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파 선생이 대구대를 설립한 것은 세상이 잘 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왜 문파 선생이 대학을 세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흔히 말하듯 민족교육이니 사회사업적인 면에서 해석하긴 하지만 실제로 누구의 어떤 영향을 받아서 학교를 세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파 선생이 대학 교육에 뜻을 두실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의암 손병희 선생과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선생일 것이다. 두 사람은 문파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들이기도 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남달리 여겨 학교설립에 적극적이었던 분들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인촌의 경우는 비록 일제강점기 막바지 친일의 불명예를 안았지만 그가 인수하여 육성한 고려대가 명문이자 국제적인 대학으로 성장함으로써 학교 인수의 뜻 만큼은 크게 빛나고 있다. 인촌이 경주최부자댁을 자주 방문한 것에 대해서 최염 선생님의 회고를 들어보자. 인촌 김성수에게 보성학원 인수를 적극 권한 문파 선생, 이전부터 각종 사업에 물심 양면 지원해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외가인 성주에서 경주로 돌아와 보니 해방 전까지만 해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조용하던 할아버지의 사랑채에 수시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이때 가장 자주 얼굴을 익히게 된 분이 인촌 김성수 선생이셨어요” 인촌은 최염 선생이 소학교 시절부터 자주 뵌 데다 이분에 대해서 할아버지로부터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마치 자신의 일처럼 생생하다는 말씀이었다. 특히 인촌은 호남 사투리를 심하게 썼는데 처음 듣는 낯선 사투리 때문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손병희 선생 소개에서 말했듯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 사람은 대한제국 이용익(李容翊 1854~1907) 대감이다. 이용익 대감은 뒤에 친일파가 득세하자 러시아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개화사상을 가진 선각자란 말을 듣는 한편으로는 고종황제 개인을 위해 금괴를 밀조했다고 하여 지탄을 받기도 한 인물이다. 하여간 이용익 대감은 을사늑약이 자행되기 전인 1905년, 보성전문을 열었다. 그러나 을사늑약 후 이용익의 망명과 함께 학교 운영주체가 사라지자 학교운영이 상당히 어렵게 된다. 이것을 1910년 12월,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선생이 인수하여 민족교육의 기반으로 활성화시킨다. 그러나 손병희 선생 역시 1919년 3·1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자신이 일제에 의해 탄압받을 것을 예상해 학교 인수를 문파 선생에게 제안한다. 만약에 문파 선생에게 다른 계획이 없었다면 할아버지가 그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 문파 선생 역시 독립운동자금을 보내기 위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만드는데 거의 모든 재산을 다 쏟아 넣고 있었기에 그 뜻을 이을 수 없었다. 결국 문파 선생은 손병희 선생과 숙의 끝에 학교를 인촌에게 맡기기로 작정하게 되고 그 뜻을 전하게 된다. 당시의 인촌은 아버지가 호남 제일의 거부로 알려져 있었고 그 자신 일본에서 신학문을 배운 20대 후반의 사업가로 일본 유학시절부터 수백 명의 유학생들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했다. 귀국 후에는 민족기업을 일으키겠다는 의욕으로 망해가던 경성직뉴회사를 인수하여 회생시키는가 하면 경영난에 빠진 중앙고보를 인수하여 송진우 선생에게 운영을 맡기고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유망한 애국청년이었다. 문파 선생이 인촌을 추천한 것은 1918년, 인촌이 경주로 문파선생을 찾아와 경성방직과 동아일보를 세울 뜻을 내비치며 후원해줄 것을 부탁하는 등 이전부터 각별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촌이 이 제안을 수락하기도 전에 3·1운동이 터졌고 손병희 선생은 자신의 예상대로 일경에 체포되어 만만치 않은 옥고(獄苦)를 치른 끝에 그로부터 3년 후 세상을 등지고 만다. 인촌 역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나 인촌이 살아야 교육이 산다고 생각한 송진우가 스스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모진 고문 끝에도 인촌의 결백을 주장해 무사히 풀려나게 된다. 이후 인촌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는가 하면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에게도 거액의 독립자금을 대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그런 와중에 마침내 보성학원이 자금난에 빠져 더이상 운영이 어려워지자 문파 선생이 인촌을 설득하여 1932년 3월, 마침내 보성학원을 인수하도록 주선했다. “인촌인들 한쪽에서는 사업을 하랴, 또 한쪽에서는 독립운동하느랴 조심스럽고 힘겨운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겠지만 보성학원을 인수하라는 할아버지의 제안에 선뜻 동의하고 나섰답디다. 그러나 자금이 여의치 않아 학교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연을 남기게 되었답니다” 인촌의 집안은 전라북도 고창에서 10만 석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최부자댁보다 훨씬 큰 부호였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학교를 인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인촌의 집안이 이렇게 부자가 되기까지는 특별한 사연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 이야기까지는 접어 두겠다. 다만 인촌은 아버지 김경중의 장자로 태어났음에도 약 2000석을 하는 큰 아버지김기중에게 양자로 감으로써 공식적인 재산 상속권을 잃게 된다. 그 와중에 손병희 선생과 문파 선생으로부터 학교 인수의 권유를 받고 결연히 고향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학교를 인수할 재산을 나눠 달라고 간청한다. “아버님, 나라를 구할 인재를 키우려면 학교를 인수해야 하니 저에게 재산을 나눠 주십시오” 아들의 설명을 들은 아버지는 그러나 굳이 학교를 인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재산 나누어 주는 것을 거절하고 만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인촌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간청한다. “원래 이 재산은 큰아이에게 갈 것이었습니다. 양자로 가느라 2000석지기가 된 것도 서러운데… 그 부탁마저 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인촌의 아버지가 짐짓 한 발 뒤로 물러나며 팔밀이를 했다. “재산은 장차 네 동생의 것이 될 것인데 어찌 나랑 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단 말이냐?” 아버지에게 재산 나눠달라 한 인촌, 거절당하자 단식투쟁으로 뜻 이루며 보성전문 인수!! 아버지는 동생 김연수를 불러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결정을 맡기게 된다. 그러나 큰 부자의 상속자가 된 동생 김연수는 지나친 비용에 놀라 신중하게 형의 제안을 거절하라고 권한다. 이렇게 되자 인촌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 단식투쟁에 들어가 버렸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 싶어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인촌이 사흘 넘게 단식투쟁을 하자 생각을 고쳐먹었다. 우선 인촌의 뜻이 남다른 것을 가상하게 여겼고 형이 저렇게 단심(丹心)을 품었는데 동생이 제 욕심만 차려서 형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모른 척하는 것에 화가 났던 것이다. 이에 두 형제를 한 자리에 앉힌 아버지는 결연히 인촌의 손을 들어주고 만다. 그러면서 김연수를 꾸짖었다. “원래 이 재산은 순리로 하면 네 형이 물려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네가 우리 집안의 대를 잇는답시고 네게 결정하게 했는데 나는 네 얼굴을 봐서 거절을 했다 쳐도 네가 형에게 이토록 박정하게 굴 줄 몰랐다. 오늘부로 우리 집 목록의 재산은 네 형에게 일임할 것이니 너는 무조건 형 말을 따르도록 해라” 이 이야기는 인촌이 문파 선생께 직접 들려준 이야기이기도 하고 최염 선생이 할아버지로부터 자주 들었던 숨겨진 이야기다. 항간에는 인촌이 단식투쟁을 한 것은 1915년 4월, 중앙고보를 인수할 때의 일화로 소개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중앙고보 정도의 작은 학교를 인수하는 일로 단식투쟁을 했을 리는 없고, 특히 인촌이 보성전문을 인수한 후 문파 선생이 창립이사로 참여하였으니 이 일화가 맞을 것이다. “만약 백산무역회사 설립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고려대학교 교정에는 인촌의 동상 대신 할아버지의 동상이 서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할아버지는 당신보다 일곱 살 젊은 인촌에 대해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나라를 위한 그의 뜻이 범상치 않았음을 자주 추억하곤 하셨어요” 문파 선생 역시 이때부터 나라의 장래를 위해 무엇보다 절실한 것이 미래를 열어나갈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겼던 것이다. 문파 선생의 인촌과의 인연은 비단 보성전문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그 이전, 인촌이 1919년 민족기업을 일으키겠다는 의도로 시작한 경성방직 설립 때와 1921년 동아일보를 창립했을 때도 문파 선생은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인촌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때만 해도 인촌은 나라를 사랑하는 우국지사로서 굳건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또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그보다 먼 앞날을 위해 인재를 키우는 데 힘을 쏟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촌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여러 가지 친일적인 행위에 참여하면서 처음의 뜻이 꺾여버렸고 결국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조차 친일인사로 기록되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문파 선생 역시 뒤에 백산무역에 털어 넣었던 재산을 일본식산은행 두취(총수) 아리가로부터 채권 집행을 연장받은 바 있고 이 시기에 문파 선생을 대신하여 동생인 최윤 씨가 중추원 참의를 지내게 된 일이 빌미가 되어 일부의 사람들에게 친일했다는 불명예에 몰린 적도 있었다. 문파 선생의 경우는 김구 선생이 귀국하고 독립자금을 댄 문파 선생의 진의가 드러나면서 가장 먼저 그 불명예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인촌의 경우는 여러 가지 행적으로 인해 결국 친일인사의 오명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문파 선생은 인촌이 친일파로 몰린 것에 대해 그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상당한 아쉬움을 표하곤 하셨다는 것이 최염 선생의 회고였다. 서로의 친분도 친분이려니와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전력이나 대학을 위해 기울인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에 해방을 코앞에 두고 끝내 절개를 지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쉽게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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