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게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 제자가 있었다면 천도교에는 ‘주옥경 여사’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천도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분으로 여기는 여자 신도 한 분이 있는데 그분이 ‘주옥경 여사’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 유명한 요리집인 ‘명월관’의 기녀로 손병희 선생의 소실이기도 했다. 당시의 유명한 요리집은 쉽게 말하면 모두 ‘기생집’이었다. 요리뿐만 아니라 술과 여자까지 파는 집이었다. 이런 요리집이 일제 강점기는 물론 1980년 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이나 전국 각 도시에 수도 없이 많았다. 참고로 경주에도 이런 대표적인 요리집이 요석궁이었다. 흔히 쪽샘 골목에 대한 추억을 말하기도 하는데 요석궁이 고급 요정이라면 쪽샘은 서민을 대상으로 한 싼 요정들이 즐비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천도교판 막달라 마리아 주옥경 여사, 손병희 선생과 천도교 발전에 큰 공헌해
이분이 중요한 분으로 알려진 것은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 선생의 소실이나 유명한 요리집 기녀라서가 아니다. 이분은 일본고관들이 드나드는 일류 요리집에서 일하면서 일본인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어 그것을 손병희 선생에게 소상히 알려줌으로써 능동적인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주옥경 여사는 손병희 선생이 3·1 운동으로 투옥된 후 서대문 형무소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선생이 인사불성이 되어 석방되는 날까지 성심을 다해 옥바라지한 눈물겨운 조력자이기도 했다. 손병희 선생은 1년여의 수형생활과 그때 받은 고문으로 인해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2년 5월, 62세로 길지 않은 생을 마치게 되는데 역시 주옥경 여사의 품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천도교는 주옥경 여사가 기녀임에도 불구하고 손병희 선생과 동지적 관계로 기술하며 매우 중요한 분으로 모시는 것이다.
손병희 선생과 문파 선생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 것이 엉뚱하게 손병희 선생의 소실인 주옥경 여사 이야기로 시작한 것에 대해 독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천도교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다.
주지하다시피 문파 선생은 동학의 교주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앞 장에서 말했듯이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 선생이 최부자댁에서 식객으로 숨어 지낸 전력도 있었고 그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문파 선생의 성장기 심상에 깊은 감화를 주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천도교와 관련을 맺은 것은 손병희 선생과의 교유 때문이었고 이로써 문파 선생이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계기가 된 것도 분명하다.
손병희 선생은 평민 출신으로 최시형 선생의 처남이기도 하다. 최시형 선생은 동학농민운동에 다소 소극적이었고 전봉준 등 남접 동학도들이 강경한 혁명적 노선을 표방한 것과 다르게 동학의 포교와 이성적 대응, 조정과의 대립을 가급적 피하려는 노선을 고수했다. 그러나 정부가 일본과 연합해 동학을 대대적으로 소탕하려는 계획을 알고는 남접의 군사행동에 가담하고 군대를 파견하는데 이때 선봉장이 손병희 선생이다.
이렇듯 손병희 선생 역시 동학의 핵심 인물이었고 최시형 선생을 통해 최부자댁을 알고 자주 다녀간 것이다. 특히 손병희 선생은 최제우 선생이 최부자댁의 중시조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가계란 것을 알고 더욱 깊이 문파 선생을 예우하기도 했다. 손병희 선생은 문파 선생에게 ‘우리 천도교는 경주 최씨 가암파 집안에서 일으킨 종교나 같다’며 천도교에서 차지하는 최부자댁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또 스무 살 이후 집안의 살림을 물려받게 된 문파 선생이 손병희 선생이 교주로 나선 초기 천도교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친교를 나누게 된다. 손병희 선생이 문파 선생보다 무려 23살이 많다. 우리나라 예법에 열 살 차이까지는 친구로 대할 수 있고 열 살부터 스무 살 미만은 형님뻘로 스무 살 이상 차이는 아버지뻘로 대우하라고 하는데,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파 선생과 각별히 친했던 것에는 이런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흔히 독립운동을 말할 때 우리 머릿속에 우선 떠오르는 분들이 있다. 김구 선생이나 안창호 선생,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등이다. 손병희 선생에 대해서는 3.1독립만세운동과 함께 연관하여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쯤으로 기억할 뿐이다. 그러나 손병희 선생이나 천도교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은 아주 크다. 여기서 잠깐 천도교의 창립 배경과 천도교가 독립운동에 얼마나 헌신했었던 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천도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천도교의 원래 이름인 ‘동학’의 발생지를 언급해두고 싶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동학’하면 으레 전라도 어디에서 발생한 종교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듯하다. 심지어 경주 시민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경주의 학생들 역시 상당수 천도교의 발상지를 전라도 고부쯤으로 알고 지내기 십상이다. 역사 교과서를 통해 조병갑의 폭정으로 전라도 ‘고부’에서 최초의 민중항쟁이 시작된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학의 발생지는 당연히 경주다. 경주시 현곡면에 가면 최제우 선생이 득도하고 포덕을 시작했던 ‘용담정(龍潭亭)’과 그 일대에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져 있다.
‘천도교’란 말은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이 동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구체적인 종교적 개념으로 격상시키면서 부르게 된 명칭이다. 알다시피 동학은 조선말 무렵 가장 강력한 항일 의병 조직이었다. 최제우 선생이 혹세무민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후 네 차례에 걸쳐 교조신원운동을 벌이지만 결국 조정의 승인을 받지 못한다. 이런 결과가 동학이 종교의 영역을 넘어 반체제적 기운까지 띠게 만들었고 결국 ‘동학민중운동’까지 일어나게 한 것이다.
동학민중운동 이후 1898년 6월 최시형 선생이 붙잡혀 단성사 앞에서 교수형 당한 뒤, 손병희 선생은 동학의 교세를 다시 결집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조정의 탄압과 추적을 피해 1901년 3월 일본으로 피신하게 된다. 이후 귀국과 재출국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국제정세에 눈뜨게 되고 개화와 독립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동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탄압이 거세지는 동안 동학의 일부 인사들은 구심점을 잃은 채 표류했다. 심지어 일본에 대한 저항력을 일부 상실하게 되면서 전국 조직으로 시작한 동학의 진보회가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에 합해지기도 한다. 이에 손병희 선생은 정치적인 종교에서 벗어나 본래 종교로서의 동학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일진회에 속한 친일 인사들을 대거 축출하고 1905년 1월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세상에 선포한다.
전국적으로 300만명 신도, 민족대표 33인 중 15명, 전국조직으로 3.1운동에 최적!
천도교로 개명(改名)하고 난 뒤 교세는 엄청난 속도로 뻗어나갔다. 전국적으로 약 300만명의 신도가 참여했는데 통계상 가장 최초인 1925년 당시의 우리나라 인구가 1300만명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임에 분명하다. 이들로부터 모아지는 헌금 역시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불어났다. 천도교의 헌금 모금 방식은 ‘성미(誠米)’라고 해서 매일 밥을 지을 때마다 한 숟가락씩 퍼내어 이것을 모으는 것이다. 이렇게 모은 자금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알 수 있는 증거가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이다.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 맞은편에 자리 잡은 이 건물을 손병희 선생은 명동성당보다 더 큰, 현재의 교당보다 3배 이상 큰 건물로 지을 생각이었고 그럴 자금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도교로 인해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이 고취될 수 있다고 판단한 일본이 끝까지 이 건립 계획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허락을 받기 위해 대거 축소한 설계안이 바로 지금 건물의 모습이 되었고 그나마 쉽게 허락 받기 위한 방법으로 당시 이 설계를 일본인 건축가인 나까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에게 맡기기도 했다. 어쩌면 당시에 이런 서양식 건축을 설계할 만한 한국인 건축가가 없어서 외국인 건축가인 일본인에게 맡겼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건물의 규모는 대지 1250평, 건평 212평에 당시 돈 22만원이 들어갔다. 이 건물은 1918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921년에 완공되었다. 비록 지금은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당시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국내 3대 건축으로 불릴 만큼 유명한 건물이었다.
이렇듯 천도교의 교세는 확장일로에 있었고 천도교 교도들의 결집력도 마른 겨울 들불처럼 거세었다. 그러나 이런 천도교가 급격히 쇠약하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운동’ 때문이다.
뜻밖에도 이 3·1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종교단체가 천도교였다는 사실 역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알다시피 3.1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각계인사 33인이다. 놀랍게도 이 중 무려 15명이 천도교 인사들이다. 그 중의 수장역할을 한 것이 손병희 선생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역사가 3.1운동을 말할 때마다 ‘손병희 선생 외 민족대표 33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참고로 민족대표 33인에 명단을 올린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 인사들이 가장 많은 16명이고 불교 인사가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기독교 숫자가 많았던 것은 각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망라하다 보니 기독교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표 선정 과정에서 천도교가 포용성을 위해 숫자의 다소를 따지지 않았을 뿐 당시 천도교는 전국적으로 촘촘이 짜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조직보다 독립운동에 적합했을 것이다.
참고로 이때 유림에서 김창숙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며 참석의사를 밝혔는데 3.1운동 직전에 어머니 상을 당해 부득이 이 명단에 서명하지 못했다. 김창숙 선생은 이 일로 방성대곡했다. 사실은 이 당시 동학이나 기독교나 불교 할 것 없이 시대적으로 이들의 내면은 거의 유학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그때 김창숙 선생 곁에 있었다면 그렇게 위로해드렸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