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대한민국 여행 1번지’다. 많은 이들은 ‘경주’라는 두 글자에서 수학여행을 떠올린다. 그 수학여행에서 빠지지 않았던 곳이 불국사다. 매표소에서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불국사로 오르는 길, 학창시절 기억이 가물가물 되살아난다. 대웅전(보물 제1744호)으로 가는 길목의 돌계단 앞에 이르자 기억은 선명해진다. 그때는 챙겨 보지 못한 가람 배치. 동쪽 자하문 앞 계단이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6호),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 앞 계단이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다. 단체 사진을 찍던 청운교와 백운교는 지금도 불국사 인증 사진 명소다. 불교 경전 근거해 치밀하게 세운 사찰 불국사는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대표적 건축물로 꼽힌다. 건축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신라의 귀족이었던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발원한 사찰이라는 삼국유사의 내용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사찰의 공사는 751년(경덕왕 10)에 시작됐고, 김대성이 완공 전에 생을 달리함에 따라 이후 국가에 의해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발원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국가의 주도에 의해 완성된, 개인의 소원이자 국가의 원찰로서 기능하는 대규모 사찰인 셈이다. 절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는 김대성이 불국사를 짓기 시작한 751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다리 아래 속세와 위쪽 부처 세계를 이어준다는 의미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전체 34계단, 연화교와 칠보교는 18계단이다. 규모는 다르지만 계단 형태로 만든 다리라는 점과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인 점 등은 비슷하다. 전자는 웅장함이, 후자는 섬세함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건너 자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전각이다. 앞쪽으로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다. 대웅전 왼쪽으로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 뒤로는 중앙의 사원을 지나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비로전, 관음보살을 모시는 관음전, 지장보살을 모시는 지장전이 있다. 언뜻 복잡해 보이는 이 구조는 모두 불교 경전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청운교~백운교~자하문~대웅전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의 사바세계로 가는 길과 같고, 연화교~칠보교~안양문~극락전으로 이어지는 구조 또한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로 가는 길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양쪽 돌계단 다리 모두 보존을 위해 출입이 금지된 상태라 옆길을 통해 대웅전으로 가야 한다. 대웅전 뜰 꽉 채운 두 석탑의 위용 대웅전 뜰에 들어서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석가탑(국보 제21호)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역사에 관심 없는 이라도 두 탑을 보는 순간, 탄성을 내지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탑 모두 국보다. 석가탑의 문화재 명칭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이지만, 우리에겐 원래 이름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을 줄여서 부르는 석가탑이 익숙하다. 불국사의 모든 배치가 치밀하지만,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석가탑과 다보탑의 관계다. 쌍탑의 경우 탑의 형태를 같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불국사의 쌍탑은 이례적으로 그 형태가 다르다. 높이는 다보탑 10.29m, 석가탑 10.75m로 비슷하지만 생김새는 확연히 다르다. 동쪽의 다보탑은 특수한 탑 형태를, 서쪽의 석가탑은 일반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오래전 수학여행 때 두 탑 앞에서 어느 게 다보탑이고 석가탑인지 헷갈린다는 학생이 종종 있었다. 선생님은 10원짜리 동전을 꺼내 보이며 “10원짜리 동전에 나오는 탑이 다보탑”라고 하셨다. 요즘 아이들은 10원짜리 동전을 볼 일이 별로 없지만, 1970~1990년대 학생들에게 다보탑은 10원짜리 동전에 나오는 친숙한 탑이다. 이들 두 탑은 불교 경전 중 하나인 묘법연화경 속 견보탑품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경전에 따르면, 다보여래는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찬양하기 위해 보배롭고 아름다운 형상의 탑으로 솟아나 석가모니와 나란히 앉았다고 전해진다. 교리를 설법하는 석가모니는 석가탑의 형태로, 다보여래는 이를 듣는 청중으로서 다보탑의 형태로 지상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반면, 석가탑의 경우 다보탑에 비해 조형적 요소가 없는 수수한 형태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상반된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두 탑에서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는 두 탑의 치밀한 설계에서 기인하는데, 두 탑을 받치는 지대석과 기단부의 넓이와 높이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멀리서 바라볼 때 서로 다른 두 탑은 완전한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일제강점기 강탈과 도굴의 아픔 겪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1915년 석굴암 공사를 마무리 지은 뒤 심하게 훼손돼 있던 불국사 수리에 집중했다. 보수 공사는 1918년 10월에 시작돼 1925년 9월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뤄졌다. 그 결과 오랜 기간 방치돼 있던 지난날의 불국사는 깔끔하고 단정 모습의 장대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불국사 공사는 미완의 공사였다. 그들은 청운교와 백운교, 석가탑과 다보탑, 대석단 등 석조구조물을 복원하는 데 그쳤고, 대웅전 영역과 비전 영역 등 경내를 구획 짓는 회랑, 관음전, 무설전 등 목조물 복원은 손을 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강탈과 도굴의 아픔도 겪었다. 다보탑 해체·보수 과정에서 사리와 사리장치를 비롯한 유물이 모두 사라졌다. 기단 돌계단 위에 있던 돌사자도 넷 중 하나만 남았다. 수리복원이 끝난 이후 불국사 방문객은 날로 증가했다. 국내는 물론 일본 황족과 고관대작의 행렬도 줄을 이었다. 일본관광객은 시모노세끼에서 배를 타고 부산, 대구를 거쳐 경주에 왔다. 여기에 1921년 불국사~울산 간 협궤선 개통, 1936년 광궤선 개통으로 일본과 부산·경남 지역 관광객이 더욱 편리하게 경주를 찾을 수 있었다. 관광객들은 시내 관광 후 열차를 타고 불국사역에 내린 뒤 불국사를 관람하고 그 인근에 들어선 숙박시설에서 묵었다. 그리곤 꼭두새벽 석굴암에 올라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을 감상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엔 수학여행단 위주의 국내 관광객 발길이 이어졌다. 1970년대부터 경주는 신혼여행지로 부상했고 불국사와 석굴암은 핵심 방문지가 됐다. 1964년 석굴암 중수가 끝난 2년 뒤 석가탑 도굴이 발생하면서 불국사가 안팎의 관심을 모았고, 정부는 1969년 불국사복원위원회를 구성해 중건에 나섰다. 공사는 1973년에서야 마무리되는데, 그때는 총독부 공사의 남겨진 과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전체 회랑을 복원하고, 관음전이나 무설전, 비로전 등 당우 재건이 핵심이었다. 대석단 전면으로 넓은 마당을 확보하고 주변 조경에도 신경을 썼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불국사의 모습은 그때 결정된 것이다. 불국사는 문화재관리국의 복원공사로 장엄한 불국정토의 위용을 자랑하게 됐다. 1997년 불국사는 석굴암과 함께 문화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도 얻었다. 그러나 그 영광 이면엔 외세의 침탈과 독립이라는 우리 역사의 수난과 파란이 숨어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1907년을 즈음해, 경주의 한 우체부는 토함산을 넘어 우편배달을 가다가 우연히 폐허 상태의 유적을 발견한다.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던 이 유적은 바로 국보이자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석굴암’이다. 나비 표본을 찾아 캄보디아의 정글로 들어갔다가 ‘앙코르 와트’를 발견하게 됐다는 프랑스인 앙리 무오를 연상시킬 만큼 극적인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석굴암 발견’ 이야기는 허구 사실 이 이야기는 허구에 가까운 듯하다. 물론 석굴암은 조선시대에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3세기 ‘삼국유사’에 언급된 후 17세기에 몇몇 기행문과 시가 나오기까지 약 400년간 석굴암과 관련된 기록은 전무했다. 하지만 석굴암은 조성된 이래 항상 토함산에 있었고, 폐굴이 되었던 것도, 밀림에 묻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시대 적지 않은 선비들이 석굴암을 다녀갔다. 불국사 인근에선 중요한 날에 토함산에 올라 예불을 올리고 공양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다만 ‘문화재’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아래 글은 조선시대 문인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기록이다. “석굴암에 이르렀다. 암자의 명해(明海)스님이 맞이하여 들어가서 잠시 앉아 있다가 석굴로 올라갔다. 모두 인공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석문(石門) 밖 양쪽에는 커다란 돌에 새긴 불상이 각각 네다섯 개 있는데, 기교하기가 짝이 없다. 석문은 잘 연마된 무지개 형태이다. 그 속에 있는 커다란 석불은 엄연하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대좌에 앉아 있는 모습은 균형이 잡히고 기교하다. 굴속 위쪽의 덮개돌과 여러 천장돌은 기울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배열된 불상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하고 기괴하여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정시한은 1688년 5월 15일 석굴암을 방문한 뒤 기행문 ‘산중일기’(山中日記)에 이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가 목격한 석굴암의 모습은 전실(前室)과 성소(聖所), 그것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뤄져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기와지붕으로 덮여있는 지금의 전실이 당시에는 상부에 아무것도 없는 노출된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처럼 정시한의 이 기록은 당시 석굴암의 모습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일제 식민지배 정당화 도구로 활용 석굴암의 조성 당시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 이곳에선 옛 이름이 석불사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통일신라시대 ‘石佛(석불)’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다. 하지만 조성 배경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명문도 발견되지 않았다. 석불사의 조성 배경은 ‘삼국유사’에서 처음 확인된다. 김대성(金大城)이 751년에 전생(前生)과 현생(現生)의 부모를 위해 각각 석불사와 불국사(佛國寺)를 조성하다가 774년에 그가 죽자 국가에서 완성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석불사 불교 존상들의 조형적인 특징이 8세기 중엽을 가리키고 있어서 ‘삼국유사’의 기록과 거의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불국사와 석불사가 모두 김대성 집안의 원찰과 관련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며, 그 규모로 볼 때 그가 이 국가적인 차원의 불사(佛事)를 주도하는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학계의 대표적 견해다. 석굴암의 미학적 아름다움엔 이견이 없지만, 석굴암이 20세기 초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관광명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일제의 영향이 컸다. 일제는 1913년부터 3년간 석굴암을 완전 해체·복원하고(1차 공사),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가 그랬듯, 석굴암도 제국주의의 ‘발견’에 의해 식민지를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1930년대에 들면 우리 스스로도 “영국이 인도를 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우리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은 석굴암 불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석굴암 ‘붐’이 일어난다. 석굴암을 불우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대조되는 ‘과거의 영화’로 내세우고, 일본의 기술로 발견·수리·복원했다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홍보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부연하자면 석굴암 등 신라의 미술 문화를 한반도 문화의 최정점으로 두고 이후 점점 퇴락해 조선시대에 이르렀다는 인식, 문명화된 일본이 석굴암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보수함으로써 석굴암의 옛 영화를 찾아줬다는 인식을 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일제는 서구에 맞서 자신들을 ‘동양’의 중심으로, 고대 인도와 중국에서 전해진 불교·유교·예술을 모두 소유하고 보존한 ‘아시아 문명의 보고’로 자리매김하도록 애썼다. 일본에서 꽃피운 문화의 중간과정인 ‘석굴암’의 훌륭함을 증명할수록 일본 문화 또한 훌륭해지는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그리스~간다라~통일신라’의 불상 전파 경로는 이런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에서 나온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일제는 ‘석굴암’의 본래 명칭이 ‘석불사’임을 알고도 ‘석굴’을 강조하면서 ‘대일본제국의 자랑’이라 홍보했다. 하지만 석굴암은 ‘인조 석굴’로, 암벽을 파고들어간 인도 석굴 양식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인도의 ‘석굴사원’과의 친연성을 강조한 것은, 일본이 불교미술의 정수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수차례 보수공사로 훼손 이 과정에서 수난도 적지 않았다. 현재 석굴암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총 3차례, 1960년대에 한 차례 보수·복원공사를 거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을 수리하면서 본존불이 있는 주실의 천장 외부를 시멘트 콘크리트로 덮어 씌웠다. 석굴암을 콘크리트 돔 구조물로 바꿔버린 것이다. 1961~1964년엔 우리 정부가 석굴암을 보수했다. 이 보수공사에서 일제가 씌워놓은 콘크리트 외부에 또 한 겹의 콘크리트층을 만들어 씌웠다. 석굴암을 현대식 콘크리트로 완전히 밀봉해 버린 것이다. 이 같은 수차례의 황당한 보수공사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콘크리트로 인해 내부와 외부의 온도차가 커져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더 많이 차고 이슬이 맺히는 결로(結露) 현상이 발생했다. 급기야는 1966년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태로 석굴암을 개방해 왔고 급기야 석굴암의 보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1976년 12월 유리문을 설치한 것이다. 지금도 석굴암은 유리문으로 막혀 있다. 그래서 석굴암에 가면 늘 아쉽다. 관람객들은 유리문 앞에서 전실과 주실 쪽을 기웃거리다 이내 밖으로 빠져나간다. 여기저기 엉뚱한 것들이 유리에 반사돼 석굴암의 진면목을 감상하기란 쉽지 않다. 전실의 팔부중상에 조명까지 뒤섞여 관람을 심하게 방해한다. 내부 공간의 구조도 경험할 수 없다. 게다가 유리문의 알루미늄 새시 틀이 석굴암의 품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참 아쉬운 풍경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1천여년 전 울산 개운포(울산시 남구 황성동)는 고대 신라 수도 서라벌의 관문이었다.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헌강왕이 처용을 만난 곳도 개운포였다. 개운포에서 시작한 길은 울산 반구동 유적지를 지나 울산과 경주의 경계에 있는 관문성으로 향한 뒤 서라벌로 이어졌다. 지금의 7번 국도와 거의 일치한다. 처용과 헌강왕이 함께 걸었고 각종 이역(異域) 문물이 지나갔을 이 길엔, 경주 도심에 있는 유적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1천여년 전 신라 유적이 즐비하다. 국가 안녕 기원한 호국사찰…원원사지 지난 회차에서 소개한 관문성에서 7번 국도를 따라 경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모화역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모화불고기단지’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동쪽 산속으로 들어가면 원원사(遠願寺)에 닿는다. 원원사는 밀교(密敎)의 대표적 승려 명량법사가 세운 금광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의 중심도량이었다고 한다. 문두루비법은 명랑법사가 당나라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행한 것으로 알려진 주술적인 밀교 의식이었다. ‘관정경’(밀교 경전)에 나오는 주술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위기에 빠졌을 때 둥근 나무에 오방신(五方神)의 이름을 써놓은 문두루를 설치한 뒤 주문을 외우면 모든 악이 물러난다는 것이다. 삼국 통일은 이뤘지만 한반도 지배를 노리던 당나라가 큰 골칫거리였던 문무왕 재위 시절(661~681). 명랑법사는 화급한 상황에서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당나라군을 670년과 671년 두 차례 격퇴시키며 전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문무왕 19년(679)에 이 절을 고쳐 지어 사천왕사라고 했다는 게 ‘삼국유사’가 전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원원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이에 대해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명랑의 제자와 김유신 등이 뜻을 모아 세웠고, 왜구의 침입로인 관문성 근처에 위치하며, 사천왕사·금강사와 함께 문두루비법의 중심 사찰이었다는 점으로 미뤄 ‘호국 불교’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먼(遠) 소원(願)을 빈다’는 ‘원원’이란 사찰명도, 나라의 안녕을 바란 김유신 등의 마음이 담긴 이름이 아니었을까. 이곳엔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높이 7m 규모 쌍탑 2기가 남아 있다. 보물 제1429호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일본 건축학자 노세 우시조(能勢丑三)가 쓰러지고 묻혀 있던 석탑 부재를 모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탑은 빼어난 수준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을 자랑한다. 사천왕상은 사방을 지키고, 십이지신상은 열두 방위를 수호하는 형세다. 탑에 십이지신상을 새기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지금의 원원사는 1970년대에 영호스님이 새로 지은 천태종 사찰이다. 시찰 건물 위쪽 쌍탑이 서있는 곳 뒤편이 옛 대웅전이 있던 자리다. 서역인 닮은 무인상의 미스테리…괘릉 원원사에서 도로를 따라 경주방향으로 10㎞ 정도 가면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인 괘릉(掛陵)이 나온다. 무덤 입구에 서역인(西域人) 모습을 하고 있는 무인상으로 널리 알려진 왕릉이다. 이 무덤 자리는 본래 곡사(鵠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 절은 원성왕의 어머니 소문왕후의 외삼촌인 파진찬 김원량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건물로 지었다. 그 뒤 불상을 봉안하고 경전을 담은 윤장대를 세워 절로 바꿨는데, 절 주변에 있는 바위가 고니 모양처럼 생겨서 곡사라고 불렀다. 세월이 흘러 798년(원성왕 14) 왕은 자신의 장례 절차와 관련한 조서를 통해 번거롭게 흙을 쌓아 무덤을 만들지 말고 지세를 따라 무덤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원성왕이 세상을 떠난 뒤, 담당 관서는 곡사를 지금의 숭복사 자리로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조성한다. 그러나 봉분이 놓일 자리가 절의 연못 터였던 탓에 땅을 메우는 과정에서 계속 물이 솟아나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사람들은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어 허공에 안치했다. ‘능을 걸다’라는 의미의 괘릉(掛陵)이란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 괘릉 조성 때 통째로 옮겨진 사찰 터…숭복사지 괘릉에서 2㎞ 정도 떨어진 외동읍 말방리엔 숭복사지가 있다. 798년 괘릉을 조성하면서 통째로 옮겨진 사찰인 곡사가 있던 자리다. 곡사란 이름이 숭복사로 바뀐 것은 헌강왕 때인 885년의 일이다. 곡사가 이곳으로 옮겨지고 60여년이 지난 경문왕 즉위 2년인 862년. 경문왕은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곡사를 주목하고 중창불사를 계획한다. 하지만 곡사의 중창은 쉽게 시작되지 못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865년 어느 날 경문왕은 꿈에서 원성왕을 만나 중창 불사에 대한 허락을 받게 되고, 허비한 3년의 시간을 아쉬워하며 중창 불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경문왕의 곡사 중창은 그동안 왕위 계승을 두고 대립하고 갈등했던 여러 정치 세력들을 ‘원성왕의 후손’이라는 점을 들어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아들인 헌강왕 때에도 곡사에선 또 다른 불사가 추진됐다. 헌강왕은 재위 11년(885)에 곡사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면서 국가가 관할하는 정법사에 예속시키고, 보살과 관리를 파견해 재정을 돌봤다. 곡사를 중창했던 선왕의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면서, 대숭복사와 왕실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려고 하려는 의도였다. 이듬해인 886년엔 최치원에게 명해 숭복사비의 비문을 짓도록 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인 ‘대숭복사비명’이다. 경문왕의 곡사 중창과 헌강왕의 대숭복사 개창 내용을 담았다. 비는 진성여왕 때에 완성됐다. 지금의 절터 한편엔 2014년 진품 비편을 본떠 만든 숭복사비가 서있다. 비편과 비를 짊어지고 있던 쌍귀부(雙龜趺)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감산사지, 구정동 방형분도 눈길 괘릉리를 관통해 산을 향해가는 길 끝엔 감산사지가 있다. 성덕왕 18년인 719년 중아찬 김지성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여러 친족 및 일체 중생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하는 절터다. 10여년 전만 해도 빈 터에 작은 불당과 3층 석탑만 있었다던 이곳엔 제법 큰 규모의 절집이 들어서 있다. 감산사지는 1915년 한 일본인에 의해 알려졌다. 당시 감산사지에서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석조아미타불상(국보 제82호)이 발견되었는데, 두 불상의 광배 뒷면에 절의 창건 시대와 배경이 명문으로 새겨져 있었다 한다. 이 불상은 발견 당시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무너진 채 절터를 지키고 있던 탑은 1965년에 다시 세워졌다고 하는데 상당히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불국사역 인근에 있는 ‘구정동 방형분’도 눈여겨볼만한 유적이다. 신라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네모꼴(방형) 형태를 지닌 통일신라시대 무덤이다. 방형 구조는 고구려 고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양식인데, 이런 이유로 이 무덤의 주인 또한 고구려 출신이거나 그 후손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1977년 이 무덤 주변에서 출토된 모서리기둥이 유명하다. 네모난 봉분 각 모서리에 세워져 있었던 돌기둥으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기둥 한쪽 면엔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이 깊고 코가 큰 이국적 모습의 인물상이 폴로 스틱을 들고 있다. 돌기둥 다른 한 면에는 사자상이 조각돼 있다. 괘릉의 무인상과 월지 입수쌍조문 사자공작무늬 돌 등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서역의 교류를 알려주는 증거로 꼽힌다. 김운 역사여행가
어느 날 대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遊)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이라는 관직까지 주었다. 처용 설화로 널리 알려진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조 기록이다. 헌강왕이 처용을 만난 곳은 ‘개운포’였다. 개운포는 울산신항에서 외항강을 따라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곳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울산 남구 황성동이다. 울산은 고대 신라 수도 서라벌의 관문이었다. 처용과 헌강왕이 함께 걸었고 각종 이역(異域) 문물이 지나갔을 이 길을 따른다. 처용을 만났다고 전해지는 개운포에서 반구동 유적지를 지나 7번 국도를 따라 경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울산과 경주의 경계지에 관문성이 나온다. 관문성 또한 반구동이 옛 신라의 무역항이었음을 말해주는 유적이다. 서라벌 향한 첫 관문 관문성은 경주에서 외동을 거쳐 울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성이다. 울산 북구와 울주군, 경주 외동읍 모화리의 경계에 있다. 수도 경주의 동남쪽 입구에 해당한다. 통일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8호로 지정됐다. 당시 관문성 일대는 모벌군, 또는 모화군(毛火郡)으로 불렸고, 이 시기 성의 이름은 ‘모벌군성’, ‘모벌관문’이었다. 관문성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붙여진 명칭이다. 관문성은 이 성이 경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는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예로부터 ‘만리성’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매우 긴 성이란 뜻이다. 이와 관련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등장한다. 삼국사기는 “성덕왕 21년 모벌군(毛伐郡)에 성을 쌓아 일본(日本)의 침입로를 막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엔 “효성왕 개원(開元, 당 현종 연호) 10년(722) 임술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에 관문(關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으로 경주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792보 5자이고, 동원된 역부는 3만9262명이며, 장원(掌員, 감독관)은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경주와 울산을 잇는 이 길은 낮은 평지로 이어진 구조곡(지각 활동으로 만들어진 직선 형태 골자기)을 따라 나있어 육로교통 상당히 수월하다. 게다가 직선거리가 30㎞ 정도로, 하루면 이동이 가능한 거리다. 이런 이유에서 관문성 일대는 울산으로 침입한 왜구가 반드시 통과하게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울산만으로 침입한 왜구들은 동대산만 넘거나 우회하면 경주평야를 쉽게 석권하고 경주까지 넘보게 된다. 따라서 관문성은 이 왜구를 경주 외각에서 저지하는 전초 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울산항이 당시 국제무역항 기능을 했었던 만큼, 배를 통해 울산으로 들어온 각종 물자가 수도 경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관문성을 거쳐야 했다. 경주와 울산을 잇는 길과 관문성이 만나는 어딘가에선 경주로 들어가는 인력과 물자에 대한 검열과 단속도 행해졌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전덕재 단국대 교수는 “관문성이 수도 경주로 들어가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한 만큼, 왕도로 들어가는 교통로 상에 관문을 설치하고 그 이름을 ‘모벌관문’으로 불렀던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옛 성벽 흔적 곳곳에 남아 관문성은 크게 ‘장성’과 ‘신대리성’으로 나뉜다. ‘장성’은 경주시 외동읍 서편부터 남쪽을 따라 외동읍 모화리 동쪽 산 아래까지 길게 뻗어있는 약 12㎞의 석성이고 ‘신대리성’은 장성 동쪽 끝자락 삼태봉 남쪽 해발 584m 봉우리를 에워싼 둘레 1.8㎞의 타원형 석성이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를 이루는 산자락을 따라 걷다 보면 군데군데 관문성의 옛 흔적이 남아 있다. 7번 국도를 지나다 보면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성벽을 만날 수 있다.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산 124-3, 경주방향 도로 인근에 있다. 도로가에 실물 크기 복제 다보탑이 세워져 있어 비교적 찾기가 쉽다. 경주로 향하는 길목인 이곳 어딘가에, 왕경으로 들어가는 인력과 물자에 대한 검열이 이뤄지던 관문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 외에도 외동읍 녹동리 인근 14번 국도변에서도 비교적 뚜렷한 형태의 성벽을 볼 수 있다. 관문성 동쪽 끝에 있는 신대리성도 옛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성은 행정구역상 남쪽과 동쪽의 일부가 울산에, 나머지는 경주에 걸쳐 있기 때문에 울산 사람들은 깃발고개(기령, 旗嶺)에 있다고 해서 깃발산성의 이두식 한자 표기인 ‘기박산성’(旗朴山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대리성이란 이름은 경주시 양남면 신대리에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이 산성은 관문성의 동쪽 끝과 이어져 있지 않아 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다. 관문성과 성벽이 이어져 있지 않아 별개의 성이라는 주장도 있고, 관문성과 매우 가까운데다 만든 의도가 관문성처럼 왜구의 감시·방어 목적으로 추정되는 만큼 관문성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린다. 지금은 관문성과 하나로 묶어 사적 제48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신대리성을 가기 위해선 7번 국도를 타고 울산에 접어든 뒤 매곡동 산업단지 쪽 산복도로를 타면 된다. 동해안 쪽에서 찾아간다면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에서 신대리 방향 산복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두 길은 동대산과 삼태봉 사이 고개에서 만난다. 이 고개가 깃발고개로 불리는 ‘기령’이다. 고갯마루에 ‘기령’(旗嶺)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이곳에서 삼태봉 방향 300여m 지점에 신대리성 동문 터가 있다.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성 안쪽 곳곳엔 건물 터로 추정되는 평탄지가 여럿 보인다. 흙속에 박힌 그릇과 기와 조각도 눈에 띈다. 이곳에선 축성 당시 공사 내용을 기록한 성돌 10여개가 발견됐고, 성내 시설물로는 문지와 수구, 성내 건물지, 망루시설, 우물 등이 확인됐다고 한다. 김운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