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가는 조선의 문화에 관심이 많은데다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라 전통적인 양반가이자 부잣집인 최부자댁에 상당한 호기심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여행을 좋아하고 고건축에 대한 취미를 가진 터라 경주를 좋아해 자주 최부자댁을 찾은 인물이었다. 이에 더해 아리가는 총독부 산하 최고의 금융기관의 장으로서 조선의 민심을 시찰하고 보고할 의무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고관들이 대부분 본래 업무와 상관없이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데 눈이 벌게져 있었듯이 아리가 역시 직무는 식산은행 두취였지만 우리나라 통리에 두루 역할을 많이 했던 인물로 경주 뿐 아니라 함경도와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다니며 민심의 동향을 살폈다. 이런 아리가가 한 번은 문파 선생에게 집에 초대해 줄 수 없느냐고 은근히 제안했다고 한다. 문파 선생 입장에서는 이유야 어떻건 결과적으로는 집안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준 사람이고 가문의 생사여탈권 역시 그가 잡고 있었으니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아리가를 초대해 극진히 대접했고 아리가에게 경주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아리가는 며칠이나 최부자댁 사랑채에 머물면서 최부자댁 건물과 주변 환경들을 꼼꼼히 챙겨보았고 경주에 대해서도 유달리 깊은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았다. 아리가는 특히 최부자댁 음식들, 그중에서도 ‘사연지’라는 김치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경성으로 돌아갈 때 문파 선생 부인이 특별히 큰 통으로 한 통이나 만들어 주었다고도 전한다. 사연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앞의 음식 이야기 편에 기술한 바 있다. 박물관을 짓고자 하니 최부자댁을 기증해 주시오. 그러면 새집을 지어주고 원하는 것을 다 들어드리겠소! 그러고 나서 몇 달 후, 아리가 두치가 다시 경주로 오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 왔다. 어지간하면 자신보다 나이가 밑이고 따지고 보면 ‘을’의 입장이 되어있는 문파 선생이 서울로 오라고 했을 테지만 자신이 직접 오겠다고 한 데는 고명한 집안의 종손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있었고, 또 그런 핑계로 최부자댁과 경주에 머물고 싶었다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반면에 문파 선생은 아리가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요구를 들고 올지 몰라 걱정부터 앞서는 형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경주로 온 아리가는 문파 선생께 다시 뜻밖의 제안을 했다. “최선생, 이 집을 경주 국립박물관으로 씁시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최선생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만큼의 다른 집을 지어 드리지요. 그럼 경주에 멋진 박물관이 생기는 것이고 최선생께는 새집도 생기니 좋은 제안이 아니겠소. 물론 지금까지도 이 집을 잘 관리해 오셨겠지만 박물관으로 사용하면 더 잘 보존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리가는 간곡하게 문파 선생을 설득하려 들었다. 워낙 뜻밖의 제안이라 선생은 그 자리에서 즉답을 피했다. 그리고 며칠 밤을 새워 가면서 아리가의 제안을 되새겨 보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운 기회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어차피 새집으로 옮기면 일본은 의심의 눈을 거둘 것이고 새집을 기반으로 또 다른 독립운동 계획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집이 어떤 집인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역대 할아버지들의 기개와 정신, 숨결이 서린 곳이 아닌가? “할아버지는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을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는 것은 조상님들께 누가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6대조께서 터를 잡고 5대조께서 이조리에서 나와 일부러 향교 옆이라 하여 터를 깎아가면서 지은 집이 아닙니까? 이 집 앞 너른 공터는 언제든 흉년이 들면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차양을 치고 큰 솥을 걸어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던 곳이었어요” 최염 선생의 회고에 사뭇 진지함이 어렸다. 그렇다. 이 집은 그냥 큰 부잣집이 아니라 조상님들의 애민 사상과 나눔의 정신이 서린 집이다. 이런 집을 일본인들이 주도되어 짓는 박물관으로 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총독부의 계획으로 집을 내준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친일 행위 그 자체였다.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한 탓에 쾡한 눈을 한 문파 선생은 아침상을 가운데 두고 아리가와 다시 마주 앉았다. “최선생, 그 사이 제 제안을 잘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리가가 수저를 놓으면서 은근히 물었다. 이제 문파 선생이 가부간 대답할 차례였다. “두취 각하, 저에게 소원이 하나 있심더” 소원이라는 말에 아리가가 고개를 바짝 디밀었다. “이 집은 제가 나고 자라고 이래 중늙은이가 되도록 살아온 집이시더. 이 집은 또 우리 조상님들의 혼이 꽉 차가 있는 집이기도 합니더. 각하께서 이래저래 배려해 주신 거는 백골난망이지만, 그래도 마, 제가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이 집에서 살도록 해 주이소. 제가 죽고 나믄 누가 어떻게 사용해도 괘안심더” 아리가 두치는 신중하게 문파 선생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선생은 그런 아리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 앉은 밥상을 두고 어지러운 불똥을 튕기며 맞부딪쳤다. 그러기를 잠시, 아리가가 헛웃음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생 뜻이 그러시다면 더 이상 누가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알고 가지요!”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아리가는 문파 선생을 늘 존중해 주었다. 아리가 역시 문파 선생이 겉으로는 장사를 빙자하여 파산을 하였으되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돕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파 선생은 그만큼 노출되기 쉬운 환경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고 온갖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일본 경찰들이 그런 심증쯤은 다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재산을 몰수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조건까지 달아가면서 집을 비워줄 것을 청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 역시 총독부의 심부름으로 이런 제안을 한 것인데 그 요구를 무산한 데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흔연히 문파 선생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나 이런 상황을 다 알면서도 집을 내 줄 수 없다고 버틴 문파 선생을 토하나 달지 않고 존중해 준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리가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이번에도 사연지 한 통과 육포니 법주 같은 최부자댁 고유의 음식들만 선물이랍시고 받아서 갔을 뿐이다. 문파 선생은 뒤에 최염 선생께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이날 이후부터 아리가가 온다 카믄 맥제 겁부터 날라 캤디라. 그 양반이 다음에는 가악자 무슨 이바구를 꺼내 놓을지 알 수가 없었거등…” 중추원 참의 한 자리를 맡아주면 재산도 돌려 드리고 문교부장 자리도 내어 드리겠소.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선생의 이런 염려는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번에도 아리가가 경주로 직접 찾아왔다. “최선생, 이번에는 꼭, 정말 꼭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재산도 다시 돌려 드리고 제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총독부 문교부장까지는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문파 선생은 무슨 파격적인 제안을 할지 몰라 잔뜩 긴장했다. 더구나 총독부가 지금의 문화관광부 장관 자리까지 보장한다고 한 것이다. 아리가의 제안은 정말 거북한 제안이었다. “최선생께서 중추원 참의 한 자리를 맡아 주십시오” 중추원 참의…, 중추원(中樞院)은 조선 말기에 고종황제가 자문기관으로 잠깐 사용했지만 유명무실하던 기관이었다. 그러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을 설립하며 같은 이름의 중추원을 설립했다. 말은 총독이 의장인 총독 자문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총독이 정하고 제안하는 의제를 형식적으로 논의하고 가결하는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지역별로 안배를 해 가며 조선의 전직 고위 관료들과 지방 유지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만든 이 중추원은 친일파 관료와 정신 나간 유지들에게는 식민지 권력의 정점에 이르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자 조선인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추원은 1945년 해방되기까지 존속한 대표적인 친일파 소굴이었다. 아리가 두취의 제안은 한마디로 말해서 ‘친일하라’는 말이었다. 문파 선생은 이 제안을 받고 깊은 시름에 잠겼다. 이미 한 번 박물관 기부를 거절한 마당이고 ‘꼭 들어달라’는 간곡한 단서까지 붙였으니 거절할 경우 어떤 불이익이 따라올지 모르는 제안이었다. 아리가의 말 한마디에 자신은 물론 집안 식솔들의 생활이 당장 결딴날 수도 있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또 모를까, 평생동안 부자로 살다가 재산이 압류당하면서 겪은 불편과 곤란을 떠올리니 그 제안이 보통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문파 선생은 그 제안을 받은 후 숫제 안채로 들어와 드러누워 버렸다. 실제로 선생은 드러누운 시늉만 한 것이 아니고 정말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드러누웠다고 한다. 거절은 해야 하는데 적당한 방법이 없어 홧병이 난 것이다. 아리가로서는 선생이 아파 누웠다는 말만 들었을 뿐 내외 구분이 엄격한 반가의 예를 알기에 안채로 들어가서 병문안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기 사흘째, 동생 최윤 선생을 통해 아리가로부터 안채로 전갈이 왔다. “내외가 유별하니 내가 들어가서 문병도 할 수 없고 더구나 이제 경성으로 올라가야 할 마당이라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나마 이렇게 전합니다” 아리가도 머리를 쓴 것이다. 자신이 떠난다고 하면 집안사람들이 업고라도 문파 선생을 모시고 나올 것이라 여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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