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댁에 많은 인물들이 묵어갔지만 이들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신돌석 장군일 것이다. 신돌석 장군은 머문 기간도 길지만 오랜 세월 최부자댁에서 산 덕분에 적지 않은 이야기도 남겨 놓았다. 아래 이야기는 최염 선생이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를 사료를 찾아 보강하며 쓴 것이다. 원래 신돌석 장군(1878~1908)은 본명이 ‘태호’고 별명이 ‘태을’로 알려져 있다. 경상도 영덕출신으로 경상도 일원과 강원도 지역에서 평민 출신으로는 드물게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그 활약이 대단하여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힘이 장사고 몸놀림이 민첩하여 누구도 대적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돌석 장군은 을미사변 이후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확산되자 1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나 고종의 명으로 해산했다가 을사늑약 이후 다시 봉기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을 벌였다. 장군은 전쟁을 일삼으면서도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을 도움으로써 민심을 얻을 수 있었고, 그를 설득하여 독립운동을 말리려는 관리들이 오히려 그의 인품에 감동하여 그들 도울 정도로 투철한 신념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깝게도 휘하에서 활동하던 김상렬 형제의 배신으로 최후를 마치지 않았다면 경상도·강원도 일대의 독립운동사가 훨씬 긴장감 있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신돌석 장군이 최부자댁에 머문 것은 면암 최익현 선생이 최부자댁을 방문한 시기와 겹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면암이 전국을 돌며 항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할 당시 최부자댁에 은거하며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면암이 짧게 머물다 간 것과 달리 신돌석 장군은 3년 가까운 기간을 머물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문파 선생의 숙부인 최현교 공과 그의 친구 한 명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최부자댁 솟을대문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신장군은 최부자댁에 머물면서 특히 최현교 공과 돈독한 우의를 나누었다. 최현교 공은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로 문필에도 능했지만 자유분방하고 한량기질도 다분해 사람 사귀기를 좋아 했고 특히 사람을 사귈 때 인품을 중히 여길 뿐 신분에 구애받지 않아 신분이 낮은 신돌석 장군과도 격의 없이 지냈던 모양이다. 하루는 최현교 공이 친구 한 명과 신돌석 장군, 이렇게 셋이서 늦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와 보니 대문이 닫혀 있었다. 이에 현교 공이 행랑채 하인들을 깨우려고 대문을 두드리려고 하자 신돌석 장군이 밤이 너무 늦었으니 사람을 깨우지 말라고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머··· 그냥 뛰어넘지요” 처음 현교 공은 신 장군이 담을 뛰어넘자는 것으로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신장군은 담이 아니라 솟을대문을 뛰어넘자고 한 것이다. 현교 공이나 친구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최부자댁 솟을대문이 비록 겸양을 위해 높이를 낮추어 다른 명가의 솟을대문보다는 작고 낮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붕 마루까지의 높이가 3미터는 족히 넘는다. 그것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두 사람이 농담 고만하라며 신 장군에게 도리질을 치자 이번에는 더 놀라운 제안을 했다. “그럼, 제가 두 어른을 안고 이 문을 함 띠 넘지요” 이건 더 말이 안 되는 제안이었다. 혼자서도 불가능한 일을 어린아이도 아닌 두 명의 성인 남자를 안고 뛰어넘겠다고 한 것이니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현교 공이 허허 웃었다. 그러자 신 장군이 결기가 생겼는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어른을 각각 한 명씩 양쪽 겨드랑이에 끼더니 ‘으랏차’하고 용을 썼다. 현교 공은 잠깐 몸이 붕~ 뜨는가 싶어 혼비백산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정말로 담을 뛰어 넘어 떡하니 마당 안쪽에 버텨 서 있는 자신을 보고는 어이가 없어졌다. 친구도 반쯤 얼이 나갔다. 그로부터 신 장군을 대하는 최현교 공의 살가움이 더욱 은근하고 남달랐을 것은 자명하다. 신 장군은 힘이 셀 뿐만 아니라 걸음도 빨랐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일화도 있다. 한 번은 당시의 가주인 최현식 공이 본향인 이조에 급히 전할 물건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비가 많이 와서 보낼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이조로 가려면 교촌 앞으로 흐르는 남천을 건너야 하는데 이미 물이 불어서 남천을 건너기도 힘들었다. 애꿎은 하늘만 탓하고 있는데 신 장군이 나서서 자신이 다녀오겠다고 했다. 이조는 신 장군도 몇 번 다녀온 곳이라 지리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문제는 물이 불어 콸콸 넘치는 남천을 어떻게 건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 장군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건을 달래서 집을 나섰다. 이조리까지는 줄잡아 50리가 좀 넘었다. 왕복 100리길. 요즘 같으면 마라톤 코스쯤 되는 거리였던 셈이다. 더구나 남천의 성난 물길이 가로막고 있고 길마저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좁고 비포장인 시골길이다. 그러니 어지간히 발 빠른 사람이라도 다녀오는데 하루는 좋게 걸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침 먹고 한 식경쯤 지나 지나서 출발한 신 장군이 점심이 채 되기 전에 대문을 들어섰다. 손에는 이조리에서 답례로 보낸 물건까지 들고서 말이다. 놀란 현식 공이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다녀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신 장군은 그저 당연하다는 듯 ‘씩’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최부자댁 앞에 넓은 공터 옆에 ‘요석궁’이라는 한정식 집이 있다. 이 집이 현교 공이 살림 나서 살던 곳인데 이 집 사랑채, 그러니까 지금의 요석궁 건물 대들보에도 신돌석 장군의 일화가 숨어 있다. 원래 교촌의 집들은 모두 소나무를 써서 기둥이며 대들보며 창방과 도리들을 다 썼는데 그 재료가 되는 소나무들이 모두 이조 근처의 박달이라는 곳에 있는 최부자댁 삼림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현교 공이 이 집을 새로 지을 때도 박달에서 나무를 베어 왔다. 보통 아름드리 큰 나무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나무를 베고 달구지에 나무를 실어 소로 끌어오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최부자댁에서 나무를 운반해오는 방법이 좀 특이했다. 먼저 박달에서 나무를 베어 근처를 흐르는 이조천에 띄운다. 목재는 이조천을 따라 형산강 지류를 만나고 거기서 다시 흘러서 남천을 만나면 남천을 거슬러서 교촌까지 운반되는 것이었다. 이때 큰 나무들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물이 너무 많아도 안 되고 너무 적어도 안 된다. 물이 많으면 물살이 세서 목재들을 다루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남천에서부터는 물길을 거슬러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수량이 적당한 때를 잘 골라야 했다. 신돌석 장군의 신화는 바로 이 목재 운반에서 또 한 번 만들어진다. 박달에서 운반된 나무들이 한창 남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중인데 갑자기 큰 소나기가 내렸다. 비는 삽시간에 억수같이 퍼부어 갑자기 남천물이 불어나면서 급류로 바뀌어 버렸다. 목재를 옮겨오던 일꾼들이 급히 목재들을 남천 변으로 옮기느라 비상이 걸렸다. 작은 목재들은 쉽게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대들보로 쓸 예정이었던 큰 목재 하나가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는데 장정들이 여럿이 달려 들어 건지려 했지만 워낙 나무도 무겁고 물살도 세져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바로 이때 신돌석 장군이 잠방이도 걷지 않은 채 남천으로 뛰어들더니 일꾼들에게서 목재를 묶은 밧줄을 걷고는 그걸 혼자서 걸어쥐고 용을 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대여섯 명의 장정이 엉겨 붙어 끌어내려 해도 떠내려가기 바쁘던 목재가 신돌석 장군이 힘을 쓰자 가벼운 널빤지처럼 쉽게 딸려 오는 것이 아닌가. 원래 신 장군이 끌어낸 목재는 안채 대들보로 사용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신 장군의 용력에 감탄한 현교 공이 이를 기념하고자 이 목재를 사랑채 대들보로 사용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요석궁 건물의 사랑채 대들보인 것이다. 이렇듯 신돌석 장군은 최부자댁에 식객으로 숨어 살면서 전설 같은 무용담을 남겨 놓았으나 의외로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것은 신장군이 피신해서 살 당시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도 했고 그가 신장군이란 사실을 안 사람도 최현식 현교 두 형제분 정도일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체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삼엄하던 시절, 온 천지가 아는 독립운동가를 숨겨 주었다가는 자칫 집안이 절단 나는 화를 당할 수 있었기에 신돌석 장군의 신분을 철저히 감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두 형제가 신장군과 허물없이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물됨이 출중하고 행동거지가 태산같이 무거워서 마음을 다 내주어도 좋을 만큼 신뢰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돌석 장군이 우리집에 오랜 동안 은거하며 많은 이야기를 만든 것과 달리 문파 선생은 직접적 신돌석 장군과 맞닥뜨린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신돌석 장군의 은거 자체가 비밀이었고 문파 선생이 16~18세 무렵인 1899년~1901년경으로 집안을 물려받기 전이니 모르고 지났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신돌석 장군은 최부자댁 본가 사랑채에 머물러 있은 것이 아니고 주로 현교 공 댁에서 머물렀기에 문파 선생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드물었을 성싶다. 신 장군이 최부자댁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문파 선생이 안 것은 문파 선생이 한창 독립운동에 전념할 때였다고 하니 최부자댁 선조들이 일을 처리하는 진중함이 이처럼 무겁고 신중했던 것이다. 더구나 당대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그것도 내놓고 일제와 힘 대 힘, 전쟁으로 맞닥뜨린 호걸을 숨겨 줄 만큼 담대한 집안의 분위기 자체가 젊은 문파 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부자댁 솟을대문을 지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과연 신돌석 장군이 이 문을 뛰어넘었을까 가늠해보곤 한다. 최염 선생님 말씀이 거짓이거나 과장되었을 턱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높이 솟은 대문을 보면 도무지 그 이야기가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이 물질을 지배한다고 믿고 인간의 도력(道力) 같은 것을 믿던 시대, 최부자댁 어른들의 말씀이고 문파 선생님을 통해 분명히 전해 내려오는 집안 일화이므로 반신반의 받아들이고 있다. 설혹 신돌석 장군의 용력을 미화하기 위해 다소의 과장이 섞였다고 하더라도 장군의 멋진 이야기가 생생히 전해져 오는 자체로 연구자로서 통쾌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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