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파 선생의 문화적 업적 중 하나는 경주의 역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동경통지(東京通志)를 편찬한 일일 것이다. 동경통지는 1933년에 한문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없던 것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다. 원래 1669년(현종10년)에 민주면(閔周冕)이라는 사람이 그 이전에 작자미상으로 내려오던 ‘동경지’란 책을 증수하여 편찬한 ‘동경잡기(東京雜記)’가 있었다. 이것을 중간에 몇몇 학자들이 중간한 것을 문파 선생이 최종적으로 보강해 펴낸 것이다.        육당 최남선, 위당 정인보 선생이 동경통지를 펴던 병촉헌, 최기영 공의 유림 유화책으로 세워져 이 동경통지는 알려져 있다시피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선생과 위당(爲當)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이 경주로 와서 1년 남짓 머무르며 감수 보완하여 만든 책이다. 이때만 해도 육당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고 정인보 선생 역시 민족사학자로서 쟁쟁한 명성을 드날릴 때다. 특히 정인보 선생은 경주에 머무는 동안 경주 선비들과 교유도 많아 나중에 경주고등학교 창립자인 수봉(秀奉) 이규인(李圭寅) 선생의 동상에 기념문을 쓰기도 했다. 동경통지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여러 가지 사료를 근거로 14권 7책으로 꾸민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현재 규장각과 서울대 박물관, 영남대 도서관, 한국학연구원 등에 나누어 소장되어 있는데 아직까지 자세한 번역본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안타깝다. 최염 선생 역시 그런 안타까움을 토로한 바 있다. 선생은 이 책에 대해 문파 선생이 설명한 것을 종합해서 이렇게 설명해주셨다. “할아버지가 만드신 책인데 내가 그 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데다 설령 책을 가지고 있어도 한학에 조예가 없어 책을 봐도 그 내용을 다 알지는 못하는 것이 송구하지요. 다만 삼국사기 등에서 신라본기를 떼 내어 경주부분을 강조했고 신라의 탄생 신화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을 종합해놓았다는 것, 역사와 지리, 풍속과 인물 등에 대해 망라된 경주역사백과사전과 같은 책이라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이 책도 중요하지만 나로서는 이 책을 지을 때 최남선 선생과 정인보 선생이 머무른 병촉헌(炳燭軒)에 대한 이야기가 더 실감났다. 병촉헌은 지금은 교촌 한옥마을 서쪽 편으로 옮겨져 있는 사마소(司馬所)의 부속 건물이다. 사마소는 원래는 경주 반월성의 남서쪽 귀퉁이, 지금의 월정교 남쪽 석축 부근에 세워져 있던 건물이다. 사마소는 16세기 초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인 사마시(司馬試) 출신의 유림(儒林) 선비들이 고을 수령의 자문기관 노릇을 한답시고 만든 자치 기구이다. 사마소 이전에는 훈구세력들이 유향소(留鄕所)를 설치하고 지방관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마소는 그 폐단을 근절하고 맞서는 사림의 역할로 세워졌으나 나중에는 이 역시 양반 토호들의 압력단체로 변모하여 갖은 악폐를 저질렀다. 결국 사마소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건의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지방에 따라 그 여파가 남아 백성들을 괴롭히는 폐단을 일삼은 곳이다. 그렇다면 병촉헌은 사마소와 어떤 연관이 있고 최부자댁과는 어떤 관계였을까? 병촉헌은 이조리에서 교촌으로 이주해 온 최기영 공이 전체 비용을 들여 세운 건물이다. 이 앞장에서 최부자댁이 교촌으로 이사 오는 과정에서 향교로 인해 집터 깎은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이것은 자발적인 일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당시 향교를 중심으로 경주에 뿌리 내리고 살던 유림들이 최부자댁이 이사 오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대한 결과이기도 했다. 요새로 치면 도시개발을 하는데 환경단체나 근처 학교 학부형, 그 지역 세입자 단체가 반대하는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림들이 무턱대고 반대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 교촌 이주는 비록 최기영(1768-1834) 공 때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 땅을 사둔 장본인은 최기영 공의 조부이신 최종률(1724-1773) 공 때여서 충분한 정지 작업을 마친 뒤였다. 오죽하면 지기를 북돋우기 위해 나무를 심어 보비림을 가꾸기까지 했을까. 한두 해도 아니고 2대에 걸쳐서 땅을 사두고 바로 그 내 땅에 내가 집을 옮겨 오는데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 요즘의 도시개발사업 같았으면 재벌기업과 행정기관이 결탁하여 반대하는 단체가 있건 없건 재력과 공권력으로 밀어 붙여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최기영 공은 그런 일방적인 불만을 허투루 대하지 않고 유림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쳤다. 이때 최기영 공이 취한 조치들을 살펴보면 첫째, 향교의 존엄성을 존중하여 땅을 향교보다 석 자 낮게 파내고 이조리에 지어져 있던 집 기둥도 두 자나 깎았으며 솟을대문도 낮게 세웠다. 둘째, 향교를 지원하고 유학을 발전시키겠다 약속했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해 옮겼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병촉헌 건립이었다. 지금도 경주 사마소가 경상북도문화재 2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과 별개로 병촉헌은 영남대학 재단의 소유로 등록되어 있는데 이 병촉헌 역시 문파선생이 영남대학의 전신 대구대학에 전 재산을 기증할 때 함께 기증했기 때문이다. 이 병촉헌은 원래 나이 많은 유림들을 위한 사랑방 역할로 세워졌는데 보기와 달리 문파 선생이 서책들을 보관하던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최부자댁 전래의 고서들은 대개 최부자댁 사랑채를 중심으로 향교 서고(書庫)와 병촉헌 서고에 각각 나누어져 보관되었는데 바로 이 병촉헌이 그 서고 기능의 일부를 담당했던 것이다. 화적당마저 함부로 행패부리지 않았던 최부자댁 인심, 경주가 화적당으로부터 안전해져 이 병촉헌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1대 최부자 최현식(1854-1928) 공 때 경주 인근 지역에 활빈당을 자처하는 화적당이 창궐해 교촌까지 그 화가 미쳤다. 이때 활빈당 괴수가 ‘구물천’이라는 자였는데, 이 자가 교촌까지 들어오긴 했지만 최부자댁은 절대 건드릴 수 없다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교촌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남천을 건너 사마소에 와서 행패를 부린 모양이었다. 당시 사마소와 최부자댁 본가와는 걸어서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구물천 일당이 사마소에서 행패를 부린 것은 사마소에 못된 양반들이 모여 있으면서 걸핏하면 힘없는 백성들을 잡아다 놓고 겁박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소에서 재물을 내놓으라고 호령하던 구물천이 뜻한 만큼 재물이 모이지 않자 사마소 부속 건물인 병촉헌에 불을 놓아 본때를 보이려 했다. 그러나 한창 불이 붙으려고 할 때 마침 이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최부자댁 고지기가 병촉헌 건물은 경주 최부자 집안에서 세운 건물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구물천이 부랴부랴 졸개들을 동원하여 불을 껐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최현식 공이 이를 기특히 여겨 구물천을 비록한 몇몇 수괴들을 집으로 불러 밥을 먹이고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감복한 구물천은 이후 최부자댁에 관해서는 절대로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경주의 대부분 지역이 최부자댁 영향이 미쳐 있음을 알고는 그 길로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 일화는 KBS에 소개되기도 한 유명한 일화인데 곰곰 따져보면 꽤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최부자댁이 오래도록 백성들을 돌보아 온 결과 화적당까지 최부자댁과 교촌에 대해서만큼은 함부로 위해를 가하지 못할 만큼 덕을 쌓았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이다. 화적당은 잡히면 그 즉시 머리가 잘려 나가는 참형에 처해지는 중범죄다. 이판사판 가릴 것 없이 달려드는 화적들이 최부자댁에 대해서는 침탈을 자제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인 것이다. 최염 선생은 이 일화를 들려주실 때 무척 신나는 표정이셨다. 그러나 조상님들의 일이라고 무턱대고 미화하는 것은 엄격히 배제하셨다. 그 일례로 구물천이 불 놓은 흔적에 대한 소감이 있다.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마소 본 건물 한쪽 면에 시커멓게 그을린 자리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 그을린 자리를 구물천이 불 놓았다가 끈 곳이라고 설명하곤 했어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 흔적은 굴뚝에서 연기가 새 나와 그을렸을 뿐 구물천이 불을 놓았던 자리는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구물천이 활동하던 시기가 벌써 백수십 년이 지난 때이니 사마소도 중간중간 찰흙이나 회벽을 바르는 등 보수공사를 하지 않았겠어요? 그저 재미있자고 한 이야기였을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화적당이 일어났어도 교촌을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했을 것이 최부자댁에 들어있던 식객들 중에는 힘깨나 쓰는 무인들도 수두룩할 때여서 섣불리 행패 부렸다가는 오히려 호되게 당했을 것이다. 최부자댁이 지은 병촉헌과 최부자댁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사마소는 심리적으로건 현실적으로건 화적당조차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성역이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 병촉헌은 우리 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계가 고향인 아버지가 경주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와 결혼하셨고 이후 경주시내로 나와 채권장사며 행정대서며 복덕방(부동산중계)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셨는데 그때 살림집으로 세 들어 산 곳이 바로 병촉헌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버지께서 경주최부자 13대 가주이신 최식 선생을 직접 만나 임대차 계약을 맺으셨는데 무엇이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세세히 배려해 주시고 세도 싸게 내주어 이 병촉헌에 사시면서 사업밑천이며 살림 기반을 다지셨다는 것이다. 병촉헌은 지금도 사마소 한쪽에 서서 묵묵히 남천을 굽어보며 세월의 풍화를 견뎌내고 있다. 지금은 유림의 발길도 끊어진 채 한낱 옛날 집으로 전락했지만 유림을 위해 재산을 놓아 건물을 지은 최부자댁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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