갈 때 밟은 돌 위의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 693년(효소왕 2년) 신라의 낭도 부례랑과 안상이 낭도 1000여명을 이끌고 금란(강원도 통천)으로 놀이를 나갔다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돌아오지 못했다. 부례랑의 아비가 백률사 대비상 앞에서 여러 날 기도했더니 형탁 위에 거문고와 피리 두 가지 보물이 나타났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존상 뒤에 와 있었다고 전한다. 부례랑이 오랑캐의 부잣집 목동이 되어 소를 치고 있을 때, 갑자기 단정한 승려가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 위로하며 따라오게 했다.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안상을 만났다. 승려가 가지고 있던 피리를 두 쪽으로 갈라 하나씩 주고, 자신은 거문고를 타고 바다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라로 돌아온 부례랑이 피리와 거문고를 가지고 궁궐로 와 왕께 아뢰니 크게 기뻐하며 대비상이 있는 백률사에 큰 재물을 헌납하여 부처의 은덕에 보답했다. 이 밖에도 대비상의 영험함이 많았다고 한다. 경덕왕의 백률사 행차는 대비상이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에게는 딸만 있을 뿐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자식을 보지 못해 첫 왕비는 폐하여 사량부인(또는 삼모부인)으로 봉한 후 의충 각간의 딸을 후비로 맞았다. 시호가 경수태후(만월부인)이다. 아들에 집착한 경덕왕은 표훈대덕을 불러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아들을 점지해 줄 것을 청해줄 것을 명했다. 천제를 만나고 돌아온 표훈이 왕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천제의 말을 고하자, 이번엔 딸을 아들로 바꿔줄 것을 청하라 명했다. 천제는 딸을 아들로 바꾸는 일은 가능하나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했고, 천제의 말에 왕은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는 것을 택하겠노라고 했다. 이후 왕후가 태자를 낳아 즉위하니 이가 혜공대왕이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던 경덕왕은 역사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는다. 불국사와 석굴암 건축, 월정교 설치, 성덕대왕신종 제조 등 불교문화를 꽃피우며 통일신라 전성기를 만들었던 업적 또한 칭송받을만하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집착은 신라를 위태롭게 만든 구실을 했다. 경덕왕의 아들 건운(혜공대왕, 신라 제36대 왕)은 겨우 8살에 즉위해 만월부인의 섭정을 거쳤지만 24살에 시해를 당하게 된다. 이후 신라는 불안정한 왕권전쟁을 겪으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금강산 자락을 걸어 돌아와 보니 부처는 여전히 사방을 굽어살핀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부처는 한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중생을 바라본다. 때로는 그런 부처 앞에 고개 들지 못한다. 부처는 그런 존재다. 중생의 죄를 묻지 않아도, 꾸짖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뉘우치게 하는 존재다. 여느 사찰이든 법당을 들어설 때 법도를 따라야 한다. 기도자는 부처가 바로 보이는 정문을 이용하지 말고 양쪽 측면의 문을 이용하라는 것은, 인간의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는 부처의 자비이리라. 영험하다는 백률사의 대비상은 금강산을 떠나 경주 박물관에 있다. 기도발이 좋다는 굴불사 터 한편을 바라보며 마음을 모아 눈을 감는다. 천년을 돌고 돈 한 줄 바람이 스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우연히 들어선 길에서 만난 절터 9월인데도 폭염은 쉽게 누그러들지 않는다. 햇빛이 강열한 한낮에는 거리에 나갈 수조차 없을 만큼 뜨겁다. 해가 저문 밤에도 달아오른 도시는 쉽게 잠들 수 없다. 더워도 너무 덥다. 이럴 땐 이른 새벽을 택해 풀밭으로 나간다. 동이 트지 않은 풀밭은 그런대로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은 생동하듯 기지개를 켠다. 잎사귀마다 크고 작은 이슬을 매단 모습은 맑고 깨끗하여 순수성을 내뿜는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미치기 전 먼저 풀밭에 닿는 것을 즐기는 건 중독이다. 동이 터 오기라도 할 때면 풀밭의 이슬들은 빛을 머금어 더욱 싱그러워진다. 빛나는 이슬을 만날 때면 신(神)이 풀잎에 뿌려놓은 가장 맑고 신성한 선물이라 믿는다. 이른 새벽 경주 어느 풀밭을 잠행하다 동이 트는 걸 알았다. 영롱하게 빛나던 이슬이 사라진다. 빛에 타 들어간 것인지, 풀숲에 몸을 숨긴 것인지 모르나 이슬은 빛을 싫어하는 습성을 지녔나 보다. 나 역시도 그렇다. 떠돌다 햇살이 밀려드니 서둘러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낯선 길을 달리다 불쑥 보문단지 낯익은 길이 나타난다. 이런 길은 익숙함에서 오는 무료함이 싫다. 이럴 땐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나 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땐 스스로 새로움을 찾아야 한다. 보문호와 경주월드를 끼고 달리다 무작정 대로변 좁다란 길로 들어선다. 작은 초등학교가 나오고 이내 길이 좁아진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큼의 폭, 무성히 자란 풀이 평소 인기척이 드물다는 걸 알려준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비포장길이 나타난다. 차를 몰아 깊숙이 들어가면서도 막다른 길이면 어쩌나 걱정이 인다.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두고 미묘하게 일렁이는 갈등,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여기서 돌아나가는 건, 저 길 끝에 있을 무언가를 버리는 것과 같다. 늘 그랬듯 ‘GO’는 나의 모험에서 가장 큰 용기와 결과였다. 풀들이 점점 길을 좁힌다. 마치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라도 하듯. 차는 거칠게 풀을 헤치고 나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른 공터가 나타난다. ‘뭐지?’ 풀밭이 길 한쪽에 펼쳐진다. 나락이 영그는 논과 풀밭은 관리된 것과 버려진 것의 반대성을 지닌 것과 동시에 미묘하게 닮았다. 생전 처음 와 보는 곳 한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방을 살핀다. 그때다. 우람한 무언가가 보인다. 얼른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풀밭으로 남은 천군동 절터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감탄이다. ‘아!’하는 감탄이 뱉어진다. 두 기의 석탑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두 석탑을 눈앞에 두고 미묘한 감정이 인다. 여기가 어디인지, 이 탑이 어떤 탑인지조차 모른 채 멍하니 서 있다 탑 앞에 서 있는 안내문을 읽는다. 경주시 천군동 절터다. 통일신라의 사찰 터로 추정한다. 두 탑은 1963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82호로 지정된 ‘천군동 동·서 삼층석탑’이다. 무너져 있던 탑재와 주춧돌을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복원했다. 1938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발굴조사를 했고 중문과 금당, 강당 자리를 확인했다. 기와와 벽돌, 지붕 맨 윗부분 끝을 장식했던 치미가 나왔다. 무려 58cm에 이르는 큰 크기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절터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논밭으로 경작이 한창이다. 탑이 서 있는 땅은 풀이 너무 무성해 감히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풀밭 넘어 보문단지의 알록달록한 색깔의 놀이기구가 지척이지만, 여기서는 마치 시간이 멈춘 오랜 과거인 듯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저 무성한 풀밭으로 들어가 마음껏 누비고 싶지만, 태초의 땅처럼 풀밭은 두려움마저 자아낸다. 풀밭 어디엔 삵이나 오소리, 들고양이와 독사, 살모사 같은 혐오스러운 뱀이 저들만의 영역을 이루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침범하지 말자. 무성히 영토를 넓히느라 애쓴 풀밭은 저들만의 세계로 남겨둬야 할 것이다. 나는 풀밭 주변을 서성이며 탑을 본다. 경주에 있으니 신라시대 석탑일 테다. 탑의 규모나 형식을 보아도 신라 여느 탑과 닮았다. 사적 제82호인 천군동 절터에 서있는 동·서 삼층석탑은 보물(제168호)로 지정되었다. 두 탑은 불국사 삼층석탑이나 고선사 터 삼층석탑, 감은사 터 삼층석탑과 많이 닮았다. 부조(浮彫) 하나 없이 깔끔한 모습으로 너른 땅을 지키고 있다. 서로 같은 두 탑 서로 다른 두 탑 두 탑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다만 동탑은 탑 터를 낮게 파고 주변에 석축을 쌓고 그 한가운데 기단부를 놓았다. 서탑은 바닥 위에 그대로 기단부를 놓았는데 두 탑의 높이를 맞추기 위함인지 동탑은 바닥을 판 대신 기단부를 높게 올렸다. 탑이 있던 사찰의 이름이나 창건된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너진 채 흩어져 있던 탑재와 주춧돌을 모아 탑을 복원했다. 1938년 일본인들의 발굴조사에 의해 중문과 금당, 강당 자리가 확인되었을 뿐 절에 관한 이야기는 무엇도 밝혀지지 않았다. 명문 기와라도 한 조각 나와주면 어떤 기록을 찾아 어떠한 실마리라도 풀릴텐데, 천군동 절터는 아직 세상에 제 이야기 한 줄 꺼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책 속의 탑을 마주하다 동탑의 바닥을 굳이 낮게 파고 탑 주변에 석축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구덩이를 파고 세운 특이한 구조의 동탑을 보다 한 장의 사진이 스친다.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2020, 글항아리)의 11쪽에 실린 사진 속 탑과 흡사했다. 이 책의 저자 ‘모리사키 가즈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대구, 경주, 김천에서 자란 재조 일본인이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 본토로 건너갔지만 나고 자란 땅 조선을 그리워했다. 재조 일본인은 조선에서 나고 자랐지만 조선인일 수 없었고,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완전한 일본인이 될 수도 없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일본에서는 재조 일본인을 두고 귀태(귀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여기며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 책 11쪽에 실린 사진을 보면 여러 사람이 탑 앞에 서있다. 일부는 탑 위에 올라 서거나 혹은 탑 위에 앉았다. 이 사진은 모리사키 가즈에의 아버지 구라지가 경주에 교사로 부임할 당시의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는 ‘1938년 5월 10일 경주 천군리’라고 기록해 놓았다. 사진 속 탑을 보면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무릎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움푹 파인 구덩이 속에 서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뒷줄의 사람들은 탑 기단부에 올라서 있다. 탑의 꼭대기에 노반과 찰주가 없는 것과 구덩이가 파인 것을 보면 사진 속 탑은 동탑이다. 지금은 탑 주변에 잔디를 심어 관리하고 있지만, 1938년 당시는 탑재만 쌓아 복원한 상태로 주변은 그냥 황무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흑백이라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뒷산의 완만한 산세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지금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인근에 현대식 건물들이 시야를 살짝 가렸을 뿐이다. 비록 일본인이 소장한 흑백 사진 한 장이지만 옛 모습을 본다는 건 참 의미 있는 일이다. 조선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재조 일본인 모리사키 가즈에 선생은 세상을 떠났지만, 내가 우연히 만난 탑이 책 속의 탑이라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한 장의 사진과 사진 속 대상을 현실에서 마주했을 때의 감탄은 실로 강렬하다. 우연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탑과 나는 어느 시대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지금 여러 번의 환생을 거듭하다 필연에 의해 다시 만난 것은 아닐까. 굳게 잠긴 이 풀밭의 비밀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 풀밭이 열리는 날 그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탑 앞에 서있을까. 뙤약볕이 한없이 내리쬔다. 다시는 주저앉지 않겠노라는 듯, 힘 있게 서 있는 탑 아래 나도 오래도록 서 있다. 풀밭을 스치고 온 바람이 나를 스치고 탑을 스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천년이든 백 년이든 우리는 그렇게 서로 마주했던 게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말도 없이.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나원리 가는 길 경주의 동남쪽을 적시며 흐르는 형산강엔 어느새 가을이 서린 듯하다. 물의 기운이 일어서는 이른 아침, 강 언저리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물비린내가 제법이다. 모든 생명이 잠들고 깨어나는 동안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흘렀다. 여름 새가 한철을 살고 날아가면, 그 자리엔 또 어느 계절을 살기 위해 또 다른 새가 날아와 빈자리를 채우는 강. 형산강을 따라 달리다 어느 낯익은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운다. 현곡면 나원리 마을 입구다. 여기서부터는 천천히 발품을 팔 참이다. 누구는 길이 좁아 차로 이동하기 불편하니 길부터 넓혀야 한다지만, 시골길을 걸어보는 자연이 주는 특별한 혜택을 누리는 것 같아 즐겁다. 입추가 지나면서 나락이 하나 둘 고개 숙이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안태봉(安胎峯·338m)이 자연스레 흘러내린 산기슭으로 접어든다. 안태봉은 신라 왕실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태봉의 기운이 동남쪽으로 흘러내린 기슭에 탑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부쩍 오게 된다. 경주의 오층석탑 이른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탑이 신성하게 빛난다. 짙푸른 나무 사이 흰빛의 무언가가 보인다. 의심할 겨를도 없이 탑이라는 것을 안다. 탑은 초록의 여름 숲이거나, 암갈색의 겨울 숲에서도 곱게, 환하게 제 모습을 다한다. 탑 아래 서면 고개부터 바짝 쳐들게 된다. 탑은 자신을 우러러보라는 것이 아닌, 세상살이에 풀 죽어 고개 숙인 사람들에게 당당히 고개 들고 살라며 용기를 주는 듯하다. 경주에는 탑이 흔하다. 대부분 삼층석탑이다. 그러나 보기 드물게 오층석탑이 있다. 토함산 동쪽 중턱에 있는 ‘장항리사 터 서오층석탑(국보 제236호)’과 현곡리 안태봉 아래 나원백탑으로 유명한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제39호)’, 그리고 일명 늠비봉 오층석탑으로 알려진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유형문화재 제555호)’이다. 나원 백탑으로 더 유명한 나원리 오층석탑 사람들은 장항리사 터 서오층석탑(국보 제236호)과 나원리 오층석탑을 서로 비교하곤 한다. 삼층석탑이 일반적인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오층석탑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뜻 보면 닮은 듯도 하지만 탑을 만든 돌의 재질, 빛깔, 몸돌에 새긴 문양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장항리사 터 서오층석탑은 구리 함량이 높아 옅은 분홍빛을 띠는 경주석으로 다듬어졌다. 나원리 오층석탑은 유달리 흰빛을 띠는 화강암으로 두 탑은 빛깔이나 재질에서 이미 다름을 알 수 있다. 고선사 터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이나 감은사 터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용장사 터 삼층석탑(국보 제186호),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국보 제21호)을 보는 듯한 웅장함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비록 탑의 층수는 오층과 삼층으로 다르지만, 자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인상은 같은 듯하다. 나원리 오층석탑은 오래전부터 ‘나원백탑’으로 더 유명하다. 일반적인 회백색의 탑보다 유난히 흰빛을 띤다. 이런 화강암이 흔하지도 않거니와 흰빛이 풍기는 순박함과 종교적 순결함, 또 흰빛이 주는 눈부심과 맑음은 인간 세계를 넘어 신(神)의 세계와 맞닿은 의식의 동경에서 그리 불리게 된 듯하다. 8세기 경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탑은 천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청태나 이끼가 끼지 않았다. 남산의 돌로 만들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남산에서 나원리까지 거대한 돌을 옮겨왔다고 한다면 ‘이 거대한 돌을 어떻게 옮겨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다. 기단석은 각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긴 것 외에는 어떠한 문양도 없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기고,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에 예리한 각을 세웠다. 지붕돌 귀퉁이마다 처마처럼 하늘을 향해 살짝 쳐들게 해 상쾌한 모습을 보인다.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부서진 노반과 부러진 찰주가 남아있다. 안태봉 기슭에 9.7m 높이로 우뚝 솟은 탑은 웅장한 위엄과 순백의 청신한 기품으로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무(無)와 백(白), 없는 것과 흰 것은 동일함을 뜻하는가? 금당은 어디에 있었을까. 백탑 3층 몸돌에서 국보급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 바깥 면에 사천왕을 새겨 놓았다. 탑의 방위와 사천왕이 놓인 방위가 일치하도록 배치하여 안치한 것으로 보아 사리함을 안치할 때 상당한 불교식을 행한 듯하다. 사리함엔 황금으로 만든 불상과 3층 공양탑 1기, 9층 공양탑 3기, 사리 15과, 나무 공양탑 편(片) 다수와 구슬 4점 등이 들어 있었다. 또한 한지에 먹으로 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일부분이 수습되었다. 보통은 탑신이나 탑의 주춧돌인 심초석에 사리장엄구를 안치한다. 그러나 나원리 오층석탑은 3층 지붕돌에 사리공을 만들어 안치했다. 후대에 도굴꾼이 들이닥칠 것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여러 차례 도굴범의 손을 탔지만 약간의 결실 외에는 거의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탑의 규모와 안치된 공양물만 봐도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금당 터조차 찾을 수 없다. 누구의 발원으로 어떻게 세워졌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으니, 백지상태인 나원리 절터는 그야말로 없는 것 즉 ‘무(無)’의 상태요, ‘백(白)’의 상태인 게다. 강산이 변해도 한국의 아름다움 품은 석탑은 변하지 않아 나원리 오층석탑은 찬란했던 신라 불교문화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탑을 돌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소원을 빌다 보면 어느새 인생 또한 돌고 도는 윤회의 과정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네 선조들의 삶과 애환이 깃든 석탑의 세계는 이미 불심 그 자체인 것이리라. 탑은 정남향을 향하고 있어 아침부터 오후까지 햇살이 아주 잘 든다. 실제 사찰이 존재했다면 부처님을 모신 금당도 정남향이 아니었을까. 사적은 무엇 한 줄 전하지 않지만, 어느 시대 누구의 발원으로 향을 피웠든 간에,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탑은 현재에도 존귀한 것이다. 거대하고 웅장한 탑을 세운 발원자는, 탑 옆에 띠풀 집을 짓고 부처님을 모셨던 걸까. 세월이 흘러 기둥 하나, 기와 한 장 남지 않도록 무(無)를 염원하면서 오로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경외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탑을 세우고 향화를 올리던 승려나 사람은 모두 세월 속으로 저물었지만, 탑은 이리도 굳건히 남아 지금 시대를 사는 누군가의 바람을 듣는다. 탑은 맑고 깨끗한 기도자들의 뜻을 하늘에 전하려는 불가의 기도처와도 같다. 큰 가람 속에 으레 서 있는 웅장한 탑이 아니라 소외된 곳에 우뚝 솟은 저 순백의 돌덩이에 누구는 숨결을 불어 넣고 누구는 생명을 주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비바람 속에서 지내온 탑, 그러나 그 탑은 차갑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참뜻과 훈기가 서려 있는 듯하다. 강산은 변했어도 탑은 변할 줄 모른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오직 자연의 섭리와 불법의 가르침을 따라 오늘의 고행을 다르게 겪는다. 그리고 내일에 올 불심의 세계를 반겨 맞으며, 꽃피고 새우는 숲속에 홀로 서서 오는 이들을 반긴다. 그 환한 감동이 있기에 나는 기꺼이 새벽길을 달리는 것이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1647호 경주 사천왕사 터(上)에 이어 문두루비법으로 나라 구한 밀교(密敎) 승려 명랑(明朗) 명랑은 632년(선덕여왕 1)에 당나라로 건너가 비밀 불교인 밀교(密敎)의 비법을 배우고 635년(을미년, 선덕여왕 4)에 신라로 돌아왔다. 《삼국유사》 신주(神呪) 편에는 명랑이 환국할 때 기이한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랑은 환국하는 길에 해룡의 청을 받아 용궁에 갔다. 명랑은 비법을 전수해 주고, 금 천냥을 받았다. 명랑은 이걸 가지고 땅속으로 와서 신라 본가 집 우물 밑 명치에서 솟아 나왔다. 이어 자기 집을 절로 만들고 용왕이 시주한 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하니 유달리 빛이 났으므로 금광사(金光寺)라고 하였다’ 명랑의 어머니는 자장율사의 누이동생 남간부인이고 아버지는 신라 사간(沙干, 신라 17관등 중 8등) 재량(才良)이다. 재량에게 아들이 셋이었으니 맏이가 국교(國敎) 대덕이요, 둘째가 의안(義安) 대덕이고, 셋째가 명랑(明朗) 법사다. 문무왕은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명랑법사를 불러 당나라 군대를 막을 계책을 물었다. 명랑은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님의 힘을 빌려 보자고 했다. 그때 정주(貞州, 지금의 개성)에서 급히 보고하기를 이미 당나라 군사가 국경 바닷가를 맴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명랑은 곱게 물들인 비단으로 절의 형태를 흉내 내고 오방신을 만들어, 유가명승((瑜伽明僧) 12명에게 문두루비밀지법(文豆婁秘密之法, 만다라)을 쓰게 했다. 무슨 연유인지 당나라 군대는 큰 풍랑을 맞고 모두 침몰하였다. 문무왕은 낭산 남쪽 기슭에 절을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다. 그 뒤 671년 당나라 군사가 다시 신라를 침범했지만 예와 똑같이 문두루비밀지법을 행하니 모두 침몰하였다. 당 고종이 이를 알고 당시 옥중에 있던 신라 한림랑(翰林郎,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던 한림대(翰林臺)의 우두머리) 박문준과 김인문 중 박문준을 불렀다. 신라에 무슨 비법이 있기에 대군을 보냈는데 두 번이나 모두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박문준은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 되므로 본국의 일을 잘 알지 못하지만 듣건대, 귀국의 은혜로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그 은덕을 갚기 위하여 절을 짓고 법석을 열어 황제의 만수무강을 빈다고 했다. 황제가 기뻐하며 예부시랑 악붕귀를 신라에 보내 사천왕사를 살펴보게 했다. 문무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사천왕사 인근에 새로운 절을 지었다. 신라 대신들은 악붕귀를 새로 지은 절로 인도했다. 약붕귀는 사천왕사가 아닌 것을 알고 ‘망덕요산지사(望德遙山之寺)’라며 노여워하며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들이 황금 천 냥을 주었더니 당나라로 돌아가 신라가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더라고 아뢨다. 이후 문무왕은, 강수에게 명하여 당 고종에게 김인문을 사면해 줄 것을 간청하는 표문을 쓰게 했다. 이는 당 고종이 신라를 의심할 때 옥에 있던 한림랑 박문준이 잘 아뢴 것에 황제가 감동하여 너그럽게 사면할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표문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 김인문을 사면하고 위로하여 신라로 돌려보냈다. 복원한 서탑 기단 벽면에 사천왕의 생생한 모습 담은 녹유신장상 사적 8호로 지정된 사천왕사 터에 올라 본다. 좌우에 단을 돋운 동탑과 서탑 터가 먼저 눈에 띈다. 사천왕사 터는 신라 최초의 쌍탑 가람 터로 알려졌다. 풀과 풀 사이에 석조물이 엎어져 있다. 동·서탑 터를 지나 금당지를 지나 회랑 터에 이르기까지 천년의 시간을 살면서 풀들은 또 얼마나 쓰러지고 일어섰을까. 사천왕사는 신라 문무왕 19년(679년)에 경주 낭산 기슭 신유림(神遊林)에 세워진 호국사찰이었다. 1915년인 일제강점기에 첫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조각이 나온 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재발굴하여 녹유신장상 파편 여러 개를 발굴했다. 녹유전(綠釉塼)은 녹색 유약을 칠한 벽돌이다. 신장상은 모두 3명으로, 신라 최고 조각가 양지가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서탑 터에는 탑 기단 벽체를 복원해 놓았는데 벽면에 녹유 신장상을 복제해 붙여 놓았다. 큰 눈과 콧수염, 날개 달린 투구와 화려하고 세밀한 갑옷,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칼이나 화살을 들고 있는 무장한 신장은 험악하거나 때로는 여유로운 표정마저 지니고 있다. 하나같이 악한 것들을 밟거나 깔고 앉아 보는 이에게 악한 마음을 품지마라 이르는 것만 같다. 세밀하게 빚어낸 솜씨가 경지에 다다른 듯하다. 불교의 세계에서는 중심에 수미산이라는 어마어마한 산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서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이 흐르고, 주변 대륙 네 곳을 지키는 천부의 왕들을 사대천왕(四大天王),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부른다. 조금 큰 절의 입구마다 천왕문(사천왕문)이 있는데 절에 따라 해탈문이나 금강문이 있기도 하다. 천왕문에 들어가면 사천왕 조각상이 왼쪽에 2좌(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오른쪽에 2좌(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있는 구조다. 사천왕은 동서남북 네 하늘을 지키며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므로 보통 우락부락하고 강인한 근육질로 묘사하며 자세도 위압적이다. 크기도 사람을 압도하도록 거대하게 만든다. 마구니, 잡귀를 발로 밟고 있는 모습도 있다. 문무왕릉비(碑)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천왕사 귀부 절터 앞 산업도로 아래 풀밭에는 두 기의 거북이 형상의 비석 받침대(귀부)가 동서로 하나씩 엎드려 있다. 비석은 신라 멸망 후 어느 시기 파손된 채 잊히다가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부윤 홍양호(洪良浩)가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청나라 유희해(劉喜海)가 한반도의 각종 금석문의 탁본을 모아 1832년에 편찬한《해동금석원》에 실었다. 상단부의 소편(小片) 1개는 2009년 경주문화원(舊 박물관) 옆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문무왕릉비는 사천왕사 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비(碑)에는 삼국통일을 이뤄낸 문무왕을 기리는 내용으로 비문은 급찬(級飡, 신라 9등 벼슬) 국학소경(國學少卿)이었던 김??(마모로 알아볼 수 없음)이, 글씨는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썼다고 기록했다. 풀밭에 동서로 놓여있는 귀부 중 동쪽에 있는 것은 사적비의 받침돌, 서쪽에는 문무왕릉비의 받침돌로 추정한다. 당대의 다른 왕의 비는 왕릉 앞에 세워졌지만, 문무왕은 동해에 불교식으로 장사를 지냈기에 왕릉이 없다. 사천왕사 터의 귀부 2개가 문무왕릉비 크기와 크기가 맞아떨어진다고 하니 어쩌면 여기 있는 거북이가 짊어지고 있던 비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무왕릉비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재위 2년(682) 7월 25일에 세웠다. 부왕이 나라를 위해 세운 절에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가설이 낯설지 않다. 일제가 개설한 동해남부선 광궤 폐철길과 지금은 산업도로가 된 경주, 울산 간 신작로가 옛 절터의 강당 터 일부를 파괴하면서 사천왕사 터를 옥죄고 있는 듯하다. 사천왕사는 없지만 풀밭에 서서 호국사찰의 위엄을 상상해 본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전장으로 나가기 전 사천왕사 앞에 도열한 군사의 사기를 돋우던 문무왕의 위엄이 들리는 듯하다. 저 무성한 풀밭에 엎드린 채 천년 동안 꿈쩍 않는 저 거북이는 언제 풀밭을 기어 나올까.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도리천이 흐르고 신들이 거니는 산, 낭산 칠흑의 밤이다. 한밤중에 문득 두드리는 소리 있어 밖을 보니,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진 초승달 너무도 가까이에 와 있다. 어디를 따라나서자는 말씀처럼 그저 나를 내려다볼 뿐, 단 한 말씀도 없으시다. 홀린 듯 서둘러 채비하고 길을 나선다. 어둠이 지워놓은 길과 어둠이 살려놓은 길과 내가 본능으로 직감하고 가는 길이 서로 다르지 않으니, 오늘 하루도 길고 뜨겁겠다. 경주는 아직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품은 토함산과 수많은 불상과 능을 안은 남산이 경주를 포근히 끌어안아 재우는 새벽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가야 할 곳은, 두 산 못지않게 신라시대에 큰 영향력을 미친 낭산이다. 낭산은 일곱 개의 가람 터 중 여섯 번째로 토착 신(神)이 머무는 신령한 산이다. 신라 사람들은 신유림(神遊林) 또는 불교 세계의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수미산(須彌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부처가 계시고 신들이 거닐고 노니는 가장 신성한 숲이니 백성들은 어쩌면 낭산을 먼발치에서만 관망만 할 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을 것이다. 《신라본기》 실성 이사금 12년(413년)에는 낭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12년 가을 8월에 낭산(狼山)에서 구름이 일었는데, 마치 누각(樓閣)과 같고 향기가 가득하여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왕이 이르기를 “이는 필시 신선(神仙)이 강림하여 노는 것이니, 아마도 이는 복된 땅이리라.” 하였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낭산의 나무 한 그루라도 벌목하지 못하게 하였다.’ 묽은 어둠이 잠식한 낭산으로 몸을 들인다. 낭산은 해발 108m의 낮은 야산이다. 동서로는 폭이 좁은 반면, 남북으로 뻗은 산세는 풍만하여 이 모습을 두고 어떤 이는 누에고치와 흡사하고, 어떤 이는 짐승 이리가 웅크린 것과 같다 하여 이리 ‘낭(狼)’ 자가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史記)’에는, 동쪽의 큰 별을 ‘낭’으로 부른다고 했다. 그러니 어떤 물체나 짐승의 형상 때문이 아니라 신라 왕궁의 동(남)쪽에 있다 하여 낭산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이처럼 낭산은 비록 작은 규모의 산이지만 의미와 깊이를 알고 나면 신라라는 사회에서 얼마나 큰 의미의 산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낭산은 내게 ‘귀족의 땅 여왕의 나라’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변방의 문외한처럼 풀밭을 왕래하는 자발적 빈민을 자처하며, 마음의 거리로부터 먼 곳이기도 했다. 아마도 왕과 관련된 곳들이 적지 않음에서 오는 어떤 괴리감 같은 것이었을 게다. 문무왕을 화장해 유골을 빻았다는 능지탑과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 그리고 도리천에 쓴 선덕여왕릉, 호국사찰 사천왕사 터, 국보로 지정된 구황리 삼층석탑과 황복사 터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신라 왕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낭산과 함께 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신라 최초 여왕 선덕(덕만, 신라 제27대 왕)은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유언했다. 신하들은 도리천이 하늘에 있는 곳이라 여기며 왕이 말한 곳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왕이 신라의 수미산은 낭산이요, 도리천은 낭산의 남쪽 봉우리라고 알려 주었다. 왕이 죽자 생전 왕이 지목한 낭산 남쪽 어귀에 장사 지냈다. 훗날 문무왕이 나라를 위해 사천왕사를 지으니 그곳이 낭산 선덕여왕릉 아래다. 잠결에 초승달은 왜 나를 깨워 낭산으로 불러들였을까. 아직 동트지 않은 시각, 지금이 신들이 거니는 시각일까.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리고 낭산 숲에서 한 무리 새가 날아오른다. 신들은 지금 어디를 거닐고 있을까. 나는 천천히 걸어 낭산 자락으로 몸을 들인다. 서서히 걷히는 어둠 속에서 사천왕사 터의 굴곡이 얼비친다. 가깝고 먼 곳이 덜 어둡고 더 어두움으로 다가온다. 사람이 낸 길을 가로지르니 돋아 올린 동탑 터와 서탑 터의 굴곡이 자연스럽게 휘어져 있다. 몇 계단을 올라 절터에 올라서니 꽤 너른 풀밭이 펼쳐진다. 풀밭 위로 돋아 올린 단이 여럿이다. 본존불이 안치된 금당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로 동탑 터와 서탑 터가 있고, 북방으로 좌경루 터와 우경루 터가 있다. 금당 터에 올라 사방을 바라본다.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이 서서히 묽어지고 있는 걸 보니 곧 동이 트겠다. 어느새 풀밭은 세월을 거슬러 나를 세워 놓는다. 바람과 햇살, 나무와 풀, 새와 짐승, 그리고 온갖 이야기들이 신화처럼 일어나 내게 이야기를 흩어놓는다. 불경에는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흐른다고 한다. 도리천은 육욕천(六欲天)의 둘째 하늘로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데, 가운데에 제석천(帝釋天)이 있고 그 사방에 하늘 사람들이 거처하는 여덟 개씩의 성이 있다고 한다. 즉 도리천은 이상 세계를 말한다. 당나라의 위협에서 계책을 고민하다 문무왕 19년(679) 낭산 남쪽 기슭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신라 사람들은 그제야 도리천에 무덤을 쓰게 한 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고 탄복했다. 도리천은 사천왕천 바로 위에 있는 하늘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다. 어쩌면 여왕은 훗날 도리천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질 것을 미리 알고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으로 정했는지 모른다.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신라 제29대 왕) 김춘추(金春秋, 604~661)의 뒤를 이어, 통일을 이룬 문무왕(文武王, 신라 제30대 왕) 김법민(金法敏, 626~681)은 679년(문무왕 19)에 전쟁의 긴박함 중에 사천왕사를 짓는다. 통일을 염원했던 선덕여왕의 뜻을 받들어 수미산 도리천 여왕의 능 아래, 나라를 위해 사천왕사를 지은 것은 철저하게 불교의 이치를 따르고 불교에 의지해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의였으리라. 문무왕은 전장에 나가기 전에 군사들을 사천왕사에 열병시켜 통일의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문무왕이 즉위했을 때는, 삼국이 통일되었다지만 불안정한 시기였다. 연합으로 전쟁을 치른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는 새로운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삼국유사》 ‘기이 2’ ‘문무왕(文武王) 법민(法敏)’ 편을 보면 사천왕사를 세운 배경이 자세히 실려있다. 신라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친 당나라 군대가 돌아가지 않았다. 옛 고구려 땅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하려는 것을 알고 문무왕이 군사를 보내 먼저 당나라 군대를 쳤다. 이것을 안 당나라 황제 고종이 당나라에 숙위(宿衛) 중인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 629~694)을 불러 질책한 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장수 설방(薛邦)에게 군사 50만을 주어 신라를 치라고 했다. 이때 당나라 유학 중이던 의상(義湘, 625~702)이 옥중 김인문을 찾아가 만나니, 이 사실을 전해주며 빨리 신라로 돌아갈 것을 청했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이 급히 왕을 만났다. 김인문으로부터 들은 말인즉 ‘곧 당나라가 신라를 칠 것이다. 대비하시라.’는 것이었다. 왕이 심히 걱정하며 군신을 모아놓고 방비책을 물었다. 그때 각간(角干, 신라 17관등 중 최고 관직) 김천존이 아뢨다. “요사이 명랑법사가 용궁에 가서 비법을 전수받고 왔으니 청컨대 조서로 물으십시오” 왕은 명랑법사를 불렀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다음호 1648호 경주 사천왕사 터(下)에서 계속
신라 고승, 고선대사 원효가 머문 고선사 알천의 상류인 덕동면 암곡동에는 고선사 터가 있었다. 가뭄에 대비한 덕동호가 생기면서 덕동면 전체가 수몰되면서 고선사 터도 함께 물에 잠겼다. 방앗간도, 학교도, 집도 모두 수장되었다. 삼층석탑 하나가 겨우 남아 고선사 터임을 증명했지만, 세상의 필요에 의해 그마저도 자리를 내어 주어야 했던 비운의 석탑이었다. 석재 유물과 석탑은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뒤뜰로 옮겨졌다. 덕동면 주민 전체가 고향을 잃을 때, 석탑도 고향을 잃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열반에 들 때까지 머물렀다던 고선사다. 어느 시기에 왜 폐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선사는 태종무열왕(김춘추, 신라 제29대 왕) 이전에 세워졌던 절로 추정 한다. 황룡사에서 출가했다고 전해지는 원효는, 저술을 위해 분황사에 머물렀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평생 이름 있는 절에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 불교계의 중심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았다. 거창한 명성보다 백성과 고락을 함께했다. 당대 그 누구보다도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은 책을 썼지만, 원효가 원한 것은 백성의 삶 속에서 실질적인 구원의 희망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서라벌의 중심이 아닌, 지금도 경주의 골짜기에 속하는 토함산 아래 머물렀던 것만 봐도 원효의 본질적인 애민 정신을 헤아릴 수 있다. 원효가 얻은 것은 지배 계급층의 존귀한 추대가 아닌 민중의 소박한 마음이었다. 신라 사람들은 원효가 고선사 주지로 오래 있었기에 ‘고선대사’라고 불렀다.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은 설(薛) 서당(誓幢, 새털)이었다.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은 원효를 기리며 고선사에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를 세웠다. 비문에는 686년 원효가 혈사(穴寺, 구멍 절)에서 입적하기 이전에 고선사는 사찰의 규모를 갖췄다고 기록했다. 『고려사(高麗史)』에도 1021년(현종 12년), 가사의 조각조각에 금색 실로 수를 놓아서 승복의 장엄함을 갖춘 ‘금란가사(金欄袈裟)’와 ‘불정골(佛頂骨)’ 을 내전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현종까지도 법등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선사 터는 옛 신라인들의 집단 무덤 터이기도 그간 덕동호는 매번 물이 가득하고 안개가 자욱했다. 돌아서는 걸음 뒤로, 다다르지 못한 갈증이 곱절로 일었다. 회의감마저 들었다. 사라진 절터를 찾아, 같은 길을 여러 번 오가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지만, 사라진 절과 수몰된 절터를 찾는 것은 또 무슨 의미란 말인가. 없고 사라진 것을 좇는 것이 때로는 미련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번 없고 있음에 의미를 두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기에 그저 ‘없음’으로 갈음하며, 무(無)에서 다시 무(無)를 좇는 것에 굳이 의미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바닥이 드러난 덕동호를 거닐다 수많은 돌무지를 보았다. 돌들은 누가 부러 쌓아놓은 듯 어떤 균형을 이루었다. 어느 날, 돌무지 앞에서 마주친 중년의 남성이 내게 말했다. “돌덧널무덤(석곽묘)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이예요. 옛날 신라인들의 집단무덤, 일종의 공동묘지 같은 것이지요. 이곳에 총 100여 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바닥 곳곳에 깨진 토기와 기와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흙 속에 묻힌 조각들을 들추었다. 천년 세월 동안 부식된 흔적이 역력했다. 세월의 틈바구니에서 아련하게 살아남았을 시간을 살폈다. 과거를 건져 올리는 일이 때로는 아플 때도 있다. 죽은 자는 육신의 한 톨 뼛조각도 없이 사라졌어도,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쌓아 올린 돌들은 무너지고 깨졌을지언정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멀리 떠밀려가지도 못한 돌들은 아직도 주변을 맴돌며 죽은 이의 슬픔을 추모하고 있는 듯했다. 수몰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덕동호 사람들 시래골을 빠져나와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무서우리만치 험한 길이었다. 간간이 민가가 나타났지만, 어둑어둑 날이 저무는 산길은 스산했다. 어두운 곳에서 산비둘기가 날고, 토끼와 고라니가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굽이치는 곳마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지류가 나타났다. 정신없이 달리니 덕동경로당 앞이다. 촌로들이 종일 앉았다 떠난 의자는 모두 덕동호를 향해 놓여 있었다. 덕동호를 한 바퀴 돌며, 어느 곳에서든 모든 것이 덕동호를 향해있다는 것을 느낀다. 의자도, 사람도, 집도, 논밭도…. 그립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일상에서 나도 모르게 바라보게 되는 것. 깊숙한 골짜기까지 닿아있는 덕동호는 침묵한 듯 수많은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저 깊은 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저 길 따라 아름다운 운치만 말할 것이다. 때로는 깊은 안개에 푹 젖어 고독을 즐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것이다. 그들에게 귀띔하고 싶다. 입을 굳게 다문 호수 밑에 1300년 전에 살다 간 신라 사람들의 발자취가 있다고. 매일 어디까지 물줄기가 뻗어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장중한 느낌을 자아낼 정도로 고요하고 도도한 덕동호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적잖이 숨기고 있다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곧 덕동호의 수위는 한층 더 가득 찰 것이고 노출된 모든 과거의 공간들은 물속에 잠길 것이다. 망향병을 달래려 덕동호 산기슭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짙고 푸른 물속을 들여다보며 오래오래 옛날을 회상할 것이다. 과거의 흔적은 지워졌지만, 길은 물살도 지우기 힘들었는지 아직도 간간이 남아 흔적을 드러낸다. 굽이진 길을 따라 시선을 뻗으면 어느새 집들이 되살아나고, 키 작은 초등학교와 고선사 삼층석탑도 나타난다. 아름드리나무가 그늘을 키우고, 그 아래 아이들이 모여 입씨름을 하며 왁자하다. 산 아래엔 층층이 논과 밭이 펼쳐지고, 곡식과 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바닥은 스스로 수몰될 채비를 한다. 물속에 잠긴 것들을 그리워하며 촌로들은 다음 가뭄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몇 겹의 바람마저 잠든 덕동호의 저녁은 평화롭게 저문다. 어둠이 장막을 치니 적막하기까지 하다. 인적이 드물어 더 쓸쓸한 덕동호의 섭섭함이란 이런 것일까. 물결만 바라보아도 고향 생각이 절로 난다던 사람들. 물속에 고향을 담그고 떠나온 사람들에게 세월은 아득해졌다. 그들이 말하는 ‘가슴 먹먹함’의 의미를, 고향을 잃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한평생, 아니 그 이전 먼 조상 때부터 정(情)을 들인 땅을 물속에 가두었다. 고향의 고샅길, 개울물과 숲이 자꾸만 물결에 아른거린다고 했다. 수몰된 마을은 선연한 기억으로 찾아오곤 했다. 물과 그 물의 끝엔 여전히 추억이 살고 있기에. 경주국립박물관 뒤뜰로 옮겨진 고선사 삼층석탑 경주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뒤뜰 고선사 삼층석탑 앞에 섰다. 탑의 균형 잡힌 몸체가 밤인데도 웅장하게 드러났다. 나는 ‘아!’ 하는 탄식을 쏟아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원효대사의 염원이 깃든 고선사 삼층석탑은 고요히 뒤뜰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고선사 터에서 가져왔다는 머리 잃은 서당화상비 귀부와 함께 옛 고선사는 이러저러했다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듯했다. 잘 다듬어진 잔디 사이로 몸을 옮긴 석탑이 한없이 쓸쓸해 보인다. 도시의 세련미 속에 석탑은 얼마나 더 고독할까. 황룡산과 토함산과 괘정산 아래, 원래의 풍경이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지천으로 날아다니는 곤충 떼와 잡풀들과 더불어 석탑은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주머니에 넣어둔 사진을 꺼낸다. 산과 들판이 한데 어우러진 곳에 탑은 터를 지키는 우람한 장군과도 같다. 나를 내려다보는 탑에서 수백 년을 거스른 소리가 들린다. 지저귀는 새소리, 원효스님 염불소리, 밤새 밤을 지키다 어디론가 날아가는 부엉이. 이것이 어느 가뭄 진 봄, 내가 목격한 고선사 터 삼층석탑의 전부다. 박물관을 돌아 나오며 뒤를 돌아본다. 비에 젖은 석탑이 비를 맞으며 계절의 웅장함을 더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보문호를 채운 물의 근원 덕동호 보문호를 거닐다 호수를 가득 채운 물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경주 땅에 널리고 널린 것이 신라의 흔적이라지만, 신라의 웅혼한 혼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을 평화롭게 적시며 흘러가는 물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문호의 근원을 생각하다 경주 사람이 아니면 모를, 덕동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보문관광단지에서 감포로 넘어가는 옛길 그 어디 즈음에 댐이 있다는 것과, 댐에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고선사 터가 수몰되었다는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가뭄이 들 것을 대비해 경주에도 식수 공급을 위한 댐이 필요했다. 경주의 옛이름 서라벌이다. ‘벌’은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한다. 대부분이 평지의 땅으로 이루어진 경주에서 유독 지대가 높은 덕동면은 댐을 만들기에 유일했고 적합했다. 한 면(面) 전체가 수몰되어야 하는 댐 건설에 덕동면 주민은 경주시를 위해 고향을 기꺼이 내어 주었다. 어디든 댐을 볼 때면 평온하게 물결치는 그 아래가 궁금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내어준 실향민들의 심정이나 집과 길, 논과 밭이 한 순간에 물에 잠기는 슬픔을 다 헤아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가까스로 물 밖까지 가지를 내밀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나무들을 볼 때면 허우적대는 처절한 슬픔이 심연 깊숙이까지 파고들곤 했다. 감포로 가기 위해 무심하게 지나쳤던 곳이었다. 덕동호를 알고 처음 덕동호에 왔을 때, 낯선 풍경에 몹시 당황했었다. 보문관광단지에서 조금 빗겨나자 예상치 못한 산길이 나타났다. 천북·암곡 방면으로 난 길은 통행하는 차량이 드물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마치 과거로 접어드는 것같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입구부터 안개가 자욱했다. 신비스러움마저 훅 끼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다. 어디론가 점점 깊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은 섬찟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안개에 잠긴 산과, 산을 따라 구불텅하게 난 길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했다. 쭈뼛쭈뼛 늘어선 나무들이 섬뜩해질 무렵, 보덕로 내리막 끝에 ‘암곡동 대성마을’이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옹기종기 지붕을 맞댄 민가가 반가웠다. 길을 따라 가면 갈수록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누구라도 만난다면 길부터 물어야 할 판이었다. 덕동길을 달려 와동경로당 앞 갈래 길에서 멈췄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겨울임에도 얼지 않고 콸콸콸 힘차게 흐르는 물소리였다. 경로당 앞 덕동천이었다. 며칠 동안 양껏 내린 비로 장마철 못지않게 물이 불었다. 저 깨끗함, 발 벗고 들어가 온몸으로 시린 물살을 느끼고 싶었다. 한기가 머리끝까지 번쩍하고 스쳤다. 겨우내 바짝 웅크린 나태함을 ‘쨍’하고 깨웠다. 한 번, 두 번, 세 번…. 덕동호는 매번 안개에 잠겨 있었다. 다시 한 번, 두 번, 세 번…. 고향처럼 덕동호가 자연스러워졌다. 저물녘엔 붉게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고, 단풍이 들 땐 옛길에서 낭만을 즐겼다. 어느새 덕동호는 특별함이 아닌 익숙함이 되었다. 추억 서린 고선사 터를 그리워하는 수몰민 오랜만에 다시 찾은 경주였다. 보문호 수위를 살핀 후 곧장 암곡동으로 향했다. 옛길은 풍광이 좋아 경주 사람들에게 아름답기로 소문난 길이다.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터를 잡은 집들이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다. 나무와 풀 사이로 덕동호가 얼비쳤지만, 수위가 얼마나 낮아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외동 경로당에서 ‘명실 2㎞’라는 오래된 표지석을 따라 익숙하게 우회했다. 덕동천 다리를 건너 구불텅하게 난 길을 달리니 논과 밭 너머 덕동호 바닥이 드러났다. ‘시래골’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나자 마음이 급해졌다. 차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밭둑에 올라섰다. 늘 그 자리에 주인처럼 서있던 한 쌍의 허수아비가 서두르라며 재촉했다. 허수아비만 자리를 지키던 빈 밭에 오늘은 촌로 내외가 나와 땅을 고른다. 내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된다. “이 촌구석엔 뭣 하러 왔소?” 촌로가 물었다. “어르신, 덕동호에 절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촌로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선사를 말하는 거로구만요” 촌로는 힘주어 말했다. “고선사를 아십니까?” 내가 반가운 기색으로 묻자 촌로는 몸을 돌려 한쪽 산기슭을 가리킨다. “저짜 저…, 저 산봉우리 아래가 거기라요. 큰 탑이 하나 있긴 있었는데…. 아주 컸어요. 우리가 쪼만할 땐, 뭣도 모르고 올라가서 소리도 지르고 놀고 그랬어요. 아들이 다 그래 놀았어요. 그라면 어른들은 탑 무너진다고, 부정 탄다고 막 몽둥이를 들고 와서 야단쳤어요. 그래도 소용 없었어요. 아들은 아들인기라요. 그키 야단맞고도 다음날 되면 또 탑에 기어 올라가서 놀았어요. 뭔 날만 되면 어른들은 탑 아래 초를 놓고 불도 붙이고, 누구는 물도 떠다 놓고, 누구는 떡도 해다 놓고 빌었어요. 그라면 우리는 어른들 안 볼 때 그거 훔쳐 묵고, 묵다 들키서 야단도 맞고 도망 댕기고…. 배고픈 시절이라 꿀맛이었어요. … 아주 옛날에 무슨 유명한 스님이 고선사에 오래 있었다 카던데…. 절터가 꽤 널렀어요(넓었어요). 논 중간에 탑이 있었는데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어요. 댐 짓는다고 살던 사람들 다 나가라 카고, 탑은 어데더라…. 그 어데서 가져갔다 카던데…. 탑이 없어지고 한참 허전했어요. 있던 거는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거라요. 우리가 나고 자라면서 늘 거기 있던 거였는데 하루아침에 가져 가뿌니까 우리도 허전하고, 탑도 아마 무척 여기 오고 싶을 거예요” 촌로는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수몰된 마을 어귀 산 중턱으로 올라와 터를 잡았다. 매일 고향이 잠긴 덕동호 물결을 내려다보며 고향에서의 추억을 생각하며 산다고 했다. 촌로가 가리키는 산봉우리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 가뭄에 물은 저 건너 산 아래까지 물러났다. 함부로 볼 수 없던 너른 땅, 땅이 드러났다. 덕동호는 비로소 속살을 열어 나를 불렀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오래전 넣어둔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 귀한 사진을 어데서 구했어요? 우리 어렸을 때, 고선사 터가 이랬었어요” 촌로의 표정이 환히 빛났다. 여기 이쯤에 누구 집이 있었고, 어디 즈음엔 무엇이 있었다며 촌로가 사진 속, 옛날을 회상했다. 너른 들판에 석탑 하나가 웅장하게 서 있는 사진이었다. 탑은 첫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멋이 있었다. 시야를 뻗어 산세를 훑었다. 촌로는 덕동호 어디까지 따라와 석탑이 서 있었을 법한 곳을 가늠해 주고 돌아갔다. 오랜 가뭄의 흔적에는 물기가 없었다. 물이 빠진 바닥은 건조되어 퍼석거렸다. 덕동호 속살에 내 발자국이 마른 흙 위에 흐릿하게 찍혔다. 바람이 불어 먼지가 일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바닥엔 누가 다녀갔는지 모를 발자국이 드문드문 찍혀 있었으나, 그들이 여기에 왜 왔으며 무엇을 하고 돌아갔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고 멈추고, 걷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오래전 절을 드나들던 사람들처럼 예를 갖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사라진 절터에 서 있었다. 돌을 모았다. 층층이 쌓다가 마지막엔 아주 작은 돌 하나를 얹었다. 사진 속 고선사 석탑에 비하면 한없이 보잘 것 없지만, 나는 이렇게 빈 땅에 탑 하나를 세웠다. 내가 쌓은 탑은 웅장한 탑을 대신해 고선사 터 석탑을 대신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남산을 맞잡고 자리 잡은 도당산 아래로 간다. 신라시대 귀족은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사령지라는 신령스러운 장소를 정해두고 돌아가며 했다. 도당산은 사려지 중 한곳으로 보인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도당산 아래 일대는 논이었다. 어느 해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옛 절터 천관사 터(사적 제340호)라 했다. 지금은 논을 메우고 탑을 세워 절터를 복원해 놓았다. 천관사(天官寺) 寺號天官昔有緣 (사호천관석유연) 천관이라는 절 이름에 사연이 있는데 忽聞經始一悽然 (홀문경시일처연) 새로 짓는다는 말 듣고 마음이 처연하네 倚酣公子遊花下 (다정공자유화하) 술기운 가득한 공자는 꽃 아래서 노닐었고 含怨佳人泣馬前 (함원가인읍마전) 한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다네 紅鬣有情還識路 (홍렵유정환식로) 말조차 정겨워서 그 길을 떠올렸을 뿐인데 蒼頭何罪謾加鞭 (창두하죄만가편) 종놈은 무슨 죄라고 채찍만 때려댔는고 唯餘一曲歌詞妙 (유여일곡가사묘) 남은 것은 오직 한 곡조의 어여쁜 노래뿐 蟾兔同眠萬古傅 (섬토동면만고전) 달 속에서 함께 자리라는 가사를 만고에 전하네 《파한집》, 이공승(李公升, 1099년(숙종 4)~1183년(명종 13), 고려 문신, 직한림원, 어사중승, 한림학사, 중서시랑평장사) 김유신과 천관의 이야기가 서린 천관사 터 천관사는 신라 김유신과 관련 있는 절이기도 하다. 천관사 터는 김유신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재매정과는 불과 500m 거리로 문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젊은 시절 김유신은 기녀 천관과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둘의 신분이 달랐다. 김유신은 옛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증손자로, 가야가 법흥왕에 항복하며 신라 진골 신분으로 편입된 왕족 가문이었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은 관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이끌며 신라에 충성한 장군이었고, 어머니 만명부인은 신라왕족의 딸이었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왕족 가문이니 김유신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하지만 유신은 기녀 천관과 가까이 지냈다. 이를 알게 된 만명부인이 늦은 밤 귀가하는 유신을 불러 크게 꾸짖었다. “너는 왕족의 핏줄이다. 장차 이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 공명을 세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랐는데, 술과 미천한 기생의 유혹에 빠져 스스로 귀함을 버리니 웬일이냐”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자 유신은 크게 뉘우치며 무릎을 꿇고 다시는 기방 출입을 하지 않겠노라, 다시는 천관을 만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관은 오지 않는 유신을 날마다 그리워하며 기다렸다. 근신하던 유신은 아주 오랜만에 벗과 술을 나누었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유신은 집으로 가기 위해 말에 올랐다. 술기운 때문인지 말 위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유신을 태운 말은 매일 향하던 곳으로 갔다. 천관이 있는 기방이었다. 천관이 반갑게 달려 나와 유신을 부축했다. 인기척에 정신을 차린 유신은 자신이 천관의 집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유신은 천관을 거칠게 밀쳐내고는 가차 없이 말의 목을 벴다. 천관은 냉기서린 유신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하고 마당에 쓰러졌다. “다시는 기다리지 마시오” 유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어머니와의 약속이다. 내 어찌 대장부로 태어나 약속을 어기겠는가. 단 한 번의 결심이라도 헛되이 하는 것은 대장부로써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유신은 다시는 천관을 찾지 않았다. 유신의 냉정하고 섬뜩한 모습을 본 천관은 날마다 눈물로 보내다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변심한 유신을 원망하며 향가 《원사(怨詞)》를 지었다고 알려졌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훗날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이 천관을 다시 찾았을 때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유신은 그녀가 살던 곳에 ‘천관사’라는 절을 짓고 넋을 위로했다. 복원된 팔각삼층석탑과 사라진 석등 도당산 기슭 풀밭에 세워진 탑은, 소녀처럼 새하얗게 빛난다. 어찌 여기에 있소, 물으면 머뭇머뭇한 모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누가 여기에 세웠소, 물으면 여전히 머뭇머뭇한 모습으로 얼굴을 돌리는 듯하다. 그래,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한 사내가 사랑하던 여인을 잊지 못해 세웠다는 말. 첫 정을 잊지 못해 평생 여인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는 그 사내는 어디로 갔을까. 사내를 기다리며 수 억만 밤을 지새우다 사라져갔을 탑을, 누가 다시 우두커니 세워 놓았을까. 천관사는 고려시대까지 맥을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폐사된 후 절터는 자연스레 잊혀 갔을 테고, 사람들에 의해 치워지고 버려졌을 것이다. 팔각삼층석탑은 2020년도에 복원한 것이다. 기단부와 팔각 탑신석으로 구성된 석탑이 남아 있었지만 상층 부재가 없어 원형을 추정하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 때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작성한 <고고자료>를 토대로 팔각 옥개석받침에 연화문이 새겨진 석탑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흩어져 있던 몇 안 되는 탑재를 모았지만 탑을 구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탑의 대부분을 새로 만들어 복원한 터라 상당히 이질적이다. 신라 석탑들은 대부분 사각 석탑이다. 천관사 터 석탑은 사각의 2중 기단에 팔각 몸돌과 지붕돌을 얹었다. 옥개석 받침엔 작은 연꽃을 조각했는데 팔각의 형태와 함께 무척 여성스럽다. 석굴암 삼층석탑과 함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탑신부 외에도 건물터, 문터, 석등 터, 석조시설과 우물 터가 확인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릉 동쪽에 있다(在五陵東)’는 기록이 있고, 금동불상과 ‘천(天)’ 자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수습되면서 천관사의 위치가 확실해졌다. 천관사 터에는 석등유물이 있었다. 발굴조사 후 원상태로 묻어 두었으나 상대석과 하대석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사진으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조각 솜씨가 상당히 뛰어난 연화무늬 대석이다. 원성대왕 꿈과 천관사 《삼국유사》 원성대왕(元聖大王) 편엔 천관사에 관련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찬 김주원이 처음에 상재(上梓)가 되고, 훗날 원성왕이 되는 경신은 각간으로서 차석의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 경신의 꿈에 자신이 복두를 벗고 하얀 삿갓을 쓰고는 12줄의 가야금을 잡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깬 뒤 사람을 시켜 풀이를 하니 복두를 벗은 것은 실직한 징조이고, 가야금을 잡은 것은 목에 칼 씌우는 형을 받을 징조요,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 했다. 경신은 그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며 출입을 삼갔다. 그때 아찬 여삼이 뵙자 청하고는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 더 높은 사람이 없는 것이요,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고, 12줄 가야금을 잡은 것은 12대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하였다. “위로 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단 말이오?” 경신이 묻자 아찬이 답했다. “청컨대 몰래 북천신에게 제사하면 가능하리이다” 얼마 후 신덕왕이 죽으니, 나라에서는 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북천 물이 불어 북천 북쪽에 살던 주원이 건너지 못하게 되었고, 경신이 먼저 궁으로 들어가니 상재의 무리들이 모두 따라와 절하며 하례하였다. 그가 곧 신라 30대 원성대왕이다. 논을 메워 복원한 천관사 터 지천에 뿌리내린 토끼풀이 한창 꽃을 피웠다. 토끼풀 꽃으로 화관을 만들고, 꽃반지를 엮어 탑 위에 얹어본다.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탑은, 님을 그리워 하듯 처연하게 서있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여왕 선덕 구층탑을 세우다 황룡사 터는 8800여평에 달한다고 한다. 불국사의 8배나 된다는데 내 안목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1976년부터 시작된 황룡사 터 발굴은 1983년 11월까지 8년간 진행되었다. 절터에 형성된 민가 100여호를 매입하여 철거한 뒤 본격 조사가 시작되었다. 발굴에 동원된 인원만도 연인원 7만8000명에 달했다. 그만큼 광대한 범위였다. 황룡사 이야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어렵기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이목을 끈다. 진흥왕 때부터 진평왕, 선덕왕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년에 걸쳐 완공된 대사찰이기도 했다. 신라 불교의 심장이자 자부심이었다. 백제나 고구려보다 불교를 늦게 받아들인 신라는 이차돈 순교 후 불교를 공인했고, 어느 나라보다 성심을 다해 불교의 꽃을 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 왕경에는 가섭불이 임했던 일곱 땅이 있었다. 그중 한 곳이 황룡사였다. 황룡사에는 신라삼보(신라를 지키는 3개의 보물. 황룡사장륙상·천사옥대·황룡사구층탑) 중 두 개가 있을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다. 절터의 면적만 보더라도 ‘신라 중심 사찰’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석가여래좌상과 두 협시보살 입상이 포함된 장륙상과 제자상이 서 있던 금당 터를 내려와 구층탑이 있던 토단에 오른다. 토단엔 사방으로 모두 8개의 초석이 흙과 풀 사이에 가지런히 박혀있다.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이다. 가로 세로 1m 남짓한 초석들 중 심초석(心礎石) 하나만 토단에 우뚝 올라 있다. 매우 투박하며 둔탁하지만 매우 육중한 모습이다. 초석을 토단까지 올리려고 드잡이공이 꾀나 고생했을 것이다. 636년이었다. 선덕왕(신라 제27대 왕)이 즉위하고 5년째 되던 해(정관 10년 병신년)다.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 갔다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불법을 전수받을 때, 문수보살이 자장에게 일렀다. “그대 나라의 왕은 천축 찰리종(刹利種, 인도 신분 계급 가운데 왕과 왕족에 속하는 부류)의 왕으로 이미 후생에 부처가 되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인연이 있으니 동쪽의 오랑캐나 지방 흉포한 종족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산과 천이 험준한 탓으로 성품이 거칠고 어그러져 미신을 많이 믿는 편입니다. 때로는 천신이 재앙을 내리지만, 법문 지식이 많은 승려들이 나라 곳곳에 있으니 군신이 편안하고 모든 백성들이 평화롭습니다” 자장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후 자장은 신비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곳에 어찌 오시었소?” “불타에 이르는 지혜를 얻기 위함입니다” 자장의 말을 듣고 그가 다시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소?”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말갈과 잇닿아 있고, 남으로는 왜국과 인접해 늘 위태롭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고 있으니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장의 걱정에 그가 말했다. “그대의 나라가 여자를 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여왕은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어 이웃 나라들이 얕잡아보는 것입니다. 그대는 지금 당장 본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살피시오” 자장이 고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해야 이롭겠느냐고 물었다. “황룡사를 호위하는 용이 나의 장자입니다. 천축(인도) 바라문교 최고의 신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 절 안에 9층 탑을 세우도록 하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아홉 나라가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입니다. 그리고 탑을 세운 뒤에는 불교 의례인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사면하십시오. 그러면 외적들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오. 또 나를 위하여 서울(서라벌) 남쪽 바다 언덕에 절을 지어 나의 복을 빌어 주면 나도 역시 덕을 갚을 것이오” 642년(선덕왕 11년), 정관 17년 계묘년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내려 준 불경과 불상, 가사, 비단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다. 자장은 황룡사에 탑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왕에게 아뢨다. 신라는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 탑을 만들 장인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신라로 왔다.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가 수하 장인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아비지는 탑에 쓰일 나무와 돌을 다듬었다. 탑의 첫 기둥을 세우는 날 밤, 아비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징조의 꿈을 꾸었다. 아비지는 탑을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자 했다. 그때 땅이 진동하며 어둠 속에서 한 노승과 장정들이 금으로 된 문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크게 후회하고 탑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쇠받침 위로 높이가 42척이고 이하는 183척이다”고 찰주기(刹柱記)에 기록하고,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1백 개를 나누어 이 탑과 통도사 계단(승려가 계를 받는 제단) 및 대화사 탑에 봉안하여 용의 청을 들어 주었다. 탑을 세운 후 삼한이 하나가 되었고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멈추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감히 범할 수 없다.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 탑, 그리고 하늘이 왕(진평왕)에게 내린 옥대(天賜玉帶)가 그것이다” 해동 명현인 안홍(安弘)이 찬술한 《동도성립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신라 제27대에 여자가 임금이 되니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범하니, 만일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략하는 재난을 억누를 수 있으리라’ 황룡사 목탑을 세운 후 여왕의 위엄은 높아졌다. 황룡사 9층 탑은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올린 여왕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했다. 신라 사람들은 지금껏 보아온 어떤 탑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술적 도전과 성취에 놀랐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걸작을 목도하고 여왕의 위엄에 손을 모았다. 9층 탑은 여왕이 이루어낸 놀라운 업적과 끊임없는 열정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지만 목탑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698년 효소왕 7년(제32대 왕) 6월, 탑에 첫 벼락이 떨어졌다. 868년 경문왕(제48대 왕) 때 두 번째 벼락이 떨어지고, 953년 고려 광종 5년 10월에 세 번째 벼락이 떨어졌다. 정종 2년 네 번째 벼락이, 1095년 현종 말년에 다섯 번째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이 떨어질 때마다 수리를 거듭하던 탑은 1238년 고종 16년 겨울, 몽골의 침략으로 화마에 휩싸이게 된다.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와 9층 탑, 장육존상과 제자상 및 모든 전각이 불에 타 사라지고 만다. 무려 29년간 진행된 몽골의 침입으로 흥왕사가 소실되고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는가 하면, 한반도 전역에서 수많은 문화재가 잿더미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신라의 커다란 꿈과 희망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사라졌다. 황룡사 대종 어디로 갔을까 몽골의 침입으로 사라진 유물이 또 하나 있다. 대종이다. 황룡사에는 큰 종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754년 경덕대왕(신라 제35대 왕) 13년에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의 삼촌)과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경덕왕에 의해 출궁되어 사량부인에 봉해진 삼모부인(三毛夫人)의 시주로 종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종을 만든 장인은 금입택 35채 중 한 곳인 이상택(里上宅) 집안의 하인이었다고 한다. 종의 길이가 1장(丈) 3치이고, 두께가 9치이며, 무게는 499만7581근이었다. 화마에 목탑이 전소되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종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국립경주박물관에 현존하는 성덕대왕신종보다 약 4배는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되는 황룡사 대종은 어디로 갔을까? 경주 시가지에서 동해로 가는 길엔 ‘대종천(大鍾川)’이라는 큰 하천이 있다. 토함산 자락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해 감은사를 지나 동해와 만나는 물줄기다. 몽골군이 대종을 전리품으로 본국에 가져가기 위해 종을 배에 실었지만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대종천에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큰 비가 내리면 토함산에서 흘러내린 거센 물살에 대종도 동해로 쓸려갔다는 것이다. 감포 인근 주민들은 파도가 심한 날엔 바다 어디쯤에서 종소리가 난다고 한다. 대종을 찾기 위해 감포 앞바다를 여러 차례 수중 탐색했다. 어느 어민이 잠수 중 둥그스름한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제보를 했지만 대종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사라진 대종이 바다 속에 있다면 수중 초와 물고기들에게 신라의 이야기를 들려주겠지. 그러다 이 너른 초지가 그리우면 불쑥 나타나 이 너른 초지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지금 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처럼 힘차게 서라벌 초지에 울려 퍼지면 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밤은 고요와 침묵과 쓸쓸함과 적막을 함께 가르친다. 잠을 설치다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눈이 떠진 것은 어쩌면 그 황량한 터를 채운 어둠이 그리워서일지도 모른다. 그곳을 지나는 바람과 그 땅에 뿌리내린 풀들의 부름, 나는 언제부턴가 그들과의 교감에 중독돼 있었다. 대문을 열고 겁 없이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일, 어쩌면 태초부터 몸뚱이에 스민 본능일 것이다. 초지에 서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막힌 경험을 해 본 자로서 중독이라는 표현 외에는 딱히 가져다 붙일 말이 없다. 어둠이 걷히려면 아직 멀었다. 가라앉은 바람에게서 풀 내음이 짙다. 머잖아 비가 오겠다는 것을 직감해 내는 것도 본능이겠지. 그래, 비가 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황룡사 터는 어둠에 침잠하고 있다.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은 태초의 고요가, 그 고요를 함께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되뇌며 숨을 깊게 들이킨다. 나는 천천히 오래된 땅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사람인 냥,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길로 들어선다. 저 풀밭 어디에선가 새벽을 잘라먹은 황룡이 승천을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상상과 사라진 장륙삼존불의 조각조각들이 풀밭을 걸어 나와 나를 옛날로 이끌어줄 상상을 하며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풀밭을 서성인다. 삼국시대 가장 컸다는 왕실사찰 황룡사는, 법당도 부처도 탑도 모두 사라지고 법당을 지탱하던 주춧돌과 부처를 모셨던 석조대좌만 남아 풀밭에 몸을 누였다. 둘러보면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황량한 들판, 그래서 더없이 적막한 땅. 5월이 되고 풀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지만 채워진 듯 비워진 땅이고, 비워진 듯 채워진 땅이다. 짙은 어둠이 묽어지고 뭣하나 눈에 걸리는 것 없는 황량한 대지에 오늘따라 형형색색의 빛깔이 바람에 흔들린다. 연등이다. 석가탄신일을 기념하기 위해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했다던 이 땅에도 누가 저리도 정성스럽게 연등을 달아놓았다. 나는 천천히 풀들 사이로 걸어가 한때는 영화를 누렸던 땅의 이야기를 듣는다.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하던 땅, 황룡사 황룡사 터는 8800여평에 달한다고 한다. 불국사의 8배나 된다는데 내 안목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1976년부터 시작된 황룡사 터 발굴은 1983년 11월까지 8년간 진행되었다. 절터에 형성된 민가 100여호를 매입하여 철거한 뒤 본격 조사가 시작되었다. 발굴에 동원된 인원만도 연인원 7만8000명에 달했다. 그만큼 광대한 범위였다. 황룡사 이야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어렵기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이목을 끈다. 진흥왕 때부터 진평왕, 선덕왕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년에 걸쳐 완공된 대사찰이기도 했다. 신라 불교의 심장이자 자부심이었다. 백제나 고구려보다 불교를 늦게 받아들인 신라는 이차돈 순교 후 불교를 공인했고, 어느 나라보다 성심을 다해 불교의 꽃을 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 왕경에는 가섭불이 임했던 일곱 땅이 있었다. 그중 한 곳이 황룡사였다.황룡사가 지어지고 훗날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는데, 산서성에 있는 오대산에 이르자 문수보살(석가모니 왼쪽에 앉은 부처로 지혜를 맡은 보살)이 현신(現身)해서 말했다. “그대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하는 땅이다” 하였다. 황룡사는 처음부터 사찰을 지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신라 제24대 왕) 14년(553, 계유년) 2월에 월성 동쪽에 궁(宮)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궁궐 짓는 것을 멈추고 절을 세우라 명했다. 《삼국사기》미추 이사금 원년(262) 봄 3월, 월성 동쪽 연못에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용을 추앙하고 신봉하는 남다른 신앙심이 있었나 보다. 지금도 황룡사 터를 걷다 보면 시가지 쪽엔 습한 기운이 남아있다. 학자들은 습지를 메워 궁을 지으려 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라 사람들 사이에 이곳에 용이 산다는 전설이나 소문이 있었을 거고, 용이 사는 터전을 망가뜨리는 것에 화가 미칠까 우려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왕은 주저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용보다 더 초월적인 석가모니를 모시는 절을 세우라 했을 것이다. 17년 만인 569년(기축년) 두루 담장을 쌓고 불사를 마쳤다고 한다.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은 어떻게 주조되었나 중금당 터에 오르니 커다란 돌덩이가 일렬로 놓여있다. 부처를 떠받들던 불상 받침돌 대좌다. 정 중앙엔 더 큰 돌덩이가 3개 있다. 장육상과 좌우 2구의 협시불, 즉 금동장육삼존불상이 서있던 받침돌이다. 받침돌만 봐도 얼마나 큰 불상이 서 있었을지 궁금하다. 삼존불상 대좌 양쪽 옆으로는 제자 상을 떠받들던 16개의 대좌가 남았다. 중금당 내부에는 19구의 불상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겨진 대좌는 17구가 전부다. 삼국유사에는 남해에 큰 배가 하곡현 사포(현 울주 곡포)에 와 닿았고 배에 문서가 있었다. 서축(西竺, 인도) 아육왕은 황 철 5만7000근과 황금 3만7000근을 모아서 석가 삼존(三尊)을 주조하려다 성공하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인연 있는 나라에 가서 여섯 길의 존용(尊容)을 이루소서’하는 축원문과 불상 한 개와 보살상 두 개를 실어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현리가 사연을 상세히 왕에게 보고했다. 왕이 듣고 칙사를 보내 그 현의 동쪽에 높고 깨끗한 땅을 가려 동축사를 세우고 세존 상을 모시도록 하였다. 금과 철은 서울(월성)로 실어와 태건(太建) 6년 갑오년(574) 3월에 장육존상을 주조하였는데 한 번에 완성하였다. 중량이 3만5007근이요, 황금은 1만198푼이 들었다. 두 보살상에는 철 1만2000근과 황금 1만136푼이 들었다. 황룡사에 봉안하였다고 기록했다. 장륙삼존불상은 매우 거대하고 웅장했다고 한다. 보는 이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육상의 높이는 1장 5척으로, 5m 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 최대 금동불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238년 고려 (고종 16년) 몽골의 침입으로 왕경이 쑥대밭이 되었고 수많은 절과 신라불교의 자부심을 보여주던 황룡사도, 탑과 전각, 장육삼존불상도 화마에 사라졌다. 황룡사 벽에 노송도를 그린 솔거를 아시나요? 황룡사 벽에는 신비로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삼국사기》<열전>에는 한 인물을 소개해 놓았다. 한국 역사에 기록된 인물 중 가장 오래된 화가 ‘솔거’다. 그는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린 인물로 유명하다. 소나무 줄기는 비늘처럼 주름졌고, 가지와 잎이 얼기설기 서리어 흡사 진짜 소나무 같았다. 제비, 솔개, 까마귀, 참새들이 제 집인 양 서슴없이 날아들었다가 머리를 부딪고 떨어져 죽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그림의 색이 바랬으나 새들은 계속 날아들어 부딪고 죽었다. 보다 못한 어느 승려가 솔거의 그림에 새로 색을 입혔는데 그 후로는 새들이 날아오지 않았다. 솔거가 그린 벽화 ‘노송도(老松圖)’의 일화다. 조선 역사서 《동국통감》에도 진흥왕 27년(566년)에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안타깝게도 솔거의 그림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신비롭고 궁금하다. 미천한 신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 솔거라는 인물에 대해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천한 신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당시 그가 최고의 화가임을 보여주는 일화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분황사의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와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維磨像)’과 ‘단군초상(檀君肖像)’, ‘진흥왕대렵도팔폭(眞興王大獵圖八幅)’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관음보살 삼상(三像)’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솔거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활약시기 등으로 볼 때 논란이 있다. 단속사와 분황사는 진흥왕 사후에 불사했기 때문이다. 신문왕 시절, 당나라 사람 승요(僧瑤)가 신라로 와서 활약했고, 왕이 명하여 솔거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나, 이 또한 분명치 않다. 그리하여 나는 솔거가 신라인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바람이 분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풀들이 흔들린다. 나는 좀 더 깊숙이 걸어간다. 머지않은 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황룡사구층탑과 대종 등에 관한 이야기는 경주 황룡사 터(下)에 계속
신라시대 낭산은 어떤 역할을 했나 경주에 도착하니 바람이 거칠다. 산골짜기 골짜기에서 누런 송홧가루가 피어오른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로 시작하는 박목월의 시『윤사월』이 절로 읊어지는 계절이다. 낭산(狼山)은 해발 108m로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며 남북으로 누웠다. 낭산은 멀리서 보면 누에고치를 닮았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부터 성역으로 여기며 신성시 여긴 진산 중의 진산이다. ‘왕이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서린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신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이니 당연히 복을 주는 곳이다. 이제부터 낭산의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낭산의 성역 사업은 7세기부터 본격화되었다. 선덕여왕(신라 제27대 왕, ?~647)은 자신의 죽을 날을 예언하고 도리천에 묻으라며 유언했다. 신하들은 도리천을 찾던 중 낭산이 신라의 도리천이라고 여겨 여왕의 무덤을 조성했다. 낭산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국가수호 사찰인 사천왕사 터,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 구황리 삼층석탑 등 굵직한 유적이 있다. 신라는 국가 제사를 중요도에 따라 모셨다. 낭산은 산천제사의 큰 제사를 지내던 곳이기도 했다. 남산이 백성들의 산이었다면 낭산은 귀족들만의 산이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화엄종의 창시자 의상이 출가한 사찰 황복사 진평왕릉 숲에서 쭉 뻗은 농로를 따라가면 길이 끝나는 곳과 낭산의 동쪽 끝이 만난다. 그곳에 그리 넓지 않은 물웅덩이가 있고, 낭산 기슭엔 삼층 석탑이 하나 서 있다. 황복사 터다.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에 ‘황복(皇福)’, 혹은 ‘왕복(王福)’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었고, 경주 낭산 동쪽 기슭에 황복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만큼 이곳이 황복사 터일 것으로 확신한다. 삼국유사 제4권 의상전교(傳敎)에는 신라 진덕여왕 6년인 652년 ‘의상(義湘, 625~702)이 서울(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상은 한반도에 처음으로 화엄종을 일으킨 승려다.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가다 요동 변방에서 첩자로 오인되어 잡혔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육로가 위험하다 여겨 661년 바다를 통해 중국에 가던 중 어느 무덤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큰 깨달음을 얻는다. 670년(문무왕 10년)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부석사를 세우는 등 여러 사찰을 세우고 제자들의 교육과 교화 활동을 펼친다.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제자들과 탑돌이 할 때 늘 허공으로 걸어 오르고 계단을 밟지 않았으므로 탑에 계단을 만들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제자들이 3자쯤 떠서 허공을 밟고 돌아가는데 의상이 돌아보고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괴이하다 할 것이니 세상에는 가르칠 수 없다’고 하였다. 의상은 부석사에서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해 40일간 문답하고, 황복사에서 〈화엄일승법계도〉, 태백산 대로방(大盧房)에서 행경십불(行境十佛),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90일간 〈화엄경 華嚴經〉 등을 강의했다. 의상의 강의를 듣기 위해 3천여 명의 제자가 운집했다고 한다. 아버지 신문왕을 기리기 위해 효소왕이 세운 탑 일제강점기인 1942년 삼층석탑을 수리할 때의 일이다. 2층 지붕돌을 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동사리함이 나온 것이다. 사리함 뚜껑 안쪽엔 해서체로 새긴 황금 글씨가 빼곡했다. 1행에 20자씩 총 18행, 360글자와 99기의 탑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692년 신문왕의 왕후이자 효소왕의 어머니인 신목태후와 효소왕(신라 제32대 왕)이 승하한 신문왕(신라 제31대 왕, 효소왕의 아버지)을 위하여 삼층석탑을 건립하였고, 이후 신목태후와 효소왕이 승하하자 706년 성덕왕(신라 제33대 왕)이 불사리 4과와 순금 아미타불상 1구와 불교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안치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탑 안에 무구정광경이나 99개의 흙 탑을 만들어 넣는 것은 참회하고 귀의하니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는 무구정탑(無垢淨塔)의 의미다. 황복사 터 삼층석탑엔 금동제 사리함에 99개의 사리탑을 새겨 넣은 것으로 대신했다. 황복사 터 석탑은 무구정경이 봉안된 최초의 석탑이기도 하다. 황복사 터 삼층석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기록상으로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또한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임을 밝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로 인해 황복사는 왕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종묘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십이지신상은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황복사 터 보축기단에는 십이지신상이 쓰였다. 십이지신상은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쓰던 것이다. 왕릉 석재를 사찰 기단에 사용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십이지신상은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학자들은 이곳이 가릉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곳에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만든 후 무슨 이유로 쓰지 않았고, 훗날 능이 아닌 사찰을 세우며 인근에 있던 석재를 썼을 것으로 본다. 가릉은 누구의 능이었을까 그럼 누구의 능을 준비하다 멈춘 것일까. 신문왕릉이라는 설, 성덕왕비인 소덕왕후, 혹은 효성왕비인 해명부인 김 씨의 능이라는 설, 황복사 목탑 터라는 주장도 있다. 발굴 조사 후 학계는 이곳이 효성왕(제34대 왕)의 미완의 무덤이라고 발표했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은 재위 5년 만에 병으로 숨졌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효성왕은 죽기 전 ‘무덤에 묻지 말고 화장해 동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기록한다. 왕이 몸져누워 있을 때 능을 준비하다 화장하라는 왕의 유언에 따라 능 조성을 중단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렇다면 지금 석탑이 서 있는 구황동 폐 능은 준비 중 시신이 안치되지 않고 멈춘 곳이라는 것이다.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불상, 그리고 천년을 건너온 미완은 석재 낭산 끝자락, 구황동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1962년 국보 (제3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7.3m로 감은사 터나 고선사 터 삼층석탑보다는 작지만 형태나 보존 상태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삼층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은 없어졌지만 머리장식 받침은 남아 있다. 풀밭에 우뚝 선 석탑은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하고 묵직한 인상을 준다. 수리 당시 발견된 금동사리함과 금동불상 2구도 탑과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다. 석탑에서 남쪽 풀밭은 경작이 이루어지던 논이었지만 지금은 석재유물(면석, 탱석 등)들이 놓여있다. 왕릉에서나 볼 법한 탱석, 면석, 지대석, 갑석 등 대부분이 미완의 석재들이다. 석재 주변으로 8~9세기 때 조성했을 법한 건물지와 담장, 회랑지, 도로 등과 함께 연화보상화문수막새, 귀면와, 신라 관청 이름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 등 명문기와 300여점도 출토되었다. 경문왕의 화장을 황복사에서 치렀다고 하니 지위가 높은 사찰이었음을 짐작해 본다. 비가 온 후라 석탑 아래 절터로 이어진 농로는 물이 고이고 질척대 갈 수가 없다. 멀리서 묵정밭이 되어버린 절터를 바라본다. 풀이 무성하고 물이 고인 웅덩이엔 오리 떼가 노닌다. 한때는 국가 사찰로 사람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았을 황복사 터에 이제는 풀들이 들어와 옛날을 이야기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윤을곡 마애불좌상 햇살이 일찍 찾아드는 동쪽의 땅, 서라벌의 아침이 환하다.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 두 봉우리가 너른 들판 한가운데 질펀히 누웠다. 영물인 거북이 한 마리가 서라벌 깊숙이 엎드린 형상이다. 오늘은 남산 윤을곡 골짜기를 지나 부흥사를 지나 늠비봉 절터까지 올라볼 참이다. 윤을곡과 부엉골 갈림길에서 윤을곡 산행로를 따라 걷다 왼쪽 산비탈을 오른다. 급한 경사 길에 지쳐 몇 번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드니 지척에 ‘ㄱ’ 자 모양의 바위가 보인다. ‘윤을곡(유느리골) 마애불좌상’이다. 누가 부러 가져다 놓은 병풍처럼 바위는 정교하게 꺾여있다. 누구는 ‘삼신(三神) 바위’라고도 하고, 누구는 ‘삼불암(三佛庵)’ 또는 ‘마애삼체불(磨崖三體佛)’이라고도 한다. ‘마애’는 자연 암벽에 무엇을 조각한 것을 일컫는데 주로 불상을 말한다. 정면 남쪽을 향한 바위엔 두 기의 부처를, 오른쪽 서쪽을 향한 바위엔 한 기의 부처를 새겼다. 정면 두 기의 부처는 선이 굵고 선명하게 도드라져 남성스럽다. 반면 서쪽을 향한 한 기의 부처는 선이 얕고 가늘어 도드라짐이 약하다. 석공이 초보였는지 서툰 솜씨다.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로 불린다. 자세히 보면 얼굴과 몸체 좌우엔 부처가 한 기씩, 모두 네 기가 더 새겨져 있다. 남향을 한 부처와 서향을 한 부처는 새김의 기법도 달라 서로 다른 석공의 작품으로 느껴진다. 남쪽을 향한 두 기의 부처 중, 오른쪽 부처의 어깨 쪽에는 ‘태화 9년 을묘(太和九年乙卯)’라는 글자가 있다. 신라 42대 흥덕왕(835년) 때 새긴 부처인 셈이다. 왼쪽의 부처는 약사발을 든 약사여래불로 코도 닳았고 눈도 움푹 파였다. 하필 눈이고 코다. 흥덕왕 시절, 신라는 고통에 시달렸다. 831년 지진과 832년 가뭄, 833년 기근으로 몹시 힘든 시기였다. 절박했던 사람들이 의지할 곳은 오로지 신(神)을 중심에 둔 종교뿐이었을 것이다. 존귀한 부처의 몸을 빌려서라도 살고자 했다.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온 부처 아니던가. 절망적인 사람에게 절박함이 더해질 때, 사람은 이성을 잃고 본능을 앞세우게 된다. 그러니 부처의 파인 눈이나 코는 중생의 불안한 마음을 의지할 유일한 위안이고 안식처였을 것이다.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 등산로로 내려와 오른쪽 산기슭 자드락길을 오른다. 산허리까지 올라 시야를 뻗으니 맞은편 절벽이 지척이다. 부엉골이다. 거대한 암벽, 그 어디쯤에서 대낮에도 부엉이가 운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엉골은 산세가 깊고 험하다. 포석곡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은 부엉더미 산허리에서 나를 맞았다. 서쪽 절벽을 향한 부처는 세월 탓인지 암질 탓인지, 윤곽이 흐릿해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손을 대면 돌가루가 부서져 내린다. 아, 곧 열반에 들지도 모를 일이다. 부처는 전체적인 선의 깊이가 얕고 가는, 선각에 가깝다. 산기슭 아래로 서너 발 물러서서 부처를 보니, 그제야 부처는 온전히 거기 있었다. 연꽃 대좌에 앉은 부처는 옷 주름의 곡선이 부드럽고, 연꽃의 표현이 세밀해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듯하다. 부처를 등지고 서니 남산 팔경의 하나인 부엉골 황금대가 훤히 내다보인다. 황금대는 석양이 질 무렵이면 골짜기 바위가 모두 황금빛으로 물든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 석양과 함께 부처도 금빛으로 빛난다 해서 ‘황금여래불’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부엉골 능선 절벽에 자연바위 기단 삼아 우뚝 선 늠비봉 오층석탑 늠비봉으로 가는 길은 산세는 깊어도 길은 완만하다. 길목에 부흥사(富興寺)가 있다. 봄이 한창인 부흥사는 옛 절터에 새로 얹은 절집이다. 대웅전 한편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지붕돌 한 개가 유물처럼 놓였다. 대웅전 마당엔 벚꽃 그늘이 짙다. 꽃잎이 눈처럼 내리는 이른 아침, 능선 위 만개한 벚꽃 사이로 새하얀 탑이 보인다. 늠비봉 오층석탑이다. ‘늠비’는 우뚝 선 봉우리에서 뚝 떨어지는 낭떠러지를 뜻한다. 금오산 삼릉 능선과 오른쪽 해목령 능선 가운데, 부엉골을 향해 뻗어가던 능선이 갑자기 뚝 끊겨 절벽을 이룬다. 그 봉우리가 늠비봉이다. 포석곡 제6사지인 작은 늠비 절터 입구에 들어서면 늠비봉 절벽에 서 있는 오층석탑의 웅장함에 말문이 막힌다. 시원스레 잘 생겼다는 표현 외에 딱히 어울리는 말이 없다. 늠비봉 아래 무너지고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했다고는 하나, 1000년 전 이렇게 웅장하게 탑을 쌓을 기술이 있었느냐는 의문이 든다. 믿기지 않는 것에 대한 의심이라기보다, 웅대함에 대한 놀라움이다. 대부분의 탑재가 없어지거나 약해, 옛 석재와 새 석재를 섞어 복원했기에 지나치게 현대적이다. 하지만 산봉우리 절벽 바위에 저렇게 높은 탑을 우뚝 세운 건, 현대 기술이라 할지라도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산봉우리 자연 바위를 기단으로 삼아 올린 탑은, 산 전체가 탑이고 탑이 산 전체인 셈이다. 탑 아래서 올려다보면 하늘로 치솟은 다섯 개의 지붕돌 모서리가 조금의 틀어짐 없이 일직선으로 나란하다. 누구의 발원으로 세워졌는지 모르나, 석재를 고르고 다듬고 올렸을 적잖은 공들임은 오직 불심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고 서라벌로 이주한 백제인들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쌓은 것은 아닐까.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아득히 먼 고국을 향했을 백제인들. 그들의 짙은 그리움만큼 탑은 한 층 한 층 높이를 더했을 것이다. 그렇게 지붕돌은 다섯 개에 이르렀고, 그들은 염원이 하늘에 닿기를 바랐을 것이다. 탑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느낌도 다르다. 백제인이 기원이라는 가정 하에 탑을 보노라면 무한한 쓸쓸함과 애잔함이 더해진다. 크고 단단한 바위는 자체만으로 신성한 신앙처가 된다. 그들이 쌓은 것은 단순한 예술적 상징의 돌탑이 아니다. 마음을 기댈 버팀목이자 위로이자 안식처였다. 자연 바위를 그대로 기단으로 삼았으니 탑의 뿌리는 가늠하기 어려운 지맥 저 깊은 어디쯤일 것이다. 사람은 비록 세파에 흔들릴지언정 암반을 기단으로 삼은 탑은 흔들리지 못하니, 그들의 웅혼한 염원을 담은 탑만은 절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작은 늠비봉 절터, 큰 늠비봉 절터 탑 뒤엔 작은 늠비봉 절터가 있다. 터를 보니 그리 큰 절은 아니었을 테고, 단칸의 법당 정도만 겨우 갖춘 암자였을 것이다. 앞은 절벽이고, 사방 천지는 탁 트였으니 불어오는 비바람에 부단히 고단했을 것이다. 탑을 뒤로하고 금오봉을 오른다. 빼곡히 들어선 나무숲에 군락을 이룬 진달래가 절정이다. 100여m 남짓 올랐을까.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절터가 아닐까’ 생각할 무렵, 한 치 앞에 절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나타난다. ‘포석곡 제7사지(큰늠비 절터)’를 알리는 표지 뒤로 일대에서 수습한 탑재 일부를 정리해 놓았다. 잡목이 우거진 숲 사이로 평지가 보인다. 필시 작은 암자는 아니었을 테다. 법당과 별도의 요사 한 채가 들어서도 될 만큼의 넓이다. 바람이 일자 대숲이 요란하다. 나는 나른한 상상으로 빠져든다. 숲은 사라지고 법당과 요사채가 가지런히 놓인다. 큰스님은 법당에서 염불을 외고, 수행스님은 마당을 쓴다. 또 다른 스님은 장작을 패고, 동자승은 마당에서 볕을 쬔다. 동자승 발치에 흰둥이 한 마리가 몸을 누였는데, 동자승이 머리를 쓸어주면 졸음에 겨운 듯 눈을 뜨지 못한다. 등 굽은 보살이 찾아와 스님을 향해 합장하고 법당으로 들어선다. 한참 뒤 법당에서 나온 보살은 산기슭 바위마다 손을 모아 합장한다. 어느 따스한 봄날의 절간 풍경이 곱고 나른하다. 한 무리 바람이 일고, 등산객들이 절터를 스치고 멀어진다. 평지는 다시 잡목 우거진 절터로 바뀐다. 큰 늠비 절터에서 뒤를 돌아본다. 우뚝 선 오층석탑과 경주 시가지가 훤하다. 사람들이 바위마다 부처를 새기고 돌을 쌓아 탑을 올린 이유와 서라벌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 법등을 올리며 염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신(神)을 찾아 산으로 왔다. 산과의 교감이 곧 신과의 교감이라는 것을 믿으며, 신은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보듬어 치유하는 존재라고 믿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찾아든 골짜기엔 아직도 신이 살아서 발길 미치는 자마다 복을 누리게 한다는 말을 믿고 싶다. 세월이 흘러 탑은 와르르 무너졌을지언정, 제 뿌리는 늠비봉이라는 것을 탑은 알 것이다. 수백 년 흘러, 탑은 후대의 손을 빌려 다시 일어섰다. 탑이 어떤 모습으로 긴 세월을 살아남았든 제 뿌리의 근원만은 잊지 않았다. 다시 늠비봉으로 내려와 석탑이 보이는 바위에 걸터앉는다. 해가 서녘으로 기운다. 탑을 떠받들던 부재들은 늠비봉 한편에 누워 ‘과거’가 되고, 탑은 ‘현재’가 되어 세상에 순응하고 있다. 박시윤 답사기행작가
토함산 자락, 노루 ‘장(獐)’, 목덜미 ‘항(項)’, 장항리 절터 해발 745m의 토함산(吐含山)은 경주의 동쪽을 수호하는 산이다. ‘머금었다 토해낸다’는 뜻으로 신라 때부터 동악(東嶽)이라 부르며 진산(鎭山)으로 신성시했다. 토함산이 동쪽으로 뻗어가는 능선 그 어디 즈음에 이름 모를 절터가 있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장항리 절터 앞을 지나 대종천과 섞여 감은사 터를 적시고 문무대왕릉이 있는 동해로 간다. 골짜기 중 골짜기, 아는 사람만 찾아간다는 곳. 해가 기우는 늦은 오후, 감포로 가는 구불텅한 옛길을 따라 토함산 자락 어디까지 오르니 장항리는 벌써 그늘에 들었다. 사찰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장항리(獐項里)’라는 마을 이름을 따 ‘장항리 절터’로 이름을 붙였다. 노루 ‘장(獐)’, 목덜미 ‘항(項)’, 장항은 ‘노루목’을 뜻하는 지명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가 노루목처럼 가늘고 길어서일까, 아니면 이곳에 노루가 많아서일까. 아니면 노루 눈빛처럼 순둥순둥하고 선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일까. 무엇이 이름 없는 절터의 이름이 되었는지 모르나, 인적 드문 곳을 찾는 객에게 아주 간간이 어린 노루가 나타나 힐끗 쳐다보고는 나무숲 사이로 사라지곤 했다. 해가 넘어간 산골짜기엔 묽은 어둠이 먼저 내린다. 뒤이어 스산한 바람마저 불면 어떤 쓸쓸함까지 더해져 마음을 내려앉게 한다. 돌아갈까, 아니다. 멈출 수 없는 건 실루엣을 드러내는 산 능선 아래, 불그스름한 빛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탑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비워진 공간이 어두워서 더 환해지는 저녁의 처연함은. 비워진 듯 채워진 절터만의 느낌일 것이다. 아침이 건 저녁이 건, 사라진 산중 절터의 분위기를 안다면 누구라도 결코 쉬이 돌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가던 길 멈추고 먼발치서 석탑의 상륜부만 바라보다 뭣에 홀린 듯 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봄비가 넉넉히 내린 터라 겨우내 말랐던 계곡이 여유롭게 흐른다. 물길을 건너가는 일, 이쪽을 등지고 저쪽을 향해 가는 일이다. 번뇌로 가득한 속세를 잊고 자비와 평화가 깃든 부처의 세계로 가는 일이다. 그렇게 물길을 건너가는 건 마음을 비우고 비우는 일이다. 산기슭을 두른 풀마다 기운이 치솟고, 절터를 돋운 벼랑 언저리마다 이 작고 가녀린 풀들이 돋고, 이 풀에 꽃이 피니 산천이 무릉도원처럼 몽글거린다. 모든 걸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숲 사이로 들리는 짐승 우는소리, 나무를 잠재우는 어둠, 무른 것과 단단한 것을 만지고 온 바람에 이르기까지 여기서 만은, 여기서 만은 모든 게 혼몽에 젖는다. 절터 지키는 두 탑 중 서탑은 국보 장항리 절터에 올라서면 오직 나는 이 봉우리의 주인이 된다. 산봉우리 하나 싹둑 잘라 부처를 모실 사찰을 얹었으니 이 얼마나 귀한 땅인가. 누가 여기에 산을 깎고 탑을 세우고 부처의 나라를 만들었을까. 경주는 신라의 수도였다.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 발길 닫는 곳마다 절이 많았다. 그러기에 지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절터도 많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룡사 터를 비롯해 너른 터를 자랑하는 절터들도 있다. 장항리 절터는 매우 좁다. 겨우 금당 하나 들어설 만큼의 넓이다. 그러나 절터의 넓이보다 석탑의 웅대함에 넋을 놓고 만다. 불가에서 탑은 엄숙한 존재다. 사람들은 탑을 향해 부처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복을 빌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탑의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붉을 빛을 내며 미끈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은 서탑, 그리고 시루떡을 피라미드 쌓듯 쌓은 동탑. 다소 엉뚱한 모습의 동탑은 경주를 돌아다니며 익숙해져 있던 탑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충격적이라는 말, 바로 이 동탑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몸돌 하나에 다섯 개의 지붕돌을 켜켜이 얹어 놓은 것이 전부다. 대체 왜 이런 부족한 모습이 되었을까. 도굴범 손길 피하지 못한 두 탑과 석조여래불 장항리 절터는 경주 시가지에서 깨나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의 관심이나 관리를 받지 못했다. 1923년 도굴꾼들은 두 탑 속에 든 사리장엄구와 불상의 복장물을 탐했다.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탑과 불상이 꿈쩍도 하지 않자, 근처에 있는 금광에서 폭약을 가져와 폭파했다. 폭약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탑과 불상은 깨지고 넘어져 풀밭을 구르거나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석불을 비롯한 두 탑은 크게 파손되었다. 무엇보다 동탑이 큰 타격을 입었다. 계곡으로 굴러떨어진 동탑은 거센 계곡 물살에 유실되어 동해로 흘러갔을 것이다. 1965년 계곡에 떨어져 있던 잔해를 수습해 복원하였으나, 몸돌 하나에 지붕돌 다섯 개가 전부였다. 결국 있는 것만 쌓아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다.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불균형한 모습으로, 보는 이들로 하여 충격적인 모습으로 남게 된 이유다. 석불은 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고, 절터 풀밭에 넘어져 있던 서탑은 비교적 온전하게 복원되었지만 상륜부엔 노반만 남았다. 서 오층석탑은 국보(제236호)로 지정되었다. 서탑을 복원한 이는 일본인 후지시마 가이치로(藤島亥治郞)였다. 그는 복원 당시 다수의 상륜부 부재들을 찾았으나 당시는 복원하지 않았고, 이후 이 부재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서 오층석탑은 상처가 있기는 하나, 가늘고 시원한 모습을 되찾았다. 상층과 하층의 기단은 여러 개의 판석을 깔았고 기단 모서리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겼다.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지붕돌이 균형을 유지하며, 지붕돌 모서리 끝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아이의 해맑은 입꼬리 같기도, 깍쟁이들의 눈꼬리 같기도 하다. 탑에 새겨진 예술성 뛰어난 금강역사상은 사악한 것 막는 수문장 동탑과 서탑 모두 몸돌 각 면에 문(門)을 새기고 문 중앙에는 용의 얼굴과 문고리를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새겼다. 인왕상(仁王像)으로도 불리는 금강역사는 인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찰의 문이나 입구를 지키는 1쌍의 천부신장상(天部神將像)이다. 보통 좌우에 무서운 표정을 하고 마주 보며 서 있고, 머리에는 정수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두광(頭光)이 표현돼 있다. 커다란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하고,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을 자랑하기도 하는데 금강역사는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악한 것이 성스러운 부처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금강역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며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노라 손을 모으고 몸을 숙여 다짐하게 된다. 입을 벌리고 한 손에 금강저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으면 아금강상(阿金剛像), 입을 꽉 다문 채 주먹으로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음금강상(吽金剛像)이라고 한다. 금강역사상은 장항리 절터 석탑의 독특한 특징이다. 전체 비례가 균형이 있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뛰어나다. 다만 동탑과 서탑에 새겨진 인왕상은 서로 다른 석공의 솜씨로 보인다. 서 오층석탑의 인왕상은 굉장히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인왕상이 밟고 있는 연화좌(蓮華坐)는 세련미를 더한다. 누구의 솜씨인지 예술적 감각이 경지에 오른 듯하다. 그러나 동 석탑의 몸돌에 새겨진 인왕상은 세밀하지 못하고 뭉툭하고 투박하다. 이목구비마저 다소 느슨해 다듬다가 만 듯한 모습이다. 인왕상이 딛고 있는 것은 연화좌가 아닌 사각의 어떤 받침으로만 표현됐을 뿐이다. 불상대좌 익살스런 사자 모습에 찾는 이들 흐뭇 금당지에 놓인 불상대좌는 누구라도 올라와 부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라는 듯 풀밭에 휑하니 놓여있다. 거대한 돌덩이도 부처를 모시는 대좌가 되어 어느 한 시대를 평정했겠지만 세월을 비껴갈 수 없었다. 부처는 없고 몸뚱이엔 굵은 금이 쩍쩍 갔다. 아랫단은 팔각으로 조각을 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이다. 대좌엔 사자 부조를 새겨 놓았는데 그 모습과 표정이 얼마나 귀엽고 익살스러운지, 하루 종일 마주하고 앉아 놀아도 지겹지 않을 듯하다. 누군가를 향해 한 대 칠 듯한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무서운 것은 아니다. 사자의 용맹함은 없고 그저 익살스럽기만 하다. 이래서 보살을 지킬 수 있겠냐고 묻고 싶다. 탑 뒤에는 흙을 돋움을 한 금당 터가 있다. 장항리 절터는 회랑이나 강당이 없는 단칸의 암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절터 뒤쪽은 가파른 산이고 앞쪽은 절벽의 계곡이니 또 다른 건물을 상상해 낼 여지가 없다. 굳이 생각하자면 서탑 옆으로 단칸의 움막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장항리 절터는 인간의 욕심과 무지함으로 불행을 기억하는 비운의 절터다. 시원스레 하늘을 이고 선 서탑과, 몸돌 하나에 지붕돌만 얹은 동탑, 그리고 주인 없는 대좌만 덩그러니 풀밭을 지키고 있는 늦은 오후, 나는 홀로 부처의 세계에 든 채 풀밭에 서 있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금오산과 고위산을 통틀어 남산이라 한다. 태초에 남산은 배경처럼 남과 북으로 길게 누웠다. 남산이 흘러내린 곳엔 완만한 언덕과 너른 벌판이 펼쳐지고 벌판을 가로지르며 남천(南川)이 유유히 흐른다. 사람 살기에 마땅한 땅이었다. 남산을 사이에 두고 사람과 사람이 모이고, 고을과 고을이 생기니 사람들은 자연스레 왕을 추대했다. 왕들의 나라, 귀족들의 땅, 서라벌은 그렇게 역사와 역사를 잇대며 오늘까지 이어져 경주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한 이야기는 신라사를 논할 때 적지 않게 등장한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가 있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왕들은 남산에서 신(神)을 만나 춤을 추고 대화했다. 백성들은 남산에 올라 소원을 빌고 영험함을 기다렸다. 삼국유사 기록, 궁궐 남산 서쪽 기슭은 창림사 터 35번 국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기슭에 하얀 탑 하나가 서 있다. 제법 묵직한 느낌의 큰 탑은 신라왕조 궁궐터로 알려진 곳에 서 있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이다. 절은 사라졌지만, 석탑이 남아 사라진 과거의 땅임을 알려준다. ‘昌林(창림)’이라 적힌 기와가 발견되면서 사찰 이름이 확인되었다. 창림사가 언제 창건되었고 폐사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창림사지를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첫 궁실로 기록하고 있다. “궁궐은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지)에 세우고 두 성스러운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월성에 궁궐이 지어지기 전의 궁터로 추정하는 대목이다. 창림사지는 통일신라 시대에서 고려 시대로 편년(編年)되는 연화문·보상화문(寶相華文)·비천문(飛天文)·귀목문(鬼目文) 와당(瓦當)과 명문 기와 등이 출토되어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사찰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의 혁거세 왕의 탄생 설화가 서린 나정(蘿井)과 함께 신라 초기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추정하는 곳이기도 하다. 남산에서 가장 크다는 창림사 터 삼층석탑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남산에 있는 석탑 중 가장 큰 탑으로 알려졌다. 1824년 도굴꾼에 의해 석탑이 무너졌다. 이때 사리공 속에서 탑의 건립 배경과 참여 인력, 발원 내용 등을 기록한 금동판 ‘무구정광다라니경’과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가 발견되었다. 경주 창림사에 왕명으로 석탑을 조성한 후 황금으로 도금한 동판에 그 내력을 기록하게 한 기록물이다. 문성왕(신라 제46대 왕)의 생전 이름은 ‘경응(慶膺)’이며 ‘무구정(無垢淨)’은 통일신라시대에 탑을 세우는데 근거가 되는 불교 경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의미한다. 한참 세월이 흘러 조선 순조 24년(1824년) 조선시대 서예가, 금석학자, 정치가, 실학자 등 많은 활약을 펼쳤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당시 창림사 터를 찾았다가 무구정탑원기에 새겨진 발원문 무구정탑의 조성에 관한 기록을 베껴 두었다. 이 발원문에 신라 문성왕 17년인 855년에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후대에 이르러 이견이 일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은 ‘현존하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탑의 양식으로 볼 때 문성왕 대보다 100여년 앞선 7세기에 세워진 것이라서 탑지와 연대가 어긋나 보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탑은 2중 기단을 만든 후 3개 층의 탑신부를 얹은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 양식을 띈다. 아래층 기단은 돌 하나에 면석(面石)과 그것을 받치는 저석(底石)을 나누어 다듬는 한편 각 면석에는 일종의 기둥인 탱주 3개를 표현했다. 불교 미술사학계에서는 탱주 개수에 따라 석탑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로 삼기도 한다. 이는 석탑을 만든 시기를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말로 보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이와 함께 10개의 석재로 된 하층 기단부 양식은 8개 석재로 만든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과 경주 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국보 제236호)보다 훨씬 옛날 석탑으로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창림사지 석탑의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상층 기단 면에 돋을새김한 팔부신중이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乾闥婆)·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睺羅迦), 여덟 신장(神將)을 일컫는다. 현재 남면(南面) 1구, 서면(西面) 2구, 북면(北面) 1구, 아수라·용·천·건달바만 남았고, 나머지 면석은 파괴된 채 방치되다가 복원하면서 새로운 면석으로 교체되어 팔부신중 없이 비워둔 상태다. 특히 눈에 띄는 신중은 아수라다. 육중한 탑 면에 조각된 아수라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삼면육비 三面六臂)인 형상으로 매우 선명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사실적인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아수라는 힘이 세고 위력이 대단하여 싸움을 일삼는 나쁜 귀신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파괴되고 어지러운 상태, 처참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아수라장(阿修羅場)’이라고 말한다. 이 말의 어원이 바로 육도(六道) 팔부중(八部衆)인 아수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규모와 완성도 면에서 매우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팔부신중이 조각된 탑은 안동 법흥사지 전탑, 구례 화엄사 사사자탑, 경주 인용사지탑, 양양 진전사지탑 등이며, 인왕상이 조각된 경주 장항리사지탑, 십이지신과 사천왕상이 조각된 경주 원원사지탑 등이다. 창림사지 팔부신중 조각은 다른 탑의 조각 수법과 비교해 볼 때도 기랑 면에서 결코 부족하지 않다. 창림사 터 쌍귀부, 사라진 비신(碑身)의 비문(碑文)은 신라 명필 김생이 썼다 삼층석탑 아래 흙바닥에 엎어져 있던 쌍귀부는 어디로 갔을까. 필자가 처음 창림사 터를 찾았을 땐 석탑 아래 풀밭에 쌍귀부가 있었다. 그러나 올 봄 다시 찾았을 때 쌍귀부는 오간데 없었다. 어디로 옮겼다는 안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쌍귀부는, 부대석은 모죽임기법으로 사각 모퉁이를 부드럽게 돌려 깎았고, 대석 위에 쌍 거북이가 나란히 엎드려 큰 비석을 등에 지고 있는 형상이었다. 머리는 둘 다 떨어져 없고, 다만 한 마리의 머리만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 했다. 귀부 위 비신(碑身)도 사라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비문(碑文)은 신라 때 김생(金生)이라는 인물이 창림사비(昌林寺碑)를 썼고 이를 원나라 학사 조맹부(趙趙孟頫, 1254~1322)가 창림사비 비문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당대 신라 승려 김생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다’라면서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나라의 명각(各刻)이라도 그보다 뛰어나지는 못할 것이다’고 찬양했다. 김생은 711년(신라 성덕왕 10년)에 태어나 80세가 넘도록 살았으며 죽을 때까지 붓과 벼루를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첫 왕의 탄생 설화가 서린 나정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왕궁 터 창림사지가 신라의 첫 왕이 생겨나고 첫 왕궁터로 자리 잡은 곳이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 땅의 쓸모를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깃든 나정이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서로 다른 생각의 사람을 모아 하나로 모으며 무리를 만들고 그 무리를 모아 나라를 열고 이끌며, 불완전한 사로국을 이끌어가야 했던 13살 어린 왕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곳에서 느껴볼 만한 특별한 감흥은 바로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는 것이다. 경주의 서쪽이 훤히 내다보이는 특별한 풍경을 바라보며 한 시대를 시작했던 ‘첫’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박시윤 답사기행작가
구절양장 추령을 넘으니 내리막길 끝에 널따란 대지가 펼쳐진다. 신비로운 세상이 나타날 것처럼 순하고 연한 땅이다. 메마른 하천엔 이름 없는 돌들이 호기롭게 누웠다. 저기 코앞이 바다인데 굴러갈 내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 이것이 인생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 그러기에 오늘만큼은 조금 게을러도 괜찮다. 경주에서 감포로 넘어가는 길목에 불현듯 두 기의 탑이 있다. 감은사 터다. 야트막한 산과 들과 탑은, 별다른 구분 없이 서 있다. ‘끼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또 지나칠 뻔했다. 여전한 곳을 왜 매번 가늠하지 못하는지. 새로울 것도 없는 저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처음 심연에 각인된 순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격정이었다. 파도가 뒤집히는 것보다 거칠게 다가오는 땅, 험하게 나를 끌어들이는 매혹의 순간엔 마치 저곳에 도깨비가 사는 듯했다. 시야를 빼앗고, 혼을 빼앗아 저들 마음대로 내 영혼을 놀아나게 했다. 신문왕, 아버지 은혜 감사한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신라의 호국사찰이었다. 태종무열왕의 장자로 신라 30대 임금인 문무왕(재위 661~681)이 삼국을 통일하고, 불문으로 나라를 더욱 굳건하게 다지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무왕은 감은사가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절은 이듬해 신문왕에 의해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 문무왕이 지었던 사찰명은 ‘진국사(鎭圍寺)’였으나,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업적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라 바꿨다. 감은사는 죽은 왕의 능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능침사(陵寢寺) 같은 절이었다. 문무왕은 평소 승려 지의에게,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이라는 서원을 자주 남겼다. 용은 축생의 응보인데 어찌 왕이 짐승으로 태어나겠다고 하는지, 지의는 그저 민망했다. 문무왕이 말했다. “세간의 영화를 버린 지가 오래되었다. 축생으로라도 나라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의 시신은 불태워진 뒤 동해 대왕암(大王巖)에 뿌려졌다고 한다. 금당은 좀 유별나게 지어졌다. 바닥은 큰 돌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돌 위에 장대석을 마루 깔 듯 걸쳤다. 사용된 주춧돌을 보면 유별스러운 웅장함이 보인다. 금당 터 앞의 석재엔 태극무늬를 새겼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 같지만 쓸모를 알 수 없다. 위엄 있고 엄숙한 절제가 곳곳에 스몄다. 동해와 감은사 사이엔 특별한 길이 있다. 바다와 절을 잇는 용혈이다. 동해에서 대종천을 타고, 절 아래 용담을 지나 금당 아래까지, 바람이 들고나는 허공의 길이다. 보이지 않는 길은 그렇게 현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모았다. 금당 아래 공간으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한 구조라고 해설사가 말했다. 신문왕이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만든 특별한 구조라는 그럴싸한 설명이 흥미롭다. 신라엔 재밌는 설화가 전해진다. 앞바다에 작은 산이 떠다니며 유유자적했다. 산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기이하게 여긴 신하들이 왕에게 전했다. 신문왕이 직접 산에 들어가니 용이 된 문무왕이 나타났다. 동해의 신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신라에 보내는 것이니,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했다. 대나무를 베니 산은 거북이가 되어 사라졌고, 피리를 만들어 불었더니 적이 물러가고 질병이 없어지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홍수가 지면 비가 그치고 바람과 물결이 잦아들었다. 이 피리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해설사가 말했다. 해설사의 말에 빠져들 무렵, 바람이 불었다. 절터 뒤편에서 대나무 부딪는 소리가 요란했다. 만파식적이라도 되고 싶은 요량인지, ‘떵, 떵, 땅’ 비슷하나 서로 다른 소리로 요란하게 부대꼈다. 왕실의 사찰이라고는 하나 금당과 강당, 회랑 터만 존재하는 걸 보면 감은사는 작은 암자 수준으로 보인다. 서쪽 귀퉁이에 작은 승방 터만 있을 뿐, 스님들이 머물렀을 법한 마땅한 공간이 없다. 왕실의 귀족들이 드나들었던 사찰답게 눈과 비를 피해 드나드는 회랑은 잘도 갖췄겠지만, 사찰을 지키고 법문을 행하는 스님들을 배려하지 않은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하다. 그러나 어쩌겠나, 옛날은 이미 멀어졌고 이것도 남겨진 역사인 것을.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보니 1950년대까지만 해도 감은사 터 곳곳에 민가가 존재했다. 어쩌면 절이 지어지기 전에도 이곳은 사람의 터전이요, 절이 무너진 후에도 천년이 지나도록 사람이 빗대고 빗대어 온 삶의 터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깊은 산중 이름 없는 절터를 찾아가면, 그곳엔 다시 땅의 주인들이 들어와 무성하곤 했다. 감은사는 분명 사람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사적지로 지정되어 사람이 살 수 없지만, 바다에 빌붙어 먹고사는 것을 해결했을 사람은, 본능적으로 볕이 고르게 드는 평온한 터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감은사 터 역시 사람과 역사가 섞이며 더불어 왁자했을 것이다. 지금껏 많은 절터를 떠돌았다. 사람의 인적이 끊긴 깊은 산중에도, 마을 어귀 경작지에도. 산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절터에 비하면 감은사 터는 법등은 끊어졌어도 사람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간 감은사 터가 불편했다. 와글대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불편했고, 빈틈없이 연결된 역사의 이야기와 작위적으로 꾸민 절터의 곳곳이 흥미로우면서도 숨이 막혔다. 빈 공간에서 마음대로 풍경을 떠 올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함부로 상상하고픈 습성이 감은사 터에서는 꽉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실체가 있으니 막히고, 형식이 있으니 구속되고, 경계가 뚜렷하니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야윈 느티나무, 폐사지 쓸쓸함 더해 이곳엔 한 해 한 해 야위어가는 느티나무가 있다. 듬직하고 늠름한 3층 쌍탑 뒤에서, 하나의 배경이 되어 그간 무수히 많은 사진을 장식했을 나무다. 느티나무는 헐벗었다. 망한 절을 두고 떠나던 스님들처럼 나무도 곧 떠날 채비를 하는 것 같다. 승려들은 저 거대하고 웅장한 탑을 두고 애석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떠났을 것이다. 언제고 다시 절이 일어서기를 염원하며 다시 돌아오마 기약했을 것이다. 세상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을 승려들은 다들 어디서 해탈하셨을까. 여기서 발아해 한평생 절터를 지키며 늙어가는 저 느티나무는 감은사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리다 열반에 든 노승의 환생인 것만 같다. 지난 여름, 탑이 아니라 나무를 보러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웅장하게 선 석탑을 더 돋보이게 하는 건 배경처럼 서 있는 느티나무라는 생각을 했다. 깊은 산중에 마음껏 뿌리 뻗고, 마음껏 그늘을 키우는 나무로 발아했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더 육중하고 푸르렀을까. 지난 여름엔 이곳에 오래 머물렀다. 학생들이 문화탐방을 왔다 갔고, 모 동호회에서 다녀갔다. 때로는 가족들이, 때로는 관계를 헤아릴 수 없는 모호한 무리가 다녀갔다. 나는 그들을 피해 풀섶에 앉아있거나 누워 있다가 관리인으로부터 눈총을 받거나 주의를 받았다. 절터 아래엔 매일 소박한 난전이 섰다. 마을 어르신들은 내가 건네는 눈빛에 반가워하며 가져나온 곡물보다 더 많은 감포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역사책보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내 귀를 건드렸다. “저 탑 안에서 부처님 사리를 모신 금으로 된 뭣(사리장엄구)이 나왔다 카니더. 우리는 한 번도 보도 못했니더. 우리 같이 나(나이) 많은 늙은이는 봐도 뭔동 모르지만. 그래도 한번 봤으만 좋지. 암, 좋고 말고지” 절집은 사라지고 풀밭이 되었고, 바다는 물러나 뭍이 되었다. 이른 봄 감은사 터 너머로 가뭄 든 대종천 물줄기가 흐릿하게 흐른다. 곧 바다에 당도할 물줄기다. 대종천은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운 몽골군이 황룡사 대종을 동해로 옮기려다가 빠뜨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로 떠밀려간 종은 비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바다가 뒤집히는 날엔 ‘웅, 웅’ 하고 운다고 했다. 대종이 우는 소리를 저 나무와 석탑은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누가 소리 없이 찾아와 겨드랑이를 간질이면 대종의 매무새나 그 울음소리가 어떠했는지 조곤조곤 말해줄 것만 같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어느 날 문득 마음이 동하면 나는 또 여기, 감은사 터를 찾아와 종일 앉아 막연한 역사를 떠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박시윤 답사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