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이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 역시 천도교의 전국적인 조직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3·1운동의 핵심정신은 독립선언문에 녹아 있는데 이것을 초안한 사람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다. 또 불교계의 대표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생이 이 숭고한 선언문을 낭독한다. 이 역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선언문을 인쇄하여 배포한 인쇄소가 천도교에서 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開闢)’을 찍던 ‘신문관(新文館)’이라는 인쇄소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물론 신문관은 천도교 예하의 인쇄소였다. 여성과 어린이까지 새로운 시대정신을 일으킨 천도교, 세계 사상사에 유래 없는 앞선 사상! 천도교는 비단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보호 운동에도 적극적인 종교단체였다. 이전의 사회개혁운동이 주로 적자(嫡子)와 서자(庶子), 즉 적서(嫡庶)의 차별 금지, 신분제도의 철폐 등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천도교는 훨씬 구체적이고 진일보한 사람 자체의 존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천도교의 밑바탕 사상인 인내천(人乃天)을 구현하기 위한 진지한 시도이자 세계인권사의 새로운 지표라 할 만한 것이다. 그 실질적인 사례가 천도가 펴낸 잡지 ‘신여성’과 ‘어린이’다. 신여성은 1923년 9월에 창간되어 1934년 4월까지 통권 38호를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지다. 중간에 3년 정도 발행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이 잡지를 통해 단군 역사 이래 5000년 동안 남성의 뒤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이 비로소 여성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여성도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함을 외치게 되었다. 잡지 ‘어린이’ 역시 1923년 3월 천도교가 펴낸 잡지다. 근대 이전 시대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전염병 등에 대해 아이들의 치사율이 높던 시절, 아이들은 어른들의 관심 밖이었고 만만한 호통의 대상일 뿐이었다. 천도교는 그런 어린아이들을 어른과 같이 아니, 어른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여겼는데 그래서 호칭부터 새롭게 ‘어린이’로 만들고 새로 만든 이 이름을 잡지 이름으로 썼다. 결국 이 잡지가 세상에 퍼짐으로써 ‘어린이’라는 말 역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잡지 이름 ‘어린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 유명한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선생인데 그가 바로 이 잡지의 발행인이었다. 오늘날 어린이날이 제정되어 5월 5일이 공휴일이 되어 있는데 이날을 있게 한 장본인이 방정환 선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방정환 선생이 손병희 선생의 사위로 천도교의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어떤 서열보다 중시되던 시대, 어른 위주의 사회상에 어린이를 내세운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의 인권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가르침은 세계의 어떤 종교에도, 어떤 철학에도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관념이자 다른 차원의 사상이기에 천도교를 새롭게 보게 하는 요인이다. 다시 손병희 선생에 집중하면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손병희 선생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여 후학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친러파 수장격인 탁지부(현대의 재경부) 대신 이용익(1854-1907) 대감이 세운 보성전문학원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이 보성학원이 지금의 고려대의 전신이다. 이용익 대감은 보성전문을 세우고 후학 양성에 노력했지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을사늑약 후 고종황제의 밀사로 프랑스로 가던 중 암살당한다. 이런 마당에 운영 주체를 잃은 보성전문을 1910년에 인수한 사람이 바로 손병희 선생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고려대학 설립자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선생인 줄로 안다. 인촌과 고려대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여기서는 이 학교가 천도교가 아니었으면 존립 자체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역사적 사실만 짚어두겠다. 이런 천도교가 3·1운동 후 급격히 쇄락하게 된다. 손병희 선생이 예측한 대로 천도교는 선생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가 구속되고 일본의 천도교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교세가 급속히 줄어들게 된 것이다. 특히 독립운동 선언서에 서명한 다른 단체들이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소강상태였던 것에 비해 천도교는 3·1 운동 이후에도 교세를 모두 기울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한편 오히려 교세 확장에는 소홀하게 되어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이것은 다른 종교들이 일제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교세를 증가시킨 것과 크게 대조되는 일이다. 그렇게 쇠퇴일로를 걷던 천도교는 손병희 선생의 사후 후계자 문제로 내홍을 겪으면서 더욱 교세가 약해지고 해방 후 뜻하지 않게 남북이 분단되면서 90% 이상의 교도들이 분포했던 북한의 교세를 읽게 되면서 또 다시 10분의 1 규모로 축소되고 말았다. 지금은 약 10만명의 신도가 천도교를 믿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병희 선생이 은밀히 3·1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늘 일본관원들과 어울리며 태화관 등의 요정에서 술을 마셨고 자신은 종교를 타락시키는 세속화된 인물이라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소실을 앉혀두고 흥청거리는 모습을 노출 시켰다. 이런 모습은 문파 선생이 가까이에서 지켜본 장본인이다. 그 당시의 회고를 손자인 최염 선생에게 자주 술회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손병희 선생의 모든 행동과 그 내막까지 소상히 알고 계셨어요. 손병희 선생의 이런 모습은 무엇보다 일본 경찰들의 경계심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선생의 진면목을 몰랐던 대부분 사람들, 심지어 애국지사들에게까지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원인이 되기도 했답니다. 물론 할아버지는 그 진의를 알고 계셨지요!” 최염 선생은 손병희 선생과 할아버지 문파 선생 사이의 이야기를 할 때 유독 상기된 표정으로 문파 선생의 간곡했던 말씀을 옮겼다. “독립운동이라 카는 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놓고 전쟁을 치는 거고 또 하나는 그놈들이 버젓이 보는 속에서 하는 거라. 내놓고 전쟁을 치믄 이거는 적들만 쓰러뜨리면 되는 거지. 글치만 적들이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 하는 독립운동은 적이 둘이 대는 거라, 적도 속여야 대지만 우리 편도 속여야 대거등. 그라이 그게 얼매나 힘든 일인가 말이다” 문파 선생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고 한다. “잘 한다꼬 칭찬 들어가며 일하믄 기운이 날 끼다. 누가 독립운동을 하는지는 몰랐다 캐도 그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알고 격려도 하고 안 그랬겠나. 글치만 아무도 몰라주는 일을 하는 거는 진짜로 신념이 없으믄 안 되는 일인 기라” 이를테면 손병희 선생과 주옥경 여사는 일본인들은 물론 우리 국민들까지 속여야 하는 이중고를 겪으며 누가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욕을 먹으면서까지 3·1 독립운동을 준비한 것이다. 이것은 일제의 감시망 아래에서 일본의 눈을 속이며 누구보다 철저히 독립운동에 헌신한 문파 선생 자신의 오래고 외로운 투쟁의 모습이기도 했다. 3.1운동 미리 안 문파 선생, 그 전에 보성전문 인수를 제안받았기 때문! 문파 선생은 손병희 선생이 3.1운동을 준비한 사실을 미리부터 알고 있기도 했다. 그것은 손병희 선생이 문파 선생에게 보성전문을 인수받을 것을 권유한 것에서 증명된다. 손병희 선생은 3·1운동이 전개되면 자신은 물론 천도교의 핵심 인사들이 모두 일본경찰에 체포될 것을 예견하고 이 중대한 학교 운영의 임무를 문파 선생이 맡아주기를 바랐다. 그러자니 3·1운동 계획까지 문파 선생에게 들려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필 이때 문파 선생 자신도 항일 독립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설립에 막바지 박차를 가하면서 전 재산을 쏟아붓고 있을 때였다. 학교 인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문파선생은 손병희 선생 사후에도 자주 주옥경 여사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손병희 선생의 옥바라지며 옥고 후 마지막 간병까지 맡은 주옥경 여사에게 지우의 의리를 다한 것이다. 이것은 최염 선생의 증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내가 23~24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와 함께 수유리 근처에 사시는 주옥경 여사를 찾아뵌 일이 있었어요. 주옥경 여사 댁에 도착해 내가 먼저 들어가 인사를 드리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고 했더니 주옥경 여사가 크게 반기며 달려 나오셨어요. 주옥경 여사는 연로하신 나이에도 매우 정갈하고 온화하신 분이셨어요. 갑자기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격조 높은 음식을 차려주셔서 더 인상적이기도 했지요” 완고한 신분 서열이 사람을 지배하던 시대, 여성에게 소실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위치였고 더군다나 기생은 내놓고 업신여김을 받던 직업이었다. 그런 멸시를 무릅쓰고 독립운동과 종교적 파트너로서 주옥경 여사를 선택한 손병희 선생과 그런 선생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여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운동을 도왔음은 물론 아내로서의 책임까지 다한 분이 있었기에 우리가 독립의 기쁨을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이야기의 전편에 주옥경 여사를 막달레 마리아와 비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주옥경 여사와 막달레 마리아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지금은 다소 시각이 바뀌고 있지만 오랜 기간 기독교는 예수님이 가장 아낀 여자 제자인 막달레 마리아를 별다른 이유 없이 창녀로 몰아붙이고 그녀를 성경 속에서 몰아내려 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신 예수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 이전 시대부터 지속되어오던 여성에 대한 비하와 오랜 터부가 알게 모르게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는 기녀였던 주옥경 여사를 떳떳하게 역사 앞에 내놓고 있음은 물론 그분의 존재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인내천(人乃天)을 강조하고 어린이로부터 여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종교의 선진성이 여실히 들여다보이는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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