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이 거액의 독립자금이 필요해서 급히 최준을 찾아가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최준은 그런 거금을 구할 수 없다며 어려움을 표했다. 어쩔 수 없이 백산은 다른 곳으로 돈을 구하러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최준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 “자, 이 수표에 2만원 금액을 적어 넣어라. 그러지 않으면 네 목숨을 거두겠다” 복면한 강도가 칼을 들고 위협했다. 최준은 어쩔 수 없이 강도가 내민 백지 수표에 2만원을 적은 뒤 사인을 했다. 그러자 강도가 복면을 벗어던졌다. 놀랍게도 복면 안에서 안희제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튿날 최준은 2만원을 결재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이 문파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대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복면강도로 가장하여 문파 선생을 떠본 끝에 자금을 얻어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안희제 선생의 전기문에도 나와 있어서 많은 이들이 사실인 양 알고 있는 이야기다.
문파 선생과 박상진 의사 사이의 이야기가 문파 선생과 안희제 선생과의 이야기로 와전된 것
그러나 우습게도 이 이야기는 분명히 잘못 와전된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문파 선생과 박상진 의사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안희제 선생이나 문파 선생이 이 말을 들었다면 무덤 속에서라도 웃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이야기가 문파 선생과 박상진 의사 사이에 일어난 일임은 문파 선생 생전에 최염 선생이 아주 자주 들었던 이야기라 증언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문파 선생이나 안희제 선생 두 분 모두 독립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은 분들이고, 그 이전에 서로의 진면목을 충분히 알고 의기투합한 분들이다. 그러니 안희제 선생이 필요하다는 비용이었다면 그것은 문파 선생도 직접 필요한 돈이었고 문파 선생이 돈이 없는 상황이었다면 백산 역시 그런 사실쯤 빤히 알고 있었을 터이므로 이런 사건 자체가 성립될 리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일화는 백산의 의협심을 좀 더 드러내기 위하여 누군가 문파 선생과 박상진 의사 사이의 이야기를 차용해서 쓴 것이 틀림없다.
문파 선생이 안희제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손병희 선생과 교유하며 천도교를 지원하고 있을 때다. 그런 한편으로 박상진 의사가 조직한 대한광복회 재정부장과 조선국권회복단 경주대표 역을 맡아 독립군의 자금줄 역할을 할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파 선생의 입장에서 지속적이고 과감하게 독립자금을 대기에는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독립운동 자금을 댈라카믄 제일 쉬운 게 쌀이나 땅을 파는 긴데...., 최부잣집에서 갑자기 쌀을 몇 백 석 몇 천 석 내다 팔기나 논이라도 팔았다고 해 바라. 당장에 ‘와 그걸 팔았을꼬?’하믄서 말들이 날 거 아이가.... 큰일을 치루기나 특별히 큰 사업을 있었다믄 핑계가 될지 몰라도 그럴 일이 없었거든....”
최염 선생이 기억하는 문파 선생의 회고다. 이 말은 만석꾼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쌀이 화폐와 비슷한 역할을 할 때였다. 쌀만 가지고 나가면 세상에서 구하지 못할 물품이 없었다. 만석의 재물은 언제건 사용할 수 있는 화폐와 같았다. 그러나 독립군에게 지원할 자금을 쌀로 보낼 수는 없는 일, 자금을 만들려면 쌀을 내다 파는 것이 합당하고 그보다 더 큰 자금을 보내야 할 상황이면 논이나 밭이라도 팔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부자댁에서 그렇게 많은 쌀이나 논밭을 판다면 대번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고 일본 경찰이 어떤 낌새를 차리고 사실을 캐러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바로 이런 고심을 하고 있을 무렵 안희제 선생이 문파 선생을 찾아 최부자댁으로 왔다.
여기서 잠깐 안희제 선생을 돌아보자. 안희제 선생은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 선생과 허위 선생의 제자인 박상진 의사 등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며 ‘기미육영회’라는 학교를 세우고 ‘중외신문’이라는 신문사도 운영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해 온 분이었다. 1930년에는 옛 발해 땅에 ‘발해농장’이라는 협동농장을 만들어 만주지역에 사는 동포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1931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국민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임오교변’이라는 일제의 대종교 탄압사건에 연루되어 헤이룽장성에 있는 감옥에 투옥된다. 여러 차례에 걸쳐 혹독한 고문을 받은 선생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석방되었고 석방된 지 며칠 만에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생을 마쳤다.
이런 선생이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독립운동자금을 해외 독립단체로 보낸 것과 상해임시정부가 생긴 1919년 이후 문파 선생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상해임시정부로 독립운동자금을 밀반출한 공로 때문이다.
원래 선생은 부산에서 몇백 석쯤 하는 부농의 자재였다. 몇백 석은 일반인에 비해서는 상당히 넉넉하지만 부자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부산에 ‘백산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이곳을 통해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큰 부자가 아니라 언제나 자금난에 시달렸다. 그런 그가 박상진 의사를 통해 문파 선생을 알았고 국내에 들어오는 즉시 경주로 문파 선생을 찾아온 것이다.
안희제 선생은 부산 구포에서 큰 부자로 이름난 윤상은이란 사람과 함께 찾아왔다. 당시 경주에 자동차라고는 택시가 딱 한 대 있었는데 거의 문파 선생이 전용으로 타고 다니던 것이었다. 그렇게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안희제 선생 일행이 문파 선생을 찾아오던 날 이런 승용차가 무려 다섯 대나 최부자댁 솟을대문 앞으로 몰려와 동네 사람들이 그걸 구경하러 나와 법석을 떨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차에는 후일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주주가 될 부산 일대 부호들로 뒤에 경상남도 지역의 독립지사들이 타고 있었다.
안희제 선생은 이때부터 무려 한 달 가까이 최부자댁에 머물며 문파 선생과 함께 효과적인 독립자금 지원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신이 꾸려오던 백산상회를 주식회사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백산이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의 연장선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무역을 하는 회사로 가장하고 무역사업을 하면서 은행에 신뢰를 쌓고 이후 사업규모가 커지게 되면 무역회사에서 발생하는 현지 물품대금을 더 보내거나 해외에서 물건값을 떼이거나 장사를 잘못하여 밑지게 되었다는 것을 핑계로 돈을 현지에 묶어두고 그 돈을 독립운동하는 단체에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919년 5월 1일 마침내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영업을 개시한다. 3·1운동으로 전국에 만세운동이 넘쳐나 많은 독립지사들과 학생들이 굴비 엮이듯 잡혀 들어간 이후의 일이었다.
철저히 위장된 회사 외형과 달리 초기 자금을 문파 선생이 댔고 회사가 기울자 대출을 위해 개인입보까지 섰다
그런데 재미 있는 기록이 있다.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설립될 당시 발행된 총주식은 2만 주였는데 안희제 선생이 2500주, 문파 선생이 1800주를 보유하고 있었고 안익상 850주, 정상환 640주, 이우식(李祐植) 600주, 이종화(李鍾和) 560주, 허걸(許杰) 550주, 정재완(鄭在涴) 500주, 윤현태가 400주를 각각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식보유 수는 숫자상의 분배일 뿐이었다. 실제로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자본금 100만원으로 설립되었는데 그중 문파 선생이 처음 4분의 1인 비용인 25만원을 먼저 냄으로써 회사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장본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에는 모두 182명의 주주들이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문파 선생의 뜻을 알고 독립운동을 하려는 사람보다 실제로 문파 선생이 주도하는 회사에 투자하여 돈을 벌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문파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그만큼 철저하게 회사를 위장한 것이다.
위에서 문파 선생이 주식을 적게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이것 또한 위장술이다. 주식을 적게 보유했으면서도 백산무역의 대표 취채역을 한 것만 봐도 문파 선생이 이 회사의 중심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주식을 적게 기록한 것은 문파 선생이 백산무역에 전력을 다할 경우 일본경찰의 경계심이 커지게 될 것이기에 일부러 안희제 선생보다 주식을 작게 보유한 것으로 위장한 것이다.
백산무역을 처음 열었을 당시 회사의 규모는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에 들 만큼 큰 규모였다고 한다. 자본금 100만원이라는 거금은 화폐가치도 높았으려니와 기업들이란 것이 모두 고만고만할 때여서 지금 기준에서는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 처음 회사 발족 시 경영진으로는 취체(사장)역 및 지배인에 문파 선생, 이사에 강복순, 안희제, 윤현태, 감사에 김시구(金時龜), 전석준(全錫準) 등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파 선생은 비록 회사 외형을 위장하기는 했지만 초기 투자에서부터 직접 회사의 대표는 물론 실무까지 맡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었고 함부로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안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 본사를 두고 대구와 원주에 지사를 둔 이 회사는 우리나라 특산품, 명주, 면포, 강포(마직물), 인삼 등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을 명분으로 세웠다. 그리고 초기에는 실제로 부지런히 사업을 전개하여 일본경찰의 눈을 속였다. 사업을 제대로 해야 은행대출도 순조롭게 받을 수 있었고 그래야 일제의 의심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최대한 키워놓고 일시에 그 자금을 해외독립운동단체에 넘긴다는 야심 찬 계획이 이렇게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