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파 선생은 그 시대 부자로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희사한 분이다. 그렇다면 그 결연한 의지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마지막 경주최부자 문파 선생에 대한 정말 궁금한 주제였다. 문파 선생은 전통적인 유생의 길을 걸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글공부는 집안 어른 중 문과에 급제해 벼슬 살다 갑오년에 낙향한 수헌 최현필(修軒 崔鉉弼1860~1937) 문하에서 했다. 최현필 선생은 정무공의 넷째 아들 최동필 공의 후손으로 문파 선생에게는 숙부 벌이었다. 최현필 선생은 조정에 출사할 당시 면암 최익현 선생과 교분이 두터워 뒤에 면암이 최부자댁을 찾는 가교가 되었다. 면암의 영향을 받은 최현필 선생은 당연히 위정척사 정신에 투철했고 문파 선생 역시 그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겠지만 뒤에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면서 사고(思顧)의 폭이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스무 살에 집안 전권 물려받은 문파 선생, 장인과 처삼촌이 독립운동 정신 철저히 가르쳐! 문파 선생의 어린 시절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최염 선생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회고를 못 하셨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최염 선생이 했던 것처럼 집안의 오랜 가르침을 충실히 배웠고 특히 집안의 대를 잇는 주손으로서 많은 기대를 받고 큰 책임감을 느꼈을 법하다. 문파 선생은 천성이 굳고 통이 큰 분이라 스무 살에 집안의 전권을 받았어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그런 성품을 알아본 부친 최현식 공이 어린 시절부터 집안 경영을 시키기 위해 남다른 교육을 시켰을 법하다. 다시 최염 선생의 회고를 들어보자. “어릴 때 할아버지를 따라 경작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소작인들을 만났어요. 그게 할아버지께서 당신이 배우신 대로 나에게 가르쳐 주신 거죠.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흉년 든 경작지를 알아 소작료를 경감시켜 주는 것이었어요. 이것은 우리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공통사항으로 우리 조상님들은 어릴 때부터 인심 베푸는 것부터 먼저 배우신 겁니다” 문파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 집안의 가법과 함께 많은 인물들의 영향을 받으며 혼란한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에서 스스로 삶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렇다면 문파 선생이 만난 인물들은 누구일까? 동학의 시조인 최제우 선생은 최부자댁의 파시조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넷째 아들의 후예로 최부자댁 방계 어른이었다. 문파 선생이 직접 최제우 선생을 만난 적은 없었지만 동학에 대해 남다른 안목을 키우는 데는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였을까? 문파선생은 유소년 시절부터 관원의 눈을 피해 식객으로 최부자댁에 드나들었던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1827∼1898) 선생을 만나 감화를 입었다. 최시형 선생은 100명이 넘는 식객들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숨기고 드러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최현식 공은 최시형 선생을 깊이 알고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게 선생을 대함으로써 자칫 발생할지 모를 밀고(密告)에 대비했다. 당대에 그분을 알고 숨겨준 사실이 드러난다면 집안에 엄청난 화가 닥칠 일이었기 때문에 내놓고 환대할 입장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최시형 선생은 홍길동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람을 대할 때 신분을 따져서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뒤에 문파 선생이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과 나이를 떠나 막역하게 지내게 되었던 것도 최시형 선생의 영향이 컸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문파 선생에게 구체적으로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알려준 분은 문파 선생의 장인과 처삼촌이라는 사실이다.   문파 선생은 15세 때 안동군 풍산면 오미동의 김정섭(金鼎燮1862~1934) 선생의 따님인 풍산 김씨와 혼례를 올렸다. 김정섭 선생 집안은 가족이 모두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중 처삼촌인 김응섭(金應燮1877~?) 선생은 문파선생이 조선국권회복단에 가입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선생은 판사와 검사를 지내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비밀결사인 조선국권회복단, 의용단, 의열단 등에 가입,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무렵 유림의 대표 137인이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냈는데 이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으로도 활약한 선생은 좌익사상가로 고려공산당 결성에 기여하며 좌익계열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분이다. 다만 좌익인사라는 사실로 인해 선생의 독립운동행적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것은 아쉽다. 선생이 활약할 당시는 지금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립이나 편견이 약할 때이고 좌익사상가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을 때였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독립운동 행적마저 저평가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면암, 신돌석 장군, 수운과 해월, 이강 공 등이 문파 선생에게 독립운동의 정신적 배경 본격적으로 문파 선생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준 분은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년~ 1907) 선생으로 짐작된다. 위정척사(爲政斥邪)운동의 화신이었던 면암은 포천에서 태어나 청양에서 살던 분으로 항일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전위에 선 분이다.   을사늑약 이전부터 국운이 쓰러지는 것을 알고 항일거병을 준비하기 위해 전국의 지사(志士)들과 부자들을 만나고 다닌 면암은 300여추종자들과 함께 경주최부자댁을 방문한다. 그분을 따라온 사람들이 300여명이나 되었던 이유는 면암이 발길이 닿는 고을마다 면암을 흠모하던 사람들이 늘었다 줄었다 반복하다 경주에 이르러 300여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면암과 추종자들은 그로부터 달포 동안 최부자댁을 비롯한 교촌일대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때 최부자댁에서 이들을 대접하고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최부자댁을 떠날 때는 적지 않은 군자금을 지원했을 테지만 그 구체적인 내역은 밝혀져 있지 않다. 면암이 최부자댁을 방문했던 기록은 면암의 후손들에게도 전한다. 면암의 현손 중 한분이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최창규 씨인데 그분이 최염 선생에게 면암이 최부자댁을 방문한 일화를 이렇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최부자댁 가주와 대화를 나누는데 그 집 아들이 하루 종일 시립하고 서서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잠시도 소홀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면암이 최부자댁에 머무는 사이 최현식 공과 무수한 이야기들이 오갔을 것이니 문파 선생의 가슴에 면암의 독립사상이 속속들이 심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을사늑약 후 면암은 74세의 나이로 순천에서 400여의병과 함께 항일투쟁을 시작했지만 안타깝게 체포되었다. 대마도로 끌려간 면암은 감옥에서 ‘일본이 주는 것은 먹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굶은 끝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종황제에게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하여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하고 단식을 중지하였으나 그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설도 있다. 3년 가깝게 식객으로 있던 신돌석(申乭錫 1878~1908) 장군 역시 문파 선생의 독립정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최부자댁에 머물 당시 신돌석 장군에 대한 일화는 꽤 여러 가지가 남아 있다. 문파 선생이 한창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할 시기이기도 했으므로 신돌석 장군과는 꽤 생생한 체험담을 기억했고 이를 최염 선생께 회고했다. 그러나 신돌석 장군이 최부자댁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채 몇도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돌석 장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쫓기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를 최부자댁에서 감추어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최부자댁 역시 큰 화를 입을 것이기에 그가 머물렀다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리에 붙여졌다. 다만 문파 선생과 동생인 최윤 선생과의 일화가 몇 개 남이 있다.   뒤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최고의 저술가인 조동걸 박사가 쓴 신돌석 장군의 전기에 3년 정도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시기가 있다는 대목이 있다. 조동걸 박사와 최염 선생은 바로 이 시기가 신돌석 장군이 최부자댁에 와 머무른 시기로 단정했다.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공도 문파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종황제와 귀인(貴人)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난 이강 공은 황족 중 유일하게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와 합류하려 시도할 만큼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인물로 알려진 분이다. 실제로 그는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과 협의,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만주의 안동현, 지금의 단동까지 도달하였으나 일경의 대대적인 체포작전에 의해 발각되는 비운을 겪는다. 국내로 송환된 그는 이후 일제에 의해 여행의 규제와 끊임없는 감시를 당하는 와중에도 항일의식을 버리지 않고 거듭되는 일본의 도일(渡日) 강압을 뿌리치며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이강 공이 최부자댁에 머문 것은 1908년 10월 초에서 12월까지로 알려져 있다. 이때 이강 공이 문파 선생의 호인 ‘문파’를 직접 지어주기도 했다. 이 호 문파(汶坡)의 문은 최부자댁 앞을 흐르는 남천의 또 다른 이름인 모기내(蚊川)의 문(蚊)을 내 이름 문(汶)으로 고쳐서 지은 것이다. 파(坡)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시내가 흐르는 언덕이란 뜻의 문파란 호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강 공이 생각한 내는 과연 어떤 내였으며 언덕은 과연 어떤 언덕이었을까? 수운과 해월, 면암과 신돌석 장군에 대한 일화는 따로 소개하겠지만 적어도 문파 선생은 이러한 많은 지사들과의 교유를 통해 점차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깨달아가기 시작했고 서서히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한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문파 선생의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배경이 되었다면 실제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분들은 따로 있다.   그들은 또 누구일까? 다음 장부터 그들과의 숨 막히는 교류를 알아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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