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참봉어른 그기 정말입니꺼?” 큰 사랑채 방문이 활짝 열린 가운데 문파 선생과 동네 소작인 한 명이 마주 앉아 실랑이하고 있었다. 소작인은 누대에 걸쳐 최부자댁 전답을 붙여 온 사람으로 최염 선생 말씀으로는 ‘우리 집안을 먹여 살려온 일등공신’이라는 사람이었다. “아이고 참봉어른요. 나라가 머라 카든지 간에 땅 주인이 분명히 참봉어른이신데 그거를 누가 즈거 마음대로 뺏아가 엉뚱한 사람 준단 말인교? 마, 쪼매마 더 기다려 보시소” 그러나 선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라. 이미 그기 대세라. 대토지 소유자들은 땅을 잃게 대 있고 실제로 농사짓는 사람들이 그 땅의 임자가 대는 세상이 댄 거라. 그라이, 김서방이 짓는 땅은 김서방이 갖고 가는기 백번 옳지러. 만약 김서방이 자꾸 사양하믄 이 땅을 전혀 엉뚱한 사람인테 조야 댈지도 몰라. 그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런 밀담(密談) 아닌 밀담이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문파 선생에게 불려 온 사람들은 대체로 김서방과 비슷하게 사양하다가 마침내 선생의 뜻을 받아들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누군가는 선생께 큰절을 올리며 감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최부자댁 소유의 많은 땅이 동네 소작인들의 명의로 하나둘씩 넘어가기 시작했다. 부자들의 땅을 빼앗아 경작인에게 주는 농지개혁법, 문파 선생은 5년을 기다리지 않고 소작인에게 땅을 넘겼다. 1949년 6월 21일 제정된 ‘농지개혁법’은 직접 농사를 짓는 소작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지주들, 특히 최부자댁처럼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예상되었다. 당시 정부가 내건 농지정책의 골자는 기본적으로 농지(農地) 소유권을 지주들에게서 거두어들여 소작인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소작인들이 농지를 5년만 경작하면 5년 뒤에는 그 땅이 자신에게 떨어지는 제도였다. 세부적으로는 5년의 기한을 정해 이 기한 내에 소작인들은 과거 토지소유자에게 내던 소작료를 정부에 내고 정부는 소작인을 대신하여 토지소유자에게 소작료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가증권으로 내주는 형식을 취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나면 해당 토지를 소작하는 소작농에게 토지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이 법은 당시 지주들의 거센 반대로 일부 수정되어 1950년 3월 개정되었고 실제로 6.25 직전부터 시행되었다. 지주 입장에서는 5년이 지나면 자기 땅에 대한 소유권이 사라지니 엄청난 불이익이었지만 그나마 5년간은 지가증권이라도 받으니 그것으로 위안이나 삼을 일이었다. 그러나 지가증권의 한계가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치솟는 물가 때문이었다. 지가증권은 받는 즉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물가가 매년 100% 넘게 치솟고 보니 불과 몇 년 만에 지가증권의 가치가 5분의 1이나 10분의 1로 줄어드는 셈이었다. 영덕의 어떤 부자가 5년 지난 지가증권을 대구 식산은행에 바꾸러 갔다가 받은 돈이 하도 적어서 하룻밤 술값으로 다 써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갔다더라는 일화가 생길 정도였다. 대지주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던 구제제도가 있었으니 지가증권으로 적산기업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적산기업이란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로 쫓겨가면서 버리고 간 기업들이다. 문파 선생 역시 나중에 대구대학 소유의 농지로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고 최부자댁 소유의 농지로는 인쇄공장을 인수했는데 이게 모두 적산기업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농지정책이 나온 것은 공산화된 북한 김일성 정권의 토지 재분배 정책에 대해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 상대적인 부담을 가진 때문에 생긴 정책이었다. 북한은 형식적으로 지주들의 땅을 몰수하여 소작인들에게 돌려주고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공산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눈 가리고 아웅’한 이 선전은 남한의 소작인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큼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북한의 농지정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토지 소유권이 정부, 즉 공산당에 귀속되고 농민들은 공동농장에 재편되어 배급으로 연명하는 이상한 제도가 되었지만 그런 강제적 폭거를 예측할 수 없었던 남한의 토지정책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승만 정권은 남한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토지 재분배 정책을 펴려 했지만 지주들의 반대와 특히 지주 출신 정치인들이 이런 개혁적인 토지정책에 순순히 참여할 까닭이 없었다. 심지어 한국민주당의 김성수 총재도 대지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대지주를 조금이라도 구제하는 제도를 만들려고 했다. 때문에 국회에서 거듭 토지정책이 부결되고 몇 차례나 개정안이 제출되어 겨우 농지에 대한 지가증권 발행과 5년 후 실제 소작인에게 토지 소유권을 돌려주는 정책이 시행된 것이다. 그러나 정책의 수립과정에서 일부 눈치 빠른 지주들은 부랴부랴 농지를 팔아치웠고 농지의 용도를 바꾸어 어떻게든 정부의 정책을 벗어나 토지를 소유하려 시도했다. 대표적인 꼼수가 농지를 염전으로 바꾸려 한 것으로 이를 안 농민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반대로 소작인들은 힘을 모아 농지를 팔아치우려는 지주를 감시하고 토지를 팔려는 지주들을 대상으로 방해 공작을 하거나 내놓고 항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몰래 농지를 팔려는 지주에게 폭력을 가해 지주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경찰이 이를 주도하던 소작인들을 대거 연행하는 과정에서 소작인들이 죽거나 다치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사태는 태백산맥 등의 소설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정책이 결정되기 직전까지 어떻게든 자기 땅을 지키려던 지주들과 평생토록 땅 한 뙈기 가져보지 못한 소작인들이 전쟁처럼 팽팽히 긴장한 채 맞서고 있었다. 더군다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대지주들 중 상당수가 일제에 빌붙어 재산을 늘린 악질적 친일파들이어서 이들에 대한 반감도 컸다. 정책이 결정되고 나서도 지주들은 지주들 나름대로 조만간 정책이 바뀌기를 기대했고, 소작인들은 소작인들대로 이 정책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바로 이 같은 시기에 문파 선생은 용단을 내렸다. 그 용단이란 5년을 기다릴 것도 없이 아예 처음부터 토지를 ‘매매형식’으로 소작인들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매매형식’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서류만 그렇게 꾸미고 아무런 대가 없이 농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눠 줘버린 것이다. 최염 선생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할아버지는 지가증권의 허구성을 대체로 짐작하기도 하셨지만 고작 5년의 소작료를 받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깨끗하게 토지를 내줌으로써 지금까지 집안에 공헌한 소작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속 시원히 인심이라도 쌓자는 판단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농지를 전부 그렇게 하다가는 당장 집안이 거덜 날 것이기에 소작농 중 앞의 김서방을 비롯한 가장 공이 큰 이들에게 먼저 토지를 넘겨주었다. 그들 대부분은 교촌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그 대부분이 또 최부자댁에 딸린 노비들과 그들의 후손들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들 노비들의 일도 기억할 만하다. 경술국치를 겪은 문파 선생은 국치 소식을 들은 며칠 후 노비들을 전부 불러 모아 보는 앞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지금부터 너거는 다 자유의 몸이까네 어디든지 가서 너거 마음대로 살아라. 혹시라도 이 근처에서 살라카믄 내가 땅을 내주꾸마” 선생의 말씀에 대부분의 노비들이 최부자댁에 붙어 살기를 희망해 제각각 소작할 땅을 나누어 받았다. 그때 고쳐진 신분으로 살고 싶어서 교촌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10%도 되지 않았고 해방이 될 때까지 교촌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대를 이어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농지개혁 정책이 발표되고 나서 가장 먼저 무상으로 땅을 받은 것이다. 그 외에 4~5대씩 대를 이어 묘답(위토답)을 지어온 소작인들도 오랜 기간 조상의 묘와 주변의 땅을 돌봐준 고마운 공에 대한 보답으로 농지를 받았다. 곽암, 닥나무밭도 농지개혁법 대상. 물려받은 소작인들이 지금도 은혜 갚아! 문파 선생의 생각은 간단명료했다. 격변기 정부의 정책은 언제 뒤집힐지 모르나 북한의 선전이나 이승만 정권의 행태로 보았을 때 농지를 빼앗길 것은 뻔한 일로 믿은 것이다. 당시 땅 받은 사람들 중에서는 혹시라도 문파 선생의 마음이 바뀌어 도로 땅을 내놓으라고 할지 몰라 토지를 받은 즉시 그 토지를 팔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 자리에 눌러살면서 생업을 이어 나갔고 뒤에 소작료는 아니어도 때마다 최부자댁에 자신들의 논밭에서 생산되는 곡식이나 특산품을 가져다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최부자댁의 경우 농지는 단순히 땅에만 그치지 않았다. 동해안의 곽암, 즉 ‘미역바위’ 역시 농지개혁 대상이었다. 이 곽암도 정부시책 대로 5년 후에 소작하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 미역바위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지금까지도 미역이 나는 철이 되면 최고로 좋은 미역을 최염 선생께 보내온다고 한다. 최부자댁 특산품인 종이의 원료공급지인 괘정리 닥나무밭도 모두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그곳 소작인들 역시 때만 되면 양질의 종이를 가져다주어서 도배지건 창호지건 편지지로건 떨어지지 않고 넉넉히 쓸 수 있었다. 뒤에 현대식 종이가 활성화되면서 한지의 쓰임이 격감하면서 제지 공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도 꾸준히 종이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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