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문파 선생은 ㈜백산무역을 경영하는 것을 핑계로 최부자댁 모든 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승화시키며 아름답게 마감했다.
㈜백산무역이 파산하고 최부자댁이 압류상태에 놓이자 문파 선생은 모든 것을 깨끗이 단념하고 부자의 명성은 물론 그때까지의 호의호식을 포함한 모든 세속적인 미련을 털어버리고자 작정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대대로 부자로 살아온 문파 선생 자신은 물론 최부자댁에 기대어 살아온 가족과 주변 친지들, 관련한 많은 사람들의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고달파지고 말았다. 문파 선생은 최염 선생께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재산은 압류됐고 가재도구 하나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는데 어디 더부살이할 곳도 없어...!
“안 그랄 수 있었겠나? 내가 아무리 머라꼬 해 바야 재산은 다 압류가 댔뿌고 가재도구 하나도 내 맘대로 쓸 수가 없으니 우짜겠노. 인자 식솔들 거느리고 어디 아는 집에 가서 더부살이라도 해야지 싶었지러…”
그러나 문파 선생 역시도 각오는 하셨지만 막상 그렇게까지 집안이 몰락하자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오긴 했던 모양이었다.
“막상 어디라도 갈라카이 어디로건 갈 데가 없더라꼬. 친척이라 해봐야 대부분 교촌에 눌러 살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 사는 집조차도 다 압류가 댔으이까네 몽땅 쫓겨나갈 판이고 외가나 처가로 갈라카이 너무 멀어가 엄두가 잘 안 나고… 오늘내일 하다보이 시간은 가는데 암만 생각해 봐도 갈 데가 없더라꼬…!”
속담에도 ‘든 자리는 표시 나지 않아도 난 자리는 표시 난다’고 했다. 더구나 영남일대 최고의 부자 소리를 듣던 문파 선생이 갑자기 곤궁해지니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이 당시 문파 선생은 집안사람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원망과 압박에 시달렸을 것이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온갖 논과 밭, 산야까지 몽땅 사업한답시고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개인입보로 그나마 생활의 근거지인 집까지 빼앗길 판이었으니 그 놀라움과 공포가 오죽했을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일이었다는 속사정을 알았건 몰랐건 상관없이 넉넉하던 재산이 사라진 현실은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원망이 오롯이 한 사람, 문파 선생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조선식산은행의 두취(頭取:지금의 대표이사 격) ‘아리가(아리가 미츠토요(有賀光豊) 1873-1949)’로부터 연락이 왔다. 문파 선생을 만나고 싶으니 서울로 와 줄 수 있겠느냐는 전갈이었다.
“할아버지는 틀림없이 빨리 집을 비워달라는 재촉을 할 것이라 여겨 서울로 갈 마음이 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저쪽의 의도가 궁금하기도 하여 연락을 받은 이튿날 바로 서울로 가서 아리가 두취를 만났답니다. 그런데 아리가 두취가 아주 뜻밖의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아리가 두취가 문파 선생에게 한 제안을 그대로 쓰면 이렇다.
“총독 각하께서 최 선생의 집안이 적몰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당분간 최 선생의 집에 대해 신탁관리를 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신탁관리란 압류된 최부자댁의 재산, 이를테면 모든 부동산에서 나오는 곡식과 수입이 될 만한 재화들을 조선식산은행에서 관리하며 문파 선생께는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대준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당장 최부자댁 재산을 처분해서 식산은행 소유로 편입시키지도 않고 교촌 등에 살고 있는 최부자댁 집안사람들을 내몰지는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최염 선생은 이 대목에서 잠시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내가 어렸을 때, 해마다 추수기가 되면 우리 집 앞 남천내에서 오릉 쪽으로 난 길은 나락을 싣고 들어오는 소들로 긴 줄이 서곤 했어요. 그때 나는 그게 모두 우리 집 곳간에 쌓이는 곡식들이라 생각했는데 뒤에 알고 보니 그 많은 곡식을 일본 조선식산은행에서 모조리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었어요. 초등학교 상급생이 될 때까지도 나는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살았지요.”
어차피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는 상태에서 문파 선생은 우선 그 제안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궁금해 아리가 두취에게 되물었다고 한다.
“아니, 이 제안은 내나 우리 집안 식솔들에게는 유리한 일이지만 은행 입장에서는 나에게 무슨 덕을 볼라고 이러는 겁니까?”
선생의 물음에 아리가 두취는 내놓고 속을 보여주었다.
“최 선생네 집안은 누구나 아는 조선 제일의 명가입니다. 조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집안이시지요. 그런데 사업에서 진 빚쯤으로 이런 중요한 집을 대일본제국이 가져갔다고 쳐보십시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조선 사람들은 우리 대일본 제국이 최부잣집을 핍박해서 몽땅 빼앗아 갔다고 믿을 것 아닙니까? 누가 봐도 뻔하게 퍼져나갈 이런 오해를 굳이 불러일으킬 수는 없지요.”
문파 선생은 비로소 이해가 갔다. 결국은 누대에 걸쳐 덕행을 이어오던 최부잣집이 망했고 그게 일본이 세운 조선식산은행에서 꾼 돈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면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총독부를 대신한 아리가는 바로 그 점을 간파한 것이다.
반면 전 재산을 독립운동단체에 탈 없이 보낸 문파 선생은 일단 첫 번째 목표가 이루어졌으니 그때부터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라도 집안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리가 두취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온 집안사람이 길거리로 나앉을 판에 뜻밖의 수혜를 입고 가문이 적몰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문파 선생은 그때 조상님들 은덕이 아직도 자신에게 온전히 내리고 있음을 느끼면서 최염 선생께 이렇게 술회하셨다고 한다.
“생각해 바라, 우리 조상님들이 누대에 걸쳐서 온갖 백성들에게 은덕을 배풀어 놨다는 거를 일본놈들도 알고 있었을 거 아이가. 안 그래도 무단정치(武斷政治)로 일관하던 총독부가 그런 통치 방식이 잘 안 묵히이까네 문화정치를 한답시고 온갖 머리를 다 쓰던 중이었지러. 그런 놈들이 우리 집을 망하게 하는 게 저거인테는 억수로 나쁜 일이라꼬 생각했을 거 아니가”
최부자댁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려 든 총독부와 아리가 두취, 거액의 돈보따리까지...!
실제로 1919년 거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전국적으로 이와 유사한 만세운동과 독립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자 일제는 조선에 대하여 무단정치를 지양하고 문화정치로 식민지 통치 수단을 대거 바꾸고 있을 때였다.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즉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사상으로 모두가 황국신민이라 떠들며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놓고 핍박하기보다는 무력적 통치와 함께 한편에서는 벼슬이나 권력으로 꼬드기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일본의 우수성을 주지시키는 세뇌작업을 병행하고 있을 때였다. 3.1운동 이후 총독 역시 육군 출신의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세미치에서 해군참모총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와 있었다. 이는 육군 출신의 총독이 무단정치를 하던 것에 비해 해군출신 총독이 문화적으로 섬세하다고 믿어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간한 명가의 사람들을 포섭하지 못 해 안달하던 일본인들이 조상 대대로 덕을 쌓아온 최부자댁을 모를 리 없었으니 이참에 경주최부자댁을 이용해 덕을 보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제의 이런 속셈은 문파 선생과 헤어지면서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아, 그리고 이건 역시 천황폐하께서 최 선생께 주시는 선물입니다. 나중에 풀러 보십시오!”
아리가는 자신의 집무실을 나서는 선생에게 묵직한 물건이 싸인 보자기 하나를 내주었다. 여관에 와서 보자기를 풀어보니 보따리 가득 빳빳한 지폐가 들어 있었다. 그즈음 돈에 쪼들리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문파 선생은 등골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요즈음으로 치면 수억 원이 든 돈보따리였으니 이걸 받아야 되나 싶었던 것이다. 선생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술회하셨다고 한다.
“생각해 바라. 일본놈들이 인자 우리 집이 거덜 났고 내가 무일푼으로 전락했다 카는 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기라. 그라이 그 많은 돈을 내줬지러…”
여하간 이렇게 해서 문파 선생은 빈털터리가 된 집안사람들이 쫓겨날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일로 선생은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 대해 선생은 최염 선생께 너무나 평온하게 이렇게 술회했다고 한다.
“내가 할 일은 다 했지러. 그라이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은 다 덤이랐지…!”
어차피 전 재산을 나라 찾는 일에 쓰겠다고 맹세한 선생의 뜻은 이루어졌으니 그 다음은 유유자적, 집안을 돌보면서 살아가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만한 것이 어지간한 부호들은 일본에 엎어져 재산을 헌납하면서 너도나도 충성을 맹세하던 시기다. 그런 시국에 그 많던 재산을 남김없이 독립운동에 사용했으니 이 자체로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나머지 재산을 긁어모아 일본에 구명운동을 벌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일본으로부터 일정 규모의 생활을 보장받고 더구나 거꾸로 거액의 돈보따리까지 받은 것이다. 살려달라고 빈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나서서 주는 것을 받은 것이니 그야말로 덤 그 자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집안을 돌보며 유유자덕 살아가겠다는 문파 선생의 작은 바람은 또다시 이어지는 일본인들의 회유 때문에 결코 평온할 수 없었다. 집안이 적몰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친일파라는 오해를 받은 선생의 앞에 더 큰 시험대가 놓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