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파 선생의 독립정신을 말할 때 짧은 인연 속에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위청척사의 화신으로 이름 높은 면암 최익현(1833-1907) 선생이다. 최익현 선생은 최준이 한창 혈기방장하던 18세 무렵에 최부자댁으로 찾아와 달포 동안 머문 것으로 전해져 온다. 면암 최익현! 그가 그를 따르는 200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최부자댁을 찾아온 것은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각이었다. 최준은 면암이 온다는 말에 아버지 현식 공을 모시고 대문 밖 공터를 지나 남천까지 나가서 길을 살피고 있었다. 면암, 그는 핍박받는 조선의 국운을 회복하고자 도끼를 걸머지고 상소를 한 이 시대의 마지막 언관(言官)이고 진정한 선비다. 면암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그는 위정척사의 정신을 나라를 구하는 도구로 삼았고 반면 지나친 보수적 자세로 조선의 개화를 늦추는 악영향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하간 면암은 전 조선의 선비와 지식인들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시대의 거목이었다. 단발령이 떨어지고 한때 권세를 얻은 유길준이 억지로 면암의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강압적인 시도를 부렸을 때 그에 맞선 면암의 유명한 일갈은 너무나 유명하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완강히 몸부림치는 면암 앞에서 유길준은 가위를 던지고 사라졌다던가! 면암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여러 가지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포천에서 다시 은둔하는 듯싶었다. 그러다 러일 전쟁 후 황제의 밀명을 받고 한성부에서 외세에 아부하는 내각대신들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경에 의해 포천으로 압송되기도 두 번, 마침내 자신의 집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런 면암이 극적으로 자신의 집을 빠져나와 전국을 떠돌며 유림의 선비들과 뜻있는 인물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면암은 전라도에 나타나는가 싶으면 강원도에 나타났고 또 다시 충청도로 경상도로 그의 발자취를 옮겨 다녔다. 면암이 이르는 곳마다 면암을 따라 길을 나서는 선비들이 비 온 뒤 죽순처럼 생겨났다. 고을을 지나면서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한 사람둘이 경주에 이르러서는 200명을 넘기고 있었다. 그 면암이 최부자댁을 방문하겠다는 통지를 보내왔으니 이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가주인 현식은 통지를 받는 즉시 손님 맞을 준비를 시켰다. 아닌 밤중에 집안 전체가 관솔불로 환하게 밝혀졌고 사랑채는 물론 마을 전체에 머물고 있는 과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새로 들어올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교촌 일대는 훤하게 불이 밝혀졌다. 현식은 면암을 향해 스승을 대하듯 극진한 예를 다했다. 면암이 최현식 공에 비해 스물한 살이 많은데다 비록 사성공파와 화숙공파로 파는 달랐지만 면암이 한 항렬 위였다. 현식의 아저씨뻘 되는 면암이니 더더욱 공경을 다할 만했다. 면암은 풍전등화인 조선의 앞날을 걱정했고 조정의 이야기와 국내외 정세 대한 화제로 대화를 그칠 줄 몰랐다. 이때 최준은 집안 어른들과 경주의 선비들 끝자락에서 앉아 하루 종일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런 최준을 면암이 눈여겨보았다. 당당해 보이는 젊은이가 하루종일 꼿꼿하게 앉아 있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두 어른 간의 이야기를 듣는 품도 자못 진지해 보였다. 특히 자신의 말을 지루해하지 않고 말과 말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으면 무언가 풀리지 않은 의문을 품는 듯 보이는 등 진지하게 듣고 있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자제분과 직접 말을 좀 나누어 봐도 되겠는가?” 면암의 말에 증조부는 먼저 겸양의 모습을 보였다. “제 몸이 보시는 거와는 다리게 불민한 게 많아 가지고…, 이 아이인테 가업을 잇게 할라꼬 늘 이렇게 제 곁에 세워 두고 있심더. 글치만 배운 게 적고 아직은 철도 없어서 말을 시켜보나 마나 영감께 누가 댈 낍니더.” 증조부의 말에는 아랑곳않고 면암이 최준에게 일러 앞으로 다가와서 앉으라고 일렀다. 최준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증조부의 반 보 뒤로 다가와 앉았다. 면암이 물었다. “그래 과거나 조정의 시험은 본 적이 있었던가?” 할아버지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직 본 적이 없습니더.” “이유가 있었던가?” “과거는 갑오년에 폐지되었고 아직 신학문에는 익숙지 않습니다. 게다가 시절이 수상하여 오히려 출사는 피하고 있었습니더” “시절이 수상하다 함은 무슨 말인가?” “나라를 책임질 대신들이 나라를 책임지지 못 하고 백성을 보살펴야 할 나라님이 스스로도 못 보살피고 있습니더. 출사를 해도 몬 지킬 백성이고 제대로 모시지도 못할 나라님인데 출사는 말라꼬 하겠습니꺼?” 분기가 서린 말이었다. 그 순간, ‘어허이!’ 현식이 최준을 돌아보며 짐짓 책망의 눈길을 보낸다. 최준이 묵묵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런 최준을 보며 면암은 깊은 한숨을 쉬어보였다. “그렇다면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자네의 길이라 여기는가?” 최준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가난한 백성을 도와주는 거를 젤로 먼저 하되 쉽게 기댈라 카지 않도록 이끌어야 하고, 나라를 구하는데 재물을 아껴서는 안 댄다꼬 믿습니더. 그래도 힘이 남으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서 인재를 기루는 데 힘을 쏟아야 할 낍니다” 도도한 최준의 말에 면암은 무릎을 쳤다. “옳거니, 자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내 말이 바로 거기에 있었네. 명불허전일세. 경주최부자 일문의 장함을 알고 늘 흠모해 왔었는데 오늘 자네의 말을 들으니 이 늙은이의 가슴이 환하게 밝아지네” 면암은 현식을 돌아보며 최준의 대답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어찌 영식의 말이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나왔겠나. 이 씩씩한 대답은 이 집안의 오랜 가풍의 결과일 터, 자네에게 이토록 영특한 자재가 있다는 것은 자네 일문뿐 아니라 이 나라의 큰 복일세” 면암은 최준에게 뜻이 깊을수록 자중자애할 것을 당부하며 장차 나이를 먹어도 그 마음만큼은 변하지 말라고 지긋이 다짐을 주었다. 그런 면암에게 할아버지는 캐듯이 물었다. “그러나 위정척사의 말씀에서 의문이 있습니다. 소생이 보기에 위정의 당위성을 세우는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척사의 부분에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면암은 이번에는 의외라는 눈길을 보낸다. 현식이 다시 최준을 돌아보며 책망의 눈길을 보낸다. 그러자 면암이 오히려 손사래를 쳤다. “척사에서 걸린다는 뜻은 무언가?” 최준은 자리를 고쳐 앉아 면암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조선은 오랜동안 신분세습으로 아래와 위가 서로 반목하고 갈라져 있습니더. 위정이라 카는 거는 성리학을 바로 세우자 카는 말씀 아입니꺼? 주자의 사상이야 물론 좋지만 가만히 보면 선비들이 그 정신은 잊어버린 채 형식과 치레를 갖고 싸움만 합디더. 조선이 잘 될라카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이 없어져야 대고 사람을 위한 새롭고 실용적인 학문이 성해야 된다꼬 믿심더. 그런데 새로운 사상과 학문이 걸핏하면 척사의 이름으로 불태워지고 쫓겨났지 안습니꺼?” 면암은 이번에는 최준을 보고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흐른 후 면암은 천천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바로 세우고자 하는 성리학의 요체와 그 병폐를 제대로 꿰뚫어 보았다. 더구나 나 자신, 외세의 침탈에 항거할 수 있는 것이 정신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어. 새로운 학문, 실용적인 학문..., 주자의 정신에 그런 학문들이 얹힐 수 있도록 너 같은 사람이 분발해야 하느니” 그러면서 현식을 향해 뜻밖의 말을 했다. “어떠신가 내가 귀댁에 머무는 동안 이 당당한 영식을 내 곁에 두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는가? 그말인즉 최준을 가까이 두고 자신의 경륜을 전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현식은 다만 고개를 깊이 숙일 뿐이었다. 면암 일행이 교촌에 머문 것은 달포나 되었다. 그 동안 면암은 경주 일원의 서원을 돌며 이 지역 유림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호소하였고 최준의 증조부 최기영 공이 쓴 ‘용암시집’ 서문을 쓰고 종조부인 만선 공의 묘갈명을 새로 써주기도 했다. 그동안 현식은 200명이나 되는 일행들에게 한 치의 불편함도 없도록 물심양면의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거기에다 면암은 수시로 현식과 최준을 가까이 불러 조정의 일과 앞으로 조선의 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준은 면암으로부터 국운이 쇠할수록 선비의 기개가 돋보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들으며 그때마다 옷깃을 여몄다. 마침내 면암이 떠나는 날 현식은 ‘말씀하셨던 것’이라며 면암에게 미리 준비한 보따리 하나를 전했다. 면암은 현식으로부터 그 보따리를 전해 받은 후 손을 굳게 잡아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런 다음 최준의 어깨를 부여잡고 한동안 최준의 눈을 응시했다. 최준 역시 면암의 눈동자를 흔들리지 않게 지켜보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면암과 면암을 따르던 200명 선비들은 총총히 남천을 따라 난 넓은 길을 걸어 떠나갔다. 최준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면암 일행이 다 사라지도록 남천 변에 서 있었다. 하늘 한쪽에서 갈가마귀떼가 새까맣게 몰려왔다가 사라져 갔다. 면암 일행의 자취도 마침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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