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회에서 문파 선생이 어떤 방법으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만들었는지 설명했다. 여기서 실제로 많은 투자자들이 문파 선생을 믿고 사업에 투자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주최부자라면 무려 10대 넘게 부잣집으로 소문 난 명문가에다 더구나 문파 선생 당대에 재산을 오히려 늘였을 만큼 문파 선생이 이재에도 밝았다. 원래 만석꾼이라고 하면 만 석 재산을 이룬 사람을 뜻하지만 실상은 대략 6~7000석만 해도 만석꾼 소리를 들었던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체계였다. 그런데 문파 선생은 아버지로부터 대충 6000석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아 9600석에 이르는 부로 확장시켰기 때문에 실제로 최부자댁이 문자 그대로의 만석꾼이 된 것은 문파 선생 당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문파 선생을 알고 있는 경주를 비롯한 영남 일대의 어지간한 부자들은 오로지 문파 선생만 믿고 백산무역주식회사에 투자했을 법한 것이다. 실제로 문파 선생은 초기에는 사업도 잘 해 은행의 신뢰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개인입보로 식산은행 대출, 자본금 100만원 외 130만엔 독립자금으로 보내... 개인입보로 전재산 압류 당해 그러나 처음부터 수익을 남기기보다 해외 독립지사들에게 자금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 회사는 사업이 궤도에 올라 일본의 감시망이 느슨해지면서 본격적으로 계획된 수순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회사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 1924년 5월부터인데 이때부터 물품 대금을 떼이거나 수출품이 비적들에게 약탈당했다거나 거래에서 손해를 봤다는 등의 이유로 자본금이 잠식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백산무역은 식산은행에서 대출받고 다시 그 대출마저 탕진하게 되었다. 급기야 1925년 문파 선생은 회사경영부실로 피소 당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자본금 100만원은 물론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까지 전부가 독립운동단체에 넘어갔고 경영부실로 인해 문파 선생과 백산은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문파 선생은 이 일로 회사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나지만 안희제 선생은 다시 회사에 복귀하여 해외로 출장을 빙자한 여행을 다녔다. 그러다가 1928년에 백산무역 주식회사는 완전히 부도가 났고 이로써 조선식산은행 등에 저당 잡힌 최부자댁 전재산이 일제히 압류된다. 주식회사의 부도에 개인재산이 압류당한 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식산은행이 백산무역에 대출해줄 당시 기체결의서에 문파 선생이 ‘개인입보’를 섰기 때문이다. 원래 주식회사는 파산할 경우 회사 대표이사를 비롯한 기타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나 대규모 대출을 경계하고 주식회사가 타격을 입었을 때 그 채무를 개인이 대신 물겠다고 약속하는데 그것이 개인입보라는 책임항목이었다. 당시 자금을 대출받은 은행은 두 군데였다. 주거래 은행이 조선식산은행이었고 부거래 은행이 경남합동은행이었다. 조선식산은행은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1925년부터 새로운 대출건이 생길 때마다 문파 선생에게 개인보증을 하라고 압박했다. 어차피 독립자금을 대는 데 목적이 있었던 선생은 기꺼이 개인보증을 수락했고 이로써 식산은행에서 대출된 자금 역시 고스란히 독립운동 단체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절묘한 ‘재산반출’ 방법이었다. 비록 재산의 해외밀반출에는 성공했지만 이로 인해 문파 선생은 ‘드디어’ 전 재산을 압류당함으로써 무일푼으로 전락하여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문파 선생이 개인보증으로 갚아야 할 돈의 총액은 130만엔, 쌀로 무려 3만석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3만석이면 단순히 지금의 쌀값로만 쳐도 100억원 가까운 거금이다. 그러나 당시의 쌀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하고 비쌌던 데다 화폐가치 역시 지금보다 훨씬 높을 때다. 추정하건데 그때 당시 문파 선생이 진 부채는 지금의 수천억 원에 해당될 만큼 큰돈이었을 것이다. 당장 그 큰돈을 변통할 수 없었던 문파 선생이었으니 은행에서 문파 선생, 다시말해 대대로 물려온 최부자댁 소유의 동산과 부동산을 일제히 차압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와 함께 최부자댁의 모든 돈 될 만한 물건에는 일제히 압류딱지가 붙었다. 여기서 최염 선생이 할머니께 들었던 회고담 한 토막을 들어보자. “압류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압류 딱지를 모든 가재도구에 다 붙이는 줄 알지만 실제로 생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 이를테면 숟가락이나 젓가락, 밥그릇 따위에는 압류 딱지를 붙이지 않아요. 그러나 연명에 지장이 없는 장롱이나 가구 같은 것에는 죄다 딱지가 붙어서 이것을 떼면 즉시 형사처벌이 내려집니다. 우리 집 구석구석에 붉은 압류 딱지가 붙여진 것에 대해 나중에 할머니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얼매나 그놈의 압류딱지가 붙어 있었던지 보름 동안 내가 버선까지 못 갈아 신었디라. 장롱 서랍에 압류딱지가 붙어 있으이까네 그거를 열 수가 없었던 기제…’” 이어 최염 선생은 또 다른 이야기를 또 해주셨다. “할아버지의 독립 운동을 말할 때 대부분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백산무역만 운영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실제로 몇 개의 기업을 더 운영하셨는데 이게 모두 중간에 문을 닫거나 망하게 되어 이를 아는 사람들이 할아버지에 대해 ‘하는 일마다 망해 먹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곤 했지요. 그러나 이것은 할아버지가 사업수완이 없어서가 아니고 무슨 일을 계획하시면 반드시 이 일을 어떻게 독립운동과 연계시킬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셨기 때문에 사업적으로 이익을 남기거나 일 자체를 성공시킬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기에 일어난 결과였어요!” 어쩌면 아무런 어려움 없이 호의호식하고 산 사람일수록 압류딱지의 위력은 더 실감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집안을 움켜쥔 압류딱지는 최부자댁 모든 사람들의 숨통을 쥐어 잡은 거대한 마수(魔手)였을 것이다. 그러니 최부자댁 어른들이 버선조차 갈아 신지 못한 것쯤은 실상은 조그마한 한 예에 불과할 뿐 그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곡절들이 있었을 것이 뻔하다. 다시 최염 선생의 회고를 들어보자. 남천을 따라 나락을 날라오던 긴 소달구지 행렬, 그것이 사실은 식산은행이 관리한 곡식들... “내가 어린 시절, 가을 추수기가 되면 우리 집으로 산더미 같은 나락 섬을 실어 오던 긴 소달구지 행렬을 보곤 했어요. 나는 그게 모두 순수하게 우리집 나락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 그때는 이미 우리 집을 식산은행이 전부 관리하고 있던 때였어요. 그때 내가 본 나락들은 전부 식산은행이 관리하던 나락이었던 것이지요. 어린 내가 철이 없어서 그게 모두 우리 것인 줄 알았던 것이지요.” 그렇게 느꼈을 법한 것이 최염 선생은 1933년생이시다. 최부자댁 전 재산이 일본 은행에 압류 당하고 5년이나 지나서 태어났고 어릴 때라고 해야 겨우 193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기 쉬워서 부자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을 하지만 이때는 이미 3년 아닌 10여년이 지난 때다. 더구나 늘여 쓰기는 쉬워도 줄여 쓰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일반의 상식이다. 일반의 상식도 그런데 영남일대를 울리던 최고의 부자댁에 압류딱지가 붙었다면 그 실상은 일반인의 참담함보다 훨씬 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최부자댁 전재산이 압류되었다고는 해도 그로 인해 일제로부터 강압적인 모멸감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최염 선생의 회고였다.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일제는 경주최부자를 매우 중요한 민심의 중심으로 알고 재산 압류를 핑계로 끊임없는 친일회유를 시도했다. 더구나 최부자댁 농토에서 나오는 쌀과 곡식으로 꾸준히 은행빚을 차감해가고 있었으니 대놓고 억압할 필요도 없었다. 일제는 적절히 최부자댁의 숨통을 열어주면서 부자로서의 체면치레를 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최부자댁 명성과 문파 선생의 영향력을 계속 보증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재산을 마음껏 활용하던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파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댄 것으로 내적 충만감은 느꼈을지 모르나 부잣집 가주로서 이전에 느껴보지 않았을 압박감에 시달렸을 것이 뻔하고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친지 모두를 경제적 어려움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때 얻은 집안에서의 불신은 그 뒤로도 오랜 기간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에 대한 문파 선생의 큰 뜻을 당시 집안의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더더구나 그 대단한 부자댁이 전재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통째로 몽땅 독립운동에 희사하리라고는 일반의 상식으로는 가늠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결정 아닌가! 아무리 큰일을 하기로서 자신과 가족, 집안의 안위를 전혀 돌아보지 않고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문파 선생은 어쩌면 그 시대의 기인이라 할 것이다. 한편, 문파 선생이 국내에서 백산무역회사의 실질적인 운영을 했다면 안희제 선생은 국경을 넘나드는 험로를 다니며 스스로 독립자금을 해외로 전달하는 운반책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당시의 해외여행, 더군다나 만주와 중국을 횡행한다는 것은 사실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감시가 삼엄하던 시절이었고 국경을 넘어도 만주 지역은 수시로 비적과 마적들이 출몰하거나 여행자를 노린 도둑과 강도 같은 악한들이 출몰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교통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시대였다. 그런 위험하고 살벌한 시대에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한다는 것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비장한 일이었다. 안희제 선생은 일본경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본 여자들과 어울리며 장사했다. 일본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방탕한 모습도 보여주고 사업가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씀씀이도 큰 것처럼 위장하거나 어떤 때는 피눈물도 없는 장사치로 보여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얼핏 손병희 선생이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해 했던 모습과도 닮았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로서의 안희제 선생은 그 역할을 완벽히 진행한 인격체이자 고결한 양심의 소유자였다. 이를 증명하는 가슴 뜨거운 일화가 이 뒤에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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