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의 『무영탑』 - 아사달과 아사달의 탄생 아사달과 아사녀가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로 알고 있지만, 삼국유사를 비롯한 역사서에는 찾아볼 수 없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등장은 빙허(憑虛) 현진건(1900~1943)의 소설 『무영탑(無影塔)』에서 기원한다. 1938~19
두 청년의 첫 만남 김동리(1913~1995)와 미당 서정주(1915~2000)는 우리나라 시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은 스무 살 언저리에서부터 시작한다. 1933년 동리가 스물 하나, 미당이 열아홉이던 시절 선학원(禪學院)에서 처음
시인 김동리는 왠지 어색하다. 하지만 엄연한 시인이었다. 소설가가 아닌 시인 김동리는 익숙하지 않지만, 소설에 앞서 시로 먼저 신춘문예에 등단한 시인이다. 1995년 세상을 떠났을 때 미발표 유고시 30편이 발견되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소설이 아닌 시였다. 시작과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강우방 원장은 팔순 중반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최근 『성덕대왕신종, 천년의 신비-우보장엄(雨寶莊嚴)의 메타포』라는 제목의 연구문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2023년에는 『예술 혁명일지』라는 책을 출간할 만큼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역 학자
경주는 거기서 태어난 사람들만의 고향이 아니요, 우리 민족 모두의 고향이다. 우리나라 민족문화의 모든 원형이 경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족문화의 고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위 문장은 일향(一鄕) 강우방(1941~ ) 원장의 저서 『강우방 예술론-예술과 미
국가유산청에서 국보로 지정하고 있는 석탑 29기 가운데 9기가 경주에 소재 하고 있다. 무려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신라의 서라벌은 말 그대로 불국토를 꿈꾼 도시였다.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흔적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서라벌 땅에 조성했던 칠처가람(七處伽藍)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의 정법을 실현하기 위한 칠처가람은 대부분 왕궁 가까이 터 좋은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 남산은 평민들이 꿈꾸던 불국토의 공간이었다. 골짝마다 바위마다 불상을 새기거나 앉혔다. 불국사도 법화경을 바탕으로 건축되었고 설명이 가능하다. 석굴암 또한 불교세계의 이상향을 축약한 곳이다. 그런가하면 왕관을 벗고 머리를 깎은 대왕도 있고 왕비도 있다. 비단옷을 버리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은 왕자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신라 멸망 후 경주를 찾은 문사들의 글에는 민가와 절이 반반이었다는 표현이 곧잘 등장한다. 결코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었다. 국보로 지정된 탑을 마주하면 지나간 역사가 보이고 예술혼이 보인다. 탑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해도 하루가 부족할 만큼 다양한 스토리가 존재한다. 아홉 개의 탑을 천천히 찾아가본다. 수박 겉핱기식으로 둘러본다면 하루면 족하겠지만 마음으로 본다면 열흘도 모자랄 것이다. ● 지정 순서별 국보 1호로 상징성을 지녔던 숭례문(남대문)이 방화로 소실된 이후 국보 몇 호라는 숫자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몇 가지로 추정해 볼 수는 있지만 말함보다는 말 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경주지역의 국보로 지정된 석탑을 지정 일자 순은 아래와 같다. ① 국보 20호 : 불국사 다보탑 ② 국보 21호 :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③ 국보 30호 : 분황사 모전석탑 ④ 국보 37호 : 황복사지 삼층석탑 ⑤ 국보 38호 : 고선사지 삼층석탑 ⑥ 국보 39호 : 나원리 오층석탑 ⑦ 국보 40호 :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⑧ 국보 112호 :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⑨ 국보 236호 : 장항리 동서 오층석탑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이 제일 먼저 지정되었고, 장항리 오층탑이 가장 나중 지정되었다. 나원리 5층석탑과 장항리 5층석탑은 절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마을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다, 두 탑은 경주에서는 보기드문 5층 석탑이다. 경주에 산재한 탑들은 대부분 3층 석탑들이다. ● 건립 시기별 ① 분황사 모전석탑(선덕여왕 3년, 634년) ②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신문왕 2년, 682년) ③ 고선사지 삼층석탑(원효스님 입적이전 686년) ④ 황복사지 삼층석탑(효소왕 원년 692년) ⑤ 불국사 다보탑 (경덕왕 10년, 751년) ⑥ 불국사 석가탑 (경덕왕 10년, 751년) ⑦ 장항리 동서 오층석탑(8세기 전반 추정) ⑧ 나원리 오층석탑(8세기 중후반 추정) ⑨ 정혜사지 십삼층석탑(9세기 추정) 건립된 시기순은 위와 같다. 정확하게 연도가 판명이 되는 탑과 그렇지 않은 탑도 있다. 몇 기는 탑의 양식과 역사적 사건과 기록에 따라 건립년도를 추정했다. 자료는 없으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 크기 별 ①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13.4m) ② 불국사 다보탑(10.4m) ③ 고선사지 삼층석탑(10.2m) ④ 나원리 삼층석탑(9.76m) ⑤ 분황사 모전석탑(9.3m) ⑥ 장항리 동서 오층석탑(9.1m) ⑦ 불국사 석가탑(8.2m) ⑧ 황복사지 삼층석탑(7.3m) ⑨ 정혜사지 십삼층석탑(5.9m) 참고로 크기 순으로 적어 보았는데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감은사지 동·서탑 앞에 서면 신라 최고 전성기의 기개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남자들이여 감은사지로 가라 이왕이면 달밤에’ 이렇게 권유하고 싶다. 호연지기를 키울만한 곳이다. ● 위치별 (동→서,북) ①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② 장항리 동·서 오층석탑 ③ 불국사 석가탑 ④ 불국사 다보탑 ⑤ 고선사지 삼층석탑 ⑥ 황복사지 삼층석탑 ⑦ 분황사 모전석탑 ⑧ 나원리 오층석탑 ⑨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석탑을 순례하는 여행자들을 위해서 위치별로 이동 코스를 정리했다.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탑의 위치는 나원리 5층 석탑과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쪽에 있다. 왕궁을 중심으로, 또는 시내를 중심으로 동쪽에 많다. 특히 토함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황복사지 석탑, 그리고 황룡사 9층목탑이 소실되지 않았더라면 최고의 탑, 최대의 탑을 지척의 거리에서 한꺼번에 만나 볼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다. ● 탑, 불교 최초의 건축물 탑은 산스크리트어로 스투파에서 음역된 것이다. 탑은 붓다 열반 후 진신사리를 8개의 탑으로 나눠 세워진 최초로 건축물인 만큼 중요한 곳이다. 지금은 법당 중심의 예배이지만, 그 이전에는 탑이 중심 역할을 했다. 탑 하나 하나마다 깃든 설화와 스님들에 얽힌 이야기를 다 말할려면 열흘도 더 걸리겠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거나 찾는 발걸음이 많지 않은 탑을 중심으로 찾아가 본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652년에 왕족이던 의상대사가 출가한 사찰이며, 황복사에서 경문왕의 화장을 치렀다는 내용과 효소왕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었던 사찰하는 전해지는 곳으로 볼 때 왕실과 밀접한 사찰로 짐작된다. 경주의 절 가운데 황룡사, 분황사, 황복사 등 ‘황’자가 들어간 절이 대개 그러한 사찰이다. [나원리 오층석탑] 세원이 흘러도 이끼가 끼지 않는다하여 일명 ‘나원백탑(羅原白塔)’으로 불린다. 예로부터 신라 3기8괴(三奇八怪)의 하나로 여겨져왔다. 1, 2층을 지붕돌과 몸돌을 제외한 나머지 층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독특한 탑이다. 화강암 석질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져와서 만들었다. 1996년 개·보수 시 금동사리장엄구, 무구정경이 나왔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짜임새 있는 구조와 비례가 아름다운 키가 큰 이태리 청년을 닮은 탑이다. [장항리 동·서 오층석탑] 절터의 원래 이름과 연혁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나 구전조차 없다. 장항리 동·서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유일의 오층 쌍탑 가람이다. 1923년 4월 사리 장엄구를 탈취할 목적으로 광산에서 쓰이던 폭약으로 서쪽 석탑과 불상을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불운한 상처의 흔적을 가진 슬픈 탑이다. 탑에는 금강역사상, 도깨비 조각 등 다른 탑에서 볼 수 없는 조각을 만나 볼 수 있다. 김명리 시인의 대표작이자 첫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적멸의 즐거움」이 태어난 곳이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정형에서 벗어난 이형석탑(異形石塔) 형태의 독특한 양식의 탑이다. 옥산서원 독락당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회재 이언적이 이 절에서 공부했다는 이야가 전해진다. 목탑 양식을 지닌 13층 탑이지만 규모가 크지 않다. 국보탑이지만 탑을 보러오는 사람은 적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찾아왔다가 덤으로 구경하고 가는 탑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원효가 주석했던 절이다. 1975년 덕동댐 수몰로 인해 박물관 뒷뜰 한쪽 구석에 실향민 모습으로 서 있다. 모조탑으로 민들어진 석가탑, 다보탑에 밀린 모습이라 씁쓸하다. 가품에 밀린 진품의 비애를 학자들과 관계자들은 알까? 조금 안타깝다. 필자는 박물관 갈 때마다 고향 어른 찾아뵙듯 안부를 묻고 오는 탑이다. 수몰로 인해 친구들이 뿔뿔이 전학을 갔듯이 이 탑도 고향 떠난 실향민과 다름없다. ● 탑, 붓다의 상징 경주에는 탑이 너무 많아서 상대적으로 존재가치를 인정 못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방법은 지역민이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보살펴야 한다. 탑을 만들고자 했던 간절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염원했던 붓다의 나라, 그 터전 위에 육신과 영혼을 물려받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 혹시라도 텅 빈 절터의 탑을 찾는다면 우측으로 탑을 끼고 세바퀴 돌며 축원하기를···. 옛 시절에는 탑돌이가 일상이었고 성행했다. 우요삼잡(右繞三匝, 탑(부처님)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세바퀴를 도는 예경) 행위 자체가 붓다에 대한 예경이자 축복과 성취를 기원하는 행위이다.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그 옛날엔 노래와 시가 하나였다. 노래를 위한 시였지만, 모든 시들이 노래가 되지는 않는다. 가곡으로 불려진 목월의 시는 40여편이 된다. 시 22편이 38곡의 가곡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시 「나그네」의 경우 14명의 작곡가에 의해 곡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 문학사와 음악사의 이례적 기록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만들어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소월, 조병화 시인과 더불어 가장 많이 가곡으로 불려진 시인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노래만 해도 대략 20여곡 이상이다. 열거해 보면 「나그네」,「산도화」, 「그리움」 ,「모란 여정」, 「첫사랑의 꿈」, 「이별의 노래」, 「망향가」, 「사월의 노래」, 「청밀밭」, 「별이 떨어지는 밤」, 「그리운 밤에」, 「어둠의 광야에서」, 「그대를 만날 때」, 「겨울 뜰」, 「구강산」, 「사랑과 미움」, 「달밤의 바다」, 「한 송이 들장미」, 「영원한 꿈」, 「발길을 돌리며」 등이다. 이렇게 많이 노래가 된 것은 목월시의 서정성과 리듬감 때문일 것이다. e북으로 출판된 『예술가곡으로 승화한 박목월의 시세계』라는 4인 공저의 책에는 시 132편이 가곡화 되었다고 한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다. 이처럼 많은 가곡 가운데 「사월의 노래」와 「이별의 노래」는 봄과 가을 계절을 대표하는 가곡이다. 봄 노래 「사월의 노래」 (김순애 작곡)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이다. 고교시절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반월성 벚꽃에 마음이 울렁거려 벚꽃 흐드러진 그곳으로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던 추억이 있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그 옛날 젊은날처럼 가슴이 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1절)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2절)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후렴) 1953년 잡지《학생계》 창간을 기념해 목월이 작시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작곡가인 김순애가 작곡하여 메조소프라노 백남옥이 처음으로 불렀다. 박목월 시인이 전쟁 전 이화여고 교사로 근무할 당시 교정에 목련꽃이 만발하면 여학생들이 그 아래에 모여 책도 읽고 편지도 쓰던 풍경을 떠올리며 썼다고 어느 수필집에서 밝힌 적 있다. 가을 노래 「이별의 노래」 (김성태 작곡) 가곡 「이별의 노래」는 쓸쓸함을 더해주는 가을 노래의 대명사격이다. 1953년 피난지인 대구에서 만들어진 노래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많다. 시인들 술자리에 노래에 얽힌 목월의 연애담은 세월이 흘렀어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시인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말을 아꼈지만 이젠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목월은 자신의 책 『구름에 달 가듯이』 (1973년 삼중당)에서 ‘세상에서 널리 불려진 이별의 노래에서 내가 노래한 상대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자기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이름 하나를 감출 줄 모르는 헤프고 어리석은 바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86년에 나온 『자하산 청노루』에서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대생과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시가 「이별의 노래」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노래가 쓰이게 된 동기에 대해 제자인 이근배 시인의 ‘문학동네에 살고지고(2001.1.22일자 중앙일보)’라는 글을 참고할 만하다. 분량이 많아서 부분, 부분만 발췌해서 인용해보면 아래와 같다. 목월의 이별의 노래는 목월이 실제로 만남과 이별의 아픔을 겪으면서 있었던 감정으로 진솔하게 시를 쓴 것으로 생각한다. 이별 뒤에 비워진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을 목월은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라고 한 것이다(중략) 목월은 이 노래로 그녀와의 긴 이별을 아름답게 승화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목월의 아름다운 이별이 있었기에 지금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지금도 사랑하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중략) 서울로 올라온 목월은 바로 아내와 아들,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효자동에서 두 달 동안 하숙생활을 하다가 귀가한다. “사랑하느냐고/ 지금도 눈물어린 눈이/ 바람에 휩쓸린다”고 목월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시 속에 심다가 붓을 놓고 갔다. 그 하늘 구만리 기러기 울어예는 뜻을 내사 알겠네. (이하생략) 「이별의 노래」는 또 다른 명곡 「떠나가는 배」를 탄생시켰다. 제주에서 목월과 소통했던 양중해 시인이 작시하고 변훈이 작곡했다. 두 사람은 제주 제일중학교 국어 교사와 음악 교사였다. 목월과 H양의 이별 장면을 보고 지었다고 양중해의 시인이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가곡 「떠나가는 배」는 제주도의 문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노래의 작곡 시기와 시의 작성 시기가 다소 이견이 있지만, 아무튼 박목월과 관련되기 때문에 더 유명해진 것은 사실이다. 최근 미공개 유고시에서도 제주에서 쓴 시편들이 다량이 발표되기도 했다. 무슨 비밀이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서둘러 구입해서 펼쳐보기도 했다. 목월은 시 보다 먼저 동시를 발표했던 만큼 어린이를 위한 동시 작업에도 선두에 섰다. 이 땅의 동요 보급에도 진심이었던 만큼 동요로 불리고 있는 동시가 많다. 생전에 그는 『산새알 물새알』(1959년)을 비롯하여 두 권의 동시집을 낸 바 있다. 국민 동요 「얼룩송아지」외에 『가을이래요』, 『다람다람 다람쥐이야기』, 『할미꽃』, 『노래는 즐겁다』, 『자장가』 등 수십 편에 이른다. 박목월 동시 연구에 관한 논문만 하더라도 수십 편이 넘는다. 우리나라 동시와 동요 보급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황성공원에 최초로 얼룩송아지 노래비가 세워진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박목월의 작사한 교가(校歌), 사가(社歌), 군가(軍歌) 목월이 작사한 교가가 여러 학교에서 보인다. 서울 신일고, 영천 영동고, 문경 문창고, 울산 신정고, 울산여상, 학성여중, 충남 태안중 등이다. 먼 곳도 있고 가까운 지역도 있다. 울산지역에 많은 것은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법인 울산 육영회 산하 학교들과 연결된다. 기타의 학교들도 비슷한 배경들을 가진듯 하다. 1970년 울산의 공업과 산업도시 지정과 맞물려 「울산의 노래」를 작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부르지 않고 있다. 목월은 고향의 모교인 건천초 교가를 작사했다. 작곡가는 얼룩송아지를 작곡한 손대업이다. 같은 고향인 건천의 무산중·고 교가도 목월이 작사했다. 두 학교의 교가에는 모두 단석산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교가와 마찬가지로 기업의 사가 또한 1970년대에 작사한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일보(1969년 나운영 작곡), 포스코(1973년 김동진 작곡), mbc방송국(1974년 손석우 작곡), 대림산업 (1977년 김동진 작곡) 등이 대표적이다. 군대시절 열심히 불렀던 군가 『전우』(1973년, 나운영 작곡)도 목월이 작사한 노랫말이다. 찾아보면 가곡, 동요, 사가, 교가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의외로 대중가요가 눈에 띄지 않는 것도 특이할만하다. 사회 전반에 목월의 노랫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달리 말하면 시가 닿지 않는 곳도 없다는 뜻이다. 계절은 노래에서부터 먼저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윤정모 작가의 책을 펼치면 프로필에는 경주 외곽 출생으로 표기되어 있다. 경주 출생이라고 해도 될텐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원리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나원리는 작가에게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윤정모 작가는 1946년 11월 외가인 경주 현곡면 나원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엄마 없이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돌봄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갈 때까지 나원에서 보낸 시간들은 작가의 소설 속에서 어김없이 등장한다. 요즘 산모들은 병원에서 몸을 풀고 산후조리원을 가지만 예전에는 산달이 되면 대부분 친정에서 몸을 풀었다. 병원에서 태어난 세대가 아니라면 태어난 순간의 첫 손길은 아마도 외할머니였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어머니의 어머니로 모계사회로 이어지는 띠뜻함의 혈통일 수 밖에 없다. 조선시대 역사적 인물의 출생지를 보면 외가에서 태어난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이 있다. 결혼 후 처가에 가서 생활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원리의 재미있는 이야기들 나원리 입구에는 나원백탑으로 불리는 국보 39호 5층석탑이 있다. 탑은 천년이 지나도 흰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신라 3기8괴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난이 많이 자생한다하여 란원으로 부르다가 이후 나원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마을의 유래가 있다. 탑 이름도 마을이름을 가져와 부르게 되었다. 인터넷에는 나원리5층석탑을 계탑이라 부른는 이가 있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계탑은 나원 3리에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탑재들은 사라진지 오래되었으며 현재는 알 수 없는 분묘가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기와조각들이 나왔다고 하니 오래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이름도 계탑 또는 탑각단이다. 나원리에는 진덕여왕릉 조성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현재 진덕여왕릉은 이웃마을 오류리에 있지만 조성 당시에는 왕릉터를 두고 지관들끼리 오류가 좋다 나원이 좋다 서로 경합하였다고 한다. 묘안을 내놓았는데 계란을 묻어두고 먼저 부화하는 곳으로 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나원보다 먼저 오류에서 부화되어 오류리에 현재 진덕여왕릉이 있다고 한다. 나원리에는 왕릉을 조성하다 만 흔적이 마을 뒷산에 있다고 한다. 마을 어른은 친절히 입구까지 안내까지 해주었다. 윤정모 작가의 어린시절 나원리 윤정모 작가에 대한 관심은 여러 권의 소설을 찾아 읽게 했다. 1992년 발간된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의 후기에 수록된 작가연보는 나원에서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가 있었다. 요약 정리하면 하면 아래와 같다. -나원에서 출생하여 다음해에 부모가 이혼을 하였고 48년 어머니 재혼 후 서울 청량리에서 2년 살다 6.25전쟁이 일어나서 경주 외가로 피난가서 나를 맡기고 다시 떠났다. -외삼촌이 보모 역할을 하며 업어키웠다. 큰삼촌은 군속으로 군대 있었고, 중간 삼촌은 나를 엎고 보리밭에 가서 새를 보거나 깜부기를 뽑았다. 막내삼촌은 책보를 메고 산너머 학교를 다녔는데 삼촌을 따라 학교에 가고 싶었다. -여섯살 때 마을 동사에 방2개 임시 교실 정하고 1학년 2학년을 모집했다. 7세에서 18세까지 모집하는 바람에 함께 놀 동무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제일 어린 나이로 입학했다. 탁아소처럼 이 동사학교를 다녔다. 놀아줄 사람들이 많았다. -광목 고무줄팬티가 흘러내렸던 경험이 있었지만 어려서 부끄러움을 몰랐다. 팬티없이 치마만 입고 다녔고 엉덩이를 맞았던 경험이 있고 삼촌에게 일러주기도 했다. 부모없는 아이라고 업신여김 당할까봐 할머니 외삼촌들은 눈을 부릅뜨고 내 주변을 살피는 과잉보호 속에 자랐다. 외갓집 식구들은 처음부터 남다르게 길렀다. 마을의 다른 애들과 달리 호미도 못쥐게 했다. 단 한번도 부엌일을 시키지 않았다. 넌 공부해야돼 소리를 제일 많이 들었다. -소풍가서 잠이 들면 나이 많은 언니들이 집에까지 업어다 주기도 했다. 몸이 유난히 작았고 5학년 때까지 삼촌들이 자주 업고 다녔다. 두번 낙제를 했다. 1학년을 두번 다녔다. 5학년을 마치고 부산으로 전학갔다. 위와 같이 작가가 기록한 연보를 읽다보면 동화책을 읽는 것 같다. 작가의 유년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 외에도 나원초등학교에 두 번이나 낙제를 했던 경험, 아홉살 때 동사 마당에서 최초로 본 활동사진 나운규의 <아리랑>의 남자주인공이 낫을 쳐든 장면은 충격적이었는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고 했다. 외갓집에 와서 잠든 사이 엄마가 떠난 뒤 밤새 울던 아이를 외삼촌들이 번갈아가며 업고 달래주던 그 첫날부터 외삼촌들은 보모이자 보호자 역할을 했다. 둘째 외삼촌은 14살, 막내 외삼촌은 10살이 더 많았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윤정모 작가의 소설 작품들 작가 윤정모의 소설들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상처나고 아픈 곳, 예민한 곳을 파고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의 소설을 간략히 살펴보면 밀리언 셀러이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삐』는 윤락여성을 통해 매춘과 외세, 즉 반미를 다룬 작품이다. 작가는 이 책의 인세를 양심수 가족들 단체인 민가협(민주주의실천가족협의회)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밤길』과 『누나의 오월』에서는 광주 5.18을, 『들』은 농민의 고통과 좌절과 분노를, 『나비의 꿈』에서는 작곡가 윤이상의 삶과 예술적 성취를 민족과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다. 한때 딸과 함께 영국에 체류하기도 했던 작가의 『슬픈 아일랜드』는 분단과 식민지배 등 우리나라와 닮은 아일랜드 역사를 거울처럼 비쳐보고 있는 소설이다.『딴나라 여인』은 해외입양 여성이 겪는 정신적 고뇌를 이야기 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다룬 『에미 이름은 조선 삐였다』 그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그곳에 엄마가 있었어』를 최근 발표했다. 『수메르』 3부작은 5천년 전 인류최초의 문명 수메르와 한민족을 연결시킨 대서사시의 소설이다. 『수메르』는 필자가 처음으로 접한 작가의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가 집필한 소설은 스무 편이 넘고 계속 발표 중에 있다.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일을 스스로 불가사의 한 일로 여기며 몇가지 이유를 들었다. 좋은 스승과 멋진 선후배를 만난 것과 외삼촌이 다른 잡지도 아닌 《사상계》를 읽었다는 것을 들었다. 사상계를 구독하던 막내 외삼촌은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외삼촌은 아버지이자 든든한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나원리 5층 석탑 또는 나원백탑 작가가 다시 경주 나원리를 찾는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어릴 적 나원리와는 사뭇 다른 나원의 모습을 볼 것이 분명하다. 나원역은 이미 폐역이 되었고, 대로들이 동네 앞을 지나가고 있다. 마을 안까지 공장이 들어와 있고, 나원 3리는 아예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다. 최근 형산강 건너 아파트단지로 연결되는 다리가 놓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용황동 아파트단지는 소설 『위대한 갯츠비』에서 주인공이 바라보던 강 건너 불빛과 다름없을 것 같다. 부와 성공을 대변하는 강 건너 화려한 불빛의 대척점에 나원리 오층석탑이 있다. 천년 세월에도 흰빛을 잃지 않는 나원백탑으로 불리는 탑만이 변함없이 서 있다. 마을 입구 산기슭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며 오래된 이야기들을 모두 알고 있을 것 같다. 소풍가서 잠이 들어 등에 업혀오던 소녀도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 전인식 시인
관음상(觀音像)과 서루(西樓) 소금강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백률사는 암자와 다름없는 작은 절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이외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많다. 백률사가 이차돈의 순교와 신라의 불교 공인과 관련된 절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미 알려진 이야기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 대해 옛시와 문장으로 백률사를 찾아가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백률사와의 인연이 깊어 남다르게 여겨지는 곳이다. 어린 날 할머니 손에 이끌려 갔던 최초의 절이기도 해서 할머니와 백률사에 대한 시를 첫 시집에 수록하기도 했다. 관음상 영험이야기 『삼국유사』 제3권 「탑과 불상」 조에 ‘백률사(栢栗寺)’가 나온다. 관음상의 영험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효소왕 때 국선(國仙: 화랑의 우두머리) 부례랑이 북명(지금의 함흥)에서 말갈족에 잡혀갔고, 그 직후 천존고(天尊庫)에 있던 보물 현금(玄琴)과 만파식적(萬波息笛)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 관음상 앞에서 며칠 동안 기도하자, 불상 뒤에서 부례랑과 안상이 나타났고 탁자에 현금과 만파식적이 제자리로 되돌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모두가 좋아하며 즐거워하였는데 얼마 후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다름아니라 6월 12일에 살별인 혜성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는 서쪽에 나타나므로, 천문관리가 아뢰기를 “만파식적과 거문고가 이룬 공적에 대한 작위를 봉하지 않아 이런 불길한 변고가 나타난 것입니다”하므로 이때서야 만파식적의 이름을 높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더니 그제서야 혜성이 사라졌다. 이후에도 백률사 관세음보살상으로 말미암은 이적이 많으나 사연이 너무 복잡하여 쓰지 않는다고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적었을 만큼 관음상에 관한 신이한 일이 많았다. 벡률사 관음상에 대해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중국의 뛰어난 조각쟁이가 중생사의 불상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보살님이 일찍이 도리천 하늘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갈 때에 밟은 발자국이 돌 위에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그 발자국 자취는 ‘관세음보살님이 부례랑을 구원해 돌아올 때의 발자국 흔적’이라 하기도 한다. 절 입구에는 오늘날까지도 자국 흔적이 남아 있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백률사에 연관되어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백률사는 이미 신라 때부터 관음성지로 유명했다. 기록상으로 보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관음상의 영험을 통한 사세가 쭉 이어져 왔다. 하지만 너무 유명세를 탔기 때문일까? 관음상은 경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전단관음상은 1412년(태종12년) 개경사(開慶寺) 주지 성민의 요청에 의해 이안(移安) 봉안되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전한다. 개경사는 태조 이성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태종 8년에 세워졌는데 건원릉을 지키는 능침사(陵寢寺) 역할을 하는 절이다. 국가 권력이 작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빼앗아 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근데 이상한 것은 경주를 떠난 관음상은 그곳에 가서는 영험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백률사 중수기(1608년)에 전하고 있다. 경주옥적이 경주를 떠나서 소리를 내지 않는 것처럼 참 희한한 일이다.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의 기록에 의하면 경기도 양주(현 구리시) 있던 개경사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전단관음상(旃檀觀音像)은 어디로 갔을까? 소재를 파악하고 원래 있던 백률사로 가져오면 그 영험이 되살아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환지본처(還至本處)의 일이야말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전단관음상은 바다를 건너온 귀한 불상임에 틀림없다. 전단향나무는 인도에서 나는 향나무로 주로 불상을 만드는 목재로 쓰이고 뿌리는 가루로 만들어 향으로 사용한다. 최초의 불상 또한 전단향 나무로 만들어졌다. 초기 불교경전에도 전단향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인도의 잠언시 수바시타에 나오는 「전단향 나무처럼」은 언제나 읽어도 좋다. 부서지면서도/ 도끼 날을 향기롭게 하는/ 전단향나무처럼 나 아닌 것들을 위해/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험한 날이 닥쳐오더라도/ 스스로 험해지지 않는다 뱀들이/ 온몸을 친친 휘감아도 가슴에 독을 품지 않는/ 전단향나무처럼 마음이 맑은 사람은/ 아무리 더러운 세상에서라도/ 그 마음 흐려지지 않는다 옛시와 문장으로 찾아가는 백률사 서루(西樓) 경주시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옛 문사들은 소금강산 백률사 서루에 올라 서라벌을 내려다보며 시를 읊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하더라도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사진이 2008년 불교신문에 의해 처음 공개되었다. 사진에는 2층 누각과 대웅전 일부 모습이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종각과 요사채 건물이 있다. 경주를 찾은 명사들이 백률사 서루에 올라 찬란했던 서라벌을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는 일이야말로 경주를 찾는 보람이었으리라.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사들이 남긴 아름다운 글을 몇 편 읽어본다. 새벽에 일어나 작은 누각끝/ 발을 걷고 하늘을 바라보네 누각 아래가 바로 계림이어서/ 기괴한 일 헤아릴 수 없네 노거수 자욱한 안개/ 일만호에 비껴 깔리네 흰 구름 동산으로 떠가고/ 푸른 물은 서쪽 포구로 흘러가네. 우뚝한 황금빛 절집 사찰들/ 서로 마주해 아침 햇살에 따스해지네 반월성 안에 빽빽한 숲/ 꽃과 대나무 이제 주인이 없네 공연히 에전 풍류 남아 있어/한 곡조 높은 가락에 춤추네 기억해보니 최유선/ 문장은 중국을 흔들어 포의로 갔다 금의환향하니/ 나이 29세 전이었네 흰 옥에 파리가 점을 찍어/ 당시에 쓰이지 않았네 지금도 남산 안에/ 채소밭 한 뙈기만 남아있네 오래지난 구세손/ 머리 묶고 무리에 썩여있어 불러서 높은 관 씌우니/ 사람들 현자의 후손인 줄 아네 또 설선생이 있어/ 성대하게 용과 호랑이처럼 겨누었네 방언으로 오경을 강의하니/ 학자들은 동방의 공자로 견주었네. 세상에서 두 군자라 불리며/ 이름 나란하니 이두와 한가지네 읊조리며 맑은 바람 쐬니/ 묵은 병도 나을만 하네 오가며 부처를 뵈옵고/ 빈당에서 향불 하나 피우고서 머리 조아려서 우리 임금/ 만년의 천복을 받끼만 축원하네 -이하생략 몽고침입으로 황룡사도 불에 탔지만 그래도 많은 건물들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전망 좋은 서루에 올라 경주를 내려다보며 열에 아홉은 금빛 사찰이라 지나는 객들은 구경하기 바쁘다는 표현과 뒤이어 큰 저택 구슬로 된 궁궐이 돌밭으로 변했네 라는 표현이 교대로 나온다. 파괴된 것과 파괴되지 않은 것들이 혼재된 도시의 모습이 그려진다. 온전한 전성기의 서라벌 모습은 얼마나 장대하고 아름다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4세기 고려 말 인물인 전사경(全思敬)은 『서루기」에서 계림에 있는 누각중 백률사의 누각이 가장 훌륭하다고 했다. 서라벌을 조망하는 최고의 위치로 백률사를 꼽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도 경주 남산 용장사에 거주하면서 경주의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니며 많은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백률사에 관한 시가 2편 있다. 「백률사 옥판 스님」이라는 시는 백률사를 드나들며 스님들과 교류하고 소통한 것을 알 수 있는 시이다. 「백률사 누각에 올라가 바라보면서」는 다음과 같다. 느릅나무 높고 낮게 흰 안개를 뿜는데/ 인가와 절집이 이웃하여 잇대 있구나. 물소리 서쪽으로 거슬러 시조(市朝)가 변하였고/ 산 형세는 북쪽이 낮아 문물을 옮겼다네. 석탈해 사당 가에 속절없이 달만 있고/ 경애왕의 능가에는 저절로 밭이 없다. 유유한 성패가 모두 이와 같으니/ 진(秦)나라 앞서 주(周)나라는 8백 년이었다네. 정지상, 박효수, 전사경 그리고 김시습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공히 백률사 서루에서 내려다 본 서라벌의 감회를 시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백률사 돌계간을 올라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는 백률사에서 시내 조망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 옛날처럼 명소가 될 수도 있는 백률사 서루 복원은 요원한 일일까?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많은 백률사 유물들 백률사의 서루는 허물어졌고 관음상도 경주를 떠나있다. 이외에도 백률사의 귀중한 유물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보관 전시되고 있다. 백률사 법당의 금동약사여래불은 높이가 179㎝ 입상으로 통일신대 최대 크기 불상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1930년대부터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보관되고 있다.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로 불린다. 이곳에서 발견된 이차돈 순교비도 백률사 석당기(栢律寺石幢記), 이차돈 공양비로 불리기도 한다. 높이 104㎝, 너비 29㎝ 6면으로 만들어졌으며, 6면인 것은 육바라밀을 뜻한다. 화강암 육각기둥 가운데 다섯면은 명문이, 나머지 한면은 이차돈 순교장면이 양각되어 있다. 제1면에는 “목을 베자 머리는 날아가 소금강산(小金剛山)에 떨어지고, 목에서는 흰 피가 수십장이나 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송이가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여 왕과 신하들이 마침내 불교를 공인했다”라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이차돈 사후 290여년 흐른 뒤인 817년 이 비를 만들었다고 『삼국유사』 염촉멸신조(厭觸滅身條) 편에 전한다. 염촉은 이차돈의 본이름이다. 글씨는 김생이 썼다고 한다. 경내에는 자연암벽에 7층탑이 음각되어 있으나 도움없이 찾아 보기는 쉽지 않다. 대웅전 앞에 탑 세울자리가 없어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앞서 말한 영험한 부처님 발자국도 절 입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절 계단 오르기 전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마주하는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에는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서쪽 아미타불, 동쪽 약사여래불, 북쪽 미륵불, 남쪽 석가모니불을 새긴 사방불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이 백률사에 행차할 때 땅속에서 염불소리에 들려와 파보니 큰 돌이 나왔고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어 그곳에 절을 세웠는데 굴불사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2022년 태풍 힌남노 때 큰 피해를 입고 자칫하면 다시 땅속으로 들어갈 뻔 했지만 다행히 최근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청마는 이곳에서 「사면불」이라는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백률사 뒷편 소금강산 정상 부근에는 동천동 마애삼존불이 있다. 이른 새벽 운동삼아 오르면 누군가 늘 빗자루로 깨끗히 쓸어 놓고 있다. 비질 덕분에 정갈한 마음으로 희미해져가는 마애불 앞에 두손 모으게 한다. 어느 분일까 궁금도 하다. 빗자루질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마음 아닐까. 그리고 소금강산 정상 근처에는 십년 가까이 매일 올라와 솔방울 달력을 만들어 날짜를 알려주는 분이 계신다. 퇴직 교장선생님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와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올라오는 마음 또한 부처님 마음이 아닐까. 세상 구석구석에는 드러나지 않게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참 많다. 소금강산 너머 마을 이름이 부처가 많다는 뜻의 다불(多佛) 마을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 청년이 큰 뜻을 위해 목숨을 바꾸었듯 백률사가 있는 소금강산에서는 모두가 부처이다. 전인식 시인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주 남산 약수골은 금오봉으로 오르는 최단 코스이다. 초입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경주교도소 철책 울타리를 끼고 산행이 시작된다. 교도소 내부에는 계곡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울타리 너머 점심 식후 산책 중인 교도관에게 수감자도 산책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강한 어조로 ‘노’라고 말한다. 물었던 이유는 박노해 시인 때문이었다. 그의 사색은 독방 안에서만 가능했을까 아니면 산책의 시간도 가졌을까? 그의 사유는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기에 급히 물었던 이유였지만 그는 분명 봄날 뻐꾸기 소리를 들었을 것이며, 저 멀리 단석산 위 맑은 가을 하늘과 흘러가는 흰 구름도 보았을 것이다. 비 오는 날엔 형산강으로 달려가는 약수골 계곡 물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상선암 목탁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 밤엔 경주 남산 바위 속 마애불과 목 없는 불상들과도 대화도 나눴을 것이다. 경주 남산에 교도소가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외지인들이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국립공원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공원은 1968년도 지정되었고 경주교도소는 1973년 이곳에 설치되었다. 불국토 남산의 정기가 어린, 공기 좋고 산세 좋은 곳이여서 일까 이곳은 국내 최초 실버 교도소로 선정되어 65세 이상 고령 수형자들이 새로운 사회생활 시작을 준비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초범 재소자와 미결수, 시국사범들이 주로 수형생활 하던 곳이다. 특히 박노해 시인은 이곳에서 7년 6개월을 독방에서 수감 생활했다. 그의 시집 『참된 시작』과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이곳 수감 중에 출간한 책들이다. 내용 속 경주 남산이 많이 등장한다. 투사에서 사색가로 사상적 전향과 삶의 행로가 달라진 것은 경주 남산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쓴 글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을 창립을 주도했고,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결성주동자로 7년여 수배 끝에 체포되었다. 24일간의 고문 끝에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경주교도소로 왔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 시인은 박해받는 노동자(勞) 해방(解)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본래의 이름은 박기평이다.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은 출판사 풀빛에서 판화 본으로 세상에 나왔다. 27살 버스회사 수습 정비공 시절 나온 시집이다. 군사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가 팔린 책이다. 『노동의 새벽』은 1980년대를 건너온 사람들은 모두가 기억할 만큼 유명한 책이다. 노동현장에 있던 사람은 물론, 문학인, 지식인에게도 강렬했던 한방이었다. 감은암(感恩庵) 경주교도소 한 평도 안 되는 0.75평, 침침한 관속 같은 독방을 살아있음의 감사와 은총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감은암(感恩庵)으로 지었다. 출가 수행자처럼 참구參究하며 이곳을 수행처로 삼았다. 그는 책에서 밝혔듯이 이곳에서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실천했다. 이곳에서 복역하다 나온 사람에 의하면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 명상하고 아침은 단식, 점심과 저녁은 채식하며 하루 10km 이상 교도소 운동장을 뛰며 심신을 단련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근무한 교도관은 그가 읽은 책이 족히 일 만권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운동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 책을 읽었다. 독서와 사색이야말로 투쟁의 시간을 끝내고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첫째의 일일 것이다. 그가 읽은 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윌든』, 노자와 장자를 읽었으며 그리고 붓다를 읽었다. 특히 그의 글에는 붓다를 만난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시와 산문에서 불교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수감생활 동안 빨리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알차게 보냈다. 출가승의 자세로, 구도자의 자세로 임했기에, 다 내려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곳 남산자락에서 그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슬며시 내려놓으며 뜨겁게 흐르던 피를 식힐 수 있었고 외부로 향했던 시선을 자기 안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곳이다. 세례명이 가스파르인 시인은 원래 신부가 꿈이었다. 자기보다 먼저 형이 신부가 된 카톨릭 집안이지만 그는 경주 남산자락에 암자를 하나 짓고 구도자의 삶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경주 남산에 자신을 묻은 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경주 남산에 나를 묻다 수감생활 중에 시집 『참된 시작』과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책 속에는 경주 남산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수감생활 중이던 1993년 6월 출판된 시집 『참된 시작』(1993년 창비)은 1. 2부는 수감생활 중에 쓴 시, 3~4부는 《노동해방문학》과 무크지 《노동문학》에 발표했던, 수감 이전에 쓴 시로 구성되어 있다. 편차, 골곡이 다소 있는 구성으로 엮어져 있다. 시집의 첫 페이지는 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으로 시작한다, 바람 찬 날이다/ 경주 남산/민들레 꽃씨는 바람에 날리고/ 바람 속에서/ 바람을 품고/ 천 년의 긴 호흡으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밤새 독거방 낡은 창은 덜컹대고/ 감시등 불빛 아래/유유히 떠도는 민들레 꽃씨처럼/ 내 영혼은/ 저문 들길 지나 낯선 산굽이를 돌아서는/ 출가승의 옷자락처럼 허허로운데/ 무겁구나 지나온 날/ 깊어가는 상처는 그칠 줄 모르고// 사흘 밤낮 몹시 아픈 날/ 스스로 삭발을 하고/ 찬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 나직이 토해내는 신열의 부르짖음/ 무너졌다. 패배했다. 이렇게/ 흐르는 눈물 흐르는 대로/ 그래, 지금 침묵의 무덤을 파고/나를 묻는다/ 나를 암장한다// 숨죽인 호곡처럼/ 머리 푼 밤바람은 쓰러지는데/ 어둠 속으로 얼굴들이 흐르고/ 해가 길어지고 해가 짧아지고/이 슬 내리고 눈이 내리고/ 죄닦음이 다하고 눈 맑아진 어느 날/ 내 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씨앗 하나/ 피투성이 목숨으로 품어온 씨앗 하나// 마침내 싹이 틀까/ 젖어드는 눈 감으면 벽 그림자/ 상처 속에 싹트는 씨앗 하나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아아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 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전문 이 시는 경주교도소로 이감 직후인 1992년 4월 시인의 누나가 접견창구에서 받은 시이다. 경주 남산에서 처음 쓴 시라 할 수 있다. 독방에 갇혀있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를 묻는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의 다짐이었다. 또 다른 시 「그해 겨울나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해 겨울 / 나의 시작은 패배였다’로 시작해서 ‘그해 겨울 /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라고 맺는다. 패배는 무기수라는 인간으로서의 패배와 사회주의 몰락이 가져온 이념의 패배는 볼 수 있다. 시집 속에는 「강철 새잎」, 「모과향기」, 「민들레처럼」 같은 생명과 생존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 많다. 세월 지나도 많은 사람이 인용하며 사랑한 시들이기도 하다. 세 가지 신물信物-진평왕릉, 에밀레 종, 감은사 탑 이 시집에서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마지막에 수록된 산문 「삶의 대지에 뿌리박은 팽창된 힘」은 펄쩍 놀라게 만든 글이다. 문화유산을 읽는 생각이 깊고 남다르다. 이를 통해 자신과 연결시켜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내용을 다 인용하고 싶지만, 부분부분 몇 줄씩 발췌해 본다.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으며 내 마음 깊은 곳에 세 가지 신물信物을 모셨습니다. 진평왕릉은 내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화려해야 눈에 들어오고, 장식이 많고 특출한 형상을 해야만 대단한 것으로 우러르는 이 시대의 천박한 안목으로는 진평왕릉의 격조가 잡히지 않습니다. (중략) 항시 나에게 열려있으라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옵니다. (중략) 에밀레종은 뼈아픈 내 침묵, 절필 이후에 새롭게 시작할 나의 시가 어떤 울림을 지녀야 하는지를 깨우쳐 줍니다. 장중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장중하기 힘든 법이건만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은 울림. 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소리‘여야 하지 않겠느냐, 길고 긴 여운을 지닌 소리여야 하지 않겠느냐, (중략) 감은사탑은 나의 참된 시작이 어떠해야 하는지, 내 사상과 운동이 무엇으로 쌓아져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단순하면서도 강인한 힘으로 생동하는 아름다운 모습. 결코 허세를 부리는 억지 상승이 아닌, 삶의 대지에 뿌리박은 팽창된 힘으로 유지되어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엄청난 기품이 서려 있는 감은사탑. (중략) 진평왕릉과 에밀레종 그리고 감은사지 탑을 통해 자기 신념으로 비추어보는 통찰력이 깊고 아름답다. 최소한 경주사람만이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이 땅의 노동해방을 부르짖던 사람이 차가운 독방에서 건져 올린 아름다운 문장은 붓다의 마지막 말을 곁들이며 끝을 맺는다. 경주 남산 자락에 파묻힌 이 침침한 관속같은 독방에서, 저는 매일같이 새벽 묵상 때마다. 진평왕릉과 에밀레종과 감은사탑을 내 마음속 부드러운 자리에 모시면서 성성한 화두처럼 궁글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부처 최후의 말씀) - 1993년 5월 경주교도소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붓다의 유훈은 시 「불변의 진리」에 또다시 인용하고 있다. 붓다의 유훈을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표현은 또한 다른 글에서 보인다. 아마도 시인이 좋아하는 문장 이전에 끝없이 부지런히 정진 노력하려는 본인의 철학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온 삶의 가파른 내력들을 보면 얼핏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캄캄한 독방에서 붓다와 독대하고 참구하며 사유했다. 글 속에는 불교 경전을 탐독한 글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경주 남산에 자락에서 그는 많은 것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새롭게 시작할 시詩가 어떤 울림을 지녀야 하는지, 그것은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 에밀레종 소리를 닮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일까. 일성원음一聲圓音의 소리를 통해 이근원통耳根圓通의 지혜를 얻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성이 있는 자는 여기 경주 남산에 오면 얼른 알아차리는지도 모른다. 영험한 남산 골짝마다 바위마다 억 만개 아승지겁阿僧祗怯의 마음들이 깃들어 있을 것이기에 사람만이 희망이다 1997년 옥중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22편 시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노해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단지 외부의 적을 향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상과 투쟁에서 나아가 삶의 안쪽에서 자기 자신과도 치열하게 투쟁하는 진정한 혁명적 삶이라는 것을 깊이 깨우친 사람으로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다가옵니다”라는 故 김수환 추기경님은 일독을 권하는 추천사를 썼다. 내적 성찰이 담겨있는 책에는 자연과 생태주의, 여성, 농민에 대해 두루 이야기하고 있다. 책 제목에서 보듯 휴머니스트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출판 선인세로 받은 일천만원을 북한동포돕기에 기부했다. 생각과 행동이 다르지 않음을 실천하는 사람답다. 1998년 7년 6개월 수감 끝에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8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됐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의 길을 뒤로하고 비영리단체 ‘나눔 문화’를 설립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 가난한 나라를 가서 반전 평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존경받기엔 충분하다. 체 게바라가 혁명의 성공에도 푹신한 권력의 자리에 앉지 않고 다시 아프리카 밀림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세계의 분쟁지역과 오지를 헤메이며 사진으로 세상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평화 인권운동가로, 사진작가로, 꾸준히 활동하며 찍은 그의 사진은 ’라 카페 갤러리‘에서 상설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시집과 산문, 사진집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그의 『걷는 독서』 속 한 문장은 지친 걸음에 휴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눔으로 실천하는 그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노동자, 얼굴없는 시인, 수배자, 혁명가, 777번 무기수, 사색가, 사진작가, 사상가, 평화 인권운동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보면 입전수수入廛垂手, 화광동진和光同塵 같은 말이 떠 오른다. 경주 남산은 한 사람의 내적 성찰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경주 남산은 민초들의 산이고 평범한 민초들의 염원들이 깃들어져 있고 새겨진 산이다. “꿈은 혼자서 꾸면 단순히 꿈에 그치지만, 모두가 함께 온몸으로 꾸면 현실이 된다” 경주교도소를 출소하던 날 경주 인근 식당에서 200여 명의 마중객 앞에서 한 말이다. 덕분에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알고 보면 혁명도, 사랑도, 사는 일이 다 한 밥상에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이 먹는 것,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것 같다. 시인이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 함께 먹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 밥상에 또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오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침침한 독방에 홀로 앉아서 벽에 뚫린 식구통으로 식은 저녁밥을 받습니다 푸실한 밥 한 술 입에 떠넣고 눈을 감고 꼭꼭 씹었습니다 담장 너머 경주 남산 어느 암자에선지 저녁 공양 알리는 소리인 듯 종 울림소리 더엉 더엉 더엉 문득 가슴 받히는 한 슬픔이 있어 그냥 목이, 목이 메입니다 함께 밥 먹고 싶어!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한 밥상에 둘러 앉아서 사는 게 별거야 혁명이 별난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늘 땅에 떳떳이 따뜻한 저녁밥을 함께 먹는 거지 나 생을 바쳐 얼마나 열망해 왔어 온 지상의 식구들이 아무나 차별 없이 한 밥상에 둘러 앉은 평화로운 세상을 아 함께 밥 먹고 싶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주 남산 약수골은 금오봉으로 오르는 최단 코스이다. 초입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경주교도소 철책 울타리를 끼고 산행이 시작된다. 교도소 내부에는 계곡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울타리 너머 점심 식후 산책 중인 교도관에게 수감자도 산책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강한 어조로 ‘노’라고 말한다. 물었던 이유는 박노해 시인 때문이었다. 그의 사색은 독방 안에서만 가능했을까 아니면 산책의 시간도 가졌을까? 그의 사유는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기에 급히 물었던 이유였지만 그는 분명 봄날 뻐꾸기 소리를 들었을 것이며, 저 멀리 단석산 위 맑은 가을 하늘과 흘러가는 흰 구름도 보았을 것이다. 비 오는 날엔 형산강으로 달려가는 약수골 계곡 물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상선암 목탁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 밤엔 경주 남산 바위 속 마애불과 목 없는 불상들과도 대화도 나눴을 것이다. 경주 남산에 교도소가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외지인들이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국립공원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공원은 1968년도 지정되었고 경주교도소는 1973년 이곳에 설치되었다. 불국토 남산의 정기가 어린, 공기 좋고 산세 좋은 곳이여서 일까 이곳은 국내 최초 실버 교도소로 선정되어 65세 이상 고령 수형자들이 새로운 사회생활 시작을 준비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초범 재소자와 미결수, 시국사범들이 주로 수형생활 하던 곳이다. 특히 박노해 시인은 이곳에서 7년 6개월을 독방에서 수감 생활했다. 그의 시집 『참된 시작』과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이곳 수감 중에 출간한 책들이다. 내용 속 경주 남산이 많이 등장한다. 투사에서 사색가로 사상적 전향과 삶의 행로가 달라진 것은 경주 남산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쓴 글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을 창립을 주도했고,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결성주동자로 7년여 수배 끝에 체포되었다. 24일간의 고문 끝에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경주교도소로 왔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 시인은 박해받는 노동자(勞) 해방(解)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본래의 이름은 박기평이다.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은 출판사 풀빛에서 판화 본으로 세상에 나왔다. 27살 버스회사 수습 정비공 시절 나온 시집이다. 군사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가 팔린 책이다. 『노동의 새벽』은 1980년대를 건너온 사람들은 모두가 기억할 만큼 유명한 책이다. 노동현장에 있던 사람은 물론, 문학인, 지식인에게도 강렬했던 한방이었다. 감은암(感恩庵) 경주교도소 한 평도 안 되는 0.75평, 침침한 관속 같은 독방을 살아있음의 감사와 은총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감은암(感恩庵)으로 지었다. 출가 수행자처럼 참구參究하며 이곳을 수행처로 삼았다. 그는 책에서 밝혔듯이 이곳에서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실천했다. 이곳에서 복역하다 나온 사람에 의하면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 명상하고 아침은 단식, 점심과 저녁은 채식하며 하루 10km 이상 교도소 운동장을 뛰며 심신을 단련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근무한 교도관은 그가 읽은 책이 족히 일 만권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운동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 책을 읽었다. 독서와 사색이야말로 투쟁의 시간을 끝내고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첫째의 일일 것이다. 그가 읽은 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윌든』, 노자와 장자를 읽었으며 그리고 붓다를 읽었다. 특히 그의 글에는 붓다를 만난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시와 산문에서 불교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수감생활 동안 빨리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알차게 보냈다. 출가승의 자세로, 구도자의 자세로 임했기에, 다 내려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곳 남산자락에서 그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슬며시 내려놓으며 뜨겁게 흐르던 피를 식힐 수 있었고 외부로 향했던 시선을 자기 안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곳이다. 세례명이 가스파르인 시인은 원래 신부가 꿈이었다. 자기보다 먼저 형이 신부가 된 카톨릭 집안이지만 그는 경주 남산자락에 암자를 하나 짓고 구도자의 삶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경주 남산에 자신을 묻은 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경주 남산에 나를 묻다 수감생활 중에 시집 『참된 시작』과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책 속에는 경주 남산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수감생활 중이던 1993년 6월 출판된 시집 『참된 시작』(1993년 창비)은 1. 2부는 수감생활 중에 쓴 시, 3~4부는 《노동해방문학》과 무크지 《노동문학》에 발표했던, 수감 이전에 쓴 시로 구성되어 있다. 편차, 골곡이 다소 있는 구성으로 엮어져 있다. 시집의 첫 페이지는 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으로 시작한다, 바람 찬 날이다/ 경주 남산/민들레 꽃씨는 바람에 날리고/ 바람 속에서/ 바람을 품고/ 천 년의 긴 호흡으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밤새 독거방 낡은 창은 덜컹대고/ 감시등 불빛 아래/유유히 떠도는 민들레 꽃씨처럼/ 내 영혼은/ 저문 들길 지나 낯선 산굽이를 돌아서는/ 출가승의 옷자락처럼 허허로운데/ 무겁구나 지나온 날/ 깊어가는 상처는 그칠 줄 모르고// 사흘 밤낮 몹시 아픈 날/ 스스로 삭발을 하고/ 찬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 나직이 토해내는 신열의 부르짖음/ 무너졌다. 패배했다. 이렇게/ 흐르는 눈물 흐르는 대로/ 그래, 지금 침묵의 무덤을 파고/나를 묻는다/ 나를 암장한다// 숨죽인 호곡처럼/ 머리 푼 밤바람은 쓰러지는데/ 어둠 속으로 얼굴들이 흐르고/ 해가 길어지고 해가 짧아지고/이 슬 내리고 눈이 내리고/ 죄닦음이 다하고 눈 맑아진 어느 날/ 내 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씨앗 하나/ 피투성이 목숨으로 품어온 씨앗 하나// 마침내 싹이 틀까/ 젖어드는 눈 감으면 벽 그림자/ 상처 속에 싹트는 씨앗 하나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아아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 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전문 이 시는 경주교도소로 이감 직후인 1992년 4월 시인의 누나가 접견창구에서 받은 시이다. 경주 남산에서 처음 쓴 시라 할 수 있다. 독방에 갇혀있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를 묻는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의 다짐이었다. 또 다른 시 「그해 겨울나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해 겨울 / 나의 시작은 패배였다’로 시작해서 ‘그해 겨울 /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라고 맺는다. 패배는 무기수라는 인간으로서의 패배와 사회주의 몰락이 가져온 이념의 패배는 볼 수 있다. 시집 속에는 「강철 새잎」, 「모과향기」, 「민들레처럼」 같은 생명과 생존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 많다. 세월 지나도 많은 사람이 인용하며 사랑한 시들이기도 하다. 세 가지 신물信物-진평왕릉, 에밀레 종, 감은사 탑 이 시집에서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마지막에 수록된 산문 「삶의 대지에 뿌리박은 팽창된 힘」은 펄쩍 놀라게 만든 글이다. 문화유산을 읽는 생각이 깊고 남다르다. 이를 통해 자신과 연결시켜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내용을 다 인용하고 싶지만, 부분부분 몇 줄씩 발췌해 본다.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으며 내 마음 깊은 곳에 세 가지 신물信物을 모셨습니다. 진평왕릉은 내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화려해야 눈에 들어오고, 장식이 많고 특출한 형상을 해야만 대단한 것으로 우러르는 이 시대의 천박한 안목으로는 진평왕릉의 격조가 잡히지 않습니다. (중략) 항시 나에게 열려있으라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옵니다. (중략) 에밀레종은 뼈아픈 내 침묵, 절필 이후에 새롭게 시작할 나의 시가 어떤 울림을 지녀야 하는지를 깨우쳐 줍니다. 장중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장중하기 힘든 법이건만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은 울림. 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소리‘여야 하지 않겠느냐, 길고 긴 여운을 지닌 소리여야 하지 않겠느냐, (중략) 감은사탑은 나의 참된 시작이 어떠해야 하는지, 내 사상과 운동이 무엇으로 쌓아져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단순하면서도 강인한 힘으로 생동하는 아름다운 모습. 결코 허세를 부리는 억지 상승이 아닌, 삶의 대지에 뿌리박은 팽창된 힘으로 유지되어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엄청난 기품이 서려 있는 감은사탑. (중략) 진평왕릉과 에밀레종 그리고 감은사지 탑을 통해 자기 신념으로 비추어보는 통찰력이 깊고 아름답다. 최소한 경주사람만이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이 땅의 노동해방을 부르짖던 사람이 차가운 독방에서 건져 올린 아름다운 문장은 붓다의 마지막 말을 곁들이며 끝을 맺는다. 경주 남산 자락에 파묻힌 이 침침한 관속같은 독방에서, 저는 매일같이 새벽 묵상 때마다. 진평왕릉과 에밀레종과 감은사탑을 내 마음속 부드러운 자리에 모시면서 성성한 화두처럼 궁글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부처 최후의 말씀) - 1993년 5월 경주교도소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붓다의 유훈은 시 「불변의 진리」에 또다시 인용하고 있다. 붓다의 유훈을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표현은 또한 다른 글에서 보인다. 아마도 시인이 좋아하는 문장 이전에 끝없이 부지런히 정진 노력하려는 본인의 철학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온 삶의 가파른 내력들을 보면 얼핏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캄캄한 독방에서 붓다와 독대하고 참구하며 사유했다. 글 속에는 불교 경전을 탐독한 글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경주 남산에 자락에서 그는 많은 것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새롭게 시작할 시詩가 어떤 울림을 지녀야 하는지, 그것은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 에밀레종 소리를 닮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일까. 일성원음一聲圓音의 소리를 통해 이근원통耳根圓通의 지혜를 얻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성이 있는 자는 여기 경주 남산에 오면 얼른 알아차리는지도 모른다. 영험한 남산 골짝마다 바위마다 억 만개 아승지겁阿僧祗怯의 마음들이 깃들어 있을 것이기에 사람만이 희망이다 1997년 옥중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22편 시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노해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단지 외부의 적을 향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상과 투쟁에서 나아가 삶의 안쪽에서 자기 자신과도 치열하게 투쟁하는 진정한 혁명적 삶이라는 것을 깊이 깨우친 사람으로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다가옵니다”라는 故 김수환 추기경님은 일독을 권하는 추천사를 썼다. 내적 성찰이 담겨있는 책에는 자연과 생태주의, 여성, 농민에 대해 두루 이야기하고 있다. 책 제목에서 보듯 휴머니스트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출판 선인세로 받은 일천만원을 북한동포돕기에 기부했다. 생각과 행동이 다르지 않음을 실천하는 사람답다. 1998년 7년 6개월 수감 끝에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8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됐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의 길을 뒤로하고 비영리단체 ‘나눔 문화’를 설립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 가난한 나라를 가서 반전 평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존경받기엔 충분하다. 체 게바라가 혁명의 성공에도 푹신한 권력의 자리에 앉지 않고 다시 아프리카 밀림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세계의 분쟁지역과 오지를 헤메이며 사진으로 세상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평화 인권운동가로, 사진작가로, 꾸준히 활동하며 찍은 그의 사진은 ’라 카페 갤러리‘에서 상설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시집과 산문, 사진집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그의 『걷는 독서』 속 한 문장은 지친 걸음에 휴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눔으로 실천하는 그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노동자, 얼굴없는 시인, 수배자, 혁명가, 777번 무기수, 사색가, 사진작가, 사상가, 평화 인권운동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보면 입전수수入廛垂手, 화광동진和光同塵 같은 말이 떠 오른다. 경주 남산은 한 사람의 내적 성찰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경주 남산은 민초들의 산이고 평범한 민초들의 염원들이 깃들어져 있고 새겨진 산이다. “꿈은 혼자서 꾸면 단순히 꿈에 그치지만, 모두가 함께 온몸으로 꾸면 현실이 된다” 경주교도소를 출소하던 날 경주 인근 식당에서 200여 명의 마중객 앞에서 한 말이다. 덕분에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알고 보면 혁명도, 사랑도, 사는 일이 다 한 밥상에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이 먹는 것,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것 같다. 시인이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 함께 먹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 밥상에 또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오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침침한 독방에 홀로 앉아서 벽에 뚫린 식구통으로 식은 저녁밥을 받습니다 푸실한 밥 한 술 입에 떠넣고 눈을 감고 꼭꼭 씹었습니다 담장 너머 경주 남산 어느 암자에선지 저녁 공양 알리는 소리인 듯 종 울림소리 더엉 더엉 더엉 문득 가슴 받히는 한 슬픔이 있어 그냥 목이, 목이 메입니다 함께 밥 먹고 싶어!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한 밥상에 둘러 앉아서 사는 게 별거야 혁명이 별난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늘 땅에 떳떳이 따뜻한 저녁밥을 함께 먹는 거지 나 생을 바쳐 얼마나 열망해 왔어 온 지상의 식구들이 아무나 차별 없이 한 밥상에 둘러 앉은 평화로운 세상을 아 함께 밥 먹고 싶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시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정(草汀) 김상옥(金相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시조에 관심이 없더라도 학창시절 교과서에 수록된 그의 시조 한두 편은 만나보았을 것이다. 그는 예술의 고장 경남 통영 출생으로 경주와 특별한 연고가 없지만, 어느 작가보다 많은 경주에 관한 시편들을 남겼다. 한편 한편이 모두 빛나는 걸작들이다.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봉선화」, 「백자부」, 「사향」을 들기도 하지만 경주를 소재로 한 「옥적」과 「다보탑」, 「십일면관음」, 「대불」도 빼놓지 않는다. 첫 시집 「초적(草笛)」 속의 경주 초적은 풀피리를 말한다. 누구나 불 수 있는 풀피리는 경주의 상징인 옥적 또는 만파식적의 원형과 다름없다. 그가 시집 제목으로 택한 이유는 시를 읽어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경주를 소재로 한 시들이 그의 첫 시집 『초적』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1947년 수향서헌에서 출간하면서 편집, 장정, 조판, 인쇄, 제본 등 전 과정을 손수 혼자서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정을 문단에 추천한 가람 이병기가 첫 시집 추천사를 썼다. 10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된 그의 시집은 현재 가격은 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시집에 수록된 경주에 관한 시들은 「옥적」, 「십일면관음」, 「대불」, 「다보탑」, 「무열왕릉」, 「포석정」, 「재매정」 등 수록된 40편 가운데 경주의 유적지를 노래한 시가 7편이나 된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시 「다보탑」은 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현장에 있는 듯 생동감 넘친다. 완성미보다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불꽃이 이리 튀고 돌조각이 저리 튀고, 밤을 낮을 삼아 정 소리가 요란터니, 불국사 백운교 위에 탑이 솟아오르다. 꽃쟁반 팔모 난간 층층이 고운 모양, 임이 손 간 데마다 돌옷은 새로 피고, 머리엔 푸른 하늘을 받쳐 이고 있도다. - 시 「다보탑」 전문 (全文) 두 번째 시집 『고원의 곡』(성문사 1949)에도 「돌탑」과 「박물관」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돌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두 탑을 화랑과 짝사랑한 신라 처녀로 비유하여 노래했다. 시 「박물관」 속에는 박물관에 소장된 금관, 옥적, 에밀레종, 돌칼과 돌도끼, 구리로 만든 열세층 꼬마탑 등 다양한 유물이 등장한다. 시인은 경주 박물관 홍보대사가 된 듯 박물관으로 가보라며 안내한다. 꿈 얘기도 옛 얘기도 아닙니다 경주 박물관으로 가보세요 내 말이 믿어지지 아니하거든 - 시 「박물관」의 일부 시집 『목석의 노래』 (청우 1956) 에는 「일모(日暮)」, 「승화(昇化)」는 시조라기보다는 긴 분량의 자유시 또는 산문시 형태로 경주의 해질녁과 불국사를 꿈의 나라, 신라로 승화하여 표현하기도 했다. 시 「일모(日暮)」 속 한 문장을 읽으면 언젠가 진평왕릉에서 보았던 선도산과 옥녀봉 두 아름다운 곡선의 봉우리 사이로 넘어가는 해넘이가 떠오른다. 초정도 이곳에서 일몰을 보았을까 아니면 어디서 아름다운 고도의 저물 무렵을 보았을까? 왕릉 위로 번지는 붉은 빛은 경주에서만 느낄 수 있으리라. 정양모 교수가 제자 유홍준에게 왜 가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물 무렵 선덕여왕 길을 맨발로 걷다 보면 운수 좋은 날엔 붉은 홍옥 속 경주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 「일모(日暮)」 일부를 인용해 본다. 지금도 각각(刻刻)으로 굳어가는 우리의 영혼! 그 두려운 여백 위에 차라리 아픈 칼자국을 내라. 언제나 비극은 지극히 아름다운 대사로 막을 내리니 오늘 우리의 슬픈 언어로 낙인으로 찍으련다. - 시 「일모(日暮)」 일부 그런가 하면 동시에도 경주를 빼놓지 않았다. 동시집 『꽃 속에 묻힌 집』(청우 1958)에는 「석굴암에서」라는 동시가 한편 자리하고 있다. 경주는 인간人間나라 생불生佛나라의 수도 『삼행시 육십오편』(아자방 1973) 시집에는 「인간(人間)나라 생불(生佛)나라의 수도」 라는 재미있는 시가 있다. 신라 천년 서라벌을 한 왕조의 서울이 아니라, 인간의 서울, 오직 인간 나라의 서울이다 라고 시작해서 생불(生佛) 나라 생불(生佛)의 수도라고 끝을 맺는다. 경주사람이 읽으면 좋아할 것 같다. 신라 일천년 서라벌은 한 왕조 아니라 한 왕조의 서울이 아니라, 진실로 인간의 서울, 오직 인간 나라 서울이니라 한가락 젓대의 울림으로 만이랑 사나운 물결도 잠재운 나라, 모란빛 진한 피바람도 새하얀 젖줄로 용솟음 치운 나라 첫새벽 홀어미 사연도 여울물에 헹궈서 준 나라, 그 나라에 또 소 몰던 백발도 행차에 나선 젊으나 젊은 남의 아내도, 서로 죄 없는 눈짓 마주쳤느니 꽃벼랑 드높은 언덕을 단숨에 뛰어올라, 기어올라, 천지는 보오얀 봄 안개로 덮이던 생불 나라 생불의 수도이니라 - 「인간 나라 생불 나라의 수도」 전문(全文) 이 시는 만파식적, 이차돈의 순교, 효녀 지은, 헌화가의 수로부인 등 신라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시 제목 또한 멋지게 지었다. 시인이 꼭 신라 사람 같다. 아사녀의 노래라는 부제가 달린 연작시 「아가(雅歌) 1」,「아가(雅歌) 2」에서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영지(影池)로 나오라고 우리를 못가로 불러내고 있다. 같은 시집 속 또 다른 시 「신록(新祿)」도 마찬가지로 다시 아사녀를 불러내고 있다. 아사녀! 아사녀! 예서 조금만 더 쉬고 있으면, 가진 것보다 더 반가운 것, 절실한 것들이 차츰 비치기도 하고, 또 어디서 옷자락 가벼이 스쳐 지나기도 할 것이다 - 「신록(新祿)」 일부 회갑기념 시집 『묵을 갈다가』(창작과 비평사1980)에는 어느 날 경주 박물관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부처님 돌이(乭伊)가 막일꾼 이차돌(次乭伊)에게 1」과 「부처님 돌이(乭伊)가 막일꾼 이차돌(次乭伊)에게 2」는 박물관 뜰과 경주 남산 목 없는 불상을 막일꾼 이차돌을 끌어들여 불교의 인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돌이와 이차돌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고 만다. 나는 석씨 출가세자 석돌이, 너는 경주의 막일꾼 차돌이, 한뜨락 감은 비바람을 함께 맞은 인연이 얼마나 지중턴가 돌 속을 흐르던 나의 피. 돌 속에서 뛰던 나의 숨결, 묘하여라 차돌이 일자무식 차돌이 네가 짚어 알았어라 - 「부처님 돌이가 막일꾼 이차돌에게 2」일부 남산을 불국토로 만든 사람도 보통사람이었고, 깨진 불상을 찾아낸 것도, 돌 속의 흐르는 피를 찾아내고 호흡한 것도 막일꾼인 이차돌을 부처와 동일시한다. 민중적 시각으로 민족의 숨결을 더듬은 시이다. 미간행 유고 시 가운데에는 「효불효교(孝不孝橋)」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1957년 《현대문학》 8월호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홀어머니의 연애를 돕기 위해 아들이 돌다리를 놓아주는 효도 되고 불효도 되는 다리에 얽힌 설화를 시로 표현했다. 경주 박물관 근처 남천에 다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혼자된 아버지의 길고 길었던 시간에 다리는커녕 돌 하나 놓아드리지 못한 사람도 있다. 신라 유물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첫 시집부터 유고 작품에 이르기까지 초정 김상옥은 신라 유물들을 매개로 절창의 시를 완성했다. 2005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한 『김상옥 시전집』을 기준으로 대략 제목만으로 파악한 것이 스무 편 정도 된다. 미처 살펴보지 못한 시 속의 내용까지 더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왜 경주에 천착했을까? 경주가 시의 대상이 된 것은 그의 삶의 행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사상범으로 여러 번 투옥되기도 했다. 윤이상과 같이 일경을 피해 도망을 다녔으며, 두만강 국경 근처에 가서 살기도 했다. 특히 첫 시조집 『초적』에는 우리의 역사적 유물을 통해 나라 잃은 슬픔을 대신하였으며, 민족 고유의 정신과 정서 회복을 노래했다. 특히 석굴암 다보탑 옥적 등에서 우리 민족이 가졌던 종교적 믿음, 예술적 미의식을 찾고자 했다. 그가 찾고자 했던 민족정신은 바로 신라 정신이었다. 서정주 시인은 초정을 모든 사물을 볼 때마다 거기 살다가 죽어간 옛 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넋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우리 시인들 중 가장 뛰어난 눈을 가진 선수라고 칭송을 했다. 6일 만에 아내를 따라간 시인 시조와 서예 서화, 수필, 전각 디자인 등 다방면에 다재다능했다. (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로 불릴 만큼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인쇄소에서 일을 했고,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백자를 좋아해서 수집하며, 「백자부」라는 명시도 남겼다. 서울 인사동에서 표구점이자 골동품 가게 ‘아자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고향 통영을 비롯한 경남지역에서 20여 년 교편을 잡았으며 박재삼, 이제하, 김병총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그는 ‘시조’라는 단어보다 ‘삼행시(三行詩)’라는 용어를 썼다. 시조를 자유시 영역에 두었으며 언어, 이미지, 리듬 등 기존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표현의 방식으로 시조 시인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또 T.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와 같은 현대 시인의 시를 번역하기도 했다. 고향 통영에는 봉선화 시비, 초정 김상옥 거리, 초정 좌상 등이 있고 매년 초정 김상옥 시조 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부부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던 시인은 부인이 사망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엿새 만에 부인을 따라갔다. 2004년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애틋한 부부애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고 <동치미>, <내 생愛 마지막 비가(悲歌>라는 연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시의 배경이 된 경주 곳곳을 둘러보며 시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을 찾아내는 일은 경주를 제대로 아는 일이다. 불국사, 석굴암, 포석정, 재매정, 무열왕릉, 경주 박물관과 남산에 산재한 불교 유적들, 꼭 실화일 것만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영지와 효불효교까지 둘러보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풍성해질 것이다. 유난히 경주에 관한 시를 많이 썼던 시인에게는 배울 점이 참 많다. 섬세한 시는 물론이거니와 부부애까지도.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목월 시인의 미공개 작품이 동리목월문학관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공개되었다. 앞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인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의 특별강연이 있었다. 평생 시인의 아들로 살아온 박동규 교수는 아버지를 회상하며 강의 중간중간에 목월의 시를 읽으며 진행했다. 1939년생인 팔순 중반의 교수가 눈시울을 적시며 시를 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감동적이었다. 미공개 유작 작품들은 다 읽어보지 못했기에 다음 기회에 미루기로 한다. 박동규 교수가 읽은 아버지 목월의 시를 고향과 가족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고향 사랑 박동규 교수는 아버지의 남다른 고향 사랑에 대해 많은 부분을 언급했다. 경주는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인 동시에 목월 시의 정신적 원형이며 시의 전부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미공개 시들을 경주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이유이며 당연한 일로 설명했다. 아버지 시는 경주의 산과 들 특히 모량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면서 목월의 시 「논두렁길」이라는 시를 이야기했다. 밑 빠진 신발로 논두렁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금융조합 근무할 적 동그라미 하나를 잘못 보고 돈을 잘못 내어주는 바람에 몇 년에 걸쳐 분할해서 변상해야 한 아픔이 있었다. 업무보다는 시에 골몰했던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표작인 「나그네」 또한 어려운 시대에 팔자 좋은 시라고 폄하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하는 열망과 못해 본 것에 대한 그림을 그리려는 것으로 이버지를 이해했다. 고향은 시의 시작점이며 고향에 대한 노래는 세월이 지나도 이어지며 계속 시로 태어났다. 목월은 고향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면 정중히 모셨다고 한다. 흰 두루마기 입은 고향의 친구분들이 서울로 올라오면 아들인 본인에게 덕수궁으로 경복궁으로 안내자 역할과 저녁 식사까지 대접하는 역할까지 맡겼다고 했다. 고향 사람들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며 고향에 대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시 몇 편을 인용했다. 그 가운데 목월의 시 「산」 이란 제목의 시 몇 구절이다. 건천 고향 역에 내리자, 눈길이 산으로 먼저 간다. (중략) 내일은 어머니 모시고 성묘를 가야겠다 종일 눈길이 가는 산 누구의 얼굴보다 친한 그 산의 구름 그 산을 적시는 구름 그림자 - 시 「산」 일부 위 시에서 보듯 고향에 내려오면 가정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산이었다. 선조들이 묻혀있고 자신이 묻히고 싶은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슷한 듯 또 다른 시 「고향에서」를 읽으면 왜 눈길이 산으로 갔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팔목 시계를 풀어놓듯 며칠 고향에서 지냈다. 옛 친구며 친구의 친구들과 어울려 술자리도 함께하고 선산에도 가보고 나의 묏자리를 생각하며 산도 둘러보았다. - 시 「고향에서」 일부 위 시에서는 알 수 있듯 목월은 고향 선산에 묻히고 싶었지만, 시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 공원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박 교수는 아버지 장례와 장지 선정에 관해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모친인 유익순 여사 또한 고향인 경주에 모시고자 하였으나, 아버지 주변 시인들의 권유로 부득이 경기도 용인에 장지를 마련했다고 했다. 고향 땅에 못 모신 아쉬움을 대신해서 800여평의 적지 않은 묘역을 조성했다. 이후 박 교수는 2015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곳에다 목월의 시비 8개를 세워 ‘박목월 문학정원’을 꾸며 오가는 이에게 볼거리와 힐링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이 다녀가기도 하는 곳이다. 목월의 자작시 해설집 「보랏빛 소묘」를 읽고 시인을 꿈꾸었던 나태주 시인은 시의 정원 개원식에 맞춰 「100년, 아버지」라는 헌시로 아래와 같이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짧지 않은 한국시사 100년에서/ 오롯이 아버지 같은 시인 한 분을 꼽으라면/ 누구라도 서슴없이 대는 이름, 박목월 (이하 생략) 박목월은 박동규 교수의 아버지, 즉 한 사람의 아버지를 뛰어넘어 대한민국 시인의 아버지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가족 사랑 목월의 가족사랑은 유별나며 가족에 관한 멋진 시들이 많다. 고모요/ 막내 고모여/ 화천골 진달래는/ 지천으로 피는데 사람평생 잘 살믄 별난기요/ 그렁/ 저렁 / 살믄 사는 보람도 서고, / 아들이 컸잖는기요 / 저 덩치 보이소/ 며누리 보고 손자보믄/ 사람 일 다 하는거로 / 유달리 넓직한 / 경상도 뽕잎에는/ 밤이슬은 왜 이리 굵은기요 - 시 「 노래 」 일부 이 시는 화천에 사는 막내 고모에 대한 시다. 지금은 경주역 앞에 고층아파트 들어서고 있는 이곳으로 시집가서 고생하며 사는 고모에 대한 애잔한 심정을 유달리 넓은 경상도 가랑잎에 유난히도 굵은 밤이슬로 표현했다. 박동규 교수는 이 시를 참 좋아한다고 어느 책에서 밝힌 바 있는데 이번 강의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했다. 화천 경주역 공터에도 많은데 이 시비 하나 정도 세워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박목월 시인의 가족사랑은 대한민국 문인들 모두가 알 만큼 유별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시인의 작품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시가 「가정」이다. 1964년에 발간한 시집 《청담》에 수록된 작품으로 많은 사람이 애송하고 낭송되는 시 가운데 한편이다. 생계를 책임지는 이 땅의 가장들을 생각하며 마지막 연만 언급해 본다.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시 「가정」 일부 아버지와 아들 박목월 시인은 누구보다 가정적이고 자식에게 애정한 아버지로 정평이 나 있지만, 박 교수의 역시 아버지에 대한 사랑 또한 이에 못지않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국문학자라는 커다란 명함 있었음에도 언제나 박목월 시인의 아들로 더 많이 불러지곤 했다. 불편했던 삶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박목월 시인과 아들 박동규 교수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책들이 많다. 평소 목월은 아들과 같이 책을 내고 싶어 했던 만큼 두 권이나 공저로 출간했다. 2007년 1월 『아버지와 아들』, 2014년 6월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두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책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아들은 아버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도 한두 편도 아니다.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순례』,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 같은 책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세상에는 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소통되지 않고, 서먹서먹한 부자 관계가 더 많을 것이다. 두 사람의 부자 관계가 샘이 날 정도로 부럽다. 애증의 관계, 세대 차이,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가로막히기 쉬울 터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연애하는 사람 같은 부자간의 소통이 부럽다. 두 사람은 고향이 경주다. 오늘 밤 밤차를 타고 모량역에 내릴 것 같다. 건천역에 내릴 것 같다. 아니 고모가 살던 동네 화천 경주역에 내릴 것 같다. 「사향가」를 부르며 내릴 것 같다. 화천 ktx 역사 옆 동네가 목월 생가터가 있는 모량이다. 목월 생가에는 꾸준히 문학인들의 발걸음이 잦다. 목련 꽃 피는 어느 봄날 대구의 시 낭송가 선생님들이 생가를 방문하여 목월의 시들을 낭송했다. 필자가 안내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생가 근처로 목월 문학관을 이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목월의 시 「사향가」를 들으면 더 그렇다. 밤차를 타면 아침에 내린다. 아아 경주역. 화자가 그리워하는 고향 경주 이처럼 막막한 지역에서 하룻밤을 가면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에 이르는 것을. 영혼의 나라인 고향 경주 천년을 한가락 미소로 풀어버리고 이슬 자욱한 풀밭으로 맨발로 다니는 그 나라 백성. 고향사람들. 땅위와 땅아래를 분간하지 않고 연꽃하늘 햇살속에 그렁저렁 사는 그들의 항렬을, 성(姓)받이를. 대대로 평화롭고 순박하게 살아가는 고향 사람들 이제라도 갈까부다. 무거운 머리를 차창에 기대이고 이승과 저승의 강을 건너듯 하룻밤 새까만 밤을 달릴까부다.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 무슨 소리를. 발에는 족가(足枷). 손에는 쇠고랑이. 귀양온 영혼의 무서운 형벌을. 이 자리에 앉아서 돌로 화하는 돌결마다 구릿빛 시뻘건 그 무늬를. - 시 「사향가(思鄕歌)」 전문 전인식 시인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 귀가 얼룩귀 엄마 닮았네 어린이 노래의 대명사 경주시민이 사랑하는 황성공원에 가면 얼룩송아지 노래비가 있다. 매년 봄이면 이곳 노래비 앞에서 목월 백일장이 열린다. 목월의 명성에 걸맞게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행사이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얼룩송아지」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엄마가 나를 재우기 위해 불러주었던 노래였으며, 내가 아이를 달래주거나 잠재울 때 불러주었던 친숙한 노래이다. 어머니 품에서 뼛속까지 스며든 노래여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목월은 1933년 계성중 재학 중이던 18세 무렵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짝짝」이 윤석중에 의해 뽑혔다. 같은 해 《신가정》에 「제비맞이」가 당선이 되면서 시보다 먼저 동시 작가로 출발했다. 1940년 《문장》지를 통해 시인으로 데뷔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박목월은 윤석중, 강소천과 더불어 한국 현대 동시 개척의 선구자 역할을 했으며 1961년 동시집 『산새알 물새알』을 발간하였다. 동시집에 수록된 시는 「물새알 산새알」이다. 간혹 시와 시집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다, 동시집은 현재까지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으며 제목을 달리하며 재출간 되고 있다. 「얼룩송아지」가 우리에게 잘 알려지게 된 계기는 동요로 만들어졌고 1948년 국민학교 1학년 교과서에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노랫말과 4분의 4박자의 가락으로 동심을 읽을 수 있는 노래는 어린이 노래의 대명사가 되었고 국민동요가 되었다. 황성공원 노래비 제막식 날의 풍경 어린이날 기념으로 세워진 이 노래비와 관련된 목월의 글이 있다. 수필집 『그대와 차 한잔을 나누며(자유문학사)』 의 「어머니의 귀」 편에 그날 하루의 표정을 자세히 담고 있다. 노래비는 새싹회 대표 윤석중의 발의로 건립되었는데, 세워진 계기는 노래를 만든 작사자의 공적보다는 어린이에게 동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전국에 여섯 편의 동요 노래비를 세우는 그 가운데 「얼룩송아지」가 선정되었다. 1968년 5월 30일 노래비 제막식이 있던 날 서울에서 아동문학가 김요섭, 윤석중 그리고 목월 선생 내외분이 정오 무렵 경주에 도착했다. 황성공원 행사에 참석한 사람 중 고향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니 내 알겠나” 옥양목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시골 노인이 물으며 다가왔지만 어정쩡한 목월에게 “내가 이 아무개다”라고 말한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의 동창생이었다. “지 누군지 알아보겠는교?”하며 물어오는 청년은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분 아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저 멀리서 “보재이 이사람” 하고 손짓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어 가보니 문중의 어른으로 일가친척이 되는 분이었다. 이처럼 이날 행사에는 고향 사람들이 대거 참석하였는데 건천초등학교 모교의 학생들, 교장 선생님,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들, 지방 유지, 면의 리동(里洞) 대표들, 친지 친척 등 수백 명이 자리했다. 또한, 면에 있는 무산 고교의 밴드부, 대구 모교의 부속 초등학교 어린이 합주단이 「얼룩송아지」를 연주하였는데, 표현을 빌리자면 연주로 시작하고 연주로 끝났다. 행사가 끝난 뒤에는 돼지를 잡고, 막걸리를 걸러 푸짐한 잔치가 벌어졌다. 이날 행사비용은 고향 사람들과 친구들이 추렴하였다고 한다. 나를 남이라 여겨지 않는 고향 사람들 이날 목월은 다른 행사 일정으로 먼저 떠났지만, 제막식 행사에 참석한 건천 사람들은 돌아오는 길 내내 밴드와 어울려 어른, 학생 할 것 없이 「얼룩송아지」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귀향했다. “햐 말도 마라 얼룩송아지 때문에 단석산이 떠나갈 듯 같았다” 이 말은 고향 친구가 나중에 목월에게 들려준 후일담이다. 시인이 자란 땅에 노래비가 선다는 것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상징물로 의의를 지니지만, 그것을 통해 베풀어주신 너무나 깊은 애정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시인은 얼룩송아지 노래비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에게 그들은 남에 불과했지만, 힘도, 재력도, 권력도 없는 한갓 문인으로 보답할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남으로 여기지 않았다. 동창생으로 혹은 선배로, 같은 면민으로, 한동네 사람으로 다정한 인간적 유대감을 이야기하면서 완전한 남이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라고 했다. 특히 경주라는 곳이 그렇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강한 뿌리 의식은 저절로 애향심을 갖게 하는지 모른다. 동리와 목월이 문학적으로 향토성 짙은 작품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얼룩송아지는 어머니의 노래이기도 목월은 얼룩송아지에 대한 언급을 아끼지 않았다. 어미 소를 닮은 얼룩송아지란 무엇일까? 그것은 엄마 소의 연장(延長)으로서 그 바탕은 엄마 소이다. 그러므로 ‘어버이와 자식과의 관계는 어버이와 자식이라는 두 개의 존재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어버이를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사람이 되어간다. 아무리 사람이 되어도 바탕은 부인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얼룩송아지 제2절 ‘엄마 소도 얼룩 귀/귀가 닮았네’라는 구절이 있다. 왜 하필이면 귀를 닮았네 했을까? 목월은 이에 대해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그 사실로서 어머니의 귀를 닮았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수필의 제목도 얼룩송아지를 이야기하면서도 「어머니의 귀」로 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간단한 「얼룩송아지」 노래를 통해 시인은 어머니를 노래하고 있다. 얼룩송아지 노래는 어린이 노래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노래이기도 하다. 전인식 시인
황용동은 경주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 중의 산골이다. 지금이야 감포로 넘어가는 길이 훤히 뚫려있지만, 과거에는 걸음하기 쉬운 길이 아니었다. 이 깊은 산중으로 찾아들어 봄을 노래한 사람들이 있으니 놀랍게도 그들은 한국문학을 주름잡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이다. 금오신화의 저자이자 천재 시인 매월당 김시습과 시와 소설로 한국문학을 대표한 경주 출신 두 거장 동리와 목월이 주인공이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찾아간 곳이 봄날의 황용골이다. 봄이 가장 늦게 올 것 같은 깊은 산골 마을로 가서 봄날을 노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이 남긴 시를 읽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봄을 맞이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와 함께 황용골로 떠나보는 일도 꽃구경만큼이나 즐거운 일이 아닐까? 매월당의 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천하를 방랑하다 경주 남산 용장사에 머물며 금오신화를 지었으며, 그의 문집 「유금오록」에는 경주에 관한 많은 시편 들을 남겼다.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매월당 또한 이곳 황용을 빼놓지 않았다. 지금처럼 감포가는 길이 놓인 것도 아닌 그 당시는 아마도 알천 물길을 따라 올라왔거나 아니면 산 고개를 몇 개 넘어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매월당은 어느 절 스님을 만나러 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매월당 김시습의 ‘황룡동’이란 시이다. 발길이 황룡동에 들어와 보니 안개와 노을 모두 듣던 대로라 길은 깊어 보이느니 짐승뿐이요 땅 외져 사람들은 만날 수 없네 냇가 풀은 안개 속에 파랗게 돋고 강가 매화마저 저 혼자 봄을 웃누나 서로 끌어 스님 집 찾아가 보니 선승 경내 먼지가 하나 없도다. -김시습의 시 「황룡동(黃龍洞)」 전문 시 속 ‘강가 매화 저 혼자 봄을 웃누나’하는 구절이 가슴에 쏙 들어온다. 먼지 하나 없이 청정한 절은 어디였을까? 황룡사였을까? 표충사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절일까? 김시습이 찾아왔던 절이 명확히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황룡동에는 절골이라는 지명이 있을 만큼 수많은 절이 산재해 있던 곳이다. 시내에 있던 신라 대표 사찰 황룡사와 이름이 같은 황룡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일본인이 발굴조사를 할 만큼 유명세를 탄 절터였다. 수년 전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적지 않은 유물들이 나왔던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크고 작은 절이 20여 개나 있다. 조선 땅을 유랑하던 김시습이 경주 땅 어디를 가보지 않았을까? 경주 남산 용장사에 거처를 정하고 머물며 김시습은 경주 여기저기를 유람했다. 황용동뿐만 아니라 외동 신계에서 양북 범곡 사이 동산령을 넘으며 「동산령에 올라 동해바다 바라보다」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아마도 불국사에서 석굴암을 경유해서 기림사로 향하던 길이었거나, 기림사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용동을 노래한 시 속에서 얼핏 세상을 등진 매월당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동리의 유고시 「황룡골의 노래」 김동리(1913 ~1995)는 소설가의 명성에 가려 시인으로서 존재감은 미미하지만, 소설가 이전에 시로 먼저 등단한 작가이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당선되었고 이후 「화랑의 후예」 등 소설로 등단하였다. 문학사에 남을 수많은 소설을 남겼으며 시집으로는 『바위』 와 『패랭이꽃』 두 권을 남겼다. 사후 그가 남긴 미발표 유고시 30편 가운데 「황룡골의 노래」가 있다. 뒷내 자갈벌 패랭이 꽃은 가뭄이 들수록 붉어나고 황룡골 산중 복분자는 철이 겨워 검어난다 황룡골 산중 우는 새여 사월 오월 해도 길다 엉개와 두릅 산나물은 벼랑이 가팔라 못 따내고 황룡골 산중 큰 애기는 골짝이 깊어 세어난다 황룡골 산중 우는 새여 물이나 먹고 쉬어 울지 -김동리의 「황룡골의 노래」 전문 뒷내는 북천을 말한다. 동리의 집이 있던 시내 성건동 쪽에서는 북천을 뒷거랑으로 불렀다. 패랭이꽃이 많던 뒷내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마지막으로 닿는 곳이자, 북천의 첫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 황룡골이다. 어느 때 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황룡의 봄날은 동리에게 시 한 편을 선사해 주었다. 패랭이꽃과 복분자의 붉은 대비가 선명하다. 가팔라서 못 딴 엉개와 두릅이 눈에 밟히면서 봄나물 향에 입안 가득 침이 괸다. 산중에 우는 새와 산중 큰 애기의 대비가 외로운 듯 닮아있다. 목월의 시와 산문 속의 「구황룡」 목월의 시와 수필에서 황룡골은 오누이처럼 등장하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목월의 시에 나오는 「구황룡九黃龍」을 두고 많은 시간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과연 구황룡이 어디일까? 실제 지명일까 아니면 상징적 장소일까? 황룡이 아니고 왜 구황룡이라고 했을까? 1년여 년 만에 이런 궁금점은 말끔히 해소되었다.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을 찾아보고, 온라인 중고 책을 구입하여 확인한 결과 구황룡은 바로 황용동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자전적 에세이』의 산문 「부운 3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구룡포에서 전학 온 친구가 말한 그 바다, 상상 속의 그 바다, 최초의 바다를 찾아가는 여정의 글이다. 여행은 구황룡 고개 넘어 양포를 거쳐 구룡포 가는 과정에 구황룡이 등장한다. 정민 교수가 엮은 에세이집 『달과 고무신』의 「구황룡의 아지랑이와 꽃 고사리」를 읽어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작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구황룡九黃龍은 경주에서 50리 남짓, 동해로 나가는 길가에 있는 깊은 산골 구황룡 재를 넘으면 동해다. 이른 여름이면 운무가 갤 날이 없고 운무 속에 산딸기가 제물에 익어 이슬을 머금은 채 지고 마는 높은 준령이요, 그 준령 아래 골짜기다. 나는 젊었을 무렵 직장 관계로 그 골짜기에 출장을 나가곤 했다. 산골로, 산골로 기어드는 외갈래 소로길을 따라 들어가면 닥나무를 벗겨 백지를 뜨는 것으로 유일한 생업을 삼는 가난한 마을이 골짝마다 뜸뜸이 몇 집씩 흩어져 있었다. 이른 봄날 그 소로길에는 온통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벌건 진달래꽃 사태를 이룬 골짝과 길에 일렁거려 산이 흔들릴 듯했다. 그 아지랑이의 황홀감 한 오리 한 오리에 꿈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아지랑이는 한 오리마다 일렁거리며 피어오르는 동안에 햇빛을 받아 빛나기도 하고 때때로 빛을 거두기도 해서 어쩌면 금실 같기도 하고 혹은 은실 같기도 했다. - 수필 「구황룡의 아지랑이와 꽃고사리」 중 일부 박목월이 근무했던 동부금융조합의 관할구역 중 하나가 이곳 황룡동이다. 위 산문의 내용처럼 업무차 출장 갔을 때의 황룡동의 모습을 시 한 편으로 다시 노래하고 있다. 다음은 시집 『산도화』에 수록된 「구황룡」 이다 날가지에 오붓한 진달래꽃을 구황룡 산길에 금실 아지랭이 - 풀섶 아래 꿈꾸는 옹달샘 - 화류장롱 안쪽에 호장저고리 - 새색시 속눈썹에 어리는 이슬 날가지에 오붓한 꿈이 피면 구황룡 산길에 은실 아지랑이 -박목월의 시 박목월의 시「구황룡 전문」 목월의 시 전집 속에는 「구황룡」 이라는 시가 두 편이나 있다. 같은 제목에 내용은 다르지만 황룡이라는 장소성은 같다. 두 편의 시와 산문을 남긴 목월에게 황룡은 평범하지 않은 곳으로 여겨진다. 대가들을 사로잡은 황룡골 봄날 황룡 꼴짝으로 가보면 그곳에 매월당과 동리와 목월이 있을지도 모른다. 냇가 저 혼자 웃고 있는 매화나무는 세상을 비웃던 김시습을 닮았고, 우는 새에게 물이나 먹고 울어라 말한 동리는 이곳까지 오느라 목이 말랐을 것이다. 목월이 황룡 산길에서 보았던 금실, 은실 아지랭이 그 너머에는 그리운 사람이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명의 유래를 보아 황룡이라는 마을은 가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지만 봄날의 황룡골은 평범하지 않다. 누구나 갈 수 있는 황룡골이지만, 누구나 시를 짓지는 않는다. 대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황룡골은 우리들이 모르는 특별함이 깃들어져 있는 듯하다. 가장 늦게 오는 봄이 가장 먼저 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봄날 황룡골에 가자.
박목월(1916~1978) 1935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5월 동부금융조합에 입사했다. 1945년 모교인 계성중학교 교사로 이직할 때까지 20대 청춘시절 대부분을 고향인 경주에서 살았다. 잠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경주에서의 세월은 그가 다녔던 직장의 근무 기간과 거의 같다. 농협의 전신 금융조합은 1956년 농업은행 설립으로 해산되었다. 목월이 근무할 당시 경주에는 경주금융조합(읍내,현곡,내남), 감포금융조합(감포,양남,양북), 건천금융조합(건천,서면,산내) 동부금융조합(천북,외동,내동) 등 4개의 금융조합이 있었다. 목월이 근무했던 동부금융조합은 당시 행정중심지였던 현재 상공회의소 자리에 있었다. 목월의 동부금융조합 시절은 많은 것을 이루어낸 시기였다. 1937년 9월 처음으로 투고한 작품이 선정되어 받은 원고료 5원은 쌀 한가마보다 많은 액수였다. 1938년에는 결혼을 했고, 맏이가 태어나던 그해 1939년에는《문장》지에 추천 완료되어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등단 시절 목월의 주소지는 ‘경북 경주군 서면 건천리’였다. 건천에서 경주까지 아침, 저녁 자전거를 타고 통근을 하다가 나중에는 시내에 방을 얻어 생활했다. 전표 뒷면에 시를 쓰다 목월은 업무를 마치면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 기슭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지만 벗할 것이라고는 고도의 산천과 하늘밖에 없었다. 왕릉 위에서 달을 보고, 깨어진 기왓조각을 툭툭 차며 길을 걷는 것, 밤이면 램프 아래에서 책을 읽는 것, 아무 주막에 가서 술을 마시는 것, 그 외는 주판알을 튕기는 금융기관 직원이었다. 스무 살 꽃 같은 나이의 풀 수 없는 고독이 안으로 응결되어 시로 터져 나왔다. 목월의 초기작품들은 고도라는 적막한 공간과 스무 살 청년의 쓸쓸한 가슴이 만나 태어났다. 목월은 시를 쓰는 것, 시인이 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었다. 그는 업무시간 자투리 시간에도 시를 썼다. 냇사 애달픈 꿈을 꾸는 사람, 냇사 어리석은 꿈꾸는 사람, 밤마다 홀로 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 기인 한밤을 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 어느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 이 시는 목월이 동부금융조합 근무 당시 전표 뒷장에 쓴「님」이라는 작품이다. 1942년 어느 가을 이 작품을 쓰고 경주군청에 근무하는 이기현 시인을 만나 시를 읽어주며 공감하고 소통했지만, 어디에다 발표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시인이 되고자 했으나 그의 작품들은 땅속에 묻어두며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문학적 소통이 부족했던 그가 자주 들린 곳이 동리의 중형이 하던 가게였다. 입사 후 맨 먼저 찾아가 만난 사람이 김동리였다. 동리는 경신학교를 중퇴하고 경주에 잠시 내려와 있던 무렵이었다. 세 살 많은 그는 이미 신춘문예에「화랑의 후예」가 당선된 신진 작가였다. 동리는 목월에게 소주 몇 잔 권한 뒤 미추왕릉 잔디밭에 앉아 많은 문학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한국문학을 대표할 두 거장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후 동리는 맏형 김범부가 있는 사천 다솔사로 떠나버려 교류가 계속되진 않았지만, 두 청년은 시와 소설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어 한국 문단을 이끌었다. 동부금융조합 관할구역의 시편들 목월의 시에는 근무지 관할지역에서 태어난 작품들이 더러 있다.「산이 날 에워싸고」는 외동면 녹동리를 다녀오다 산기슭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잠시 쉬는 시간에 얻은 시이다. 경주에서 외동 녹동리까지는 대략 7~80리 먼 길이다. 울퉁불퉁 자갈이 깔린 먼지 날리는 신작로에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던 목월을 떠올려 본다. 길이 멀어서일까? 황룡동 구장(區長) 집에서 하룻밤 유하며 쓴「구황룡」이라는 제목의 시는 ‘주먹만한 다래가 익는다’로 시작해 ‘다래가 거멓게 익어 제물에 이운다’로 끝맺는다. 골이 깊고 인적이 드물다는 표현인 듯하다. 토함산자락 황룡동 또한 내동면 지역이다. 짧은 시「달」은 외동면과 내동면이 같이 등장한다. 1955년 행정구역이 변경되기 전까지 불국사 지역과 덕동, 암곡, 황룡을 포함한 보문단지 일대가 모두 내동면이었다. 보문단지 목월공원에 시비「달」이 서 있는 것도 우연만은 아닌,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에 시비가 있는 셈이다. 이외에도 불국사와 석굴암 대불 등을 노래한 시들도 여러 편 있다.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慶州郡 內東面) 혹(或)은 외동면(外東面)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달」전문 가슴이 설레던 기계와 청하 목월은 1938년 5월 충남 공주에서 결혼하기 전까지 연애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해진다. 어느 날 기차 안에서 처음 보았던 아름다운 그녀, 어디 사는지 묻고 싶었던 그녀, 우연히 불국사에서 다시 만난 그녀, 그곳에 그녀를 데리고 온 사람은 금융조합에 같이 근무한 적 있던 기계금융조합에 근무하는 그녀의 형부였다. 형부 집에 머물던 공주 처녀 유익순을 만나러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달려갔던 곳 그곳에서「기계장날」이란 시가 태어났으며 시비도 세워져 있다. 일부 뜻있는 문인들「기계장날」이라는 구수한 사투리로 엮은 시극을 최근까지 공연하기도 했다. 목월의 향기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뜻깊은 일이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맞선보러 갔던 청하, 아름다운 그곳의 처녀 천희는 칠빛 머리카락에 설레는 밤바다 피리 소리로, 인연의 수심(水深)속에 흔들리는 해초 잎사귀로, 아름다운 인어의 모습으로 시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살아있는 듯하다. 청하라는 이름만큼이나 청하의 여인도 이쁠 것만 같다. 시를 쓴 시인도, 선을 봤던 청하의 여인은 존재하지 않아도「청하」라는 아름다운 시는 여전히 푸르게 살고 있다. 조지훈 경주에 오다 경주에서 만난 문인들은 김동리, 이기현, 소설가 이순보 등 경주 출신 이외에 윤석중 아동문학가와 조지훈 시인이 있다. 윤석중은 동시로 맺어진 인연으로 목월의 집에서 하루 저녁을 묵고 갔다. 조지훈은《문장》지가 맺어준 인연이었다. 나이는 목월이 많았고 등단은 지훈이 먼저였다. 1942년 지훈과 목월의 역사적 첫 만남의 현장 건천역도 폐역으로 사라져 안타까울 따름이다.「완화삼」과「나그네」의 탄생은 우연 아닌 필연으로 이어진 경주에서의 보름간이었다. 월성여관에 여장을 푼 첫날 새벽까지 문학 이야기로 밤을 꼬박 새웠다. 이 시기 서로 소통한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본다. 1942년 목월은 “나는 지방의 조그만 금융기관에 은신하여 낮에는 공출미의 대금 지불을 위하여 주판알을 튕기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에 대한 정열과 집념은 끈질기게 나의 내면에 타오르고 있었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조지훈은 그때의 정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불국사 나무 그늘에서 나눈 찬술에 취하여 떨리는 봄, 옷을 외투로 덮어 주던 목월의 체온도 새로이 생각난다. 그리하여 나는 보름 동안을 경주에서 머물렀고, 옥산서원의 독락당에 눕기도 하였으며「완화삼」이란 졸시를 목월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목월의 시「나그네」는「완화삼」에 화답하여 보내준 시이다. 붓을 꺾고 떠돌며 살던 5년간을 우리는 이렇게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하소연하며 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명작이 명작을 낳았던 경주에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시작에 불과했다. 낭만시의 최고의 걸작「나그네」와「완화삼」도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합작품 같은 생각마저 든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의 법칙이랄까? 경주에서 태어난 최고의 작품들 경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목월은 삶에 있어 획기적인 일들이 많았다. 문단 데뷔, 동리와 조지훈과의 만남, 좋아하던 여인과의 결혼, 장남의 태어남까지..... 조국 해방과 더불어 목월은 모교의 초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대구에서《죽순》의 이윤수 등과 교류하다 3년 뒤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1946년 6월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각자 15편씩을 모아 엮는『청록집』을 발간했다. 모두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써두었다가 마루 밑에 묻어 놓았던 작품들이었다. 우리나라 최고 시집이라 할 수 있는『청록집』에 실린 「나그네」,「윤사월」,「청노루」,「산도화」,「춘일」,「귀밑 사마귀」,「가을 어스름」,「산이 날 에워싸고」등은 목월의 시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썼지만, 오늘날까지 널리 애송되는 최고의 시들은 모두 경주에서 쓴 초기 작품들이다. 눈에 보이는 곳, 발걸음 닿는 곳곳이 바로 시가 태어난 장소이기 더욱이 경주를 사랑할 일이다. 목월 스스로 이십 대를 보낸 경주를 천애의 유형지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는 문학적 소통과 공감할 사람이 부족했다는 뜻일 것이다. 외롭고 고독했던 시간들이야말로 시가 태어난 원동력이었음을 시와 에세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월은 누구보다 고향 경주를 사랑한 시인이었다.
경주를 찾은 조선 시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경주 옥적에 대한 문장과 시를 남겼다. 첨성대, 반월성, 봉황대, 금오산 등 경주의 많은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옥적을 빼놓지 않고 노래하였다. 그들은 왜 문장 속으로 옥적을 불러들였을까? ‘동경잡기’에 수록된 시들을 한 문장씩 언급해 본다. 풍월을 읊던 신선들 어디 갔는지 관문에는 옥적 소리만 슬프네 /오봉 이호민 주렴 걷으니 산빛은 그림 같고 옥적 소리에 해는 중천이네 /가정 이곡 반월성 가운데 첨성대가 우뚝한데 옥적 소리는 만고의 바람을 잠재운 듯 /포은 정선생 하나의 옥적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관현 소리도 아니고 금속 소리도 아니네 /박원형 정교히 뚫린 여섯 구멍에 별이 쏟아지듯 현악과 화음하고 금석과 잘 어울려 청아한 그 소리에 연주장이 고요하네 /이석형 생각하노니 의풍루 위 밝은 달밤에 옥적의 여운 곡조 참으로 맑았지 /김구용 천년 고관들 사적은 적막한데 한가로운 옥적 소리 아직도 호화롭구나 /정효상 누런 잎이 서풍에 드날릴 때 옥적 소리 멈추고 왕기王氣도 끊어졌다 /최숙정 금오산 달 밝으니 천기가 새로운데 옥적 한 곡조에 대들보 티끌이 움직인다 /어세겸 외로운 산에 해지니 금선(金仙)의 그림자이고 옛 성루에 가을이 깊어 옥적 소리일세 /서거정 황금 수레를 타고 스스로 항복한 임금은 누구이며 옥적을 그대로 전하며 또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서거정 이외에도 청우 안필(1838~1912), 갈산 권종락(1745~1819) 등이 있고, 찾아보면 더 많을 것이다. 특히 박원형과 이석형은 옥적을 소재로 장문의 아름다운 시를 남겼는데 기회가 되면 다 같이 읽어볼 수 있도록 옮겨 적고 싶다. 당주 박종(1735~1793)은 경주를 유람하고 지은 기행문인 ‘동경유록’에서 비교적 옥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 그런가 하면 경주 남산에 7년 가까이 기거한 매월당 김시습 역시 옥적을 두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시 「월야문옥적(月夜聞玉笛)」 에서 폐도 서라벌의 쓸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 누가 옥피리를 부는가 가을 바람 타고 온갖 감회가 이네 誰橫玉笛暗飛聲 散入秋風百感生 그 가락은 높아 구름 속에 아득하고 그 음절은 느릿느릿 달빛 타고 흐르네 詞腦調高雲渺渺 羅候歌緩月盈盈 서리 내린 포석정에 신라의 꿈은 다하고 잎 지는 계림에 별은 빛나네 霜粘鮑石衣冠盡 木落鷄林星斗明 이것이 애를 끊는 단장곡인가 아니면 고향을 그리는 그 곡조인가. 不是欲吹腸斷曲 故城淸夜更關情 위에서 언급한 여러 편의 시에서 볼 수 있듯, 옥적을 통해 옛 신라 고도의 애잔함을 공통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옥적을 매개로 해서 그리움과 슬픔을 노래하고자 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도 그러할 것이 옥적 만큼이나 슬픔을 표현할 악기가 몇이나 될까? 다산 정약용 「계림옥적변 鷄林玉笛辨」다산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 제1집 제12권 시문집 편에는 「계림옥적변鷄林玉笛辨」 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경주(慶州)에 옥적(玉笛, 옥피리) 한 자루가 있는데, 신라(新羅)의 유물(遺物)이다. 다른 사람이 불면 소리가 나지 않고, 오직 경주의 악공만이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악공이 소리를 잘 내게 되면 다른 악공들은 소리를 내지 못하였고, 그 악공이 죽은 뒤에야 그의 대를 이어 소리를 낼 수 있는 자가 나왔다고 한다. 나라에서 일찍이 시험 삼아 옥적의 소리를 잘 낼 수 있는 자를 부른 적이 있는데, 올라오는 길에서 연주할 때는 그 소리가 크고도 깨끗하였다. 그러나 조령(鳥嶺)의 북쪽에 이르자 갑자기 옥적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서울에 이른 뒤에 많은 상금(賞金)을 걸어 놓고 소리를 내게 하였으나, 끝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에 옥적을 가지고 돌아가도록 했는데, 조령 남쪽에 도착하여 불어 보니 예전처럼 다시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신령스럽고 기이하여 따져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하 생략) 지면상 내용을 모두 인용할 수 없지만, 다산은 죽령 이북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옥적을 돌려주지도 않고 왕실에 붙잡혀 있을 것을 염려한 악공이 꾸며낸 말이라고 했다. 풀이 바람에 따라 쏠리듯 사람들이 들은 말을 믿기만 하고 이치를 탐구하지 않는다고 교훈적 말을 덧붙인 것은 다산이 세상에 이르는 훈계이었다. 박목월의 시와 편지 옥적은 목월에게도 피해 갈 수 없었던 시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옥피리」 라는 제목의 짧은 시가 있다. 물살 흐르는 졸음 곁에 하얀히 삭아서 스며오른 목숨발 내 색시는 하얀 넋 천만년 달밤 이슬 하늘 찬 달빛에 높이 운다 그리고 목월이 조지훈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도 옥적이 등장한다. 언제 경주로 한번 오라고 초대하는 편지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주 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 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당시 그가 근무하던 동부금융조합 바로 근처에 경주박물관(현 문화원)이 있었다. 그곳에 옥적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자주 보러 갔던 것 같다. 편지 속 산수유는 현재 연명치료 중인 노인같지만 지난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워올렸다. 아슬아슬한듯하지만 올봄에도 꽃을 피울 것이다. 산수유꽃 피는 봄날 문화원 뜰에서 옥적 소리를 들으면 제격일 것이다. 초정 김상옥의 시조 「옥저(玉笛)」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와 민족 정서, 혼을 노래한 시조 시인 초정 김상옥 또한 신라 옥적을 노래했다. 특히, 시인은 경주를 가장 많이 노래한 대표적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첫 작품집인 『초적(草笛)』에 수록된 「옥저(玉笛)」는 그의 대표 시 가운데 한 편이다. 뚫린 구멍마다 임의 손이 움직일 때, 그 소리 은하 흐르듯 서라벌에 퍼지다. 끝없이 맑은 소리 천년을 머금은 채, 따스히 서린 입김 상기도 남았거니,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 하리요 이 시는 1948년 김세형이 작곡한 가곡 「옥저」가 많이 불러 지고 있다. 국악가 김영동에 의해 만들어진 국악곡 「옥저」도 있다. 오늘날엔 옥적 소리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지만, 문학 작품으로, 음악으로 재탄생 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경주는 피리의 도시다. 나라의 근심과 걱정을 잠재워주는 만파식적, 가던 달을 멈추게 했던 월명사(月明師)의 피리, 그리고 경주를 떠나서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경주의 자존심 옥적이야말로 경주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전인식 시인(시민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